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서

15강. 빌립보서3장17절-21절, 나를 본 받는 자

변명섭 2022. 3. 13. 07:31

빌립보서 15장. 나를 본받는 자(빌3:17-21)

빌립보서3징17절에서 21절까지 말씀입니다 같이 말씀을 읽겠습니다.

17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그리고 너희가 우리를 본받은 것처럼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을 눈여겨보라 18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19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20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21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아멘.

오늘은 빌립보서강해 열다섯 번째 말씀입니다. 제가 스무 번 정도 하면 끝날 것 같습니다. 제가 열다섯 번째의 제목을 나를 본받으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지난 번 강해의 제목이 부르심의 상을 위하여 쫓아가노라 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렸는데 그 말씀을 잠깐 리뷰하고 다시 오늘 말씀으로 연결하겠습니다. 왜냐면 이 말씀들이 다 연결이 되어 있기 때문에 그러는 겁니다. 지난시간에 바울이12강13강14강에 계속해서 어떤 말씀을 하느냐면 본인은 육체에 신뢰할 만한 것들이 누구보다도 많다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를 아는 지식을 가진 후에 이 모든 것을 상대적으로 배설물처럼 여겼다는 말씀 그러니까 예수를 안다고 할 때는 구약의 아담이 하와를 안다는 말과 똑같다고 그랬습니다. 동침하다는 그런 의미의 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예수님을 알아도 머리로만 안 것이 아니고 완전히 삶 자체를 알았다는 겁니다. 부부간에 서로 아는 식으로 이렇게 예수님을 안 다음에 이렇게 배설물처럼 여긴 후에 삶의 목표가 완전히 뚜렷해졌다는 겁니다.

어떤 목표로 뚜렷해졌냐면 마라톤선수의식을 가졌던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부름의 상을 향해서 마라톤선수처럼 목표를 향해서 전진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쫓아가노라 그랬습니다. 부름의 상을 뭐라고 그럴까요?

면류관이라고 제가 말씀드렸습니다. 마라톤의식을 가진 사람은 현재 달려가고 있기 때문에 다 다렸다는 그런 개념이 없습니다. 계속 달리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달리고 있는데 벌칙을 조금 메기면 상을 향하여 가다가 본인은 느끼지 않지만 종착역에 가면 상이 무효 되는 경우도 있다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상이 빼앗기지 않도록 잘 정신 차려서 마라톤경주를 하라는 겁니다. 그래서 이분이 쫓아가노라 이 말을 영어로 프레스 온(Press on)이런 말로 썼습니다. 이게 원어와 똑같은 말입니다.

프레스(Press)는 누르는 겁니다. 온(on)이라는 말은 계속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자기 자신을 눌려가면서 마라톤경주를 달려간다는 겁니다. 우리 신앙생활이 그렸습니다. 나를 계속해서 죽어가면서 그렇게 달려간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분은 미래지향적인 분입니다 과거지향적인 분이 아니고 그래서 이분은 말하기를 그럽니다. 뒤에 있는 것은 나는 향상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향해서 달려간다는 말을 계속해서 하는 겁니다.

그런데 부름의 상이 무엇인가? 지난시간에 이렇게 말씀을 드렸는데 이게 무엇입니까? 다른 말로 하면 면류관이라고 말씀했습니다. 면류관인데 면류관이 몇 가지가 있다고 그랬습니까? 다섯 가지의 면류관이 있습니다.

기쁨의 면류관, 생명의 면류관, 섞지 않는 면류관, 영광의 면류관, 의의 면류관 특히 의의 면류관은 예수님의 재림을 사모하는 자들이 받는 면류관입니다 그러면 제가 면류관의 특징은 뭐라고 그랬습니까? 첫째 사역한 공로만큼 받는 겁니다. 영광 체의 모습이 면류관인데 면류관을 받았다는 것은 그만큼 나에게 하나님의 보좌에서 흘려 나오는 영광으로 옷을 입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사람마다 영광의 모습이 다르고 분량이 다르고 크기가 다릅니다.

사람마다 다 다릅니다. 그런데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면류관을 가지고 있습니까? 아닙니다. 소수만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두 번째 특징은 소수에게만 이 면류관이 주어지는 겁니다. 그러면 어떤 소수냐면 이분들은 사역자체보다도 예를 들어서 내가 헌금도 많이 하고 일도 열심히 하고 집사고 장로고 권사고 목사고 전도사고 이런 사역자체보다도 어디에 중요한 요건이 있느냐면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은 겁니다. 이게 대단히 중요한 개념입니다

그래서 2장5절에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어라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어라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라는 겁니다.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그다음에 고린도전서13장의 사랑이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이 마음을 품는데 이것을 우리는 주로 예수님을 닮아간다 이런 말로도 표현을 하잖습니까? 그래서 매일매일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성화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은 점진적으로 되는 겁니다. 또 발전적으로 되는 겁니다. 이 개념을 잊지 말아주세요 신앙생활을 하는 그날부터시작해서 어제와 오늘이 다르고 조금씩, 조금씩 이슬이 내리듯이 큰 변화가 없으면서도 매일매일 내가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성품이 변해가는 겁니다. 그런데 변해간다는 말은 맞지가 않습니다. 발전해가는 겁니다.

