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서

13강. 빌립보서3장4절-9절, 예수를 아는 지식

변명섭 2022. 2. 27. 17:03

빌립보서 13강. 예수를 아는 지식(빌3:4-9)

빌립보서3장4절에서9절입니다. 4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5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6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아멘,

오늘은 빌립보서강해 열세 번째인데 지난 시간 열두 번째 강의한 부분을 제가 간단하게 다시 한 번 반복해드리고 싶습니다. 왜냐면 이게 다 연계되기 때문에 지난번 강의가 몇 주 전이기 때문에 기억이 잘 안 나실 것 같아서 제가 간단하게 반복을 해드리겠습니다. 지난번에는 참 할례당이 되자 이런 제목으로 3장1절에서3절까지 말씀을 가지고 제가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때 사도바울이 말씀하시기를 기뻐하라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걸 명령형이라고 그랬습니다. 왜냐면 기쁨이 그 교회에 없었기 때문에 기뻐하라 이런 말로 표현하고 명령을 했습니다. 그 이유는 뭐냐면 그 교회 안에 착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 안에 보이지 않는 투기와 질투와 분쟁과 다툼 이런 것들이 산재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이분들에게 이런 문제들이 있기 때문에 교회 안에 보면 기쁨이 없고 평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원망과 시비와 허영과 다툼 이런 걸로 너희들은 마음의 평화를 빼앗기는 일이 없도록 하라 했습니다. 그래서 그 교회에 그런 문제를 가진 분들을 세 가지 측면으로 설명을 했습니다. 첫째 개들이라는 표현을 하고 또는 행악하는 사람들 그리고는 순 할례당들 그래서 그 사람들을 삼가라 이런 말로써 이야기를 했습니다. 개들이라는 것은 나와 다르면 공격하는 자들이라는 겁니다. 성가신 자들 그래서 항상 떼를 지어서 개인적으로 남과 하나 되지 못하고 자꾸 싸우는 사람들을 개라는 표현으로 이방사람들이 그러한 사람이었는데 이분들은 이방사람들이 개라는데 이방사람이 아닌 주 안에서 이렇게 복음을 받은 자들도 개 같은 사람들이 주 안에 교회 안에 많았던 겁니다.

그다음에 행악하는 자들이라 그래서 악한 일꾼들이라고 원어는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일꾼은 일꾼인데 교회에서 열심히 일을 하는데 동기가 불순해가지고 자기익만을 생각하고 그리스도의 마음 없이 일하기 때문에 이분들은 교회 안에서 투기가 있고 분쟁이 있고 다툼이 있게 되어 있습니다.

자기이익을 가지고 일하는 사람들을 예수의 마음을 가지고 일하지 않고 그 다음에 순 할례당이라고 그랬습니다. 뭐냐면 형식주의의 기독교인들 율법에 강한 사람들 이런 사람들을 순 할례당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참 할례당이 되어라 이렇게 사도바울이 빌립보교회에 말씀을 하면서 예수의 모습으로 마음을 변화를 받아가지고 참 할례당이 방법을 세 가지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첫째가 뭐냐면 하나님의 성령으로 예배를 드리라는 겁니다.

이런 사람이 되지 않으려면 진정과 신령으로 예배를 드려야 됩니다.

다시 말하면 이런 공간 속에서 예배를 신령과 진정으로 보는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나의 사람 속에서 내 삶이 항상 영적예배를 할 수 있는 삶을 살아야 된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영적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로마서12장에 말씀처럼 하나님이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영적예배는 이러하니라. 하면서 첫째가 뭐냐면 다른 사람의 분수를 알고 자기의 분수를 알고 공동체 안에서 하나 되는 일을 항상 하는 사람이 영적예배를 잘 드리는 사람이다 이런 말씀을 제가 드렸습니다. 이런 사람은 항상 주님과 깊은 영적교제를 하게 됩니다. 두 번째 단계로 영적예배를 드린 다음에 사도바울은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그리스도를 자랑하는 자가 되어야 된다는 겁니다.

영적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그다음에 오는 단계가 예수님을 자랑하게 된다는 겁니다. 한국말로는 자랑이라고 말을 했지만 예수님께 영광 드린다.

이렇게 표현을 합니다. 영광이라는 말로 표현을 하는 겸손한 자입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하는 것이 하나도 없고 매일매일 주님이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하는 것입니다 내가 소유한 것도 내 것이 아닙니다. 내 능력도 내 것이 아닙니다. 다 주님께 전부 이야기하는 분 이런 사람이 다툼이 있겠습니까? 이런 사람이 다툼이 없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다 주님! 주님이 이렇게 나에게 은혜를 주셔서 하는 것입니다 라고 하는 사람이 예수그리스도를 자랑하는 자라는 겁니다. 한국말로는 자랑이라고 표현을 했는데 원어로는 글로리 인 크라이스트(glory in Christ)라 그랬습니다. 그다음에 참 할례당이 되는 단계는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 이렇게 된 사람은 그때부터 육체적인 부분들을 육적인 부분이나 혼적인 부분들에 자기 자랑을 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서 잘 생겼다든가 건강하다든가 머리가 좋다든가 재산이 있다든가 권력이 있다든가 인맥이 있다든가 또는 학연이나 지연 등 이런 모든 것에 의지를 하지 않는 겁니다. 있어도 의비를 하지 않고 예수님만 신뢰하는 사람이라는 겁니다. 이 세 단계 과정을 거치는 겁니다. 이게 항상 과정이 있습니다. 단계입니다 중간으로 뛰어 들어가지 못합니다. 이 세 단계를 거치면 사도바울도 이것을 거쳤습니다. 그다음에 오늘 제가 말씀드리는 예수님을 아는 지식이 점점 커지는 겁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예수님을 아는 지식이 점점 커진다는 겁니다. 점점이라는 말을 제가 쓰는데 이것은 뭐냐면 점점 발전적입니다 점진적입니다 이게 하루아침에 혼의 레벨까지 가는 것이 아니고 계속해서 발전 합니다 예수님을 아는 지식이라는 것은 길이가 길어지고 넓어지고 높아지고 깊어지는 겁니다. 큰 그릇으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예수님을 아는 것이 어떤 사람은 깊이만 압니다.

