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강해 24강,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롬7장13-25) 2014년12월21일 말씀
오늘 말씀은 상당히 어려운 7장의 마지막부분입니다,
7장13절부터25절까지 말씀입니다, 제가 시간상 읽지 않겠습니다,
왜냐면 설교 중에 이 말씀들이 하나하나 다 나오기 때문에 그때 우리가 성경을 펴가면서 같이 보면 되겠습니다,
오늘 말씀은 7장의 결론적인 말씀이기 때문에 상당히 감동적인 말씀이고 또 이해가 쉽지도 않으면서 그렇다고 해서 어렵지도 않는 그런 말씀입니다,
지난시간에 제가 로마서7장7절에서12절까지 말씀을 드렸습니다,
제목은 율법도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다, 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 말씀의 결론은 뭐냐면 수평계명을 주신 목적이 무엇이냐 그 목적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 목적이 뭐냐면 한마디로 말하면 우리 속에 있는 크리스천들 속에 있는 쓴 뿌리를 노출시켜주기 위해서다 이렇게 결론을 내리면 되겠습니다, 예수 안 믿는 사람은 관계가 없습니다,
예수 안 믿은 사람은 쓴 뿌리가 있지만 그분들은 있는 그 자체로 살고 있는 분이고 우리 기독교인들은 그것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수평계명에 의해서 그것이 발견된다는 겁니다, 그 말씀을 바울이 계속 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7장을 어떤 신학자들은 그것은 기독교인들을 상대로 하는 말씀이 아니고 7장 마지막에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말씀이 나오잖아요,
7장은 기독교인이 되기 전의 장이다, 라고 해석하는 분들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그리고 8장에 기독교인으로서 변화를 받는 장이다,
라고 해석하는 신학자들도 꽤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그렇고 다른 나라도 그렇고 저는 그것이 아니라고 보는 사람입니다 만약에 그렇게 된다면 성서가 풀리지가 않습니다, 오늘은 말씀드리기 전에 지난시간에 제가 말씀드린 것 중에 한 포인트가 있습니다, 쓴 뿌리에 대한 가르침이 있었습니다,
어떤 가르침이었냐면 모든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다 쓴 뿌리가 있다 쓴 뿌리라는 것은 알다시피 질투심. 미움. 용서 못하는 마음. 모든 더러운 성품들이 그대로 다 있다는 겁니다, 기독교인들도 예수 안 믿는 사람들도 마찬가지고 그런데 쓴 뿌리가 사람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양도 다르고 질도 다르고 종류도 다르고 두께도 다른 겁니다,
이 말을 다시 말하면 같은 기독교인인데 성품도 다르고 사람됨됨 이도 다르고 이 쓴 뿌리 때문에 또는 성화의 정도도 다르고 다시 말하면 이것이 왜 이렇게 되느냐면 저쪽나라가 계층사회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낮은 계층에 있는 사람들이 피라밋 형태이기 때문에 낮은 계층에 있는 사람들인데 이분들은 영적유아기라고도 하고 영적어린아이 또는 돌밭크리스천 영적소경들 이런 단어를 우리가 썼습니다,
이런 분들은 숫자가 많아야 되는데 이분들은 쓴 뿌리가 있는 그대로 신앙생활을 하다가 가는 분들입니다, 성품의 변화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20년30년40년 섬겨도 교회생활해도 인격의 변화가 없는 사람들이 많다는 겁니다, 두 번째 중간계층사람들은 20-30%인데 이 사람들은 쓴 뿌리를 약간 제거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분들은 소위 영적사춘기 똔 영적청년기 또는 가시떨기크리스천 또는 영적 근시안들로 20-30%로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높은 계급의 크리스천들 이분들은 5%에서10%정도 되는데 계급이 높고 낮음이 무엇으로 설정되느냐면 쓴 뿌리를 얼마만큼 제거 했느냐에 따라서 계급이 설정되는데 높은 계급으로 예정된 자들은 쓴 뿌리가 아주 많이 제거되어야 되는 겁니다, 영의 눈이 밝아지면서 원시안의 눈을 가지고 옥토크리스천이라고 그럽니다, 또는 영적아들 영적아버지수준 이런 사람들은 소수인데 NO3믿음을 가진 히브리서11장 믿음을 가진 사람들인데 이분들이 가지고 있는 쓴 뿌리를 없애주어야 되는데 어떻게 없앱니까,
이분들의 쓴 뿌리를 없애는 방법이 하나님의 방법이 용광로에 집어넣는 겁니다, 그래서 어렵게 만드는 겁니다, 핍박을 받게 하고 미움 받게 하고 재물도 빼앗아 가시고 명예도 빼앗아 가시고 가족에게도 문제가 있고 건강 또는 외롭게 만드시고 우상을 깨뜨리는 일을 하게 하므로써 마음이 가난해지면서 이분의 삶이 변하는 겁니다, 이런 이야기를 제가 지난시간에 했습니다,
오늘은 7장13절에 보시면 수평계명을 주신 목적을 계속해서 말씀하시는 겁니다, 목적은 쓴 뿌리를 노출시켜주기 위해서입니다,
13절에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냐 이런 말을 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난시간에 선한 것 할 때 무엇입니까, 수평계명을 선한 것이라 그랬습니다, 다시 말하면 수평계명이 내게 사망이 되겠느뇨,
이 말이 무엇입니까 수평계명이 나에게 와서 비추어줄 때 내가 죄의식만 가지게 하여 지키지도 못할 것을 잔뜩 주었으니까 그것 때문에 죄의식을 가지고 내가 망하게 되겠느냐 다시 말하면 수평계명이 나를 망하게 만드는 도구냐 바울이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지키지도 못할 것을 우리에게 주어가지고 죄의식을 느끼게 하고 수평계명이 우리를 사망으로 이끌고 망하게 만드느냐 그러니까 바울이 뭐라고 그러느냐면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이게 쓴 뿌리입니다 죄로 쓴 뿌리로 드러나기 위하여 노출시켜주기 위해서 선한 그것이 수평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럴 때 나로 하여금 죽은 자처럼 할 말 없게 만들었으니 지난시간에 제가 이렇게 설명하였습니다,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다시 말하면 이는 수평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라는 것은 쓴 뿌리로 심히 죄 되게 하려 하심이라는 겁니다,
