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서

18강. 빌립보서4장10절-13절,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변명섭 2022. 4. 7. 19:32

빌립보서 18강.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4:10-13)

우리가 익히 잘 아는 주님의 말씀이니까 다시 한 번 같이 읽겠습니다.

10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

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12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아멘,

 

제가 주님께 기도드리겠습니다.

아버지하나님 저희들이 과거 열일곱 번을 걸쳐서 빌립보소서를 강해해오고 있습니다. 또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감옥에 계셨던 사도바울을 통해서 주님이 사랑하셨던 빌립보교회와 교인들을 향해서 하셨던 성령님의 세미한 음성이 우리에게도 들려지기를 소원합니다. 이제 열여덟 번째에 왔습니다.

이종이 제목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라는 사도바울의 말씀을 가지고 임하겠사오니 성령님께서 이 종위에 신실하신 성령님의 기름 부으심으로 임해주시고 말씀을 듣는 주님의 귀한 백성들 위에도 똑같은 은혜로 채워주시옵소서 그래서 저희들이 이 말씀 속에서 성령님께서 사도바울에게 주셨던 말씀하셨던 그 상태 그 때 그대로 우리가 느끼며 깨달으며 배우며 실천하기를 소원합니다. 도와주시고 은혜로 채워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지난시간에 제가 한 말씀을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지난시간에는 마음과 생각을 지키는 평강이라는 말씀으로 하셨는데 이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그리고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라 그랬습니다. 그다음에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 이렇게 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가능하다고 그랬습니까? 이것이 가능하지 않습니다.

이걸 지킬 수가 없습니다. 왜냐면 우리에게 평강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평강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왜 평강이 없을까요?

그러면 어떻게 하면 평강을 가지게 될까요? 제가 말씀드렸습니다.

원시안적인 시각으로 나의 시각을 바꾸어라 그랬습니다. 어떻게 원시안적인 시각으로 바꿉니까? 우리는 어떤 사람들입니까? 천국시민권자들이라는 걸 항상 잊지 말아야 합니다. 면류관을 받는 자들이라는 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항상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떠나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라 그랬습니다. 원시안적인 시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원시안적인 시각을 이렇게 가지고는 구체적으로 주님과 보좌의 기도를 하라 이렇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보좌의 기도는 주님과 직접 내가 만나서 그분과 인격적인 대화를 하는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매일 잡수시면서 영의 눈을 더욱 밝게 뜰 수 있게 되고 이렇게 해서 보좌의 기도를 하게 되면 그때부터 마음의 평강이 오기 시작하는데 평강이 오면서 눈이 거시안적으로 떠지면서 세계관이 달라지고 가치관이 달라지고 시각이 이렇게 변화니까 주님이 주시는 평강이 나에게 오는 겁니다. 문제는 환경은 변하지가 않았습니다.

환경은 안 변했습니다. 그런데 나의 시각이 변해버린 겁니다. 이렇게 변하는 연습을 끊임없이 하는 겁니다. 그럴 때 사도바울에게 주님이 하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항상 주 안에서 기뻐하라는 겁니다. 주 안에서 그럴 때 기쁨이 오는 겁니다. 그리고 환경을 보면 모든 사람을 관용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환경을 지배하는 자가 되니까 모든 사람을 관용할 수 있는 넓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이런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질 때 보좌에서 나에게 영광을 부어주십니다 보좌의 영광을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 수록 많이 가질수록 영광의 크기가 점점 더 커집니다. 그래서 영광 체로 영광 체로 점점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닮아가는 겁니다. 그 말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무엇입니까? 면류관을 받는다는 겁니다. 면류관이 커지는 겁니다.

그러니까 문제는 무엇이냐면 우리가 주님을 섬기는 것이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변해가는 겁니다. 그래야지만 나중에 주님을 만날 대 주님과 가까이 지낼 수가 있습니다. 주님의 성품으로 변해가려면 보좌의 기도를 해야 된다는 겁니다. 제 말씀 이해되십니까? 이렇게 정리해드리니까 약간 도움이 됩니까?

기억을 새롭게 할 수 있겠죠? 오늘 말씀은 계속해서 말씀하시는 겁니다.

이렇게 빌립보교회는 다른 교회와 달리 예수의 형상 곧 영광 체를 입은 자들이 꽤 많았습니다. 빌립보교회가 그래서 사도바울이 성령님의 가르침에 의해서 4장1절에 하시는 말씀이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아 그러면서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이 사랑하는 자들아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빌립보교회교인들은 특수한 그룹들입니다 그리고 사도바울이 이 교인들을 꽤 사랑하셨습니다. 왜냐면 주님이 사랑하기 때문에 그러는 겁니다.