그러면 안 됩니다 넓이도 알아야 됩니다. 그다음에 높이도 아셔야 합니다.

그것만 가지고 안 됩니다. 길이도 알아야 됩니다. 그러니까 엄청난 크기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것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을 아는 겁니다.

오늘 말씀은 사도바울이 이 깊은 것을 깨달으시고 이분이 여기에 대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겁니다. 이분이 그랬습니다. 예수님을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고상하는 말이 아주 고상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고상이라는 말은 영어로 소올 패서(solid phase)라는 말인데 다시 말하면 다른 것들과 비교가 안 되고 한 차원을 넘었다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소올 패서(solid phase) 아주 넘어 섰다는 겁니다. 그 말을 한국말로 고상하다는 말로 표현을 했습니다. 그래서 한문으로 높을 고(高) 윗 상(上)자입니다.

사도바울은 지금 말하기를 이 세 단계를 거친 다음에는 예수님을 아는 지식이 고상해지면 그다음에는 그동안에 내가 가지고 있었던 세상의 것들이 이분이 지금 자랑했던 육체의 자랑들이 다 배설물같이 되어 버린다는 겁니다.

우리 모두가 이 단계에 들어가야 됩니다. 그래서 제가 여기에 대한 말씀을 자세하게 드리려고 그럽니다. 배설물 같이 된다는 것은 뭐냐면 두 가치(價値)가 있는데 두 가치(價値)중에 하나가 너무나 가치가 있기 때문에 나머지 하나는 그냥 상대적으로 가치 없게 만들어 버리는 겁니다,

상대적인 가치기준입니다 가치기준의 상대적인 변화입니다 이런 변화를 가지게 될 때 고차원의 사람이 되니까 교회 안에서 다툼이 있겠습니까?

다툼을 보면 어린아이들을 보는 것 같습니다 질투가 있는 걸 보면 어린아이들 같습니다. 분쟁 허영 원망 시비시기를 보면 어린아이들 같은 겁니다.

왜냐면 이쪽에 있는 고상한 그것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러는 겁니다.

사도바울은 빌립보교인들에게 그쪽을 좀 보라는 겁니다. 왜냐면 내가 봤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분의 가치기준이 확 변해버린 겁니다.

우리예수 믿는 사람들은 이 가치기준의 변화를 가지고 와야 되는데 이것을 주님이 우리에게 천국은 이런 것이요 하면서 가치기준의 변화를 비밀로 가르쳐준 일이 있습니다. 마태복음13장에 보면 그랬습니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 추인 보화와 같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이걸 발견했습니다.

아하! 저분 밭에 보화가 들어있구나 그러면 가만히 숨겨두는 겁니다.

숨겨두고는 혼자서 마음이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 있는 소유를 다 팔아버리는 겁니다. 마태복음13장44절의 말씀입니다 가치기준이 변해버렸기 때문에 자기가 가지고 있는 땅은 별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생의 자랑 그러니까 다 팔아가지고 몰래 주인에게 이 밭을 팔아라. 그래가지고 이 밭을 샀다는 겁니다. 이게 천국의 비밀이라는 겁니다. 가치기준의 변화 그러면서 45절46절에 또 말씀하시는 겁니다. 두 번 말씀하시는 것은 예수님의 강조의 의미가 있습니다. 대단히 중요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진주의 비유를 드십니다.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꾼과 같으니 값진 진주하나를 만나면 가서 자기 소유를 다 팔아가지고 그 진주를 사는 거나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대부분의 교인들은 이 부분이 약한 겁니다. 지금 빌립보교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도 부족하지만 이 세상에서 잘나가는 사람 중에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보화를 보고는 성령님의 도움으로 내 마음을 저 쪽 것을 포기하게 만드셨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보니까 이것은 내가 한 것이 아닙니다. 은혜입니다 그러니까 그 은혜를 생각할 때마다 너무나, 너무나 눈물을 안 흘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을 은혜로 깨달았을 때 그것을 저는 스스로 복된 자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떠십니까?

지금 어느 단계에 있습니까? 이 보화를 보시고 이 보화를 구경만 하고 계십니까? 자기 땅만 그냥 가지고 계시고 문제는 땅만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눈에 각도가 아직 땅에 가 있기 때문에 이 세상에 가 있기 때문에 육체의 자랑을 하니까 그런 사람들은 교회 안에 와서도 다툼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 것을 놓고 보니까 파도가 보이니까 세상 것에 대한 비교의식이 있고 이걸 가지고 원망하고 시기하고 이것 때문에 마음아파하고 그럽니다. 그런 것은 우리에게 항상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것이 잠깐 있지만 그것을 이길 수 있는 파워는 어디서 나오느냐면 가치기준이 변한 사람들에게 나오는 겁니다. 문제는 항상 있습니다. 불안함이 항상 있고 평강이 나를 빼앗아 갈 때도 있고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애들아 이 가치기준으로 내가 변화를 받으라고 말하는데 이것이 그냥 말하는 게 아니다 내가 그런 사람이다 내가 그걸 경험한 사람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너희들보다도 더 육체부분에서는 세상 부분에서는 자랑거리가 너무나 많다는 겁니다.

