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용현목사 강해설교 녹취록/로마서 강해

19강, 로마서5장12절-21절, 아담은 오실자의 표상이라

변명섭 2019. 11. 17. 19:41

로마서 19강, 아담은 오실자의 표상이라(로마서5장12절-21절) 2014년11월9일 말씀
오늘 로마서 열아홉 번째 제목은 아담은 오실자의 표상이라는 말씀입니다, 시간이 없어서 본문을 읽지 않겠습니다, 
오늘 말씀은 상당히 어려운 말씀 중에 하나입니다, 
그리고 굉장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신학적으로 이 부분이 굉장히 중요하기 때문에 오늘은 제가 이 부분에 대해서 조금 어려운 부분이지만 조금 쉽게 설명하려고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지난시간에 로마서5장1절부터11절까지 공부했습니다, 지난시간 말씀을 간단하게 요약을 하면 뭐냐면 우리는 과거에 하나님과 원수였다는 말씀을 바울이 했습니다, 
10절에 우리는 하나님과 원수였다 우리는 죄인이었다, 
그래서 창조목적대로 살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를 야기하게끔 인도했나, 9절에 그랬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과 우리는 원수가 되었다 
10절에 이렇게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우리 원수 된 관계를 화목 시켜 주기위해서 예수님이 화목자로 오셨다 8절에서11절에 이런 말씀을 하시고는 그리고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진노에서 우리를 구원해주셨다 9절에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이 화목 자였고 우리는 화목을 받은 자였다, 그래서 그 말을 다른 말로 의인이 되었다, 이런 말로 표현했습니다, 10절에 그래서 우리는 화목을 받을 자였는데 그리고 우리는 의인이 되었는데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확정 받은 자라고 표현했습니다, 
8절에 이런 사람들인데 우리는 이제 우리할일이 뭐냐면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려야한다 이렇게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 말은 뭐냐면 왜 아담이 죄를 지었냐면 피조물이 창조주처럼 되려고 창조의 목적에 위배되는 생각을 했던 겁니다, 사탄 루시퍼도 마찬가지로 이와 같이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려면 창조목적대로 살아야 된다는 겁니다, 
이 말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우상을 섬기지 말아야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제는 예수님 때문에 우리가 화평을 누리게 되었으니까 우리의 할 일은 뭐냐면 우리는 이제는 하나님이 다시 화를 내지 않으시도록 우리는 우상을 섬기지 말아야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람들이 유대인을 이렇게 지칭하면서 유대인의 구약의 2000년 동안 유대인의 모습을 보면 유대인이 하나님의 자녀들인데 우상을 섬겨왔다는 겁니다, 
이분들이 하나님과의 화평문제가 깨어졌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첫 번째 믿음의 소유자 두 번째 믿음의 소유자가 화평을 깬 사람들인데 세 번째 믿음의 소유자 히브리서11장의 믿음의 소유자들이 소수인데 이 사람들이 하나님과의 화평을 사모했던 사람들이다 이렇게 성서에서 이야기했습니다, 우상을 섬기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결론 뭐냐면 우리는 이런 사람이기 때문에 세 번째 사람들은 하나님이 우리를 보고 상당히 흡족케 하시고 기분좋아하신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이 기분좋아하시는 모습을 보고 우리도 즐거워하자 이게 결론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이 아니고 히브리서11장의 믿음을 가진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되어야 되는데 바울이 우리라는 그 우리는 그분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여러분들 보면 기뻐하시고 당신들도 저 나라에 올라가면 하나님이 대단히 기뻐하실 테고 왜냐면 창조목적대로 살다가 왔으니까 저쪽동네에 가면 존귀히 여김을 받을 사람들이라는 겁니다, 
이 말씀을 지난시간에 했습니다, 그게 로마서5장1절부터11절까지입니다 
오늘은 로마서의 두 번째 내용인데 로마서5장12절부터21절의 말씀 이 말씀은 상당히 한 단계 업 그레이더 된 어려워서 소화하기가 힘든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것을 소화하고야 마는 겁니다, 
그래서 12절에 바울이 이렇게 시작하는 겁니다, 
이러므로 하면 뭘 수식어로 할까요, 이러므로 하면 지난시간의 설교 스토리가 그러면서 바울이 그러는 겁니다, 이것은 아담이 타락했기 때문이다, 
라고 바울이 논리를 전개합니다, 이 말은 뭐냐면 아담이 창조목적대로 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일들이 일어났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12절에 아주 대단한 말씀을 했습니다, 보시면 이러므로 그러면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한 사람이 누굽니까 아담입니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그다음에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이 죄라는 게 뭡니까, 죄는 헬라어로 하말티아라 그랬습니다, 하말티아라는 헬라어가 무슨 뜻입니까 활을 쏘는데 과녁에 맞아야 되는데 과녁에서 벗어났다 그런 뜻입니다, 
하말티아라는 말이 그것을 죄라고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과녁이 무엇입니까 과녁이 창조목적입니다 그런데 창조목적에서 벗어났다는 겁니다, 아담이 그런 행위를 했다는 겁니다, 죄라는 뜻이 다시 정리하면 창조목적에서 벗어난 행위를 이것을 죄라고 합니다, 다시 12절을 읽으면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그러면 세상이라는 말은 무엇입니까 세상은 우리가 저 세상과 이 세상 기억나십니까, 지금 여기서 이 세상은 어느 세상입니까 이 세상이라는 것은 시간세계입니다 이것이 몇 년입니까,
 7천년 세계입니다 이 세계의 주인이 누굽니까 예수님이 통치하시지만 누구에게 이 세상 임금 자리를 주었습니까, 사탄에게 준 겁니다, 
요한복음12장31절에 그래서 사탄이 지배하는 이 세상7천년 세상을 그리고 사탄의 자녀들이 이 세상의 모든 특권을 가지는 7천년 이 세계는 그것을 예수님이 허락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공중권세 잡는 자 에베소서2장2절에 또 이 세상신들 고린도후서4장절에 사탄의 세력들이 이 세상의 신들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세상 사람들이 사탄과 사탄의 똘만이들을 하나님처럼 믿는 그러한 구조가 7천년 세계라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여기서 단순하게 보면 아담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이 세상이 생겼고 또 사탄의 세력들이 이렇게 되었습니까, 실은 아닙니다, 그보다 더 앞에 창세전에 하나님이 이것을 계획하셨다, 라는 말씀 우리 공부 많이 하였습니다, 
그러면 다시 12절을 보세요, 죄가 이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다 그랬습니다,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른다, 여기서 우리가 사망이 왔다는데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사망은 무슨 사망입니까, 육. 혼. 영의 사망입니다 타락 전에는 아담이 육이 있었고 혼이 있었고 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담의 육은 어떤 육이었습니까, 타락 전에는 영원한 육이었습니다, 썩지 않는 영원한 육 신성한 육 그다음에 혼은 하나님의 성품을 닮은 성령의 9가지 열매의 성품이 있는 그러한 혼입니다 마음입니다 그다음에 영은 하나님의 입김을 받아서 하나님의 성령을 받아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그 영입니다 그런데 타락으로 말미암아 어떻게 되었습니까, 
육이 썩는 육으로 변해버린 겁니다, 그리고 시간 속으로 들어와서 나이가 차는 이런 육으로 변해버리고 혼은 사탄의 성품으로 옷 입혀지는 하나님의 성품이 빠져나가면서 사탄의 질투심 미움 경쟁심 여러 가지 용서 못하는 마음 이간질 하는 것 거짓말하는 이런 마음으로 변해버리는 겁니다, 
인격이 그렇게 변해버리고 영은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에서 사탄의 자녀의 신분으로 변해버린 겁니다, 그래서 이런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왔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모든 사람에게 우리가 초점을 맞추어야합니다 모든 사람이라는 것은 모든 인류입니다 모든 사람이 아담의 타락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 
