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강해 11-1강, 요한계시록의 구조(1장-5장)
오늘은 요한계시록11강으로 구조에 대해서 공부를 하겠습니다,
우리예수님은 정돈된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질서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모든 그분의 말씀이나 그분의 가르침하나하나가 다 정돈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부분에서 이분의 말씀이 영적인신비가 들어있는 말씀드리기 때문에 우리의 시각으로 우리의 이성으로 소화를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 말은 다시 말해서 내가 볼 때는 정돈이 안 되어 있는 같은 그런 느낌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성령님의 감화 감동이 뒤따라 주어야 되는데 성령님의 감화 감동이 뒤따르지 않으면 주파수가 다르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은 정돈된 말씀인데도 내가 보기에는 정돈이 안 된 힘든 말씀으로 이해하기 쉽습니다, 과거2000년 교회사에서 이렇게 이성적으로만 성서를 이해하려고 노력했던 분들이 많은 소위 학문적 접근을 해서 책을 쓴 분들도 많고 가르친 분들도 많고 그래왔습니다, 그러다보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예수님의 정돈된 시각으로 보지를 못하고 이성적으로 제한된 시각으로 보아왔기 때문에 온갖 해석에 차이점도 많았고 또 이것 때문에 신학적 논란도 많았고 그래 왔습니다, 이런 모든 일들이 오늘날에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특히 오늘날은 이성이 더 발달되어 있고 또 세상 적으로 지식도 더 많이 발달되어 있고 또 사람들도 더 깨어있고 이런 사회 속에서 예수님의 재림이 아주 가까이 와 있는 이때기 때문에 영적으로 혼돈스럽고 이런 사회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더 혼란스럽게 나름대로 정돈을 하고 있는 것이 우리에게는 큰 도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상당히 많지만 들을수록 혼돈스러운 그러한 말씀들이 난무하고 있고 왜냐면 하나님의 말씀도 같은 영적말씀이지만 깊이와 높이와 넓이와 길리라는 것은 시간과 역사의 개념을 거기다가 포함시킨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네 가지요소가 잘 배합이 되었을 때 또 이것이 잘 정돈이 되었을 때 예수님의 말씀을 능히 예수님의 뜻에 따라서 소화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세미나를 통해서 우리가 영성이 깊기만 하면 안 됩니다 사람이 깊기만 하면 그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높이도 있어야 됩니다, 그렇게 깊고 높기만 하면 어떻게 됩니까,
뽀쪽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런 사람도 문제가 있습니다, 어떻게 되어야 됩니까, 이게 넓어야 됩니다, 그릇이 커지려면 깊고 높고 넓어야 됩니다,
넓은 시각이 우리가 카메라를 봐도 넓은 앵글을 뭐라고 그럽니까,
와이드앵글이라고 그럽니다, 카메라에 특별한 앵글장치가 되어 있어야 되잖아요, 와이드앵글로 보는 연습을 하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까지만 가지고도 충분치가 않는 겁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역사 속에서 움직이고 역사 속에서 가르침을 주셨기 때문에 역사관이 있어야 됩니다,
