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강해

요한복음강해 32강. (요20장1-31)왜 예수님이 부활하셨는가

변명섭 2021. 10. 25. 13:28

요한복음강해 32강. 왜 예수님이 부활하셨는가? (요20:1-31)

오늘 주님이 주시는 말씀은 요한복음20장1절부터31절까지 지난시간에 이어서 다루었는데 오늘은 그 말씀을 주제로 해서 계속해서 다루겠습니다.

지난시간에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사건을 직접 말씀 속에서 들여다봤는데 이런 모습을 봤습니다. 4복음서는 예수님의 부활을 다양하게 다루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4복음서를 다 읽어야 됩니다. 그 이유는 저자들의 배경과 상황이 달랐고 서술 목적이 달랐기 때문에 부활사건을 다양하게 기술하게 하셨습니다. 그렇지만 공통적인 게 하나 있다면 예수님이 영적으로 부활하신분이 아니고 육적 부활을 하셨다는 겁니다. 그것을 정확하게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또 그 육적부활을 목격한 사람들의 모습들을 이분들의 이름들을 성서에 기록하게 하시고 또 목격한 사람들과 예수님과 대화했던 대화내용들을 소상하게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사건을 의심했습니다. 특히 수제자인 베드로와 요한도 빈 무덤을 확인까지 하고도 의심했던 것을 우리가 알 수가 있습니다. 특히 아주 의심이 많았던 우리 도마께서는 손과 발을 보여 주지 않으면 안 믿겠습니다. 하는 걸 기억나십니까? 예수님께서 이렇게 안 믿도록 당분간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실제로 부활하셨다는 것을 역사적사건으로 또는 실제적사건으로 입증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분이 부활체로 육에서 변형된 겁니다.

부활체로 변형되었을 때 열 가지의 특징이 있습니다. 부활체로써 변형되었을 때 부활체의 열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는 뭐냐면 부활체가 옛 아담을 만들었을 때 창조했을 때 아담의 모습으로 변하지 않았나. 이렇게 우리가 볼 수가 있습니다. 부활 했을 때 우리도 마찬가지로 죽으면 이렇게 된다고 보고 두 번째는 낙원에 올라갔을 때 낙원 사람들의 모습이 부활체의 모습이라고 우리가 추정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세 번째로는 육의 모습과 비슷한 겁니다. 그러니까 얼굴이 우리가 육의 얼굴을 가졌던 그때 얼굴과 비슷하다고 생각해서 네 번째로 그렇기 때문에 서로 알아보고 서로 만질 수도 있고 그렇습니다. 완전히 딴 얼굴이 아니고 다섯 번째로는 공간과 시간을 초월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우리와 차이가 나는 게 공간과 시간을 초월하는 여섯 번로 지금까지는 지난시간과 연계되고 나머지 다섯 가지는 어디에 기록되었냐면 고린도전서15장42절에서49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머지 다섯 가지의 부활체의 모습은 여섯 번째로 부활체의 모습은 섞지 않는다는 겁니다.

일곱 번째로 영광스러운 모습이라는 겁니다. 여덟 번째로는 강한모습이라는 겁니다. 아홉 번째로는 신령한 모습이라는 겁니다. 열 번째로는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이라는 겁니다. 이런 부분을 지난시간에 우리가 다루었습니다.

오늘은 새로운 이슈입니다 우리가 보통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라 이렇게 말하잖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를 중요시하시는 예수님은 부활하셨던 분입니다 우리 의문점이 뭐냐면 예수님이 죽으셨습니다. 죽으신 후에 바로 낙원에 가셔가지고 그곳에 그냥 계시지 뭐하려 우리에게 나타나셔가지고 내가 부활했다. 그냥 계시지 왜 이렇게 하실까 이게 우리의 의문 중에 하나입니다

그냥 계시지 내려오셔서 부활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이런 부분은 어디서 차이가 나느냐면 타종교에서 차이가 납니다. 타종교와 여기서 엄청난 차이가 나는 겁니다. 여러분들 기독론 공부할 때 이 부분을 공부했지만 다시 한 번 확인해보세요. 타종교와 비교를 할 때 불교의 창시자가 누굽니까? 부처입니다 이슬람은 창시자가 마호메트입니다 유교는 누굽니까? 공자입니다 도교는 노자 바벨론종교는 창시자가 누굽니까? 니므롯입니다 힌두교는 소위 신이 많아가지고 모릅니다. 문제는 뭐냐면 이런 모든 세계종교들은 창시자가 있는데 그 창시자들에게는 무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 무덤에 참배 가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기독교는 창시자인 예수님의 무덤이 없는 겁니다. 다른 종교들은 창시자가 부활했다는 이야기는 한 마디도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기독교는 기독교를 만드신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메시지가 기독교의 핵심교리입니다 그러니까 기독교의 핵심교리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거기서만 끝나면 기독교의 교리가 아닙니다. 죽으시고 그다음에 부활했다는 그 부활사건과 연계되었을 때 기독교의 교리입니다 이걸 잊지 마세요 그냥 죽으셨다가 아닙니다. 부활까지 연계 되었을 때 기독교의 교리가 살아나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은 부활에 관한 이야기를 심도 있게 이야기하려고 그럽니다. 제가 여기다가 써놓았지만 부활은 소생이라는 말과 다르다고 예전에 제가 여러 번 말했습니다.

부활은 영어로 레저랙션(resurrection)이라고 그러잖아요. 소생은 영어로 러서시테이션(resucitation)입니다 이걸 구별하시면서 성서에 보면 소생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적어도 네 곳에 나옵니다. 소생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들의 이야기 제가 예를 드리겠습니다. 첫째가 사르밧이라는 두로와 시돈 근방에 있는 조그만 마을인데 사르밧의 과부의 아들이 죽었다가 살아나는 장면입니다 누구에 의해서입니까? 엘리야에 의해서 열왕기상17장8절에서14절입니다. 두 번째로 나인성과부의 아들이 살아나는 장면입니다

누구에 의해서입니까? 예수님에 의해서 나인성과부의 아들이 누가복음7장11절에서16절입니다. 세 번째는 마르다 마리아의 오빠인 나사로가 살아나는 장면입니다 예수님에 의해서 요한복음11장1절에서44절입니다.

네 번째로 바울에 의해서 유도고가 드로아에서 유도고가 바울에 의해서 죽었다가 살아나는 장면이 있습니다. 사도행전20장7절에서12절입니다.

이분들은 부활했습니까? 소생했습니까? 이분들은 소생한 사람들입니다

왜냐면 소생은 특색이 있습니다. 소생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은 같습니다. 그런데 소생을 하면 죽기 전 모습으로 회생하는 겁니다. 다시 말하면 죽기 전 얼굴모습그대로고 주기 전 나이가 그대로입니다 예를 들어서 70세에 죽었으면 그분이 30세 로 소생하는 게 아니고 70세 로 소생하는 겁니다.

죽기 전에 나이로 모습 그대로 그때 만약에 무슨 병이 있었으면 그 병을 안고서 그대로 그러다가 중요한 것은 때가 되면 이분이 다시 죽습니다.

여기서 큰 차이가 있는 겁니다. 아무리 건강해도 죽는 겁니다. 언젠가는 부활은 무엇입니까? 부활은 죽는다는 의미는 같은데 살아나는 의미는 같은데 부활은 살아나는데 부활체로 부활의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는 겁니다.

그래서 그 모습은 아까 제가 말씀드렸습니다. 열 가지의 특성을 가지고 있는 겁니다. 부활체의 모습으로 그러니까 소생하고 차이가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주시는 의문점이 있습니다. 왜 예수님이 부활하셔야만 했는가? 입니다. 이게 큰 제목입니다. 아까 다섯 가지를 주었잖아요.