다시 말하면 쓴 뿌리가 이렇게 있으므로 쓴 뿌리 때문에 내가 쓴 뿌리로 네가 이것을 노출시켜주어서 바울이 법적으로 의인인데 윤리적으로 내가 죄인이구나, 라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그렇다는 겁니다,
법적으로 우리는 의인인데 윤리적인 측면에서 보면 나는 죄인이구나,
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기 위해서 그렇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러니까 우리가 수평계명이 절대로 필요하다는 겁니다, 14절에 보면 바울이 이런 표현을 합니다, 우리가 하는 표현을 합니다,
우리 가는 바울도 포함된 모든 크리스천들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줄 알거니와 그럴 때 율법은 수직계명입니다,
수직계명은 원죄를 해결해준 계명입니다 예수님과 우리가 연합되어 가지고 우리가 의인이 되었는데 신령하다는 겁니다, 법적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겁니다,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바울은 쓴 뿌리를 가진 존재이기에 그런 말입니다 내가 쓴 뿌리를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그놈의 쓴 뿌리의 노예가 되었다는 겁니다, 쓴 뿌리가 시키는 대로 내가 움직이는 존재가 되었다는 겁니다, 우리 크리스천들도 바울 자신도 이것을 고백하는 겁니다, 바울이 지금 이 말씀을 할 때가 주후57년입니다 그러니까 35년에 개종하였으니까 22년 후입니다 그 사이에 엄청난 일을 많이 하였습니다, 훈련도 많이 받고 10년 동안 고독훈련 받고 또 낙원에도 올라갔다 내려오고 이분이 그 사이에 성경을 5권을 썼습니다,
49년에 갈라디아서 51년에 데살로니가 전 후서 55년에 고린도 전 후서 바울이 지금 로마서를 쓰기 전에 성경을 다섯 권이나 쓰셨던 분입니다 그리고 우리 입에 오르내리는 교회들을 그분이 다 개척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제자 화 시키시고 그러니까 선교의 대가이고 신학의 대가이고 교회개척의 대가인 이분이 하는 소리가 나는 아직도 쓴 뿌리를 가진 존재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15절부터 보시면 바울이 그때부터 그럽니다, 이런 쓴 뿌리가 있는데 내가 쓴 뿌리의 노예가 된 내 자신이 딜레마에 빠졌다는 겁니다, 15절에 내가 그러면서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는 겁니다, 이 말은 쓴 뿌리가 나를 조종하기 때문에 질투심. 미움. 고집, 용서 못하는 마음, 남을 깎아내리는 이런 더러운 쓴 뿌리가 나를 조종하기 때문에 내가 지금 그런 실수를 해놓고도 내가 했는지 모른다는 겁니다,
바울 같은 거룩한 성인 같은 사람도 이런 말을 하는 겁니다,
내가 현재 행하는 행위에 대해서 내가 왜 이런 행위를 했지 내가 스스로 컨트롤을 못하는 자제력이 없는 존재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나를 붙잡고서 주인 노릇하는 사람이 누구냐면 쓴 뿌리라는 겁니다, 그 안에 깔려있는 쓴 뿌리가 나를 지배하고 있다는 겁니다,
바울이 지금 고백하는 겁니다, 그리고 15절 후반부에 가서 그러는 겁니다, 바울이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이분이 자기가 무엇을 해야 된다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자기가 행하고 있다는 겁니다, 스스로 자제력이 없다는 겁니다, 이게 우리의 고백이고 바울의 고백입니다 그렇게 22년 동안 예수님을 만나가지고 주님의 일을 많이 했는데도 아직도 이분에게 쓴 뿌리가 있는 겁니다, 그러면 보세요, 바울이 그러는 겁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안 된다는 겁니다, 도대체 바울이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울이 원하는 게 뭐냐면 바울이 쓴 편지 갈라디아서를 보면 갈라디아서를 쓰시면서 주님께서 바울에게 무엇을 주었습니까,
성령의 열매를 맺어라 이분이 자기도 지금 맺지 못하면서 도 성령님이 바울에게 말씀하시는 겁니다, 이분이 성령님의 감동을 받아가지고 성령의 열매가 뭔지 아느냐 아가페사랑이다 희락이다 화평이다 오래 참는 거다,
자비와 양선이다 충성과 온유와 절제라는 겁니다, 자기가 말해놓고는 자기가 이것을 해야 됩니다 그런데 자기가 못한다는 겁니다,
자기가 말해놓고는 내가 원하는 것이 이것인데 왜냐면 내가 받아가지고 글 까지 썼는데 그런데 이게 안 된다는 겁니다, 또 그 후에 무슨 편지를 썼습니까, 데살로니가전서를 썼습니다, 5장14절부터18절을 보면 그분이 원하는 것을 본인이 말했습니다, 데살로니가교인들에게 너 네들 마음이 악한 자들을 붙들어주고 오래 참고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서로 사랑해 주고 항상 기뻐해라 쉬지 말고 기도해라 범사에 감사해라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이분이 계속 말해놓고는 자기가 그것을 100% 지키지 못하는 겁니다,
자기도 누가 자기 앞에 밥 맛 없는 사람이 있으면 확 뱉어버리는 겁니다,
이분도 화를 내고 이분도 자기 감정표시를 마음대로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이분이 이게 자기 딜레마인 겁니다, 왜 그럽니까,
