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강해

요한복음강해 31강. (요20장1-31)부활하신 예수님

변명섭 2021. 10. 25. 13:27

요한복음강해 31강. 부활하신 예수님(요20:1-31)

오늘 주님이 주시는 말씀을 같이 보겠습니다. 말씀은 요한복음20장 전체를 보게 될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주님이 주신 말씀을 잠깐 상고하겠습니다.

지난 시간에 주신 말씀은 요한복음18장과19장 전체를 우리가 봤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성취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지난시간에 저희들이 상고했습니다. 그기에 열 가지 예수님의 십자가사건 준비하시는 모습을 우리가 상고했는데 다시 한 번 적어 보세요. 지난시간에 했지만 열 자기 중에 첫째는 예수님의 체포과정 두 번째는 안나스 공관에 끌려가는 과정 세 번째는 가야바 뜰에 가는 장면 네 번째는 빌라도에게 가는 장면 다섯 번째는 헤롯에게 갔다가 빌라도에게 다시 가는 장면 일곱 번째는 죽을 준비하시는 과정 여덟 번째는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 아홉 번째는 십자가에 못 박히심 열 번째는 죽으심 이 순서입니다 이렇게 죽으신 다음에 예수님이 아리마대 요셉을 사용 하셔서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자리에 안치되는 그러한 일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지금 3일 있다가 예수님이 부활하시는 장면입니다

오늘 부활하시는 장면을 자세히 들여다보겠습니다. 부활이야기는 제가 오늘도 하고 다음시간에도 계속해서 부활에 관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오늘은 부활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 항상 제가 지난시간에도 봤지만 4복음서에 다 기록되어있기 때문에 4복음서를 동시에 같이 봐야 됩니다.

4복음서가 부활장면에 표기한 내용들이 조금씩 다릅니다.

그리고 길이가 다릅니다. 어떤 분은 짧게 말씀하시고 어떤 분은 길게 말씀하시고 그리고 어떤 분은 어디를 강조하시는데 강조점이 서로 다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유 신학자들은 이런걸 보고 봐라 하나님의 말씀이 앞뒤가 서로 맞지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다 그냥 그 당시의 저자들이 자기네 생각대로 쓴 것이라고 자유 신학자들은 성경을 이렇게 비평을 합니다. 이렇게 할 수 있습니다. 이성적으로 볼 때 그런데 실제로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하나님이 성서 특히 4복음서에 보면 이렇게 마태, 마가, 누가, 요한 네 분이 예수님의 사건을 또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이렇게 표현하실 때 조금씩 다르게 표현을 일부로 하도록 하신 겁니다.

왜냐면 이 사람들이 배경이 다른 사람들입니다 저자들의 개인적인 배경이 다른 것뿐 아니라 서술을 하실 때 상황이 다른 겁니다. 이분들이 서술하실 때 우리가 알다시피 마태복음은 언제입니까? 주후50년에서52년 누가복음은 언제입니까? 주후60년에62년 마가복음은 주후65년 전후 그다음에 요한복음은 주후68년에서70년 전 이렇게 저술시기가 다르고 상황이 다르고 목적이 달랐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님께서 이분들에게 이런, 이런 부분은 삭제하라 쓰지 말라 이런, 이런 부분은 강조하라 이렇게 표현도 이런 식을 해라 이렇게 다르게 하신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렇게 글 쓴 것을 다보고 종합적으로 보는 연습을 할 필요가 있는 겁니다. 한쪽만 보면 그기에 해석에 분제가 생기는 겁니다. 종합적으로 보는 연습을 해야 됩니다.

그다음에 오늘 우리가 요한복음을 보기 때문에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부활사건을 앞에 자세한 스토리는 다 삭제를 해버렸습니다. 요한복음에는 아예 삭제가 아니고 요한은 아예 그것을 쓰지를 않았습니다. 왜 그러겠습니까?

요한복음은 제일 나중에 기록된 책이기 때문에 이미 마태, 마가, 누가가 써놓은 것을 다시 반복할 필요가 없는 겁니다. 거기다가 요한복음은 어디에 강조점이 있습니까? 예수님의 신성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되심과 그리스도 되심에 관심이 있기 때문에 그쪽 분야를 빼놓고는 저술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요한이 그랬잖아요. 내가 쓸 것이 무지무지하게 많다 그렇지만 꼭 필요한 것만 내가 골라서 썼다라고 이분이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19장 마지막부분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배경을 보시고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을 이해하려면 요한복음 오늘 본문1절2절3절 그것부터 보면 안 됩니다.

왜냐면 그 사건 있기 전에 일어났던 일들이 공관복음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그러니까 우리가 공관복음을 볼 필요가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있는 겁니다. 그러면 공관복음에서 제일 먼저 마태가 때를 이야기할 때 언제 무덤에 찾아간 때입니다 언제 찾아갔느냐 그 표현을 먼저 했습니다.

네 분이 언제 찾아갔느냐 말을 했는데 표현이 조금씩, 조금씩 다릅니다.

마태는 방문한 날짜와 시간을 이렇게 표현을 했습니다. 마태복음28장에 안식 후 첫날 미명에 이렇게 표현을 했습니다. 안식 후 첫날이라는 이 개념을 잘 알 필요가 있습니다. 안식일이 어느 날입니까? 안식일 시작이 어디입니까? 우리식으로 말하면 안식일 시작이 금요일저녁6시부터입니다

금요일저녁6사부터 토요일 오후6시까지 그게 안식일입니다 그리고 안식 후 첫날이니까 정확하게 말하면 몇 시부터 몇 시입니까? 토요일 저녁6시부터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토요일 저녁6시 이후가 안식 후 첫날입니다

첫날이 저녁6시부터 주일날 저녁6시까지입니다 요 사이에 예수님이 부활하셨는데 지금 이분들이 안식 후 첫날 미명에 가보니까 이미 예수님이 계셨습니까? 안 계셨습니까? 안 계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부활을 언제 했다고 생각이 됩니까? 예수님이 여러 번 이야기 했습니다. 마태복음16정21절에도 그랬습니다. 예수님이 내가 죽었다가 3일에 부활하리라 그랬습니다.

3일에 그렇기 때문에 분명히 이분이 안식 후 다음날에 부활하셔야 됩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이렵니다. 어떻게 3일이 됩니까? 3일이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게 질문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왜냐면 날짜로 24시간 24시간 하년 몇 시간입니까? 48시간 72시간이 3일인데 72시간이 아닙니다. 그런데 72시간으로 따지는 게 아닙니다. 유대인들이 날짜를 따지는 것은 시간이 한 시간이라도 하루입니다 그러면 보세요. 금요일 날 몇 시에 예수님이 숨을 거두었습니까? 오후3시입니다 금요일 날은 예수님이 3시간 밖에 금요일을 지내지 않았습니다. 그다음에 토요일은 안식일로 24시간 지냈습니다. 그다음에 주일날은 토요일저녁6시부터입니다 그러니까 몇 시에 부활하신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그 날에 부활하신 겁니다. 그러니까 분명히 어두울 때 부활하신 것이 틀림없습니다. 시간은 정확하게 모르지만 하여튼 새벽미명에 가보니까 이미 안 계셨던 겁니다. 그러니까 며칠입니까? 유대인의 계산으로는 3일인 겁니다. 그걸 생각하시면서 마태복음28장1절에 안식 후 첫날 새벽미명에 이렇게 말했고 마가는 마가복음16장2절에 안식 후 첫날 매우 일찍 해 돋을 때 이렇게 표현을 했습니다. 누가는 어떻게 표현을 하느냐면 누가복음24장1절에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이렇게 표현을 했습니다.

