기독교 패러독스

1강. 시편73편16절-17절,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변명섭 2024. 9. 28. 12:35

기독교의 패러독스(paradox)시리즈 (역설의 진리)
1강.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시73:16~17) 2011. 12. 16.
내가 어쩌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그것이 내게 심한 고통이 되었더니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우리 눈으로 보이는 패러독스(paradox)처럼 보이는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들이 밝히 이것을 패러독스(paradox)로 깨닫는 시간, 시간 되도록 은혜 베풀어주시옵소서. 성령님께서 이 저녁에 계속해서 기름 부으시고 또 이 자리에 앉아있는 사랑하는 자녀들 한분 한분을 안수해주시고 강하신 오른팔로 껴안아 주시고 영안이 떠이게 하시고 영력이 넓어지게 하시고 깊어지게 하시고 높아지게 하시고 길어지게 만들어주시옵소서. 이악한 세대에 하나님을 소중히 여기며 소중히 사용하는 귀한 딸들 아들들 되게 하시옵소서. 이것에 천군천사들로 진 치게 하시고 악한 영들이 방해하는 일들이 조금도 없도록 온전히 이 예배처소를 운행하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제가 오늘부터 조금 더 자세히 아삽을 통해서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시작해서 기독교의 패러독스(paradox)가 한국말로 번역하면 뭔지 아십니까?
모순입니다 역설이라고 합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모순같이 보이는데 그 모순이 알고 보면 진리라는 겁니다. 그것을 패러독스(paradox)라 그럽니다.
오늘 아샵이라는 사람을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기독교의 패러독스(paradox)를 한번 같이 나누었으면 합니다. 아삽이라는 사람은 하나님이 특별히 사랑했던 분이시고 아삽은 다윗왕의 성가대장이다 이렇게 우리가 알고 있잖습니까? 다윗왕의 성가대장이라는 말은 그 옛날 구약 때는 다윗이 지성소와 성소에 들어갈 때마다 같이 들어갔던 아주 성령 충만하고 말씀도 충만하고 하나님의 비밀을 많이 아는 사람 중에 한 사람임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아샵하면 여기 앉아 있는 우리 모두가 아삽의 경우라고 볼 수 있는데 아샵이 어떤 딜레마에 있었냐면 이분은 종교지도자니까 권력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종교적인 영향력도 있었고 또 사람들에게 존경도 받아왔고 이런 부분이 있었는데 이분이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면서 가지고 있었지 않았던 몇 가지가 이 사람을 괴롭혔습니다. 그중에 뭐냐면 돈이 없었습니다.
봉급을 조금 받아서 그랬는지 아니면 어디에 투자를 했는데 투자가 잘 안되든지 어째든 이 사람이 돈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몸이 건강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항상 마음에 갈등이 있었던 것을 우리가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주변에도 이런 아삽 같은 분들이 많습니다. 
여기에 아샵이 누굽니까? 한번 손들어보세요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이런 부분에서 만사가 다 형통하면 좋은데 형통치 않는 부분이 많습니다.
특히 정말 예수님을 잘 믿는 사람들은 세상일에 밝지 못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컨대 주식투자를 해도 돈을 잃고 그런데 어떤 사람은 주식투자를 하면 돈을 잘 따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도 잘 믿는데 그래서 그럽니다.
아하! 내가 기도를 했더니 하나님이 보여 주어서 했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주식투자를 해서 돈을 많이 번 사람이 그 돈을 가지고 어떻게 하느냐면 어께에 힘주고 폼을 잡고 그러면 이 사람에게서 돈 냄새가 뭉클뭉클 납니다. 성령님의 냄새보다도 우리나라에 그런 분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장사하면 탁탁 잘되어서 이게 하나님께 기도해서 그렇다면서 잘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기독교에서 한 부분이지 이게 다가 아닙니다. 이렇게 그 맛을 들여놓으면 예배를 그런 식으로만 생각합니다.
내가 어디에 투자하니까 잘 되었다 정말 하나님께 감사하다 이렇게만 생각하다보면 이게 안 될 때 문제가 생기는 겁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이 세상 사람들같이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잘되는 것이 차도 좋은 차타고 장수하고 돈도 잘 벌고 자녀들도 다 잘되고 이러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대개 보면 열심히 신앙 생활하는 사람일수록 이런 걸 안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게 딜레마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열심히 안 하는데도 이런 걸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게 복잡합니다.
어떤 사람은 성서주일도 잘 안하고 기도도 별로 안하는데 멀 하면 잘 풀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크리스천들 중에서 그래서 하나님께 복 받았다 그러면서 잘 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게 딜레마 아닙니까? 이번에 이런 딜레마 부분을 하나하나 집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생활이 어렵고 자녀들이 안 되고 기타 등등 문제들이 많으니까 교회에 나오지만 본인들이 그것 때문에 고민합니다. 그러니까 마음에 질투가 있습니다.
저 사람은 별것 아닌데 잘 되니까 아삽도 여기에 대한 질투가 있었습니다. 
