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강해

29강. 요한복음18장1절-2절, 겟세마네기도

변명섭 2021. 10. 14. 06:00

요한복음강해 29강. 겟세마네 기도(요18:1-2)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한복음강해 스물아홉 번째 말씀을 주십니다.

오늘도 말씀이 조금 까다로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잘 들으시면 능히 소화하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를 위해서 제가 천천히 말을 하겠습니다.

지난시간에 말씀을 잠깐 한번 리뷰를 해야 되겠습니다 지난시간에 주님께서 요한복음17장에서 제자들과 또 그 제자들을 통해서 제자 될 사람들을 통해서 기도하시는 장면이 있습니다. 기도 장면에서 네 가지의 패턴이 있었는데 첫째는 예수님이 기도하시면서 제자들의 정체성을 확인하시고 두 번째는 이제 떠날 준비가 되었다고 피력하시고 또 세 번째는 제자들을 걱정하시고 왜냐면 이 세상이 악하고 제자들이 이 세상에 속해 있지 않고 또 이 세상이 제자들을 미워하기 때문에 예수님이 걱정하셨다 하셨습니다.

그러시면서 제자들을 향해서 중보기도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중보기도를 세 부분을 통해서 하셨습니다. 첫째는 세상의 악에 빠지지 않도록 제자들을 위해서 중보하시고 두 번째는 이들의 말씀이 진리로써 거룩하게 되기를 위해서 중보 하셨습니다. 세 번째는 이렇게 됨으로써 예수님 안에서 서로 하나 되기를 위해서 중보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저들이 하나가 되는데 일반적인 세상적인 하나가 아니고 삼위하나님이 하나인 것처럼 예수님이 그랬습니다. 우리가 아버지와 저와 하나인 것처럼 저들도 하나가 되게 하십시오. 이 말은 뭐냐면 저들이 본질적으로 이제 DNA가 같아진 겁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에 그렇지만 삼위하나님이 기능적으로 차이가 있듯이 우리크리스천들도 본질적으로 하나지만 기능적으로 다 다르다는 겁니다. 문화가 다르고 언어가 다르고 교육수준이 다르고 가정환경이 다르고 수입이 다르고 직업이 다르고 다 다른데서 서로가 다양 속에서 하나가 되라는 겁니다. 이것을 잘 하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삼위하나님이 서로가 서로를 높이셨다고 그랬습니다. 서로가 같은 파워를 가지고 계신 분들이고 같은 하나님이신데 서로가 높이시고 서로가 서로를 증거 하시고 칭찬해주시고 서로 그랬다는 겁니다. 서로가 똑같이 크리스천들도 특히 제자들은 이렇게 서로 다르지만 하나님께서 다르게 만드셨고 그렇지만 서로 높여야 된다는 겁니다.

서로 증거 해주고 칭찬해주고 이런 부분을 지난시간에 한 시간 반을 이야기했습니다. 오늘 말씀은 제가 성경말씀을 읽지는 않겠습니다. 왜냐면 내용이 하도 방대해서 오늘은 요한복음18장 말씀입니다. 17장은 예수님의 기도장면입니다 18장 말씀인데 18장 말씀은 예수님이 성만찬설교를 다 하셨습니다.

성만찬설교는 요한복음에서 몇 장부터 몇 장입니까? 13장부터17장까지입니다 성만찬설교를 다하시고 그다음에 지도를 보시면 성만찬설교를 이분이 어디서 하셨습니까? 다락방에서 하셨습니다.

다락방에서 하셨습니다. 이게 예루살렘 성전 산이고 예루살렘 도시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성전이 북쪽이니까 서남코너에 집이 하나 있었는데 그 집이 다락방입니다 이게 마가의 어머니 마리아가 소유한 다락방입니다

이 다락방에서 예수님과 제자들이 자주 모였습니다. 나중에 마가의 다락방 사도행전2장에 나오는 그 다락방도 이방입니다 그러니까 마가의 어머니가 항상 장소를 제공했습니다. 지금 성만찬도 여기서 하셨던 겁니다.

마가의 다락방에서 이 마가의 다락방 바로 위쪽으로 안나스의 관저가 있습니다. 안나스가 누구냐면 가야바대제사장의 장인입니다 이 집이 아주 고급 분들의 저택이 이 지역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북 쪽에 빌라도관저가 있었고 그다음에 헤롯 아티파스 관저도 이 중간에 있었고 우선 지도를 이렇게 그림을 그리면서 보셔야 됩니다. 여기 다락방에서 13장14장15장16장17장 말씀을 하시고는 예수님께서 이제 때가 되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로 기도하려 가시는 겁니다. 겟세마네로 가시는데 요한복음18장에는 겟세마네로 갔다라고 직접 언급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성서를 열어주세요

18장1절에 보면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이 말씀이 무슨 말씀입니까? 크게 보면 13장부터 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이 말씀을 다 하시고 성만찬설교를 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 건너편으로 나가시니 그랬습니다.

기드론이라는 골짜기라 그럽니다. 아주 깊은 계곡입니다. 100m정도 직선으로 밑으로 계곡이 되어 있는데 그러니까 분명히 예수님께서 가시는데 여기 다락방에서 어떻게 가셨겠습니까? 두 가지 옵션이 있습니다.

나는 이렇게 이 도시를 끼고 이렇게 해서 동문으로 해서 가실 경우도 있고 제 생각에는 그렇게 안 가신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나와 가지고 성 밖으로 해서 기드론 계곡으로 가신 겁니다. 기드론 계곡으로 가셨다면 먼저 어디에 도착했겠습니까? 감람산에 먼저 도착하신 겁니다.

감람산은 성전 산 동쪽에 그의 평행선으로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감람산에 가셨습니다. 그래서 감람산에 가셨다는 말씀을 요한복음에서는 뭐라고 그러느냐면 기드론 시내 저편으로 가시니 그러는 겁니다.

그다음에 성서를 다시 보세요. 그 곳에 동산이 있는데 제자들과 함께 들어가시니라 이 동산이 겟세마네 동산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런데 겟세마네라는 동산은 감람산의 한 부분으로 보시면 됩니다. 겟세마네라는 것은 감람산은 높은 언덕인데 그 언덕의 한부분입니다 그기에 올리브나무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감람산이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겟세마네도 올리브나무가 많았습니다. 거기에 있는 동산인데 감람산에 들렸다가 겟세마네로 가신 겁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서는 이것을 자세하게 감람산에 들렸다가 겟세마네로 갔다고 한 줄로 해버렸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이나 마가복음이나 이 두 복음은 자세하게 써놓았습니다. 조금 있으면 우리가 그걸 볼 텐데 그리고 누가복음에도 마태와 마가가 또는 요한이 말씀안한 부분을 자세하게 쓴 게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본문이 18장1절과 2절이 본문입니다 그렇지만 그 사이에 요한이 말하지 않은 부분들이 많은 겁니다. 마태와 마가와 누가가 말한 부분을 집중적으로 보려고 합니다. 오늘은 그래서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을 집중적으로 보겠습니다. 그래서 이 공간복음은 요한복음을 다시 봅시다.

요한복음18장2절을 보시면 그 곳은 가끔 예수를 파는 유다도 그 곳을 알더라. 예수께서 제자들과 모이시는 곳이므로 그 곳이 어디입니까?

겟세마네 동산을 이렇게 요한이 표시했습니다. 가끔 예수님이 거기에 모이시는 곳 그래놓고는 예수를 파는 유다도 그곳을 알더라. 그리고는 유다가 군대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아랫사람들을 데리고 등과 횃불과 무기를 가지고 그리로 오는지라 여기 보면 요한복음은 그 중간에 일어나는 일들을 다 생략해버렸습니다. 생략해버리고는 그냥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체포하러 오는 장면을 직접 도입해버렸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중간에 일어나는 일들이 많잖아요. 중간에 일어나는 일들을 우리가 볼 필요가 있는 겁니다.

오늘은 중간에 일어나는 일들을 요한복음에 없는 부분들을 한번 심도 있게 보려고 합니다. 첫째 우리가 마태복음26장을 열어보세요. 마태복음26장26절부터보시면 마태복음이나 요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이 4복음서가 성만찬설교를 끝을 내는 장면이 다 다릅니다. 특히 마태와 마가는 같은데 요한복음은 차이가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성만찬 끝나는 게 무엇으로 끝났습니까?