신앙관이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1세기 때 하신말씀 또2세기 때3세기 때 왜냐면 예수님은 창세전부터 말씀하셨거든요 그래서 조금씩 구약의4천년 역사이야기하시고 아담타락 전 역사 영원세계에서의 역사이야기도 하시고 엄청난 길이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길이를 보는 시각이 그릇이 크면서 그릇이 시간에 따라서 움직이는 그릇입니다 그걸 소위 융통성 또는 거대한시각이라고 그럴까요, 거시적인 시각이라고 그럽니다, 거시적이라는 말은 시간이 거기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시간을 이야기하는 개념을 설명하기위해서 칠판에 도표도 거리고 이렇게 해왔습니다, 그래서 종말론도 그런 차원에서 네 가지학설을 드리는 것은 제가 네 가지학설을 드리는 목적이 무엇이겠습니까, 깊이와 높이와 넓이와 길이 그러면서 종말론이 어떻게 역사 속에서 움직여왔는가 이걸 우리가 다보는 시각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오늘부터 구체적으로 요한계시록을 들여다볼 때 요한계시록에 깔려있는 주님의 뜻을 조금 더 멋있게 볼 수가 있습니다,
오늘은 요한계시록의 구조에 대해서 볼 터인데 무 청년주의자들과 후 천년주의자들은 같은 그룹들입니다 이 세상마지막이 어떻게 된다는 겁니까,
이분들은 낙관적인 시각과 비관적인시각 여기에 차이가 있지 그의 비슷한 종말론을 가진 분들입니다 무 천년주의자와 후 천년주의자들이 요한계시록을 어떻게 보느냐 제7강에서 잠깐 말씀드렸지만 이분들은 단계를 여섯 단계로 나누어가지고 보는데 큰 주제가 뭐냐면 지금 이 세상은 선과 악이 공존하면서 선과 악이 서로가 격돌하는데 결론적으로는 선이 승리한다는 시각에서 요한계시록을 들여다보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시각은 우리에게 어느 정도는 필요한 시각입니다 필요한 시각인데 요한계시록의 본래의 뜻은 그기에 담겨 있지 못한 점이 아쉬운 겁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은 이런 시각으로 보기 때문에 우리는 이와 반대되는 역사적 전 천년주의와 세대주의적 전 천년주의자들이 보는 시각이 또 있습니다, 이 시각을 가지고 그렇지 않는 시각과 비교를 하면서 우리가 잠깐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역사적 전 천년주의와 세대주의적 전 천년주의자들은 요한계시록의 구조를 볼 때 구조의 가장 결정적인 성구가 계시록1장19절입니다, 요한계시록의 중심 구절이니까 이 구절을 잘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네가 본 것과 지금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그러니까 여기 보면 세 부분으로 되어 있는 겁니다,
또 사건도 보면 그런 겁니다, 네가 본 것과 그다음에 지금 있는 일과 그다음에 장차 될 일들 이 성구 때문에 요한계시록전체를 이 성구에 맞추어서 구조적으로 셋업(setup)을 하는 그룹이 역사적 전 천년주의 팀들과 세대주의 전 천년주의 팀들입니다, 전 천년주의자들이 이 구조를 중시합니다,
무 천년주의나 후 천년주의자들은 이 구조를 별로 중시하지 않습니다,
이분들은 그냥 계시록1장은 서론장이라고 보는 겁니다, 이 구절에 초점을 맞추지 않습니다, 왜냐면 요한계시록은 미래를 향한 책이라고 보지를 않는 겁니다, 전 천년주의자들은 요한계시록을 미래를 이야기하는 책이다 그래서 미래적 개념을 지난시간에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무 천년주의는 이것이 미래사건이 아니고 오늘날교회사에서 일어나는 선과악의 다툼의 이야기다
라고 보는 겁니다, 교회사에서 일어났던 과거에도 주욱 일어났고 지금까지도 그것이 일어나고 있는 총체적인 하나의 선과악의 싸움을 설명한 것이다
어떤 무 천년주의자들은 또는 후 천년주의자들은 과거 네로 황제가 있었을 때 기독교인들이 핍박받았던 이야기들이 묘사되어 있다고 보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은 무리가 생기는 게 요한계시록은95년에 썼잖아요,
그런데95년에는 네로 황제시대가 아닙니다, 네로 황제시대는 주후54년에서68년까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봐도 이게 맞지가 않습니다,
네로 황제 때 일어났던 선과악의 싸움이야기가 요한계시록에 싸움이라고 보는 이런 시각이 많습니다, 그래서 무 천년주의자들은 그러면666이 뭐냐 그러면666을 네로 황제라고 보는 학자들도 또 있습니다,
왜냐면 그 당시의 선과악의싸움 속에서 악한 황제였던 악의 중심 되었던 분이 네로 황제라고 보기 때문에 이분들은 오늘날666이 아무개다 뭐다 하면 아니다 그것은 다 잘못된 이야기다 그러니까 완전히 시각이 다른 겁니다,