이 아샵이 가지고 있었던 문제점들이 뭡니까? 악인이 형통함을 보고 질투했다는 겁니다. 악인이 어떻게 해서 형통한 겁니까? 4절에 악인이 죽을 때도 고통이 없고 그러니까 암에 걸려 죽지 않는 모양입니다 큰 고통 없이 죽는 경우도 복 중에 복입니다 우리인간의 눈으로 보면 복입니다 
건강하고 다시 말하면 장수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다음에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이 그들에게는 없고 사람들이 당하는 재앙도 없고 그래서 그들의 마음이 교만이 그들의 목걸이요 강포가 그들의 옷이며 실제로 살이 쪘다는 것은 아마도 잘 먹었다는 소리입니다 그다음에 그들의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많으며 그러니까 천만 원 투자했으면 2천만 원 나왔으면 좋을 텐데 천만 원 투자 했는데 1억이 된 겁니다.자기가 소원한 것보다도 돈이 더 들어오는 겁니다. 악인들이 이렇다는 겁니다. 12절을 보면 이들은 악인들이라도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항상 불어나서 주체를 못하는 겁니다. 이걸 아삽 같은 사람이 볼 때 왜 나는 아파트20평짜리를 샀는데 몇 년이 지났는데 오르지 않는 경우가 있고 모든 게 잘 되지가 않는 겁니다. 물질적인 문제만이 아니고 몸도 약하고 모든 게 잘 풀리지가 않고 주변 사람들은 내 돈을 빼앗아가려고만 하고 뭔가 잘 안 풀립니다. 이런 상황 속에 있는 겁니다. 악인들은 자랑거리가 많으니까 11절에 그분들의 사고가 어땠습니까? 말하기를 하나님이 어찌 알랴 지존 자에게 지식이 있으랴 하는 도다 내가 하나님보다 더 똑똑하다는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존재를 그렇게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우리주변에도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 중에서 가끔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렇게 하면서15절을 보면 내가 만일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그들처럼 말하리라 하였더라면 나는 주의 아들들의 세대에 대하여 악행을 행하였으리이다. 이분이 어떤 외부적인 표현을 했습니다. 
이분이 평소에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런 딜레마를 가지고 있었는데 15절을 보면 밖에 다닐 때 사람들에게 불고 다녔습니까? 아니면 혼자서 마음속으로만 생각하고 있었습니까? 혼자서 생각하고만 있었습니다. 
여기서 엄청난 차이가 납니다. 이런 불만이 아삽에게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삽이 여기저기에 다니면서 나 억울하다 하나님이 이렇게 하는데 안 된다면서 이런 식으로 나가서 불고 다니지 않았습니다. 혼자서 이렇게 고민만하고 있었다. 그랬습니다. 혼자서 고민만하고 있을 때 이분이 고민을 어떻게 해결 했습니까? 17절에 보면 성소에 들어갔다 그랬습니다. 
이게 아주 핵심입니다 이것을 인간적인 눈으로 우리의 이성으로 또는 사랑의 방법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않고 영의 눈으로 해결하려고 했던 겁니다. 그래서 성소에 들어가서 하나님과 대화를 했다는 겁니다.
이 문제를 우리도 심각하게 받아드려야 합니다. 우리도 이런 부분에서 하나님과 이야기를 할 때 우리에게 가르쳐준다는 겁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드리는 것도 하나님과 대화하는 동기를 유발시키기 위한 방법 중에 하나입니다 
지금 제가 이렇게 말씀드리는 것은 이런 일들이 아삽에게만 있지 않았잖아요.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사랑하셨던 선지자들은 그의 다 이런 경험을 했습니다. 특히 하박국 선지자도 하박국1장13절에 보면 이런 부분을 아주 적나라하게 표현을 했습니다.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차마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거짓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는데도 잠잠하시나이까. 
악인이 자기보다 의롭지 않는데 왜 자기보다 잘 되고 잘 되면 다리를 부려 뜨려 놓으시던지 하셔야 되는데 왜 안하십니까? 왜 나만 점점 어려워집니까? 이런 말씀을 하박국 선지자도 하셨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도 똑같았습니다. 예레미야서12장1절에 보면 여호와여 내가 주와 변론할 때에는 주께서 의로우시니이다. 그러나 내가 주께 질문하옵나니 악한 자의 길이 형통하며 반역한 자가 다 평안함은 무슨 까닭이니이까? 악한자들이 형통하고 패역한 자들이 다 안락함을 느끼는데 이게 무슨 까닭입니까? 이분이 막 덤벼드시는 겁니다. 이 당시에 예레미야나 하박국 선지자들은 누구이야기를 하는지 아세요? 일반인들 가지고 이야기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을 아는 이스라엘공동체 안에 있는 제사장들 보면 악하게 제사장역할을 하는데도 잘 되고 그 안에 정치지도자들을 보세요. 다시 말하면 교계 안에서 크리스천 안에서도 하나님의 방법으로 안하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안하고 세상방법으로 하는데도 잘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분들이 우상을 섬긴다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우상을 섬기지 말라고 선지자들을 통해서 말씀하셨잖아요. 
선지자들의 고민이 뭐냐면 하나님이 가서 제사장들에게 말해라 정치지도자들에게 말해라 이스라엘공동체 안에다가 말해라 우상을 섬기지 말라 그런데 그 말을 했다가 얻어맞고 그랬습니다. 그리고는 저쪽 코너로 몰리는 겁니다.