누가 바울을 컨트롤 합니까 바울 속에 있는 쓴 뿌리가 컨트롤하는 겁니다, 데살로니가후서도 마찬가지입니다 3장13절부터15절에 보면 똑같습니다,
이분이 그래놓고는 55년에 고린도전서를 썼습니다,
이때 그 유명한 고린도전서13장을 보세요, 우리가 고린도전서13장을 보면 사랑장입니다, 바울이 이런 걸 다 했기 때문에 쓴 줄 우리가 압니다,
그분은 성인인줄 압니다, 아닙니다, 이렇게 못했다는 것을 나중에 증명을 해드리려고 그럽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하며 투기하지 않고 자랑하지 않고 무례히 행치 않고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고 주욱 나오는 게 사랑장입니다, 그런데 이분이 오늘 본문 로마서7장15절에서 그러는 겁니다,
내가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않고 우리가 미워하는 그것을 내가 행하여 왔다는 겁니다, 자기가 쓴 뿌리가 있기 때문에 이런 걸 했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 한번 이분의 삶을 한번 들여다봅시다, 이분이 특히 교계에 들어와 가지고 가장 관계를 잘 맺어야 되는 두 리드가 있습니다,
하나님나라를 위해서 그게 누구냐면 야고보하고 베드로입니다,
그 당시에 제자들입니다 유다와 야고보는 예수님의 육신의 동생입니다 그다음에 베드로 최소한 이 세분과는 좋은 관계를 맺어야 됩니다,
그 당시 1세기 때 기독교가 빛을 내려면 그런데 이렇게 보면 이 세분의 관계가 안 좋았습니다, 바울이 야고보와 베드로와의 관계를 잘 설정을 하지 못했습니다, 바울이 가지고 있었던 이분들을 향한 쓴 뿌리가 있었습니다,
무슨 쓴 뿌리가 있었냐면 바울이 개종을 했을 때 이분이 다메섹에서 주후35년에 개종 했을 때 예루살렘에 있는 야고보와 베드로가 축전이라도 한번 보내주어야 되잖아요, 바울아 너가 우리를 원수처럼 이렇게 못살게 굴다가 우리 공동체에 들어온 걸 축하한다고 한마디도 안한 겁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속으로 이 사람들에게 섭섭했을 겁니다,
그분도 사람인데 그러니까 쓴 뿌리가 들어오는 겁니다,
아라비아에 내려가서 3년 동안 혼자서 외롭게 있을 때 위로방문 위로편지도 없었습니다, 그래가지고 3년 지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서 15일 동안 있을 때도 한사람도 이분을 만나기를 원치를 않는 겁니다,
그러니까 바나바가 나타나서 그러지 말고 내가 인사시켜 드릴께 그런데 보니까 야고만 정식으로 만났습니다, 갈라디아서1장19절에 보면 베드로도 잠깐 얼굴만 비치고 피해버린 모양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이분의 마음에 자존심에 상처를 받은 겁니다, 그래도 내가 예루살렘에서 한 때 놀던 사람이고 엘리트출신인데 너 네들이 나를 우습게 아는구나,
어쩌다가 내가 너 네들 그룹에 들어오려고 그러는데 나를 쳐다보지도 않아 여기에 대한 자존심에 상처를 받은 겁니다,
이래가지고 예루살렘에서 바울을 죽인다, 그래서 고향 다소로 갔습니다,
다소에서 7년 동안 있으면서 주님 앞에 꿇어 앉아 있으면서 외롭게 친구 다 잃어버리고 자기 옛날 동료들은 다 자기를 죽이려고 그러고 그래서 생명의 위협을 받으면서 외롭게 있는데 자기가 새로 입문한 기독교공동체는 자기를 쳐다보지도 않는 겁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이렇게 하셨지만 인간적인 측면에서 보면 마음에 섭섭함이 있는 겁니다,
이런 쓴 뿌리가 이분에게 있었던 겁니다, 반대로 베드로도 마찬가지입니다, 베드로나 야고보도 이분들이 바울과 관계에서 쓴 뿌리가 무엇입니까,
바울이 우리 예루살렘교회 집사 스데반이를 죽이고 예루살렘교회를 풍지 박산으로 만들은 사람이 바울이라는 겁니다,
저 양반 때문에 예루살렘교회가 다 흩트려져버리고 우리 교인들이 북쪽 시리아 터키지방으로 흩트려져서 디아스포라가 되어가지고 상당한 고생을 하고 있는데 저 사람 때문에 이런 마음이 야고보와 베드로에게 있는 겁니다, 서로가 쓴 뿌리가 있는 겁니다, 서로 쳐다보면 말하기도 싫은 상대입니다 이런 모습을 왜 우리에게 보여줍니까, 예수 믿는 우리들도 교회 안에서 권사는 권사끼리 집사는 집사끼리 장로는 장로끼리 목사는 목사끼리 선교사는 선교사끼리 이런 것들이 다 있는 겁니다, 이걸 모르는 사람들은 교회 안에 성인들만 있는 줄 알지만 교회 안에 들어와 보니까 싸움질을 더 하는 이런 모습을 보게 되는 겁니다, 바울이 누구에게 격려를 받았습니까,
바나바에게는 아주 빚진 자입니다 바나바가 바울에 어떻게 했습니까,
7년 동안 다소에 있을 때 바나바가 다소에 방문해서 안디옥교회 전도사로 부임시켰습니다, 다시 말하면 풀타임 시역을 하도록 기회를 제공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1차 선교여행을 끝나고는 예루살렘에 가서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할 때는 바나바가 같이 가서 다 도와 주었습니다, 그래서 바나바가 베드로와 야고보에게 잘 설명해주고 그래서 예루살렘총회가 성공적으로 끝나게 되는 겁니다, 바울은 바나바에 대하여 빚진 자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바나바나 베드로에게 그런 빚진 자로써 행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바나바에게 예루살렘총회가 끝난 후에 주후49년입니다 이분들이 안디옥으로 다시 돌아왔는데 그 뒤를 따라서 열두제자들이 야고보와 베드로가 안디옥교회로 방문 왔습니다, 방문 와서 자기네끼리 식사하는데 베드로와 바나바 이분들이 이방인들과 같이 앉아서 식사하는 겁니다,
그럴 때 바울이 식사하는데 가보니까 베드로와 바나바가 바울의 얼굴을 보고는 슬슬 피하는 겁니다, 그때 바울이 너 네들 말이야 이중인격자들이라고 한마디 쏘아 붙입니다, 바울이 그동안 깔렸던 쓴 뿌리가 베드로에게 간 겁니다, 그런데 바울이 자기 은인인 바나바에게도 똑같이 소리를 지르는 겁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쓴 뿌리가 굉장히 많았던 사람입니다 자기가 볼 때 눈에 그슬리면 그냥 뱉어버리는 참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감정 관리를 잘 못하는 겁니다, 은인에게 까지 나중에 바나바와 같이 1차 선교여행 갔잖아요,