요한은 어떻게 표현을 했느냐면 요한복음20장1절에 안식 후 첫날 일찍이 아직 어두울 때 이 말은 예수님의 부활했다는 이야기가 아니고 여자들이 간 시간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러면 방문자들이 누구인가? 마태나 마가나 누가나 요한이 다 다르게 표현을 했습니다. 같은 의미인데 마태는 1절에 그랬습니다. 막달라 마리아 그다음에 다른 마리아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런데 마가는 막달라 마리아 그다음에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 그다음에 살로메까지 집어넣었습니다. 누가는 어떻게 표현 했느냐면 여자들이라고 말했습니다. 막연히 여자들이 그랬는데 누가가 나중에 24장10절에 막달라 마리아 그리고 요안나를 집어넣었습니다. 그리고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를 집어넣고 그다음에는 나머지는 다른 여자들 이렇게 써놓았습니다.

그러니까 이걸 종합해서 여러분들이 봐야 합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는 20장1절에 요한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다른 여자는 다 제하여 버리고 막달라 마리아 이렇게 써놓았습니다. 그러니까 요한은 아주 중요한 인물들만 부각시킵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요한은 누구를 부각시키느냐면 베드로와 요한 자기 자신입니다 이 세분을 집중적으로 분석을 하고 그분들이 했던 일들을 요한은 설명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 여자 분들이 향 품을 가지고 예수님께 간 겁니다. 그것은 마가와 누가만 이야기를 했습니다. 향 품을 가지고 간다고 그때 향 품을 마가는 뭐라고 표현을 했느냐면 향 품을 미리 사두었다가 가지고 간다. 이렇게 표현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막달라 마리아가 그 중에 가장 지도자 같습니다. 이 여자가 미리 다 시장에 가가지고 예수님의 시체에 바를 향 품을 다 준비했던 겁니다. 누가는 그냥 향 품을 가지고 간다. 이렇게 써놓고 마가가 그런 부분에서 자세히 썼습니다. 그러니까 이분들이 예수님을 상당히 사랑했던 분임이 틀림없습니다. 여자 분들이 제자들은 남자 분들은 그런 생각도 안 했습니다. 그런 걸 보면 성서에 보면 여자들이 참으로 자상했던 것을 우리가 볼 수가 있습니다. 이게 하나의 예표로써 지난2천년 동안 교회역사를 보면 이런 자상한 부분들은 다 여자들이 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헌신을 보면 그리고 오늘날 전 세계어디를 가나 교회에서 기둥역할을 하는 분들은 다 여자들입니다 그것뿐만 아닙니다. 숫자도 어느 나라나 어느 교회나 여자의 퍼센트가 약70%입니다. 그래서 제가 우리교회를 이렇게 보는 겁니다. 과연 여자가70%가 되는가? 그런데 우리교회는 조금 이상한 교회입니다 여자가70%가 아닙니다. 약 절반, 절반 이렇게 여자들을 주님이 쓰시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특히 막달라 마리아 같은 여자는 어떤 여자입니까? 귀신들렸던 여자입니다 예수님께 은혜를 많이 받은 여자입니다

그래서 이 여자가 예수님을 열심히 따라다니고 그러니까 모든 것을 최우선으로 하고 예수님을 따라 다녔던 여자입니다 우선순위가 철저하게 서 있었던 여자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이 여자를 사랑하셨던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항상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그랬지 않습니까?

똑같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사랑을 받으시려면 우선순위를 잘 정하셔야 됩니다. 우선순위가 잘 안된 우리자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와의 관계 속에서 자기가 필요할 때만 아빠와 엄마에게 뭘 달라고 그러고 이런 자녀하고 자나 깨나 엄마아버지를 생각하는 자녀하고는 이게 질이 다릅니다.

관계성이 달라지는 겁니다. 똑같습니다. 마태는 여자들이 이렇게 왔다고 표현한 다음에 마태가 다른 복음서에서 표현 안한 표현이 있습니다.

마태복음28장2절에 뭐라고 표현했느냐면 지진이 있었다. 이렇게 표현을 했습니다. 지금 갈보리에 그런데 원어를 들여다보면 마태가 갔을 때 여자들이 갔을 때 지진이 일어난 게 아니고 과거완료형으로 써놓았습니다.

과거완료형으로 썼다는 것은 여자들이 새벽에 가기 전에 아마 지진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지진이 있었는데 지진이 있었어. 예수님의 무덤에 돌이 옮겨졌다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지진이 있었다. 그랬습니다. 그런데 그 뒤에는 누가 돌을 옮겼느냐 보면 천사가 돌을 옮겼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볼 수 있는 게 아하! 지진도 누가 일으킵니까? 천사가 와서 지진을 일으킨다는 겁니다. 소돔과고모라성이 무너질 때 천사 몇 분이 가서 소돔과고모라 성을 무너지게 했습니까? 두 천사가 창세기19장2절에 보면 두 천사가 완전히 지진을 일으켜가지고 불나게 하고 건물들을 다 파괴시켜버렸습니다. 그러듯이 오늘날 여기저기에서 지진이 많이 일어나잖아요.

예수님이 마태복음24장에서 분명히 말씀하셨잖아요. 또 계시록6장에서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마지막 때가 되면 지진이 일어나리라. 그럴 때마다 지진을 예수님이 직접 일으키겠습니까? 예수님이 창조주가 그럴 것까지 안 하십니다 그냥 천사에게 한마디만 눈짓만 해도 그것도 많은 천사가 아니고 한 천사에게 그냥 지구를 한번 흔들어라 하면 이슬람지역이 지진이 일어나고 있잖아요. 천사가 한분이가서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천사가 우리를 보호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천사가 가서 지진을 일으켰다는 내용이 마태복음에 있습니다. 마가는 그것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마가복음16장3절에 이 여자들이 가니까 지진이 일어나가지고 무덤 문이 열린 것을 보지 못하고 이 여자들이 가가지고 돌을 옮길 걱정을 먼저 했다 이렇게 써놓았습니다. 그래서 서로 말하되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 3절에 이렇게 표현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여자들이 가가지고 아직 마음이 급해가지고 무덤 문이 열려있는 것도 보지를 못한 겁니다.

마태는 28장2절에 천사가 그렇게 했다 그리고는 돌을 옮겨놓고 천사가 돌 위에 앉아 계셨다 마태는 이렇게 표현을 했습니다. 이렇게 앉아있더라 이런 표현은 마태만 했습니다. 그런데 마가는 여자들이 걱정을 하고 있는데 눈을 들어보니까 돌이 굴려서 저 쪽으로 넘어져 있는 걸 본 겁니다. 그런데 마가는 이런 표현을 했습니다. 5절에 돌이 굴려져 있어 여자들이 그대로 무덤에 들어갔다 그러니까 무덤에 먼저 들어간 분들은 이 여자들입니다 무덤 속에 들어갔다는 표현은 마태와 마가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들어가니까 예수님의 시체가 있던 머리맡에 천사한분이 발끝에 천사한분이 그래서 천사한분이 아니고 두 분이 거기에 계신 것을 본 겁니다. 누가도 똑같이 누가복음24장4절에 천사가 둘이 있었다. 그랬는데 마가는 표현을 아주 묘하게 했습니다.

마가복음16장4절에 천사 두 분이 있는 걸 뭐라고 그랬냐면 청년이 우편에 앉아 있더라.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분명히 천사가 젊은 청년 모습으로 계셨음이 틀림없습니다. 여자모습이 아닙니다. 청년이 거기에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합니다. 요한은 이런 이야기를 전혀 안 했습니다. 요한은 그냥 20장2절에 돌이 옮겨진 것을 보았다. 요한은 막달라 마리아이야기만 합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돌이 옮겨진 것을 보았다 이렇게 말합니다. 다시 계속해서 마태복음으로 돌아가면 마태는 천사에 대한 모습을 설명하는 겁니다.

천사를 보니까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인데 그 형상이 번개 같고 옷은 흰 눈 같더라. 이렇게 표현을 했습니다. 그런데 마가는 어떻게 표현하느냐면 흰 옷 입은 한 청년이다 이렇게 표현을 했습니다. 누가는 어떻게 표현했느냐면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이렇게 표현을 했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나중에 20장12절에 이렇게 표현을 했습니다.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이렇게 표현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천사를 여러 가지로 이렇게 표현을 했습니다.