이것을 우리는 죽을 때까지 묵상하셔야 됩니다. 매일 이 부분을 묵상하느냐를 오늘 제가 가이드 해드리려고 합니다. 이것을 묵상하시면 엄청난 복을 주십니다. 왜 예수님이 부활하셔야만 하는가? 첫째는 뭐냐면 예수님이 본인이 그랬습니다. 내가 부활하신다고 본인이 예언하신 겁니다. 예수님은 신실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거짓말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한번 말씀하시면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이분이 구약과 신약에서 예언하셨습니다. 그러면 구약에서 누구에게 예언 하였냐 이것을 우리가 알 필요가 있습니다. 이분이 구약에서 첫째 아브라함에게 예언하신 겁니다. 이삭을 바칠 때 상징적인 예언입니다

창세기22장2절과4절에서 이삭을 바치는 장면이 예수님이 죽으셨다가

3일 만에 부활하시는 그것을 예표로 보여주신 겁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도 그 예표를 받으신 겁니다. 그게 주전2천년입니다. 두 번째 예표로 다윗에게 주전 천년에 시편16편 스토리를 이것을 다윗에게 주셨습니다. 다윗이 환상을 봤는데 자기모습인줄 알고 딱 보는데 자기모습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분이 죽었다가 몸이 섞지 않고 부활하는 모습을 다윗이 환상으로 본 겁니다. 이것을 보고 이분이 시편16편을 쓴 겁니다. 그리고는 천년이 지나갔습니다. 베드로가 오순절 날에 설교를 하실 때 디아스포라유대인들 앞에서 설교를 하시는 겁니다. 성령님의 기름 부으심을 받고 설교를 하시는데 무슨 설교를 하느냐면 이분이 그러는 겁니다. 디아스포라유대인들이 오순절을 섬기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온 구약성경을 잘 아는 사람들입니다

유대인들에게 그러는 겁니다. 여러분들 당신들 다윗에게 하신 시편16편을 아십니까? 그러니까 전부다 안다는 겁니다. 그때 다윗이 몸이 섞지 않는다고 말한 것 알아요? 그러니까 알아요. 그러는 겁니다. 그것이 다윗이 아니란다.

그러는 겁니다. 그러면서 이것은 누구냐면 지금부터 50일 전에 예루살렘에서 죽었다가 부활하신 예수 이야기란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게 사도행전2장22절에서32절입니다. 그러니까 베드로도 성령님의 기름 부으심을 받으시니까 아하! 시편16편의 말씀이 예수님의 말씀이었구나. 라는 것을 이분이 그것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전에는 이분이 살아나신 예수님도 믿지를 않았던 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성령님의 기름 부으심이 상당히 필요한 겁니다. 이것이 있어야지만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을 듣고 이해하고 내가 그것을 믿을 수가 있습니다. 세 번째 구약의 약속이 뭐냐면 요나입니다 요나는 주전760년분입니다 요나에게도 말씀하셨습니다.

요나가 큰 물고기배속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그 장면 요나서1장17절에 이 사건을 주님께서 요나에게 보여주셨던 겁니다. 요나는 멋도 모르고 한 겁니다.

똑같이 다윗도 마찬가지고 아브라함도 마찬가지고 뜻도 모르고 했습니다.

했는데 나중에 예수님께서 3년 공생애 때 하시는 말씀이 있는 겁니다.

유대인들이 이분에게 우리에게 표적을 보여주세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나는 요나의 표적밖에는 너희들에게 보여줄 것이 없다고 몇 번 말했습니까?

두 번 말했습니다. 요나의 표적은 무엇입니까? 죽었다가 3일 만에 부활하신다는 마태복음12장39절 그다음에 마태복음16장4절에 이렇게 구약에서 몇 번 입니까? 세 번입니다. 이 말씀을 집에서 운전하시면서 기도하시면서 묵상하셔야 됩니다. 말씀을 묵상하시려면 외워야 됩니다. 외우기 전에 뭘 해야 됩니까? 셀 모임에서 토의해야 외워지는 겁니다. 설교만 듣고 가시면 절대로 외울 수가 없습니다. 안 됩니다 자꾸 입으로 말해야 됩니다. 말 안하면 30년을 교회 다녀도 모르는 겁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제가 봐도 답답한데 예수님이 볼 때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그러면서 급할 때는 예수님 날 도와주세요. 날 도와주세요. 예수님께서 사람이라면 아휴! 밥맛없다 그러실 겁니다.

사람이라면 이런 표현이 이상하지만 그분도 인격체시기 때문에 그러니까 그분의 사랑을 받으시고 우리가족들이 잘 되려면 내 소원이 잘 되려면 일단 그분을 항상 묵상하실 때 이분이 잘해줄 겁니다. 그러니까 이분을 묵상하시되 첫째 예수님이 왜 부활하셨나? 그러면 이분이 구약에서 최소한 세 번 아브라함에게 다윗에게 요나에게 부활하신다고 말씀하셨구나. 그것을 묵상하셔야 합니다. 저도 이것을 책을 보면서 하는 게 아닙니다. 주님의 말씀을 제가 읽으면서 저에게 지혜를 주셔가지고 제가 묵상하다보니까 이렇게 정리해서 여러분들에게 드리는 겁니다. 교과서에 나오는 것도 아닙니다.

제가 평소에 묵상하니까 쉽게 여러분들에게 드릴 수가 있는 겁니다.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해야지만 남에게 줄 수가 있잖아요.

입으로만 해가지고 안 되잖아요. 구약에서도 이렇게 예언하셨지만 신약에 와서 예수님께서 직접 네 번 말씀하셨습니다. 부활하실 것을 죽으셨다가 부활하실 것을 네 번을 최소한 직접 하신 말씀이 네 번 되고 또 간접적으로 하신 말씀을 다 합하면 20번 됩니다. 그렇지만 네 번은 예수님이 직접 하신 말씀이기 때문에 꼭 알아놓아야 합니다. 첫째가 뭐냐면 마태복음16장21절 누가복음9장22절이나 같은 이야기입니다 마태복음16장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가이샤라 빌립보로 제자들을 데리고 올라갔다가 물어보는 겁니다.

가이샤라 빌립보는 갈릴리호수에서 한참 올라가는 산동네에서 내려다보시면서 5병2어 사건도 그 밑에서 했거든요 많은 군중들이 있는데서 군중들을 내려다보면서 그러시는 겁니다. 애들아 저 군중들이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이렇게 물어보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베드로가 뭐라고 그랬습니까?

주는 그리스도시여 살아계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마태복음16장16절입니다. 이 말씀을 주욱 하시고는 베드로야 너는 이렇게, 이렇게 해라 베드로를 복 주시는 말씀을 하시고는 그다음에 이 말씀을 끝내시고는 뭐냐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얘들아! 이 때로 부터 지금 예수님의 십자가사건과 3일 만에 부활하신다는 말씀을 처음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21 이 때로 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 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이분이 지금 어디서 말씀하시는 겁니까?

갈릴리 북쪽 산동네에서 말씀하시는 겁니다. 때가 되면 내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데 그러면서 죽임을 당하고 제3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기에 보면 중요한 단어가 있습니다.

must 자기가 이렇게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죽으시고 그다음에 3일 만에 살아나야 될 것을 비로소 말씀하시나니 그런데 영어로 must입니다.

이 말씀이 끝나니까 베드로가 뭐라고 그랬습니까? 주여 그렇게 하지 마옵소서. 그러니까 예수님이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이 말씀의 백그라운드가 이것입니다 그러니까 사탄이 잠깐 베드로의 입을 사용하시는 겁니다.