그러니까 엄청난 혼돈을 우리한데 야기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들에게 거듭 말씀드리지만 어떤 입장에 있어야 됩니다, 하는 말은 저는 안 합니다, 왜냐면 여러분들에게 주님이 주신 다양한 시각과 여러분들의 품성과 인격이 있기 때문에 그렇지만 스스로 결정하시되 이런 분들은 어떻게 해석하느냐 이런 분들은 어떻게 해석하느냐 비교는 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면 이렇게 네로 왕이다 그 당시 무 천년주의자들이 해석하는 사람들도 결코 나쁜 사람들이 아닙니다, 보면 나보다도 더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전도도 많이 하고 기도도 많이 하고 영성도 높고 이런 분인데도 이런 생각을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의 다른 것 때문에 통째로 그분들을 나쁘게 이야기하면 안 됩니다 제 말 잘 소화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해주시길 바랍니다,
아까계시록1장19절을 가지고 해석을 전 천년주의자들은 첫 부분 그게 네가 본 것 그것을 어떻게 해석을 하느냐면 요한계시록1장이라고 해석을 합니다,
요한계시록1장을 네가 본 것들 이렇게 해석을 하고 그다음에 지금 있는 일 할 때 지금 있는 일들은 요한계시록2장과3장으로 해석을 합니다,
아시아의 일곱 교회들을 그 당시에 현재형입니다 그러니까 주후95년 그 당시에 현재 상황 예컨대 일곱 교회들이 그 일곱 교회들을 누가 개척한 교회입니까, 사도바울이 개척한 교회입니다 사도바울이 언제 개척했느냐면 2차 여행 때 일곱 교회들이 개척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일곱 교회들 중에 한 교회가 빠진 게 있습니다, 실은 여덟 교회가 되어야 될 텐데 그 교회가 골로새교회입니다 골로새교회는 여기에 없습니다, 그러면 골로새교회는 왜 없을까
골로새교회는 항상 바울이 일곱 번째인 라오디게아 교회와 같이 취급을 합니다, 다시 말하면 두 도시가 쌍둥이도시로 붙어있는 도시로 되어 있습니다,
교회는 따로 있지만 그래서 이분이 골로새서를 집필하시고는 마지막에다가 이런 말을 썼습니다, 골로새교인들아 이 편지를 읽고는 라오디게아 교인들에게도 이 편지를 전해라 그러는 겁니다, 그래서 라오디게아 교회는 골로새교회와 동일시하는 바울의 시각이 있다는 걸아시고 예수님도 지금 일곱 교회를 말씀하실 때 골로새교회는 라오디게아 교회에 속해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시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우리가 지난시간에 봤지만 성령님께서는 질서가 있기 때문에 요한계시록은 항상 일곱이라는 숫자에 초점을 맞추십니다,
그러니까 여덟 교회를 하지 않고 골로새와 라오디게아는 하나로 붙여서 일곱 교회로 하셨습니다, 일곱이라는 숫자는 어떤 숫자입니까, 성서에서는 항상 완전 숫자라 그럽니다, 하나님의뜻을 이루는데 필요한 완전 숫자다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그래서 항상7이라는 숫자를 많이 썼습니다,
몇 번 썼다고 그랬습니까, 52번이나 썼습니다, 그래서 세 번째로 장차 될 일들 할 때 이것이4장부터22장까지로 보는 겁니다, 통째로 그렇게 보는 겁니다, 그러니까 요한계시록은4장부터22장까지니까 요한계시록대부분이 장차 될 일들에 대한 메시지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그래서 장차라는 것은 과거2세기3세기사람들도 그 당시에 자기네가 볼 때는 말세라고 생각을 하고 그분들도 요한계시록을 그 당시 상황 속에서 해석을 했을 테고 심지어는18세기19세기사람들도 주님의 재림이 가까이 왔다고 보고 이것을 그런 식으로 해석을 했을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어떻게 했다고 그랬습니까,
봉하라 그랬잖아요, 그러니까 그 당시에 해석을 만약에 했던 분들은 정확한 해석이 아닐 수가 있습니다, 왜냐면 봉해놓았는데 자기가 그냥 자기 이성적으로 해석하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이제 오늘날 와서 요한계시록에 대한 해석들이20년 전이 다르고5년 전이 다르고1년 전이 다르고 끊임없이 새로운 시각들을 가지고 해석하는 분들이 여기저기에서 나타납니다,