라고 12절에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바울이 오늘 본문을 주욱 보면 17절18절19절21절을 보면 여기서 12절의 말씀을 또 다른 표현을 했습니다, 같은 내용인데 그래서 다른 표현을 한번 봅시다, 17절을 보세요, 
17절에는 한사람의 범죄로 인하여 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한사람의 범죄로 인하여 잘못 갔다는 겁니다, 사망이 그 한사람으로 말미암아 그 한사람이 아담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하였다는 겁니다, 
다시 말하면 아담의 범죄로 인해서 창조목적을 위배하는 일을 위해서 사망이 육. 혼. 영의 변화 육의 시간 속에 들어오고 왕 노릇했다는 말은 이 사상이 통치하고 지배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은 어떤 세상입니까, 
다시 말하면 사탄의 자녀들이 살고 그 자녀들이 왕 노릇하고 더러운 성품들 이간질하고 싸움질하고 사기치고 부패한 이 성품들이 이 세상에서 왕 노릇하고 있고 그리고 사람도 나이가 들면 죽게끔 이 사상 이것이 왕 노릇하게 되었던 겁니다, 다시 말하면 이것에 지배된 세상 이 세상이 그렇다는 겁니다, 우리가 지금 그런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누가 더 파워가 있습니까, 사탄의 자녀들이 훨씬 피워가 있는 겁니다, 그분들이 정권을 다 쥐고 전 세계 어느 정권이나 그분들이 경제권을 다 쥐고 있고 이분들이 정치세력 다 가지고 있고 문화 사회 심지어는 모든 윤리 도덕 다 그분들이 쥐고 있는 게 이게 우리 하나님이 힘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우리 하나님이 그렇게 만들어 버린 겁니다, 당분간 허락하신 겁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변화시키려고 과거 기독교2천년 동안 변화시키려고 했지만 안 되었습니다, 오늘날도 그렇게 많은 기독교인들과 교회가 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가 없습니다, 왜냐면 당분간 이 나쁜 분들에게 왕 노릇하도록 이렇게 다 준 겁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변화시키려고 노력하는 그 자체를 또 우리 주님이 기뻐하시는 겁니다, 그리고 18절을 보시면 한 범죄로 한 범죄는 누굽니까 아담의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르렀다는 겁니다, 
정죄라는 것은 너 죄 있다, 라고 판단을 내리는 겁니다, 
그러니까 모든 사람이 죄인이다, 라고 정죄를 당하는 일이 있다는 겁니다, 같은 의미지만 표현을 조금 달리한 겁니다, 19절을 보시면 한사람의 순종치 아니하므로 그랬습니다, 뭘 순종하는 겁니까, 창조의 목적을 순종하지 않는 겁니다, 우리가 간단하게 말해서 먹지 말라는 과일나무를 먹어서 당하는 이런 단순적인 것이 아닙니다, 더 큰 그림을 보셔야 됩니다, 
창조의 목적에 순종치 아니하므로 많은 사람이 죄인이 되었다는 겁니다, 
죄인이라는 말은 무엇입니까, 하말티아 다시 말하면 많은 사람이 창조의 목적에 위반하는 자가 되었다는 겁니다, 과녁을 맡 추지 못하는 과녁에서 벗어난 자가 되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21절에 바울이 결론을 내렸습니다,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하게 되었다 그래서 16절에 보면 결국 나중에 심판이 따라 온다, 라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면 21절에 제가 다시 한 번 쉬운 말로 바꾸어 드리겠습니다, 21절에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하게 되었다 이런 말은 창조목적에서 벗어난 행위와 다시 말해서 창조목적에 벗어난 행위와 이런 행위를 범하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7천년 세상에서 지배세력으로 있을 것이고 이런 자들이 이 세상을 통치할 것을 또 하고 있다는 것을 왕 노릇한다는 것을 바울이 지적했습니다, 
이렇게 아담 때문에 세상이 이렇게 되었다는 겁니다, 
13절을 보시면 율법을 있기 전에도 죄가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는 죄가 죄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이 말입니다 14절을 보세요, 
그러나 아담시대부터 모세시대에 이르기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않는 사람들에게 까지 죽음이 왕 노릇했습니다, 
아담은 오실분의 모형입니다, 이게 굉장히 어려운 말입니다, 
13절14절이 이것을 하나하나 설명하여 드리겠습니다, 
13절에 보면 그랬습니다, 율법이 있기 전이다 율법이 있기 전이라는 것은 기간으로는 언제부터 언제까지입니까, 아담타락이 4114년입니다 이때부터 율법이 있을 때까지 모세가1526년에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율법을 받은 것이 모세가 80세에 불리 움을 받았습니다, 
모세가 시내 산에서 율법을 받은 것이 모세가 이스라엘백성들을 출애굽 시키고 광야에 3개월 있을 때입니다 이때 율법을 받았습니다, 
출애굽기19장1절에 보면 그러니까 율법을 받은 년도가 1446년입니다, 
그러면 13절에 보시면 율법 있기 전에도 죄가 세상에 있었으나 죄로 여기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기간 동안에는 율법이 없었습니다, 
뭐가 죄인인 것은 율법이 있어야만 잣대가 되잖아요, 
그러니까 이 기간 동안 율법이 없었으니까 사람들이 죄가 무엇인지 몰랐던 겁니다, 죄에 대한 잣대를 주지 않았기 때문에 그래서 14절에 그러는 겁니다, 그러나 아담시재부터 모세시대에 이르기까지 아담의 범죄를 짓지 않는 사람들에게 까지 죽음이 왕 노릇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다음부터 1446년부터 주전4년까지 약1400년 동안 율법이 있었는데 율법을 주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지 지난시간에 10가지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중에 제일 마지막 목적이 너희들 아무리 노력해도 율법을 지키지 못한다, 너희들이 의로운 사람이 되려면 예수님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율법을 주셨다, 라고 공부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꼭 필요하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겁니다, 아담은 오실 분의 모형이라는 겁니다, 모형이라는 단어가 헬라어로 티포스 이게 모슨 뜻이냐면 자국. 흔적. 형상. 거울. 표상 그러니까 실체가 아니라는 겁니다, 실체의 그림자 같은 모습이라는 겁니다, 
그것을 티포스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아담은 오실 예수님을 보여주기 위한 거울이라는 겁니다, 티포스라는 겁니다, 그냥 형상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이게 이해하기가 상당히 힘듭니다, 이게 어떻게 되어서 이렇게 되었느냐 제가 이것 때문에 묵상을 많이 했습니다, 
우리 예수님을 보여주기 위해서 아담의 이 사건을 우리에게 운 높이 교육을 시킨다고 생각하세요, 첫 번째 아담의 특성이 있습니다, 
아담은 본래 죄 없는 분이었습니다, 본래 그리고 예수님의 특징이 있습니다, 예수님과 아담을 비교하면서 두 칼럼을 만들어 보세요, 
아담은 처음에 죄 없게 창조되었다 그러면 예수님도 본래 죄 없으신 분이십니다 이런 부분에서 아담과 예수님이 표상입니다 두 번째는 아담은 본래 영적존재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실제로 영적존재이십니다 
세 번째로 아담은 영적존재가 되어 버린 겁니다, 
죄를 지었기 때문에 시간 속으로 떨어진 겁니다, 
똑같이 예수님도 우리 죄를 위해서 이미 창세전에 이분이 육적존재로 내려올 것을 성육신하실 것을 계획하셨습니다, 그래서 인자라고 그렇게 예수님이 표현합니다, 그래서 아담은 고린도전서15장45절에 뭐라고 표현했냐면 첫째 아담이나 그러는 겁니다, 아담이라는 뜻은 사람이라는 뜻이거든요 그러니까 첫째 사람이다 이렇게 표현하시는 겁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둘째 아담이다 그랬습니다, 
이 말은 뭐냐면 예수님이 이제는 성육신하셔서 아담의 이 모습을 이 역할을 할 일을 우리에게 보여 주기위해서 오실 분의 의미에서 둘째 아담이다 그랬습니다, 세 번째로 아담이 어떤 모습이었냐면 아담이 죄인이 되었습니다, 
네 번째로 보시면 우리 예수님도 인간이 되셔가지고 인류의 죄를 뒤집어쓰셨습니다, 이사야서53장5절에 징계를 받으셨다 그랬습니다, 
죄인이 되셨습니다, 그다음에 이사야서53장6절에는 우리의 죄악을 담당하셨다 그랬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예수님이 마태복음27장46절에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니까 다시 말해서 이분이 완전히 버림을 받아 가지고 죄인의 모습으로 잠깐 계셨습니다, 