가장 중요한 이것 때문에 예수님께서 인간으로 오셨잖아요. 이 말씀을 하시고는 마태복음17장22절23절에서 갈릴리지방에서 또 한 말씀이 22 갈릴리에 모일 23 죽임을 당하고 제삼 일에 살아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매우 근심하더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같은 마태복음인데 16장 말씀과17장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는 마태복음20장17절에서19절에 또 마가복음10장32절에서33절에 예수님께서 앞에 두 말씀을 하시고는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해서 예루살렘으로 내려가야 되는 때 길거리에서 17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 하실 때에 열두 제자를 따로 데리시고 길에서 이르시되 18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누가 넘겨줍니까? 가룟 유다가 넘겨줍니다.

예수님이 미리 다 말씀하시는 겁니다. 저희가 죽이기로 결의하고 누가 죽이기로 결정했습니까? 빌라도가 마지막에 결정을 내렸잖아요. 이 때 죽이기로 경의하고 이때는 유대인입니다 그다음에 19절에 보면 그랬습니다.

19 이방인들에게 넘겨주어 그랬습니다. 이방인들에게 넘겨 준 것이 무엇입니까? 제사장 가야바가 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이방인들에게 넘겨주었다는 것은 누구에게 넘겨준 겁니까? 빌라도에게 넘겨준 겁니다.

이걸 예수님이 다 예언하신 겁니다. 이방인들에게 넘겨주어 그를 조롱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나 제삼 일에 살아나리라 예수님을 조롱하며 채찍질 한 것은 이방인들 중에 어떤 사람입니까? 로마 군인들입니다.

이렇게 할 것을 예수님께서 미리 다 예언하시고는 그대로 다 이루시는 겁니다. 재미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재미있다고 하년 큰 일 납니다. 예수님이 죽으시는데 왜 재미있습니까? 그렇지만 이해가 되니까 재미있습니다.

네 번째로 주님이 또 이 부분에 대해서 예언하시는 부분이 누가복음18장31절에서34절 이 말씀은 대단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이걸 언제 말씀하였냐면 이제 십자가에 달리시기 위해서 여리고 가까이 왔을 때 장면입니다

31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선지자들을 통하여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

이 말이 뭡니까? 선지자들을 통하여 기록된 모든 것은 뭐로 생각해야 합니까? 아브라함, 다윗 요나입니다 이 세 개가 이루어지게 하기 위해서 내가 지금 내려간다는 겁니다. 32절에 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겨져 희롱을 당하고 능욕을 당하고 침 뱉음을 당하겠으며 33 그들은 채찍질하고 그를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되 그러는 겁니다. 그런데 그 다음 말이 굉장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34절에 제자들이 이것을 하나도 깨닫지 못하였으니 그 말씀이 감취었으므로 그들이 그 이르신 바를 알지 못하였더라.제자들에게 이렇게 이야기를 여러 번 하셨는데 이 비밀이 제자들에게는 그때까지 감추었다는 겁니다. 제자들이 아무리 알려도 알 길이 없다는 겁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눈을 감겨놓았다는 겁니다. 히든(hidden)이라는 것은 숨겨놓은 겁니다. 숨겨놓았기 때문에 이것은 아무도 알 수가 없고 무슨 말을 해도 이해가 안 된다는 겁니다. 감추었다는 개념을 제가 조금 있다가 자세히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제자들이 언제 감추어 놓은 것을 뚜껑을 열어서 예수님이 보여주었습니까? 이 부활을 믿고 한 것이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40일 동안 제자들을 따라다녔는데도 살아계신 예수님을 믿었는데 부활하신 예수님을 100% 안 믿은 것 같습니다. 40일 동안에 그냥 따라만 다녔던 것 같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 나오지만 신앙생활을 오래하지만 예수님의 부활을 지적으로만 이해하고 논리적으로는 이해하지만 100%믿는 사람은 많지가 않습니다. 부활을 100%믿었다면 예수님을 위해서 목숨까지도 바치게 되어 있습니다. 목숨을 안 바치고 예수님을 위해서 나의 살의 중요한 것을 놓지 않는 사람은 100%믿지 않는 겁니다. 100% 믿으면 사람이 달라집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부활을 왜 하셨냐. 했을 때 여기에 가르쳐주는 게 예언하셨기 때문에 부활하셔야 된다는 겁니다. 이게 첫 번째 조건입니다 두 번째 조건은 뭐냐면 왜 부활하겠다고 예언했느냐 입니다.

이것도 의문점입니다 왜 부활하신다고 그냥 낙원에 올라가버리시지 왜 부활하신다고 예언하셨나. 그것은 목적이 뭐냐면 예수님이 자신의 정체성을 제자들에게 크리스천들에게 증거 시켜주기 위해서 이분이 부활하신 목적은 정체성을 본인이 누구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가 요한복음을 주욱 공부하고 있지만 목적이 그것이 아닙니까? 제자들도 그것을 알아야 되거든요

첫째 예수님이 창조주 되심을 보여주기 위해서 부활하셨습니다.

창조주는 자기 마음대로 죽었다 살았다 마음대로 할 수 있습니다.

창조를 하시는 분이십니다 죽는 것도 본인이 마음대로 하시고 사는 것도 마음대로 하시고 요한복음1장3절에 예수님께서 창조주라 그랬습니다.

골로새서1장16절 히브리서1장12절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뿐입니까?

예수님은 나는 생명이다 그랬습니다. 요한복음11장25절에 14장6절에 보면 예수님이 나는 생명이라는 겁니다. Life가 대문자 L입니다 그러니까 생명의 원천이 예수님이라는 겁니다. 우리는 그분과 붙어있어야지만 영원한 생명을 가집니다. 영원한 생명의 원천이 예수님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I am the Life 생명의 원천이 되시니까 이분이 마음대로 부활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분의 부활을 우리가 묵상하면서 아! 생명의 원천이 되시니까 하시는군요. 창조주가 되시니까 하시는군요. 이것을 깊이 묵상하셔야 합니다.

성경구절까지 외워가면서 그뿐입니까 예수님이 그러는 겁니다.

요한복음11장25절에 나는 부활이다 더 구체적으로 나는 죽었다가 마음대로 살아나는 그러한 존재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나는 생명이요 부활이요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는 요한복음11장27절과 로마서1장4절에 바울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이분이 부활하셨기 때문에 이분은 그리스도시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로마서1장에 바울이 로마 교인들에게 복음이 무엇인지 아느냐 하면서 복음을 설명할 때 이 말씀을 하십니다.

복음이라는 게 딴 게 아니다 예수가 구약의 사람들에게 의해서 인간으로 오셔서 피를 흘릴 것을 이야기했고 피를 흘린 후에 부활하실 것을 예언 했는데 이것이 복음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죽으시는 것만이 아닙니다.

죽으심 플러스 부활 이것이 복음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로마서1장4절에 이렇게 바울이 썼습니다. 4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그러니까 부활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로 곧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로 이렇게 써놓았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이렇게 이야기할 때는 이분이 부활했기 때문에 이렇게 타이틀을 받을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부활이 없이는 도저히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우리가 믿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리스도라는 말이 뭐냐면 메시아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우리가 말하는 부활은 십자가사건과 연계된 가장 중요한 합해져있는 기독교의 복음의 핵심입니다 이렇게 우리에게 이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자기 정체성을 보여주기 위해서 부활하신 겁니다.

첫째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부활을 약속하셨기 때문에 두 번째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자기의정체성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기 위해서 부활하신 겁니다. 세 번째는 부활하신 목적이 성도들도 부활한다는 겁니다.