우리도 그런 교회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합니다. 그런데 10절을 다시 한 번 보세요. 이런 사람들에게 뭐라고 말씀하느냐면 사도바울이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그랬습니다. 여기 보면 갑자기 이분들에게 말씀하시기를

그이 사도바울의 편지가 끝날 때쯤입니다 하시는 말씀이 내가 기쁜데 굉장히 기뻐다는 겁니다. 성경에 크다는 말이 그리스말로 메가로스(megaros)라는 말입니다 메가(mega)라는 말이 메가톤(megaton)급이다 메가(mega)급이다 이게 다 그리스말에서 나온 말입니다 메가(mega)라는 것은 크다는 소리입니다 그래서 메가로스(megaros)의 기쁨이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신약에서 메가로스(megaros)라는 말은 사도바울이나 다른 분들이 한 번도 쓰지를 않았습니다. 여기에만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게 엄청난 기쁨입니다. 메가로스(megaros)라는 말이 여기 한 번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크게 사도바울의 감정에 깊이를 심도 있게 표현한 말입니다

왜 이렇게 메가(mega)기쁨일까요? 왜 그럴까요? 일반세상에서 오는 기쁨 이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왜냐면 이제 이분들을 보니까 영광 체로써 이렇게 커진 것을 보는 겁니다. 그리고 저분들이 면류관을 받을 것이고 이제는 영원한 세계에서 엄청난 높은 계급에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이분이 보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 기쁨이라는 것은 말도 못합니다. 그것을 우리 영의 사람들은 볼 줄 알아야 되잖아요. 아하! 저분 보기도 저래도 대단한 사람이구나. 하늘나라에 가서 나보다 더 높을 줄도 모르겠구나.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이 보니까 당신들이 이렇게 높은 자리에 있을 것을 내가 봤기 때문에 당신들은 내 면류관이야 왜냐면 당신이 높으면 나는 더 높아진다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더 높아진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나의 큰 기쁨이라는 겁니다. 메가(mega)기쁨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완전히 사도바울은 영적으로 시각을 바꾸어가지고 사람들을 보는 겁니다. 그러면서 이분이 지금 하시는 말씀을 보세요. 10절을 다시 보세요.

문장을 보세요.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는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 나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 이게 무슨 말입니까? 기뻐하는 이유가 무엇을 기뻐하는가?

설명을 이렇게 하는 겁니다. 보통 기뻐하는 게 아니고 크게 기뻐하는 이유를 나를 생각하는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났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나를 생각하는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이게 무슨 소리냐면 빌립보교인들아 너희들이 나를 굉장히 생각해왔었지 그래서 이 뒤는 다음시간에 말씀드리겠지만 물질에 도움을 준 것 기억나시죠. 18절에 보면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가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 물질의 도움을 받은 겁니다. 이것을 이분이 때를 따라서 빌립보교인들에게 받아왔습니다. 고린도교회도 그랬고 데살로니가교회도 그랬고 이분에게 물질의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교회들에게는 이런 감격을 가지지를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분이 빌립보교인들에게는 향기로운 재물이라고 그러면서 내가 가만히 감옥에 앉아서 당신들을 생각할 때 너희가 나를 생각하는 것이 다시 내 속에서 싹이 난다는 겁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어려울 때 물질의 곤고함을 느끼고 있었을 때 너희들이 나를 잊지 않고 생각해준 것이 내가 지금 다시 생각이 난다는 겁니다. 언제 생각이 나느냐면 에바브로디도를 통해서 나에게 지금 감옥으로 물질을 가지고 온 것이 그 물질을 받으면서 과거에 너희들이 나를 이렇게 물질로 도와주었던 것이 생각난다는 겁니다.

그 생각을 이렇게 하다보니까 나에게 큰 기쁨이 떠오른다는 겁니다.

내가 기쁨이 떠오르는 이유 중에 하나가 그런데 이분이 분명히 말하기를 그다음에 보세요.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다.

그리고11절을 보세요.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 말이 무슨 말입니까? 물질을 주어서 고맙다 이렇게 말씀해놓고는 나는 궁핍하지 않다는 겁니다. 18절에 내가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고 내가 풍부하다는 겁니다. 그런데 물질을 주어서 고맙다는 겁니다. 이 말은 성경을 보는 연습을 제가 드리려고 제가 이렇게 자꾸 질문을 하는데 이분은 물질은 절대적으로 필요하신 분이십니다 그렇지만 물질이 필요하다고 온 사방으로 다니면서 나 물질이 필요합니다. 나에게 헌금을 하라는 절대로 이런 분이 아닙니다. 겉으로는 필요 없는 것처럼 나타내는 분이 이분이십니다.

속으로는 필요하지만 그래서 지금 나는 필요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너희들이 나에게 보내준다는 겁니다. 그런 마음이 그기에 숨겨져 있습니다.

거기다가 뭐냐면 당신들이 나에게 필요한 물질을 주면서 절대로 당신들은 거기다가 끈을 달고 주지 않는다는 겁니다. 노끈을 달아서 내가 물질을 주었으니까 이제 내 말 들어 그리고 조건을 갔다대고서 물질을 주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냥 물질을 주고는 내가 그것을 어떻게 쓰던 별로 그기에 대해서 이렇다 저렇다 평을 하지 않고 무조건 그냥 나를 위해서 물질을 준 그것이 감사하다는 겁니다. 나를 믿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고린도교회나 데살로니가교회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물질을 줘 놓고 이렇다 저렇다 비평을 하고 너 왜 우리 물질을 이렇게 썼느냐 이렇게 비평한 교회들입니다

사도바울은 빌립보교회가 상급을 많이 받는 이유 중에 하나가 이것이라는 겁니다. 너희들이 믿음으로 나에게 물질을 줘 놓고 전혀 그 물질 가지고 나를 컨트롤하려고 들지 않고 어떤 세력을 키우기 위해서 어떤 동기가 불순해서 당신이 지금 나가서 여기저기서 복음을 전하니까 물질을 줘 놓으면 우리교회영향권에 들어오겠다. 당신이 벌여놓은 사역이 그러한 어떤 불순한 동기를 가지고서 물질을 준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분이 그걸 생각하면서 주 안에서 너희들을 생각할 때 대단히 메가(mega)기뻐다는 겁니다.