성만찬 설교가 예수님의 기도로 끝났습니다. 17장에서 예수님의 기도내용은 다른 공관복음에는 없습니다. 요한복음에만 있는 겁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의 기도로써 끝났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기는 이 기도가 마지막 성만찬장면이다 라고 볼 수가 있는 겁니다. 그런데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은 마지막 성만찬장면을 무엇으로 썼느냐면 마태복음26장26절에서29절에 보면 예수님이 성례전 말씀으로 끝냈습니다. 성례전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 떡은 내 살이다 포도주는 내 피다 이것은 새 언약이다 우리가 이것을 성례전이라 합니다. 영어로 성찬예식을 홀리 컨미니온 서비스(holy communion service)에 관한 이야기를 하시고는 끝납니다. 다락방에서 그리고는 그 뒤에 무슨 말이 나오느냐면 마태복음26장30절에 감람산으로 가셨다 그랬습니다.

그리고 마태복음은 조금 혼돈스럽지만 여러분들이 이걸 잘 아셔야 지만 성서가 눈에 뜨입니다. 마태복음26장30절에 감람산에 가셨다 성찬예식이 끝난 다음에 그리고 감람산에서 예수님이 네 가지 예언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 가시기 전에 이것은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네 가지 예언하신 것이 감람산에서 마태복음26장31절에서32절에 또 마가복음14장27절에서31절에 네 가지 무슨 예언을 하였냐면 제자들을 놓고 예언하신 겁니다. 제자들이 우러러 따라 갔잖아요 지금 감람산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그러는 겁니다. 네 가지 예언 중에서 첫째 예언이 뭐냐면 너희가 오늘 밤 나를 버리리라 그러는 겁니다. 지금 저녁시간에 성만찬을 하셨잖습니까? 그래서 오늘 밤 하니까 우리 생각에는 밤10시 정도는 되었을 갔습니다. 이럴 때 예수님이 먼저 하신 말씀이 너희가 오늘 밤 나를 버리리라

이렇게 예언을 하시는 겁니다. 두 번째 예언은 뭐라고 하느냐면 스가랴서17장7절을 인용하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가룟 유다가 나를 칠 것이고 그다음에 양 때가 제자들이 흩어지리라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가룟 유다라는 말을 직설적으로 쓰지를 않았습니다. 앞뒤를 보면 그 말입니다 이렇게 해서 조금 있으면 가룟 유다가 와가지고 나를 잡아가고 너희들이 다 도망가고 그럴 거라는 겁니다. 세 번째는 이분이 하시는 말씀이 내가 부활한 후에 너희보다도 먼저 갈릴리에 갈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겁니다.

제자들이 이 말이 무슨 말인지 모릅니다. 그리고 네 번째 예언은 베드로가 나를 세 번 부인할 거다 이렇게 예언하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베드로가 절대로 안합니다. 라고 큰소리치는 장면 나옵니다. 이렇게 예언을 하시는 장면을 마태가 기록을 했는데 지금 감람산에서 마가도 똑같이 기록을 했습니다.

왜냐면 마가복음은 마태복음을 많이 인용을 한 겁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은 다르게 표현했습니다. 누가복음22장14절에서23절을 보시면 누가는 성례전을 행한 후에 예수님께서 직접 감람산에 갔다는 기록을 하지 않았습니다.

성례전을 말씀하신 후에 특별한 메시지를 하나 전했습니다. 그게 뭐냐면 누가복음22장24절과38절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누가는 특별히 조명하여 놓았습니다. 이 말씀은 다른 복음서에는 없습니다.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두목은 섬기는 자와 같고 아버지나라를 너희에게 맡겨 이스라엘열두지파를 다스리게 하겠고 예수님자신이 불법자의 동료로 여김을 받겠고 이게 무슨 소리냐면 예수님이 내가 불법자라는 것은 강도입니다 내가 같은 강도취급을 받게 될 것이다. 라는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런 말씀은 여기 누가복음에만 나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는 감람산으로 가셨다는 겁니다.

누가복음22장39절에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따라 감람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따라 갔더니 그러니까 다시 말하면 감람산에 예수님이 자주 가셨다는 것을 이렇게 습관을 따라서 가셨다 그랬습니다. 그래서 4복음서에 이 부분 성만찬설교가 끝나고 성례전이 끝나고 어떻게 표현했느냐를 제가 간단하게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으로 돌아와서 요한복음13장이 성만찬시작이라고 그랬잖아요. 그런데 요한복음에는 성례전이야기가 구체적으로 없습니다. 성례전 이야기가 무엇입니까? 이 떡은 내 살이다 포도주는 내 피다 요한복음에는 그 말씀이 없습니다. 그러면 그 말씀을 언제 하였냐면 우리가 추측하는 게 13장3절입니다. 저녁 먹는 중 이 말 한마디로 아하! 성례전을 이때 하셨구나. 이렇게 보는 겁니다. 저녁 먹는 중에 성례전을 하셨구나.

그리고는 성례전이 끝나시고는 그다음부터 13장14장15장16장17장 주욱 한겁니다. 예컨대 성례전을 끝나시고는 무엇을 했습니까? 세족식을 하시고 그리고 13장에서 나중에 21절부터 가룟 유다가 떡 한 조각을 받고 나가는 장면 그리고 13장31절에 내가 너희들에게 새 계명을 주노라 이 내용들 그리고 베드로가 세 번 부인하는 예언이 있습니다. 그 다음에 14장에 가서는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말씀 보혜사성령님을 주겠다는 말씀 15장에서는 참 포도나무와 가지 16장에서는 제자와 보혜사에 관한 이야기 16장에서는 예수님이 기도를 가르치는 장면 17장에서는 예수님의 기도 이걸 쫘악 다 하시고 그다음에 예수님이 감람산으로 가시는 게 18장 오늘입니다ㅣ

그러니까 요한복음은 성례전 끝나고는 감람산까지 가는 그 사이에 이야기들을 많이 적었습니다. 그 이야기들이 13장14장15장16장17장 다섯 장을 썼습니다. 이 배경을 우선 알 필요가 있습니다. 그다음에 요한복음18장1절에서3절이 공관복음과의 차이점을 제자 설명했는데 이걸 다시 정리해드리겠습니다. 제목을 차이점이라 그래가지고 차이점이 제가 보니까 일곱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가 요한복음은 감람산행 표현이 없다는 겁니다. 단지 기드론 시내 저편으로 이렇게만 표현했습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는 겟세마네 행 표현이 없는 겁니다. 겟세마네로 갔다는 표현이 없습니다. 단지 동산이라고 표현을 했습니다. 또는 가끔 모이는 곳 이렇게 표현을 했습니다. 세 번째는 예수님이 세 제자들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따로 겟세마네로 데려갔다는 내용이 없습니다. 그런데 마태나 마가복음에는 있습니다. 그리고는 네 번째로 나머지 제자가 몇 명입니까? 8명입니다 왜냐면 가룟 유다는 이미 떠났다고 보고 이야기하면 되겠습니다. 여덟 명은 어디에 있었느냐면 여덟 명은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 보면 여덟 명은 감람산에 있었습니다. 11명이 감람산에 같이 갔다가 감람산에서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여덟 명 너희들은 잠깐 여기 있어라 그리고는 세 명을 모시고 겟세마네로 가셨던 겁니다. 이런 내용들이 요한복음에는 없는 겁니다. 다섯 번째로 겟세마네로 가가지고 예수님이 기도하실 때 세 제자들과 얼마나 거리가 떨어졌느냐는 내용이 없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에는 이걸 기록했습니다. 그러니까 성경은 다 읽어야 됩니다. 하나만 읽으면 한쪽을 모릅니다. 누가복음22장41절에 누가가 그것을 기록한 게 뭐냐면 돌 던질 만큼의 거리에서 서로 떨어져 있었다. 그랬습니다.

그 당시는 m나 이런 시스템을 사용안하고 한발 짝 거리 또는 돌 던지는 거리 누가복음22장41절에 그다음에 여섯 번째로 요한복음은 이런 걸 다 생략하고 단도직입적으로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체포하려 도착했다는 이야기가 들어가 있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요한복음18장3절에 일곱 번째는 요한복음에는 겟세마네의 기도장면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겟세마네에서 몇 번 기도했습니까? 세 번 기도했잖아요. 이 기도 장면이 요한복음에는 없습니다.