이것이 없으면 교회 나오는 사람이 이것이 없는 사람이 많습니다.

점점 예수를 더 오래 믿을수록 더 완악해지고 눈이 더 무서운 눈이 되고 입이 독소를 가진 입이 되고 그렸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딱 보면 아하! 저 사람은 면류관이 없구나. 근방 알 수 있습니다. 소위 성화되어야 되는데 면류관의 특징 네 번째는 뭐냐면 감소되거나 또는 완전히 소멸되는 게 면류관입니다 이게 대단히 중요한 개념입니다. 구원은 웬만해서 이런 일이 없는데 구원은 은혜로 그냥 받아버리는데 무료선물입니다 그렇지만 면류관은 상급은 나의 노력이 첨가되어야 됩니다. 이것은 감소도 되고 또는 완전히 소멸도 되어 버리는 겁니다. 또는 계속해서 더 많아지기도 하고 이게 빌립보서나 또는 모든 사도바울의 서신에서 감소되는 원인을 항상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어떤 요소가 이렇게 면류관을 감소시키느냐 이게 이분의 신학입니다

아주 중요한 신학입니다 빌립보서에서도 항상 똑같은 말을 하고 갈라디아서나 로마서나 어디나, 어디나 할 것 없이 똑같은 표현입니다 뭐냐면 그리스도인의 공동체 안에서 다툼을 하는 사람들 질투하는 사람들 투기하는 사람들 분쟁하는 사람들 허영으로 하는 사람들 이간질하는 사람들 원망하는 사람들 시비하는 사람들 자기욕심을 가지고 하는 사람들 자기야심 자기영광 이런 모든 불순한 동기로 그리스도의 공동체 안에서 일을 하거나 또는 그 안에서 교제를 할 때 아무리 많이 해도 여기는 면류관이 없습니다.

왜냐면 이런 마음은 누구의 마음이냐면 마귀의 마음입니다 그러면 상급이 영광이 언제 더 증가되느냐면 팔복의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복 있다 그랬습니다. 팔복의 마음을 가진 사람들 그다음에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로 맺어진 사람들 그다음에 고린도전서13장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이 마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왜 감소되는지 아십니까? 마귀의 마음을 가지면 왜 감소되는지 아십니까? 이런 마음을 가지면 기독교의 공동체 그리스도인의 공동체에도 하나님의 자녀들이 지금 제가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들끼리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끼리 이런 마음을 가지면 어떻게 되느냐면 내 이웃 하나님이 사랑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상처를 받습니다.

실족합니다. 믿음이 떨어집니다. 이런 마음을 가지면 그다음에 공동체가 혼란해집니다. 혼동을 가져옵니다. 시험에 빠지게 합니다. 그러면 교회 와서 재미있는 게 아니고 그리스도의 공동체에 와서 힘을 받아야 되는데 힘을 빼어버리는 겁니다. 그게 누구의 마음입니까? 마귀의 마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이웃 힘을 빼버리는 사람은 빼는 순간에 그대로 영광이 뚜두둑 떨어져버리는 겁니다. 왜냐면 주님이 볼 때 네가 저사람 별로 마음에 안 들지만 나는 예쁜데 어떻게 하느냐 그러면서 뚜두둑 떨어뜨려버리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 모두가 다 믿음의 정도가 다르고 다 다릅니다.

성품도 다르고 하지만 주님이 보실 때 다 예쁜 겁니다. 예쁨의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다 예쁜 겁니다. 예쁘니까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어 놓았잖아요.

주님이 예뻐하는 사람을 내가 건더러 놓으면 주님이 싫어하십니다.

아주 심플한 원리입니다 내 눈에는 마음에 안 듭니다. 그렇지만 주님의 눈으로 사람을 봐야 합니다. 그게 영리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사람이기 때문에 자칫하면 내 눈으로 사람을 자꾸 봅니다. 왜 감사드려야 하는지 알겠죠?

지금 까지 이야기를 보면 어떤 사람에게 하나님의 영광 체를 증가시킬까요.

주님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 증가 됩니다. 그러면 왜 주님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 증가됩니까? 주님은 마음은 무엇입니까? 주님을 마음을 크게 보면 주님의 자녀들을 인류역사부터시작해서 처음부터지금까지 나중에 주님이 오실 때까지 주님의 선별된 자녀들을 주님의 백성으로 만드는 것이 주님의 마음입니다 그다음에 그렇게 주님의 공동체에 들어온 사람들은 주님의 마음이 뭐냐면 점점 점 영적으로 자라게 만들어주는 것이 주님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영안이 더욱 떠가지고 영적으로 힘을 받고 자라게 되어 가지고 이분이 주님을 더욱 사랑하게 만들어주는 게 주님의 마음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하는 일이 뭡니까? 주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주님의 마음에 내가 연합하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순길 형제가 있습니다. 그러면 순길 형제에게 내가 어떻게 해야 순길 형제가 나를 따라 옵니까? 내가 예뻐해 주는 겁니다.