왜냐면 그런 사고를 가졌기 때문에 너희들은 면류관을 받는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물질을 쓸 때 조심해야 합니다. 그 물질 뒤에 어떤 끈이 달려 있거나 그러면 그 물질은 그분에게는 잠깐 도움이 될 수 있지만 하늘에는 기록이 안 되는 겁니다. 여기 앉아있는 우리 동역 자들은 한 사람도 그런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가 지금 선교사역에 쓰고 있는 물질들 한 사람에게서 황 목사님 그 물질 잘 관리합니까? 그것 어디에 쓰며 재정보고가 왜 없습니까? 목사님 혼자 다 씁니까? 어쩌고저쩌고 그런 말하는 사람 한 사람도 없습니다. 물질을 주는 것이 마음을 주었다고 사도바울은 생각하는 겁니다.

물질과 같이 따라오는 것이 그렇기 때문에 사도바울은 이분들에게 고마운 게 뭐냐면 당신들이 내가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 것에 대해서 같이 감동을 받고 조금이라도 나를 도와주고 주님의 일을 도와주기 위해서 배려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당신들의 배려를 이렇게 생각해보면 내가 크게 기뻐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본인이 크게 힘을 받았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다시 말하면 예수 안에서 남을 배려하는 그분들이 면류관을 받습니다. 이것이 대단히 중요한 개념입니다 남을 배려하는 자들이 특히 하나님의 사람들을 배려하는 자들이 그래서 면류관을 받으시려면 저를 배려해주세요 저도 사람이기 때문에 배려가 필요합니다. 왜냐면 모든 사람 앞에서 제가 칭찬받을 수가 없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칭찬을 받기 위해서 내가 행동하면 나는 주님과 거리가 멀어집니다. 사람을 기쁘게 해주기 위해서는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20명이면 20명을 다 기쁘게 해주려면 20명 마음이 다 다릅니다. 그걸 어떻게 다 기쁘게 해줍니까? 그러니까 이제는 내가 정치를 해야 됩니다 조금 인위적으로 해야 됩니다. 목사가 인위적인 부분이 너무 없을 수도 없지만 그것이 너무 강해지다 보면 인간의 냄새가 납니다. 그러면 영성이 떨어져버립니다

그게 목사가 가지고 있는 딜레마입니다 교인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그런 것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목사님의 어텐션(돌봄, attention)을 요구하니까 그것을 어떻게 목사님이 채워 줄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러니까 자기도 모르게 이제는 인간적인 그런 부분으로 가게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적인 부분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밸런스를 잘 맞추느냐 이것이 과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를 위해서 기도해주셔야 됩니다.

여러분들의 기도가 필요한 겁니다. 우리목사님 영성을 잘 유지하시면서 이 복잡한 모든 일들을 어떻게 주님이 가르쳐주시는 대로 밸런스를 잘 맞추게 할 수 있을까요 그분을 붙잡아 주십시오. 이것이 여러분들이 저를 위해서 필요한 기도제목들입니다 똑같이 우리가 선교지에다가 물질도 보내고 사람도 보내고 모든 것을 우리가 다 보내고 있는데 물질 때문에 저들이 우리의 마음을 이해를 못 할까 두렵습니다. 예컨대 우리가 물질만 보내다보면 저들이 우리를 물질을 보내는 사람으로 이해하기 쉽습니다. 과거 약10년 동안에 한국선교가 이런 면에서 실패했습니다. 한국교회는 물질을 보내가지고 물질로 선교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음을 보내지 않았습니다. 인격을 집어넣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물질과 같이 사랑을 같이 담아서 보내지 않았습니다.

물질만 보냈습니다. 그리고는 물질의 파워로써 저들을 지배하려고 하였습니다. 10년 후에 그 결과는 오늘날 나타났습니다. 우리는 이걸 보면서 우리의 선교사역이 물질로써 저들을 우리의 사람으로 만들어서 지배하려고 하는 그런 저희들이 되면 안 되겠다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여기 서있는 제가 그런 모습이 보이면 여러분들은 저를 위해서 기도해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목사님이 저러시면 안 되는데 하고 기도해주시길 바랍니다.

그런데 물질은 어디까지나 저들을 우리가 영적으로 도와주기 위해서 필요한 물질입니다 물질 그자체가 저들을 우리가 지배하는 하나의 도구가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여기에도 우리가 균형이 필요로 합니다. 사도바울이야기로 다시 돌아갑니다. 사도바울이 물질이 필요했던 사람이라고 그랬습니다.

물질이 필요했지만 빌립보교인들의 마음을 이분이 더 필요로 했던 겁니다.

물질에서 담아오는 마음 그래서 이분이 크게 기뻐했다고 그랬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사도바울은 대단히 외로웠던 사람입니다 인간적인 측면에서 보면 하나님의 종들은 주님을 섬기다 보면 외롭습니다. 또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외롭게 만들어 놓으십니다. 주님에게만 시각을 가지게 하기 위해서는 세상에 모든 좋은 것들을 다 가지지 못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사도바울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이분도 외로웠습니다. 진정한 친구가 필요했는데 주님이 옆에 계시지만 빌립보교인들이 그 역할을 사도바울에게 담당해주었습니다.