공관복음에는 다 있습니다. 특히 누가복음에는 아주 짧게 있는데 조금 있으면 우리가 보겠지만 누가복음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아주 중요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그러면 제목을 쓰세요. 왜 요한복음에는 겟세마네 기도장면이 없는가? 제가 세 가지로 봤습니다. 첫째는 겟세마네 기도장면은 예수님의 인성 인간으로써 아주 나약한 부분을 노출시키는 장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부로 요한이 뽑아버린 모양입니다 성령님이 뽑아라. 했던 모양입니다

두 번째는 그렇기 때문에 요한복음에서의 강조점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신성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신성인 그리스도 되심을 이야기하는 책이 요한복음이기 때문에 인성부분을 집어넣지 않는 겁니다. 세 번째는 만약에 신성을 강조하는 요한복음에 예수님의 약한 부분을 인성이 아주 약한 부분입니다 이런 부분을 만약에 첨가시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독자들이 혼선을 빚을 수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서는 4복음서 중에서 제일 나중에 썼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책 자체가 예수님의 신성만을 강조하기 때문에 그렇게 해놓았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우리가 겟세마네 기도장면을 상고할 필요가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겟세마네기도는 실은 요한복음에 속해 있는 내용이 아닐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예수님의 신성을 공부하고 있지만 인성부분도 같인 공부해야만 심도 있게 하나님말씀을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겟세마네기도장면입니다

첫째로 예수님이 세 명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을 이렇게 데리고 가면서 그들 앞에서 이분이 우리가 봐도 이해가 안 되는 제자들 앞에서 고민하고 슬퍼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여기에 원어와 영어를 적어 놓았습니다. 고민하고 슬퍼하는 겁니다. 고민은 영어로 그리프(Grief) 헬라어로 루페오(LUPEO)란 말인데 슬퍼하고 괴로워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전을 들여다보니까 한국사전에도 고민이라는 말이 거기에 있더라고 그런데 이 고민이라는 게 슬픈 마음이 들어 있는 고민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26장30절에는 고민하고 슬퍼한다는 말을 거기다가 집어넣어 놓았습니다.

그래서 슬퍼한다는 말을 제가 원어를 보니까 아데모네오(ADEMONEO)라고 쓰 있습니다. 뜻은 뭐냐면 우리가 디스프레슨(depression)받았다고 그럽니다. 기분이 조금 울적해졌다 이런 의미가 있습니다.

아데모네오(ADEMONEO)라는 뜻은 그러니까 예수님의 마음에 슬픔도 조금 있고 기분이 별로 안 좋은데다가 스트레스도 조금 받았다 안 그러면 이런 예수님의 모습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마가는 표현을 이런 식으로 했습니다. 심히 놀라고 슬퍼하셨다 그랬습니다. 놀랐다는 말을 영어성경에는 어메지먼트(Amazement) 헬라어로는 에커탐메오((EKTHAMMEO)라는 뜻은 놀라웠다 이러누 말로 표현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또 디스프레슨(depression)받았다고 이 표현을 그대로 썼습니다. 마가는 이런 표현에다가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제자들보고 내가 죽게 되었다 그러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죽게 되었다는 겁니다. 이때 죽게 되었다는 말을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지금 생각하시면서 지금 이 표현을 하셨는지 아니면 아주 괴롭다는 말을 강한 의미로 표현하기 위해서 이렇게 했는지 우리도 그럽니다. 나 죽겠다 이런 말 쓰지만 진짜 죽는 게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제자들에게 나 대단히 극심하게 내 마음이 편치 않다는 표현을 이렇게 죽게 되었다라고 표현한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이런 표현을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왜 했을까요. 이것이 우리에게 큰 의문입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그럴 겁니다. 이분이 그동안 3년 동안 인간으로 와 계시면서 완전한 인성입니다 그러니까 신성을 포기했다고 그랬습니다. 그 말씀이 성서 어디에 나옵니까? 빌립보서2장7절에 신성을 포기하셨거든요. 그러니까 이분에게 신성이 없는 겁니다. 완전히 사람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완전히 사람이 된 상황 속에서 왜 하필이면 3년을 훈련시켰던 이 제자들 특히 3명을 가까이 데리고 다녔잖아요. 이 양반들에게 왜 자기의 약한 부분을 노출해야 되느냐 입니다.

분명히 예수님이 신성을 포기하셨기 때문에 외로움이 있었고 괴로움 고민 고통 근심이 있다는 걸 이렇게 지금 표현한 겁니다. 이분이 인간으로써 세 사람을 데리고 간 것도 왜 데리고 갔느냐 이것도 우리가 질문할 필요가 있는 겁니다. 왜 데리고 갔느냐 그러니까 저는 이걸 가지고 묵상하면서 주님 왜 이 사람들을 데리고 갔습니까? 그럴 때 저에게 이런 생각이 드는 겁니다.

아하! 이렇게 극한 상황 속에서 이분이 실 오르기 만큼이라도 조그만 인간적인 위로를 3명에게 기대했던 것 같습니다. 위로를 나머지 여덟 명에게는 별로 기대도 안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3분이 위로를 해주었습니까?

못해주고 나중에 더 짐만 안겨주었습니다. 그런데 그것까지도 예수님이 다 어셨잖아요. 아셨는데도 너희들이 나를 부인할거다 너희들이 나를 떠날 거다

다 아셨는데도 데려가 가지고 그래도 한 마디라도 위로의 말을 듣고 싶었던 겁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세 분을 모시고 가지 않았나. 라고 생각이 되는데 이런 상황 속에서 예수님이 기도를 하시는 겁니다. 첫 기도가 마태복음26장39절부터 보시면 됩니다. 마가복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은 마태복음을 주로 가지고 이야기할 겁니다. 돌을 던질 만큼의 거리 누가복음22장41절에서 제자들에게 너희들 여기 있어라 돌 던질 만큼의 거리에서 예수님이 가가지고 기도를 하시는데 기도를 어떻게 하느냐면 얼굴을 땅에 되시고 엎드려서 기도하셨다고 했습니다. 바로 17장에서는 예수님이 기도하실 때 어떻게 기도했습니까? 하늘을 우러러 보시고서 기도하셨다고 그랬습니다.

17장1절에서는 여기서는 완전히 반대입니다 얼굴을 땅에다 되시고 엎드려서 기도하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내 아버지여 할 수만 있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십시오. 그러는 겁니다. 할 수만 있거든 이분이 이런 기도를 하시는 겁니다. 다시 말하면 지금 아버지와 협상을 하시는 겁니다.

만약에 가능하다면 아버지 다른 방법이 있다면 대안이 있습니까? 라고 여쭈어 보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대안이 있으면 다른 방법을 쥐어주십시오.

이 방법은 너무 심합니다. 제가 감당하기 힘듭니다. 너무 괴롭습니다.

다른 방법을 조금 취해주십시오. 이렇게 기도하는 예수님의 그 당시의 마음이 분명히 이랬습니다. 왜 예수님이 이런 식으로 기도할까요. 이게 우리에게 의문인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런 식으로 기도하는 장면을 제가 딱 보면서 아하! 이분이 너무하다는 생각이 더는 겁니다. 어떤 측면에서냐면 이분이 지금 이런 식으로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 특히 이 잔을 피하겠습니다.

라고 말씀하신 이 잔을 피한다는 말이 뭐냐면 영어로 패씽(pasing)한다고 그랬습니다. 패스(Pass)라는 말은 헬라어로 파래르코마이(PAFERCOMY)라는 말입니다 파래르코마이(PAFERCOMY)라는 말은 이 잔을 우회한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운전하다가 지금 도로공사를 합니다.

우회도로 목적은 같은 목적인데 이렇게 우회해가지고 가는 겁니다.

이쪽으로 직접가지 않고 예수님께서 그러는 겁니다. 이 잔을 내가 받아야는데 이 잔을 받지 않고 우회를 해서 가서 가게 해주세요.

다시 말하면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죽기는 죽어야 됩니다. 죽으려고 오신 것 분명히 아십니다. 예수님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야 되는 것은 분명히 아십니다. 그런데 지금 겟세마네기도부터 시작해서 죽기 직전까지 필을 흘리는 숨을 거두는 직전까지 과정은 나 우회해서 그 과정은 하기 싫습니다. 입니다.

예수님이 지금 하시는 말씀이 그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잔이라는 게 뭐냐면 겟세마네기도부터 시작해서 예수님이 피를 흘리는 숨을 거두는 그 과정을 잔이라고 이 잔을 피하겠다는 겁니다. 그 과정만은 피하겠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이게 굉장히 중요한 개념입니다 이 과정을 피하겠다는 겁니다. 왜냐면 이 과정이 너무나 힘들다는 겁니다. 아예 탁 숨을 끊는 것이 훨씬 편하지 이 과정이 힘들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이 과정을 피하게 해달라고 하면서 예수님 본인이 빤히 알면서 이 과정을 피하게 해달라고 하는 겁니다. 왜냐면 아버지가 볼 때는 절대로 이 과정을 피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왜냐면 이 과정이 있어야만 된다는 겁니다. 삼위하나님께서 이미 결정을 하신 겁니다. 창세기3장15절을 통해서 결정을 하시고는 삼위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가지고 구약의 여호와이름으로 이 과정을 겪게 될 것을 다윗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시편22편 전체가 다 그리고는 다윗은 주전천년입니다

또 주전700년에 이사야에게 또 말씀하셨습니다. 이 과정에 대해서 이사야서53장에 이 과정이 꼭 필요하다는 것을 그런데 그렇게 필요하다고 말씀하신 분이 누굽니까? 예수님이십니다. 여호와께서 직접 말씀하셔놓고 지금 와서 이분이 완전한 인간이 되셔가지고 본인이 이걸 안하려고 그러시는 겁니다.