예쁘게만 해주어도 안 됩니다 영적으로 자라도록 키워주어야 됩니다.

사람이 자라는데 제일 중요한 것이 뭐냐면 아무리 내가 좋은 말을 해도 기분 나쁘게 하면 내 말을 안 듣습니다. 그게 사람으로 우리가 감정의 동물들입니다 동물들도 똑같습니다. 그러니까 항상 좋은 말을 해주고 격려해주고 칭찬해주고 그래서 마음 문을 열어주어야 합니다. 그게 성령님입니다

성령님이라는 말이 위로자입니다. 우리가 성령 충만하다면서 이웃을 위로해주지 못하면 성령님이 들어갔다가 악령이 들어갔다가 왔다 갔다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내 마음에 두 영이 왔다 갔다 하는 겁니다. 성령님이 온전히 들어올 때는 내가 순길이를 항상 잘한다. 잘한다, 자꾸 격려해주는 겁니다.

그러면 순길이는 바깥에 나가서는 힘을 못 받다가 이곳에만 오면 힘을 받는 겁니다. 그러면 점점 커지는 겁니다. 그러면 순길이가 키만 커지고 성숙만 해서는 안 되잖아요. 그 다음에 순길이로 하여금 영적으로 아이를 낳아가지고 순길이가 또 그 아이들을 키워주는 그게 소위 제자훈련이라 그러자 않습니까? 그렇게 할 때까지 키워주는 겁니다. 그러니까 스스로 아이를 낳아가지고 스스로 똑같이 아이들을 그렇게 키우는 겁니다. 그런 사람들은 누가 마음을 가장 편하게 생각합니까? 주님이 그런 사람들을 예뻐합니다.

왜냐면 자기 마음과 연합되기 때문에 그러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분은 자동적으로 영광이 다닥다닥 붙어 버립니다. 이게 심플한 원리입니다

좁은 의미에서 내 민족 앞에서 이렇게 하는 사람은 그냥 크리스천이라 그럽니다. 그런데 넓은 의미에서 주님의 마음은 내 민족만이 한국민족만이 아닙니다. 모든 타 민족에까지 다 이렇게 보여줄 때 진짜 주님의 마음을 우리가 더 넓게 깊게 이해하는 겁니다.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이 사역이 더 주님의 마음을 넓고 깊게 이해하기 위해서 그분의 마음을 더 깊게 즐겁게 해드리기 위해서 우리가 이방사역을 하는 겁니다. 이방사역이 얼마나 힘이 듭니까?

오늘 본문말씀을 보면 사도바울이 빌립보교회에 하시는 말씀이 빌립보교회에 이런 면류관의식을 가진 자들이 많지 않다는 겁니다. 똑같이 일반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면류관의식이 오늘날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대부분의 교회는 그냥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입니다 면류관이라는 마라톤선수들의 개념이 없습니다. 이게 문제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이들에게 간곡히 부탁하기를 너희들은 착한 일을 많이 했는데 그런데 상급이 없으니 웬 말이냐?

이분들에게 오늘 말씀하시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18절에 뭐라고 그러느냐면 내가 눈물을 흘리며 말하고 있다는 이런 안타까운 심정을 빌립보교회에 말씀하고 계십니다. 왜냐면 상급의식이 없기 때문에 그러는 겁니다.

그러면 사도바울이 감옥에 앉아서 이렇게 눈물을 흘리면서까지 빌립보교회에게 말하는 이유가 뭐냐면 사도바울도 이 사람들보다 더 어려운 환경 속에 있는데 눈물을 흘리면서 말해주는 겁니다. 이분 말씀이 이렇습니다.

1장6절에 보면 너희들이 착한 일을 나에게 얼마나 많이 했느냐 그다음에 4장18절에 그랬습니다. 너희들이 내가 돈이 없을 때 돈도 갖다 주고 기도도 많이 해주고 그래서 너희들이 받친 헌신을 향기로운 제물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향기로운 제물을 너희들에게 받았는데 그런데 그것 가지고는 안 된다는 겁니다. 그것은 형식적으로 또는 마음 가지고 그냥 받쳤지만 주님이 받치는 것은 그것보다 더 깊은 측면이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이유를 안 된다면서 왜 내가 이렇게 슬퍼하는지 아느냐?

그러면서 그 이유를 말씀하시는 것이 오늘 본몬18절에 보세요.

그런데 한국말 번역이 아주 이상하게 되어 있습니다. 한국말 번역을 보면 아무리 봐도 무슨 말인지 모릅니다. 18절에 보면 내가 여러 번 너희들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첫째 눈물을 흘리는 이유가 뭐냐면 빌립보교인들 중에 많은 교인들이 십자가에 원수로 행한다는 겁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한국말로는 원수라고 그러는데 원어로 보면 복수로 원수들로 이렇게 표현을 했습니다. 그러면 이게 무슨 말입니까? 십자가의 원수들은 누굽니까?