그래서 이분이 크게 기뻐한 겁니다. 사도바울은 그렇게 나에게 한 것이 하늘에 영광을 쌓는 일이라는 것을 그분이 알고 있었습니다. 저는 사도바울은 아니지만 저에게 조금이라도 힘 있게 하시는 분은 저는 알고 있습니다.

저분이 조그만 영광 체를 알 수 있는 자격이 되겠구나. 왜냐면 제가 주님의 일을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측면에서 여러분들은 저와의 관계에서도 그렇게 해오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될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외로웠던 것처럼 저도 외롭습니다. 세상친구는 이제 없습니다. 세상친구들이 만나자 해도 만나야 할 말이 없는데 만나서 뭘 합니까? 그리고 교계 안에서도 저는 교계에 아주 날고 기는 사람들과 개인적으로 친분은 다 있지만 깊이 서로 마음을 주고 사귀는 그런 사이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외롭습니다.

왜냐면 사람들은 다 각자가 사귀면서 저 사람을 내가 어떻게 이용할까하는 그러한 측면에서 보기 때문에 너무나 피곤합니다. 그러니까 안 만나는 게 편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하나님의 종들도 이용가치를 보고 종들을 서로 사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걸 느낄 때마다 피곤합니다.

사도바울도 똑같았습니다. 그러니까 사도바울을 따라다니다가 이용가치가 없을 때 떠난 분들이 많습니다. 많은 분들이 사도바울을 떠났습니다.

사도바울이 지금 감옥에 있으면서도 그런 걸 체험했지만 그래서 빌립보교인들에게 고맙다 그러는 겁니다. 너희들은 내가 이제 감옥에 있는 몸이니까 이용가치가 없는 사람인 겁니다. 그런데 너희들은 끝까지 나를 도와주는 자라는 겁니다. 이런 부분에서 기쁨이 있었습니다. 아! 이 사람들 영광을 많이 받겠구나. 사도바울이 그 후에 이때가 주후60년 때인데 67년에 마지막으로 2차 감옥에 들어가 계실 때 이분이 지난날을 생각하면서 자기수제자인 디모데에게 편지한 것이 디모데후서입니다 그럴 때 하신 말씀이 디모데야 너는 지금 사역하고 있는 이 목회현장을 떠나서 나에게 와 달라 나 참으로 외롭다 왜냐면 주님을 만나서 인간적으로 환희가 있지만 인간적으로 볼 때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나를 이용만 하고 이제 나는 내 옆에 신실한 누가 한 명만 내 옆에 있고 그다음에 내가 너와 마가를 보고 싶다 그러니까 너 빨리 나에게 오너라는 이야기가 디모데후서입니다 바울이 그렇기 때문에 저는 주님과 대화하면서 그럽니다. 주님 언젠가는 저와 같이 이렇게 사귀고 있던 모든 주님의 백성들이 저를 떠날 겁니다. 저는 그것을 항상 마음에 준비하고 있습니다. 저는 제 혼자 될 것을 마음에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신실한 몇몇은 떠나지 않을 거라는 겁니다. 저는 과거 인생을 살면서 이것을 많이 경험해왔습니다. 그래서 신실한 소수 서로 믿을 만한 떠나지 않는 그 소수가 된다면 서로가 얼마나 행복할까요. 내가 저 사람을 이용하기 위해서 만난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은 언젠가는 이 사람이 이용가치가 안 될 때 그럴 때는 떠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용이라는 그러한 전제 속에서 사귀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주님이 기뻐하시는 교제입니다

주님이 우리들을 붙어 놓았기 때문에 우리는 최선을 다해서 서로 한 마음으로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같이 동역합시다. 이런 마음을 가져야 될 것 같습니다. 사도바울이 이런 의미에서 빌립보교회를 사랑했던 겁니다.

영원한 진정한 친구로 생각했던 겁니다. 그래서 이분이 내가 정말 물질이 필요해서 너희들과 같이 이렇게 교제해서 물질 때문에 너희들이 나의 친구가 되어서 이렇게 고맙다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나는 물질 없어도 돼 완전히 시각이 딴 데 있는 분입니다 그래서 이분이 말씀하시기를 11절에 내가 궁핍함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궁핍하지만 물질 그 자체 하나만 보고 너희들이 나에게 이렇게 호의를 베푸느냐 그러면 언젠가는 너희들이 나를 또 씹을 것이라는 겁니다. 사도바울은 돈이 필요로 했던 사람입니다.

막을 것도 필요로 했습니다. 그렇지만 당연히 돈이 필요하다고 광고하고 다니지 않았습니다. 선교모금운동을 하고 다니지 않았습니다. 필요할 때마다 주님에게 의지만 했습니다. 그러면 주님은 정말 어딘지도 모르게 준비된 사람들을 보내주는 겁니다. 소수의 준비된 사람을 저도 과거10년 동안 이런 걸 다 경험했습니다. 제가60년대 미국으로 유학을 가가지고 돈 버는 학문을 공부하고는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돈을 벌어도 엄청나게 많이 벌었습니다.