우리도 부활한다는 겁니다. 예수님께 붙어 있는 사람은 그것을 몸소 우리에게 보여주신 겁니다. 그래서 요한복음11장25절26절에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약속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 하니라 선한 일을 행하는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하는 자는 심판의 부활로 우리 피조물들도 예수님과 똑같이 부활하는데 두 가지 부활이 있는 겁니다.

예수 안에서 영생을 가진 자는 생명의 부활을 하게 되고 예수를 모르는 자들은 심판의 부활을 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부활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에게도 부활이 있다는 것을 몸소 가르쳐주시기 위해서 본인이 부활하신 겁니다. 그래서 이분은 부활의 첫 열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고린도전서15장20절에 첫 모본을 보여 주신 분이십니다 부활의 첫 열매로 바울에게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부활의 두 번째 열매입니다 예수님의 부활하는 것은 우리한데는 엄청나게 고마운 겁니다. 이것을 묵상을 하셔야 합니다. 그냥 머리로만 기억하시고 오늘 집에 가버리면 우리예수님이 섭섭해 하십니다. 이것을 묵상하셔야 합니다.

성도의 부활이라는 것은 이게 무슨 뜻입니까? 우리가 부활한다는 것은 우리가 죽으면 우리의 육이 그냥 땅 속에 조용히 있는 겁니까? 아니잖아요.

우리가 죽는 순간에 어떻게 됩니까? 이미 땅에 묻히기 전에 어떻게 됩니까?

숨을 거두는 순간에 우리는 부활해버리는 겁니다. 우리가 어디로 가는 겁니까? 낙원에 가는 겁니다. 그러니까 부활한다는 개념은 낙원에 간다고 생각하면 되는 겁니다. 이게 굉장히 중요한 개념입니다 부활하다는 개념은 숨을 거두는 그 순간에 우리는 낙원으로 간다는 겁니다. 어떻게 아느냐면 예수님이 강도에게 하신 말씀을 보면 아는 겁니다. 누가복음23장43절에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그랬으니까 예수님도 숨을 거두시는 순간에 어디에 가셨습니까? 낙원에 일단 가셨던 겁니다.

그래서 강도를 데리고 아마 우리주님께서 성부하나님께 소개시켜주었을 수도 있었을 겁니다. 아버지 애가 이런 애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삼위하나님과 잠깐 미팅하시고는 낙원에서 음부로 내려가신 겁니다.

우리 스데반이도 보세요. 사도행전7장54절에서60절에 스데반이도 돌에 얻어맞아서 숨이 거두는 순간에 이분은 벌써 낙원에 올라가서 삼위하나님의 보좌를 보시면서 그쪽과 기도하고 그쪽과 대화를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이분도 숨을 거두시는 순간에 낙원으로 올라가신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부활하셨던 목적 중 하나가 우리에게 낙원에 올라가는 이 사건을 우리에게 약속하셨습니다. 부활을 믿지 않는 사두개인들이 예수님께 질문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럽니다. 모세 때 그랬잖아요. 아들이 일곱 명이 있는데 첫 째아들이 결혼을 해서 아이가 없었고 그리고 죽었습니다. 그러면 모세에 의하면 첫째 아들이 죽으면 둘째 아들이 그 여자와 사는 겁니다. 그러면서 일곱 째까지 내려갔습니다. 그러다가 낙원에 가면 진짜 남편은 누굽니까? 물어보는 장면 있습니다. 마태복음22장23절에서33절입니다. 마가복음12장8절에서27절에도 똑같은 이야기입니다 누가복음20장27절에서40절도 같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실 때 예수님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낙원에 올라가면 천사들과 같이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도 천사와 같은 부활체의 모습들인 겁니다. 예수님이 그러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거기에 올라가면 시집 장가 안 간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해야 될지 모르겠습니다. 부부사이도 거기 올라가면 부부관계가 지금 같은 이런 관계가 아닌 모양입니다 어떤 때는 그럽니다. 여자가 열심인 여자인데 남편은 교회도 잘 안 나오는데 나중에 마누라 치마폭 붙잡고 올라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이 어느 정도 가능한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성서에는 그런 이야기가 구체적으로 안 되어 있어서 우리가 지금 왜 예수님이 부활하셔야만 되는가?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이야기를 했습니다. 네 번째를 보세요.

네 번째는 우리에게 성도들에게 낙원에 믿음과 소망을 넣어주기 위해서 우리가 낙원에 가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제는 신앙생활하면서 낙원에 가는 믿음과 소망을 계속 가지고 있어야 됩니다. 이럴 때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이 사상이 투철했던 겁니다. 고린도전서15장19절에서 부활이야기를 하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이것입니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이 세상의 삶뿐이라면 모든 사람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사람들이라는 겁니다. 이분이 이런 말을 한 이유 중에 하나가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이분은 잠깐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는 모든 것을 희생했습니다. 부귀영화 다 포기하고 복음을 위해서 고통도 감수하고 모욕도 당하고 미움 핍박 투옥도 당하시고 매도 맞으시고 강도의 위험 바다의 위험 거짓형제의 위험 잠도 잘 못자고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이런 걸 하셨다고 고린도후서11장23절에서27절에 말씀하셨습니다. 이분은 이미 고린도후서12장2절에서4절에 보면 이분이 기도 가운데 묵상가운데 3층천에 올라갔다가 그곳을 이분이 낙원이라고 말했습니다. 4절에 보면 낙원이 올라갔다가 내려왔다가 이것을 하면서 이분은 죽은 후에 저쪽에 갈 것을 다 아신 겁니다.

아시니까 이분은 이 사건을 이분은 기록하시면서 우리는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이 아니고 살고 있지만 우리는 언젠가는 저 동네에 간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기 때문에 이 모든 어려움을 이길 수 있었던 겁니다. 이것은 왜 그렸습니까? 예수님이 먼저 모본을 보여주신 겁니다. 이분이 부활하셔가지고 낙원으로 올라가셨거든요 그러면서 너희들이 나한데 붙어 있기 때문에 너희들도 이렇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셨고 실제로 바울 같은 사람들에게 아예 눈으로 영의 눈을 뜨고 보여주셨던 겁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이 세상을 그런 시각으로 살았던 겁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너희들 이것 봤지 너희들 이걸 모르는 사람들에게 나가서 전하라는 겁니다. 그것이 제자들의 모습입니다

전해라는 겁니다. 바울은 그랬잖아요. 그분의 편지내용을 보면 이 말씀을 하시면서 낙원에 가면 거기가 공산나라처럼 계급이 없는 나라처럼 지금은 공산나라가 계급이 더 많지만 그게 아니고 이 나라는 계급이 있는 나라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분의 편지 속에는 일곱 가지의 면류관을 이야기합니다.

낙원에 가면 낙원은 계급사회다 일곱 가지 면류관은 기쁨의 면류관 데살로니가전서2장18절 빌립보서4장1절 두 번째는 생명의 면류관 야고보서1장12절 계시록2장10절 세 번째는 섞지 않는 면류관 고린도전서9장25절 바울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네 번째는 영광의 면류관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베드로전서5장4절 다섯 번째 바울에게 하신 말씀으로 의의 면류관 디모데후서4장8절 그리고 요한에게 보여주신 두 가지 면류관이 금 면류관 계시록4장4절 계시록14장14절 일곱 번째로 열두 별의 면류관 계시록12장1절 이렇게 바울과 야고보와 베드로에게 요한에게 낙원이라는 저곳은 계급사회라는 겁니다. 제 방에도 디모데후서4장8절에 의의 면류관이 붙어 있는데 바울이 순교직전에 하신 아주 멋있는 말씀입니다. 7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 니라

이렇게 네 가지로 예수님의 부활하신 결과로 왜 부활하셨나? 여기에서 네 가지로 우리에게 가르쳐주셨는데 마지막으로 가르쳐주시는 게 뭐냐면 성도의 성화를 위해서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겁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성화를 해야 되는데 그것을 바울과 베드로에게 가르쳐주었습니다.