다섯 번째 아담이 죄인이기 때문에 아담의 죄가 온 인류에게 전위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저주의 전위원칙입니다 저주가 온 인류에게 전위가 되는 겁니다, 예수님은 이분의 십자가사건 때문에 이것을 로마서5장15절에서17절18절19절에 여러 가지 표현을 합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은혜다, 이렇게 표현하고 그리스도의 은혜 또는 의의 한 행동 한분의 순종 이런 표현을 했습니다, 이 은혜 때문에 순종. 의의 행동 때문에 우리 모든 사람이 의롭게 되었다는 겁니다, 5장16절18절19절21절에 그래서 우리가 의인이 되었고 영생을 전위 받았다는 겁니다, 이런 의미에서 전위 받는 개념 속에서 아담의 저주의 전위가 모든 사람을 죄인으로 만드는 것처럼 예수님의 그 의의 행동 때문에 모든 사람이 의인이 된다는 그러한 하나님의 논리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담의 행동은 전위의 원칙이 의로운 사람을 만드는데도 전위의 원칙이 예수님을 통해서 일어난다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담은 오실 예수님의 그린자라는 겁니다, 이런 의미에서 티포스라는 겁니다, 
전위의 원칙이 여기서 우리가 집고 넘어갈 것이 하나 있습니다, 
이것 때문에 신학적으로 많은 논란이 있었는데 예수님의 선한 행위 때문에 모든 사람이 의인이 되었다 이 말입니다, 그다음에 아담의 불순종 때문에 모든 사람 저주의 전위가 모든 사람에게 갔듯이 복의 전위도 모든 사람에게 간다, 라는 이 두 개념에 대한 상당한 해석의 문제들이 신학적으로 과거2천년 동안 있어 왔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게 우리가 지금 질문 던질 게 하나가 1세기 때 예수님의 승천이후에 1세기 때 예수님의 제자들을 통해서 복음화를 시도할 때 첫100년 동안은 기독교인의 숫자가 0.01%였습니다, 
나머지 사람들은 기독교인이 아니었습니다, 의인이 아니었습니다, 
그것만 봐도 이 말씀이 맞지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의의 행위 때문에 모든 사람이 의인이 된다고 그랬는데 실제로 100년 동안에 모든 사람이 아닙니다, 아주 소수만 의인이 되었습니다, 그 나머지는 다 죄인들입니다 그러다가 500년 후에는 약20%가 기독교인이었습니다, 그리고 1000년 후에 가서는 전 세계인구의 약17%가 기독교인이었습니다, 1500년 종교개혁 때 보면 약20%입니다 1900년도 20세기 시작에는 약33%로 상당히 많았습니다, 그 후 지금까지2014년입니다 기독교인이 약30%-33%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문제가 생기는 겁니다, 
모든 사람이라고 할 때 그 모든 사람이 아닌 겁니다, 역사적인 실체를 보면 기독교인이 그래서 저주의 전위는 모든 사람이라고 했을 때 그 모든 사람은 그 안에 숨겨져 있는 하나님의 예정된 사람은 거기서 빼어야 되는 겁니다, 그런데 복의 전위를 보면 또 모든 사람이 복 받는다고 그랬는데 그런데 알고  면 복 받는 사람은 정해져 있습니다, 
기독교인의 숫자가 여기에서 예수님이 구원받는 하나님의 자녀가 전 인류다, 라고 할 때 다 라다라고 보는 사람들이 아직도 기독교 안에서 많습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그게 아닌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서적구원론을 제가 지난 몇 시간동안 계속 이야기했는데 성서적구원론은 무엇입니까, 
아담이 육. 혼. 영이 타락했습니다, 타락 후에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먼저 예수님이 오신다고해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데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선행조건이 아닙니다, 무엇입니까 은혜가 따라와야지만 은혜를 받으면 예수님이 나를 위해서 죽으셨구나, 라는 그 믿음이 들어온다고 바울이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은혜를 받는 사람이 많았습니까, 
다시 말해서 적었다는 소리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바울부터시작해서 1세기2게기 또 카타콤 교회들이 주욱 해서 313년에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인정했잖아요, 그때까지 보면 기독교인의 숫자가 아주 적었습니다, 
그리고 그때까지 기독교인들의 생각이 어떤 생각이냐면 의인이라는 것은 숫자가 적다, 라는 겁니다, 소수라는 겁니다, 
첫300년 동안 그렇게 믿어왔고 이분들은 거기서 대해서 별로 따지지를 않았습니다,  우리는 소수고 우리는 은혜 받은 사람들이고 그런데 그 당시만 해도 성서를 우리처럼 이렇게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그냥 믿어왔는데 이제 4세기에 들어오면서부터 사람들이 이성의 발달이 오면서부터 이런 의문을 가지기 시작하는 겁니다, 어떻게 모든 사람이 의인이 된다고 성경에 있는데 기독교인의 숫자는 이렇게 제한되어 있는가, 많지가 않는가, 여기에 대해서 고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전에도 이 부분에 대해서 고민하는 신학자들이 그 당시에 꽤 있었습니다, 
오리겐 이라는 사람 애굽사람으로써 2세기3세기 그때 사람입니다 
또는 어거스틴 같은 사람 어거스틴은 로마 카톨릭 교리를 만든 몇 명 중에 아주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어거스틴은 354년에서430년까지 살았던 분입니다 이 사람도 이런 비슷한 고민을 안 할 수가 없었습니다, 
지식인들이니까 이 성이 강한 분들이니까 그런데 그중 대표적인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어거스틴과 그의 같은 시대 사람입니다 펠라기우스(Pelagius)라는 사람입니다 펠라기우스 이 사람은 어거스틴과 같은 해 태어난 사람으로 354년에 태어나서420년에 죽었습니다, 
이 사람의 가르침을 펠라기아니즘이라고 그럽니다, 
아주 유명한 신학에서 나오는 이분의 학설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어디에서 태어났는지 정확하지 않지만 펠라기우스라는 사람이 섬나라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분이 아일랜드나 또는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나지 않았나, 이렇게 이야기하는데 이분이 어디에서 태어났는지 기록이 없습니다, 로마 카톨릭 신학자였습니다, 그래서 로마에서 살면서 로마 카톨릭 신학에 어거스틴과 같이 로마 카톨릭 신학에 많이 공헌을 한 사람입니다 
이 사람 특히 펠라기우스가 대단한 아이디어를 만들어 냈습니다, 
이분이 뭐냐면 이담이 타락한 것은 아담이 육의 타락보다는 아담 속에 들어있고 도덕적 자유의지 자기의지가 있는 겁니다, 
이분이 도덕적 윤리적 자유의지가 부패해지는 겁니다, 
그래서 이분이 타락한 거라는 겁니다, 그래서 이것이 뭐냐면 자유의지의 타락이지 아담의 타락이 아니라는 겁니다, 아담 그 사람의 타락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 속에 들어있는 의지가 타락이 되었다는 겁니다, 자유의지가 그러니까 이분은 아담의 원죄에 대한 의문을 따지는 겁니다, 
원죄 그 속에 들어있는 자유의지가 그러니까 이분은 아담의 원죄에 대한 의문을 따지는 겁니다, 원죄 그 속에 들어있는 자유의지가 도덕적인 윤리적인 의지가 타락한 거다, 그렇기 때문에 자유의지를 새롭게 회복시켜주면 구원 받는 다는 겁니다, 의지를 회복시켜주면 구원 받는다는 겁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도움이 별로 필요 없다는 겁니다, 그러시면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것을 약간 지적을 했지만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자유의지가 희생되는 게 아니고 인간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인간의 노력에 의해서 자유의지를 제대로 거룩하게 도덕적인 사람이 되었을 때 가능하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때부터 펠라기우스가 그때부터 머리를 굴리면서 사람의 이성 사람의 노력 여기에 집중을 한 겁니다, 
인본주의가 거기에 깃들어 있는 겁니다, 나머지 분들은 뭐냐면 모든 걸 다 신본주의로 모든 사물을 볼 때 철학사상도 그렇고 어떤 사물을 봐도 사회적으로 모든 걸 하나님 중심적으로 봤는데 인간 중심이 아니고 그런데 펠라기우스가 그것 보다는 인간의 노력에 의해서 인간의 이성으로 해결을 해야 된다 그렇기 때문에 원죄도 알고 보면 이분의 자유의지가 잘못 발동이 되어가지고 그렇게 되었기 때문에 자유의지를 새롭게 소생시켜주면 구원이 가능하다, 라고 보는 겁니다, 그러면 이 말씀이 오늘 본문말씀과 연계가 됩니까, 
바울의 신학은 그게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이분이 이것을 가지고 나오니까 이분이 지금 354년420년 이때이니까 이게 언젠가 하면 공의회 기억나십니까, 4대 공의회를 할 때입니다 그러니까 공의회사람들이 5대교구가 무엇입니까, 처음에 로마교구 콘스탄티노플 그리스 교구 안디옥교구 예루살렘교구 그다음에 알렉산드리아교구입니다, 5대교구에 이 사상이 퍼지는 겁니다, 
교회 안에 퍼지니까 나중에 안 되겠다 이것은 아니다 왜냐면 니케아 공의회에서도 아리아사상을 배격해버리고 니케아에서 니케아신조(사도신경)를 만들고 이렇게 나오다가 에베소공의회에서 이 사상을 논의하기 시작했습니다, 에베소공의회가 431년입니다, 이 사람이 죽고11년 후입니다 431년에 이 사상이 퍼지니까 지도자들이 모여서 이것은 아니다 이것은 비 성서적이다 그리하여 펠라기우스를 이단으로 정죄하여 버렸습니다, 