너무나 힘드니까 이게 아이러니입니다 그래서 성서에서는 예수님이 이 과정을 잔이라고 그랬습니다. 컵(Cup) 성서에서는 컵(Cup)이라는 잔을 여러 가지로 표현했습니다. 지금 예수님이 당하는 이 과정을 분노의 잔 이사야서51장17절에 또는 진노의 잔 예레미야서25장15절 계시록14장10절 또는 진노의 포도주 잔 계시록16장19절 이런 잔을 이런 식으로 표현했습니다.

이 잔 다시 말하면 이 기간 겟세마네에서부터 시작해서 예수님이 숨 거두시는 그 사이 기간 동안은 예수님이 피조물들을 통해서 엄청나게 경멸을 당하고 자존심이 상처를 받는 기간입니다 이 기간이 피조물들을 통해서 그러니까 창조주입장에서 보면 피조물들에게서 본인이 이런 자존심이 상처를 받는 기간입니다 이것은 창조목적에 위배되는 순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께서는 다른 것은 다 없애더라도 피조물이 창조목적에 위배되는 행위를 할 때는 이분이 참지를 못하는 겁니다. 그 기간 동안에 베드로가 세 번 부인해도 아주 욕을 하면서 저주하면서 부인하는 장면이 나오잖아요.

예수님이 다 계획하셨지만 이것을 받으려니까 쉽지가 않는 겁니다.

또 가야바 빌라도 이런 분들이 예수님을 네가 그리스도냐 네가 하나님이나 네가 누구냐 하면서 침을 뱉고 뺨을 때리고 심지어는 로마 군인들까지도 예수님의 옷을 벗기고 조롱하고 이 모든 일들을 다 생각하시면 예수님이 볼 때도 끔찍한 겁니다. 이 피조물들이 내가 저놈들 그냥 훅 불어버리면 다 없어질 저놈들이 나를 괴롭힐 것을 생각하니까 예수님이 끔직한 겁니다.

그러니까 아버지에게 그러시는 겁니다. 아버지 이것만은 제가 안하겠습니다.

이걸 안하고 그냥 우회도로로 가게 해주세요. 그러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아버지가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아들아 우리 결정했잖느냐

그래서 당신이 다윗과 이사야에게 말했잖아 그런데 왜 우회하려고 그러느냐 이겁니다. 이런 내용을 아버지께서 말씀하시니까 예수님도 어떻게 반발할 수 없는 겁니다. 나중에 아시지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마지막 순간에 예수님이 어떤 수모까지 당하느냐면 엘리 엘리 라마 사막다니 그러면서 아버지, 아버지 왜 나를 버리십니까? 예수님이 완전히 버림을 당하는 그 순간까지 간 겁니다. 이걸 이분이 다 아셨잖아요. 그러니까 여기까지 가기가 싫습니다.

여러분들 제가 이사야서53장 내용 이야기 안 해도 알죠? 그다음에 시편22편은 우리가 잘 알다시피 예수님께서 다윗에게 말씀하신 겁니다. 다윗이 환상을 딱 보는 겁니다. 다윗이 환상을 보는데 자기 같기도 하고 또 딴 분 같기도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환상입니다 나중에 예수님께서 신약에서 말하는 겁니다. 시편22편에 그러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뭐라고 절규 하느냐면 다윗이 환상을 보니까 내 하나님 내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이게 엘리 엘리 라마 사막다니 장면을 천 년 전에 다윗에게 보여준 겁니다. 6절에 가서는 예수님이 그러시는 겁니다. 나는 본래 사람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훼방거리입니다 백성의 조롱거리입니다 라고 말씀하시고 7절에 나를 보는 자마다 다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비쭉 하면서 머리를 흔듭니다.

저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이 사람들이 막 농담을 하는 겁니다.

자기 자식도 구원을 못하면서 이런 모습들을 다 보여 준 겁니다 천 년 전에

이렇게 할 것을 예수님이 그것을 자기가 보여줘 놓고는 자기가 실제로 하려니까 되게 힘든 겁니다. 왜 힘듭니까? 창조주의 자존심이 그것을 실제로 허락하지 않는 겁니다. 아버지하나님은 저 위에 계시기 때문에 해라, 해라 쉽게 말할 수 있지만 아들 하나니은 이게 입장이 다르잖아요. 우리가 인간적으로 말하면 경험해보세요 얼마나 힘든가? 아버지에게 아마 이렇게 말씀하셨을 겁니다. 아버지는 위에서 쉽게 생각하지만 저는 얼마나 힘든지 아세요.

이런 식으로 아마 말씀을 하셨을 겁니다. 이사야에게도 분명히 말씀하셨잖아요. 이사야서를 보면 53장3절4절에 보시면 똑같이 예수님의 고민하는 모습을 겟세마네에서 고민하는 모습을 이사야에게 다 보여 주었습니다

그러니까 본인이 이런 고민을 할 것을 700년 전에 다 보여 주시고는 본인이 이걸 지금 하시는 겁니다. 이사야서53장3절에 그랬습니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간고를 간고라는 말이 고민을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지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 우고 보이지 않는바 같아서 이분이 얼굴을 가리고 기도하는 장면까지 멸시를 당하고 귀히 여김을 받지 않았느니라. 창조주로써 귀히 여김을 받지 않았느니라. 4절에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가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이때 우리라는 것은 아까 말한 빌라도니 가야바니 이 모든 로마 군인들 유대인들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미리 다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하실 것을 다 아신 분이 막상 자기가 당하려고 그러니까 이분이 지금 아버지와 협상을 하는 겁니다. 가능하다면 이걸 안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묵상하면서 이렇게 까지 창조주하나님이 고민하시면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생명을 받은 우리는 이것을 가볍게 생각하면 그게 큰 무리고 무례한 겁니다. 그러니까 가볍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 수가 없는 겁니다. 그냥 예수님 감사합니다. 날 위해서 죽었으니 감사합니다. 할렐루야 아멘. 이 수준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우리가 묵상하고 이분의 사랑 이분의 은혜를 묵상할 필요가 있고 특히 해야 되는 겁니다.

이렇게 하는 사람들에게 삼위하나님께서는 은혜를 베푸시고 자비를 베푸시고 사랑을 베푸십니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공부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이 하나님을 깨달아라. 그리고 이것을 우리 속에 묵상하면서 매일매일 삶 속에서 우리하나님은 참으로 대단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다 아시면서도 아시는 것을 이분이 공생애 동안에 여러 번 말씀하셨습니다.

자기가 이런 아픔을 경험할 것을 제자들에게 말씀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가 이렇게 할 것을 미리 말씀했습니다. 유월절6일 전에 토요일에 요한복음12장24절에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어야만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자기 자신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리고는 이분이 그 말씀을 하시고는 아버지와 기도를 하시는 겁니다. 똑같이 12장27절에 기도하시면서 이분이 또 죽어야 된다는 것을 본인이 빤히 알면서도 이분이 아버지와 기도하면서 또 생각이 달라진 겁니다. 무슨 생각을 하느냐면 기도하는 내용이 이런 겁니다. 아버지 지금 내 마음이 민망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아버지 나를 구원하여 이때를 면케 해주십시오. 이렇게 기도하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완전한 인간이 되신 창조주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겁니다. 이 나약한 이런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힘이 생기잖아요.

아하! 우리도 인간이기 때문에 제아무리 목사고 뭐고 다 소용없다 인간입니다 이렇게 오락가락, 오락가락하는 것은 당연한 겁니다. 예수님도 지금 오락가락하는 하시는데 그러니까 왜 저 사람이 오락가락하지 말씀도 잘 알고 기도도 많이 하고 뭘 하는데 왜 오락가락하지 당연히 하게 되어 있는 겁니다.

이렇게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 아버지의 소원이 예수님의 소원이 무엇었습니까? 이 잔을 우회시켜주십시오. 그런데 예수님이 대답하시기를 여쭙기를 아버지 그렇지만 아버지의 소원이 이게 아니라면 아버지 뜻대로 하십시오.