부활의 사건을 더 영성 화시키는 그것을 바울에게 베드로에게 가르쳐주었습니다. 바울에게는 로마서6장3절에서11절에 하신 말씀입니다 뭐라고 하느냐면 성도는 예수님과 연합된 자라는 겁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이 성도의 쓴 뿌리 옛 성품이 죽은 것과 비교했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이 성도들의 쓴 뿌리 옛 성품이 죽은 것과 비교해서 그러다가 땅 밑으로 내려가는 겁니다.

그것을 세례로 물로 씻김을 받는다는 겁니다. 그랬다가 장사되었다는 겁니다. 물속에서 씻김을 받았다는 겁니다. 그래놓고는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겁니다. 물속에서 다시 올라왔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연합된 사람은 옛 성품이 죽었다가 부활한다는 겁니다. 다시 말하면 옛 성품이 부활한다는 말은 옛 성품이 없어지고 씻김을 당해가지고 새롭게 성화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런 의미에서 부활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부활한다는 것은 죽었다가 옛 성품이 말씀 속에서 성령의 기름부음을 통해서 죽었다가 새롭게 나타나는 성화된 사람으로 되는 그러한 내용을 가지고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바울이 설명을 했습니다.

이뿐 아니라 베드로에게도 베드로전서3장21절에 똑같은 내용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궁극적으로 예수님이 부활을 왜 하셨습니까?

이야기할 때 아하! 우리가 낙원에 가는 소망과 믿음을 가지기 위해서 그다음에 부활사건은 우리에게 예수님을 닮아가는 성화의 삶을 살기 위해서 우리에게 부활을 가르쳐주셨구나. 라고 묵상하시길 바랍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 부활하신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저 나라에 소망을 가지면서 그리고 온전한 성화된 크리스천이 되기 위한 하나의 주님의 뜻이 그기에 담겨 있는 겁니다. 여기까지 말씀을 제가 드리고 여기에 연계해서 몇 가지 중요한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제자들이 나중에 예수님의 부활을 완전히 깨달은 후에 그분들이 나가서 전할 때 제자들이 전했던 메시지가 무엇이냐면 이 다섯 가지의 메시지였습니다. 제자들이 전했던 부활의 메시지가 죽었다가 살아나셨다 이게 아닙니다. 제자들의 메시지가 성서에서 제자들이 쓴 글을 읽어보면 제가 지금 말씀드리는 다섯 가지 그렇기 때문에 이 다섯 가지를 체계적으로 외우시고 묵상하셔야 합니다. 첫째 다섯 가지가 예수님이 왜 부활하셨나. 부활한다고 본인이 예언하셨다는 겁니다. 그다음에 부활의 목적이 자신의 정체성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기 위해서 그러니까 기독론을 가르쳐주기 위해서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정체성을 강하게 예수님의 제자들이 이야기하다가 다 목이 잘렸습니다. 이 정체성을 이야기하다가 왜냐면 유대인들은 왜 싫어합니까? 이것은 신성목독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다 목이 잘린 겁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정체성을 강하게 이야기하는 자가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이것을 이야기하지 않는 자는 제자가 아닙니다. 그냥 알고만 있는 것 하고는 다릅니다. 이것을 이야기하는 바울은 제자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이 문제를 가지고 사도행전17장18절에 보면 아덴에 있는 스토아철학자들과 이 문제를 가지고 논쟁을 했습니다. 그뿐입니까? 사도행전23장6절에 보면 바울이 산헤드린 예루살렘의 공의회 앞에서 이 문제를 놓고서 그분들과 논쟁을 하고 그것 때문에 바울이 심문을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 생활하는 우리들은 예수님의 정체성을 이야기하면서 핍박을 각오하고 그것을 이야기해야 됩니다. 그것을 이야기하고 핍박을 받을 때 우리는 제자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를 믿으면 나중에 낙원에 간다는 것을 예수님의 부활사건을 통해서 이런 것이 우리에게 획인 되었다고 하면서 외치며 가르쳤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왜 예수님이 부활하셨나. 그분의 부활 때문에 우리는 낙원 간단다. 그것을 외치고 가르쳐야 됩니다. 우리는 그렇기 때문에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낙원에 믿음과 소망이 있단다. 이것을 외치며 가르치는 겁니다. 또 낙원은 계급사회라는 것을 외치고 가르쳐야 됩니다.

부활을 왜 하셨나. 우리보고 성화의 삶을 살라고 바울과 베드로를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쳤단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 부활의 사건은 우리에게 이렇게 온전한 크리스천이 되라고 가르쳤단다. 이렇게 외쳐야 됩니다.

이 다섯 가지를 그러니까 묵상을 하시면서 이것을 외쳐야 되는 겁니다.

안 그러면 제자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 당시에도 그랬고 제자를 선택할 때 조건이 있었습니다. 가룟 유다가 떨어져 나간 후에 가룟 유다를 대신해서 제자를 뽑는 장면입니다 사도행전1장22절에 장면을 보시면 정확하게 나옵니다. 후보를 뽑는데 두 사람을 선정해서 한 사람을 제비로 뽑는데 그기에 보면 조건이 있습니다. 뭐냐면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는 사람으로 그러니까 열두제자는 아니지만 항상 예수님과 함께 다니면서 훈련 받은 사람으로 지나가는 아무나 뽑는 게 아닙니다. 똑같이 우리 AMI사역도 우리와 같이 말씀공부하고 같이 헌신하고 같이 하는 사람을 뽑는 겁니다.

주님께서 괜찮다고 아무나 데리고 오는 게 아닙니다. 비전이 같아야 되는 겁니다.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와 더불어 예수께서 부활하심을 증언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 하거늘 그러니까 우리가 누굽니까? 열한제자들입니다 열한제자들도 무엇을 하려고 불리 움을 받았습니까?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 하려고 불리 움을 받았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부활이라는 뜻이 무엇입니까? 다섯 가지를 외치기 위해서 가르치기 위해서 불리 움을 받았는데 한 사람의 후보도 어떤 사람이냐면 이것을 하는 사람을 우리가 뽑아야 된다는 겁니다. 이걸 하려면 위험부담이 따라와야 되는 겁니다. 신성모독이라고 덤벼들 텐데 주류사회에서 핍박을 당할 텐데 주류사회에서 소외당하고 미움 당하고 사형까지 받을 텐데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각오한 사람을 뽑는 겁니다. 1세기초대교회 교부들이 예수님부활메시지를 전하다가 순교당한 분들의 이름들을 제가 드리겠습니다.

이게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우리도 이 이름 속에 들어가야 됩니다.

안 들어가고 그냥 데이터로 전해주세요. 정보만 주세요. 할 수 없습니다.

첫째 열두제자들입니다. 이분들의 메시지가 다 예수님의 부활 다섯 가지를 외치다가 이분들이 어떻게 된지 아세요. 도마는 인도에서 창에 맞아서 죽었습니다. 두 번째 마태는 에티오피아에서 살해당했습니다. 마가는 알렉산드리아에서 마차에 끌려 죽음을 당했습니다. 요한은 에베소에서 기름 가마 속에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안드레는 스키티아라고 흑해연안에 있는 남 소련 쪽에서 십자가에 달려서 죽었습니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는 스페인에서 목 베임을 당했습니다. 세베데의 아들 야고보는 예루살렘에서 헤롯에게 목 베임을 당했습니다. 첫 순교자였습니다. 베드로는 로마에서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었습니다.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는 예루살렘에서 매 맞아 죽었습니다. 맛디아는 예루살렘에서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바돌로메는 아르메니아에서 산채로 가죽이 벗김을 당하여 죽었습니다.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누가는 목 베임을 당했습니다. 빌립은 십자가에 달려서 매 맞아 죽었습니다. 바울은 목 베임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분들은 어떻게 죽었는지 기록이 없습니다. 바나바, 두기고, 디모데, 누가, 실라, 브리스길라, 아굴라, 루디아, 에바브로디도, 구레네 시몬, 보네시보로, 뵈베 자매 이런 모든 사람들 다 어려움을 당하고 죽었습니다. 왜냐면 이분들은 무슨 소망이 있었습니까? 낙원에 소망이 있었습니다. 낙원을 봤기 때문입니다 이그나티우스라고 있었습니다. 67년에서110년분인데 이분은 요한의 제자입니다 이분은 안디옥교회의 감독이었습니다. 이분은 로마에서 사자에게 잡아 매김을 당했습니다.