그래서 엘리야선지자도 그랬습니다. 그렇게 하지 말라. 그렇게 하지 말라 
이스라엘지도자들에게 정치 경제 종교지도자들에게 말했는데 그분들이 엘리야선지자들을 죽이려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바알 신을 섬기지 않는 7천명을 남겨두었다 그 사람들이 너 친구들이라는 겁니다. 겉으로 나타난 지도자들이 너 친구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 말씀이 구약에 보면 나오는데 예수님이 나중에 팔복의 말씀에서 제자들보고 복 있는 크리스천들은 내 이름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서 욕을 먹고 또 멸시당하고 있는 말 없는 말을 지어서 너를 어렵게 만들 거라는 겁니다. 그럴 때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선지자들도 그렇게 취급을 받았단다. 다시 말하면 선지자들이 취급을 받았다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같은 이스라엘사람들 공동체 안에서 그렇게 취급을 받았다는 소리입니다 그러니까 제자들보고 하는 말이 너희들이 예수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너희가 내가 가르친 것을 예수님이 가르친 것을 제대로 전하려고 그럴 때 기독교인들이 너를 핍박할 것이라는 겁니다. 이게 이방인들 가지고 이여기하는 게 아닙니다. 교회 안에서 핍박이 더 심합니다. 
여러분들도 신앙생활해보면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들이 문제가 있을 때 바깥에 안 믿는 사람들 때문에 문제가 있습니까? 믿는 사람들끼리 문제가 더 심합니까? 우리 믿는 사람들도 두 가지 사람이 있습니다. 
정말 주님이 원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 있고 또 그 사람을 핍박하는 일에 동참하는 사람이 있다는 겁니다. 그것은 여러분들 각자가 판단하셔야 합니다.
누가 어느 쪽에 있는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내가 어느 쪽에 있는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크게 대별하면 이렇게 두 개로 되어 있습니다. 
이 두 개가 어떤 때는 이쪽에 올수도 있고 어떤 때는 이쪽에 올수도 있고 그렇게 되겠지만 우리가 이 원리만은 알 필요가 있지 않나 생각이 됩니다.
기독교의 역설을 제가 뭐라고 그랬습니까? 패러독스(paradox)라 그랬습니다.
모순인 것 같지만 실은 모순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게 패러독스(paradox)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독교가 왜 이렇게 패러독스(paradox)가 있는 것처럼 만들었을까요? 우리인간의 눈으로 볼 때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우리인간은 육과 혼과 영으로 나누어졌다 그랬습니다. 그러면 육도 육의 눈이 있고 다시 말하면 육적으로 이해하는 그러한 것이 있습니다. 
혼은 혼적인 이해가 있습니다. 영은 영적인 이해가 이렇게 세 가지의 다른 차원의 이해를 하는 그러한 안목이 인간에게 있습니다. 
기독교는 어느 안목차원의 종교입니까? 영의 안목차원의 종교가 기독교입니다 그런데 영의 안목차원인 기독교를 혼의 눈으로 볼 때는 패러독스(모순, paradox)가 옵니다. 육의 눈으로 볼 때도 패러독스(모순, paradox)가 옵니다. 여기에 역설이 나옵니다. 그런데 누가 볼 때 역설이라고 볼 수 있습니까? 육의 눈이나 혼의 눈으로 보는 측면에서는 영의 쪽을 보면 역설입니다 
이게 맞지가 않는 겁니다. 어떤 때는 억측 같기도 하고 원리에 맞지 않고 그러는 겁니다. 이걸 전제로 해놓고 이런 과정 속에서 우리크리스천들은 우리의 소망과 우리의 본향이 어딥니까? 우리크리스천들은 하늘나라에 있습니다.
영의 나라에 속해있는 것이 크리스천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디에 살고 있습니까? 우리는 육과 혼의나라에 살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살고 있는 게 우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본래의 본질은 영의 사람들인데 지금 살고 있는 환경은 혼과 육의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패러독스(모순, paradox)가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역설입니다 이 세상은 어떤 세상입니까?
누가 지배하고 있습니까? 소위 마귀가 지배하고 있다고 그럽니다.
이 세상은 마귀가 지배하는 세상이고 우리크리스천들은 이 세상을 어떻게 봅니까? 우리는 이 세상이 우리고향입니까?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우리는 이 세상을 잠깐 지나가는 나그네라 그러지 않습니까? 우리는 지금 나그네입니다. 잠깐 왔다가 잠깐 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고향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이 세상에 이런 식으로 나그네로 살고 있기 때문에 성경에서 우리보고 뭐라고 그럽니까? 너희는 풀 같다 그러는 겁니다. 
풀이 조금 있으면 시들어지잖아요. 그다음에 너희들이 아무리 이 세상에서 잘되어야 그 영광은 꽃 같다는 겁니다. 꽃은 아름답지만 언젠가는 시들어지는 그러니까 잠깐 와있는 곳이 이 세상이라는 겁니다. 
이 가치기준을 우리가 다 아는 소리지만 제가 정리해드리는 겁니다.
패러독스(모순, paradox)로 그렇다면 하나님이 우리를 이 세상에 살게 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어쩌다가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이 세상에서 나그네로 잠깐 살고 있는데 하나님이 우리를 크리스천이 아닌 사람들과 살게 하는 목적이 뭡니까? 쉬운 말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이렇게 말할 수 있잖아요. 하나님영광이라는 말이 도대체 뭡니까?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목적이 예수그리스도의 보혈의 사건을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그 메시지를 갖고 오신 분이 예수그리스도십니다. 
