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서

14강. 빌립보서3장10절-16절, 부르심의 상을 위하여

변명섭 2022. 3. 6. 07:30

빌립보서 14강. 부르심의 상을 위하여(빌3:10-16)

오늘말씀은 빌립보서3장10절16절 말씀입니다. 같이 봉독 하겠습니다.

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11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15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어떤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16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 아멘.

지난시간에 제가 무슨 말을 했느냐면 예수를 아는 지식이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지난시간에 바울이 말하기를 자기가 육체에 신뢰할만한 것이 누구보다도 많이 가지고 있다고 그랬습니다. 자기는 모든 여건을 갖추었던 엘리트였다 그런데 예수를 아는 지식을 얻었을 때는 이들을 다 배설물로 여기는 상대적 가치기준을 가졌던 사람이었다고 바울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면 예수를 안다는 것이 무엇이냐면 안다는 것은 기노스코(ginosko)라는 말로 그것을 구약에서는 야다(yadah)라는 말로 제가 표현을 했다고 했습니다. 야다(yadah)라고 하는 것은 아담이 자기부인 하와를 안다는 말에서 나온 말인데 다시 말하면 동침하다 이런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를 안다는 것은 그냥 머리로만 안다는 것이 아니고 육과 혼과 영의 세 부분으로 다 아는데 이것은 전인적인 동체개념입니다 그러니까 완전히 전인적인 의미입니다 예를 들면 육적으로 예수님을 안다는 것은 함께 예수님을 모시고 내속에 있고 내안에 거하시고 그다음에 파라클레토스(parakletos)로 보혜사성령님으로 나와 함께 동거하는 겁니다. 같이 걸어 다니는 겁니다.

동행 이럴 때 예수님을 안다는 표현을 씁니다. 다시 더 깊이 들어가서 혼의 레벨이나 영의 레벨로 예수님을 안다할 때는 이분의 인격이 내속에 들어와 계신 겁니다. 그분의 성품이 그래서 계속해서 빌립보에서는 예수를 닮아라. 이런 말을 쓰잖아요. 예수의 마음을 품어라 이런 말을 계속해서 합니다.

그러니까 다시 말하면 예수의 마음을 품었다는 것은 더 구체적으로 2장에서 보셨지만 겸손을 품어라 이런 말로 말씀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겸손이다

그래놓고 구체적으로 예수님의 마음은 마음을 같이하는 마음 뜻을 같이 하는 마음 이런 공동체 안에서 항상 피스메이커입니다 화평케 하는 사람입니다 이게 예수님의 마음이라는 겁니다. 다른 사람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마음 그래서 항상 제가 부족합니다. 이런 마음입니다 이런 겸손한 마음을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셨다는 것은 그는 본래 하나님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하지 않으시고 하는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을 안다는 것은 영과 혼의 의미에서 뭐냐면 그리스도의 겸손한 마음을 내속에 가지고 그냥 매일매일 예수님의 마음으로 사는 사람 그 사람이 예수님을 아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예수님과 동침한 사람이다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의 마음과 내 마음이 열람된다. 이런 말을 쓰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열람이 되는 겁니다. 우리가 한 마음이 되는 겁니다.

이런 마음을 가지면 결과적으로 어떻게 되느냐면 예수님의 관심이 내 관심이 되고 내 관심이 예수님의 관심으로 되고 내 뜻이 예수님의 뜻으로 열람되어 버리고 그렇게 되어 버리니까 이제는 주님이 내 마음에 없으면 허전하고 주님과 매일매일 대화를 하지 아니하면 어딘가 허전하고 그래서 우리는 그분을 나의 주인이라 그러는 겁니다. 그러니까 나의 주님이기 때문에 나를 컨트롤하시는 분이고 나의 모든 삶을 주관하시는 분이고 내 생각을 그분이 완전히 소유하고 계신 분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과 상의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항상 그분과 대화하면 그분에게 모든 것을 물어보면 이것을 예수님을 사랑한다. 이렇게 표현을 했습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런 관계를 가지듯이 그래서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는 아가페사랑이라는 말은 이 정도까지 들어갔을 때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알아야지만 주님을 사랑하는데 우리는 보통 안다는 것은 지적으로만 이야기하잖습니까? 그런 게 아니잖아요. 그것은 하나의 유치원레벨입니다 지적으로 예수님을 안다는 것은 그래서 제가 지난시간에 그랬습니다. 이런 부분은 대단히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에 그냥 지적으로만 이해하시면안 되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과 동침하는 사람입니까?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마음과 열람되는 사람인가? 구체적으로 지난시간에 그랬습니다. 우선 내가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내 마음의 그릇을 정돈을 시켜주어야 되는 겁니다. 예수님을 닮으려면 그 그릇을 닮으려면 그래서 하나님은 어떤 분들은 고집이 센 분은 그런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기가 쉽지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성품이 괜찮은 사람은 근방 그 마음을 닮을 수가 있습니다. 그 비밀만 깨달으면 그래서 하나님은 연단을 허락하십니다. 그래서 마음이 조금 부드러워지는 겁니다. 시련을 허락하셔가지고 자아를 깨뜨리게 만들어 놓습니다. 그러면 겸손한 마음으로 준비가 됩니다.