또 폴리캅이라는 사람은 70년에서120년의 사람인데 이분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서 배운 최후의 제자입니다 이분은 서머나 교회의 감독이었습니다.

이분은 서머나에 있는 야외극장에서 장작불에 태워서 순교를 당했습니다.

그다음에 저스틴 마터라고 100년에서166년의 분인데 이분은 변증 가입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변증적으로 예수님의 신성을 변증적으로 외쳤던 사람입니다 아주 유명한 사람입니다 이 사람도 예수님 때문에 목이 잘렸습니다.

그 외에도 테두리안, 이레니우스, 오리겐, 카타콤 크리스천들 이 모든 사람들이 다 이렇게 낙원에 소망을 가지고 죽임을 당했던 사람들이고 거기에서 상당히 높은 위치에 있음을 우리가 알 수가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제자라면 우리의 사명이 무엇일까요 우리도 죽음을 각오하고 부활의 가르침을 소화하고 묵상하고 생활화하고 가르치고 순종해야 합니다. 저도는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가르치고 순종하는 일을 지금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부활은 이 다섯 가지 내용을 들여다보면 뭐가 들어 있느냐면 예수님의 기독론이 들어 있고 두 번째는 성화론이 들어 있고 그다음에는 선교론이 들어 있습니다. 기독론은 알아야 되고 내가 성화되어야 되고 사람이 변해야 되고 그다음에 이것을 내 민족과 타민족에게 가르쳐주어야 됩니다. 여기에는 항상 핍박과 미움과 소외와 비난과 저주까지 따라오게 되어 있는 겁니다.

이단들이라는 게 뭐냐면 여러 가지로 해석되지만 이단들이라는 것은 이 부분에 대해서 색깔을 변하게 하는 사람들을 이단들이라고 합니다.

지금 이 다섯 가지 부분에 대해서 첫째 우리가 알다시피 1세기 때는 이단들이 에비오니즘이라고 있었습니다. 에비오니즘이 예수님의 무엇을 부인하는 자들입니까?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하는 자들입니다 갈라디아 교회에 있었다고 그랬습니다. 4세기 때는 신성을 부인하는 그룹이 아리아니즘 그 후부터 시작해서 주욱 나가다가 마지막 때 되면 무슨 주의가 강하게 있습니까?

종교다원주의입니다 이런 모든 부분들은 예수님의 부활 이 부분의 다섯 가지 부분의 색깔을 변화시키거나 희미하게 만들거나 이렇게 만들어 놓는 겁니다. 오늘날 소위 자유주의입니다 또는 진보주의입니다 종교다원주의 이 사람들이 공격하는 공격의 최대의 무기가 뭐냐면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하면서 거기에 따라서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하다보면 뭐가 나오느냐면 예수님의 육의 부활을 부인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육의 부활을 그런데도 이분들은 소위 크리스천들입니다 그런데도 말은 기독교의 언어를 씁니다. 부활절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니까 조심해서 보셔야 합니다. 부활절에 아무데나 가면 안 됩니다. 대부분의 많은 기독교인들이 대다수의 기독교인들이 여기에 빠져버렸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어떤 식으로 이야기하느냐면 영의 부활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육의 부활은 아니라는 겁니다. 어떻게 사람이 부활할 수 있느냐 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이성으로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분의 영이 부활한 것이라 믿는 겁니다. 또는 어떤 느낌이 있느냐면 그분의 정신이 부활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정신(Spirit)이 부활했다는 겁니다. 이분의 정신(Spirit)이 부활했다는 것은 이분의 사상이 부활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불쌍한 사람 도와주고 의를 위해서 나중에 목숨까지 바치는 이런 멋있는 분 병자도 고쳐주고 과부도 사랑해주고 이분의 사상이 부활했다는 겁니다. 실제로 그분이 부활한 것이 아니고 그분의 가르침이 사상 가르침 그분의 삶의 모습 이분의 세계관 가치관 이것이 부활해가지고 우리와 함께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한다

부활을 이야기하는 말은 이런 걸 이야기하는 겁니다. 혼돈스럽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예수님의 부활이 아닌 겁니다.

나중에 예수님께서 재림해 오신다고 이런 사상이 재림해 오신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육적으로 여기에 재림해 오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런 분들은 우리가 죽으면 어떻게 되느냐면 우리가 죽으면 낙원에 간다고 그러잖아요.

이분들의 개념은 뭐냐면 죽으면 여러 가지로 의미로 말합니다. 여러 가지 학설들이 있습니다. 죽으면 우리는 그냥 무의식상태로 된다고 믿는 크리스천들이 많습니다. 그냥 무의식상태로 있다가 나중에 천년왕국이 끝나면 낙원으로 갈 수 있다고 보는데 그 낙원의 개념도 우리가 생각하는 낙원이 아닌 게 많습니다. 이 낙원의 개념이 뭐냐면 진보주의자들은 다원주의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유주의자들은 낙원을 이 세상이 낙원이라는 겁니다. 물리적인 이 세상 이 세상이 변한다는 겁니다. 변해서 사람이 살기 좋게 만든다는 겁니다. 이런 의미의 낙원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그러니까 이 세상을 변화시키고 사람들이 살게끔 잘 만들어놓고 녹색운동을 해야 되고 이런 부분으로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 기독교인의 사명이라는 겁니다.

어떤 분들은 이 세상을 그냥 물리적인 개념이 아니고 상징적 비 물리적 개념으로 이야기합니다. 철학 속에서는 신학이 철학과 연계되어 있거든요

그러니까 이념적 낙원입니다. 제가 여러분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이념적 낙원이 아닙니다. 어떤 낙원입니까? 이게 영적이지만 물리적인 낙원입니다

실체가 있는 그러니까 보세요. 바울이 가지고 있었던 부활신앙은 무엇이었습니까? 고린도전서15장13절에서부터19절입니다. 바울이 가지고 있었던 부활신앙입니다. 그분의 부활신앙을 고백하는 겁니다. 왜냐면 이미 바울세대에도 고린도에 지식인들이 많이 살았거든요 고린도 안에 이미 이런 크리스천들도 있었던 겁니다. 이념적인 낙원 또는 예수님의 부활은 하나의 상징적으로 부활이지 실제로 부활하신 것이 아니라는 그러니까 우리도 그렇게 부활할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런 학설들이 바울의 제자들 중에서도 많았던 겁니다.