그랬잖아요. 도대체 그러면 아버지의 소원은 무엇이냐 아버지의 소원은 그러면 이것은 간단하게 이사야서53장5절입니다. 유명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 속에 아버지의 소원이 그대로 다 들어 있는 겁니다.

아버지의 소원은 뭐냐면 그가(예수님이)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아버지의 소원은 예수님이 찔려야 됩니다. 찔림은 무엇입니까?

손과 발에 십자가에 못을 박히게 되는 겁니다. 이것도 잔의 한 과정입니다

과정이 끝나는 게 언제입니까? 숨을 거두는 순간이 끝나는 겁니다.

지금 잔이 겟세마네기도부터 시작해서 숨이 끝나는 그 순간이 잔입니다

그러니까 이 잔을 겪게 되는데 이 잔 속에서 하나의 크라이막스 잔이 뭐냐면 손과 발이 못 박히는 겁니다. 찔림은 찔려야 된다는 겁니다.

왜냐면 우리의 허물을 위해서 우리의 원죄를 해결하기 위해서 그렇게 이사야에게 예수님이 말씀하신 겁니다. 그러니까 내가 찔려야 된다.

그다음에 두 번째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상한다는 말이 뭐냐면 창에 옆구리를 찔리는 겁니다. 창에 찔려가지고 피를 흘리잖아요

이것을 예수님이 왜 했느냐면 이것은 우리의 잡음 죄와 쓴 뿌리를 제거하기 위해서 성화시켜주기 위해서 하셨다는 겁니다. 우리를 성화시켜주기 위해서 이분이 이렇게 이 과정을 겪어야 된다는 겁니다. 이분이 창에 찔려야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이분이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렸다는 겁니다. 징계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법적으로 저주를 받은 겁니다.

저주를 받는 순간에 무엇을 했습니까? 엘리엘리 라마 사막다니 왜 나를 버리십니까? 아버지 그 순간입니다 그것을 예수님이 경험해야 되는 겁니다.

그 경험하는 순간이 아사셀 염소가 되는 이 세상에 모든 죄를 한꺼번에 다 짊어지는 그 순간입니다 완전히 죄인이 되는 순간입니다 그냥 순간적으로 죄를 다 뒤집어쓰는 순간입니다 그분은 죄가 없는 분이시지만 그러니까 이렇게 아픈 순간이 이분에게 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마지막으로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채찍에 엄청나게 맞았잖아요. 그러므로 우리가 나음을 받았도다

힐링 된다는 겁니다. 육의 병, 혼의 병, 영의 병이 낫게 된다는 겁니다.

이 과정을 예수님이 이사야에게 이미 예언하신 겁니다. 이렇게 할 것이다

그러니까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 이 잔을 통과해야 되는 것은 왜 통과해야 되느냐면 우리가 전인적 구원을 받기 위해서 다시 말하면 전체 그냥 영원 구원만이 아니고 원죄를 구원받고 또 인격에 변화가 오고 성화되고 그리고 법적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예수님이 엘리 엘리 라마 사막다니 우리죄를 다 뒤집어쓰셨기 때문에 그리고 우리 육의 병, 혼의 병을 고쳐주는 온전한 구원을 주기 위해서 하나님은 이 계획을 짰기 때문에 예수님은 하기 삻은 이 잔을 예수님은 받으셔야 되는 겁니다. 그냥 탁 십자가에 매달렸다가 순간에 숨을 거두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기에 이렇게 전인적 구원을 시켜주기 위해서 우리예수님은 이 아픔을 경험해야 되는데 너무나 아프니까 예수님께서 이것만은 피하게 해주십시오. 예수님이 이 기도를 끝내시고 제자들이 있는 곳을 가보니까 제자들이 잡자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베드로에게 하시는 말씀이 너 한 시간도 나와 같이 있을 수 없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그러면서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구나.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또 질문이 나오는 겁니다. 무슨 시험에 들지 말라고 기도하는 겁니까? 이것도 우리가 질문으로 던질 필요가 있습니다.

시험에 들지 말게 깨어 기도하라는 겁니다. 무슨 시험입니까? 제가 이렇게 묵상하면서 적어도 여섯 가지의 시험을 주님이 생각나게 하시는 겁니다.

첫 번째 어떤 시험인가? 보니까 이제 조금 있으면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게 되어 있는 겁니다. 베드로는 지금 안한다고 큰 소리 쳤지만 부인하게 되어 있습니다. 부인 한 후에 베드로가 얼마나 갈등을 가지겠습니까?

그 갈등을 너무 심하게 가지지 않도록 기도시켰던 모양입니다

다시 말하면 기도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눈에 보이는 환경을 보지 말고 파이프라인을 저 하늘로 올려서 저 세계로 보고는 저쪽세계의 음성을 듣게끔 하는 게 기도입니다 그러니까 기도생활을 하면 환영이 지금 어렵지만 그 한경을 내가 이길 수가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기도의 시각을 저쪽으로 옮기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베드로에게 기도하라는 것은 아마 그 연습을 해라 나중에 네가 어려움이 올 텐데 네 스스로가 이겨나가지 못할 갈등이 올 텐데 그럴 때는 시각을 저쪽으로 옮기는 것 밖에 없다 그러니까 기도해라 두 번째는 예수님이 진노의 잔을 드시려고 하는데 예수님이 안 드시려고 고민하는 모습이 있잖아요. 이 모습을 보고서 이 사람들이 실족할까봐 그러니까 너희들 시각을 위로 올려라 나의 약한 부분을 보고는 실족할까봐 세 번째로 이런 가능성이 있습니다. 너희들이 조금 있으면 나를 던지고 도망갈 텐데 그러다가 내가 너희들보다 먼저 갈릴리로 갈 텐데 그때 내가 나타날 텐데 애들아 이리와라 그럴 때 네! 알겠습니다. 미안합니다. 그렇게 오도록 만들기 위해서 그러니까 기도하고 시각을 예수 중심으로 만들기 위해서 미리미리 기도하라는 겁니다. 기도 안하면 이게 안 된다는 겁니다. 네 번째는 너희들이 장차 이 세상에서 미움 받고 배척당하고 죽임까지 갈 텐데 그 당시에 이길 수 있는 길은 기도함으로써 기도가 연습이 되어 가지고 저 세계를 보는 이 세상 상황에서 저 세계상황으로 보는 연습을 미리미리 하라는 겁니다.

또 그뿐 아닙니다. 다섯 번째는 이분들도 제자들도 마태복음20장23절에 그랬습니다. 제자들 너희들도 나같이 이 쓴 잔을 마셔야 된다는 겁니다.

너희들도 나만 마시는 게 아니다 그러니까 너희들도 장차 이런 쓴 잔을 마시게 될 때 실족하지 않기 위해서는 기도연습을 하라는 겁니다.

여섯 번째는 요한복음12장24절에 너희들도 이제 한 알의 밀알이 되어서 죽을 것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제목을 바꾸어서 세 사람을 겟세마네 동산에 데려간 이유는 왜 세 사람을 겟세마네로 데리고 가셨나? 그 이유는 첫 번째로 예수님의 인성적인 갈등을 직접 목격하고는 이것을 자신의 삶에도 적용시켜주기 위해서 예수님의 인성의 갈등부분을 그다음에 두 번째로 제자들이 장차 진노의 잔을 먹을 때 이 장면을 생각나게 해가지고 극복할 수 있도록 해주기 위해서 세 번째는 예수님이 이들에게서 세분들에게서 위로와 격려를 받기 위해서 예수님이 어떤 위로와 격려가 필요로 하느냐면 예수님이 첫째 제자들에게서 이런 말이 오기를 기대했을 겁니다. 첫째가 뭐냐면 예수님이 고민하고 이럴 때 이분들이 와가지고 예수님, 예수님 왜 이러십니까?

갑자기 왜 이러십니까? 예수님 예수님이 3년 동안에 저희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적어도 20번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무엇을 말씀하신지 아세요. 예수님이 내가 무슨 말을 했니 분명히 물어볼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장차 때가 되면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3일 만에 살아나야 한다는 말을 마태복음16장21절에 하시지 않았습니까? 이런 비슷한 말을 스무 번했습니다.