한번 들어 볼래 그러는 겁니다. 여러분들도 한번 들어 보시래요 이분이 지금 말하는 게 내가 가지고 있는 눈에 보이는 자랑거리가 엄청나게 많다 너희들보다 더 많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을 내가 배설물로 여기는 그러한 은혜를 받았다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말하는 겁니다. 4절부터6절까지 말씀입니다.

사도바울의 육체의 자랑은 무엇일까요? 첫째 유전적인 요소들이 있습니다.

유전적으로 전수받은 요소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그분이 말씀하시기를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았다는 겁니다. 이것은 엄격한 유대전통에 따라 꼭 받아야 되는 것들입니다 이 말은 뭐냐면 나는 전통적으로 자랑할 만한 유대인이라는 겁니다. 그것을 주장하는 겁니다. 그리고 율법을 준수하는 자고 그렇기 때문에 나를 따라올 자가 없다는 겁니다. 그리고 할례에 관한 이야기는 아브라함에 하나님이 약속하신 겁니다. 창세기17장12절에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시고는 아브라함이 아들을 팔일 만에 할례를 시켰습니다. 창세기21장4절에 그리고 레위기12장3절에 모세에게 명령하시고 그리고 나중에 신약에 와서 세례요한도 팔일 만에 할례를 받았습니다. 예수님도 팔일 만에 할례를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이게 유대인의 전통 중에 전통입니다. 유대인으로 개종한 자들은 나중에 유대인이 되었기 때문에 어른이 되어서 할례를 받았지만 팔일 만에 할례를 받는다는 것은 순종들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나는 순종 중에 순종이라는 겁니다. 참된 유대인이라는 겁니다.

우리 같으면 나는 모태신앙인이라고 말하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두 번째 이분이 말씀하시기를 유전적인 요소로써 나는 이스라엘 족속이요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나는 개종자가 아닙니다. 나는 이방인으로 개종해가지고 들어온 유대인이 아니고 나는 순종 중에 순종이라는 겁니다.

출생에 의해서 이스라엘사람이라는 겁니다. 아까는 종교적인 측면에서 할례적인 측면이지만 지금은 피로도 유대인이라는 겁니다. 이스라엘자손으로써 선택된 족속이고 하나님의 직접통치하에 있고 언약의 족속이고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의 연극배우역할을 하는 복음의 핵심을 전수받은 특수한 선택된 족속이라는 겁니다. 거기에 대한 자랑거리가 있습니다.

세 번째 유전적인 요소는 이분이 베냐민지파라는 겁니다. 열두지파 중에서 베냐민지파는 아주 조그만 지파입니다 그런데 상당히 존경을 받는 지파입니다 왜냐면 야곱의 가장 총애를 받았던 부인이름이 라헬입니다

라헬의 두 아들 요셉과 베냐민입니다 야곱의 열두 아들 중에 제일 막내아들인데다가 또 가장 사랑하는 처 막내아들입니다 그래서 특수하게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던 아들입니다 야곱의 열두 아들 중에서 베냐민만 약속의 땅 가나안 땅에서 태어난 사람입니다 창세기35장16절에서19절에 보면 이 베냐민 족속 중에서 이스라엘역사에 최초로 합법적인 왕이 탄생했습니다.

그분이 사울 왕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그분의 본래 이름이 사울이었습니다. 사울 왕을 자기가 닮았다 그래서 나중에 예루살렘성전과 그 지역영토도 베냐민족속에게 하나님께서 할애했습니다. 그러니까 베냐민족속 땅입니다

본래 유대 땅이 아닙니다. 유대는 바로 옆이고 지금의 예루살렘성전과 예루살렘 모리아 산 그 땅이 베냐민족속에게 할애했던 땅입니다. 그러니까 베냐민족속은 거기에 대한 프라이드가 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바벨론 포로이후에 베냐민족속들이 유대족속과 다시 복귀해가지고 예루살렘성전 짓는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핵심 파들입니다. 거기다가 베냐민족속은 이스라엘군대 안에서 장군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군대서 항상 높은 계급에 있는 분들은 베냐민지파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사사기5장14절이나 호세아서5장8절에 보면 베냐민아 네 뒤를 따르리라 이렇게 항상 말을 합니다.

베냐민족속이 그런 특수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역사 속에서도 민족해방지도자인 모르드개나 에스더 그분들도 다 베냐민지파들입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베냐민지파하면 힘이 있고 순수하고 충성심이 강한 그러한 지파다 이렇게 말을 합니다. 그러니까 사도바울은 이런 지파의 줄기를 따라서 나왔기 때문에 이분은 상당히 자존심이 강한 분입니다

그래서 이분이 그러는 겁니다. 내가 베냐민지파라는 겁니다.

그다음에 네 번째 요소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라는 겁니다.

히브리인가 또는 유대인 하면 같은 이야기지만 그 안에 내용상 다릅니다.