그래서 펠라기아니즘에 대한 내용을 알아주시기를 바랍니다, 
왜냐면 오늘날에도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 중에서 사람의 노력 우리가 우리스스로의 노력에 의해서 우리가 성화를 이룰 수가 있고 우리가 노력을 해서 구원까지도 갈 수도 있다. 라는 그러한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없지 않아 주변에 많습니다, 그럴 때 우리 저 사람 펠라기아니즘의 영향을 받지 않았나,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성서학자들이 또 어떤 때는 아니다 그러면 세마이 펠라기아니즘의 사상을 가지고 있다고 그럽니다, 
세미라는 것은 중간이라는 겁니다, 그리하여 서로가 말뜻을 알아듣는 사람은 무슨 말인지 아는 겁니다, 이 사상이 이단입니다 그러니까 얼씬도 못하는 겁니다, 다시 말하면 인본주의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발도 밟지 못하게 만드는 겁니다, 로마 카톨릭에도 그렇고 그리스정교회도 그렇고 또 애굽 정교회도 그렇고 시리아정교회도 그렇고 나중에 러시아정교회도 그렇고 모든 게 소위 인본주의가 아니고 신본주의로 나가는 겁니다, 
교회가 그러다가 13세기부터 14세기15세기16세기까지 무슨 일들이 있었냐면 유럽에서 소위 문예부흥이 일어났습니다, 문예부흥 르네쌍스라 그럽니다, 르네쌍스라는 것은 우리 인간이 그냥 하나님 밑에 있지만 우리 스스로가 우리 능력을 발휘해가지고 우리 이성을 발휘시키자 우리사회를 이런 식으로 발전시키자는 그런 기본 사상이 깔려 있는 것이 문예부흥입니다 소위 이성주의가 발달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것 때문에 나중에 종교개혁자들 루터나 칼빈 같은 사람들이 문예부흥의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왜냐면 문예부흥은 교회를 우리가 고리탑탑한 전통주의에서 다 나온 겁니다, 소위 진보사람들이라고 그럴까요, 문예부흥 이런 운동이 일어날 때 유명한 한분이 나타났는데 에라스무스(Erasmus)라는 사람입니다, 
1466년에 태어나서1536에 죽은 사람입니다 1536년에 죽었으니까 종교개혁이 1517년이니까 종교개혁이후에도 20년 더 살았던 분입니다 에라스무스라는 사람은 1000년 전에 펠라기우스가 가졌던 이 사상에 어느 정도 물이 들었습니다, 문예부흥사상 속에 접어들면서 1000년 전에 펠라기우스의 사상 이 사람이 로마 카톨릭의 사제였습니다, 
그리고 신학자였고 철학자였고 그러면서 인본주의자였습니다, 
그러니까 휴먼니스트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믿지만 신본주의에서 인본주의사상을 만들어 낸 하나의 장본인 중에 한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뭐냐면 인간의 운명은 하나님의 손에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자유의지를 어떻게 잘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인간의 운명이 결정된다는 겁니다, 
인간의 자유의지가 중요하다는 겁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로 보는 겁니다, 자유의지가 그래서 에라스무스하면 자유의지론자로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그러면 로마 카톨릭도 우리가 변화시키자 자유의지 쪽으로 보면서 인간의 책임론도 보자 다 하나님께만 맡기지 말고 인간 책임론도 우리가 필요하다 로마 카톨릭도 이런 부분에서 개혁되어야 된다, 
그래서 진짜 개혁으로 나간 사람들이 루터나 칼빈 같은 사람으로 이 사람은 개혁하지는 소리를 질려놓고 이 사람은 로마 카톨릭에 그대로 머물려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루터와 특별히 싸움을 많이 하였습니다, 
루터는 야 너 가톨릭이 싫으면 나오지 왜 그 안에 끼여 가지고 하느냐 그러니까 이분은 뭐라고 대답하느냐면 내가 가톨릭 안에 있어야지만 가톨릭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자기가 변호를 하는 겁니다, 
오늘날도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종교다원주의 교회에 다니면서 거기서 나오지 그러면 내가 여기 있어야지만 이 교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 
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에라스무스적인 사람입니다 루터는 1483년에 태어나서1546년에 죽었습니다, 에라스무스가 죽고 10년 후에 죽었습니다, 같은 시대의 사람들입니다, 에라스무스는 네덜란드(화란)사람입니다, 
루터는 독일 사람입니다, 화란은 지금도 조그만 나라지만 대단한 사상가들과 신학자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오늘날도 화란이 세계의 금융 또는 유통의 세계 센터입니다, 그래서 저는 가끔 그럽니다, 주님 홀 랜드가 조그만 나라지만 강대국사이에서 프랑스와 독일과 영국의 강대국사이에서 끼여 있지만 저 나라를 저렇게 만들어서 주님 우리 한국이 대국사이에서 홀 랜드나 벨기에 같은 나라로 만들어 주세요, 큰 나라를 잘 컨트롤하는 겁니다, 
우리가 고집부리면서 중국이나 일본에 덤벼들지 말고 가끔가다가 덤벼들다가도 꼬리를 내리고 이러면서 교통정리를 잘 하는 지혜 있는 지도자들이 우리나라에 나와야 합니다, 큰 나라가 우리가 이길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화란이나 벨기에사람들은 그걸 잘해왔습니다, 그러면서 이 안에 세상적인 신학적인 대가들이 많이 만들어내었습니다, 우리나라가 이 나라를 따라가면 됩니다, 에라스무스도 그 중에 한분입니다 에라스무스가 항상 그러는 겁니다, 
여보시오 우리가 존경하는 초대교부들 그러면 오리겐(184-254) 이 사람의 사상이 무 천년주의를 만들고 이 사람의 사상이 어거스틴을 키운 겁니다, 
오리겐 이 사람은 애굽 알렉산드리아교회 출신입니다 그다음에 안부르로저(340년-397년) 그다음에 제롬(340년-420년) 그다음에 어그스틴(354년-430년) 이때 사상가들이 에라스무스가 그러는 겁니다, 약1000년 전에 유명한 사상가들이 자유의지사상을 그분들이 가졌단다, 
이렇게 자꾸 루터에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루터는 그러면 꼬리를 내리는 겁니다, 유명한 사람들이 그 사상을 가졌는데 그런데 이 사람들이 그런 사상을 약간 가지고 있었는데 제가 문서를 보면 거기에 심취한 사람들은 아닙니다, 중세에 와서는 로마 가톨릭에 유명한 신학자 토마스 아키노스라고 르네상스 때인데 1225년에서1247년 토마스 아키노스가 다시 말하면 로마가톨릭에서는 어거스틴 보다 800년 후에 나타난 로마 카톨릭의 최고의 사상가가 토마스 아키노스입니다, 그러니까 어거스틴 아키노스 이렇게 나갑니다, 
이 사람들이 자유의지 사상에 어느 정도 동조하였습니다, 특히 아키노스가 그렇기 때문에 로마 가톨릭이 나중에 이쪽으로 흘려갔습니다, 
이런 자유의지사상이 나타날 때 소위 유명한 마틴 루터가 나타나서 자유의지사상에 대항을 한 겁니다, 로마 카톨릭에만 대항한 것이 아니고 자유의지사상에 루터가(1483년-1546년)나타나가지고 자유의지론을 반대한 1517년에 종교개혁을 한 후 13년 후에 루터교단을 만든 사람입니다 이분이 루터교단을 만들면서 이분이 뭘 주장했냐면 자유의지는 아니다 우리가 구원받으려면  솔라 피데 우리는 믿음이 있어야 된다, 
그래서 이분이 우리 로마서1장17절을 읽다가 거기에서 깨달은 겁니다, 
오직 믿음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솔라 스크립투라 다시 말하면 오직성경이다 구원 받으려면 성경을 100% 믿어야 되고 그다음에 믿음이 있어야 된다, 이 사람은 두가지 솔라 스크립투라. 솔라 피데 이것을 가지고 이분의 신학을 정립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분이 그러다 보니까 뭐가 빠졌습니까, 
솔라 그라시아가 빠진 겁니다, 그라시아가 은혜입니다, 
은혜부분을 이분이 주장을 안 했습니다, 그때에 이미 로마 카톨릭은 에라스무스의 자유의지론을 도입하고 있을 때입니다 그래서 자유의지론에 의해서 로마 카톨릭에서는 이것을 사용했습니다, 왜냐면 자유의지론은 사람의 순종이 따라와야 된다는 겁니다, 사람의 액션이 따라와야 된다는 겁니다, 
자유의지를 발동해서 그러니까 구원에 가서 로마 가톨릭이 그러는 겁니다, 너희들 구원받으려면 자유의지를 발동해가지고 로마 가톨릭 안에 들어와야 된다, 이게 자유의지를 필요로 하는 겁니다, 들어와서도 로마 가톨릭 가르침 속에 들어와야 된다는 겁니다, 그래야 구원이 있다는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연옥사상 연옥에 있는 사람이 구원받아서 낙원으로 올라가려면 거기 가서도 열심히 자유의지를 발동해서 일을 해야 되고 그리고 연옥에 있는 친척이 거기서 구원을 얻으려면 이 땅에 있는 갇힌 족들이 교회에 돈도 바치고 자유의지를 발동해서 촛대도 바치고 면죄부도 사고 이렇게 해서 교회에 열심히 해야 된다 그래야지만 구원이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자유의지론을 도입하였습니다, 지금도 똑같습니다, 로마 가톨릭의 교리가 이런 부분에서 우리 장로교사람들은 자유의지론이 별로 안 들어 있는 겁니다, 우리는 기도해 열심히 해 열심히 안하면 안 돼 이런 게 있습니다, 그것은 어디서 온 겁니까, 에라스무스의 자유의지론에서 다 온 겁니다, 그러니까 해야 돼. 해야 돼 이게 우리나라신학이 많이 비빔밥이 되어 있는 겁니다, 로마 카톨릭은 미사에 참석해서 거기서 성채로 화채설입니다 거기서 나오는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셔야지만 구원으로 가능하다는 겁니다, 