그래서 그것은 성서적인 것 같습니다 주님의 재림이 가까이 올수록 새로운 메시지가 깨달음을 주님이 조명해주지 않았나, 이렇게 보는 겁니다,
그래서 구조적으로 우리가 도표를 잠깐 보면1장은 과거에 본 것 그리고는2장과3장은 현재 있는 것(주후95년) 그러니까 일곱 교회가 언제 개척이 되었습니까, 2차여행이50년에서53년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일방적으로51년 정도에 일곱 교회를 개척하지 않았나, 라고 보는 겁니다,
그런데 지금주후95년입니다 그러니까44년 기간 동안에 교회가 변한 모습을 요한에게 보여준 겁니다, 이것을 우리게 가르쳐주는 것을 보면 교회가 이렇게 오래 되면 변질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이게 다 유명한 사도바울이 성령님의 능력에 의해서 개척된 거룩한 교회들입니다
거룩한 교회들인데 시간이 가면 갈수록 이게 변질된다는 걸 보여주는 겁니다, 그런 모습들을 우리가 볼 겁니다, 그게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들입니다 과거2000년 교회사를 보면 교회가100년 이상 제대로 가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커다 유명하다 건물 잘 지었다 하는 교회들은 근방 변질되어버렸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자녀지만 창조목적대로 교회생활을 하지 않으면 우리예수님께서 아예 던지거나 무너뜨리십니다, 우리는 교회 지어놓고 교회자체가 우상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걸 아주 질색하시는 겁니다, 왜냐면 예수님이 그 훈련시키려고 우리인간을 이 세상에 던져놓고는 너희들 교회 오픈해라 그래가지고 그 훈련시키려고 했는데 인간들이 딴 짓하는 겁니다, 그런 딴 짓하는 모습을 아시아의 일곱 교회를 통해서 우리에게 그림으로 보여주는 겁니다, 대부분의 교회들이 어떻게 변해왔느냐면 일곱 교회라는 뜻이 뭐냐면 무 천년주의에서도 이렇게 해석을 합니다,
또 전 천년주의에서도 공통분모가 많습니다, 뭐냐면 일곱 교회는 교회시대에 있는 모든 교회를 지칭하는 그런 의미입니다 그런데 그 안에 일곱 가지의 교회가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다시피 그 중에 다섯 교회는 꾸중을 받고 그리고는 두 교회는 칭찬을 받는 겁니다, 칭찬받는 두 교회는 면류관이 있는 겁니다, 이미 면류관을 받은 교회들입니다 이 두 교회는 핍박받고 조그만 교회입니다 나중에 자세히 볼 것입니다, 그러니까44년 동안 시간이 흘러가면 이렇게 변질이 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겁니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가면 이 다섯 교회들은 점점 더 교인들도 많아지고 교권도 생기고 헌금도 많이 들어오고 커졌는데 그 안에 문제들이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교회들은 종교행위는 하지만 그분들에게는 면류관이 없다는 겁니다, 그리고는 서머나 교회는 조그만 교회지만 핍박을 받으면서 생명의 면류관이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빌라델비아교회도 조그만 교회인데 능력이 조그마하다는 겁니다, 그런데 너희들에게 면류관이 있는데 그것을 내가 빼앗기지 않도록 하겠다는 겁니다, 면류관이 있다는 소리인 겁니다,
나머지 다섯 교회는 면류관이야기가 없습니다, 그리고는 꾸중만 하는 이야기만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신학적으로 기독론에 문제가 있는 부분을 지적을 하십니다, 나머지 다섯 교회는 그 부분을 우리가 시간이 될 때 같이 볼 것입니다, 그리고는4장과5장부터 장차 될 일이거든요 그래서 앞으로 있을 것들 이 말이 뭐냐면 예수님의 재림 전에 나타날 것들입니다,
그러니까 오늘날 상황과 딱 맞는 메시지들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 재림 전에 요한에게 보여주는 게 뭐냐면 4장은 삼위하나님이 계신 보좌를 보여주었습니다, 보좌를 보여주셨는데 예수님을 포커스를 맞추어서 보여주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에 대해서 공부를 많이 해야 됩니다,