사도바울도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해서 하나님이 얼마나 훈련을 시켰습니까?

모세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 서있는 저도 마찬가지고 우리 모두가 다 그래서 연단을 받을 때는 기뻐하라 그랬습니다. 왜냐면 예수님을 닮는 사람이 되는 준비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연단을 다 받은 다음에 연단자체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그릇이 이제는 예수그리스도의 마음을 닮을 수 있게 되었을 때는 어떤 사람이 되느냐면 아주겸손한 사람이 됩니다.

이렇게 겸손한 사람으로 만드시려고 연단을 시키시는 겁니다.

그래서 겸손이라는 말이 뭐냐면 주여 나는 할 수 없습니다. 나의 한계성을 철저하게 고백하게 하고 무기력성 무능 성 나는 성실한 사람도 아닙니다.

나는 윤리성도 없는 사람입니다 나는 비도덕한 사람입니다 철저하게 자신을 주님 앞에서 주님의 연단 앞에 비추었을 때 자기는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라는 것을 철저하게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을 우리가 뭐냐면 은혜를 체험한 자라는 겁니다. 은혜를 체험한 자 자신의 능력을 의지하지 않고 자기가 하나님 없이도 홀로 설려고 하는 사람을 교만한 자다 그렇게 말하잖아요.

그래서 이것을 철저하게 느낄 때 아하! 나는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을 매일매일 고백하는 자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과 동침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내가 사는 것이 내가 아니요 내안에 계신 예수님이 살고 있기 때문에 내가 지금 살고 있다 이것을 우리가 매일매일 고백하는 겁니다.

이 고백을 받은 자들은 이 고백을 하는 자들은 이제는 예수님의 마음이 오니까 내 주위의 사람들을 이렇게 보면 나를 헤치는 자를 봐도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이 옵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있기 때문에 나를 괴롭히는 자들을 보면 관용할 수 있고 참을 수 있고 그리고 영적인 눈으로 들여다보면 그분에게 영광이 비쳐 나옵니다. 그래서 이 단계까지 가야지만 우리가 용서도 할 수 있고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겁니다. 제 말씀 이해되십니까?

빌립보교회는 아직 이 단계에 있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사도바울이 말씀하시는 겁니다. 왜 너희들은 자꾸 투기하느냐 분쟁하느냐 다투느냐 원망과 시비가 저렇게 많으냐. 왜 그렇습니까? 아직 이 단계에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에 그러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면 영성이 날로, 날로 깊어지니까 영의 눈이 더 밝아집니다. 지난시간에도 말씀드렸지만 그냥 이렇게 깊어지는 것만 아닙니다. 이제는 넓어지는 겁니다. 그리고는 높아지는 겁니다.

그다음에 길어지는 겁니다. 그릇이 아주 크지는 겁니다. 그러니까 저쪽 세계가 구체적으로 보이기 시작하고 아하! 이 세상은 일시적으로 잠깐 나그네의 삶과 같은 세계구나라는 것이 보이면서 저 세계를 한눈으로 보니까 그다음부터 가치기준이 달라지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자랑했던 모든 것들은 배설물같이 보이며 이 세상에서 알고 있었던 모든 것들은 초등학문처럼 보이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눈의 각도가 달라지기 시작하는 겁니다. 사도바울은 오늘 계속해서 말씀하시는 겁니다. 이렇게 영의 눈을 떠서 보니까 저 멀리 영의 세계가 보이는 겁니다. 그러니까 세상을 봐도 배설물같이 보이기 시작하는 겁니다. 왜 배설물같이 보일까요? 이분은 눈을 그렇게 떴기 때문에 그러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분이 죽어서 저 세상에 가서 받을 엄청난 가치 그것을 여기서는 부름의 상이라는 말로 표현을 했습니다.

이것을 비교해보니까 이 세상의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겁니다.

엄청나게 가치 있는 것을 그분이 깨달은 겁니다. 구지 우리가 비교한다면 이 세상에서 가장 비싸고 보배스러운 것들을 우리가 보고 있는 이생의 자랑들입니다 돈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건강한 사람들 교육이나 기타 등등 모든 이런 것들을 볼 때 배설물로 보인다고 말씀하시고는 어떤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부름의 상과 바꾸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을 깨달은 사람은 그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우리의 생명입니다 육신의 생명입니다 육신의 생명도 하잘 것 없이 생각하는 겁니다.