미국에서 제일 좋다는 것은 제가 다 했습니다. 미국에서 좋다는 것을 다 했기 때문에 세계에서 좋은 것은 다 했습니다 차도 세계에서 최고로 좋은 차를 타고 다녔습니다. 집도 그랬고 아이들도 제일 좋은 학교에 다 보냈습니다. 주위에 사람들이 다 부러워했습니다. 아! 저사람 성공한 사람이라고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세상 적으로 보면 조금도 부러움이 없었습니다.

교만할 수밖에 없었는데 저희 어머니의 기도 때문에 저는3대째 모태신앙입니다. 할아버지가 장로님이셨는데 저희 어머니가 헌신을 하시고는 목사가 되라고 하셨는데 저는 안 한다고 내가 왜 목사가 되어야 하느냐 그러는데 세상 것을 다 가지게 한 다음에 내 마음 속에 강하게 주님이 너 이제 다 가져봤지만 그게 뭐가 그렇게 대단 하느냐? 그 말씀이 내 속에 깊이 오면서 세상에 모든 것이 그렇게 보배스럽게 안 보이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깊은 주님과의 교제 속에서 완전히 세상 것을 놓아야 되는 상황까지 왔습니다. 그런데 강제성을 띠고 한 것이 아니라 내 마음에 세상 것을 만지기가 싫어지는 겁니다. 돈을 봐도 전혀 관심이 없어지는 겁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나에게 두 번씩 너 정말 돈을 포기했느냐 그러면서 돈을 엄청나게 벌 수 있는 기회를 두 번을 주십니다. 제가 YES 하기만 하면 되는 겁니다. 한 달에 100만 불 버는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런 기회를 나에게 두 번이나 주시는 겁니다. 제가 신학을 공부할 때 그런데 제가 그것을 잡으면 신학을 그만두어야 되고 신학을 내가 못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일주일을 고민하다가 그 돈을 놓아버렸습니다. 구체적인 이야기는 제가 기회 있을 때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리고는 몇 개월 후에 다시 한 번 다른 케이스로 돈을 버는 길을 또 주시는 겁니다. 그걸 또 놓아버렸습니다.

그때부터 하나님께서 저에게 하늘의 비밀을 보여주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주위에서 날보고 다 돌았다고 그랬습니다. 저 사람이 왜 신학교를 가느냐? 이겁니다. 저렇게 잘사는 사람이 제가 그러니까 캐나다에서 제일 큰 신학교인 틴데일 세미나리라고 캐나다에서 제일 오래된 100년 넘은 신학교인데 캐나다에서는 그 학교가 제일 좋은 학교입니다. 제가 그 학교에 처음에는 파트타임으로 다녔습니다. 재가 공부하려 낮에 그 학교에 자동차를 갖다 대면 내 자동차가 제일 좋은 차입니다. 신학교에 캐딜락을 타고 오는 사람은 없습니다. 거기다가 캐딜락만 있는 게 아니라 BMW도 갖다 대고 그리고 항상 제가 멋쟁이였습니다. 지금은 아니지만 30대에 한창 내가 날릴 때입니다

그러니까 백인들아 다 아는 겁니다. 저 사람부자다 저 사람은 알아주는 사람이라는 걸 다 아는 겁니다. 하루는 그 학교에 제일 높은 학장이 나한데 그러는 겁니다. 자기 방에 와달라는 겁니다. 왜냐면 우리학교에 이사가 되어 달라는 겁니다. 그 학교에 이사가20명 되는데 다 날고 기는 사람들입니다

동양 사람인 나를 이사가 되어달라는 겁니다. 그래서 왜 그러느냐니까 우리가 너 돈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그 학교에서이사를 10년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신학교를 운영하는 것을 하나님이 나에게 다 가르쳐주었던 겁니다. 그러니까 지금 신학교하는 게 하루아침에 된 것이지 아십니까?

그러면서 있는 돈을 이 사람에게 주고 저 사람에게 주고 돈을 벌지를 않았습니다. 목사님들에게도 주고 우리교회에 다니시는 조OO목사님 제가 그 당시에 조OO목사님교회에 제가 집사였습니다. 그러니까 내 말이 거짓말이 아닙니다. 그분이 압니다. 조OO목사님이 캐나다 토론토에 목사님들 수십 명 모시고 어디 세미다 갑니다. 그러면 목사님들은 다 나에게 찾아옵니다.

왜냐면 내가 돈을 주니까 그리고 조OO목사님교회에 제일 부자가 저입니다

그러니까 목사님어께가 힘이 들어 다니는 겁니다. 그리고 목사님이 황 집사님 우리 플로리다에 세미나가 있는데 그러면 제가 신용카드를 주면서 마음대로 쓰시라고 자동차 한 대를 렌트해가지고 마음대로 사용하시라고 호텔에 가서 주무시고 알아서 다 하시라고 그분이 항상 내 신용카드를 가지고 쓰면서 다녔습니다. 그리고는 몇 천 불날라 오면 지불하는 겁니다.

그분이 얼마 전에 저에게 황 목사님 그 당시에 목사님이 책상하나 주셨죠?

그 당시에 제 사무실에 큰 책상이 하나 있었는데 그 책상을 목사님께 갔다 주라고 해서 그 책상을 지금도 쓰고 있다는 겁니다. 그게20년 전 이야기입니다 그때 주신 책상을 지금까지 쓰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분이 여기 와서 저를 도와주는 겁니다. 저분이 그럴 사람이 아닌데 천막에서 이걸 한다는 걸아는 겁니다. 그러니까 열심히 와서 도와주는 겁니다.