예수님을 포커스를 맞추어서 보여 주었는데 그기에24장로들에 대한 해석은 구약에서의 열두지파의 장로들 신약에서의 열두제자들 이렇게 일방적으로 해석을 합니다, 이분들이 보좌주변에 자기네의 보좌들이 있습니다,
그기에 앉아서 면류관을 쓰고는 예수님께 찬양을 드리고 경배 드리는 장면들 또 스랍천사들이 보좌주변에서 예수님께 찬양을 드리는데 거기 보면 찬양 드리는 목적이 이분이 인간으로 내려가셔서 고생을 많이 하시고 이분을 통해서 많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창조목적훈련을 받고 다시 영생을 회복 받고 올라온 그기에 대한 고마움을 예수님께 찬양 드리는 모습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도 올라가면 그렇게 할 것입니다,
그리고5장에서는 더 구체적으로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합니다,
예수님이 책을 한권 들고 계신데 작은 책이라고 그랬습니다,
그 책에 일곱 인으로 봉인이 되어 있는 책을 예수님께서 들고 계신 겁니다,
이 책에 인을 떼실 분이 누군가 요한이 질문을 던지니까 이 책에 화면으로 보여주시는데 어린양이 나타나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인데 예수님을 어린양의 모습으로 요한에게 보여주는 겁니다, 이 어린양이 이 책에 봉인을 뗀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십자가사건이 그렇게 중요하고 그것으로 인해서 예수님이 찬양을 받으신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인을 떼시는 분이 예수님이신데 예수님을 찬양하는 모습을 보면24장로들이 찬양하고 그다음에 천천만만이라는 단어가 거기서 나옵니다, 천천만만천사들이 어린양에게 찬양을 드리고 그다음에 모든 피조물들이 다시 말하면 온갖 동물들 식물들 꽃들 바다에 있는 것들 모든 피조물들이 어린양에게 찬양을 드리는 모습을 요한이 본 겁니다, 그런데 찬양 드리는 게 뭐냐면 예수님이 경배 받으시기에 합당하시고 찬양받으시기에 합당하시고 존경받으시기에 합당하시고 예수님보고 예수님. 예수님이 최고입니다 이러한 장면을 요한이 봤는데 예수님이 그렇게 대접을 받으시면 우리가 이성적으로 그러면 성부하나님과 성령하나님은 뭡니까, 까다로운 사람은 그럽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영광 받으시면 두 분은 자동적으로 같이 기뻐하시는 겁니다, 따로 지내는 분이 아닙니다,
한분이 기쁘면 같이 기뻐하시고 서로가 연합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피조물들의 입장에서는 우리는 삼위하나님 중에 누구와 제일 가깝게 지내야 됩니까, 예수님입니다 왜냐면 삼위하나님 중에서 창세전에 이미 결정했습니다, 예수님 보고 성부하나님이 당신이 우리와 같은 수준이지만 같은 파워지만 피조물들과 관계를 맺는 하나님으로 이미 결정되신 분입니다
예수하나님이 그렇기 때문에 피조물들을 훈련시키는 일 피조물들과 관계맺는 일 그것은 예수하나님이 하십시오, 그래서 마태복음28장18절에 예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지상사명을 제자들에게 주시면서 아버지가 나에게 이 모든 권한을 나에게 주셨다는 겁니다, 권한을 주셨지만 권한만이 아니라 권한 속에 인간으로 내려와서 인간의 고통을 당하셔야 되는 그 권한까지 다 받으신 겁니다, 그렇지만 그 권한을 이 분이 행사하셨기 때문에 피조물들이 이분에게 엄청나게 고맙게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저도 그렇고 여러분들도 그렇고 그러니까 우리가 저쪽세계에 올라가서 뭘 해야 됩니까,
예수님께 예수님 고마워요 예수님 고마워요 이렇게 해야 되는 겁니다,
왜냐면 그 모습을 미리 보여준 겁니다, 그러니까 4장9절에 보면 그 생물들이 보좌에 앉으사 그 생물들이 누구냐면 스랍천사들입니다,
그 생물들이 보좌에 앉으사 세세토록 살아계시는 이에게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돌릴 때에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살아계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관을 보좌 앞에 드리며 이르되 우리 주 하나님이여(예수님께 드리는 겁니다)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그러니까 모든 만물이 모기들이 개미들이 주님의 뜻대로 있다는 겁니다, 모기들이 이놈들이 날라 다니는 것도 나에게 와서 피 뽑아 먹는 것도 주님의 뜻 안에서 하시는구나, 이런 시각을 가져야 됩니다, 이런 시각을 가지고 모기가 와서 물어도 주님 감사합니다,