그때 마가를 데리고 갔잖아요, 마가가 중간에 나 집에 갈래요 그러니까 마가 때문에 선교여행 도중에 바나바와 바울이 관계가 나빠진 겁니다,
자기 은인인데 바나바가 상처를 입었던 겁니다,
나중에 1차 여행 끝나고 예루살렘총회가 있을 때도 바나바가 바울을 도와주는 겁니다, 예루살렘총회 끝난 다음에 주후49년도 후반에 바나바에게 우리 2차 선교여행 떠납시다, 그러니까 바나바가 내 조카 마가가 지난번에 실수 좀 했지만 데리고 가자 그러니까 안 돼요 그러면서 화를 내는 겁니다,
성서에 보면 둘이 심히 다투었도다,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자기 은인을 함부로 대하는 겁니다,
예전에 자기가 힘들었을 때 생각을 못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바나바입장에서는 저 사람 외로울 때 내가 도와 주었는데 자기 머리 위에 올라앉으려고 그러는 겁니다, 안 그래도 1차 선교여행 때 웬만한 설교권을 다 주었는데 그러니까 바울이 이런 성품인 사람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보면 이런 성품인 사람이라는 걸 바울이 쓰신 열두 권의 서신 속에 보면 바울이 베드로를 향한 쓴 뿌리가 있음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의 쓴 뿌리가 베드로와 관계에 있어서 서신 속에서 나타나는 겁니다, 신기한 게 바울이 자기 서신에서 베드로의 행적에 관한 이야기를 일체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해야 되는데도 일체 베드로에 대한 이야기를 안 하였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의 리드 쉼을 깎아내리는 그런 말을 갈라디아서2장에서 했습니다, 뭐라고 그러느냐면 나는 이방인의 사도고 그분은 할례자의 사도다, 그리고 내가 그 사람이 외식할 때 질타까지 했다고 이런 식으로 아주 베드로를 깎아내리는 스타일의 편지를 했습니다, 또 고린도전서를 쓰실 때도 게바 파가 있다 그런 말을 하면서 나쁜 의미에서 베드로를 지적합니다,
그리고는 9장에 가서 고린도교회가 바울에게 준 헌금으로 해외여행 다니고 한다, 라고 하니까 바울이 뭐라고 하느냐면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아내와 같이 다닐 권리가 없겠느냐 하면서 베드로를 비교합니다, 이런 쓴 뿌리가 바울에게 강하게 있었던 겁니다,
왜냐면 베드로에게 자기 나름대로 당한 것이 있기 때문에 그러는 겁니다,
이게 우리에게도 다 있습니다, 그 오해는 바울이 자기가 쓴 편지 속에서 베드로에 대해서 감사하다는 말 한마디도 없고 그분에게 내가 미안하다는 말한 것도 없고 이분이 나의 선배사역자라는 것도 없고 내 선임자라고 말한 것도 없고 열두 사도 중에 수위사도라고 말한 것도 없습니다,
베드로의 인격이나 또는 영 권을 인정해주는 말 한마디도 안했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바울이 나빠서가 아닙니다,
성령님께서 바울의 마음을 가이드해가지고 그렇게 하도록 한 겁니다,
왜냐면 우리에게 그것이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그것을 가르쳐주려고 또 바울이 온전한 사람이 아니란 걸 그리고 앞으로 기독교계의 지도자들도 이 모양이라는 것을 예언적으로 가르쳐주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겁니다,
분명히 바울이 베드로의 모든 좋은 부분들을 알고 있었지만 또 속으로 인정했지만 공식적으로 공개적으로 인정을 안 하려는 그분의 깔려있는 마음이 있는 겁니다, 제가 볼 때는 바울이 못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바울만 못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못 되었고 2000년 기독교역사에 소위 말하는 성직자들도 다 이런 부분에서 못된 것이 다 있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동료크리스천들을 볼 때 이 못된 것이 있다는 것을 우리가 미리 접고서 들어가 주어야 되는 겁니다, 접지 않을 때 문제가 생기는 겁니다,
저 사람은 내가 그렇지 않는 걸로 내가 알았는데 이렇게 하면서 실망했어, 이렇게 나오는 겁니다, 실망하지 말라고 오늘 주님이 우리에게 이런 말씀을 주시는 겁니다, 바울의 행적을 썼던 분이 누가입니다 누가는 의사지만 이분은 역사가고 저술가고 어떤 사건을 보면 아래 위를 잘 리서치해가지고 아주 글로 전달하는데 탁월한 재능을 가진 분입니다 그래서 이분이 누가복음을 썼을 때 누가복음을 예수님의 탄생 주전4년부터 시작해서 예수님의 십자가사건 주후30년까지의 역사이야기입니다 그때 누가가 기독교인이 아니었습니다, 누가가 언제 기독교인이 되었습니까, 주후50년입니다 안디옥출신입니다 주후50년에 다시 말하면 사도바울이 안디옥교회에 계실 때 누가를 복음화 시키시고 그래서 누가가 그때부터 2차 선교여행을 따라 간 겁니다,
2차 선교여행이 주후50년에서52년까지입니다 누가는 기독교계의 그 전 사역들은 모릅니다, 특히 이방인이고 주후50년 전 이야기는 누가는 모릅니다,
자기가 그때는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누가복음은 언제부터 언제까지 이야기입니까 주전4년부터 주후30년의 이야기입니다 그것을 누가가 어떻게 썼습니까, 누가복음1장에 보면 내가 여러 문헌을 체크하고 사람들을 만나고 여러 가지 정보를 모아가지고 내가 누가복음을 썼다고 그러는 겁니다,
그러니까 누가복음의 후속 복음이 사도행전입니다, 사도행전도 알다시피 1장부터15장까지는 누가가 모르는 이야기들입니다, 16장부터 2차 선교여행 시작하는 그때부터 누가가 쓰는 단어가 우리가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그전에는 저희가 이렇게 표현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사도행전 처음15장까지는 누가의 경험이 없는 장들입니다 그런데 신기한 게 누가가 2차 여행을 같이 다니면서 그때부터 글을 썼는데 그때부터는 사도바울의 이야기만 잔뜩 써놓았습니다, 그때부터 누가가 베드로이야기를 전혀 안 썼습니다,