원칙적으로 말하면 마귀입니다 그런데 십자가의 원수의 행위들을 지금 누가 하고 있는 겁니까? 십자가의 원수의 행위는 무엇입니까? 마귀의 행위들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지만 마귀의 마음을 가지고 행동한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인데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지 않고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지 않고 마귀의 마음을 가지고 행동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원수들이라는 말로 표현을 했습니다. 그러니 마귀의 마음을 가지고 행동을 하면 내속에 성령님이 계십니다. 그런데 내가 마귀의 마음을 가지고서 행동을 하면 내속에 있는 하나님의 마음이 슬슬 떠나갑니다. 소멸되어 가는 겁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영광이 슬슬 감소되고 소멸됩니다. 마귀의 마음을 가지면 그래서19절에 마귀의 마음을 가지게 되면 결과가 어떻게 된다고 사도바울이 표현을 했습니까?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랬습니다.

이것도 겁나는 이야기입니다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이렇게 말할 때는 멸망하면 무엇을 생각해야 합니까? 우리기독교인들에게 멸망이라는 말이 해당이 됩니까? 안 됩니다 우리가 왜 멸망을 받습니까? 그런데 멸망이라 그랬습니다. 원어를 들여다보면 아포레이야라는 말로 썼는데 영어로는 로스(loss)상실을 의미하는 겁니다. 그 후에 성경해석에서 낭비한다는 말을 멸망한다는 말로 또는 패망한다. 또는 영벌 받는다. 이런 말로 번역이 되었습니다.

본래의 뜻은 상실이라는 뜻입니다 멸망이라는 아포레이야라는 뜻이 그러면 무엇이 상실된다는 겁니까? 면류관 영광 체가 상실된다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그것을 알기 때문에 안타까워 가지고 눈물로 저들에게 호소했던 겁니다. 너희들이 착한 일을 많이 하였으나 면류관이 감소되거나 상실되는 신앙생활을 하지 말라는 겁니다. 우리가 인간의 눈으로는 상급을 많이 받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영의 눈으로 보면 저분의 상급이 감소되고 상실되고 있는 곳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인간의 눈으로 볼 때는 그렇게 안 보입니다 거꾸로 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영의 눈을 뜨고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또 볼 줄 알아야 됩니다. 사도바울이 왜 이렇게 강한 표현을 서슴치 않고 했는지 아세요. 특히 사랑하는 빌립보교인들에게 그게 굉장히 강한 표현입니다 이것은 빌립보교인들만 아니고 과거2천년 동안 기독교역사에서 상전에 있었던 교회의 문제점들입니다 오늘날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문제가 이런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교회도 이 문제에 대해서 심각하게 다루겠지만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구별의식이 결여되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구별의식이 이게 무슨 말이냐면 애굽 생활이라는 하나의 생활과 그다음에 출애굽해서 광야에서 사는 광야생활도 있습니다.

그다음에 요단강을 건너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사는 생활이있습니다.

사람은 이렇게 세 가지의 삶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광야에서 사는 사람들이고 애굽에서만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애굽을 나온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은 두 가지의 삶을 삽니다. 광야의 삶을 사는 분이 있고 그다음에 가나안 땅에 사는 가나안의 삶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광야의 삶은 구원의 기쁨이 없었고 불평이 많았고 애굽 사람들의 삶을 그대로 따라갔던 사람들입니다 구원은 받았는데 지금 여기서 말하는 것은 광야의 사람들이 이런 문제를 야기하기 때문에 그러는 겁니다. 요단강을 건넌다는 것은 성령세례를 받고 완전히 삶의 변화를 추구하는 사람들입니다 오늘날 교회성장 학을 다루는 학자들에 의하면 교회 안에 광야 생활하는 사람들이 퍼센트가 전 세계의 평균이 80%에서90%라 그럽니다. 그러니까 면류관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의 퍼센트가80-90%라는 겁니다. 이분들의 삶이 아까 우리가 본대로 마귀의 마음을 가지고 면류관이 감소되는 그러한 삶을 살고 있는 겁니다.

질투가 많고 싸움이 있고 다툼이 있고 자기욕심이 많고 예수 믿는 사람들이 특히 우리나라도 보면 안 믿는 사람들보다도 이런 부분이 더 강한 사람들입니다 예수이름으로 더 강합니다. 예수이름으로 그게 참으로 이상하게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니까 마귀가 아주 대단하게 이런 부분에서 우리민족을 건들리고 있습니다. 헌신된 사람들의 퍼센트는 10%에서20%입니다.

그런데20%라 그러면서 미국이나 어떤 나라의 학자들과 이야기하면 20%가 아니라는 겁니다. 10%도 아니라는 겁니다. 5%도 아니라는 겁니다.

어디를 가나 어느 교회를 가나 보세요. 이런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제직들이 얼마나 되며 그기에 심지어 목회자들이 얼마나 되는가?