그다음 죄도 고백해서 신부에게 가서 이게 모든 게 에라스무스의 자유의지론이 로마 카톨릭 안에 있었던 겁니다, 그러니까 루터가 좋아하겠습니까, 
안 그래도 그 안에 조직 시스템이 루터에게 마음이 안 드는데 그분들의 신학도 지금 이런 부분에서 루터의 마음에 안 드는 겁니다, 
그래서 루터가 뭐냐면 솔라 피데 그다음에 솔라 스크립투라 이것만 이야기하는 겁니다, 루터가 그런데 루터와 한 살 차이의 유명한 분 쯔빙글리(1484년-1531년)라는 분으로 종교개혁 때 루터와 같은 시대분인데 이분은 아주 유명한 분인데 우리 한국 사람에게는 별로 알려지지 않는 사람입니다 왜냐면 그 이유가 있습니다, 이 사람은 스위스 쮜리히 출신입니다 
이 사람은 로마 카톨릭의 사제입니다 이 사람은 에라스무스의 영향을 받은 사람인데도 로마 카톨릭의 연옥학설이나 마리아학설이나 성직자독신설이나 이런 것을 반대하면서 공격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분이 로마 카톨릭에서 뛰쳐 나왔습니다, 루터와 그의 신학이 비슷해서 이분도 솔라 스크립투라 솔라 피데만을 외쳤습니다, 구원은 그렇게 밖에 안 된다 그리고는 삼위일체에 강했습니다, 쯔빙글리라는 사람은 스위스에서 아주 이분의 가르침이 강했는데 이분은 국제사회에 자기의 가르침이 넘어가지 못했습니다, 
루터 같은 사람이나 칼빈 같는 사람은 국제사회로 넘어 갔는데 쯔빙글리는 그대로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종교개혁에 3대 인물이라고 그러면 루터. 쯔빙글리. 칼빈이라 그럽니다, 칼빈이 세 번째입니다 지금도 쯔빙글리의 영적제자들은 스위스기독교회라고 거기만 있지 별로 영향이 없습니다, 
그다음 이런 상항 속에서 나타난 분이 요한 칼빈(1509년-1564년)입니다 루터보다26살 젊은 분입니다, 이 사람은 본래 프랑스에서 태어난 분인데 이 사람은 자기 신학사상 때문에 프랑스가 로마 가톨릭이 강하거든요 그래서 거기서 쫓겨나가지고 스위스 제네바로 간 사람입니다, 
주로 이분은 스위스 제네바에서 살았고 자기 모든 신앙생활과 신학생활을 거기서 했습니다, 이분에게 하나님이 루터나 쯔빙글 리가 가지고 있지 않는 사상을 칼빈에게 준 겁니다 그러니까 칼빈이 유명한 겁니다, 
칼빈이 로마서를 섭력하면서 바울의 신학을 섭력하면서 유명한 다섯 개의 솔라를 이분이 외치기 시작한 겁니다, 
그래서 칼빈을 우리가 유명하다고 거르는 겁니다, 
칼빈이 뭐냐면 구원받으려면 첫째 그라티아가 들어와야 된다는 겁니다, 
은혜가 임해야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솔라 그라티아 그리고는 거기에다가 피데가 따라와야 된다는 겁니다, 솔라 피데 그라티아가 있어면 거기에 믿음이 따라오게 되어 있는다는 겁니다, 그런데 무엇에 관한 믿음이냐면 예수님에 관한 믿음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솔라 크리스투스 그런데 목적이 뭐냐면 솔라 스크립투라가 기초가 되고 거기에 적혀있는 목적이 있다는 겁니다, 
솔라 데오 그로리아 그러는 겁니다, 다시 말하면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다시 말하면 창조목적을 위해서 창조목적의 개념까지 칼빈에게 주님이 주신 겁니다, 그래서 칼빈이 이것가지고 루터와 쯔빈글리 그룹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다섯가지의 솔라를 가지고 그러는 가운데 칼빈의 제네바에서 제자 중 한사람이 스코틀랜드 사람인데 존 낙스라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1510년에서1572년분입니다, 이 사람이 제네바에서 스코틀랜드 사람들을 위해서 이민목회를 하는 분입니다 이분은 신학을 칼빈에게 배워가지고 스코틀랜드 고향에 가가지고 장로교를 만든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분이 1560년에 역사상 처음으로 장로교를 만든 분입니다 그러니까 장로교는 누구의 신학이 배어있습니까 칼빈의 신학이 그래서 배어있는 겁니다, 
장로교가 그리고 똑같이 칼빈의 제자 중 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누구냐면 아르미니우스(1560년-1609년)라고 이분은 칼빈보다 약50년 후에 출생한 분입니다 이분도 네델란드 사람입니다, 
칼빈이 죽은 후에 이분이 칼빈주의를 주욱 배우면서 칼빈이 가르치는 구원론에 의심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칼빈의 가르침에 의구심을 가졌습니다, 그게 뭐냐면 칼빈이 전적인 은혜다, 라는 그 사상에 의구심을 가졌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자유의지는 배제가 됩니까, 거기에 대한 의구심을 가졌습니다, 전적인 은혜라고 이야기하면 인간의 자유의지가 배제되는 게 아닙니까, 그다음에 칼빈이 항상 그러는 무조건적 선택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사람을 선택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분의 생각에는 사람의 자유의지는 거기에 없네요, 내 의지는 없이 무조건 선택이니까 여기에 대한 반발심을 또 가지게 됩니다, 그다음에 또 칼빈의 제한적 속죄입니다, 
선택받은 자만 속죄를 받는 다는 겁니다, 여기에 대한 자유의지와 연계가 안 되는 겁니다, 아무리 자기가 자유의지를 발동하려고 그래도 이게 선택이 안 되면 안 되는군요 하는 이런 갈등들 그리고 성도의 견인문제 그 전에 인간의 완전부패문제 그러면 사람이 부패되었다면 자유의지는 부패 안 되었나요 성도의 견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칼빈주의에서 뭐냐면 한번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무슨 일이 있더라도 구원이 무효화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성도의 견인이라고 그럽니다, 그러면 이분 생각에는 자유의지를 발동해서 다시 회복될 수 있지 않습니까, 라는 이 모든 부분에서 자기 선생님 것을 공부하다보니까 문제가 있음을 이분이 깨달은 겁니다, 그러다가 칼빈주의가 그 당시 유럽에 많이 퍼지고는 왜냐면 루터주의나 쯔빙글리주의나 칼빈주의나 비슷비슷한 겁니다, 거기서 많이 보충한 게 칼빈주의입니다 그래서 유럽이 지금 칼빈사상으로 뻗치고 있는데 갑자기 아르미니우스가 선생님이 말하는 게 내 마음이 안 든다, 그러다가 이분이 1609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전에 이미 이분의 사상을 여기저기 이야기하다가 유럽에서 그분 사상을 배우는 분들이 핍박을 받았습니다, 누구냐면 칼빈주의 사상을 가진 기독교인들에서 너희들 이단사상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을 반항 자들이라고 불렸습니다, 이러다가 나중에 이름을 반항자라 그러지 말고 좋게 말하자 그래서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이라고 불렸습니다, 
이분의 제자들이 모여가지고 우리 선생님이 죽으셨는데 우리 선생님이 가르치는 이 내용이 칼빈의 다섯 가지의 항목에 위배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어떻게 했냐면 칼빈주의자들에게 그 당시에 칼빈의 제자들 대부분이 소위 다수니까 그분들에게 자기네 신학노선을 한번 이분들에게 던져주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신학노선을 가지고 있는데 여기에 대해서 답변 좀 하세요, 칼빈주위자들에게 말한 겁니다, 
그래서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이 다섯 개의 항목의 신학 교리를 만들어 가지고 킬빈주의자들에게 제시를 했습니다, 이걸 잘 들으시길 바랍니다, 
왜냐면 오늘날 W. C. C 멤버들은 다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인의 75-6%가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입니다 칼빈주의자들은 소수입니다 약24-5% 밖에 안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기독교에 대해서 알려면 이 아르미니우스주의를 알아야 합니다, 
아르미니우스주의에 다섯 개의 신학교리가 있습니다, 
자유의지를 존중하는 차원에서 만든 겁니다, 첫 번째 조건적 선택입니다 
이분들은 뭐냐면 사람이 자유의지를 발동해가지고 하나님의 복음 다시 말하면 구원의 메시지를 수용하는 자들만 조건적으로 선택받는다는 겁니다, 
구원받는다는 겁니다, 우리 아까 본문에서 그랬습니다, 
모든 사람이 구원받는다고 그랬잖아요, 모든 사람에게 구원받을 수 있게끔 기회는 주었지만 자유의지를 발동해가지고 내가 긍정적으로 수용할 때 감사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사람을 선택하되 자유의지를 발동해서 감사합니다, 하는 사람에게 조건적으로 구원받는 겁니다, 두 번째 무제한적 속죄입니다 
이 말은 뭐냐면 모든 사람이 만민이 속죄 받을 기회를 받았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모든 사람입니다 칼빈주의는 다릅니다, 
세 번째 인간완전부패입니다, 인간의 완전한 부패가 아니고 자유의지가 부패가 되었다는 겁니다, 다시 말하면 도덕 윤리적 자유의지가 이것은 누구와 비슷한 사고방식입니다, 펠라기아니즘 사고방식과 비슷합니다, 