이렇게 하는 사람을 순교자들이라 그럽니다. 여기까지 가는 겁니다.

주기철 목사님 같은 분도 이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그냥 배설물같이 생명을 던져버린 겁니다. 우리가 다 그렇게 되면 좋겠지만 그기까지 간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니까 주님이 저에게 하늘의 비밀을 더 구체적으로 보여주셔서 제 생명까지도 그냥 마다할 수 있는 그러한 믿음의 소유자 복된 자가 되었으면 하는 것이 우리 모두의 소원입니다 10절을 잠깐 보세요.

어떤 사람이 육체의 자랑을 배설물로 여겼냐면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씀하시는 겁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한국말로는 이렇게 되어 있는데 알고자 하는 말이 예수그리스도를 알고 부활의 권능을 알고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 이 세 조건입니다

이전까지는 무엇을 알았냐면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의 성품을 경험하고 한 단계를 올라가서 그다음에 부활의 권능을 알고 다시 말하면 예수그리스도의 성령님의 능력을 체험한다는 것은 변화의 능력을 내 삶속에서 체험해야 합니다. 더 구체적으로 그다음에 우리에게 주는 것이 고난을 알게 합니다. 고난을 깨닫게 합니다. 고난을 경험하게 합니다. 고난을 체험하게 합니다. 이 부분을 예수님의 고난과 비교를 합니다. 나의 자아를 깨는 방법이 예수를 알고 부활의 권능을 알아서 매일성령님의 도움으로 내가 변화의 체험을 받고 그다음에 고난에 까지 참여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고난을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겁니다. 나의 자아를 깨기 위해서 그러면 구체적으로 예수님의 고난이 뭐냐면 예수님은 육적으로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이게 대단히 중요한 개념입니다. 나를 살리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도 고난 받는 게 왜 고난을 받느냐면 나를 통해서 내 이웃이 살아나기 위해서 이게 대단히 중요한 개념입니다 예수님은 만민이 하나님의 자녀들이 살아나기 위해서 이분이 성육신하여서 고난을 자초했던 겁니다. 그러니까 목표가 뚜렷했습니다.

똑같이 내가 그냥 육의 고난을 받는다. 다시 말해서 주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 몸도 피곤하고 목마름도 있고 베고픔도 있고 예수님이 그것을 다 경험했습니다. 십자가의 아픔도 있고 그럴 때마다 주여 저도 주님을 위해서 이렇게 고난을 받는데 육의 고난을 받을 때마다 내가 고난 받는 것이 남에게 이웃에게 유익이 되게 하십시오. 이렇게 우리가 기도해야 되는 겁니다.

내가 유익이 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이것이 내 이웃이 자라나는데 도움이 되게 하세요. 이게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사람입니다

똑같이 혼의 고난을 주님이 받으셨습니다. 영과 혼의 고난을 특히 뭐냐면 주님께서 성육신하셔서 사람들에게 모욕을 당하셨습니다. 인격의 자존심이 아주 땅바닥으로 떨어져 버렸습니다. 십자가사건 전후로 아주 모욕을 당하셨습니다. 신랄하게 당하셨습니다. 그러면서도 조용히 계셨잖아요.

주님의 모습을 닮아가는 사람은 이 과정을 겪어야 합니다. 인격의 모욕을 당하셔야 됩니다. 그런데 이것은 내가 잘못해서가 아닙니다. 내가 잘못하지 않았는데도 그런 모욕이나 신랄하게 내 자존심을 건드리는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마다 누굴 생각해야 됩니까? 주님을 생각해야 되는 겁니다.

싸움하면 안 되는 겁니다. 그럴 때마다 주여! 제가 주님의 마음을 닮아가기 위해서 이런 걸 나에게 주시는군요. 저분들 불쌍히 여겨주세요.

이런 마음을 가져야 되는 겁니다. 주님은 인간으로 오셔가지고 영적고난도 당하셨습니다. 하나님이신데 마귀가 와서 세 번씩이나 유혹을 했습니다.