이분이 우리에게 남겨놓으신 말씀 내가 이렇게 했으니까 너희들은 나가서 내가 너희들에게 정해준 예정론에 의하면 하나님의 백성의 숫자가 있는데 그 숫자를 채우는 일을 내가 성령을 너희들에게 줄 터이니 내가 너희들과 함께 할 터이니 그 일을 너희들이 하려라! 너희들이 이 세상에 살면서 그러다가 때가 되면 내가 너희들을 다시 데리고 가겠지만 그 일을 하기 위해서 선택받고 불리 움을 받은 자들이 너희들이다 그러니까 그 일을 하라!
그래서 우리 삶의 목적은 이 세상에 나그네로 살면서 하나님이 맡겨놓으신 그 일을 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이 사명을 다 주었지만 이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 앞에 불리 움 받고 선택받아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실제로 우리의 고향이 저기구나 이곳이 아니구나.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는 겁니다. 성경말씀에 보면 하나님에게 불리 움을 받았지만 실제로 그 일을 하는 사람은 아주 소수라는 겁니다. 그것을 구약의 이스라엘사람들이 역사 속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고귀한 뜻을 이루시기위해서 불리 움을 받은 사람들은 이 세상에 살면서 이 세상의 모든 것을 가지고 있으면 그 뜻을 까먹는다는 겁니다.
왜냐면 우리인간은 피조물이기 때문에 여기에서 모든 걸 편하게 가지고 있으면 이제 여기에 머물려고 하는 속성이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저쪽나라를 위해서 살려고 하나님 앞에 불리 움을 받은 사람들은 이 세상에 있는 것을 조금씩 뽑아버립니다 가장 내가 아파하는 부분을 빼앗아버립니다
가지지 못하게 그래야 받아드린다는 겁니다. 그래서 아삽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삽도 하나님의 종으로 불리 움을 받았지만 이분에게 원하는 것을 다 주어버리면 이분은 성가대장 역할을 안 할지도 모릅니다.
해도 잡(job)으로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아삽에게 고난도 주었고 재앙도 주었고 아삽에게 소득도 별로 많이 안주었습니다. 그러니까 아삽이 다른 눈으로 볼 때 다른 사람들은 악은들은 고난도 많고 재난도 많고 교만하고 돈도 많고 편안하고 이렇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큰 뜻을 보는 자가 복 있는 자인데 그 뜻을 이 세상에 눈을 많이 뜨고 보면 그 뜻이 안 보이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큰 뜻을 보기위해서 이 세상 것을 빼앗아버린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잖아요.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큰 그림을 보게 됩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다 가지지 않을 때 모자랄 때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런 소리나 같은 의미입니다 그러면 큰 그림을 보게 됩니다.
그러면 작은 그림은 잘 안보일 떼가 있습니다. 아삽이 이런 딜레마 속에서 성소에 들어가서 큰 그림을 다시 보게 된 겁니다. 큰 그림을 딱 보니까 아하! 내가 이제야 알았다 지금 저렇게 잘 되는 사람들 아삽도 이스라엘사람들 가지고 이야기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이해가 힘든 부분 중에 하나인데 이스라엘사람들은 다 크리스천들인데 이스라엘사람들 가지고 이야기하는 건데 보면 완전히 멸망하는 것처럼 표시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지만 우리는 이렇게 배워왔습니다. 한번 구원 받으면 영원히 무효가 되지 않고 그냥 계속 어떻게 살든 어떻게 살았든 그냥 우리는 다 천국 간다. 이렇게 배웠습니다. 실은 그게 아닙니다. 구원을 받아도 주님 앞에 온전히 서지 못하면 그분의 구원이 무효가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제가 언젠가는 그기에 대해서 자세한시리즈로 하겠지만 19절에 그랬습니다. 
이분이 큰 그림을 보고나니까 하나님을 잘 섬기지 않고 교만하고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지만 하나님마음에 마땅치 않는 그분들이 어떻게 되느냐면 졸지에 황폐해 되어 전멸되는 것을 환상으로 보는 겁니다. 
이것을 우리가 여러 가지로 설명합니다. 지옥에 들어가는 경우도 되겠고 하늘나라에 가서 보니까 계급도 낮고 정말 평 시민으로 빌빌거리는 구원받은 모습으로 환상으로 이분에게 보여주는 겁니다. 그분들이 이 세상에서는 벤즈(benz)타고 매일 고급호텔 돌아다니고 돈이 많아서 어디에 쓸지 고민하는 사람들 많잖아요. 예수님을 잘 믿지만 하나님의 큰 그림 속에서 선교하거나 주님의 마지막 때를 기다라는 마음은 전혀 없고 돈 벌어서 딴 생각하는 사람들 어떻게 하면 돈을 더 벌까? 어떻게 하면 내가 이걸로 뭘 조금 더할까?  
이 생각에 차 있는 사람들도 기독교인들 중에 얼마나 많습니까? 
이분들의 종말을 아삽이 본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도 아삽같이 성소에 들어가서 그 영안을 뜨도록 하는 것이 이게 복 있는 자라는 겁니다. 