유대인하면 뭐냐면 대개 딴 나라에 가서 살기 때문에 디아스포라라 그럽니다. 그분들은 히브리어를 쓰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유대인이라고 그럽니다. 그런데 딴 나라에 가서 살면서도 부모나 위에서부터 전수받아서 디아스포라나 국내에서도 히브리말을 쓰는 사람들로 그러니까 모국어를 잊어버리지 않는 사람들을 히브리인이라고 특별히 말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히브리인들이 가지고 있는 자존심이 있습니다. 우리는 대대로 바깥에 나가서 살았지만 계속해서 우리는 때를 따라 예루살렘에 와서 교육받고 모국어를 우리는 쓴다는 겁니다. 사도바울은 그렇기 때문에 다소라는 이방에서 태어났지만 나는 히브리인이라는 겁니다. 그는 아직도 히브리어를 쓰고 있고 히브리부모 밑에 있고 그다음에 나는 때를 따라서 헬라문화에서 태어났지만 다소에서 태어났지만 히브리문화 속에 나는 젖어있다 왜냐면 가말리엘 밑에서 이분이 바리새인 중에 아주 유명한 바리새인입니다

가말리엘 밑에서 아주 정통유대율법을 배운 민족적 엘리트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라는 겁니다. 자기는 조금도 색깔이 변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겁니다. 이분이 지금 자랑하는 게 자발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라는 겁니다.

그것은 자기가 선택한 겁니다. 가말리엘이라는 사람이 자기선생님이 바리새인입니다 이 사람들은 유대율법에 열정적인 전수자들입니다 바리새라는 말은 그 당시에 굉장히 명예로운 칭호였습니다. 왜냐면 하나님이 주어진 율법의 규정의무를 잘 지키는 충실하고 진실한 사람들이 바리새인들입니다

그 집단들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주전2세기 전부터 생겨났습니다.

하시딤이라고 경건한 자들이라는 그러한 이름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들인데 그 당시에 이방세력들이 와서 정치적으로 이스라엘을 지배하려고 할 때 이분들은 종교적인 순수성을 가지고서 우리는 절대로 이방영향력을 안 받는다 그래서 분리주의자들로 아부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하게 지켰던 분들이 바리새인들입니다 이 사람들이 소위 계명이 몇 개가 있느냐면 250개가 있습니다. 그리고 하지 말라고 하는 금령이365개가 있습니다. 이것을 철저하게 지키는 자들인데 나중에 사도바울이 나는 율법에는 흠이 없다고 그랬습니다.

이 말은 이분이 250개의 계명과 365개의 금령을 다 지켰던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아주 외형에만 치우쳐서 외형으로 철저하게 율법을 지켰던 자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분들을 꾸짖었습니다. 외식 자들이라고 내용은 없고 외식 자들이라고 그다음에 두 번째 요소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했던 자라는 겁니다. 바리새인으로 하나님에 대한 열심과 바리새공통 체에 대한 열정 율법에 대한 열성이 지나치게 많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바리세인으로써 열심 율법에 대한 열성 그러니까 열열 한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교회를 핍박하는 겁니다. 우리와 다른 사람들을 핍박하는 겁니다. 그다음에 마지막으로 이분이 나는 율법에 흠이 없는 자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어려서부터 모든 계명 명령 금령을 다 지켰다는 겁니다.

다시 말하면 이분은 완전주의자였습니다. 완벽주의자였습니다.

양심에 가책이 전혀 없는 자였습니다. 왜냐면 다 지키니까 이분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이런 모든 면에서 이렇게 볼 때 엘리트였습니다.

그러니까 엘리트의식이 강했고 선별의식이 강했고 귀족의식이 강했고 완전주의자의식이 강했고 전형적인 엘리트유대인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육체의 자랑을 할만 했을 겁니다. 그런데 이분이 예수님을 만난 후에 완전히 이 모든 것들을 배설물로 여겼다 그랬습니다. 상대적가치기준이 변해버렸던 겁니다.

사도바울이 예수님을 안후에 내가 이렇게 가치기준이 변했다는 겁니다.

안다는 말을 제가 설명을 해드리겠습니다 이 말을 우리가 분명히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안다는 말은 영어로는 놀리지(knowledge)라 그럽니다.

그것을 헬라어로는 기노스코(ginosko)라 그럽니다. 헬라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안다와 히브리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안다는 개념이 달랐습니다.

헬라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안다는 소위 지적인 이해입니다 그래서 아카데믹이라는 말로 표현을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학교의 모든 시스템이나 시작이 헬라의 아카데믹에서 넘어온 겁니다. 헬라사람들은 아카데믹이라면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 또는 소크라테스, 이 사람들이 이때 사람들입니다.

예수님보다 200-300년 전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이 안다는 것은 그냥 머리로써 이해하는 겁니다. 그것을 지식이라고 그랬습니다. 머리로만 이해하는 겁니다. 그것을 안다는 겁니다. 그때 예수님은 아니다 히브리 적 다시 말하면 성경적으로 안다는 것은 모리로써 이해하는 그 정도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이 내 삶 속에 깊이 들어오는 겁니다. 들어와서 내 삶에 완전히 한 부분이 된 것을 그것을 안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을 욕했던 게 그것입니다 안다는 것은 머리로는 완전히 알고 있는데 그것이 삶 속에는 대입이 안 되는 겁니다. 히브리말로 유대말로 야다(yadah)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히브리말로 야다(yadah)가 헬라말로 번역이 될 때 기노스코(ginosko)로 번역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야다(yadah)라는 표현이 어디에 제일먼저 나오느냐면 창세기4장1절에 보면 나옵니다. 뭐냐면 아담이 그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그랬습니다. 이때 안다. 라는 의미가 정확하게 동침하다는 의미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동침했잖아요. 부부가 되었잖습니까?