자유의지를 강조하는 네 번째는 저항할 수 있는 은혜 은혜에 대해서 저항할 수 있다는 겁니다, 이 말은 뭐냐면 모든 사람 만민에게 구속의 은혜를 베풀었지만 자유의지가 발동해가지고 거절할 수가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저항할 수 있는 은혜 다섯 번째 배교의 가능입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예수님을 부인하거나 내가 타종교로 가거나 이럴 때 구원이 상실된다는 겁니다, 구원상실 론은 아르미니우스주의에서 강하게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이 질문 다섯 개를 칼빈주의 사람들에게 던진 겁니다, 
칼빈은 저 세상에 갔고 칼빈의 제자들에게 던지니까 칼빈의 제자들이 모여가지고 여기에 대해서 정리된 우리의 신학을 만들어보자 이 질문에 대해서 그래가지고 칼빈주의자들이 만든 것이 투맆(TULIP)주의입니다, 
여기에 대한 대답이 칼빈주의의 5대 교리입니다 첫째가 전적타락(Total Depravity) 인간의 자유의지가 아니고 완전히 타락된 존재다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 구원받을 수 없다 자유의지를 발동해가지고 얻은 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스스로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누가 필요한 겁니까, 
예수님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사상입니다 우리의 노력이나 나의 자유의지가 거기에 개입이 안 된다는 겁니다, 
두 번째 무조건적 선택(Uncomnditional Election)다시 말하면 내가 잘났던 못났던 하나님이 내가 자유의지를 발동했던 안했던 하나님이 그냥 무조건 뽑았다는 겁니다, 거기에 뭐가 따라옵니까, 은혜가 따라오는 겁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로 제한적 속죄(Limited Atonement)입니다, 
속죄라는 것은 예수님이 우리를 대속하신 겁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이 아니고 제한된 하나님의 택한 사람들만 속죄 받는다는 겁니다, 제한적 속죄 네 번째는 저항할 수 없는 은혜 불가항력적 은혜(Irresistable Grace)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일방적으로 내가 자유의지를 발동하지도 않았는데 일방적으로 은혜를 베풀어서 구원을 받게 했는데 내가 밀어낼 수가 없다는 겁니다, 내가 저항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거절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리고 마지막 다섯 번째는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Saints)입니다 이 성도의 견인은 한번 구원을 받으면 구원이 무효화가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칼빈주의 신학이 나중에 개혁주의 신학이 된 겁니다, 지금 이 신학에 여기다가 다섯 가지 솔라 기억나시죠, 솔라 스크맆투라. 솔라 피데. 솔라 크리스투스. 솔라 그라티아. 솔라 데오 그로리아 이 다섯 솔라와 이게 칼빈신학의 기둥입니다 그러면서 루터도 쯔빙글리도 그분들이 가지고 있는 것과 이것과 합해가지고 하나의 공통신학이 된 겁니다, 칼빈주의라는 게 루터신학과 쯔빙글리신학을 다 합해가지고 종합적인 칼빈주의신학이 된 이것을 개혁주의신학이라 그럽니다, 
우리나라는 장로교가 많기 때문에 장로교는 개혁주의신학 하는 게 이 칼빈의 이 사상입니다 자유의지가 어느 정도 인정이 안 되는 하나님의 은혜가 인정되는 그걸 개혁주의 신학이라 그러고 인본주의의 이성이 개입이 안 되는 다시 말하면 신본주의 그러면서 신본주의의 극치가 뭐냐면 하나님의 주권사상입니다, 이게 굉장히 중요한 개념입니다 개혁주의 칼빈주의는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내가 잘나서가 아니고 내가 아니고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주권적으로 무조건선택하고 제한적 속죄를 하고 이 모든 저항할 수 없는 은혜 모든 게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겁니다, 주권을 인정하는 겁니다, 
그러다 보니까 질문들이 많아지는 겁니다, 무슨 질문이 많으냐면 그렇다면 하나님의 자녀가 다 미리 정해져 있다면 전도가 필요가 없네요, 
그러는 겁니다, 우리가 다른 나라에 가서 전도하고 우리나라에서 전도할 필요가 없네요, 하나님의 자녀가 다 준비되어 있는데 뭐하려 열심히 전도하러 다닙니까, 왜 선교하려 다닙니까, 이런 질문이 없지 않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칼빈주의에서 이것을 어떻게 이야기하느냐면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이 우리는 누군지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을 찾아가도록 만나도록 주권적으로 허락하신다고 그러는 겁니다, 내가 잘나서가 아니고 우리가 지금 중국선교나 동남아선교나 아프리카 선교하는 게 내가 잘 나서가 아니고 거기에 하나님의 주권적으로 선별된 사람을 나는 모르지만 그런 사람을 선별하고 우리가 하나님의 주권적으로 나에게 그것을 인도하신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런 사상을 가지면 어떻게 되느냐면 다 해놓고도 이게 내가 한 것이 아니구나, 
이것은 우리 주님이 하셨구나, 그러니까 내가 그것 가지고 폽 잴 필요가 없는 겁니다, 나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솔라 데오 그로리아 입니다, 그분의 영광만 나타나는 겁니다, 그것이 강한 겁니다, 
이제 아르미니우스사상에서 선교해라 뭐해라 그래서 열심히 가서 했습니다, 열심히 안하면 안 돼 잠도 자지 말고 금식하면서 무조건 해라 다 한 다음에 우리가 했습니다, 나처럼 하세요, 이렇게 될 가능성이 없지 않아 있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기도도 안하고 선교도 안하고 자꾸 죄의식만 가지는 겁니다, 해야 되는데 해야 되는데 이러면 안 돼 울기만하는 이렇게 될 가능성 그런데 또 칼빈주의의 문제점이 있는 겁니다, 모든 것을 다 사람이 만들었기 때문에 문제점이 있는 겁니다, 칼빈주의 안에서 소위 극단주의 칼빈주의자들이 또 있습니다, 사람은 다 죄성이 있기 때문에 온전한 게 없습니다, 
저도 이렇게 말하지만 내 자신이 온전해서 말하는 게 아닙니다, 
저도 칼빈주의 자지만 저도 아직 온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 말씀을 하면서 주님이 나에게 살찌게 하시고 그러는 겁니다, 
한국말로는 극단주의자들은 사람의 자유의지를 절대로 인정하지 않는 겁니다, 그렇지만 저도 칼빈주의 자지만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주권 안에서 주님의 일을 할 때는 하나님이 나에게 자유의지를 발동하도록 이끄시는 겁니다, 그게 온건 칼빈주의 자입니다, 주님이 나의 자유의지를 무시하는 게 아니고 자유의지가 활동하도록 이끄시는 겁니다, 
그런데 극단적 칼빈주의 자들은 뭐냐면 하나님의 인간의 자유의지를 완전히 무시하는 쪽입니다, 예를 들어서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해 놓고는 자기중심적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섬겼다 하지만 자기행동정당화입니다 예컨대 무슨 말이냐면 구원 파를 예를 들면 쉽습니다, 구원파가 극단 주의적 칼빈주의 자들입니다, 구원 파는 뭐냐면 우리가 구원받으면 회개할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기도할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다 이분이 이루었는데 내가 한 게 아무것도 없다는 겁니다, 나의 자유의지에 대해서는 책임이 없는 겁니다, 
이분이 다 구원하셨고 이제 우리가 죽으면 저 나라에 가는데 이 세상에 살면서 그냥 열심히 살면 된다는 겁니다, 그분의 은총에 감사하면서 그러다 보니까 자기 인간적인 책임 이 부분에 대해서 책임이 없는 겁니다, 
온건 칼빈주의 자들은 성령님에 민감한 겁니다, 성령님이 너를 내가 불려서 내 종으로 만들고 너를 이렇게. 이렇게 살아야 되지만 너는 할 때 너 자유의지를 발동해가지고 이런 선한 일을 해야 된다는 겁니다, 성령님의 가르침이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자유의지가 따라와야 되는 겁니다, 
그 자유의지 자체도 내가 너와 함께할 게 내가 너에게 힘줄 게 하면서 자유의지를 발동하도록 하는 겁니다, 그런데 극단주의는 뭐냐면 그런 측면이 없는 겁니다, 내가 좋아서 하는 겁니다, 그래놓고는 책임감이 없는 겁니다, 
왜냐면 하나님이 다 하시는데 그러니까 자유의지를 우리가 무시하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은총 안에서 자유의지를 우리가 잘 발동해야 됩니다, 그러니까 순종하라. 순종하라. 순종하라는 그 단어가 자유의지를 발동하라는 소리입니다, 그 자유의지도 내가 하는 게 아니고 성령님이 민감하게 내가 자유의지를 발동할 수 있도록 가이드해주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성령님이 민감 하는 겁니다, 우리 칼빈주의 사람들은 성령의 열매를 맺으려도 성령님 저희에게 은혜를 주셔서 성령의 열매를 맺게 내 인격이 변하게 도와주세요, 그래서 우리가 그분에게 부탁하는 겁니다, 
그러면 성령님이 나를 변화시켜 주십니다, 그러니까 내가 변화 받은 다음에 내 자랑하는 게 아니라 주님이 나를 이렇게 도와주셨구나, 
내가 노력해서 된 것이 아니고 이런 고백을 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서 솔라 데오 그로리아 주님께만 영광 드리는 겁니다, 