이런 마음을 가질 때 내가 주님께 영광 드리는 겁니다,
이분의 주권을 인정하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날 예뻐하시는 겁니다,
예수님께 이쁨을 받아야지만 그 사람이 복 있는 사람입니다
어머니들이여 아버지들이여 예수님께 이쁨을 받으면 자녀들 기도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자녀들을 예수님이 알아서 이뻐하십니다,
솔로몬이 그렇게 나쁜 짓을 해도 너 아버지 때문에 내가 너 놓아둔다고 그러잖아요, 그러니까 우리아이들도 너 부모 때문에 너 놓아둘 거야 너에게 복을 줄 거야 그러는 겁니다, 그러려면 모기가 물어도 인상 쓰지 마시고 무슨 뜻이 계셔서 이놈이 나를 물게 합니까, 이런 사고방식을 가져서야 됩니다,
그러니까 범사에 감사하라 그러잖아요, 이런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은 범사에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겁니다, 그런 사람은 신경질 내지 않습니다,
냈다가도 근방 바꿉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때는 화가 났다가도 근방 바꿉니다, 왜냐면 범사에 감사하라고 그랬잖아요, 황 목사 너 왜 그러니 그러면서 또 바꾸고 또 바꾸고 범사에 사고방식을 바꾸는 겁니다,
그런 사고방식을 가지게 되니까 나는 모르겠는데 주변사람들이 날 보면 그럽니다, 황 목사님 더 젊어졌습니다, 그러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속으로 아하 주님께서 젊게 만드시는구나, 제가 이번에도 선교지에 갔는데 선교지 가는데 마다 미얀마 라오스 베트남에 갔는데 미얀마 쪽에는 과거10년 전에 말씀을 배웠던 사람이 제가 왔다고 며칠씩 버스를 타고 왔다는 겁니다,
날 보더니 그러는 겁니다, 10년 전보다 더 젊어졌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왜 그럴 까요, 내가 가만히 보니까 그러는 겁니다,
모기에 물려도 주님 감사합니다, 이런 생각을 가지니까 주님께서 그렇게 만드시는 갔습니다, 5장을 보세요, 5장1절을 보면 또 내가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두루마리가 있으니 안팎으로 썼고 일곱 인으로 봉하였더라
그러면 보좌에 앉으신 분이 누구냐면4장절과2절을 보면 이 일 후에 내가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 내가 들은 처음에 내게 말하던 나팔소리 같은 그 음성이 이르되 이리로 올라오라 이 후에 마땅히 일어날 일들을 내가(예수님) 네게(요한) 보이리라 2절에 내가 곧 성령에 감동되었더니 보라 하늘에 보좌에 베풀었고 그 보좌위에 앉으신 이가 있는데 그분이 누구냐면 예수님입니다, 그래서5장1절에 또 내가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예수님의 오른손에 6절에 보면 내가 또 보니 보좌에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한 어린양의 서있는데 일찍이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그에게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들은 온 땅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
그러니까 예수님이 어린양의 모습으로 요한에게 보여주시는 겁니다,
8절을 보면 그 두루마리를 취하시매 네 생물(스랍천사들)과 4장6절에 네 생물의 모습을 보여주시는 겁니다, 첫째 생물은 사자 같고 둘째 생물은 송아지 같고 셋째 생물은 얼굴이 사람 같고 넷째 생물은 날아다니는 독수리 같은데 지금 이 생물이 누구냐면 스랍천사입니다 에스겔서1장10절에 보면 똑같은 얼굴을 가진 천사가 스랍입니다 그다음에 이사야서6장2절에도 그런데 그룹천사는 얼굴이 네 개가 있는데 모습이 조금 다릅니다,