바울이 제자 화시켜놓고 떠나버리니까 바울이 떠난 후에 그런 소문들이 많이 돌아서 그것을 가르쳐주려고 고린도전서를 쓴 겁니다. 15장13절에서19절에 보면 바울이 하시는 말씀을 보면 우리가 하고 싶은 말이 그기에 다 있습니다. 뭐냐면 13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리라 14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바울이 전파한 내용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의 육신의 부활입니다. 그다음에 너희 믿음도 헛것이라는 겁니다. 왜냐면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는데 무슨 낙원이냐 그런 믿음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부활 때문에 낙원의 믿음이 있었는데 너희들이 부활이 만약에 없다고 그러면 다 헛것이라는 겁니다. 그것뿐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거짓 증인이 되고 너희 믿음도 헛것이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겠다고 15절부터17절에 써놓았습니다. 그리고 18절에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예수 믿고 죽은 자들은 그 사람들은 낙원이 있는데 만약에 여러분들이 부활을 믿지 않는 다면 그분들은 지금 낙원에 있지 않고 그분들은 망하리라 그랬잖아요. 망하라는 것은 멸망으로 이분들은 낙원에 있지 않고 음부나 저런데 가 있을 거라는 겁니다. 만약에 예수님의 부활이 없다면 그다음에 예수님의 낙원행이 없었더라면 그러면서 이분이 아까 말씀드린 데로 19절에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이제 마지막 결론으로 들어가는데 지금부터 잘 들으시길 바랍니다. 지금부터 모든 정보들이 어떻게 우리와 연계되어 있느냐 지난 2천년 동안에 많은 크리스천들이 부활신앙을 부분적으로 믿거나 부분적으로 깨달았습니다. 다섯 가지의 이 부분을 100% 소화를 못했습니다. 특히 소위 신학자들 사이에서 이 다섯 가지 부분 때문에

서로 논쟁하고 다투고 원수시하고 분리하고 정죄하고 이랬습니다.

그 싸움이 기독교의 역사입니다 소위 마지막 때 신학계를 보면 이 싸움이 엄청나게 더 심합니다. 지금 이 부분에서 그래서 이것을 반대하는 예수님의 육적인 부활을 반대하는 이 사람들은 낙원에 관한 개념도 아까 말씀드린 대로 믿지 않는 사람들도 박사들도 많고 목사들도 많고 신학자들도 많고 굉장히 많습니다. 그 숫자가 더 많습니다. 복음주의사람들 보다 이분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으면서 몇 가지 학설들을 우리가 ABA에서 공부했을 겁니다. 첫째 가 이분들이 생각하는 게 뭐냐면 예수님이 죽으셨을 때 이분이 진짜 죽지 않았다는 겁니다. 기절 론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도 얻어맞아서 기절하셨다는 겁니다. 그래가지고 어느 정도 정신 차리시고는 무덤에서 나와서 도망가셨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 무덤이 비었다는 겁니다.

이걸 기절 론이라 그럽니다. 두 번째 학설이 뭐냐면 착각 론입니다

착시라고 할까요. 착시 착각입니다 뭐냐면 무덤에 찾아갔던 분들이 누굽니까? 막달라 마리아 수잔나 마리아 살로메 등 많이 갔잖아요. 그 여자들만이 아니고 베드로와 요한이 갔잖아요. 갔는데 이분들이 너무나 흥분해가지고 예수님의 몸이 거기에 있었는데도 너무 흥분해가지고 착각을 해서 없어진 걸로 보았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부활한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죽은 몸이 거기그냥 있었다는 겁니다. 부활한 것도 아니고 착각을 했다는 겁니다. 이러누 학설도 있습니다. 이런 학설을 주장하는 분들은 누군지 몰라도 음부에 가서 엄청나게 두들겨 맞을 것 같습니다. 세 번째 학설은 뭐가 있느냐면 사람이 머리를 굴리는 겁니다. 예수님이 죽으셨는데 부활한 게 아니고 죽으신 그 몸을 누가 도둑질해갔다는 겁니다. 무덤이 비어있는 이유가 누가 도둑질해갔다는 겁니다. 이 학설은 누가 만든 겁니까? 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높은 바리새인들이 만들어낸 학설입니다 그런데 그 학설을 만들면서 누가 퍼뜨렸습니까? 로마 군인들이 퍼뜨렸습니다. 돈을 많이 받고 뇌물을 많이 받고 이 학설이 상당히 많았던 겁니다. 누가 훔쳐갔다는 학설이 네 번째 학설은 무슨 학설이냐면 이 여자들이나 또 베드로나 요한이나 찾아 봤는데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간 게 제대로 찾아간 게 아니고 다른 무덤을 찾아가가지고 예수님이 없어졌다는 겁니다. 이렇게 해가지고 이 학설을 많이 퍼뜨려서 지금 세계적으로 이 학설들을 굉장히 유명하고 이 학설을 믿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우리주변에는 그런 사람들이 별로 안 보이니까 여러분들은 예수 믿으면 전부다 우리처럼 믿는다. 아닙니다. 우리처럼 믿는 사람은 아주 소수입니다 심지어는 복음주의신학자들 중에서도 이런 부분에서 동의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신학교라 그래서 가서 복음주의신학교라 그래서 가서 있다가 교수라는 그 양반들이 하는 말을 보면 가관인 게 많습니다.

마지막 때 특히 이게 심합니다. 그러니까 이걸 듣는 학생들이나 목사들이 이걸 듣고는 흔들리는 겁니다. 지금 우리가 이런 때 살고 있습니다.

이런 때 살고 있을 때 정통 예수님의 다섯 가지를 외치는 자들을 그 사람들을 뭐라고 부릅니까? 너희들은 극우파들이다 또 너희들은 비이성주의자들이다 어떻게 똑똑한 사람들이 그렇게 이성을 잃어버렸느냐 그러는 겁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너 네들은 광신자들이라고 매도하는 겁니다. 이 숫자는 소수입니다 이 광신자그룹에 들어가는 사람은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도 광신자그룹에 들어가는 사람입니다 여러분들은 어쩌다가 광신자그룹에 들어가는 사람 밑에서 말씀을 배우고 있는 겁니다. 극우파들입니다

유럽에 가서 보면 유럽에 크리스천들 그의99%가 전부다 자유주의사람들입니다 미국가도 마찬가지입니다 미국가도 소위 광신자그룹의 크리스천들은 고작10%입니다. 우리처럼 이야기하는 사람은 캐나다도 마찬가지입니다

오스트리아 똑같습니다. 백인사회는 10%될까 말까입니다 나머지 80-90%는 다 이런 식으로 믿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깔려 있는 겁니다.

서구만이 아닙니다. 선교지에 나가면 제3세계에 목사들 신학자들이 서구사람들의 영향을 받아가지고 그쪽에 신학공부를 하다 보니까 그런 사람이 깔려 있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가서 외치는 게 그게 아니라고 외치려 다니는 겁니다. 이번에 아프리카에 가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프리카도 이 세력이 엄청나게 큽니다. 그게 아니라고 외치는 겁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저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하셔야 되는 겁니다. 그것도 그냥 아니다가 아닙니다,

논리적으로 설명해주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저에게 논리를 주님이 주셔야 합니다. 그 머리를 주셔야 합니다. 그리고는 파워를 주셔야 합니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납니까?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날까요? 왜 소수만 예수님의 부활의 다섯 가지를 완전히 이해하고 거기에 감격하고 그 예수를 전하려고 열심히 돌아다니고 왜 그럴까요? 왜 다수는 안 그럴까요? 그 대답은 예수님이 미리 하셨습니다. 아까 누가복음18장31절에서34절에 예수님이 제자들이 이것을 깨닫지 못하도록 감추었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감추었다는 겁니다. 감추었다는 것은 뚜껑을 닫아 놓았다는 겁니다. 이분들이 언제 완전히 깨달았습니까? 오순절 다락방사건 이후에 이것을 완전히 깨달은 겁니다.