왜 그럴까요, 제 생각에는 그러는 겁니다,
베드로이야기도 조금 집어넣으면 좋은데 베드로이야기를 썼다가는 자기 선생님에게 혼쭐날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사도행전에는 베드로이야기가 없는 겁니다, 누가가 정말 쓰고 싶어서면 베드로이야기를 베드로행적을 얼마든지 쓸 수 있었습니다, 자기가 바울을 따라 다녔기 때문에 바울 것만 썼다고 생각하지만 베드로 이야기도 얼마든지 리서치해서 사람들을 만나서 쓸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사도행전은 실은 베드로이야기도 끼여 있으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그것이 안 된 겁니다, 왜냐면 이게 다 쓴 뿌리와 연계되어 있는 겁니다, 우리 인격과 성서는 우리 인간을 폭로해줍니다,
너희 인간들은 이렇다, 그것을 폭로시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런 모습을 보면서 우리가 바울의 약한 부분이 여기 있는 저도 가지고 있고 여러분들은 모르겠습니다, 있는지 없는지 여기 저기 다 있는 겁니다, 그다음에 반대로 베드로를 들여다봅시다,
베드로가 바울을 어떻게 다루었나, 베드로는 순교1년 전에 베드로는 65년에 순교를 당했습니다, 순교1년 전64년에 베드로 전 후서를 썼습니다,
베드로의 유일한 서신입니다 이분이 편지를 누구에게 썼냐면 자기 제자들입니다 그 제자들은 어떤 분이가면 옛 예루살렘교회에서 같이 사역하다가 쫓겨난 사람들입니다 누구 때문입니까, 바울 때문에 그래서 고향을 떠나서 시리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본도. 비두니아. 아시아 등지에 흩어진 사람에게 편지를 쓴 겁니다, 왜냐면 베드로가 자기 예루살렘교회에 교인이 없으니까 시간만 나면 이분들을 방문해가지고 말씀을 가르쳐주고 복음을 주고 또 격려해주고 왔다 갔다 하는 순회선교사가 된 겁니다,
그러면서 이분이 자기가 죽을 때가 언제인지 미리 아시니까 죽기1년 전에 이분들에게 편지를 쓴 겁니다, 편지를 쓰면서 바울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걸 우리가 볼 수가 있습니다, 신기한 게 바울은 베드로에 대해서 긍정적인 이야기를 별로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뭐냐면 바울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베드로가 바울을 보는 눈이 어떤가를 베드로후서3장12절부터18절 말씀인데 15절에 베드로가 자기제자들에게 너 네들 얼마나 고생스럽나 외지에서 온갖 인종차별을 받으면서 종교적 차별로 소외당하고 왕따 당하고 예수님 때문에 그랬지 그렇지만 15절에 그 핍박가운데 너희들은 오래 참으라, 그러는 겁니다, 왜냐면 오래 참으면 나중에 좋은 일이 있다 그러면서 오래 참으라는 이야기를 하시면서 우리가 사랑하는 형제 바울이 그런 말을 썼습니다, 그러니까 베드로가 바울에 대한 쓴 뿌리가 어느 정도 빠진 겁니다, 벌써 쓴 뿌리가 빠졌으니까 우리가 사랑하는 형제 바울이라고 쓰는 겁니다, 바울이 쓴 편지가 많습니다,
그 편지를 베드로제자들도 읽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러는 겁니다,
바울의 편지 내용들을 보면 바울이 항상 뭐라고 그러느냐면 오래 참으라, 한 게 있잖으나, 그러면서 바울을 올리시는 겁니다,
바울의 편지도 보면 사랑은 오래참고 오래 참으라한 게 있잖으나 똑같이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이렇게 말했단다, 너 네들 읽어서 알잖아 그러면서 너희들 오래 참으라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바울의 말씀을 베드로가 인용하는 겁니다, 그러면서 베드로가 솔직하게 말하는 겁니다,
그런데 바울의 서신을 읽다보면 그 일부는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도 못한 자들이 바울의 편지을 잘 이해를 못한다는 겁니다, 다시 말하면 배우지도 못한 학벌이 없는 사람들은 바울의 편지를 읽다보면 어떤 것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를 못한단다,
굳세지도 못한 자들은 믿음이 약한 자들입니다 믿음이 흔들리는 자들은 바울의 편지를 읽다가 보면 이해가 안 되니까 이분들이 그 성경말씀을 변형시켜서 풀다가 어떤 사람은 멸망에 이르는 사람도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바울의 편지가 어렵다는 겁니다, 그렇지만 그 편지가 우리에게 중요하다는 겁니다, 어려운 것들은 이해안가는 것들은 함부로 해석하지 말라는 겁니다, 바울의 편지 속에서 오래 참으라, 그랬잖아 너 네들도 오래 참으라, 그걸 말씀하려고 그러는 겁니다, 그러면서 내가 바울을 인정한다는 소리입니다 그러니까 베드로가 바울을 인정했던 부분을 이분이 순교1년 전에 볼 수가 있습니다, 바울서신도 인정했고 바울의 가르침도 인정했고 그분의 영성 지성들 다 인정해준 겁니다, 문제는 저는 이걸 보면서 그러는 겁니다,
주님께서 베드로는 단순한 사람이기 때문에 주님께서 이 사람 마음을 순수하게 만들었구나, 이분에게 쓴 뿌리를 어느 정도 제거시켜 주었구나, 이것을 우리가 볼 수가 있습니다, 베드로는 본래 성품이 오래 참지 못하는 분입니다, 본인이 오래 참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분이 물위에 걸어가는 것 그다음에 신앙 고백하는 것 마태복음16장에서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그다음에 너는 나를 세 번 부인할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죽을지언정 부인 안할 것이다 그러면서 성질이 급한 사람입니다,