그 영안을 떠서 저분들이 하늘나라에 가서 어떻게 될 것인가? 라는 것을 보고 아까워하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이분이21절에 아삽이 어떤 마음을 가졌냐면 내 마음이 산란하며 내 양심이 찔렸나이다. 이렇게 산란하고 찔렸다는 말은 내 심장 하트에서 쓴 물이 나온다는 말입니다 그분들을 이렇게 보니까 저 사람들이 지금은 잘 되고 지금은 복 받았다고 그러면서 하나님의 마음과는 관계없이 이 세상에 모든 걸 다 가지고 건강하고 헬스 다니고 뭘 하고 뭘 해서 잘 되고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지만 우리나라에 기복신앙이 큰 문제 중에 문제입니다 이렇게 투자하면 돈이 이렇게 나오고 십일조하면 돈이 이렇게 들어오고 십일조를 해도 고생하면서 십일조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노예지만 된다고 생각하고 우리가 이렇게 훈련을 받아 왔습니다.
주님이 보실 때는 아니라는 겁니다. 이분들이 저런 식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저런 식으로 세상사는 것을 보고 내 마음이 산란하며 내 양심이 찔렸나이다.
그러니까 불쌍한 마음이 들어왔던 겁니다. 그러니까 이 비전으로 큰 그림을 보니까 세상모든 것들이 이렇게 하는 것들 이게 불쌍하구나? 
저 사람들 시야가 아주 좁아서 그렇다 그러면서 이분이 22절에 보면 그랬습니다.  내가 이같이 우매 무지했다는 겁니다. 우매가 뭡니까? 
바보 같다는 겁니다. 영적으로 내가 영안이 떠지지 못해가지고 이렇게 될 사람들보고 내가 두려워했구나. 그래가지고 내가 우매무지한 사람이고 내가 짐승 같았다. 주님의 눈으로 볼 때 내가 짐승이었습니다.
짐승을 보세요. 짐승은 눈으로 보이는 육의 눈 그다음에 짐승도 혼이 있습니다. 마음의 눈 그 수준밖에 보지 못합니다. 그게 짐승입니다
지금 우리가 보는 게 뭡니까? 이 세상에서 짐승같이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매무지한 정치인들을 이렇게 보면 저는 TV뉴스에 이런 분들이 나오면 꺼버립니다. 돈이 많이 들어오고 권력이 많이 누리면 그것이 인생의 최고로 생각하는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인데도 그런 안목을 가지고 있는 겁니다. 짐승의 안목을 가지고 있는 겁니다. 그런 사람들은 잘 됩니다
다 잘 되잖아요. 잘되는데 이게 복이 없는 자들입니다 영의 눈이 어두워지니까 애꾸눈이 되어가지고 그것을 보지 못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제가 여쭈어 보겠습니다. 그렇다면 이게 중요한 이슈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진짜 사랑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있는 것을 다 빼앗아가야 합니까? 이것도 우리질문 중에 하나입니다 모든 걸 없애야 됩니까? 몸도 아파야 되고 돈도 없애야 되고 권력도 없애야 되고 이것도 우리의 이슈 중에 하나입니다 
그다음에 또 한 가지이슈가 뭐냐면 하나님의 복을 받기 위해서는 국회의원들 중에 사업하는 사람들 중에 그 중에 하나님이 정말로 사랑하는 한 사람을 잡아다가 강제로 감옥에 집어넣어둡니다. 감옥에서 회개합니다.
그리고 높은 자리 다 빼앗기고 감옥에서 혈당이 높아져서 당뇨병도 걸리고 그래가지고 건강이니 명예니 돈이니 모든 걸 하나님께서 다 빼앗아버리십니다 그리고는 감옥에서 회개해가지고 그 안에서 성경 읽다가 눈을 떠가지고 이게 다 소용없다는 그런 사람들 가끔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 양반을 쓸려고 하는데 돈과 명예와 권력을 줘가지고는 안 되겠다. 해가지고 감옥에 집어넣어가지고 하나님이 저쪽 큰 그림을 보도록 만드는 경우도 있습니다. 
눈을 뜨게 하면 겸손해지고 이 세상 모든 것이 초토화같이 보이고 그렇다ㅣ고 해서 그게 초토화는 아니지만 가치가 없이 보이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게 하나님의 크신 은혜입니다 이게 하나님의 은혜구나? 라는 것을 항상 느끼게 되고 그래서 내가 잘난 것이 없다. 내가 잘해서 되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항상 느낍니다. 우리AMI사역 이것도 내가 계획해가지고 지금까지 온 게 아닙니다. 이만큼 물이 흘려가다 보니까 이만큼 온 겁니다.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갈지 저는 이만큼도 걱정이 없습니다. 주님이 하시는 거니까 앞으로도 주님이 하십시오. 그러니까 죽으라고 악을 쓰면서 기도안합니다. 제 기도는 간단합니다. 주님이 알아서 하십시오. 제 기도는 그것밖에 없습니다. 주님의 뜻대로 주님이 알아서 하십시오. 제 뜻을 여기에 펼치지 마십시오.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밝히 깨닫기를 나에게 보여주시고 가르쳐주세요. 저는 이 기도밖에 안 합니다. 이 이상 뭐가 필요합니까? 
주님 내 욕심 부리지 않게 해주세요. 아삽이 이런 환경 속에서 자기가 짐승이라는 걸 깨닫고 그다음에 이분이 크게 눈을 뜨면서 23절부터 보면 그렇습니다. 아하! 내가 마음이 산란하고 마음이 아프고 성소에 오기 전에는 질투심도 있었고 이런 갈등들이 있었는데 이제 보니까 주님이 나의 오른 손을 붙잡고 계신 것을 깨달은 겁니다. 여기 앉아 있는 주님을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이여 주님이 지금 우리를 붙잡고 계십니다. 어떤 상황에서든지 주님이 붙잡고 계신 것을 내가 큰 그림으로 보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지금 붙잡고 계시니까 여기까지 오신 겁니다. 그다음에24절에 때를 따라서 주님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고 계신 것을 이분이 깨달았습니다.