제가 신학교에서 많은 강의를 하다가 보면 신학생들 다 목회자 될 사람들 아니면 목회자들이 많이 앉아 있습니다. 딱 보면 보입니다. 그 안에 쓸 만한 사람은 10%20%밖에 없습니다. 어떤 때는 제가 그럽니다. 주여! 내가 왜 이 사람들을 가지고 시간을 낭비합니까? 겉으로 보면 다들 목사고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생각하는 사고구조들 삶의 태도 가치기준들 목표가 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여기에 벗어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인간성을 보면 기본기가 안 된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요즘 와서는 백인들도 보면 똑같습니다. 한국 사람만이 아니고 그런데 한국 사람들이 더 심합니다. 이상하게도 더 심합니다. 미국신학교에 이렇게 보면 백인교수들이 한국 사람들 때문에 골치를 아파합니다. 목사 전도사들인데 거짓말을 제일 많이 하고 시험 볼 때 커닝을 제일 많이 하고 남의 페이퍼를 제일 많이 복사하고 못된 짓은 코리안 들이 다 한다는 겁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때는 아주 창피해 죽겠습니다. 언제는 웬 2세 코리언이 나에게 편지가 왔습니다. 한국말을 못하는 2세입니다 나에게 목사님 왜 우리 코리언들은 클래스에서 시험을 보면 커닝하는 것은 다 코리안 입니까?

제가 코리아 인이라는 게 창피해서 죽겠다는 겁니다. 다 목사들이고 전도사들인데 커닝을 한다는 겁니다. 우리교회 안에서 이런 사람들은 다 광야의 사람들입니다 거짓말을 밥 먹던 하고 세상 사람들이 봐도 구별이 안 되는 사람들 전혀 사고방식이 세상 사람들보다 더 못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기본적인 가치기준입니다 다시 한 번 제가 말씀드립니다. 광야인의 모습이 무엇일까요? 제가 계속 반복합니다. 다툼이 있고 질투가 있고 투기가 있고 분쟁이 있고 이간질이 있고 원망이 있고 시비가 있고 자기욕심 자기고집 자기아집이 강한 사람 그다음에 자기영광을 나타내려고 하고 이런 사람들이 모여 있으면 그 안에 평화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모두가 다 자기스타일로만 자기이익만 가지고 앉아있는 겁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러니까 다툼이 있는 겁니다. 그 안이 그냥 불안합니다. 교회 와서 주님의 은혜와 평강을 체험하고 가는 것이 아니고 상처만 입고 가는 겁니다. 이런 사람들은 영광이 감소됩니다. 왜냐면 하나님의 백성들의 공동체를 아프게 하기 때문에 그러는 겁니다. 예수님의 몸인 교회를 아프게 하는 겁니다. 가시역할을 하는 겁니다.

우리가 지체의식을 분명히 가지면 내 지체 하나가 조금 병들면 예수님의 몸이 아파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기분이 좋으시겠습니까?

주님이 기분이 나쁘시니까 영광을 뽑아버리는 겁니다. 감소시켜버리는 겁니다. 영광 있는 사람들도 열심히 했는데 정말 열심히 주님을 섬기고 희생을 많이 했는데 이런 성품이 있는 사람을 조심해야 된다는 겁니다.

제가 지금 말씀드리는 것은 우리한국교회가 열심히 합니다 기도도 많이 합니다. 세상에 산기도하는 나라가 이 나라 뿐이잖아요. 새벽기도도 많이 합니다. 앉으면 찬양하고 기도하고 금요철야도 하는데 이 성품이 없는 겁니다.

그러니까 무엇입니까? 제일 열심히 하는 사람들을 보면 이 성품이 없는 겁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우리에게 그러지 말라 하시는 겁니다.

저는 이것을 보면서 안타까울 때가 많은 겁니다. 피스메이킹을 하는 사람들은 공동체 안에서 주님의 몸이 아프지 않도록 항상 달래고 그래서 주님의 몸을 편안하게 만드는 사람이 화평케 하는 자입니다 피스케이킹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피스메이킹 하는 사람들을 제일 예뻐합니다.

트러블메이커보다는 이것을 우리가 철저하게 회개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주님 앞에 감소요인을 내가 가지고 있을 때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항상 주님 죄송합니다. 미안합니다. 저는 걸어가면서도 그러는 겁니다.

주님 죄송합니다. 미안합니다. 거룩하신 주님 용서해주세요 고상하게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주님 미안합니다. 나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세요 내가 왜 이럽니까?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그게 회개입니다 주님 미안합니다.

왜냐면 우리는 이 비밀을 알기 때문에 그러는 겁니다. 영의 비밀을 알기 때문에 빨리 아임 쏘리(I'm Sorry)해야 됩니다. 그게 똑똑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아임 쏘리(I'm Sorry)해놓고도 이런 게 빨리 정돈이 안 됩니다.

계속해서 그 모양 그대로입니다 해놓고 그 다음날 되면 또 어떤 때는 더 삼하고 이럴 때가 있습니다. 이게 문제가 뭐냐면 자각증세가 없어지는 겁니다.

병이 나 있는데 여기에 대한 자각증세를 가지지 못할 때가 환자로서는 제일 무서운 병입니다 이게 설교가 아닙니다. 우리가 같이 말씀을 나누는 겁니다.