또 정의감이 강해서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잘라버리고 부활 후에 예수님이 찾아가니까 물로 뛰어드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인데 지금 자기 제자들에게 오래 참으라, 그러니까 이분이 얼마나 영적훈련을 받았기에 성품이 변해버린 겁니다, 변한다는 것은 이분의 쓴 뿌리가 어느 정도 빠진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 주님이 베드로를 상당히 사랑하심이 틀림없습니다,
바울과 바나바의 관계에서 보면 바나바는 본래 착한사람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자기의 은인인 바나바를 별로 신사적으로 대하지 못 했던 이야기 들었죠,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바울이 바나바에게는 배은망덕한 사람입니다 이런 바울의 문제점 베드로와의 문제점 또 바나바와 문제점들을 우리가 볼 수가 있습니다, 자기에게 은혜를 베푼 바나바에게 이분의 편지 속에서도 보면 바나바가 참으로 고마운 사람이다, 라고 말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바나바의 이름도 언급을 안 했습니다, 미안하다는 말도 없고 바나바가 주후61년에 구보로 살라미에서 돌에 맞아 순교 당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러면 분명히 바울이 그 소식을 들었을 겁니다, 바울이 68년에 순교를 당했습니다, 분명히 자기에게 은혜를 베푼 바나바가 순교당한걸 보면 마음이 아팠을 겁니다, 그런데 바울이 61년 이후에 편지를 세 권을 썼습니다,
61년에 디모데전서를 쓰고 65년에 디도서를 쓰고 67년에 디모데후서를 썼는데 이 세 편지에서 자기제자들에게나 기독교공동체에게 내가 바나바 같은 존경하는 분이 순교를 당하여 마음이 아프다 천국에 가서 만났으면 좋겠다는 이런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자기가 사랑하는 디모데에게 편지하고 디도에게 편지하는 그만큼 외골수 같은 사람입니다, 복음을 위해서도 외골수로 달렸지만 전체를 보는 시각이 약했던 사람입니다 이런 가운데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보면 자기 문제점을 자기가 압니다, 이게 딜레마입니다 그런데 이게 잘 고쳐지지가 않는 겁니다, 그러면서 이분이 그러시는 겁니다,
왜 내 마음이 이렇게 오락가락할까 그럴 때 이분이 오늘 결론적인 말씀인데 그러는 겁니다, 내가 지금 깨닫기를 내 마음에 두 법이 있다는 겁니다,
한 법은 하나님의 법이 있는 겁니다,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는 다시 말하면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이런 모든 부분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법이 있고 또 다른 법이 하나있다는 겁니다, 이러면서 두 법이 있어서 내 마음에서 내 지체 속에서 두 법이 싸움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이런 말씀을 하는 겁니다, 이분이 고민하는 것이 로마서7장6절까지는 원죄에 관한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원죄가 해결이 되었는데 7장7절부터는 쓴 뿌리문제 기독교의 윤리문제를 다루는데 기독교인들이 윤리문제 이것이 자기에게도 문제가 있어가지고 성격을 자기가 컨트롤을 못하겠다는 겁니다,
이분이 지금까지 자기가 기독론도 쓰고 구원론도 쓰고 삼위일체론도 자기 편지 속에서 다 다루고 종말론까지 다 다루었는데 그런데 성결론도 어느 정도 가르쳤는데 자신이 성결하지 못한 딜레마가 있다는 겁니다,
가장 서로 사랑해야 되는 동역 자들을 싫어하고 미워하고 질투하고 하는 자기 스스로가 이것에 헤어나지 못한다는 겁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법이 너 속에 있고 다음에 다른 죄의 법이 쓴 뿌리의 법이 그 속에 있다는 겁니다, 그래가지고 이 두 법이 안에서 싸움을 한다는 겁니다, 싸움을 해가지고 죄의 법이 이기면 이런 못된 말들이 입에서 나온다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법이 이기면 죄의 법이 거기에 숨겨져 가지고 그렇지 않고 그런데 바울이 그러는 겁니다, 내 속에 죄의 법이 나를 뒤집어 놓아서 하나님의 법을 눌려서 내가 지금 이렇게 어렵다는 겁니다,
그래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라는 겁니다,
14절부터 바울의 딜레마를 본문에서 고백하는 모습을 우리가 한번 봅시다, 14절부터25절에14 우리가 율법은 수직계명입니다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도다 다시 말하면 쓴 뿌리의 노예가 되었다 그런 말입니다 15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하나님의 법입니다,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쓴 뿌리의 노예가 된 죄의 법을 내가 지금 행하고 있다는 겁니다,
16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행하면 다시 말하면 쓴 뿌리의 노예가 되어 쓴 뿌리가 시키는 대로 하면 내가 이로써 율법이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다시 말하면 쓴 뿌리가 시키는 대로 할 때마다 수평계명이 나에게 이렇게 소중하구나, 느끼게 된다는 겁니다, 죄책감이 자꾸 생겨서 수평계명의 소중함을 더 느끼게 되고 17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내 속에 지배하고 있는 쓴 뿌리가 나를 붙잡아 가지고 내가 이런 행동을 하게 된다는 겁니다, 18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다시 말하면 내가 수평계명대로 순종해야 되겠다는 그 원함은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쓴 뿌리가 시키는 대로 내가 지금 행동을 하는구나,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19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바 악을 행하는도다 20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쓴 뿌리가 나를 이렇게 만든다는 겁니다, 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그래서 바울의 마음에 두 법이 있음을 깨달았다는 겁니다, 22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속사람은 에베소서3장16절 로마서7장22절 고린도후서4장16절 이렇게 세 성경구절에서 속사람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속사람이라는 말은 예수님이 내 배속에서 이렇게 표현을 했습니다, 로마서8장16절에 속사람은 내 영이라 했습니다,