돈을 만져 봤기 때문에 이제 돈을 쓰는 연습만 하면 되는 겁니다.

그러다가10년 전에 우리 집사람이 날보고 하루는 그럽니다.

내가 박사공부를 하려 가는데 2년 동안 최소한 가족을 떠나야 되는 겁니다.

우리 집사람이 걱정을 하는 겁니다. 왜냐면 당신 우리 집에 돈이 있는 줄 아느냐? 지금 돈 한 푼도 없어 당신 돌았어? 날보고 돈이 한 푼도 없다는 겁니다. 당신 학비가 일 년에 약2만 불 들어가는데 그 2만 불나에게 없어 그러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가슴이 철렁하는 겁니다. 이제 진짜 없는 겁니다.

그런데 신학교를 가야 되는데 우리 집사람이 아이들 셋을 어떻게 키우느냐는 겁니다. 지금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인데 당신 돌아도 보통 돌지 않았다는 겁니다. 울고불고 하는데 주님이 우리 집사람에게 나타났습니다. 그러더니 내가 너 남편을 쓸라고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라 돈 걱정을 왜 하느냐 내가 다 알아서 해줄게 그래서 우리 집사람이 예수님이 살아계심을 직접 만나는 겁니다. 그러더니 하루 이틀 있더니 어디 가서 나에게 돈을 2만 불을 봉투에 넣어 주는 겁니다. 어디서 가져왔느냐 그랬더니 집 담보로 은행에서 빌렸다는 겁니다. 그래가지고 그 돈을 들고 제가 공부하려 시카코에 간 겁니다. 그때부터 하나님의 기적이 막 보이는 겁니다. 포기했을 때 그러면서 하나님이 숨겨놓은 사람들을 한분한분 만나게 해주시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로 제가 박사학위를 보통 5년 걸리는 것을 저는 2년 남짓해가지고 끝내버렸습니다. 그 학교역사에 길이 남을 왜냐면 하나님이 다 보여주시는 겁니다. 논문은 무엇을 쓰고 다 보여주시는 겁니다.

그러면서도 경제적으로도 어려워 져서 다음 달 생활을 어떻게 할까라는 그러한 어려움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집사람이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면서 때가 되면 누굴 통해서 조금 주시고 왜냐면 학교를 내가 파트타임으로 가르치니까 봉급이 일 년에 5천불밖에 안 되는 겁니다.

그리고는 선교지로 돌아다니니까 그때부터10년 동안 한국에 와서 목회자 세미나니 이런 걸 하라고 해도 못하는 겁니다. 이걸 할 기력이 없고 보기도 싫은 겁니다. 그래가지고 제가 온 선교 지를 다니면서 신학교에서 완전히 한국을 떠나가지고 바깥으로 다니면서 선교현장을 하나님이 다 보여주시는 겁니다.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선교현장에 갈 때 제가 돈이 있어서 가는 게 아닙니다. 비행기 값도 없습니다. 항상 그래서 신용카드로 끊습니다. 예를 들어서 목사님 여기 와서 말씀을 전해주십시오.

그러면서 캐나다에 있는 나를 부르는 겁니다. 그러면서 비행기 표도 안 보내는 겁니다. 옆 동네 사람 부르는 식으로 하는 겁니다. 그렇다고 목사가 비행기 표를 달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알았습니다. 그리고는 신용카드에 지불할 게 많은데도 또 신용카드를 또 끊습니다. 그러면 저도 속이 아프지만 우리 집사람은 여보 다음 달에 어떻게 갚아요. 우리 갚을 길이 없는데 왜 하나님 일을 하는데 하나님은 우리를 이렇게 도와주지 않습니까? 계속 그러면서 살았습니다. 그렇지만 주위 사람들은 뭐라고 그러느냐면 저를 아는 사람들은 황 목사 저 사람이 목사가 되었지만 저 사람 봉급이 별로 없지만 저 사람 그동안 쌓아놓은 재산이 많고 부동산이 많고 쇼핑센터 가지고 있고 하면서 말들이 온 천지를 돌아다니는 겁니다. 그러니까 저 사람 이자만 가지고도 충분히 먹고 살기 때문에 저러고 다닌다는 겁니다. 그런 말들이 많이 들어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 집사람하고 나하고 헤헤하면서 웃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실은 아무것도 없는데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저를 아는 사람은 저 사람 재산이 많이 있어가지고 제 말하는 것을 주님이 듣고 계시니까 거짓말이 아닙니다.

그런데 지나고 나니까 하나님께서 때가 되니까 그동안에 준비시켜 놓은 일을 다 하고 계신 겁니다. 다시 말하면 어떤 일이 어떤 사역이 있는 이것이 하루아침에 된 게 아닙니다. 엄청난 훈련과 희생과 경험과 이게 다 합해져서 준비된 이사람 저 사람을 보내주신 것밖에 없습니다. 11절에 보면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라 그러는 겁니다. 이분도 이런 업 덴 다운(up dean down)을 경험을 하면서 과거부터 지금까지 계속 배워오고 있다는 겁니다. 가난할 때나 돈이 있을 때나 내가 마음대로 그 안에서 평강을 누릴 수 있는 것을 내가 주욱 배워오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나는 궁핍에 처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일체의 비결을 배웠기 때문에 배운다는 말을 이렇게 현재완료형으로 쓴 것은 훈련을 의미하는 겁니다. 시간을 요하는 겁니다.