우리도 지금 마찬가지입니다 그보다 더 큰 것을 깨달은 것은 이분이 저 나라에 가면 이런 패러독스(모순, paradox)속에서 이런 딜레마 속에서 하나님이 나를 영광스럽게 만드시고 존귀와 높은 자로 나를 만드시겠구나. 라는 것을 이분이 큰 그림 속에서 본 겁니다. 아하! 내가 이렇게 주님을 향하여 가니까 주님께서 나를 하늘나라에 천국시민 중에서 지도자계급을 만드시겠구나. 이것을 본 겁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우리가 하는 이 모든 사역들이 그냥 하나님이 시키니까 한다는 막연한 이런 게 아니고 주님! 주님이 나를 하늘나라에 가서 존 귀히 여기시고 높은 자리에 지도자급으로 나를 만들어 주십시오. 라는 상 주심을 바라보는 소망과 비전이 있기 때문에 힘을 받아서 가는 겁니다. 그것이 없이는 안 되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주님! 나의 눈이 짐승의 안목이 되지 않게 해주십시오. 큰 안목을 가지는 것이 복 중에 복이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한 가지만 말씀드리고 끝내겠습니다.
그렇다면 우리크리스천들은 이런 복 받는 크리스천이 되려면 물질을 다 빼앗겨야 되고 명예도 다 빼앗겨야 되고 권력도 다 빼앗겨야 됩니까?
그런 것 없이 세상 사람들이 볼 때 찌질이도 못나게 살아야 됩니까?  
그런 소리는 아니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이 불꽃같은 눈으로 사람들의 성품을 보면서 만약에 아무개전도사 아무개목사 또는 아무개집사 권사 장로 만약에 지금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서 아무개전도사를 쓰시려고 하는데 그런데 이 전도사의 약점과 장점을 하나님이 아십니다. 그래서 저 전도사에게는 물질을 많이 줘놓으면 딴 짓을 하겠구나? 건강을 너무 잘 줘놓으면 젊어서는 괜찮은데 나이40이 넘어서는 딴 짓을 하겠구나? 주님이 아시는 겁니다.
딴 짓 하면서 마음대로 쓰실 수가 없겠다 하면 그것이 육체의 가시입니다
사도바울도 육체의 가시를 가지고 계셨잖아요. 그런 걸 집어넣어주는 겁니다. 그래가지고 그것은 죽으라고 기도해도 안 됩니다. 하나님이 주십니다.
그것 때문에 큰 안목을 가지도록 하나님이 인도하십니다. 
큼 안목을 가지라고 하나님이 주시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은 피조물이기 때문에 모든 것이 다 잘되고 편해지면 큰 안목을 보는 눈보다는 이 세상에다가 눈을 갖다 대는 이 세상에 속해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 눈을 갖다 됩니다. 그래서 정말 착실한 사람은 빼놓고는 큰 안목을 주려고 그러면 할 수 없이 이 세상 것을 놓아야 됩니다. 의도적으로 놓게끔 만들기만 하시고 안 그러면 강제로 아픔을 통해서 뽑아 가시기도 하고 여러 가지 방법을 쓰십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정말로 사랑하는 자인데 줘놓았더니 딴 짓을 하는 경우가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이것도 하나님의 뜻인지 모르지만 그렇게 해가지고 하나님이 본래 계획했던 일을 못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소위 알미니안주의라고 그럽니다. 칼빈니즘 안에서 알미니안주의 하나님이 정해놓았는데 순종을 잘못해가지고 이것이 잘못 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기독교과거2천년 역사를 보면 가톨릭이 주후590년 이루에 생겨났는데 그전에 약300년400년 동안은 처음4-5세기 동안은 소위 313년 기독교가 공인되기 전까지는 카타콤시대라 그래가지고 기독교인들이 모든 게 어려워 졌습니다. 핍박 속에서 가정에서 떠나고 어려운 가운데서 강한 기독교인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가톨릭이 590년에 그레고리1세가 교황이 되면서 그때부터 가톨릭이 점점 커지면서 가톨릭이 돈이 많아지면서 왜냐면 교인들이 헌금을 하니까 돈이 많아지고 파워가 생기고 명예가 생기고 교황권이 세어져가지고 교황이 모든 걸 다 지배하고 있고 그게 과거천년 동안590년부터 종교개혁까지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가톨릭이 변질되는 겁니다.
이 세상 것을 영의 공동체가 영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곳에 쌓아놓으니까 우상 숭배하는 것 중 가장 큰 것들이 돈과 명예와 권력입니다
이걸 다 가진 겁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 눈이 밝아가지고 저 세상에 밝아진 것처럼 모습은 있지만 본 모습이 없어져버린 겁니다. 가톨릭이 그렇게 된 겁니다. 가톨릭만이 아니고 그리스도종교도 그랬고 성공회도 그랬고 그래서 기독교가 이렇게 변천해오면서 크게 지었던 건물들이고 교단의 세력들이고 다 영적을 매 말라버리고 사람들이 떠나버리고 지금 서구사회가 그렇게 되어 버린 겁니다. 오늘날 우리나라도 보면 전 세계에 대형교회50개 중에 한국에24개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나라가 대형교회가 전 세계에서 제일 많은 겁니다. 하나님이 특별히 우리민족을 사랑하셔서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 대형교회가 어떻게 변질되어가고 있습니까? 