칼빈주의 자들이 당시에 인격의 변화도 없고 거짓말도 마음대로하고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장로교교단이 100여개가 있다는데 어떤 장로교단은 총회장 선거할 때 봉투 돌리고 다 한답니다 세상 사람들이 신문에 나오고 그러잖아요, 그래도 죄의식이 없는 겁니다, 왜냐면 우리는 하나님의 선택된 자녀들이야 나는 목사야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내가 이렇게 되었어, 
그러면서 나쁜 짓을 해도 죄의식이 없는 겁니다, 왜 그럴까요, 
신학의 하이퍼 칼비니즘(Hyper-Calvinsm)사상이 있는 사람은 그렇다는 겁니다, 이게 칼빈주의 약점 중에 하나입니다 윤리 도덕성 사회적 책임 죄의식 결여 성경적 성품이 결여했습니다, 이런 것을 본 한사람이 나타난 겁니다, 이렇게 칼비니즘이 유럽에서 그럴 때 성령님께서 한사람을 나타나게 하는 겁니다, 그 사람이 누군가하면 유명한 요한 웨슬리입니다, 요한 웨슬리는 1703년에서1791년까지 살았던 분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은 아르미니우스보다 130년 후에 태어난 사람이고 칼빈보다는 200년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200년 동안 칼빈주의가 유럽을 이렇게 강타하면서 많은 좋은 점도 있었지만 문제점들을 많이 야기하면서 있으니까 하나님께서 요한 웨슬리를 부르시면서 이 문제를 고민하게 만든 겁니다, 
요한 웨슬리는 영국에서 태어난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1744년에 감리교를 창설했는데 이 사람이 알미니안주의 쪽으로 갈 수 밖에 없는 게 칼빈주의 사람을 보니까 문제가 많은 겁니다, 
그래서 이분이 알미니안주의로 들어 왔는데 알미니안주의를 가지고 알미니안주의의 아까 다섯가지 교리를 보니까 거기에 또 문제점이 있는 것을 웨슬리가 발견한 겁니다, 그래서 웨슬리가  알미니안주의적인 사람이지만 웨슬리안 알미니안니즘이라고 그래가지고 오리지널 알미니안 사람들을 신학용어로 뭐냐면 클랙식한 알미니안 리스트라 그럽니다,  
다시 말하면 고전적 알미니안 리스트라 그러는데 알미니안 다음에 143년 이후에 요한 웨슬리가 나타나가지고 웨스리안 알미니안니즘을 만든 겁니다, 
같은 알미니안니즘에서 약간 차별을 두었습니다, 몇 가지 차별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감리교가 많기 때문에 그 차별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가 뭐냐면 무제한적 속죄입니다, 모든 사람이 속죄 받을 기회를 제공받았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럴 때 속죄개념에 대한 해석의 차이가 있습니다, 고전적 알미니안주의에서는 속죄라는 것은 예수님이 법적인 처벌을 받으신 부분에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법적으로 처벌 받으셨다 그러니까 형벌을 받으셨다 예수님이 내 대신 내가 받을 형벌을 이런 의미에서 형벌대체이론이라고 그럽니다, 이런 측면에서 고전적 사람들이 말을 하는데 웨슬리는 그게 아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죄를 미워하시는 분이시다 그래서 이분이 속죄를 하셨다고 보는 겁니다, 그래서 사랑차원에서 속죄를 접근하고 있습니다, 
법적인 차원이 아니고 그게 웨슬리안 주의의 하나의 접근 방법입니다 두 번째 문제가 뭐냐면 배교의 가능성에 대해서 한번 배교하면 구원이 상실되며 회복이 안 된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을 부인 했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한번 배교했으면 그게 전통적인 것인데 웨슬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기초로 해서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에 이분은 뭐냐면 회복이 안 되는 경우가 딱하나가 있다 뭐냐면 회개하지 않았을 때는 회복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회개하면 아무리 배교해도 다시 회복이 된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이렇게 웨슬리가 알미니안주의로 바꾸었습니다, 거기다가 웨슬리는 하나를 강하게 집어  넣은 게 있습니다, 
칼빈주의의 문제점을 보완하기 위해서 뭐냐면 칼빈주의 사람들이 경건성이 조금 결여되어 있다 인간 책임이 결여되어 있고 경건성이 결여되어 있어서 한번 구원받으면 제멋대로 생활해도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고방식이니까 웨슬리가 가지고 있는 아주 중요한 개념이 뭐냐면 경건주의입니다 그래서 웨슬리가 경건주의 그래서 크리스천들이 규범 있게 살아야 된다, 
구원받은 사람들은 그래서 요한 웨슬리 같은 사람과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아주 경건주의 사람들입니다 규범 있게 살았고 이 세상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안 받게 칼빈주의가 가지고 있는 약점이 그런 부분이 조금 약했던 겁니다, 그래서 웨슬리를 통해서 경건주의자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경건주의는 좋은데 감리교가 가지고 있는 장점이 하나님의 사랑을 항상 강조하기 때문에 사회복음화에 대한 관심이 많은 겁니다, 
이분들이 그래서 이분들은 선교사를 내보내도 복음을 전하는 일도 했지만 그것 보다는 또 강조하는 게 병원지어주고 학교지어주고 고아원지어주고 이런 사회복음화에 앞장을 섰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도 감리교선교사들이 오셔가지고 복음을 전하는 일도 했지만 그것 보다는 병원 학교 그래서 우리나라에 감리교에서 지은 학교들이 배제학당 이화학당 병원으로는 우리나라 최초의 광혜원 하여튼 우리나라에 감리교분들이 들어와 가지고 이런데 관심을 많이 가졌습니다, 장로교선교사는 오자마자 뭘 했느냐면 복음만 전했습니다, 그래서 이분들이 복음만 전하다 보니까 감리교보다는 장로교가 교회가 많아진 겁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이야기하면서도 병원을 지어놓고 환자고치는 일 학교도 그러다 보니까 그러다보니까 그 안에서 이분들이 표용주의사상으로 정확하게 되는 겁니다, 예수 믿고 구원 받아라 이것보다도 사랑해주고 당신은 언젠가는 구원받을 거야 그런 식으로 해서 전도와 개종하는 쪽에 약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감리교가 20세기에 들어와서 특히 그래서 감리교의 단점이 있습니다, 제가 이야기하는 것이 뒤에 신학적인 배경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날 우리나라와 전 세계 감리교가 왜 이렇게 되었는가, 장로교가 왜 이렇게 되었는가, 감리교의 단점이 뭐냐면 이분들이 이러면서 알미니안 주의이기 때문에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하는 겁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주권사상이 약합니다, 인간책임 인간이 해야 된다 그러다보니까 인본주의로 치우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과거100년 동안 알미니안 주의기 때문에 만인구원론입니다 모든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가 다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는 이성주의로 사람의 자유의지 인본주의 그러다보니까 감리교가 진보주의로 오늘날 발전되는 겁니다, 
그리고는 인권주의 인간중심주의 그러다보니까 인권과 연계되어 가지고 이제 성소수자들도 이제는 인권적인 차원에서 사랑해주어야 하고 안아주어야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동성연애자까지 다 용납하는 겁니다, 
동성연애자 목사님도 용납하는 겁니다, 이러다보니까 어디까지 갑니까, 종교다원주의까지 가는 겁니다, 모든 종교는 다 그렇다 이런 감리교가 이렇게 경건주의로 가고 정말 잘나가다가 전 세계 감리교가 지금 완전히 이쪽으로 종교다원주의 쪽으로 인간중심적인 쪽으로 돌아간 겁니다, 보세요, 이 알미니안주의가 이 사상이 오늘날 WCC에 속해있는 교단에 스며들어갔습니다, 
로마 카톨릭. 그리스정교회. 애굽 정교회. 러시아정교회. 루터교. 성공회. 장로교일부 장로교도 칼빈주의가 있는 반면 비 칼빈주의 알미이안주의적인 장로교도 있습니다, 그 숫자가 알미니안주의 장로교가 더 많습니다 그래서 WCC에 다 들어있습니다, 침례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침례교 일부가 절반. 절반입니다 그다음에 감리교 다 알미니안의 사상으로 가면서 만인구원론이 어디까지 되었냐면 전 세계 모든 사람이 구원받는다고 오늘 본문에 나왔잖아요, 모든 사람을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든 또는 아니든 종교다 뭐든 관계없이 다 구원받는 다는 까지 펼쳐나가는 것이 알미니안주의에서 뻗어나간 사상입니다, 그것이 종교다원주의까지 간 겁니다, 