배우는 것은 하루아침에 되는 게 아닌 겁니다. 여기 젊은 사람들이여 조금 안다고 까불면 안 됩니다. 이제 시작입니다 조금 어렵다고 몸을 비틀면 안 됩니다 이제 시작입니다 하나님이 사도바울을 언제 태어나게 했는지 아십니까? 주후5년입니다 주후5년에 사도바울이 태어났습니다. 그래가지고 다메섹도상에서 하나님이 부르신 때가 주후35년입니다 이미 어머니의 배 속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을 받고 이방선교사로 선택을 받았지만 30년 동안은 세상에서 경험을 시킨 겁니다. 하나님을 전혀 모르고 구약의 하나님만 알지 예수님하나님을 전혀 모르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리고는 세상경험을 시켰습니다. 다메섹에서 만난 것은 30살 때입니다 30살 때 만나게 한 다음에 하나님이 이 사람을 또 강 훈련을 시키는 겁니다. 이분이 십년을 강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래가지고45년에 이분이 안디옥교회로 전도사로 부임을 받은 겁니다. 십년을 강훈련을 시키는 겁니다. 그래서 나이가40세가 되었을 때 안디옥교회에 말단 교육전도사가 된 겁니다. 그때부터 현장으로 나가서 계속해서 1차2차3차전도 여행을 하시면서 지금60년에 감옥에 앉아계시는 겁니다.

주후60년에 3차 여행 끝내시고 주후60년에 이 편지를 쓰셨다면 이분이 몇 살 때 쓰신 겁니까? 55세 때입니다 사도바울도 편지마다 언제 썼느냐에 따라서 이분이 변하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55세가 되니까 겨우 이제 뭐가 보이기 시작하시는 겁니다. 인생이 무엇인지를 67년에 순교당하시니까 그러면 몇 살에 순교 당했습니까? 62세에 순교 당하신 겁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릇이 되기 위해서는 시간을 요합니다.

제가 만약에 젊은 사람이라면 이런 말하면 어울리지 않겠지만 머리가 희어지고 저도 과거를 이렇게 보면 세상에서 경험을 다 하게 하시고 교육을 많이 받게 하시고 그리고는 돈도 많이 벌게 하시고 그리고 주님의 은혜로 별 고생 없이 다시 주님 앞에 오게 하시고 그래가지고 또 10년을 강훈련을 시키시고 지금도 훈련을 받고 있지만 이렇게, 이렇게 해서 오늘날 여기까지 오게 된 겁니다. 저와 같이 배를 탄 여러분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다들 훈련받는 사람들입니다 훈련을 받다보면 어떻게 됩니까?

우리 눈이 거시안적으로 되는 겁니다. 거시안적으로 훈련받을 때 목적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분이 하시는 말씀이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안다는 말은 오이다. 라는 원어인데 이 말은 경험한다는 말입니다

풍부에 처할 줄도 안다는 말입니다. 비천에 처한다할 때 비천에 처한다는 말은 타페이논(tapeinw'n) 이런 말인데 저수지에 수위를 낮추어가지고 또는 산의 높이를 낮추어서 밑으로 내려간다는 말입니다 내가 원래 이만큼 높은 사람인데 이렇게 스스로 밑으로 내려가는 우리예수님도 똑같잖아요. 하나님이신데 밑으로 내려오신 겁니다. 타의에 의해서가 아니고 자의에 의해서 밑으로 내려오신 겁니다. 그런데 이것은 스스로 그렇게 하도록 하나님이 성령님이 인도하시는 겁니다.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고 그게 은혜입니다

풍부에 처할 줄을 안다고 그랬습니다. 풍부라는 말은 높아진다. 풍성해진다

이런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사용 받는 자는 성경 속에서도 이 경험을 다 해야 합니다. 왜냐면 이렇게 되어야지만 내 눈이 거시안적으로 주님을 바라볼 수 있게 만들어 놓습니다. 이 세상 것을 보지 않고 아브람을 보세요.

이 경험을 다 했습니다. 모세를 모세요. 이 경험을 다 했습니다.

다윗을 보세요. 이 경험을 다 했습니다. 사도바울을 보세요. 이 경험을 다 했습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렇게 되면 모든 사람을 껴안을 수 있는 주님의 눈으로 내가 조금씩, 조금씩 변하게 되는 겁니다. 눈의 각도로 그래서 내가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비밀이 한국말로는 비결이라는 말로 써놓았습니다 본래는 비밀입니다 내가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어떤 상황에 있을 때라도 큰 요동이 없는 겁니다. 항상 주님만 바라보는 겁니다. 마음에 변덕이 없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이 비밀을 이 사람이 깨달은 겁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경험에 의해서 움직여지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분의 눈은 주님만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현재완료형으로 계속해서 훈련받아 왔다는 겁니다. 여기에 앉아 있는 우리 모두가 이 훈련을 받고 있는 과정입니다 어느 처소에 있던지 이 훈련을 받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배워야 되는 것이고 경험해야 되는 것이지 이것이 짧은 시일에 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젊은 사람들이여 시간이 가야 됩니다. 사도바울이 현재완료형을 쓴 이유가 무엇입니까? 내가 지금 감옥에 앉아 있습니다. 55세인데도 나는 계속 이것을 배우고 있다는 겁니다.