예수님 본인이 우리한데 그렇게 말씀해놓고 지금 당장 이 순간에 와서 왜 이렇게 갑자기 오리발을 내미십니까? 이런 말을 예수님이 듣고 싶었겠습니까? 안 듣고 싶었겠습니까? 듣고 싶을 겁니다. 그분도 인간이시니까 이런 말도 듣고 싶을 겁니다. 예수님 요한복음12장24절에서 분명히 말씀 하셨잖습니까?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어야지만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그랬지 않습니까? 본인이 말씀을 해놓고는 이게 무엇입니까? 힘내세요. 분명히 이런 말을 듣고 싶었을 겁니다. 이렇게 해야지만 진노의 잔이 만민이 받는 축복의 잔으로 변한다는 겁니다. 축복의 잔 고린도전서 10장16절에 11장25절에서28절 또는 구원의 잔으로 변합니다. 시편116편13절 또는 복의 잔으로 변합니다. 시편23편5절에 예수님! 예수님이 우리에게 우리인간들에게 복 주고 구원을 하기 위해서 오셔서 예수님이 이 과정을 겪어야지만 우리가 이 잔을 먹을 수 있는데 받을 수 있는데 왜 이러십니까? 아마 분명히 이 소리를 듣고 싶어서 세분을 데리고 갔던 것 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잠자는 이 제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애들아 너 한 시간도 기도 못하느냐 그러시고는 이런 말씀을 합니다. 마음으로는 원이로되 육이 약하구나.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게 우리가 그냥 단순하게 보면 아하! 세 사람들이 마음이 약하고 마음이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구나. 이렇게만 볼 수 있습니다

아닙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도 마음은 원이로되 육이 약한 겁니다. 그러니까 이게 우리에게 힘이 되는 말씀입니다 우리도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한 것은 이게 당연한 겁니다. 그러니까 주님도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가 이 세상에 살고 있지만 이 세상에서 불리 움을 받아서 나가는 저 세상 사람들 아닙니까? 그러니까 우리는 저 세상 사람이기 때문에 항상 저 세상과 파이프라인을 갖다 대고 있어야 됩니다.

그것을 대고 있지 않으면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해서 이게 안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쉬지 말고 파이프라인을 올려라 그랬잖아요.

쉬지 말고 올리고 있지 않으면 근방 우리 삶 속에서 나타나버립니다

아하! 저분이 마음이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구나. 파이프라인을 올리지 않았구나. 근방 알 수가 있는 겁니다. 나 자신부터 알게 되는 겁니다.

파이프라인을 항상 올려놓고 있는 사람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왜냐면 죽으면 저쪽동네로 그대로 순간적으로 가니까 올려있는 걸 확인하는 사람은 그냥 순교까지 할 수 있는 겁니다.

이걸 안 올린 사람은 크리스천인데도 이 세상에 바빠 가지고 이 세상일에 모든 시간을 다 보내고 그럽니다. 이 세상일하지 말라는 게 아닙니다.

해야 되지만 이 세상에 열심히 일을 하지만 그렇지만 언젠가는 나는 이걸 다 놓고 간다는 이것이 나의 영원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항상 인식하시면서 사는 사람입니다. 우리주변에 그런 사람들 많이 보잖아요. 열심히 하다가 그대로 놓고 가는 사람들 장례식에 가보면 그렇잖아요. 나이와 관계없습니다.

제 아무리 돈이 많아도 그런데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면서 이 세상에서 살다가 가는 사람은 무엇입니까? 그러니까 우리는 항상 언젠가는 주님이 오라 그러면 놓고 가야되는 존재입니다 그러니까 한 시간 한 시간을 주님의 은혜 안에서 사는 겁니다. 내가 숨을 쉬고 있는 것도 주님이 나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지금 살고 있는 겁니다. 주님이 가자 그러면 저도 가야 되는 존재입니다 그러니까 매일 저도 주님에게 대화하면서 주님 제가 하고 있는 모든 사역들이 누가 보면 아주 큰 사역 같지만 저는 주님이 오라 그러면 다 놓고 가야 되는 존재입니다 제가 이것을 잊지 않게 해주십니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주님이 예뻐 가지고 너 오래 살게 해줄게 그러는 겁니다.

나는 너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많이 필요하다 그러실 겁니다.

그렇게 해주기를 은근히 바라면서 따리를 붙이시는 겁니다.

예수님이 두 번째 기도하시는 장면을 봅시다. 이분이 두 번째 기도하시는데 첫 번째 기도하신 후에 잠깐 자기 자신을 리뷰하신 것 같습니다.

아하! 내가 이러면 안 되잖아. 내가 이미 삼위하나님의 회의 때 창세기3장15절에 다 이야기했고 천 년 전에 다윗에게도 이야기했고 700년 전에 누구한데이야기 했습니까? 이사야에게도 다 이야기했는데 내가 왜 이러지 그러면서 그때 할 것을 미리 말씀도 하셨거든요. 그러면서 이분이 그것 때문에 아마 갈등하셨던 모양입니다 그래도 두 번째 기도하시는 장면을 보시면 마태복음26장42절에 왜냐면 다시 두 번째 나가서 기도해봐라 기도내용이 약간 변했습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한번 실수하시고는 이분이 약간 변했습니다. 그렇지만 지금 말씀 속에는 아직도 우회도로로 가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습니다. 이렇게 우회도로로 가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는데 이것을 마태는 이정도로 끝냈는데 누가가 더 심도 있게 두 번째 기도를 설명해줍니다. 그래서 누가복음22장42절에서46절에 그러니까 성서는 하나만 보면 안 됩니다. 여러 군데를 봐야 합니다.

누가는 사람이 아주 이기적인 사람입니다 의사출신이고 역사가고 모든 것을 철저하게 조사해가지고 기록을 하는 분입니다 누가는 그런 스타일입니다

그래서 누가복음을 쓰고 사도행전을 쓰고 바울의 모든 행적을 아주 자세히 쓰신 분입니다 누가가 42절에 이런 식으로 표현을 했습니다.

똑같이 이르시되 아버지의 뜻이거늘 이 잔을 내게서 옮기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소원대로 하시기를 바랍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는 누가는 그 다음43절에 보면 사자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서 힘을 더하더라. 이런 말씀을 써놓았습니다. 사자라는 것은 천사 한분입니다

천사 한분이 오셔가지고 예수님에게 힘을 더하더라. 예수님께 힘을 넣어주더라. 그러니까 예수님의 인성이 아주 약하게 된 상황 속에서 이분에게 힘을 집어넣어주더라 그 말은 무슨 말일까요 이분에게 무엇을 주었냐면 이 잔을 받을 수 있도록 이분에게 힘을 넣어 주더라. 그러면 그냥 힘이 아니고 영적 지혜입니다 예수님께 무엇을 주는 겁니까? 이사야에게 하신 말씀 다윗에게 하신 말씀 창세기3장15절 이것을 다시 기억하시도록 도와주었다는 겁니다. 왜냐면 예수님이 파이프라인을 올리고서는 아버지와 대화하다보니까 아버지께서 천사를 통해서 주님이 본인이 하신 말씀을 기억나게 하시는 겁니다.

이 기억이 나니까 예수님께서44절에 그랬습니다.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셨다는 겁니다. 그래가지고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 그랬습니다. 이 말은 뭐냐면 예수님이 파이프라인을 올리시고 본인이 약속하신 내용을 다시 리뷰해보니까 아하! 내가 이러면 안 되겠구나

깨달았지만 이분도 아직도 본인이 말씀하시고는 그 말씀에 아주 100% 돌아가지는 않는 겁니다. 그만큼 힘드니까 그렇지만 이분이 그때 천사가 도와주고 힘을 받으니까 다시 생각이 저 하늘나라로 딱 가니까 하나님의 뜻으로 가니까 이분이 환경을 지배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동일한 기도를 세 번째 하셨다 그랬습니다. 예수님의 기도모습을 보면서 우리에게 그대로 적용이 됩니다. 우리 삶 속에서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저 세계에 속해 있는 DNA가 저쪽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도 파이프라인을 항상 저쪽으로 옮기지 않으면 우리가 지금 이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에 환경이 우리들을 괴롭힙니다. 건강문제 재정문제 사람들과의 관계성 자녀문제 여러 가지 잡다한 문제들이 우리를 엄습해 와서 우리는 저 세상사람 같지가 않습니다.

말과 행동과 생각까지도 이 세상 사람처럼 똑같이 행동할 수밖에 없는 존재들입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우리한데 말씀하시는 겁니다. 바울도 똑같았다

유명인사들 다 똑 같았다 왜냐면 예수님도 그러셨는데 그러니까 바울도 예수님처럼 갈등이 올 때 이런 식으로 기도하신 겁니다. 그래서 바울이 빌립보서를 쓰실 때 빌립보서4장6절에서7절에 우리가 잘 아는 말씀입니다

빌립보교인들에게 쓰실 때 이분은 그렇게 좋은 환경이 아니었습니다.