시험을 했습니다. 물질적 시험도 하셨고 명예 적 시험도 하셨고 권력의 유혹을 당하셨습니다. 마태복음4장에 보면 이런 것도 우리도 영적으로 이런 것을 주님처럼 시험을 당해야 됩니다. 목사들은 특히 물질의 유혹이나 권력의 유혹이나 명예에 강한 유혹이 옵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것을 우리가 이겨나가면서 예수님을 본받는 겁니다. 이렇게 해서 그릇을 크게 하는 이런 과정입니다 이렇게 그릇을 크게 하면서 크게 하면서 예수님의 마음을 닮아가는 것이 지금 여기에 말씀하시는 이 말씀입니다 그런데 11절에 보면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런 고난을 받으면서 부활이란 말을 쓰셨는데 부활이라는 말은 성경자체를 읽어보면 뭐냐면 부활의 상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런 고난 후에 뭐가 오느냐면 부름의 상을 받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부활이라는 말을 사도바울은 부름의 상으로 나중에 바꾸어 버렸습니다. 부름의 상을 받는 그러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우리는 이 세 단계를 격어야 된다는 겁니다. 우선 이렇게만 아시고 계속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러면 이 부름의 상을 위해서 우리들은 어떤 태도를 가져야 되느냐면 사도바울은 이것을 분명히 우리에게 보여주시고 예수님도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가 이 아픔 속에서 자존심이 깎이고 이게 훈련받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의 모습으로 그러한 그릇을 가진 사람으로 변하는데 목적이 뭐냐면 부름의 상을 받기 위해서 우리는 이것을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부름의 상을 향해 우리는 어떤 태도를 가져야 되느냐 입니다. 사도바울은 이것을 우리에게 분명히 가르쳐 주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부름의 상을 위해서 달려가는 사람들입니다 첫째 뭐냐면 목표지향적인 태도를 취했습니다. 푯대를 향해서 그리스도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푯대가 분명하였습니다. 사도바울은 목표 없이 계획 없이 막연히 주님을 섬기는 자가 아니었습니다.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목표지향적인 사람이기 때문에 이분은 정확하게 그 목표를 향해서 하나하나 달려갔습니다.

두 번째는 이분은 어떤 사람이냐면 겸손한 태도를 가지고서 이 목표를 향해서 달려갔습니다. 이분이 이랬습니다. 12절에 자신이 이미 이 상황을 얻었다고 자만하지 않았습니다. 또 완전히 자기가 이 상황을 내가 얻었다 받았다고 그러지 않고 이 상황을 향해서 계속해서 달려간다. 겸손한 마음을 얻었다고 생각하면 나태해집니다. 도중하차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이것을 우리에게 어떻게 설명하였냐면 우리 모두는 마라톤경주자라 그랬습니다.

이 개념을 오늘 잘 이해해주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모두 이 목표를 향해서 달려가는 마라톤 경주자들입니다 그러면 모든 그리스도인이 다 마라톤선수냐 아닙니다. 그래서 이 부분을 제가 분명히 말씀드리겠는데 구원과 상급은 다릅니다. 구원은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은혜라 그럽니다. 상급은 우리의 자유의지를 발동해서 노력해야지만 됩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은혜도 포함되어 있지만 그럴 때 받는 겁니다. 달음질한다는 것은 모든 기독교인들은 마라톤선수가 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렇지만 출발점에 서서 달리는 사람과 안 달리는 사람과의 차이점입니다 그런데 이 상급은 달리다가 어느 정도 어느 기간까지 갔다가 상급을 이만큼 받았는데 그 상급이 캔슬될 수도 있습니다.

무효화될 수도 있습니다. 안 그러면 온전히 없어지기도 하고 안 그러면 조금씩 소멸되기도 합니다. 구원은 특별한 예를 빼놓고는 무효 되지가 않습니다.

거기에도 예외조건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상급은 끝없이, 끝없이 달려가야 됩니다. 계속해서 땀을 흘려야 됩니다. 안 그러면 이 상급은 무효 되거나 또는 일부가 소멸됩니다. 상급이라는 말은 여러 말로 표현을 했습니다.

면류관이라는 말로도 표현을 했습니다. 또는 우리가 영광 받는다는 말로 영광 체라는 말로도 표현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무효도 될 수 있다는 겁니다. 일부가 상실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항상 말하기를 내 달음질도 헛되이 되지 아니하고 이분이 지금 달리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이분들에게 빌립보서2장16절에 보면 그랬습니다. 내가 달리는 달음질이 헛되이 되지 아니하고 왜냐면 빌립보사람들이 사도바울을 통해서 복음을 받고 지금 훈련을 받고 있는데 그분들의 열매 맺는 삶을 살지 못하면 사도바울이 너희들이 내 면류관인데 너희들이 열매를 맺지 못하면 내 달음질이 잘못하면 헛되이 될 가능성이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제자훈련은 잘 시켜야 된다는 겁니다. 저도 이렇게 여러분들에게 부탁드리는 것은 우리 모두가 다 열매를 많이 맺어야 여러분들 때문에 저도 상급을 받아야 되잖아요.