감정을 서로 나누는 겁니다. 설교라고 듣지 마세요. 제가 여쭈어 보겠습니다.

왜 우리가 자각증세가 없을까요. 자각증세 지금부터 잘 들으세요.

첫째 이유는 가치관과 세계관이 이 땅에 와 있기 때문에 그러는 겁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의 시각이 이 땅에 와 있기 때문에 그러는 겁니다.

하나님의 자녀인데 그래서 사도바울은 이런 빌립보교인들에게 하는 말이 너희들이 가치관과 세계관이 땅에 있기 때문에 저 하늘나라 백성들이면서도 그들의 신은 배요 이 말씀이 어려운 말씀입니다. 배타는 배가 아닙니다.

이들이 눈에 보아고 감각적으로 보이는 여기에 관심이 많아가지고 이분들이 식욕을 신같이 여기는 겁니다. 당장 눈에 보이니까 느끼는 것이 당장 있으니까 그기에 더 관심이 있는 겁니다. 보이지 않는 저쪽 세계보다도 하나님의 백성들인데도 그러니까 가치관과 세계관이 보이는 세계에 가 있는 겁니다.

광야의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애굽에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상이라는 말을 썼잖습니까? 우상이라는 말은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더 기대는 겁니다. 의지하는 겁니다. 그리고는 거기에서 마음의 평강을 찾는 겁니다.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우상이 무엇입니까? 물질입니다

돈이 없으면 마음이 불안 합니다. 돈이 있으면 마음이 편안 합니다.

명예도 우상입니다 있으면 평안하고 좋고 없으면 불안하고 권력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눈에 보이는 것들은 이 세상 것들은 꼭 신기루와 똑 같습니다.

사도바울이 지금 우리에게 말해주는 겁니다. 신기루라는 게 무엇입니까?

사막에서계속 따라가다 보면 내가 갈증이 나서 멈추어버리는 겁니다.

그게 신기루입니다 계속 쫓아가다가 죽어버리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우리에게 너희들은 시민권이 하늘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인데 너희들은 이 세상 것을 물질을 그냥 추구하고 따라간다는 겁니다. 권력을 추구하고 따라가고 명예를 끝없이 추구하고 따라가는 겁니다. 그것이 눈에 보이니까 그것이 나를 편안하게 해주니까 교회 안에서 광야의 사람들이 다투고 하는 것이 뭐냐면 다 자기의 어떤 명예 자기고집 자기의 어떤 위치 자기의 어떤 아이디어 자기 가치관 이것이 무너질까봐 이것이 무너지지 않기 위해서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우리가 그것을 건드려야 되는 겁니다. 자기 아성이 무너질까봐

사도바울이 식탁이야기를 했느냐면 이유가 있습니다. 바울은 잘못된 가치관과 세계관을 가진 빌립보그리스도인들에게 로마제국의 식탁문화를 비교해서 말씀하시는 겁니다. 로마제국은 식탁 때문에 망했다는 말을 씁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로마사람들은 그 당시에 저녁4시부터 시작해서 자정까지 밥을 먹습니다. 지금도 그 잔재가 유럽에 남아있어서 프랑스에 가도 그렇고 이태리에 가도 그렇고 이 사람들은 저녁에 음식을 놓고 즐깁니다.

보통2시간3시간4시간씩 합니다. 지금도 구라파사람들은 그렇습니다.

그 당시에 로마도시 인구가120만 명이었습니다. 국가부양자가40만 명이었습니다. 그리고 노예가40만 명이었습니다. 그다음에 자립자가40만 명이었습니다. 자립자 중에서 상류층사람이3000명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소위 상류층 엘리트그룹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의 음식문화가 문제입니다 이 사람들이 저녁4시가 되면 진수성찬을 차려놓고 밤12시까지 먹는 겁니다.

밥상에서 술 마시고 음악이 나오고 하루저녁에 저녁식사를 위한 예복을10번을 갈아 입는다는 겁니다. 하인들이 옆에서 부채질해주 있고 그다음에 어린 소녀노예들이 부채질해서 파리쫒아주고 여자 안마사가 옆에 있고 화장실이 옆에 있어서 먹고는 화장실에 가고 이게 로마사람들의 소위 음식문화였습니다. 지금도 그 잔재가 남아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눈에 보이고 느끼는 것에만 집착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너희들 그렇게 하지 말라 너희신은 배라 하는 말이 그런 의미에서 나온 겁니다. 먹는 것 눈에 보이는 것에 초점을 두고 크리스천들이 살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눈이 이 세상에 고정되어 있다는 겁니다. 면류관이 상실 받는 자들은 눈의 위치의 차이에서 달라지는 겁니다. 우리는 어떤 눈을 가져야 됩니까? 원시안적인 눈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눈을 높이 뜨고는 저 나라를 봐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20절에 보면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그래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러니까 우리는 뭐냐면 그곳에 예수님이 계신데 그분을 만나게 되고 그다음에 지금도 이 땅에서 그분을 원시안적인 눈을 뜨고서 그분을 볼 수 있고 그다음에 그분이 나에게 면류관을 부어주시는 것을 내가 이렇게 보는 겁니다. 그러니까 눈을 근시안적으로 뜨면 그게 안 보이는데 원시안 적으로 뜨면 그것이 보인다는 겁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들에게 원시안적인 눈을 뜨라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다투고 이러는 것은 근시안적으로 눈을 뜨기 때문에 다툼이 오는 겁니다. 조금 붕 떠가지고 주님의 눈으로 보면 다툴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다툴 때마다 내 눈이 이 밑으로 깔려있군요 그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바울은 이렇게 명쾌하고 분명하고 확실하게 그리스도인의 가치관과 세계관 정립의 동기를 우리에게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분은 설명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구체적으로 방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 문제를 해결하느냐 이것을 저는 닮음의 원칙이라고 여러분들에게 표현하고 싶습니다. 오늘 본문의 처음 부분17절에 말씀하시는 겁니다.