뚜껑을 열어주는데도 대부분의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어 놓았습니다. 그리고는 일부는 애꾸로 만들거나 안 그러면 약간 보여 주거나 하지 완전히 오픈해서 주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바울도 이것을 깨닫고 뭐라고 그랬냐면 이것은 그리스도의 신비라 그랬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마태복음13장10절에서17절을 보시면 마태복음13장은 하나님나라는 이런 거라면서 일곱 가지의 비유를 드시는 이야기입니다 씨 뿌리는 비유, 가라지의 비유, 겨자씨비유, 누룩에 관한 비유, 감추인 보화에 관한 비유, 값진 진주에 관한 비유, 고기 잡는 그물에 관한 비유로 천국은 이렇다면서 서론적으로 제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이 13장10절에서17절에서 하시는 말씀이 10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어찌하여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왜 일곱 가지 비유로 말씀하십니까?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11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되었나니 그 당시에 일반유대인들이나 바리새인들 사두 개인들에게는 아니 되었나니 12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다시 말하면 뚜껑을 열어서 이 비밀을 아는 사람들에게는 더 많은 것을 비밀로 주고 눈이 감긴 사람에게는 안 준다는 겁니다. 그 사람들 것까지 빼앗아서 이쪽에 주겠다는 겁니다. 13 그러므로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기는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그러면서 내가 이것을 14절에 그랬습니다. 이사야의 예언하셨다는 겁니다. 700년 전에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사야서6장9절 말씀을 인용하시는 겁니다.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내가 저 사람들 뚜껑을 닫아 놓았는데 저 사람들 못 보게 해놓았는데 혹시나 볼까봐 내가 신경이 쓰인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것을 깨닫는 사람은 이게 소수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을 우리의 이성으로 해결이 안 되는 겁니다. 그래서 바울도 미스터리라는 겁니다. 이성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사람은 목사님같이 똑똑한 분이 왜 이런 걸 가지고 이야기하십니까? 비이성적인 이야기를 합니까? 그럽니다.

저도 모릅니다. 이것을 가지고 나에게 자꾸 덤벼드는 사람은 어떻게 할 수 없는 겁니다. 주님이 은혜를 주어야지만 이것을 이해하고 이것을 받아줍니다

은혜를 받지 않으면 이게 안 되는 겁니다. 제가 이렇게 전하다 보면 이런 시각을 가지도록 주님이 은혜를 주어야만 됩니다. 우리AMI사람들은 이런 은혜를 받은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와서 앉아있습니다. 이게 설교가 30분짜리 설교가 아니잖아요. 지금 몇 시 입니까? 1시가 지났습니다. 이렇게 긴 설교를 듣고서도 그러는 겁니다. 목사님 시간이 근방 지나가네요. 그러는 겁니다.

속으로 아하! 이분들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구나. 지금 예수님의 이 부활의 이 메시지 다섯 가지 메시지를 이게 내가 은혜를 받으니까 이것이 이해가 되고 이걸 내가 수긍할 수 있지 이것은 내가 운이 좋아서도 아니고 똑똑해서도 아니고 잘난 것도 아니고 열심 낸 것도 아니고 황 목사가 잘 가르쳐서도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셔서 우리주변에는 우리보다 똑똑한 사람들도 많고 열심 있는 사람들도 많고 교육 많이 받고 예수님 오래 믿고 교회생활 열심히 하고 신학훈련도 받고 목사가 되고 어떤 사람은 선교사가 되고 안수집사가 되고 권사가 되고 장로가 되고 전도사가 되고 대학교수가 되고 신학교수가 되고 이랬는데 이 부분을 완전히 믿지를 못하는 사람들이 꽤 되는 겁니다. 그래가지고 하나하나 따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걸 어떻게 해석을 해주어야 합니까? 그러면 저는 이렇게 해석을 합니다.

주님이 이분에게 지금은 은혜를 안 베푸셨지만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제자들도 처음에는 이 은혜가 없었잖아요. 뚜껑을 닫았다고 그랬잖아요.

나중에 때가 되니까 이분들에게 예수님이 은혜를 베푸셨듯이 이런 분들에게도 우리교회도 분명히 그런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주님이 제자들에게 나중에 뚜껑을 여셨듯이 뚜껑을 여셔서 이분들에게 언젠가는 가르쳐주십시오. 그러기 위해서는 이분들을 위해서 뒤에서 중보해주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이걸 가지고 논리적으로 서로 싸움할 필요가 없는 겁니다.

또 어떤 사람은 이런 사람이 있습니다. 절대적으로 변화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은혜가 안 들어가는 사람들 그런데 이 은혜도 나중에 알고 보니까?

태어나기 전에 창세전에 이 은혜를 준비하셨다 그랬습니다. 우리가 말씀 속에서 봤잖아요. 그러니까 이게 미스터리인 겁니다. 저 사람은 나보다도 똑똑하고 저 사람은 나보다도 교육을 많이 받았는데 이게 안 먹혀 들어가면 저 사람은 창세전에 이게 준비가 안 된 모양이죠. 이렇게 까지도 생각할 수가 있을 겁니다. 있을 수도 있다는 겁니다. 그러나 나중에 변화를 받아가지고 바울같이 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지만 그렇기 때문에 이런 모든 사건들 가지고 우리가 서로 다투거나 싸움하거나 정죄하거나 그러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대로 언젠가는 주님이 저 사람을 깨닫게 하시겠지 만약에 주님이 은혜를 베푸시기로 결단하셨다면 예정하셨다면 만약에 아니면 주님! 저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이렇게 밖에 대답이 안 나오는 겁니다.

우리는 이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이것은 내가 잘나서가 아니고 주님이 주신 은혜이기에 매일 다섯 가지를 외우고 묵상하고 매일매일 외우고 그러면 주님이 나에게 은혜를 더 베푸셔서 영성을 더 발전시킬 겁니다.

영계가 얼마나 큽니까? 얼마나 무지무지 하잖습니까? 부피와 넓이와 높이와 길이와 이것을 잔뜩 주시는 겁니다. 주시니까 더 영계 속에 들어가는 겁니다. 그런 사람들은 딱 보면 얼굴에 나타납니다. 우리교회교인들을 보면 다들 자기나이보다 더 젊게 보입니다. 이 영계 속에 들어가니까 다들 평화스럽게 보이고 지금 60대 된 우리교회 어른들 보면 모두다 얼굴들이 훤하게 보입니다. 왜 그럴까요. 영계 속에 들어가니까 그렇습니다.

기도드리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우리 피조물들은 너무나 피조물로써 한계성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자칫 피조물들이 자기의 이성을가지고 그 이성 자체도 하나님이 주신 것인데 하나님의 너무나, 너무나 광대한 마음을 이해하려고 하는 경우 그러한 우를 범할 때가 있습니다. 어느 정도는 그것이 가능하지만 한계가 있음을 고백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서원합니다. 그러기에 바울도 이 부분에서 손을 드신 모습을 보면서 이것은 그리스도의 신비라고 고백했던 그 모습대로 그분의 겸손함을 우리가 보았습니다. 예수님! 예수님도 분명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는 그 목적은 이 신비가 너무나, 너무나 광대하기에 너희들이 그것을 소화하지 못한다. 그러니까 내가 비유로 말한다고 하신 것처럼 우리가 겸손히 주님의 크심을 다시 한 번 마음속에 되새기면서 또 묵상하면서 또 되새기면서 내 것으로 만들어 주변의 형제자매들에게 하늘의 이 비밀을 나누는 우리 모두가 되도록 은혜 베풀어주시옵소서.

이렇게 할 때마다 나의 영성이 점점 더 깊어지고 넓어지고 높아지고 길어져서 주님을 만날 때 그 감격이 얼마나 큰 가를 생각을 하며 우리가 더 영이 커지기를 기대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주님! 여기 앉아있는 주님의 자녀들 한분 한분에게 이 은혜를 만들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