그러니까 어떤 사람을 만나서 어떻게 같이 동역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숫자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상급은 이렇게 표현을 했습니다.

상급에 대한 이야기를 자세히 할 테니 잘 들어주시길 바랍니다.

소아시아에 일곱 교회가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일곱 교회 중에서 상급을 받고 칭찬받는 교회가 빌라델비아 교회를 이야기했습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조그만 교회입니다 그러면서 핍박을 받았던 교회입니다 그래서 거기다가 성령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에게 속히 말하노니 내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라. 이게 상급입니다 면류관입니다 아무나 내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왜냐면 잘 나가고 있지만 면류관이 빼앗길 수 있는 그러한 기회도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면류관을 굳게 잡고 있으라는 겁니다.

마라톤선수들은 사도바울은 그 비밀을 알고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어떤 사람이냐면 세 번째로 이분은 중단 없는 노력형의 사람이었습니다.

아까 두 번째는 겸손한 사람이라고 그랬습니다. 세 번째는 쉼 없는 노력 형 사람입니다 집착이 강한 사람입니다 부름의 상의 목표를 보고는 그래서 한국말로 뭐라고 그랬냐면 내가 그것을 잡으려고 쫓아가노라 이렇게 말했습니다. 한국말로 쫓아가노라고 썼는데 이것이 영어로는 아엠 프레스 온(I'am Press on)이라 그랬습니다. 프레스(Press)라는 말이 누른다는 말입니다

거기다가 온(on)이라는 전치사를 붙여놓았습니다. 프레스 온(Press on)이게 원어와 똑같은 의미입니다 프레스(Press)라는 말이 무엇입니까?

내가 환경이 어려워서 포기하는 마음도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자기 자신을 프레스(Press)하는 겁니다. 자신을 이기려고 노력하는 겁니다.

환경을 극복하는 겁니다. 상급을 놓치지 않으려고 그러니까 프레스(Press)하는 겁니다. 노력이 필요로 합니다. 결단이 필요로 합니다. 자기를 쳐서 복종시키는 이것이 필요로 하는 겁니다. 사도바울은 그냥 쉽게 생각하는 게 아닙니다. 마라톤선수가 땀을 흘리면 달리는 것처럼 그런데 거기다가 온(on)이라는 전치사를 붙였습니다. 그게 뭔지 아세요. 프레스 온(Press on)하는 게 무엇입니까? 계속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을 계속해서 앞을 보면서 달려가는 겁니다. 무엇을 보면서입니까? 부름의 상을 향해서 계속해서 사도바울은 지금 감옥에 앉아있는 겁니다. 이분이 가지고 있는 부름의 상을 위해 달려가는 목적이 뭐냐면 자기가 출옥해가지고 다시 예루살렘에 가서 가만히 안주하려고 하는 게 아닙니다. 출옥해서 어디로 가르고 그러느냐면 스페인까지 가려고 그러는 겁니다. 스페인까지 너희들 나를 잡아먹어라 이놈들아 나는 간다는 겁니다. 왜냐면 하나님이 보여주신 비전이 있습니다.

구라파를 복음화를 시키기 위한 하나님이 주신 이방을 향한 복음의비전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엠 프레스 온(I'am Press on) 내 마라톤경주의 종착역은 스페인이라는 겁니다. 우리들의 마라톤경기의 종착역은 어디입니까?

우리는 아시아전역입니다 그다음에 모슬렘입니다 나중에 이스라엘까지 가는 겁니다. 지금 그렇게 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부분적으로 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총체적으로 나중에 이스라엘까지 가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도 프레스 온(Press on)입니다 아멘. 아시아에 모든 나라를 다 커버하도록 하나님이 이미 비전을 주셨습니다. 지난시간에도 캄보디아에서 선교하시는 장로교 합동 측의 인도차이나 책임자선교사님이 우리교회에 찾아 왔습니다. 미얀마와 라오스와 캄보디아와 태국을 책임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찾아오셔서 목사님 자기가 우리 같은 사람을 기다렸는데 이야기 듣고 찾아왔는데 우리와 동역하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캄보디아에 우리 안디옥신학교를 열어주십시오. 그분이 속해 있는 총회신학교에서는 이걸 못한다는 겁니다. 자기는 그 교단사람이지만 교단을 가지고 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10년 전에 하나님이 나에게 캄보디아에 비전을 주시고 캄보디아에 초창기에 드나들면서 그기에 하나님의 종들을 지도자들을 교제하고 그러다가 제가 안 들어갔는데 언젠가는 주님이 캄보디아에 다시 가서 그기에 지도자들을 만나게끔 했는데 이 사람이 찾아온 겁니다. 이분이 아는 사람들을 제가 다 아는 사람들이고 미국에서 제가 캄보디아사람들을 훈련시킬 때 그 캄보디아사람들이 지금 캄보디아에 주 멤버들입니다. 제자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머지않아 캄보디아에 우리 안디옥신학교가 또 생길 겁니다.