그러면 천사의 공통점을 우리가 보게 됩니다. 4복음서에서 뭘 보느냐면 첫째 천사가 옷을 입었음이 틀림없는 겁니다. 발가벗지는 않았습니다.

두 번째는 천사의 옷이 찬란하고 흰 옷이었습니다. 마태는 번개 같다고 그러고 흰 눈 같다고 표현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찬란한 옷이었습니다.

그런데 마태와 요한은 천사라고 표현을 했고 마가와 누가는 사람이라고 표현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천사가 사람모습으로 내려오셨음이 틀림없습니다.

어떤 때는 한 사람으로 표현하고 또는 두 사람으로 표현하는 겁니다.

이렇게 천사의 표현이 차이가 있습니다. 이렇게 천사를 표현한 다음에 계속해서 나타나는 장면이 뭐냐면 천사가 나타났으니까 무덤을 지키고 있던 파수꾼들이 덜덜 떠는 모습을 마태만 표현을 했습니다. 마태복음28장4절에 그랬습니다. 천사를 보고 파수꾼들이 두려워하고 떨면서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더라.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파수꾼들은 영안이 안 뜬 사람들입니다

일반사람들인데 천사가 일반사람들 눈에도 보였다는 겁니다. 크리스천들에게만 아니고 그런데 그 천사를 보고 예수 안 믿는 파수꾼들도 덜덜 떨었다고 그랬습니다. 그뿐 아니라 천사가 이렇게 나타나니까 여자들도 떨었다 그랬습니다. 여자들이 덜덜 떨고 있는 모습을 천사가 보고는 천사들이 하는 말이 있는 겁니다. 두려워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 내가 아노라 그리고 6절에 마태복음에 그러는 겁니다. 천사가 예수님의 부활을 선포하는 겁니다. 애들아 예수님이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는 겁니다.

왜 안 계신지 아느냐 예수님이 살아계셨을 때 무덤에 계시지 않겠다고 부활하신다고 말하지 않았느냐 그러면서 너희들 여기 좀 봐라 이 자리에 누웠잖느냐? 그런데 이 자리가 비어 있잖아 이렇게 천사들이 여자들에게 말하는 겁니다. 이런 스토리는 마가에게도 똑같이 했습니다. 누가에게도 똑같이 했습니다. 그런데 누가는 거기다가 또 한 가지 중요한 말씀을 붙여놓았습니다

누가복음24장6절7절8절에 굉장히 중요한 말씀을 거기다가 붙었습니다.

천사들이 하는 말을 누가는 뭐라고 붙여놓았느냐면 이 여자들아 너희들 갈릴리에 예수님이 계셨을 때 너희에게 어떻게 말한 줄 너희들이 기억나느냐 그러는 겁니다. 그 말씀이 뭐냐면 마태복음16장21절 똑같은 말씀을(누가복음9장22절)에 마태복음20장17절에서19절 똑같은 말씀을(마가복음10장32절34절)에 하셨습니다. 또 누가복음18장31절34절 말씀을 천사가 예수님이 하신 이 3번의 말씀을 인용을 하는 겁니다. 천사가 인용을 하는 겁니다.

애들아 예수님이 살아계실 때 갈릴리에서 너희들과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아느냐 예수님이 분명히 이런 말씀을 하셨지 내가 언젠가는 예루살렘에 가가지고 제사장들과 높은 분들에게 내가 어려움을 당하고 죽음을 당했다가 3일 만에 내가 부활한다고 하신 말씀 이 말씀이 그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미리 다 말씀하신 겁니다. 너희들 이 말씀 기억하느냐? 이렇게 기억하느냐? 그러니까 이분들이 천사들에게 이 말을 듣고는 기억합니다.

너희들이 기억하는대로 지금이 사건이 일어났다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그러면서 이 여자들에게 명령을 하는 겁니다. 애들아! 너희들 여기 있지 말고 이것을 기억을 못하는 나중에 제자들은 이것을 기억을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교회서도 보면 여자들이 훨씬 똑똑함을 보여주는 겁니다.

2천 년 전의 여자들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천사가 여자들에게 명령을 내리는 겁니다. 너희들 이러고 있지 말고 가서 제자들에게 이것을 보고해라 그래서 제자들에게 보고하는 장면을 마태는 기록하고 마가도 기록하고 누가도 기록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은 제자들에게 보고해라 하는 그 내용을 요한복음은 막달라 마리아 혼자 들은 것처럼 보고해라 하니까 막달라 마리아가 누구에게 보고하느냐면 베드로와 요한에게 보고하는 겁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여자들이 제자들에게 가는 겁니다. 그리고 누가복음에서도 제자들에게 가는데 신기한 게 제자들이 믿지를 않았더라. 이렇게 보고하는 겁니다. 나중에 성서를 보시면 마태복음도 그렇고 마가복음도 그렇고 믿지를 않았더라. 그런데 누가복음24장11절에 제자들은 믿지를 않았는데 그중에 베드로만 믿었는지 안 믿었는지 그 안에서 뛰어나와서 무덤으로 달려갔더라.

이렇게 써놓았습니다. 그러니까 다른 제자들은 덤덤했던 모양입니다

여기까지 우리가 공부하는 요한복음20장1절2절이 있기 전의 일들입니다

그 일들이 마태 마가 누가는 기록된 것을 설명해주었습니다.

그리고는 요한복음을 봅시다. 요한복음은 막달라 마리아가 제자들에게 가서 보고를 하는데 베드로와 요한이 응답하는 모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가지고 막달라 마리아가 제자들에게 특히 두 분에게 보고를 하는 보고장면을 보면 보고내용이 조금 변질되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보고할 때 보면 천사가 말한 것과 다릅니다. 어떻게 다르냐면 막달라 마리아가 이분들에게 뭐라고 말했느냐면 요한복음20장1절에 보면 무덤에 돌이 옮기진 사실만 보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베드로선생님 요한 선생님 우리가 가봤는데 무덤에 돌이 옮겨져 있습니다. 이분들이 그 이야기만 가지고는 안 되잖아요

예수님이 부활했습니다. 이렇게 말해야 되는데 그 말은 하지를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를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믿지 않는 것을 말 할 수가 없는 겁니다.

그렇지만 무덤이 그렇게 비어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이 두 남자 분들이 달려가는 내용입니다 왜냐면 이 여자가 비어있습니다. 그래놓고는 거기다가 토씨를 또 다는 겁니다. 뭐냐면 우리선생님의 우리주님의 무덤이 비어있는데 분명히 누가 시체를 옮겨갔을 거라고 생각이 던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요한과 베드로가 열을 받은 겁니다. 요한과 베드로도 예수님이 부활할 것을 아예 생각도 안 했습니다. 기억을 못했다고 그랬습니다. 그 말씀을 나중에 보면 압니다. 그러니까 이분들은 인간적인 측면에서 시체를 누가 훔쳐갔구나 생각하고 달려간 겁니다. 3절부터 보시면 달려갈 때 누가 먼저 달려갔습니까?

둘이 함께 달려갔는데 요한이 더 빨랐습니다. 그런데 요한이 빈 무덤에 도착했는데 이분이 들어가지 않고 어정쩡하게 있는 겁니다. 그런데 요한이 예수님의 시체에 쌓던 세마포 옷이 있는 걸 봤습니다. 그렇지만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누가 들어갔습니까? 베드로가 도착하지말자 그때 이분들이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믿었더라. 그랬습니다. 8절에 보면 그리고는 9절에 부연설명을 했습니다. 그들은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 그랬습니다. 예수님이 이분들 바로 옆에서 말씀하셨을 텐데 죽었다가 3일 만에 부활하실 것을 말씀하셨을 텐데

그것을 이해를 못했더라. 이렇게 부연설명을 했습니다. 요한이 자기 스스로 이해를 못했다는 소리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우리의 삶에 그대로 적용이 됩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부활을 이야기하지만 정말 피부로 느끼고 정말 이분의 부활에 대해서 앞으로 믿음이 오게 하려면 지금 이 사람들 수준 가지고는 안 된다는 겁니다. 이분들은 오순절 다락방사건이 없었잖아요

지적으로 이해만 한 겁니다. 어려움이 올 때는 이것이 그렇게 내게 와서 활력이 되지 않는 겁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 지적으로 이해만 하지 이것이 내 몸에 들어와서 살과 피가 되지 못합니다.