결론적인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감람산 설교를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는 그 고난주일 화요일에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이 이 말씀입니다 마태복음24장5절입니다,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내 이름이 누굽니까 예수님의 이름으로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예수라 이게 아니고 그리스도라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 그랬습니다, 미혹이라는 말은 진짜와 가짜가 구별이 안 되는 그러면서 계속해서 24장23절에 그 때에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혹은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그리스도가 예수가 아닙니다, 그러면서 25절에 거짓 그리스도들이 많이 나오고 이런 걸 가르치는 거짓 선지자들이 많이 나온다는 겁니다,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혹은 저기 있다 그래가지고 큰 표적과 기사를 의미하는 것은 이 그룹이 강하다는 겁니다, 이 그룹이 크고 강하고 유명하고 이런 사람들이 있어서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한다는 겁니다, 다시 말하면 칼빈주의 하면 예수님이 내가 택하여 놓은 사람들을 미혹을 해가지고 빠지게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분들의 주검이 있다는 겁니다, 
28절에 보면 구원이 무효화가 된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예언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지금 마지막 때 이것이 있어야 되는데 지금 이것이 지금 우리 눈에 나타나고 있는 겁니다, 
이런 상항이 어떻게 나타나느냐면 종교다원주의라는 말이 무엇인가 하면 종교다원주의는 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WCC에서도 그러는 겁니다, 
예수님이 아니고 그리스도라는데 초점을 맞추는 겁니다, 
그리스도 그래서 이 그리스도는 각 종교에 다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기독교에 있는 그리스도가 예수님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힌두교에도 그리스도가 있고 불교에도 그리스도가 있고 이슬람에도 그리스도가 있고 유교 도교 참 과학회 모든 종교에 다 그리스도가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 기독교인이 말하는 그리스도가 예수라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각 종교가 그리스도가 다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하나라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하늘에 계신데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가 다 구원받는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만인구원론입니다, 이것이 종교다원주의입니다 그리스도개념의 그래서 우리가 자칫하면 왜 종교다원주의를 믿습니까, 
목사님 그러면 그리스도가 다른데도 있잖아 힌두교도 착한 걸 가르치고 사랑하고 불교도 사랑이야기하고 그리스도가 거기에도 다 계셔하면 그러면 아멘 하는 사람이 대부분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이 올 것이라고 그래서 사람들을 혼돈 시킬 것이라고 지금 예수님이 예언 하신 겁니다, 
마지막 때 지금 우리가 이런 세대에 살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적은 사람이 아니고 많은 사람이 여기에 빠질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그래서 택하신 하나님의 사람들도 거기에 빠진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 빠지겠습니까, 모든 종교는 다 같다, 
라고 생각하는 기독교인들이 구원을 상실한다는 겁니다, 
이런 일이 있을 거랍니다, 지금 이 일이 전 세계적으로 퍼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말도 못하게 퍼지고 있고 유럽은 99%가 기독교인이라는 사람들이 이런 사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지금 마지막으로 질문이 하나있습니다, 왜 예수님이 전지하신 예수님이 전능하신 예수님이 본인이 재림하여 올 때 이런 종교다원주의가 있을 것이라고 왜 예언하셨으며 왜 이것을 준비하셨느냐 이겁니다 예언하셨다는 것은 예수님이 준비하신 겁니다, 
허락하신 것이 아니고 준비하신 예수님의 계획입니다, 
왜냐면 이분은 전지하시고 전능하신 분이신데 왜 이걸 막지 못하십니까, 
막지 않을 것을 2000년 전에 예언하신 겁니다, 
이런 것이 일어날 것을 그러니까 이게 신비로운 것이 아닙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이런 걸아는 사람은 왜 그래. 왜 그래 그러지만 예수님의 예언 속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반대하는 사람도 예언 속에 있고 찬성하는 사람도 예언 속에 있다고 저는 보는 겁니다, 그런데 왜 이런 엄청난 복음에 대항하는 엄청난 이 일을 왜 예수님이 예언하시고 준비하시고 이것이 있을 것을 이야기하시고 실제로 지금 일어납니다, 왜 이렇습니까, 
그러면 마지막 때 소위 예수님의 재림 전에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런 것이 꾸준히 있어야지만 깨끗한 물을 찾게 되는 겁니다, 어두움이 있어야지만 거기에 빛이 와서 어두움을 보게 하는 겁니다, 뭐냐면 종교다원주의가 있어야지만 예수님중심사상으로 초점을 우리가 맞추게 되고 거기에 더 초점을 맞추게 되고 이것이 아니다, 라는 것을 깨달음으로서 예수님에 대해서 우리가 더 가까이 가게 되고 그러니까 기독론이 더 강해지고 순수해지고 철저하지 않고 잡다한 쓰레기들을 한번 보여주는 겁니다, 
그렇지만 볼 때마다 너희들 알겠지 지저분한 놈들 너희들은 따라가지 말라 그래서 이분이 그렇게 하지 말라고 예언까지 다 해준 겁니다, 예언까지 이렇게 있을 것을 그러니까 깨어있어라. 깨어있어라 예수님만 사랑해라 그분만 구원주다, 라는 것을 오늘 본문 말씀에서 주욱 보면 역사적인 측면을 제가 주욱 설명을 했는데 주님께서 펠라기우스를 통해서 나중에 1000년 후 에라스무스를 통해가지고 그러다가 쯔빙글리를 통해서 루터를 통해서 하다가 이분들이 한쪽으로 조금 치우치니까 조금 모자라니까 요한 칼빈을 통해서 또 한쪽으로 보내시고 요한 칼빈쪽으로 가다가 그쪽에 또 다른 주의가 나타나니까 요한 웨슬리를 불려가지고 이쪽으로 가게하고 이러면서 지금까지 오다가 그 알미니안주의가 예수님이 2000년 전에 예언하셨던 종교다원주의 쪽으로 가도록 알미니안주의를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겁니다, 
그러면서 알미니안주의 안에 있는 사람들 중에서 소수라도 이게 아니다, 
라는 사람이 분명히 있잖아요, 이러면서 지금까지 오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어쩌다가 칼빈주의자지만 칼빈주의자라고 그래서 하이퍼 칼빈주의자가 되면 안 되는 겁니다, 알미니안주의도 내가 다 안아주고 큰 틀에서는 칼빈주의 자들이지만 그 안에 알미니안주의인 모든 순종하는 일들 자유의지를 내가 발동해가지고 주님영광 올리는 일들을 내가 해야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입장에서 보면 칼빈주의나 알미니안 주의나 공존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사용하시면서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우리에게 순종하도록 가르쳐주는 겁니다, 우리가 어떤 한 주의를 공격하기보다는 아하 주님이 나에게 이 두 그룹을 다 주셨구나, 내가 이 두 그룹을 다 수용하면서 예수님 중심으로 내가 잘 가주는 그러면서 창조목적에 우리가 순종하는 모두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드리겠습니다, 
예수님 오늘 긴 시간 로마서5장12절부터 마지막 절까지 사도바울에게 주셨던 그 영성을 우리가 지난 2000년 동안 교회의 신학사상의 흐름을 통해서 섭력을 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주님의 뜻이 이 속에 역사 속에 담겨있을 것을 직시하고 이 속에서 주님의 마음을 우리가 깨닫고 주님의 마음에 합당한 하나님의 마지막 때 자녀들이 되는데 크게 기여하는 그런 메시지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예수님 성령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계속적으로 가르쳐주시고 이 은혜 안에서 우리가 더욱 예수님을 사랑하고 또 저 세상을 항상 소망을 가지고 보면서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을 가르쳐주시고 또 우리 남은여생을 주님의 창조목적에 부합되는 그러한 사람이 되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주님의 영광을 우리의 삶을 통해서 받아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황용현 목사님 설교내용영상으로 보세요.
https://www.youtube.com/watch?v=rFQMPlKvx7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