이분은 주후60년이니까 이분이 35년에 예수님을 만나고 다메섹에서 60년이니까 25년 동안 예수님이 이분을 훈련을 많이 시켰습니다. 이 세상 살 맛이 없을 정도로 훈련시킨 겁니다. 이분이 빌립보서를 쓰실 때 어디에 있었습니까? 로마에 가택연금당하고 있을 때입니다 돈도 없었고 주변에 친구들 다 도망가 버리고 유대인 친구들도 다 마찬가지고 교계에 친구들도 별로 이 사람을 좋아하지 않고 핍박 속에 있었던 겁니다. 이 때 빌립보교인들에게 하신 말씀이 너희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 왜 염려하느냐 오직 모든 것을 기도와 간구로 파이프라인을 올려놓고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는 겁니다.

왜냐면 왜 감사해야 됩니까? 우리는 언젠가는 다 내려놓고 가야되는 존재라는 것을 항상 깨닫고 지금 엄습하는 문제들이 이것은 나하고 언젠가는 빠이빠이 하는 존재들입니다 그기에 내가 붙잡혀 있으면 안 되는 겁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은 그 존재를 문제들을 우리가 쫓아낼 수가 없습니다.

따라 다니게 놓아두세요. 그런데 우리가 그놈의 영향을 받잖아요. 우리가 그놈들을 지배하고 있는 겁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문제를 없애려고 하지 마세요. 따라 다닙니다 이렇게 파이프라인을 올리고 우리의 사고 관 가치관을 저쪽에다가 올리고 있을 때는 바울이 그러는 겁니다. 그렇게 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니라 지각이 뛰어나다는 말은 한국말로 표현이 잘못되어 있습니다.

이게 어떻게 해석을 해야 되느냐면 너 생각을 초월한 그런 소리입니다

그러니까 이성을 초월한 영생에 저쪽 세계에서 내려오는 예수님의 평강과 그분의 은혜가 내 마음과 생각을 지킨다는 겁니다. 파이프라인을 올려놓으면 이게 보통 복입니까 예수님도 인간으로 오셔가지고 이것을 연습하셨습니다.

바울도 이것을 연습하신 겁니다. 환경이 열악하고 몸도 불편하고 바울을 비난하는 사람도 많았고 질투하는 사람도 많았고 물질도 마음대로 있지 않았고 일부로 하나님이 그렇게 만들어 놓았거든요 왜 그렇게 만들어 놓았습니까? 파이프라인을 올리는 연습을 시키려고 모든 게 이 세상 것이 잘 되어 보세요. 돈도 많고 뭘 하면 척척 잘되고 유명하고 이 세상 것을 다 가졌습니다. 그러면 파이프라인을 올립니까? 절대로 올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가 기복신앙을 가르치고 번영신학을 가르치면서 예수이름으로 기도하시오 기도하면 다 줍니다 이건 기독교가 아닙니다. 이것은 그냥 초년생 기독교인들에게는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예수 믿으면 복 받습니다 무슨 복입니까? 이 세상 복 그것은 메시지가 아닙니다. 예수 믿으면 핍박을 받습니다.

그런데 그 핍박이 나를 건들리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로마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잖아요. 너희들 이렇게 파이프라인을 올린 사람은 성령이 내가 가지고 있는 약한 부분들을 가지고 내가 무엇을 기도해야 될지도 모르는데 성령님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나를 대신해서 간구해주신다는 겁니다.

이게 기가 막힌 약속입니다 이렇게 파이프라인을 올린 사람은 그러니까 간구를 어떻게 하느냐면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원하도록 간구하신다는 겁니다. 로마서8장27절에 그랬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사람이 되도록 그런 사람은 그 유명한 약속이 8장28절입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모든 크리스천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은 모든 것이 합해서 선을 이룬다고 그랬잖아요.

그러니까 어려운 상황이나 좋은 상황이나 있거나 없거나 모든 상황을 통해서 알고 보면 다 주님의 뜻 안에서 내가 잘된다는 겁니다. 이렇게 파이프라인을 올릴 때 시각의 차이가 생기는 겁니다. 예수님이 지금 파이프라인을 올리면서 무엇을 생각하시냐면 아까 말하는 이 잔을 본인이 겪어야 된다는 겁니다. 왜냐면 이사야서53장5절을 생각하시는 겁니다. 전인구원을 위해서는 내가 이것을 겪어야 된다는 겁니다. 내가 찔림을 받아야 되고 상함을 받아야 되고 징계를 받아야 되고 채찍을 맞아야 된다는 겁니다. 이 과정을 겪어야 된다는 겁니다. 이분이 이것을 깨달으니까 이제부터 주님이 준비되었느냐 주님 되었습니다. 아버지 되었습니다. 그러는 겁니다. 가룟 유다야 오느라 그래서 가룟 유다가 예수님 앞에 나타난 겁니다. 가자 예수님이 기룟 유다를 통해서 이제 끌려가는 장면입니다 그 장면은 다음시간에 할 것입니다

결론적인 말씀입니다 왜 예수님이 이 잔을 피하려고 했을까요? 무서워서입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뭐냐면 창조목적에 위배하는 행위를 하는 피조물들의 모습을 눈 뜨고 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창조주의 자존심이 상처를 받는 순간입니다 무시 받는 순간입니다 무례하게 취급받는 순간입니다

창조의 목적은 창조주를 경배하고 찬양하고 영광 드려야 되는데 이놈들이 거꾸로 지금 여기에 반대역할을 하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우리 주님은 창조목적을 위반하는 크리스천들을 제일 싫어하십니다. 지상계명입니다

우상섬기는 일들을 제일 싫어하시는 겁니다. 왜냐면 자기 자존심과 관계가 있기 때문에 예수님은 출애굽기20장에 그랬잖아요. 나는 질투의 하나님이라는 겁니다. 예수님 외 딴 것을 더 좋아하는 사람은 더 섬기고 의지하는 사람은 예수님이 싫어하시는 겁니다. 거꾸로 예수님만 사랑하고 순종하는 사람들을 예수님이 가장 예뻐하십니다. 가장 예뻐하십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은혜와 자비와 평강과 사랑을 부어주십니다 왜 잔을 피하려고 하느냐 첫 번째 이유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이들의 무지함을 이렇게 보시면서 괴로워하신 겁니다. 어떤 부분에서 무지 하느냐면 저들이 창조주가 누구라는 것을 모르는 것에 대해서 저들이라는 게 누굽니까? 가야바 안나스 빌라도 로마 군인들 이들이 그걸 모르는 겁니다. 그럴 알았으면 그렇게 할 수 없는데 또한 자기네가 피조물인 것을 몰랐던 겁니다. 자기네가 제일 잘난 줄 아는 겁니다.

자기네 정체성을 모르는 겁니다. 창조주의 계명이 무엇인지를 창조주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몰랐던 겁니다. 세 가지부분을 항상 제가 이야기합니다.

창조의정체성 피조물의정체성 지상계명과 사명을 몰랐던 겁니다.

몰랐기 때문에 무지한 것 때문에 문제가 생기는 겁니다. 이것을 가지고 주님은 안타까워하는 겁니다. 그런 걸 모르는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고 자존심상할 것을 생각하니까 이분이 이 잔을 받기를 싫어하시는 겁니다. 특히 싫어하는 이유 중에 하나가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종교인들 바리새인들 서기관들 제사장들 종교인들이 예수님이 누구인 것을 모르는 애꾸눈이 된 겁니다.

하나님을 안다고 하지만 예수님을 모르는 겁니다. 소위 기독론에 부재입니다

종교인인데 기독론이 부재입니다 예수를 모르는 겁니다. 이분들에 대한 예수님의 분노가 있었습니다. 그분들이 지금 예수님을 핍박하는 겁니다.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우리에게 하나의 그림자로 보여주는 겁니다. 종교인들이 예수에 대한 것이 약한 소위 종교인들이 크리스천들이 기독론이 약할 때 예컨대 자유신학에 종교다원주의에 또는 혼합주의 이런 소위 크리스천들이 예수를 똑바로 보지 못하기 때문에 오는 종교성이 실은 예수님을 죽이기까지 하는 역할까지 하는 겁니다. 이런 사람들은 예수 믿는 사람들 예수님을 잘 아는 사람들을 핍박하는 대열에 들어가게 되는 겁니다. 로마 사람들보다도 더 무서운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종교성이 있으면서 기독론이 약한 사람들은 마지막으로 왜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했느냐 이것도 질문입니다 왜 그기에 자주 가셨냐? 왜 거기서 기도하셨냐? 성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모든 행적들은 다 의미가 그기에 숨겨져 있잖아요. 겟세마네라는 이름이 영어로는 오일프레스(Oil Press) 다시 말하면 감람유를 짜는 틀이라는 소리입니다 겟세마네라는 뜻이 감람나무는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겁니다. 예레미야서11장16절 호세아서14장6절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예수님을 낳은 나라입니다 감람유는 예수님께서 무엇을 상징하시냐면 예수님의 보혈을 상징하는 겁니다. 기름부음을 받았다 할 때 감람유로 기름 부음을 받는 겁니다. 그래서 구약에서는 제사장이 기름 부음을 받는 겁니다.