왜냐면 오순절성령의 경험이 없기 때문에 다음에 말씀으로써 깊이 내 속에 박혀있지 않기 때문에 이분들처럼 이렇게 됩니다. 이런 부분에서 부활에 관한 설교는 꼭 필요합니다. 이런 부분에서 우리가 깊이 묵상하고 이해해야 합니다. 제자들도 똑 같았습니다. 이분들이 이렇게 이해는 어느 정도 되었지만 가만히 보니 말씀대로 부활허신 모양이다 그렇지만 거기에 대한 의심이 많았습니다. 그러니까 이분들은 거기에서 다른 액션을 취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는 요한보고 그랬습니다. 요한아 우리 집에 돌아가자 막달라 마리아는 어땠습니까? 이 시체를 누가 훔쳐가지 않을까? 해서 이 여자는 지금 옆에서 울고 있었다고 그랬습니다. 11절에 보면 막달라 마리아는 무덤 밖에서 울고 있는데 이 남자들은 뭐라고 그럽니까? 야! 가자 이렇게 했다는 겁니다.

요한아! 가자 그래요 형! 이 정도 수준으로 끝났다는 겁니다. 그럴 때 이 여자는 울고 있고 두 제자들은 가자하면서 떠나버렸는데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는 겁니다. 그러면서 천사가 말하는 겁니다.

너 왜 우느냐 그러니까 이 여자가 대답하는 겁니다. 어떤 사람인지 모르지만 내 주님의 시체를 가지고 가버렸습니다. 어디에 두었는지 나는 찾고 싶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제자 둘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겁니다. 이여자인 막달라 마리아하고는 이렇게 천사하고 대화하고 있는데 갑자기 예수님이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부활하셔가지고 누구에게 제일 먼저 나타났습니까? 막달라 마리아에게 제일 먼저 나타나신 겁니다. 그러니까 이 여자의 하트(heart)를 아는 겁니다.

마음씨를 주님이 아시고 문제는 하트(heart)가 무엇이냐가 중요한 한 겁니다. 예수님이 나타났는데 14절에 그랬습니다.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으나 예수이신 줄은 알지 못하더라 하면서 예수님이 동산지기인 줄 알고 있었다는 겁니다. 15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이르되 주여(선생님) 당신이 옮겼거든(예수님을)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예수님이 동산지기인줄 알고 이 여자가 말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막달라 마리아를 부르시는 겁니다.

마리아야! 이렇게 부르시는 것을 보고 이 여자가 깜짝 놀라서 보니 지금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는 말이라) 더디어 예수님임을 알아차린 겁니다.

지금 이 이야기들은 공관 복음에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마리아야 너 나 만지지 마라는 겁니다. 그때 만진다는 말이 한국말로 만진다는 뜻으로 표현이 되었는데 원어로는 합토미로 기댄다는 뜻입니다

이걸 만지지마라 여자여 나에게 매달리지 마라 이런 표현 같습니다.

제가 상상합니다. 이 여자 분이 예수님 제발 가지 마세요. 내 옆에 있어주세요 아마 그렇게 했던 것 같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얼마나 기다렸는데요.

여기 그냥 계셔주세요 그러니까 나 만지지마라 그러시면서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기가 막히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 여자여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이렇게 말씀하시는 겁니다. 이 말이 뭐냐면 예수님이 십자가사건으로 숨을 거두는 순간에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서 내가 거기서 있다가 온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데 한국번역에는 아직 올라가지 아니하였다 그랬잖아요. 그런데 그게 아닙니다. 내가 계획이 있어서 아직 가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잠깐은 올라가셨던 것 같습니다

이분이 가신 것은 부활체시니까 눈만 깜박하면 그냥 올라가시잖아요,

어떻게 우리가 잠깐 올라가셨을까? 분명히 옆에 있는 강도에게 너는 오늘 나와 낙원에 있으리라 그랬잖아요. 그러니까 분명히 십자가사건이 있는 그 순간에 잠깐 그 형제를 데리고 아마 아버지께 소개를 해드렸던 것 갔습니다. 그리고 이분은 거기에 계시지 않고 내려오셔서 이분이 어디로 가셨다고 그랬습니까? 음부로 내려 가셨다 그랬습니다. 어떻게 압니까?

베드로에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베드로전서3장18절19절에 예수님이 이 자매에게 왜 만지지 못하게 했을까 저는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애야! 나 이제 근방 떠나지 않는다. 적어도 내가 40일은 너와 같이 지낼 거야 그랬습니다. 40일 동안 지내시다가 이분이 올라 가셨잖아요.

그러니까 걱정하지마라 그렇게 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지금 어디로 가셨습니까? 음부에 가셨습니다. 이 부분을 조금 있다가 심도 있게 보려고 합니다. 이런 경험을 하고는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을 만났다고 제자들에게 가서 보고하는 장면입니다 마가도 이 보고를 했고 누가도 보고를 했는데 마태는 이 보고를 안 했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아주 자세하게 이 부분을 보고합니다. 그런데 마가나 누가나 요한도 그럽니다. 제자들이 믿지를 않았다는 겁니다. 이 여자가 가서 보고하는데 믿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리고 있다가 나중에 의심 많은 도마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때 보고를 할 때 도마는 거기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도마가 돌아온 후에 제자들이 그러는 겁니다. 지금 여자가 이런 이러한 이야기를 하드라 그러니까 도마가 하는 말이 나 보지 않으면 내가 직접 손발보지 않으면 안 믿는다.

이렇게 말했잖아요. 그 말에 예수님이 딱 나타나신 겁니다. 그 말에 이분이 공간을 초월해서 그냥 거리가 멀어도 다 듣고 부활체 예수님이니까 문 열 필요도 없습니다. 그냥 뚫고 와 계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도마가 말하는 걸 듣고서 애야! 내 손발을 봐라 보면 부활체 예수님이신데 부활하셨으면 몸에 구조가 변해야 될 텐데 그대로 있는 겁니다. 그래서 구멍도 그대로 있는 겁니다. 이걸 조금 있으면 자세히 보게 될 겁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장면이 요한복음에 나옵니다. 그런데 그 장면이 끝나면서 그다음에 한 장면이 나오는데 그 장면은 마태복음에만 나오는 장면이 하나가 딱 있습니다.

그게 뭐냐면 마태복음28장11절에서15절에 파수꾼들이 천사를 보고는 겁이 나가지고는 분명히 파수꾼들의 생각에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 같기도 하고

천사를 보고는 겁이 나가지고 대제사장과 장로들에게 달려가서 보고를 하는 겁니다. 왜냐면 뜬금없이 시체를 잃어버렸으니까 자기들 책임이 따르잖아요?

그래서 가서 보고를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이 보고를 받고는 그분들이 뭐라고 그러는지 아세요. 애들아 너희들 이 말 어디 가서 하지마라 내가 너희들에게 돈을 많이 줄게 그래서 성서에 많은 돈을 뇌물로 주었다고 그랬습니다. 뇌물을 받고는 입 닥쳐라 그 대신에 뭐라고 말해야 되는지 아느냐 누가 와서 밤에 살짝 시체를 도적질 했다고 말하라는 겁니다.

부활했다는 말을 하지 말라는 겁니다. 왜 파수꾼을 거기다가 갖다 집어넣었습니까? 마태복음에는 그랬습니다. 예수님이 살아있을 때 죽었다가3일 만에 부활할 것을 여러 번 말씀한 것을 대제사장들이나 장로들은 믿은 겁니다.

그래서 파수꾼을 세워놓았는데 제자들은 믿지를 못했던 겁니다.