그것을 기노스코(ginosko) 야다(yadah)라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예수님을 안다고 할 때 무슨 말일까요? 쉽게 말하면 예수님과 동침했다는 말입니다

성경에는 육과 혼과 영 이 세부분을 다 이야기하는 겁니다.

바울이 예수님과 육적으로 동침했다는 말은 무엇입니까? 이분이 항상 성령님과 같이 다녔습니다. 매일 육적으로 동거했습니다. 성령님과 매일 동거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안다는 겁니다. 혼적으로는 혼이라는 것은 인격과 마음입니다 영어로는 소올(soul)입니다 인격적으로 동침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한 마음이 된 겁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바울의 마음이고 바울의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인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마음이 사도바울의 마음 속으로 들어와 버린 겁니다. 동침한 겁니다. 그것을 영적으로 성령님이 사도바울 속에 들어와 계신 겁니다. 그래서 계신 것만이 아닙니다.

인격적으로 서로 나눔이 있었던 겁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안다고 표현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과 전인격적으로 관계를 맺었던 겁니다.

전인격적인관계 그래서 우리보고 그러는 겁니다. 너희들 나를 사랑하느냐 그럴 때 네 사랑합니다. 이 세 부분으로 동침하지 않으면 예수님을 아가페 적으로 조건 없이 사랑할 수 없습니다. 이 부분을 가지라는 겁니다.

지적으로 예수님을 이해하니까 머리로만 이해해가지고는 예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동침했다는 것은 사랑했다는 말입니다 사랑한다는 말은 전인격적으로 이야기하는 겁니다. 전인격적인부분에서 그러니까 그분이 온전히 내 속에 들어와 가지고 내 속에 완전히 지배하는 겁니다. 결혼했다는 것은 그래서 신랑신부이야기 할 때 예수님이 나의 신랑이다 나는 신부라는 이야기를 하잖아요. 그런 모든 측면에서 예수님을 안다는 것은 상당히 깊은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우리가 체험한다고 말하지만 찬송 속에서도 예수님을 알기 원합니다. 예수님을 알기 원합니다.

이것은 너무나 가벼운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을 육적으로도 매일매일 만나야 되고 또 혼과 마음 인격적으로도 예수님의 마음을 내가 매일 받아가지고 그분의 인격과 내 인격이 매일 대화를 해야 합니다. 서로가, 서로가 같이 그래서 예수가 내 안에 내가 예수 안에 이런 말을 우리가 쓰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마음이 서로 열람이 되어 있는 겁니다. 예수님의 관심과 내 관심이 하나가 되어 있는 겁니다. 예수님의 뜻과 내 뜻이 하나가 되는 겁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아는 겁니다. 예수님과 동침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기도는 매일 주님! 주님의 뜻이 내 뜻이 되게 항상 해주세요.

이렇게 기도하고 주님의 관심이 내 관심이 되게 해주세요. 그래서 이 비밀이 크도다. 하는 말로 사도바울이 에베소서에서 그랬습니다. 두 부부관계를 이야기하면서 이 비밀이 너무나 크도다. 이 속에 들어있는 영적비밀이 너무나 크다는 겁니다. 남편들아 부인을 사랑해라 부인아 남편을 존경하라 이러면서 부부간에 관계를 가지고 이 밀이 크다는 겁니다. 이 안에 이 비밀이 들어있다는 겁니다. 육신의 부부를 가만히 보세요. 육적으로는 동침할 수 있습니다. 마음으로 동침이 안 되는 부부가 너무나 많습니다. 결혼안한 사람은 무엇인지 모를 겁니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부지만 서로가 영적으로 신앙이 다릅니다. 비전이 다릅니다. 영성이 다릅니다. 그러니까 진정한 의미의 부부는 육과 혼과 영으로 하나가 되어야 되는데 이 모든 인간적인 부부관계 이것은 잠깐 세상에 살다가 없어지는 겁니다. 그렇잖아요. 그렇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별로 중요한 게 아닙니다. 그런데 이 비밀이 크다는 것은 주님과 나와의 관계에서 진정한 신랑과 신부의 관계에서 주님이 이 부부관계를 통해서 너희들 나와의 관계를 배우라는 겁니다. 그러면 제가 한 단계 올라가서 그러면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알 수 있을까요? 다시 말하면 어떤 사람이 예수님과 육과 혼과 영 부분으로 동침할 수 있을까요? 결론적인 말씀입니다

겸손한자라는 겁니다. 잠언3장34절에 그랬습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신다는 겁니다. 겸손해져야지만 내 마음의 그릇에 예수님의 마음을 담을 수가 있습니다. 겸손해져야지만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겸손해지라고 어떤 때는 핍박을 줍니다. 마음에 그릇을 예수님의 마음을 담게 만들어 라고 고집이 센 사람은 핍박을 줍니다. 아집이 센 사람들 교만한 자들을 연단을 시킵니다. 그래서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이 오도록 마음을 정돈시켜주는 일을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도 그것이 안 오는 사람은 할 수 없습니다.