아론과 그 아들들이 기름 부음을 받는 장면을 보면 감람유를 부었습니다.

출애굽기30장30절에 민수기35장25절에 또 왕을 세울 때도 감람유를 부었습니다. 다윗 왕 열왕기상1장34절 역대상11장3절에 그리고는 예수님이 기름부음을 받는 분이라고 성서에서는 표현합니다. 예수님이 기름부음을 받는 분 감람유를 받는다. 다니엘서9장24절26절에 이사야서61장1절은 그대로누가복음4장18절에서 그대로 재현이 됩니다. 성취가 됩니다. 그리고 사도행전4장27절에 보면 예수님이 감람유를 통해서 기름부음을 받으신다.

겟세마네가 뭐라고 그랬습니까? 감람유를 짜는 틀이라고 그랬습니다.

예수님이 겟세마네에 가신 것이 무엇일까요 감람유를 내기 위해서 특 속에 들어가신 겁니다. 그래가지고 감람유가 나오는 것은 언제 나옵니까?

예수님이 보혈이 떨어질 때 예수님이 숨을 거두시는 그 순간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이럴 때 감람유가 나오면서 그 감람유를 통해서 우리가 생명을 얻는 겁니다. 그러니까 감람유가 나오기 전까지는 감람열매가 특 속에 들어가 있어야 되잖아요. 그 틀 속에 들어가는 게 감람산기도부터 시작해서 숨 거두시기 전까지 과정이 틀 속에 들어가는 겁니다. 잔속에 들어가는 겁니다.

잔이 준비되어야 되잖아요. 과정이 잔입니다 잔이 준비되어야지만 감람유가 떨어질 때 탁 받을 수가 있는 겁니다. 예수님의 보혈을 받을 수가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전인적인 구원이 잔이라고 그랬잖아요. 전인적인 구원과정이 들어가야지만 예수님이 이것을 보여주시는 겁니다. 너희들의 구원이 단순한 영적인 구원만이 아니다 전인적인 구원이라는 겁니다. 이 구원을 위해서나는 겟세마네기도부터 시작해서 이 과정을 내가 겪어야 된다는 겁니다.

이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겟세마네동산이라는 이름을 예수님이 붙이도록 하신 것 같습니다. 훨씬 전에 구약 때 저 곳이 겟세마네다. 겟세마네다. 아무도 뜻도 모르고 그냥 부른 겁니다. 예수님이 3년 공생애 동안에 심심하시면 가시는 게 아니잖아요. 분명히 예수님의 뜻이 계셔서 겟세마네에 자주 가서 기도연습을 하시는 겁니다. 마지막 기도를 위해서 그래서 가룟 유다도 그 자리를 알았더라. 그랬습니다. 왜냐면 알아야지만 예수님을 체포 하러오잖아요. 안 그러면 찾으러 다니려면 또 바쁠 겁니다.

그러니까 미리 다 준비를 하신 겁니다. 전인구원을 위해서 이렇게 겟세마네 기도를 우리가 보면서 하나님의 구원계획과 실제로 우리 삶 속에서 보여주는 것이 기가 막히구나. 이것이 보이세요.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그리스도의 보혈을 찬송하고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사건을 우리가 묵상하면서 이것이 하나의 상식적인 하나의 단어가 아니구나. 그냥 정보가 아니구나. 이것은 대단한 하나님의 사랑의 결정체구나 이것을 위해서 얼마나 창조주삼위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이것을 이루기 위해서 성자하나님이 인간으로 오셔서 이렇게 자세하게 우리에게 다 보여주시고 정말 먼지 같은 존재인 우리에게 이것을 보여주시고 애들아 우리가 너희들을 이렇게 사랑한다. 이것을 깨달아라.

이 세상에 잡다한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너희들은 잠깐 이 세상에 근야 사는 거다. 삶을 이 세상에서 멋있게 살되 여기에 눈이 떨어있지 않고 너희 눈이 전천후 눈이 되어서 올라왔다 내려갔다 하면서 언젠가는 쫘악 올라갈 거다. 그러니 너희들 이것 때문에 이것을 가르치려고 내가 너희들에게 겟세마네기도의 모습을 한번 보여준 것이다 너희들은 전인적인 크리스천이 되어라 이것을 다 가르쳐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보혈의 찬송을 할 때마다 주님의 마음을 묵상하시면서 같이 보혈의 찬송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기도드리겠습니다.

예수님! 예수님께서 겟세마네에 왜 가셨는지 거기서 왜 세 번씩이나 기도하셨는지 조금은 저희들이 소화가 되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 예수님이 하나님이시고 창조주 되시는데 이 잔을 받지 않으려고 했던 그 이유를 저희들이 깨달았습니다. 피조물들이 창조의 목적을 생각지도 않고 이해하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고 창조주를 무례히 대했던 이 사실에 대해서 예수님은 참기 힘들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이것을 안 지시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심정을 저희들이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저희들도 우리 삶 속에서 예수님의 창조주 되심을 예수님의 창조의 목적에 위배되는 삶을 살지 않도록 우리의 마음을 점검해 주시고 우리가 항상 파이프라인을 올려서 창조의 목적에 열람되는 우리의 삶이 되도록 은혜 베풀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예수님! 저희들은 예수님이 흙으로 창조하신 하나의 먼지 같은 피조물들입니다 그렇지만 은혜를 주셔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게 하시고 피조물들을 관리 보전하는 책임까지도 주셨는데 저희들이 이 엄청난 책임을 받았지만 우리에게 이 책임을 주시고 영생을 주신 창조주가 누구인 것을 알지 못하고 그저 나의 어떤 만족만을 위해서 나의 피로만을 위해서 하나님을 이용했던 것 죄송합니다. 창조주를 창조목적에 따라 섬기게 되면 창조주가 약속하신 한량없는 행복과 사랑과 은혜와 삶의 존재가치를 깨달을 수 있는데 저희들이 우둔하여 이렇게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라고 우리에게 인간으로 오셔서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가르쳐주시고 깨닫게 하시고 영원한 생명까지도 주셨는데 우리는 아직도 그 하나님의 뜻을 잘 깨닫지 못하고 순종치 못하고 매일매일 나의 필한 것을 채워주는 단지 하나님으로 종교의 하나님으로 생각하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저희들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예수님의 그 고귀한 보혈의 선물을 우리에게 주셨을 때 그것이 사람의 피가 아니고 하나님의 피 입니다. 하님의 생명입니다 이것 때문에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영원한 세계에서 주님과 같이 살고 있는 특권을 받았지만 여기에 대한 감격이 없습니다. 감사가 없습니다.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그저 주시니 그냥 받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저희들 용서해주시옵소서. 이무지함을 무감각함을 용서해주시옵소서 저희들이 이 찬송을 부를 때마다 이미 백여 년 전에 미국에 주님의 자녀들이 이런 찬송을 만들어서 고백하며 그 당시에 주님을 섬겼던 분들 목숨을 바치며 미 전도족속에게 복음을 전했던 사람들입니다. 이분들은 지금 다 낙원에 가 있습니다. 저희들이 그분들의 후속으로 지금 주님 앞에 섬기기를 소원합니다.

 

오! 주님 벌써 백여 년 전에 이 고백을 했던 주님의 백성들처럼 우리에게도 이 고백이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나오도록 성령님 저희들을 주관해 주시옵소서. 그럴 때 성령님이여 이것에 있는 한분, 한분에게 성령님의 기름 부으심이 임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이곳에 계시는 한분, 한분에게 안수해주시고 성령님의 기름 부으심을 주셔서 창조의 목적에 우리가 부합되는 삶을 사는데 부족함이 없도록 은혜 베풀어 주시옵소서. 주님 저희들이 마지막 찬송을 다시 한 번 부르기를 원합니다. 이 찬양을 부르며 주님 앞에 우리 마음을 드릴 때 성령님이시여 우리 한분 한분에게 기름 부어 주시옵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