사람의 영을 속사람이라고 합니다, 내 속에 있는 내 영 그것이 속사람 속에 있는 내 자신 그래서 바울의 영 그럽니다, 고린도후서2장13절에 그렇기 때문에 로마서8장16절에 보면 내 영 안에 하나님의 영이 내려와서 내 영과 하나님의 영이 연합할 때 우리가 기독교인이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겁니다, 내 속사람과 하나님의 영이 연합될 때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그러는 겁니다, 그런데 23 내 지체 속에서 할 때 지체는 혼입니다 마가복음12장30절을 보면 혼에는 네 부분이 있습니다, 힘이 있고 뜻이 있고 목숨이 있고 마음이 있습니다, 혼 안에 쓴 뿌리들이 들어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혼의 가장 깊은 곳 마음에 속사람 바로 옆에 쓴 뿌리들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겁니다, 내 마음에 두 그룹이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내 지체 속에서 바울의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죄의 법 사탄의 법 쓴 뿌리의 법 죄와 사망의 법입니다, 그리고는 내 마음의 법과 하나님의 법 성령의 법 다시 말하면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입니다 이 두 법이 있어서 싸운다는 겁니다,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자기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이 쓴 뿌리의 법이 더 힘이 세어서 마음의 법을 사로잡아서 쓴 뿌리의 법이 자기를 노예로 삼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가 지금 쓴 뿌리의 법이 너무나 강해가지고 그렇게 자기에게 은혜를 베풀던 바나바도 별로 소중하게 생각안하고 자기 영적인 은사인 베드로나 야고보에게도 항상 섭섭함이 있고 그러니까 편지에도 쓰지 않고 여러 가지 갈등이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그러는 겁니다,
내가 신학편지도 다섯 권이나 썼고 교회도 개척 많이 하고 전도도 많이 하고 제자훈련도 많이 시키고 두란노 서원을 열어서 신학교 총장도 하고 다 하는데 마음속에는 미워하는 마음. 질투하는 마음. 용서 못하는 마음 이런 쓴 뿌리들이 잔뜩 들어있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나는 괴롭다는 겁니다, 곤란 받는 불쌍한 존재라는 겁니다,
그러면서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다시 말하면 수평계명을 온전히 지키지 못하는 죄의 법속에서 노예생활을 하는 내가 누가 나를 노예생활에서 건져낸다는 것은 해방시켜주느냐 입니다, 지금 7장까지가 바울이 쓴 뿌리 때문에 괴로워하는 모습이 있는 겁니다, 왜 주님이 바울에게 이런 모습을 허락했을까요, 우리가 그것을 다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러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런 모습을 기독교인들이 다 가지고 있는데 바울이 지금 하나의 모범으로 보여주는 겁니다, 그분의 삶 속에서 그러면서 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이게 도대체 이해가 안 되는 겁니다, 이분이 지금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이렇게 고민하고 있는데 갑자기 성령님이 바울의 입을 통해가지고 바울아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러는 겁니다,
이런 모습이 된 너 자신을 보고 감사하라는 겁니다,
왜냐면 우리가 이런 모습이 있다는 것을 스스로가 깨닫고 이런 행동을 할 때 내가 겸손해지는 겁니다, 내가 이렇게 교회개척도 많이 하고 이렇게 신학에 유명한 기독론 삼위일체론 성결론 다 썼는데도 나는 아직 여기에서 헤어나지 못한다는 겁니다, 이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그러면서 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분은 내 능력을 가지고는 안 된다는 것을 이분이 고백 하므로써 주님이 볼 때 주님이 기뻐하시는 겁니다, 그뿐입니까,
지금 우리가 기독교인들을 보면 NO1그룹 성품이 변하지 않고 성화되지 않는 사람들이 대부분인데 이런 사람들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이 말을 고백합니까,
안 합니다 왜냐면 이런 자각증세도 없는 겁니다,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어떤 때는 당연하게 생각하는 겁니다, NO2기독교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시 말하면 기복신앙을 가진 사람들 번영신학이나 이 세상에서 잘되기를 원하는 사람들도 이 고민을 안 합니다, 그냥 귀로만 듣지 내가 이것 때문에 고민하지를 못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지금 히브리서11장에 나오는 믿음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으로 지금 만드는 겁니다,