첫째 제가 말씀하는 것은 겸손한 사람입니다 은혜를 깊이 체험한 자는 겸손한 자라는 겁니다. 이 말을 잘 들어주세요. 아주 대단히 중요한 성경말씀 속에 들어 있는 비밀입니다 그냥 우리는 은혜를 체험했다 그러면 아하! 은혜 받았구나. 은혜 받았구나. 그럽니다. 그런 은혜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은혜라는 것은 무료선물이라는 뜻입니다 그레이스(grace)라는 이름인데 프리 기프트(Free Gift)라는 말입니다. 주님 앞에 내가 무료선물을 깊이 체험한 자입니다 그걸 다른 말로 표현하면 겸손한 자는 어떤 사람이냐면 주님 내 마음의 그릇은 주님이 볼 때 정말로 비천한 것이라고 깨달은 사람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자심의 한계성을 깨닫는 사람입니다 육신의 자랑거리가 사도바울이 엄청나게 많았지만 이것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는 이것은 주님 앞에 아무 쓸모가 없다는 것을 고백하는 그것이 자신의 한계성입니다

나는 주님 앞에서 무기력한 사람이라는 것을 무능하다는 것을 그리고 주님 앞에서 성실한 것 같지만 나는 성실하지 못하다는 것을 불성실성을 고백하고 비윤리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고백하고 비도덕적인 사람이라는 걸 고백하고 비 의인이라는 것을 나는 주님 앞에서는 의인이 아닙니다.

나는 전적으로 타락했다는 것을 타락 성을 통감하는 자입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겸손한 자의 시작입니다 이 마음을 가진 사람은 다른 사람과 싸움을 할 수 있습니까? 내가 문제 있는데 왜 다른 사람을 가지고 이렇다 저렇다 말할 기력도 없습니다. 그렇게 되어 버리는 겁니다.

그리고 어떤 부족한 부분을 보면 저 사람이 내 모습이구나. 이렇게 보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율법으로 보는 눈이 안 되고 영의 눈으로써 사람을 보는 사람입니다 그게 겸손한 사람입니다 주님은 너희들을 그런 사람이 되라는 겁니다. 너희가 똑똑해야 네가 영적으로 뭘 알아야 그것 가지고 조금이라도 자랑을 하면 교만하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저 같은 사람들입니다

저 같은 사람들은 교만 끼가 더덕더덕 붙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그걸 깨닫게 하는 겁니다. 그래서 너 이놈아 모든 부분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놈이라는 걸 너는 깨달아야 된다. 그래서 겸손한 사람은 주님의 긍휼이 없이는 그분의 자비가 없이는 그분의 용서가 없이는 나는 하루도 살 수가 없다.

라고 매일 고백하는 사람 그래서 지금 내가 사는 것이 내가 아니고 내 안에 계시는 예수님 때문에 살고 있구나. 그분의 긍휼 때문에 그분의 은혜 때문에 살고 있다는 것을 매일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은혜를 매일 깊이 체험하는 이걸 잊지 마세요 이 마음이 없는 자들은 이 마음을 함부로 가지는 게 아닙니다. 시간을 요합니다. 이런 마음을 내가 어느 정도 맛을 알고 나면 그분이 말하는 걸 보면 아! 저분은 아직도 이걸 체험 못했구나.

그러니까 그런 사람들은 다투기를 좋아합니다. 불평이 있습니다.

남을 율법의 눈으로 보기 시작합니다. 각자가 율법의 눈으로 보면 비평할 게 엄청나게 많습니다. 그러니까 서로가 다투는 겁니다. 왜냐면 자기가 파랑안경을 쓰고 있으니까 세상이 다 파랗게 보이니까 파랑기준으로 사람을 다 보는 겁니다. 저쪽에는 또 그린 색깔의 안경을 쓰고 있으니까 그린 색깔로 사람을 다 보는 겁니다. 자기가 쓰고 있는 안경 색깔로 세상을 다 보는 겁니다. 주님의 은혜를 체험한 사람은 전천후안경입니다. 주님이 전천후안경을 가지고 계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마음을 이렇게 가지게 되면 그때부터는 아가페 사랑을 해라 그러면 안 할 수가 없습니다. 내가 지금 그분으로부터 아가페 사랑을 받고 있는데 내가 안 하면 못 견딥니다. 내가 주님에게 조건 없이 자비를 받고 있는데 내가 남에게 조건 없이 자비를 베풀어 주어야 됩니다. 그런데 그걸 경험하지 않으면 아가페 사랑을 해라 그러면 이게 짐이 되어버립니다. 용서해라 해도 안 됩니다. 자비를 베풀어라 안 됩니다.

우선 내가 경험해야 합니다. 내가 경험하려면 내가 먼저 겸손해져야 됩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 이것 달라 저것 달라 기도하지 마세요. 뭘 기도해야 딥니까? 주님 내가 겸손해지기를 주님 앞에 원합니다. 전혀 이런 부분에 되어 있지 않으면서 그냥 달라고 산 기도를 합니다. 그러면 주님이 볼 때는 너는 나와 열람되지 못했다 우리나라 교회가 지금 그런 스타일입니다

과거 30년 동안 한국교회가 그러니까 세상 사람들도 한국교회교인들을 존경하지 않습니다. 왜냐면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전혀 안 되어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더 무습니다. 독기가 많고 더 입이 사납고 마음도 사납고 왜 그렇습니까? 용서 못하고 남을 정죄하고 그것도 예수 이름으로 합니다. 그러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이 더 사람들에게 밥맛이 없는 사람들이 되어 버리는 겁니다. 성경을 끼고 할렐루야 아멘 하는데 하는 짓들을 보면 더 못나게 노는 겁니다. 더 밥맛없게 노는 겁니다. 더 독기가 많고 그러니까 세상 사람들이 예수 믿는 사람들 보면 싫어하잖아요. 특히 우리나라가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아는 지식이 어떤 사람들입니까? 예수님을 아는 지식을 가지려면 겸손해져야 된다는 겁니다. 겸손해달라고 기도하세요.