에스겔서10장14절에는 그룹천사의 모습이 나옵니다, 얼굴이 조금 다릅니다,
그룹천사가 더 높은 천사로 우리가 공부했습니다,
그래서 여기에서는 지금 요한이 스랍천사가 이렇게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천사들도 밤낮 쉬지 않고 4장8절에 네 생물들은 가각 여섯 날개를 가졌고 그 안과 주위에는 눈들이 가득 하더라 그들이 밤낮 쉬지 않고 이르기를 거룩하도다. 거룩하도다. 거룩하도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오실 이시라 이분이 누굽니까 앞으로 우실 분입니다, 그러니까 성부하나님도 성령님도 아닙니다,
앞으로 오실 주 하나님은 예수님이 십니다 그러니까 이분들이 보좌에서 예수님에게 집중적으로 포커스를 맞춘 겁니다, 그러면서 이 생물들이9절에 보니까 그 생물들이 보좌에 앉으사 세세토록 살아계시는 이에게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드리고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살아계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관을 보좌 앞에 드리며 이르되 우리 주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그러니까 예수님께 찬양 드리는 목적이 예수님은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시고 그 만물들이 예수님의 뜻대로 존재하며 그것을 위해서 창조되었다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광 받으십시오, 그러니까 우리 인간들에게만 영광 받는 게 아니고 만물들에게서도 영광을 받으셔야 된다는 겁니다,
왜냐면 만물들을 창조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러면서5장에 들어와서 어린양에게 만물들과 또 이십사 장로들과 천사들이 경배하는 장면이 5장8절14절까지 나옵니다, 왜 어린양의 모습을 보여줍니까, 이분이100%인성이 되셔서 창조주 되신 분인데100%인간이 되셔서 우리에게 새 생명을 허락하는 일을 하셨기 때문에 8절에 그 두루마리를 취하시매 네 생물 이십사 장로들이 그 어린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 그들이 새 노래를 불러 이르되 두루마리를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를 합당하시도다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하리로다
이때 우리하나님 앞에서 할 때는 삼위하나님으로 생각해도 됩니다,
그래서 앞뒤로 보면 예수님으로도 볼 수도 있고 삼위하나님으로도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11절을 보면 내가 또 보고 들으매 보좌와 생물들과 장로들을 둘러선 많은 천사의 음성이 있으니 그 수가 만만이요 천천이라
이것은 일반천사들입니다, 엄청난 천사들의 소리가 멀리서 들려오는 겁니다,
그들의 음성을 들었는데 그들의 수가 만만이요 천천이라 기가막힌 화음으로 이분들이 찬양을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주님 앞에 찬양할 때도 이와 같은 화음으로 찬양했으면 좋겠습니다, 12절에 이 만만이요 천천의 천사들이 뭐라고 그러느냐면 큰 음성으로 이르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
13절에 내가(요한) 또 들으니 하늘 위(3층천)에와 땅 위(1층천2층천)에와 땅 아래(음부)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피조물이 이르되 보좌에 앉으신 이(예수님)와 다시 말하기를 어린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세세토록 돌리지어다 하니 네 생물이 이르되 아멘 하고 장로들은 엎드려 경배하더라 여기서 우리가 배울 점이 무엇입니까,
모든 피조물들도 예수님에게 이렇게 경배 드리고 찬양 드리고 한다는 겁니다, 모든 피조물들도 그러니까 우리이성으로 볼 때는 예수님이 피조물들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신 것은 아니잖아요, 넓게 보는 겁니다,
이 세상이 아담의 타락 때문에 이 세상이 이렇게 되었잖아요,