어떤 한 교회를 지칭하는 게 아닙니다. 교인수가1000명이 넘어가면 그 교회는 돈이 많고 권력이 있고 명예가 있고 신학교에 간 신학생들의 꿈이 뭐냐면 이런 큰 교회로 성공하고 싶어 하는 것이 신학생들의 꿈입니다. 
오늘날 신학생들의 꿈입니다.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이 세상눈에 보이는 것에 송공하려고 하는 우리의 사고가 우리의 동기가 그기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여기서 이런 게 자꾸 커지면 너희들은 변질 된다 그러니까 천국에서 큰 자가 되려면 이 세상에서 어떻게 되어야 합니까? 작은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이 세상에서 커져서 사람들 보기에 유명하다 성공했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이 봐도 저 목사는 저 교회는 성공했다 그러면 그게 하나님이 보실 때는 성공이 아닙니다. 왜 그렇습니까? 가치기준이 육의 가치기준과 혼의가치기준으로 사는 사람들이 볼 때 성공했다는 것은 영적으로 성공이 아닙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성공했다 그러면 하나님이 사랑하시니까 많은 사람들이 구름떼같이 모여든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저는 절대로 그렇게 생각안 합니다.
성경에는 그렇게 안 되어 있습니다. 절대로 그렇게 안 되어 있습니다.
성경에는 항상 소수가 주변에서 봐도 성공하지 않았다는 소수를 통해서 하나님이 역사를 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 그러니까 세상에서 커졌다 성공했다 하는 것은 그 다음세대에서 그다음세대까지 가지를 못합니다. 
기독교의2천년 역사를 보면 다 무너져버립니다 그리고 다 변질되어 버립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성공이라는 단어가 세상 사람들이 쓰는 단어를 쓰면 안 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아시아의 일곱 교회를 하나님이 보여 주셨습니다.
계시록2장과3장에 아시아의 일곱 교회를 보면 일곱 교회가 뭘 말하느냐면 두 가지 학설이 있습니다. 뭐냐면 1세기부터시작해서 지금21세기 말까지 교회가 일곱 가지 스타일의 교회로 시대마다 그 교회가 변천이 된다.
예컨대 에베소교회는 1세기와2세기교회로 첫사랑을 잃어버렸다 
그다음에 나오는 교회는 2세기에서5세기까지의 교회다 이렇게 해서 제일 마지막 라오디게아교회는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아 내가 내 입에서 뱉어버리겠다는 그런 교회로 마지막 말세의 교회다 이렇게 해서 세대별로 나누는 그런 학설이 있습니다. 또 한 가지는 어떤 학설이냐면 주어진 한 기간 동안에 일곱 가지 교회가 항상 존재한다는 겁니다. 저는 이 학설을 믿고 있는데 1세기나 어디나 지금21세기에 보면 일곱 가지 교회가 있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관심을 둘 것은 오늘날도 그렇습니다. 일곱 가지 교회가 있는데 일곱 교회가 하나님께 다 칭찬을 받지 않았습니다. 칭찬을 받은 교회는 두 교회만 칭찬을 받았습니다. 빌라델비아 교회와 서머나 교회입니다
그래서 빌라델비아 교회라는 이름도 가끔 쓰고 서머나 교회라는 이름도 가끔 씁니다. 그렇지만 나머지교회 에베소교회 이런 이름들은 다 안 씁니다.
다 욕 먹는 교회입니다 그런데 서머나 교회와 빌라델비아 교회 두 교회가 가지고 있는 특징이 있습니다. 크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리고 핍박받았다 그랬습니다. 그리고는 우상을 섬기지 않았다는 겁니다. 권력과 명예와 물질에 대해서 초연했다는 겁니다. 그리고 너희들은 진리를 위해서 핍박을 받았다는 겁니다. 이 두 교회를 칭찬하셨습니다. 이런 교회는 1세기에도 이런 교회가 있었고 15세기도 이런 교회가 있었고 21세기에도 이런 교회가 있는 겁니다.
우리는 이런 교회가 되었을 때 주님에게 우리가 상급을 받고 주님이 기뻐하시고 이런 교회를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겁니다. 저는 그렇기 때문에 우리교회도 교인 늘리려고 제가 애쓰지 않는 겁니다. 주님이 알아서 다 보내주신다고 생각하고 그걸 믿기 때문에 그냥 오신 사람은 오고 만약에 떠나고 싶은 사람은 떠나고 저는 교인숫자에 대해서 신경 안 씁니다. 
목회자들이 제가 신학교에서 오랫동안 가르치면서 항상 생각이 어떻게 하면 교회 성장시키느냐 이것을 신학교에서 많이 배웁니다.
이게 중요한 과목 중에 하나입니다 어떻게 하면 교인들을 행복하게 해주어서 교회를 떠나지 않게 하고 그분들을 어떻게 하면 교회에 헌금도 많이 내게 하고 그분들이 어떻게 하면 교회에서 잘 적응하게 하느냐 그리고 그분들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을 또 데리고 오게 하고 이런 방법론을 가르치고 그리고 성서적인 말씀 몇 가지 골라가지고 이것이 성서적이라고 가르치고 그러니까 목사가 어떤 목사가 되는지 아세요. 완전히 인위적인 목사가 되어 버립니다. 사람에게 관심을 두니까 주님의 말씀을 담대하게 전하지 못하는 겁니다. 사람눈치를 봐야 하니까 그러니까 사람을 어떻게 하면 즐겁게 할 것인가? 목회자가 그렇게 되어 버립니다. 왜냐면 교회가 다 그렇습니다.