기도를 해서 주님의 은혜를 받아야 됩니다. 그런 사람이 되는 마음에 그릇이 그런 사람이 되도록 은혜를 받아야 됩니다. 다시 말하면 이게 자동적으로 되는 게 아닙니다. 주님의 은혜가 나에게 와서 그런 마음의 소유자가 되도록 해야 되는 겁니다. 그런 사람이 복 있는 사람입니다 20년30년40년을 신앙생활을 해도 이런 마음의 그릇이 되지 않으면 그 사람은 복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이것도 주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것이 내가 이렇게 깨닫고 이런 사람으로 되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구나. 이것도 내 실력으로 되는 게 아닙니다. 그러니까 내 실력으로 된 게 아닌데 내가 뻐길 수 있습니까?

주여! 내 힘으로 나를 헤치는 자 나를 질투 나게 하는 자 나를 괴롭히는 자 내가 누구를 보기만 해도 괜히 미운 사람 그런 사람을 내 힘으로는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주님 용납할 수가 없습니다. 관용을 베풀어라 그러는데 관용을 베풀 수가 없습니다. 인정할 수도 없고 그런 모습을 보면 참을 수도 없고 나는 그런 사람입니다 이것을 고백을 해야 됩니다.

주여! 나는 정말 전적으로 이런 부분에서 무능한 자입니다. 주여! 내 힘으로는 매일매일 엄습해오는 나의 나약함을 이겨낼 수 없는 자입니다 이걸 고백하는 겁니다. 내 힘으로는 안 됩니다 이것을 철저하게 고백하는 겁니다.

이런 사람이 예수님을 아는 사람입니다 이런 것을 주님과 매일 고백하면 이런 자는 투기하지도 않습니다. 투기할 결렬도 없습니다. 자기문제해결이 급한데 남과 질투하거나 분쟁하거나 다투거나 원망 시비할 결렬이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예수님과 이렇게 동침한다. 예수님을 안다 이런 말을 다른 말로 표현한 것이 예수님을 닮아간다는 말로 표현을 했습니다. 예수님을 닮아간다

이렇게 닮아가려면 이렇게 기도와 고백을 하면서 매일 주님의 말씀을 먹어야 되지 않습니까? 영의 양식을 먹고 영의 양식을 안 먹으면 안 됩니다

지금 설교말씀도 영의 양식을 먹는 겁니다. 먹으면서 성령님이 역사하심을 매일 의지하며 기대하며 성령님이 24시간 나와 함께 함을 의지하며 기대하며 이렇게 사는 사람이 예수님을 닮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사람입니다

이러 때 그러니까 말씀을 매일 잡수셔야 합니다. 성령님의 역동하심과 능력주심을 매일 의지하는 그래서 삶에 적용하는 사람 제가 지금 말씀드리는 것은 단회 적이 아닙니다. 이것은 연속성이 있어야 됩니다. 계속성이 있고 발전적이고 점진적이고 어느 한 단계에 와서는 작년 한해는 내가 이런 삶을 살았는데 그래서 이 만큼 발전 한 겁니다. 금년 한해는 주님 내 그릇이 조금 더 주님의 마음을 담을 수 있는 그릇으로 조금 더 변화시켜주십시오.

그래서 이만큼 발전한 겁니다. 내년에는 조금 더 발전하고 더 발전하고 이래서 내 그릇사이즈만큼 주님의 마음이 와서 앉습니다. 내 그릇의 모양만큼 주님이 그기에 와서 딱 그분의 모양으로 만듭니다. 내 속에 미움이 있으면 예수님이 와서 앉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매일매일 내 그릇이 주님을 만날 때가 되면 정말 그분의 크신 그 마음 크기는 높이 깊이 넓이 길이 이 크신 예수님의 엄청난 마음이 내 마음도 커가지고 그 마음이 내속에 와서 앉게 그렇게 되면 이 세상에 미운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마음이 어디에 있습니까? 너는 네 교회성장만을 위해서 했지 그것은 조그만 그릇입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어디에 있습니까? 전 세계 사람들을 한 마음으로 끼고서 한 사람 한사람을 다 주님 앞에 이끌고 오려고 하는 그런 마음이 주님의 마음입니다. 우리가 지금 이방인선교하는 게 주님의 마음에 약간 들기 때문에 하는 겁니다. 그 마음과 열람이 되었기 때문에 내 민족까지만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내 교단까지만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내 교회에서 내 교단까지만 가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것은 사람이 만들어 놓은 하나의 장벽입니다

그렇게 보면 이런 넓은 주님의 마음을 가지다가 내 교회 내 교단 어떤 사람은 그 밑으로 내 집만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제가 볼 때 오! 주여 답답 지사입니다 주님 불쌍히 여겨 주세요. 저 사람들 그릇을 크게 해주세요.