이분이 당장 그렇게 하자는 겁니다. 그런데 제가 더기도하고 다음 주에 다시 오세요 그랬습니다. 그분이 세 번째 오는 겁니다. 제가 약속을 안 했습니다. 더기도하고 나중에 보자 하였습니다. 오늘 아침에 이메일 열어보니까

인도에 우리 신학교 학생들이 각자가 나가서 위성신학교를 만드는 겁니다.

인도에 우리 안디옥신학교에 한사람, 한사람이 목사님이기 때문에 나가서 20개의 신학교를 또 만들어 놓는 겁니다. 이메일에 지금 20명의 신학교를 위성신학교를 훈련시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가르쳐준 것을 고스란히 가르치고 있는데 지금 성령님이 엄청나게 역사하고 있습니다.

그기에 우리 신학생들이 약200명가량 있는데 한 사람이 20-30개위 위성신학교를 가지면 숫자가 얼마입니까? 생각을 해보세요. 또 며칠 전에는 네팔에서 이메일이 날라 왔습니다. 네 번째로 사도바울은 어떤 사람이냐면 미래지향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이분은 과저지향적인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이분이 13절에 그랬습니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는 사람입니다 이분이 엄청난 죄의식이 있고 아픔이 있습니다.

고린도후서11장23절과27절에 이분이 자기 아픔을 쫘악 설명한 게 있습니다.

내가 태장을 39번씩이나 맞고 감옥에도 자기 집처럼 드나들고 죽음의 경지에도 들어가고 그의 죽었다가 살아나는 아픔들 모욕을 당하고 이런 걸 쫘악 말했습니다. 이분은 또 그것뿐입니까? 스데반을 순교케 했던 장본인입니다

그러니까 거기에 대한 죄의식이 있습니다. 과거를 들여다보면 그것뿐입니까?

열심 때문에 1세기의 그리스도인들을 많이 핍박했던 장본인입니다

그러니까 이분은 거기에 대한 죄의식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주님께서는 그 죄의식을 다 씻어버렸습니다. 그래서 과거를 생각하지 않게 과거에 집착해버리면 앞으로 달려가지 못하잖아요. 지금 경주하는 자입니다 경주하는 자가 10m뒤에서 자기가 한번 넘어져서 무릎을 다쳤는데 그것 때문에 마음이 위축되어가지고 앞을 달려가지 못하면 그것 때문에 신경 쓰여 가지고 그러면 됩니까? 바울은 아니다 과거를 나는 뒤를 보지 않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 충만한 사람은 과거를 잘 잃어버리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을 용서하고 이웃의 과거에 모든 잘못들을 용서하는 것은 잊어버리는 겁니다. 나쁜 것들은 잊어버리는 것처럼 좋은 은사가 없습니다.

그걸 꼬장 꼬장하는 사람들은 그 사람은 아직도 하나님의 은혜를 덜 받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은 과거를 생각하려도 기억이 안 납니다. 헌금을 3백만 원을 해놓고도 한 달 지나면 다 까먹어버립니다.

내가 했는지 안했는지 그게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걸 생각하면 아깝거든요

그러니까 생각 안 나게 잊어버리는 겁니다. 주님이 그렇게 만들어 놓습니다.

마귀는 과거지향적인 사람을 이용을 합니다. 마귀는 자꾸 과거를 들추게 만드는 겁니다. 특히 과거아픔을 기어하게 하고는 왜냐면 아픔 거기에다가 마귀가 집을 짓는 겁니다. 우리마음에 그래서 아픔의 집을 자꾸 건들려 놓습니다. 과거에 아픔의 마귀가 지어놓은 집을 허물게 하는 것이 성도의 치유사역입니다 치유사역은 내속에 아픔이 있는 것을 스스로 본인이 알아야 됩니다.

모르는 사람에게 치유사역자들은 그런 것을 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이야기를 해줍니다. 대화 속에서 그래서 본인이 그것을 같이 알아야 됩니다.

아하! 내가 문제가 있구나. 자아인식이 스타팅 포인트(starting point)입니다.

내가 문제가 있다는 것을 내가 아픔이 있다는 것을 본인이 고백을 해야 됩니다 인정해야 됩니다. 그것을 인정하는 그 순간에 집을 짓고 있던 마귀가 자신의 정체가 노출되었기 때문에 떠나버리는 겁니다. 그런데 고집이 있고 똑똑한 사람은 남의 이야기만 하지 자기아픔을 틀어놓고 이야기를 못합니다.