그래서3일 동안에 파수꾼을 세워놓았던 겁니다. 그런데 파수꾼들에게 뇌물을 주고는 말을 못하게 하는 겁니다. 그런데 마태가 어떻게 표현을 했느냐면 마태복음은 언제 썼습니까? 주후50년에서52년입니다. 뭐라고 써놓았느냐면 마태가 이렇게 써놓았습니다. 이 말(훔쳐갔다는 소문)이 오늘날까지 유대인 가운데 두루 퍼지니라 그랬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시간적인 개념을 가지고 있어야 됩니다. 예수님이 언제 돌아가셨습니까? 주후30년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마태복음을 쓴 것은 주후50년에서52년입니다 20년 동안 이 소문이 이스라엘지역에 퍼지고 사람들이 그대로 믿고 있었다는 겁니다.

20년 동안 성서를 이렇게 이해하려면 연대를 알아야 됩니다.

연대를 알아야 되는 겁니다. 이것을 주님의 뜻으로 알려면 연대고 역사고 뒤에 배경스토리를 아셔야 됩니다. 그런 것 필요 없습니다. 무조건 믿으면 되죠. 무조건 믿는 것도 한계가 있는 겁니다. 주님을 사알하시려면 무조건 믿으면 안 되는 겁니다. 이 사건이 있은 후에 다음에 누가가 다른 복음에는 일체 말을 안 하는데 누가만 말하는 한 사건이 또 하나가 있는 겁니다.

이 사건이 뭐냐면 그 유명한 엠마오도상의 두 제자사건입니다

그러니까 열두제자 외에도 다른 분들이 많았습니다. 두 제자가 누굽니까?

한 사람이름은 모르지만 한 사람이름은 글로바라는 사람입니다

엠마오사건은 누가복음에만 나오는 사건입니다 이분들이 예수님이 죽으신 후에 마음이 허전해서 둘이 예수님이야기를 하면서 가는 겁니다.

이분이 3일 안에 살아난다고 했는데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가는데 그분의 대화 속에 예수님이 나타나시는 겁니다. 그래가지고 애들아 너희들 대화하는 것 내가 다 들었다. 너희들 생각나느냐 성서에 그러면서 24징27절에 모세가 또는 시편과 모든 선지자들의 글을 봐라 다 내가 이렇게 살아나는 것을 이렇게 이야기하지 않았느냐 그래도 너희들 모르느냐 그러면서 주님이 성경을 쫘악 풀어주는 겁니다. 길에서 이 두 사람에게 그러니까 두 사람이 그러는 겁니다. 날이 이미 기울었으니 우리와 함께 주무시면서 대화를 더 합시다

그래서 예수님도 어느 집에 들어갔습니다. 식사를 같이 하면서 예수님이 떡을 가지고는 축복기도를 해주는 겁니다. 축복기도해주는 그 순간에 그냥 이분들이 눈이 밝아지면서 예수님이 보이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분들이 놀라면서 그길로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가는 장면입니다 십리길이라니까 4km가 십리니까 성서에 보면 몇 십리길이라고 그랬습니다. 그 길을 엠마오가25리라고 그랬습니다. 25리길이니까 엠마오와 예루살렘까지 몇 km입니까?

10km거리입니다 예루살렘에서 북서쪽에 있습니다. 이분들이 10km를 달려서 다시 예루살렘에 와서 열두제자에게 가서 여보세요 우리가 예수님을 봤습니다. 그러는 겁니다. 베드로도 그러는 겁니다. 나도 예수님을 본 것 같다.

라고 아직도 확신은 없지만 이런 식으로 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럴 때 예수님이 그분들 그룹 속에 나타나시는 겁니다. 그 그룹 속에 나타나시는 이야기를 마태는 안 했는데 마가가 하고 그런데 마가는 간단하게 했습니다. 누가 가 아주 자세하게 말하고 요한도 아주 자세하게 말했습니다.

그 장면에서의 사건을 그러니까 복잡합니다. 복잡하니까 어떻게 해야 합니까? 공부해야 되고 또 이 CD를 사다가 들으셔야 됩니다. 그렇게 안 하면 계속 원점에 있게 됩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친히 나타나셔서 하시는 말씀을 보면 평강이 있을지어다. 그리고 너희들 걱정하지마라 평강을 가져라 그리고는 손과 옆구리를 딱 보여주시는 겁니다. 제자들의 반응이 기뻤다 그랬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고 요한복음에서 그랬습니다. 너희들은 이제 이 사건을 지적으로 이해하지 말고 너희들도 나가서 복음을 전해라는 겁니다. 누가복음에는 더 자세하게 예수님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어찌하여 너희들은 나를 이렇게 의심하고 두려워하느냐 내 손과 발을 봐라 못 자국이 여기 있다 나를 만져봐라 그러면서 이분이 말씀하는 것이 있습니다.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그러니까 예수님이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부활체인 자기는 살과 뼈가 있다는 겁니다. 영이라고 두려워하니까 그런데 이분들이 믿지를 못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살과 뼈가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먹을 것이 있느냐 그러니까 제자들이 생선 한 토막을 갖다 드리는 겁니다. 그러니까 생선을 잡수시는 모습이 나옵니다. 이런 설명을 하시면서 나중에 우리가 배울 점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건이 있은 후에 8일이 나났습니다. 예수님이 또 이분들 모임에 가셨는데 거기에 도마가 있는 겁니다. 도마보고 그럽니다. 너 지난번에 의심했지 이걸 보아라! 그러니까 부활체의 예수님이신데 손과 발에 자국이 다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분이 보고는 나의 주님이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하면서 이분이 고백하시는 장면은 요한복음에 다 나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이 요한복음을 쓰신 목적을 말씀하시고 20장에 부활사건을 이렇게 다루시는데 부활사건을 가지고 질문이 몇 개가 있습니다.

질문을 잘 받아서 소화하시기 바랍니다. 첫째 질문입니다 예수님이 3일간 어디에 가셨을까? 이게 첫째 질문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다 알다시피 음부에 가셨다 베드로전서3장18절에서19절 예수님이 육체로 죽임을 당 하사 이것은 육체적인 십자가사건입니다 그런데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나니 부활체 영으로 다시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나실 것을 말씀하신 겁니다.

그런 부활체의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셨다. 라고 과거형으로 써놓았습니다. 19절에 이 부분은 우리AMI교회 교인들 대부분은 다 아십니다.

알지만 또 메모하셔야 됩니다. 음부를 보세요. 우리가 죽으면 음부에 가는 게 아니고 크리스천들이 죽으면 낙원에 갑니다.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이 죽으면 지옥에 가는 게 아니고 일단은 음부에 가는 겁니다. 그래서 음부를 성경에서는 네 가지로 표현했습니다. 아비스. 바탐레스(무저갱),하데스, 프리젼 지금 베드로전서에서는 옥에 있는 영들에게 가서 선포하셨다 이렇게 써놓았습니다. 그 옥이 음부 스올 또는 하데스 또는 아비스 또는 무저갱 이렇게 표현하는 겁니다. 이렇게 표현하고는 지옥은 심판이 끝나면 가는 곳입니다.

심판 끝나면 가는 곳인데 무저갱에 있는 예수 안 믿었던 사람들을 거기서 부활을 시켜가지고 지옥으로 옮겨가는 겁니다. 계시록20장에 보면 다 나옵니다. 그런데 지옥을 이렇게 4가지로 표현합니다. 게헨나 쓰레기장이라는 뜻입니다 또는 불과 유황 못(불 못)이렇게 지옥을 표현했는데 음부에 두 방 학설이 있습니다. 음부에 방이 2개가 있다는 겁니다. 누가복음16장22절에 나옵니다. 아브라함의 품이라는 곳이 있고 두 번째는 음부라 그랬습니다. 16장23절에 나사로라 이름하는 거지는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는 음부에 갔는데 그런데 서로가 마주보면서 그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있는데 건너지는 못하지만 서로 목소리도 듣고 보이고 하는데 서로 넘어가지는 못하는 겁니다. 그러데 이쪽에는 아브라함의 품에 있는 사람은 훨씬 좋은 곳이고 음부는 훨씬 나쁜 곳이고 이게 하나의 학설입니다 저도 이분이 학설로 저한데 수용이 됩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은 수용을 안 해도 괜찮습니다.