이런 사람으로 만드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 고민을 하게 하는 겁니다,
어느 고민이냐면 왜 내 속에 두 법이 있어가지고 내가 왜 이 쓴 뿌리에게 사로잡혀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는가, 여기에 대한 안타까움이 있는 겁니다, 그것 때문에 내가 마음이 가난하여지고 애통해지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마음이 가난하고 애통하는 사람을 뭐라고 그랬습니까,
복 있는 사람이라고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바울의 수준에서 내가 왜 이러지 내가 왜 이러지 하면서 이것 때문에 고민하는 사람 이것 때문에 고치지 못하지만 고민하는 그 자체를 주님이 기뻐하시는 겁니다,
이런 사람은 때가 되면 고쳐줄게 그래서 주님께서 이제 고침을 받는 다시 말하면 영적 엘리트가 되는 사인입니다 이 고민하는 사람은 그러니까 복 있는 사람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로마서8장에 들어가서 이런 복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우리에게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사인이 있는 사람들은 너 네들은 하나님께 감사해라 너희들은 특별한 존재들이기 때문에 감사하라는 겁니다, 결론적으로 우리 주변에는 지금 기독교인들에게 쓴 뿌리가 다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쓴 뿌리가 있어도 거기에 대한 자각증세가 없습니다,
있는 그대로사는 겁니다, 쓴 뿌리의 노예가 되어가지고 그냥 사는 겁니다, 하나님이 전능하신 분이신데 고치려면 얼마든지 고치십니다,
그런데 안 고치시고 그대로 놓아두시는 겁니다,
왜냐면 저쪽나라에 가서 낮은 계급에 있게 하려면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이유가 있어야 됩니다, 너 낮은 계급에 왜 있는지 아느냐 너에게 쓴 뿌리가 많고 법적으로 내 자녀지만 윤리적으로 못되게 놀다가 왔잖아 그래서 너는 낮은 계급으로 가라면서 우리 하나님도 머리를 쓰시는 겁니다, 그래서 주변에 그런 사람이 많은 겁니다, 만약에 내가 세 번째 높은 계급의 사람은 아니지만 거기 후보라고 생각하면 그럴 어떻게 압니까,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라고 고백하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나의 부족함을 항상 고백하는 사람은 이게 복 있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자기 자신이 들여다보기가 바쁘지 딴 사람들을 들여다보면 안 되는 겁니다,
왜냐면 저 사람들은 그러다가 갈 사람들입니다 골치 아픈 사람들은 놓아두어야 됩니다, 고치는 것은 예수님께 맡기는 겁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을 미워하면 안 되는 겁니다, 그런 사람들을 비평하거나 욕하거나 그러면 안 되는 겁니다, 더 불쌍한 생각을 하셔야 되는 겁니다,
내가 높은 계급에 가정을 했을 때 그러니까 높은 계급에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압니까, 그런 사람들을 불쌍하다는 마음이 있는 사람들 그러니까 복 있는 자는 자비로운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큰 그림으로 볼 때 나는 그러면 어디에 있느냐 내가 지금 어느 그룹에 속해 있느냐 그런데 나의 마음에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라는 고백이 없습니다, 없으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성령님 내가 이런 고백을 할 수 있게끔 저를 가이드해주세요 바울은 복 된 사람이니까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나에게도 그것을 할 수 있게 해주세요, 이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사람이 되면 주변사람을 내가 다 안아줄 수가 있는 겁니다,
그런 사람을 보면 내가 다 안아주는 겁니다,
왜냐면 저분은 그렇게 안 되도록 주님이 하셨는지도 모른다,
안 그러면 이쪽으로 발전시키는 일에 내가 가이드해주고 도와주는 겁니다, 그러면서 모든 것을 보는 겁니다,
기도드리겠습니다,
예수님 바울의 삶을 통해서 이분의 한계점을 보게 되고 또 성령님께서 의도적으로 이분의 한계성을 우리에게 노출시켜주었습니다, 이와 같이 저희들도 바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우리도 이런 한계성을 가지고 하루하루 살고 있습니다, 주님 바울에게 주셨던 그 마지막 결론의 말씀 나는 하나님께 감사하라 왜냐면 뒤에 숨겨놓은 하나님의 복이 있기 때문이다, 라는 이 말씀을 우리가 소화해서 우리에게도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하는 이 고백을 하도록 하시고 이 고백 뒤에 숨겨 있는 하나님께 간사하는 마음이 우리에게 있기를 간절히 간구합니다, 성령님이시여 이곳에 남아있는 한분. 한분에게 바울에게 주셨던 그 은총을 내려주시옵소서 이 은총을 받은 자는 베드로같이 바울같이 야고보같이 넓은 마음으로 주님의 마음을 가지고 주변사람들을 안아주고 정죄하지 말고 항상 이끌어주고 주님 창조목적에 부합되는 삶을 같이 살 수 있도록 격려해주는 그러한 우리 모두가 되도록 지혜를 허락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황용현 목사님 설교내용영상으로 보세요.
https://www.youtube.com/watch?v=6E36vA5yauw
'황용현목사 강해설교 녹취록 > 로마서 강해'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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