그래서 아담타락으로 인해서 이 세상이 이렇게 시간 속으로 떨어진 것은 이런 모든 다른 피조물들도 다 같이 시간 속으로 떨어진 겁니다,
다른 피조물들도 강아지도 영원세계에서는 영원히 살 겁니다,
사자도 그렇고 개미도 그렇고 아담이 타락하는 바람에 시간 속에 떨어지는 바람에 모든 피조물들도 다 나의의 한계성을 가지고 그다음에 이놈들도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으면서 살게 된 겁니다, 그러다가 나중에7천년훈련학교가 끝나면서 이놈들도 영원세계로 들어갈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누구에게 이놈들이 고맙게 생각하겠습니까, 예수님께 고맙게 생각하는 겁니다,
이놈들도 예수님의 장중에서 움직이는 겁니다, 우리 인간을 훈련시키려고 등달아 다른 피조물들도 똑같이 고생하도록 집어넣은 겁니다,
강아지가 생명이 몇 년입니까, 20년 됩니까, 살아있는 강아지가 저리 올라갔는지는 저는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저쪽으로 올라가면 만물들이 분명히 있다고 그랬잖아요, 모든 피조물들이 예수님께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세세토록 돌리지어다 했으니까 그러니까4장과5장은 우리에게 장래에 있을 일을 이야기하는 장면이기 때문에 분명히 이 사건이 지금 이 순간에 일어났느냐 안 일어났느냐 이게 우리의 질문입니다, 그런데 나중에6장과7장에 보면 일곱 인을 떼는 장면입니다 일곱 인은 누가 뗍니까,
예수님이 떼는 장면입니다 첫 인을 예수님이 뗄 때 무슨 일이 일어나고 무슨 일이 일어나고 주욱 나옵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공중 재림 전에 일어나는 모든 징조들입니다 일곱 인들이 징조들을 보여주는 겁니다,
인을 뗄 때마다 그런 걸 보면4장과5장의 이 장면은 이미 실현되지 않았나, 보는 겁니다, 아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대에 정확하게 언제 실현되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러니까 예수님의 재림의 징조들 중에 첫째 인 둘째 인 셋째 인에서 이야기하는 모든 징조들이 이미 우리 눈앞에 나타나있거든요
이미 나타나있기 때문에 4장5장 사건은20세기든 21세기든 이미 이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나 보는 겁니다, 우리가 못 봐서 그렇지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는 기도를 할 때 보좌의 기도를 하는 겁니다, 어떻게 하느냐면 4장의 모습을 비전으로 보는 연습을 하는 겁니다, 지금오늘날 우리에게 그런 은혜를 주셨습니다, 재림 전에 하나님의 자녀들은 소위 보좌의 기도를 할 수가 있는 겁니다, 왜냐면 이미 이것이 재림 전에 있을 것을 요한에게 보여주었기 때문에 그래서 지금 4장의 그 장면을 기도하면서 딱 보는 겁니다,
말로 이야기할 필요도 없이 혼자 묵상하면서 이걸 쫘악 그리는 겁니다,
그다음에5장의 모습도 쫘악 그리는 겁니다, 그리려면4장과5장을 자꾸 묵상하면서 그것을 시각화하는 겁니다, 이미 이루어진 장이기 때문에 이걸 시각화하면 엄청난 주님의 기쁨이 있을 겁니다, 시각화하시면서 지금 이 순간에도 지금 스랍천사들이 예수님께 찬양을 드리고 있고 경배 드리고 있고 24장로들이 면류관을 쓰고는 엎드려 경배 드리고 계시구나,
그래서 만물이 오실 예수님을 향해서 경배 드리는구나, 그 모습을 시각화하는 겁니다, 그것을 매일 순간순간 하는 겁니다, 이렇게 하는 사람은 복 있는 사람입니다 다음 시간에 뵙겠습니다,
#황용현 목사님 설교내용영상으로 보세요.
https://www.youtube.com/watch?v=BWYr9-Utmy8
'요한계시록 강해' 카테고리의 다른 글
12강, 요한계시록6장-22장, 요한계시록의 구조 (0) | 2020.11.30 |
---|---|
11-2강, 요한계시록1장-5장, 요한계시록의 구조 (0) | 2020.11.30 |
8강,9강, 10강, 요한계시록의 융합적 해석과 특성들 (0) | 2020.11.28 |
5강,6강, 7강, 요한계시록의 해석방법들 (0) | 2020.11.27 |
4강, 종말론학설의 역사적변천사 (0) | 2020.11.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