오늘날 전 세계복음화를 위해서는 이제는 개교회주의가 없어져야 되고 개교단주의도 없어져야 되고 개 민족주의도 없어져야 되고 이제는 완전히 우주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주님의 마음으로 예수그리스도를 전해야 됩니다.

결론입니다 이런 마음을 가지면 영성이 깊어질 것입니다.

영성이 깊어진다는 것은 영의 눈의 시야가 커진다는 소리인데 이것은 길이도 길어지고 높이 넓이 깊이가 달라진다는 겁니다. 영성이 깊다는 것은 한쪽으로 깊이만 있어도 안 됩니다 영성이 그릇이 커져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이것을 깨달은 겁니다. 이것을 이분이 깨달은 겁니다.

그러니까 육신의 자랑거리가 배설물같이 보이는 겁니다. 이것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구나. 그런데 하나님은 육신의 자랑거리들 학벌 인맥 건강 미모 재산 위치 지연 학연 이런 모든 것을 하나님이 없애는 게 아닙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받는 그릇을 만드는 준비역할을 하는 하나의 도구들입니다

공부 많이 시키는 것도 그런 겁니다. 미모가 괜찮으면 그대로 하나님이 그걸 가지고 쓰십니다. 못나면 못난 데로 쓰시고 그기에 맞게끔 쓰시는 겁니다.

그렇지만 그 자체로 쓰시지만 그 안에 들어있는 것들을 우리가 생각할 때 이걸 가지고 자랑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사도바울은 그것을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배설물이라 그랬습니다. 가치기준의 변화 그것을 요즘 와서는 일반 사회학에서도 패러다임 시프트(paradigm shift)라는 말로 씁니다.

의식의 전환이라는 겁니다. 시대에 따라서 의식이 전환되어야 합니다.

그기에 맞는 그릇으로 시대가 요구하는 그릇으로 그래서 오늘날 사회학에나 정치학에서는 의식을 전환하자 의식을 전환하자 계속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의식전환이 필요로 합니다. 그래서 복 있는 자는 겸손한 자라는 겁니다. 겸손한 자의 표상은 투기하지 않고 분쟁하지 않고 다투지 않고 원망 시비하지 않고 항상 나보다 남을 더 높이 여길 줄 아는 이게 왜 그럴까요? 겸손해지면 그런 마음이 들어오는 겁니다. 주님! 저 사람이 나보다 낫네요? 겉보기는 내가 나아보이지만 그런 마음이 드는 겁니다.

깊이 자기를 들여다 볼 때 저 사람이 나보다 낫네요? 우리교회가 1주년을 맞이하여 교인이 더 많이 늘어나고 교회가 더 성장하고 이것은 겉으로 자랑하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보통 2주년3주년 지나면서 교인이 얼마나 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하나님 이런 걸 가지고 우리가 자꾸 자랑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1주년의 자랑거리는 앞으로 자랑해야 될 것들은 내가 점점 더 예수님의 그릇으로 만들어져서 예수를 아는 지식이 점점 더 증가되고 커져서 이 세상에 자랑거리들은 상대적으로 배설물처럼 생각하는 그러한 복된 자들 사도바울 같은 그런 사람들이 이번 1주기를 통해서 되기를 바라며 내년2주기 때는 새 건물에서 다 함께 이런 부분에서 더 감사드리며 주여 감사합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그릇이 조금이라도 되었군요. 우리 모두가 그런 사람들이 된 것을 서로가 느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드리겠습니다.

여러분들이 오늘 본문을 깊이 묵상하시길 바랍니다.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니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을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라 내가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히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험이 없는 자로다 그러나 무엇이던지 내게 유익하다는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주 그리스도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이 임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라.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 난 의라 하나님아버지 이 시간 사도바울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사도바울이 삶 속에서 경험했던 이 사건들이 여기 앉아 있는 우리 모두의 사건들이 되며 우리의 간증들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내 안에 계시는 예수그리스도시여 나의 죽음도 유익함이라는 상대적인 가치를 깨달을 때 나의 죽음도 유익하다는 고백이 나올 수 있는 담대하고 복된 백성들 되게 하시옵소서. 사도바울처럼 예수그리스도는 나의 생명이시고 나의 왕이시고 내 노래시며 내 생명 내 기쁨 나의 힘 나의 거룩함 나의 평화 나의 주가 되시는 이러한 고백이 나올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 안에서 매일매일 나의 나약성을 깨닫고 나의 불완전성을 깨닫고 나의 불성실성을 깨닫고 주님 앞에 또 사람들 앞에 매일 겸손해지는 복 된 자가 되게 하시옵소서. 그래서 진정으로 육적으로 혼적으로 영적으로 예수님을 나와 함께 모시고 나의 동역 자가 되고 나의 생명이 되어서 예수님을 안다고 하는 경험하는 지식이 날로, 날로 커질 수 있도록 그러므로 이제는 예수의 마음으로 세계를 안는 마음의 소유자가 되어 주님 앞에 열람되는 귀한 백성 되게 하시옵소서. 지금 이 시간은 예수그리스도의 무한하신 은혜와 하나님아버지의 극진하신 사랑하심과 성령님의 순종케 하심이 주님의 말씀 속에서 다시 한 번 그리스도를 알기를 원하는 주님의 백성들 위에 지금부터 영원히 함께 하시기를 축원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