인생을 지금도 계속해서 배우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나는 겸손한 사람으로 배우는 사람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내가 부족한 사람이라는 걸 느끼는 겁니다. 남이 나보다 났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겸손한 사람이라고 2장에서 말씀하셨잖아요. 배운다는 사람은 저 사람이 나보다 났다는 것을 내가 인정하기 때문에 저 사람을 통하여 배우라고 그러는 겁니다. 저 사람이 이런 일 저런 일은 나보다 못하지만 그래도 최소한 한 가지 내가 모르는 것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나는 저 사람을 통해서 항상 배워야 되는 겁니다. 어린아이를 통해서도 배워야 합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는 겸손한 사람입니다 그게 사도바울의 마음이었고 주님의 마음이었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가져야 된다는 겁니다. 그런 사람은 말 한마디를 해도 말에서 그 겸손이 보이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말씀하시는 이 말씀 주님이 이분들에게 말씀하시기를 그렇기 때문에 항상 감사해라 어떤 상황에 있던지 감사하라는 겁니다. 내가 지금 어려움에 있습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나를 훈련시키느라고 이런 어려움을 주시는군요. 언젠가는 또 이 어려움이 변해서 즐거움으로 변하겠지요. 주님이 그렇게 하실 겁니다.

그렇지만 내가 이 어려움을 통과해야 됩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이 어려움을 내게 주셔서 원시안적인 거시안적인 눈을 뜬 사람들은 지금 이 상황에 완전히 상황 속에서 내가 빠져가지고 헤매어 나지 못하고 울고불고 하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이것은 자나가는 하나의 과정이고 나를 주님이 어떤 그릇으로 만들기 위해서 주님이 나를 이렇게 하시는구나. 감사합니다.

이런 마음을 가지셔야 합니다. 그게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사도바울은 그것을 가졌기 때문에 모든 상황에 처해있던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라 그러는 겁니다. 배웠다는 겁니다. 자동적으로 하늘에서 떨어진 게 아닙니다.

이 아픔을 통해서 배웠다는 겁니다. 결론적으로 이 경험은 예수 믿는 사람과 안 믿는 사람들이 다 가지게 됩니다. 이런 아픔의 경험과 또 즐거운 경험을 그렇지만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은 이 경험을 자기의지를 가지고 처리를 합니다. 그런데 우리 믿는 사람들은 여기서 차이가 나는 겁니다.

안 믿는 사람과의 차이점은 우리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우리는 하는 겁니다. 이것이 차이점입니다 우리가 보통 이 말씀을 내가 네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그 말은 능력주시는 자안에서 돈 백억이 나와라 하면 뚝 떨어지고 이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걸 마음대로 쓰는데 아닙니다. 이 말씀은 뭐냐면 능력주시는 자안에서 내가 아픔도 경험하고 모욕도 경험하고 어떤 때는 자존심도 떨어지고 이렇게 주님이 나를 훈련시키는 것을 내가 인정하고 감사하게 생각하면서 내가 이것을 이겨나갈 수 있는 능력은 주님 안에서 나온다는 것을 확신하고는 그 혹신을 가지고 내가 걸어갈 때 그것이 현실화되는 것을 체험하는 사람이 말하는 겁니다. 주님과 능력주시는 자안에서 말할 때 전제조건이 하나가 있습니다. 뭐냐면 보좌의 기도를 하지 않으면 이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주님의 능력을 매일 받는 사람이 고백하는 말입니다 그런 사람은 좋은 환경 속에서나 나쁜 환경 속에서나 항상 편안한 마음을 가지고 대처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바울은 빌립보교인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기뻐할 수 있다는 겁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고 그랬잖아요. 염려될 것이 많지만 그 염려가 나를 지배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염려하지 말라는 겁니다. 어떻게 해야 됩니까?

보좌의 기도를 해서 그분의 능력을 받고 위안을 받고 그분의 평강을 내가 받아야 되는 겁니다. 그러다보면 모든 사람을 내가 관용할 수가 있습니다.

환경을 내가 지배할 수 있다는 겁니다. 이것은 내게 능역주시는 자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고백입니다. 제가 다시 사도바울이 하시는 말씀을 11절에서13절까지 다시 읽어드리겠습니다. 가만히 눈을 감고 들어보세요.

바울이 말씀하시기를 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12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보좌의 기도를 할 때 이런 고백이 나올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결코 가난한 자가 아니었습니다. 이유는 빌립보교인들의 도움이 없어도 살 수 있는 사람인데 그런데 이분은 어떤 부분에서 빌립보교인들보고 너희들은 나의 기쁨이요 나의 면류관이요 하는 그분들이 사도바울에게 베풀었던 그 배려하는 마음 물질을 주면서 배려해주는 마음까지 같이 주는 겁니다. 그 마음속에서 이분이 이런 고백을 깨닫는 겁니다. 저희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을 섬기는 것이 이웃을 배려해주면서 어려울 때도 이웃에게 힘을 주고 배려해주고 그러면 이웃이 나 때문에 살아나고 이러한 배려하는 마음을 가지게 바라며 고생을 복으로 생각하시는 이런 복된 말씀 속에서 이 말씀이 내 것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