그러면 치유사역이 안 됩니다. 그리고 또 부름의 상은 도대체 무엇인가?

부름의 상은 첫째로 이것은 면류관이라는 겁니다. 면류관을 영광 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크신 하나님의 역광의 일부가 나에게 이전되는 겁니다.

이것을 면류관이라고 표현을 했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로 면류관은 소수에게만 해당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9장24절에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려도 오직 상 받는 자는 한사람인줄 알지 못하느냐 한사람이라는 뜻이 아니고 소수입니다. 달려가는 사람들도 소수고 상도 계급이 있습니다.

높은 상일수록 소수입니다 소수가 여기에 참가합니다. 그러니까 복 있는 자들입니다 왜냐면 이분들이 나중에 영원한 세계에서지도자급들이 되는 사람들입니다 세 번째로 사역한 것만큼 자기의 상을 받는 겁니다.

환란이나 핍박이나 희생의 대가로 면류관으로 줍니다. 그리고는 영적으로 어린아이들을 잘 보살펴주고 격려해주고 위로해주고 그래서 그 어린아이들이 자라게 하는 일을 해주는 사람이 받는 면류관이 기쁨의 면류관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기에 해당 됩니까? 그러니까 면류관을 받기 위해서 이걸 알고는 그렇게 하면 됩니다. 두 번째 면류관이 있습니다. 생명의 면류관입니다

야고보서1장12정입니다 이 사람은 어떤 사람들이냐면 그릇을 하나님이 크게 하기 위하여 예수님이 받는 그릇으로 만들기 위해서 예수님의 마음을 담는 그릇으로 만들기 위해서 믿음의 시련을 당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믿음의 시련만 당하면 안 됩니다. 그다음 단계로 인내로 들어가야 됩니다.

잘 참는 사람으로 되었을 때 시험을 잘 참는 사람이 되어서 합격 받는 사람이 받는 면류관입니다. 그러니까 성품이 오래 참는 성품 예수님의 성품을 가진 자에게 주는 면류관이 생명의 면류관입니다 야고보서1장12절입니다.

세 번째 면류관은 썩지 않는 면류관이라 그랬습니다. 썩지 않는 면류관 고린도전서9장25절입니다. 이 면류관은 어떻게 해서 사도바울이 말씀하였냐면 사도바울이 고린도교회 사람들에게 기분 나쁜 말씀을 한 것이 고린도전서9장입니다 고린도교회 사람들이 사도바울에게 어떤 힐난을 했느냐면 당신이 우리가 준 헌금을 가지고 부인과 같이 여행을 다녔다는 이런 식으로 사도바울을 힐난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사도바울이 바나바나 베드로처럼 부인을 데리고 내가 다닐 권리가 없느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내가 너희들에게 복음의 씨를 뿌리고 나 때문에 너희들이 예수님을 만나고 나 때문에 상급을 받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었는데 내가 너희들에게 영의 양식을 주었는데 내가 너희들이 준 돈을 마음대로 쓸 권리가 없느냐?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그리고는 구약의 말씀을 예를 들면서 소가 맷돌을 갈면서 곡식 낱알이 떨어지면 소가 먹도록 놓아둔다는 그런 말이 있습니다.

지가 일하고 지가 먹는데 무슨 말이 많으냐? 이런 말입니다. 그래서 내가 너희들 돈을 조금 썼다고 해서 그걸 가지고 나를 힐난하느냐 이러는 겁니다.

그래놓고는 그러는 겁니다. 내가 너희들이 이럴 줄 알고는 나는 밤낮없이 따블 잡(job)을 뛰었단다. 내가 돈을 벌어 썼다는 겁니다. 너희들이 시험들까 봐 내가 너희들에게 돈을 받을 권리가 있다 그런데 내가 한사람이라도 시험받고 실족할까봐 그래서 나 때문에 복음의 색깔이 변할까봐 너희들 돈을 안 받았단다. 그러면서 내가 이방인들에게는 이방인스타일로 내가 복음을 전했고 믿음이 없는 자들에게는 그런 식으로 믿음이 없는 자들처럼 복음을 전했고 유대인들에게 율법을 가진 사람처럼 내가 복음을 전했는데 그때 마다 나는 색깔을 변하면서 복음이 변하지 않기 위해서 나는 상황에 따라서 대처해 왔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남에게 거침돌이 되지 않고 물질의 희생을 감당하면서 절제하면서 주님이 섬기면 받는 상이 무엇인지 아느냐 썩지 않는 면류관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이분이 결론적으로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마라톤선수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나는 마라톤선수야 모든 일에 절제 하노니 우리는 썩지 않는 면류관을 위하여 내가 지금 마라톤을 달리는데 너희들이 나를 이렇게 씹지만 나는 나 때문에 너희들이 넘어지지 않게 내가 손해 보더라도 내사 신경을 쓰면서 달려간단다. 그러니까 내가 절제하는 운동선수라는 겁니다. 우리하나님의 종들이 자칫하면 나의 어떤 부족한 것 때문에 또는 내가 내 권리를 너무 주장하다가 보면 믿음이 적은 초신 자들이 저 목사가 왜 저래 저 사람 왜 저래 나 저 사람 때문에 교회 안 나올래 그런 사람들 가끔 있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나 때문에 누가 믿음이 떨어지거나 내가 거침돌이 되면 어떻게 합니까? 제가 그런 사람이 되지 않게 해주세요. 그러면서 저는 한 사람이라도 나 때문에 실족할까봐 그렇지만 저는 여러분들에게 봉급을 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안 받겠습니다.