사도바울은 닮음의 원칙을 17절에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그리고 너희가 우리를 본받은 것처럼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을 눈여겨보라 이게 무슨 말이냐면 바울은 나를 본받으라. 우선 너희들은 나 바울을 본받고 내 스타일을 나의 시각을 본받으라는 겁니다. 그리고는 내가 세운 내 제자들이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제자들이 나를 본받고 있는데 그분들이 누구냐면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라는 겁니다. 그 사람들을 본받으라는 겁니다. 바울은 누구의 본을 받았습니까?

2장5절에서 예수그리스도의 마음을 본받았습니다. 이게 닮의 원칙입니다

이것이 그냥 되는 게 아닙니다. 어떤 표본이 있어야 되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예수님을 쳐다본 겁니다. 그분의 가치관 세계관을 똑같이 본받은 겁니다. 그러면 닮음의 원칙에 대해서 간단하게 말씀드리고 오늘 말씀을 끝내려고 합니다. 우선 닮음의 원칙에 우리가 들어가려면 첫째 닮아야 하는 대상이 있어야 합니다. 선생과 제자관계 목회자와 성도들과의 관계 부모와 자식 상사와 부하의 관계 이런 관계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관계는 꼭 전염이 됩니다. 다시 말하면 상사의 라이프스타일이 가치관이 밑에 사람에게 점염이 됩니다. 긍정적으로 또는 부정적으로 닮는 원칙이 저와 우리교회성도들은 닮의 원칙을 우리가 깨달아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바울의 스타일 디모데의 스타일 에바브로디도의 본을 우리는 배워야 됩니다. 그분들의 본이 뭡니까? 천국시민으로써 원시안적인 눈을 뜨고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분들의 가치관과 세계관을 우리가 전염을 받아야 됩니다. 그런데 이것은 하루아침에 받는 게 아닙니다. 점진적으로 발전적으로 조금씩, 조금씩 전염 받는 겁니다. 제일 먼저 전염을 받아야 될 사람이 누군지 아세요?

저입니다 내가 사도바울의 가치관으로 전염을 받아야 됩니다. 그분의 세계관으로 제가 그렇게 전염을 받으면 여러분들에 닮은 것이 전염되는 겁니다.

목회자들과 성도들 간에 이게 전염이 되는 겁니다. 내가 그렇지 못하면 여기 앉아있는 사랑하는 주님의 백성들이 아무리 사랑한다 하지만 내가 못되게 하면 다 그렇게 전염이 되어 버립니다. 그러니까 지도자들을 잘 만나셔야 됩니다. 전염을 주는 사람을 잘 만나셔야 됩니다. 그러니까 지도들이 책임이 있는 겁니다. 결론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와 같이 천국시민권자의 원시안의 가치관과 세계관으로 우리는 서서히 전염이 되어야 되는데 이것이 이렇게 전염이 되면 삶에 가치변화가 오기 시작하는데 변화가 되는 부분들을 제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결론적인 말씀입니다 첫째로 원시안적으로 우리가 이렇게 변화가 되면 첫째 물질관이 변합니다. 물질이 내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소유의식에 변화가 옵니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해서 죄송하지만 전00권사님이 여기 땅 값만 해도 엄청납니다. 여기가 3000평이 넘는데 이분이 이걸 하나님 앞에 바치면서 저에게 하시는 말씀이 권사님이 물질관의 변화가 있었던 겁니다. 목사님! 이게 내 것 아니잖아요. 주님 것인데 저는 다 놓고 갈 텐데 그 생각이 쉽습니까? 돈을 가진 사람들이 쉽지가 않는 겁니다. 그러면서 건물이 서는 것을 본인이 보시면서 그렇게 기뻐하십니다.

자기 평생의 모든 것을 주님께 바치는 것이 눈에 보이니까 두 번째로 변하는 것이 가정관의 변화입니다 첫째로 자녀다 내 자녀가 아닌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잠깐 관리하라고 맡겨 놓았구나. 자녀관이 달라집니다. 내 자녀가 아니구나. 길게 높이 보는 사람은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알아서 하십시오. 저는 잠깐 내 자녀가 열여덟 살이 될 때까지 내가 관리하고 주님의 뜻대로 잘 가르치라고 맡겨준 것이구나.