아브라함의 품은 같은 음부지만 좋은 음부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가는 곳이구나. 라는 이야기를 저가 수십 번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우리가 정돈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이걸 절 정돈하시길 바랍니다. 십자가사건 전에 죽었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2천 년 전 구약 때 꼭 이스라엘사람만이 아닙니다. 전 세계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 중에 두 가지 사람들이 있는 겁니다.

유대인이 있고 이방인이 있는 겁니다. 십자가사건 전에 죽었던 사람들 유대인들 중에 일반유대인들을 보면 이 사람들은 어디로 갔다고 생각을 합니까?

이분들은 하나님의 선택받은 자들이고 언젠가는 하나님이 다 구원하는 자들입니다 언젠가는 구원한다는 것이 언제입니까? 로마서12장26절에 이방인의 숫자가 찾을 때입니다 구약 때 죽은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품에 갔을 것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분들은 어떻게 했겠습니까? 이분들은 예수님이 3일 동안에 들려가지고 애들아 낙원으로 가자하고 데리고 갔을 수도 있을 겁니다. 아마도 예수님이 분명히 그렇게 하셨을 겁니다. 그런데 신기한 게 구약 때 사람들 중에서 만약에 낙원에 다 올라갔으면 십자가사건 전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3층천에 올라가보니까 낙원에 올라가보니까 거기에 모세와 엘리야가 계시는 겁니다. 마태복음17장3절에 이걸 보면 어떻게 된 겁니까?

십자가사건 전인데 그래서 우리가 상상하는 겁니다. 아하! 이분들은 언제든지 언젠가는 하나님의 보혈에 해택을 받는 사람들인데 특수케이스로 저분들은 아마 죽자말자 주님께서 낙원으로 데리고 가지 않으셨나. 이렇게도 생각되고 아마도 아브라함의 품에 잠깐 있게 했다가 예수님이 무소부재하시니까 아무 때라도 십자사건 전이라도 내려가셔서 애들아 낙원으로 가자했을 수도 있습니다. 이분이 구원주신데 꼭 십자가사건이 아니라도 이분은 할 수 있잖아요. 우리는 일반사람들은 안 되지만 예외조항들은 항상 있잖아요.

창조주가 왜 못하니까? 창조주가 법을 만들어 놓고 그 법에만 들어가 있으면 창조주도 법의 노예가 되어 버립니다. 우리에게 일방적으로 법을 만들어 놓고는 그분은 예외조항을 얼마든지 할 수 있잖아요. 스스로가 그걸 믿으십니까? 이방인들은 어떻게 됩니까? 십자가사건 전입니다 예정된 이방인들은

어디로 가겠습니까? 아브라함의 품에 갔을 겁니다.

그렇게 생각 안 됩니까? 그러니까 우리나라에 복음이 들어오기 전에 수많은 괜찮은 사람들이 많았잖아요. 이런 사람들을 가지고 이야기할 때 그분들이 누구라고 이야기하기는 그렇지만 하여튼 괜찮은 사람들 많았잖아요.

그 사람들 중에 예정 되었다면 아브라함의 품에 갔다가 주님이 낙원으로 아마도 데리고 올라 가지 않으셨나. 그렇게 보는 겁니다. 이게 다 우리 추측입니다 비 예정된 자들은 볼 것 없는 겁니다. 구약 때도 옛날에 이 사람들은 분명히 음부에 갔을 겁니다. 십자가사건 후에 죽었던 사람들을 보면 유대인들 중에서 십자가사건 후에 열두제자들 그 사람들은 메시아닉 쥬가 아닙니까? 열두제자들은 어디로 갔겠습니까? 또 그기에 1세기 때 크리스천들 그런 분들은 다 낙원에 갔을 겁니다. 말할 것도 없잖아요. 그런데 유대인들 중에서 비 크리스천유대인 특별 유대인들입니다 그다음에 일반유대인들 유대인들은 다 구원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를 안 믿는 겁니다.

1세기 때 2세기 때 3세기 때 주욱 해서 지금까지 예수는 안 믿는데 이것은 제가 그냥 상상한 겁니다. 천국에 올라가서 여쭈어 보기는 여쭈어 보아야겠지만 상상하는 겁니다. 여기 보면 특수한 하나님이 사랑했던 사람들은 주님이 예외조항으로 했듯이 비 크리스천유대인 중에서 예수 안 믿는 유대인 중에서 아브라함의 품에 넣었다가 주님이 언젠가는 낙원으로 데리고 올라가는 사람들도 없지 않아있지 않을까 생각하는 겁니다. 유대인들은 죽으면 어디로 갑니까? 아브라함의 품에 가니까 어떤 사람들은 아브라함의 품에 계속 있는 유대인들도 분명히 있을 겁니다. 언제까지냐면 이방인의 숫자가 찰 때까지 거기에 있는 사람들도 있겠다고 보는 겁니다. 그 대신에 예정 받은 이방인들은 복음을 받고 죽은 자들은 낙원에 가지만 복음을 받지 않고 미전도 족속들 우리조상들도 이런 분들이 많잖아요. 그렇지만 예정된 사람들 이런 사람들은 아브라함의 품으로 보냈다가 낙원으로 이미 가 있을 수도 있는 겁니다.

예정된 자들은 그다음에 비 예정된 자들은 이렇게 우리가 한번 볼 수가 있습니다. 질문이 또 하나 있습니다. 왜 아리마대 사람 요셉의 무덤에 예수님의 시체를 보관했느냐 입니다. 이걸 물어보면 대답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첫째는 이사야53장9절에 예언을 했습니다. 이사야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강포를 행치 아니하시고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 폭력을 쓰지 않으셨다는 겁니다. 그리고 입에 거짓이 없었다는 겁니다. 다시 말하면 속임수가 없었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그런 사람이기 때문에 이분이 부자와 함께 부자무덤에 들어가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무덤은 악인과 함께 있었다고 그랬습니다. 여기가 아주 특수한 표현입니다 무덤은 악인과 함께 있었다는 것은 무덤 자리가 어디였습니까? 갈보리 또는 골고다입니다

공동묘지는 악인들이 묻혀있는 곳입니다 그런데 묘실은 부자묘실에 들어 가셨다는 겁니다. 이유는 뭐냐면 이분이 강포를 행치 않고 속임수가 없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아리마대요셉이 어떤 사람이기에 이렇게 이분이 이 은혜를 받았느냐 이겁니다. 그래서 성서를 주욱 보니까 누가복음23장50절에서53절에 그리고 요한복음19장38절에서41절에 마가복음15장43절 이 세 부분을 종합해서 보면 아리마대 요셉이 어떤 사람인지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을 사용하셨는지 제가 성경을 읽으면서 나름대로 떠오르는 것들을 적어 놓았습니다.

아리마대요셉은 공의회의원입니다 지금 같으면 국회의원입니다 그리고 이분은 선하고 의로운 사람이라고 그랬습니다. 이분이 선하고 의로웠기 때문에 예수님이 선하고 의로웠기 때문에 그분의 자리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참으로 재미있는 게 요한복음19장41절에 그랬습니다. 아직 그 묘실은 한 사람도 그기에 들어간 일이 없다는 겁니다. 한 시체도 요한복음19장41절에 그러니까 아리마대 요셉이 자기가 들어가려고 만들어 놓았지만 하나님의 뜻은 아닙니다. 이놈아! 그기에 너가 들어가려고 하느냐. 아닙니다.