그런 교회는 사람들이 많이 모입니다. 저는 본래 그런 자질이 없습니다.
오늘날 교회들을 보세요. 특히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마지막 때 복음 전파를 위해서 쓰시는 미전도 지역을 위하여 애쓰는 교들을 보면 그런 교회들 돈 많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교회들 권력을 가지지 않게 했습니다. 
그런 교회들 서머나 교회 같이 조그맣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핍박받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중국교회들 보세요. 중국에 가정교회들 보세요.
구소련에 있는 모든 교회들 보세요. 다 돈이 없어서 그리고 그 안에서도 핍박을 받습니다. 중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슬람권교회들 보세요.
복음이 마지막으로 들어가야 할 지역의 교회들을 보세요. 다들 빌라델비아 교회가 아니면 서머나 교회들입니다 그런데 마귀는 그 교회들을 가만히 놓아둡니까? 자꾸 대형화시키려고 그러고 또 권력화 시키고 정치적으로 만들고 교회를 이런 것들로 여기저기서 많이 만들어 놓습니다.
그런데 그중에 그런 일을 만드는 것을 돕는 교회가 한국교회가 돕습니다. 
한국교회가 그런데 가가지고 파벌 만들고 한국교회가 선교라는 미명아래서 그러니까 우리한국교회가 그런 부분에서 정신 차려야합니다.
영적으로 깨어나야 합니다. 말세가 되면 마지막추수를 해야 되는 때입니다 
마지막 추수하는 데는 두 가지 사람들이 있습니다. 추수하는 일을 농사꾼처럼 옷을 입고 농기구들을 들고 농사꾼처럼 행동을 하면서 추수를 방해하는 그룹들이 있습니다. 또 정말 추수에만 관심을 두는 그룹도 있고 마귀는 추수사역에 이렇게 혼돈을 시키고 할 것입니다 지금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예수님께서도 그랬습니다. 말세가 되면 이런 일 저런 일이 많을 거다 그러면서 예수님이 말세가 되면 불의가 성하고 노아의 때와 같고 소수만 추수작업을 하고 나머지는 한다고 하지만 알고 보면 관심이 없다는 겁니다. 마태복음24장4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5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 6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하지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
7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8 이 모든 것은 재난의 시작이니라.
9 그 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 때문에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 10 그 때에 많은 사람이 실족하게 되어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11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겠으며 12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13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14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그러니까 많은 사람들이 돈을 사랑하고 종교다원주의가 성행하고 그다음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핍박을 받을 거다. 이게 마지막 때 추수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환경들이 이렇다는 겁니다. 그로니까 주님이 오늘 아삽에게 주신 말씀처럼 우리는 마지막 때 추수하는 일꾼들이 되려면 주변의 모든 사물들을 보고서 내 마음에 갈등을 가지지 말고 아삽처럼 성소에 들어가서 내 눈을 주님의 뜻으로 맞추고 그 뜻을 바라보며 그 뜻을 의지하며 그래서 아삽이 고백한 것처럼 주님은 나의 반석이시여 영원한 분깃이시여 주님은 나의 피난처라고 항상 고백하면서 나를 죽여 가며 주님만 바라보면서 이 세상을 이렇게 돌아갈 것이라는 것을 미리 다 알고 악이 성할 것을 미리 다 알고 그것 때문에 마음 아파하지 말고 그 안에서 주님의 뜻을 이루어나가는 일에 도구로 사용 받는 지혜로운 자들이 되시면 얼마나 좋을까요? 
세상은 악해지게 되어 있습니다. 점점 혼돈되게 되어 있습니다.
진짜와 가짜가 구별이 안 되는 때가 오고 그렇게 되고 있습니다. 
그다음에 커지는 게 좋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십니다. 커지면 생각이 이 세상에 가고 크진 조직에 의지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커졌지만 주님만 의지하는 사람이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정말 주님을 의지하면서 몸도 건강하고 돈도 많이 벌고 파워도 가지면 얼마나 좋겠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주님! 제가 가질 것 다 가지고 그렇지만 주님만 의지하고 교만하지 않는 그러한 사람 되게 해주세요. 이것이 우리의 꿈이요 비전입니다 

기도드리겠습니다.
이 세대가 악한 세대인 만큼 여기 앉아있는 주님이 사랑하는 나의 아들딸들이 아삽 같은 사람 되게 해주십시오. 아삽을 지나서 다윗 같은 사람 되게 해주십시오. 또 내가 이러한 사람이 되게 기도해주세요. 
그리고 기독교의 패러독스(모순, paradox)가 왜곡된 개념이 아니고 패러독스(모순, paradox) 자체가 진리인 것을 깨닫도록 도와주세요. 라고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같이 기도하면서 말씀을 상고하면서 다시 한 번 주님 앞에 되새기를 바랍니다. 아멘. 

#황용현 목사님 설교내용영상으로 보세요.
https://www.youtube.com/watch?v=pDXQIowulYY&list=PLtkvObidqrDQzO7s6LdE1QW17YzkwN1Vu&index=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