나는 관리자구나 세 번째로 명예 관과 권력관이 변합니다. 이제는 명예를 따라서 추구하지 않습니다. 파워를 가지려고 추구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해서 내가 망할까봐 내 눈이 어두워 질까봐. 네 번째로 인생관이 변합니다. 마라톤인생여정에서 나그네의식이 철저하게 들어옵니다.

나는 조금 있다가 떠나는 사람이다 인생은 잠깐 왔다가 없어지는 안개다 잃게만 생각하는 사람들은 믿지 않는 사람들 말입니다 안개지만 우리는 안개로써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잠깐 와서 있는 안개 같다는 겁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없어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저 세계로 영원히 들어가는 사람들입니다 그 인생관이 뚜렷해지는 겁니다. 그다음에 교회관이 변하는 겁니다. 내 교회발전만을 위한 아주 근시안적인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서 주님의 교회로 보는 겁니다. 내가 믿는 주님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교회들을 다 보기 때문에 그 교회를 내가 섬겨야지 내 교회 중심이 아니고 그것이 소위 선교 적으로 눈이 뜨게 되는 겁니다. 주님의 뜻을 깨닫고 우리교회는 교인이 많아지면 그 교인들을 최대한으로 활용해서 이 사역을 하도록 내 교회만 부자 되고 내 교회만 커져서 내 교회 내 교회해서 5부6부7부 예배 보는 그러한 식의 교회가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여섯 번째는 교인관이 달라집니다.

이런 사람들이 모이면 이 모든 교인들이 동역자의식으로 변해버립니다

경쟁의식이 아닙니다. 질투의 대상이 아닙니다. 교역자의식으로 변해버립니다 그리고는 눈을 떠서 보기만하면 아하! 이 많은 인구들 중에서 어쩌면 저 사람을 만나게 해서 같이 신앙생활을 하게 합니까? 이대로 영원히 천국에 가서도 이 사람이 나와 친구가 되겠구나. 그것을 생각하면 얼마나 기분이 좋습니까? 싫던 좋던 여러분들은 우리는 주님을 만나려 저 위에 올라갈 때는 영원히 가까운 동네에서 같이 살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부터 연습하셔야 됩니다. 눈을 저위로 올라 뜰 때는 그게 보이는 겁니다. 밑으로 깔아 뜨면 그게 안 보이는 겁니다. 생각을 바꾸셔야 됩니다. 영원히 같이 사는 사람들입니다 인생의 길은 마라톤경주처럼 험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견디다, 견디다 잘 참고 이겨나면 우리는 주님을 만난다는 종착역에 간다는 의식이 뚜렷한 겁니다. 우리는 마라톤선수들입니다 인생에서 어려움이 있을 때나 그럴 때도 주님 내가 지금 언덕을 올라가는 겁니다. 조금 있으면 언덕에서 내리막길로 내려갈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 감사합니다. 빨리 내려가게 빨리 밀어주세요. 가다가 웅덩이가 있으면 피해가야겠는데 안 그러면 점프해서 가야 겠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는 마라톤선수들입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여기서 앉아 있지 않게 해주세요. 사도바울이 이게 투철했잖아요.

여덟 번째로 마라톤게임이 끝난 다음에 뭐가 있습니까? 부름의 상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그 사람이 뚜렷한 겁니다. 우리 신앙생활의 동기를 뚜렷하게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부름의 상이 있다는 것을 이런 사람은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 안에서 다툼이 있습니까? 있다가도 근방 아임 쏘리(I'm Sorry)그럽니다. 질투, 투기, 분쟁, 허영, 이간질, 원망, 시비, 자기욕심, 자기 모든 야심들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이런 것이 계속해서 내 주위를 계속 엄습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내가 여기에 집착해서 여기에 내 발이 묶여가지고 이것 때문에 내가 추한 사람이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것은 계속해서 우리를 엄습하고 있습니다. 저에게도 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다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걸 이기려고 눈을 자꾸 올려 뜨는 겁니다. 문제는 눈의 각도입니다 천국시민권자의 눈의 각도로써 우리가 이렇게 항상 눈의 각도를 바꾸면 아주 천천히 점진적으로 발전적으로 우리가 이런 문제들을 조금씩, 조금씩 소멸할 수가 있습니다. 문제는 온전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저도 온전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이 문제를 우리가 안 다음에 이것을 매일매일 조금씩, 조금씩 주님 앞에 고백하면서 주여! 주님의 성품을 나에게 주십시오. 주여! 주님의 성품을 나에게 주십시오. 이렇게 하는 데는 방법론이 하나가 딱 있습니다. 마지막 결론입니다 첫째 매일매일 영의 양식을 먹어야 됩니다. 영의 양식을 잡수시면 영의 눈이 밝아집니다. 근전해집니다.

아주 감수성 있게 영의 눈이 빛이 납니다. 동시에 영의 귀도 열리게 됩니다.

그래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거기서 나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