그기에 예수님이 들어가야 된다는 겁니다. 딱 준비시켜놓고 그다음에 세 번째로는 이 아리마대 요셉은 어떤 사람이냐면 공의회에서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정했잖아요. 공의회에서 결정할 때 이분도 거기에 있었지만 거기서 이분은 아마 반대의견을 냈던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분이 공회 결정과 관계없이 이분이 빌라도에게 당돌히 갔다고 그랬습니다. 빌라도에게 담대히 가가지고 마가복음에는 그렇게 써놓았습니다. 시체 달라고 소리 지르는 겁니다.

마가는 16장43절에 이렇게 말하고는 계속해서 이 사람은 존귀한 공의회원이라는 겁니다. 거기다가 계속해서 마가는 말하기를 이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고 그러니까 예수님이 죽으셨기 때문에 시체는 분명히 3일 동안 어디에 보관해야 되잖아요. 보관할 자리를 이렇게 미리 다 준비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을 택하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깨끗한 사람 이런 사람이 은혜를 받은 사람입니다 그 무서운 유대인들 반대세력 속에서 뛰쳐나와 가지고 용감하게 예수님을 그리스도로써 외쳤던 사람 그러니까 외로운 사람이었습니다. 똑같이 이 공식이 오늘날에도 그대로입니다

예수님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반대세력 때문에 외로움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전하면서 인기가 있으면 그것은 성서에 보면 그렇지가 않습니다. 예수님을 섬기다보면 젊은 사람들도 핍박을 각오하셔야 됩니다.

그럴 때마다 상급이 엄청나게 큰 겁니다. 세 번째 간단한 질문입니다

왜 여자들이 무덤을 방문하고 제자들은 안했는가? 여자들이나 제자들이나 서로가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이 여자들은 방문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단순히 예수님이 말씀하신 예언의 말씀 때문에 간 게 아니거든요 예수님이 살 것은 생각도 안 했잖아요, 그냥 그분의 사랑을 받았으니까 정이 있어서 예의상 고마운 마음으로 그래서 시체에다가 향유를 발라드리려고 그러는 겁니다. 유대문화가 그러니까 그러기 위해서 안식일에는 갈 수가 없는 겁니다. 왜냐면 안식일에는 그럴 것을 못하니까 우리가 무덤을 방문하는 거나 비슷한 겁니다. 우리의 개념이나 그러니까 이렇게 간 겁니다. 그렇게 단순하게 갔지만 예수님께서 그 자매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겁니다. 똑같이 우리도 멋도 모르고 그냥 교회 나오고 이렇게, 이렇게 하다가 주님이 그 안에서 은혜를 베푸는 사람들이 있는 겁니다. 처음부터 할렐루야 아멘하고 이러지 않잖아요. 어떤 분들은 알았습니다. 이제는 문제없이 성공하고 주 안에서 내가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나중에 보면 또 쓰러집니다. 그냥 한걸음, 한걸음 하는 겁니다. 이분들도 어떻게 순종하다보니까 이렇게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제자들은 이분들은 그래도 예수님이 그랬거든요 너희들이 나를 부인하고 나중에 십자가 끝난 후에 내가 부활한 후에는 내가 너희들을 예루살렘에서 만나지 않고 너희들을 내가 갈릴리에서 만나겠다. 그랬거든요

그리로 먼저 가라 그래서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잠깐 열굴 봤잖아요.

거지서 자세한 이야기는 안 했잖아요. 갈릴리에 가가지고 자세한 이야기를 한 겁니다. 그것은 다음시간에 할 겁니다. 이런 제자들도 믿지 않았던 제자들이 그다음에 네 번째 질문이 왜 3일 만에 부활하셔야 되느냐 입니다.

왜 그러면 우리는 여기에 대한 대답이 있어야 합니다. 첫째 대답은 예수님이 유월절에 세상을 떠나셨기 때문에 유월절에서 3일 되는 날은 초실 절입니다.

왜 초실 절일까 첫 열매가 바울이 그랬습니다. 고린도전서15장20절에 예수님이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두 번째 열매입니다

이분이 첫 열매가 되시기 위해서 이것은 아주 하나님이 디자인하신 겁니다.

3일 안에 이분이 부활하실 것을 디자인 하신 겁니다. 그렇게 디자인하시고는 구약에서 3일 만에 이분이 부활하실 것을 여러 예화로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하나님이 얼마나 자상한 분이신지 모릅니다.

구약에서 어떻게 보여 주었습니까? 아브라함과 이삭사건에서 무엇을 보여 주었습니까? 창세기22장4절에 브엘세바에서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산으로 가는데 3일 걸렸습니다. 그것뿐입니까? 요나사건 요나서1장17절에 요나가 고래배속에 들어가서 3일 있다가 나왔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요나사건을 거머쥐고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이스라엘사람들에게 설명하는 겁니다.

너희들 요나사건알지 그러면서 내가 기적을 보여 주려고 그러는데 요나사건 밖에 너희들에게 보여 줄 것이 없다는 겁니다. 두 번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12장39절 마태복음16장4절에 요나사건은 무엇입니까? 죽으셨다가 3일 만에 부활할 것을 유대인들아 내가 보여주지 않았느냐 그렇기 때문에 나중에 고린도전서15장에서는 바울이 고린도교회에다가 말하는 겁니다.

구약에서 다 말씀하신대로 죽으셨다가 3일 만에 부활하셨다는 겁니다.

3이라는 숫자는 삼위하나님의 숫자입니다 하나님의 숫자입니다

예수님이 삼위의 하나님이신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래서 예수님께서 3일 만에 부활할 것을 마태복음16장21절 누가복음9장22절 마태복음20장17절에서19절 마가복음10장32절에서34절 누가복음18장31절에서34절 이렇게 정확한 3일이라는 겁니다. 마지막으로 부활체 모습에 대해서 부활체가 어떤 모습인가? 첫째는 부활체의 모습은 아담이 타락하기 전에 모습으로 우리가 보면 됩니다. 아담이 타락하기 전의 모습 우리는 낙원에 올라가면 낙원의 우리의 모습으로 보시면 됩니다. 그러니까 천국왕국에서의 우리의 모습이 아닙니다.

두 번째는 살과 뼈가 있습니다. 이 부활체의 모습은 세 번째는 공간을 초월하는 공간여행을 쉽게 척 척하는 순간, 순간 하시고 예루살렘에서 갈릴리도 척 가시고 그것뿐입니까 승천하실 때도 그냥 사람들이 눈에 보이는데서 주욱 올라가시고 이런 부활체의 모습이 있습니다. 그다음에 네 번째는 이분이 잠깐 같이 있다가 순간적으로 없어져버리십니다 똑같이 우리도 여기 있다가 어디 가고 싶다고 생각하면 주욱 가는 겁니다. 우리가 앞으로 그러니까 2층천 엄청난 우주를 여행할 수 있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우리 집에 올 수 있고 내가 여러분들 집에도 가고 이걸 생각하면 아주 기똥찹니다. 이 세상에서 살 맛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오래 살 생각을 하는 것은 주님을 위해서 오래 사는 거지 나를 위해서 오래 사는 것은 크리스천의 생활방식이 아닙니다. 저쪽세계를 알고 있는 사람은 건강의 목적도 그것입니다.

다섯 번째는 부활체의 모습을 가지고 있는데 서로가 부활체의 모습이 아닌 사람과도 대화가 가능한 겁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마음대로 대화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부활체의 모습을 가지고 저차원으로 내려와서 저차원의 존재들과도 대화가 가능한 겁니다. 그러다보면 우리가 추리하는 겁니다.

내가 개미차원에 가서도 대화할 수 있겠다 생각하는 겁니다. 차원을 오르내리고 하는 그래서 거기 차원들과 대화하는 겁니다. 자연과도 대화할 수도 있고 이게 엄청난 특권입니다 그것뿐입니까 육의 모습과도 동일해가지고 육안으로도 사람을 보고 또 서로 만지고 음식도 육의 음식을 잡수시고 아까 말한 대로 못 자국도 그대로 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 육이 옛날 육이 아닌 겁니다. 옛날 육은 어떤 육입니까 나이가 들어가는 섞어져가는 육입니다

그런데 새로 된 부활체의 육은 나이가 안 드는 겁니다. 그러면서 얼굴 모습은 옛날 육의 모습과 똑같은 겁니다. 아마 키도 그런 모양입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이 처음에는 못 알아보고 약간 다른 부활체지만 근방 알아 본 겁니다. 막달라 마리아도 예수님을 근방 알아 봤습니다. 그러니까 얼굴이 변한 게 아닙니다. 우리도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얼굴 아마 그대로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젊은 나이로 아까 천사들 봤죠. 청년들이라 그랬잖아요. 그런데 여자들은 남자같이 안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천사가 여자천사가 있다고 그랬습니까? 저는 모르겠습니다. 여자천사가 있다는 것은 못 봤습니다. 베이비천사가 있다는 것은 성서에 나옵니다. 아마 여자들도 남자가 될 가능성이 없지 않아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죽으면 어떻게 되는가? 우리가 죽으면 우리 육은 어떻게 됩니까? 섞어서 없어져가지고 흙으로 변해버립니다 왜냐면 흙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창세기2장7절에 그런데 우리의 혼은 어떻게 됩니까? 우리의 영과 혼이 낙원으로 부활체의 모습이 되는데 우리의 혼은 이게 더럽잖아요.

거짓말 잘하고 뭐 잘하고 잔뜩 나쁜 혼의 상태로 있는데 죽는 그 순간에 혼이 완전히 성결케 될 것 같습니다. 안 그러면 저 동네에 갈수가 없으니까

그러니까 미리미리 성결 시켜놓으면 주님이 청소할 게 많지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혼이 변해가지고 그대로 정말 성결 된 깨끗한 혼으로 되고 우리영도 마찬가지고 그래서 영과 혼이 우리 몸에서 빠져나와가지고 낙원으로 올라가는 겁니다. 우리가 죽으면 그리니까 우리크리스천의 죽음이라는 것은 무덤에 그냥 머물려 있는 게 아니잖아요. 그 길로 낙원으로 가잖아요. 강도도 그랬잖아요. 낙원으로 가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장례식이 중요합니까? 이미 올라가있는데 무슨 장례식입니까? 예수님이 장례식을 했습니까? 타종교사람들에게는 장례식이 중요합니다. 그 사람들은 무엇을 믿습니까? 그 땅에 있다고 믿기도 하고 극락에 갔다고 믿기도 하지만 이 사람의 혼과 영이 여기 와 있다고 이 땅에 무덤자리가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조상님이 거기서 술도 따라주고 밥도 해주고 그러잖아요.

개념이 다른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크리스천들은 실은 무덤이 필요 합니까? 안 합니까? 무덤이 실은 필요가 없습니다. 1세기 때 많은 크리스천들은 사자에게 그냥 물려가지고 사자가 다 먹어버렸습니다. 그렇지만 그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습니까? 다 낙원에 갔습니다. 무덤이라는 것은 인간적으로 우리가 그분을 기념하기 위해서 기억하기 위해서 하나의 흔적으로 필요하지 무덤이라는 것은 우리에게 큰 의미가 없는 겁니다. 무덤자리에 돈을 너무 투자하지 마세요. 조상제사 이게 뭐가 대단합니까? 그것은 딴 사람들이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죽으면 제가 여러분들에게 부탁했습니다. 내가 죽어서 장례식 할 때는 댄스파티 하라고 그랬습니다. 왜냐면 내가 저위에 있는데 여기서 울고불고 할 필요가 없는 겁니다. 그리고 황 목사의 장례식에서 나도 언젠가는 저분 따라서 가는구나. 라고 생각하면서 주님과 대화하시면서 장례식에 참석하세요. 저분이 우리보다 먼저 갔구나. 제가 이렇게 말하지만 나보다 먼저 가는 사람들 분명히 여기에 있습니다. 먼저가든 안가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우리는 죽음에 대한 개념이 다른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성령님이 깨닫게 해주시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겁니다.

죽음이 복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이것을 깨달은 사람은 이것을 삶 속에서 대입하며 사는 사람은 육의 건강이 필요합니다. 왜냐면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건강을 주셔야 됩니다. 나이가 80,90,100세가 되어도 건강을 가지고 있다면 할렐루야입니다 왜냐면 내가 좋아서가 아닙니다. 내가 이렇게 건강해가지고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예수님을 전하는 일을 할 수 있으니까 그게 감사해서 그러는 겁니다. 내가 건강해가지고 내가 무엇을 하겠다는 겁니까? 건강 목적은 주님 제가 돈 많이 벌기 위해서도 아니고 주님 복음을 위해서 저에게 건강주십시오 몇 시간씩 서서 복음을 전해도 끄떡없는 건강주십시오 주님께 영광 드리기 위함입니다.

이 목적으로 건강 달라고 하는 겁니다. 그 목적으로 제가 각 처소에서 그 목적으로 저는 건강유지하고 음식조절하고 하는 겁니다. 왜냐면 죽음에 대한 개념이 다르기 때문에 그러는 겁니다. 저는 주님에 대한 할 일이 있기 때문에 주님이 저를 안 데리고 가실 겁니다. 그러니까 어떤 선교지에 가서 어떤 위험을 받아도 끄떡 안 합니다. 어떤 고물비행기 당장 떨어질 비행기에 올라타도 저는 걱정안 합니다. 이 사람들 나 때문에 그냥 같이 가겠구나.

왜냐면 주님의 사명이 나에게 주어졌기 때문에 그분의 사명을 나에게 주셨기 때문에 저는 당분간은 안 죽을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도 이 사명을 가지시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더 건강하게 오래 살도록 만들어 놓습니다. 아멘.

기도드리겠습니다.

예수님 오늘 저희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상고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여러 번 제자들에게 부활하시겠다고 말씀 하셨지만 사랑했던 그 여자들도 또 열두제자들도 거기에 대해서 무관심했고 기대도 하지 않았고 별로 관심을 두면서 그쪽 분야에 대해서는 눈들이 캄캄했습니다. 왜냐면 이 세상에만 눈이 있었고 저 세상에 눈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나약한 존재들을 주님께서는 어린아이 다루듯이 조금씩, 조금씩 깨닫게 해주시면서 나중에 이분들이 다 깨닫고 난 다음에는 육신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까지 다 없어지게 하시고 저3층천에 멋있는 왕국을 보게 하시고 그쪽에 소망을 두게 하시고 그 소망을 위해서 육의 모든 부분을 다 순교로써 주님 앞에 바쳤던 그 모습을 저희들이 보게 됩니다. 우리AMI공동체 주님 사랑하는 자녀들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가시게 하시고 저 나라에 대한 소망을 더 가지도록 은혜위에 은혜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우리부모들이 이러한 삶을 살 때 우리자녀들도 우리의 삶을 따로 올수가 있습니다. 우리자녀들도 시간이 가면 똑같이 나이60,70,80이 됩니다. 20년30년 차이입니다 하나님아버지 우리가 과거에 20년30년을 생각하면 잠깐 눈 깜짝할 사이로 지나가버렸습니다. 우리자녀들도 지금은 어리지만 눈 깜짝할 사이에 10년이 자나가고 20년이 지나가고 나이40,50,60.70,80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부모님들은 자녀들에게 가장 좋은 선물을 주어야 되는데 이 선물이 예수님에 관한 선물이고 우리 인생이 무엇이고 죽음이 무엇이고 죽음 후에는 무엇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는 삶에서 보여주는 부모님들이 되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저희들이 부활을 하신 예수님을 묵상하면서 부활의 주체가 되시는 예수님 저희들도 예수님을 따라서 부활 할 것을 믿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 저희들은 너무나 감사를 드립니다. 이러한 부활하신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더라면 우리에게는 소망이 없게 되었을 것입니다. 바울도 이 부활의 예수님을 보고 이생에 소망을 가지고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도 이 부활을 통해서 부활의 사건을 통해서 이러한 소망을 가지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