그 대신 다른 사람들이 저에게 돈을 주게끔 만들어주세요 그 대신에 여기서 열심히 일하는 우리스텝들이 봉급을 충분히 받게 한 다음에 그다음에 여유가 조금 있으면 저는 조금 받겠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스텝들이 나보다 돈을 더 많이 받게끔 만들어주세요 그러니까 저는 돈 때문에 이 사역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특히 우리 동역 자들에게 보여주고 싶습니다.

내가 돈을 더 많이 받아야 되는 권리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권리를 행사를 안 하겠다는 겁니다. 그게 사도바울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우리 스텝들보다도 내가 더 많이 받는 사람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어떻게 굴려가는 겁니다. 네 번째 영광의 면류관이라 그랬습니다. 베드로전서5장2절에서4절에 이것은 지도자들에게 주는 면류관입니다 그런데 모든 지도자들이라고 해서 다 받는 면류관이 아닙니다.

베드로가 이것을 깨달은 겁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자기 제자들에게 말하는 겁니다. 뭐냐면 지도자들은 억지로 일을 하지 말라는 겁니다. 억지로 일을 하면 이 면류관을 못 받습니다. 자원함으로 하고 집사님들 권사님들 장로님들 다 지도자들입니다 우리가 다 주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다음에 더러운 일을 위해서 하지 말라는 겁니다. 자기의 어떤 일을 위해서 자기의 어떤 개인적인 욕심 때문에 일하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은 이 면류관을 못 받습니다. 그다음에 즐거운 뜻으로 하고 그다음에 중요한 말이 있습니다. 주장하는 자세로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소위 권위주의로 하지 말라는 겁니다. 이게 대단히 중요한 말입니다 예수님이 권위주의로 우리에게 명령하십니까? 아닙니다. 그러니까 기독교지도자들은 권위주의로 자기가 가지고 있는 파워를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 할 수 있도록 동기를 유발시켜주는 리드 십입니다. 그럴 때 영광의 면류관을 받는다는 겁니다.

그냥 군대식으로 해가지고 교인이 늘어나고 행사가 많아지는 것은 주님이 볼 때 그것은 네가 영광받기 위해서 했다 너의 어떤 이익을 위해서 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면류관이 없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영의 눈을 뜨고 말씀을 볼 줄 알아야 됩니다. 주님이 그랬습니다. 주장하는 자세로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모든 양무리가 볼 때 저 사람이 우리의 리드다 저 사람 속에 그리스도의 모습이 보인다. 모델이 되라는 겁니다. 그럴 때 이 상을 주겠다는 겁니다. 그럴 때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 너희에게 영광의 면류관을 주겠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면류관 받는다는 게 쉬운 게 아닙니다. 다섯 번째로 마지막으로 의의면류관입니다

디모데후서4장8절입니다. 디모데에게 사도바울이 2차 감옥에 감금되어가지고 이 면류관을 받으라고 부탁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오른팔 같은 형제에게 너 이것 꼭 지키라는 겁니다. 유언 같은 말씀입니다.

이것이 뭐냐면 모든 일에 근신하고 고난을 받고 전도의 일을 하고 맡겨진 사역을 잘 감당하고 선한 싸움을 싸우고 믿음을 지키라는 겁니다.

이것은 굉장히 어려운 조건입니다 디모데에게 모든 일에 근신하고 그다음에 고난을 달게 받고 전도의 일을 하고 맡겨진 사역을 잘 감당하고 선한 싸움을 잘 싸우고 믿음을 잘 지키라는 겁니다. 찬송가에 의의 면류관 의의 면류관 모든 사람이 다 부르는데 100명이 의의면류관을 부르는데 그중에 한 두 명이 있을까 없을까 입니다. 주님이 너 네들 입으로만 부르는구나.

그다음에 평신도들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의의 면류관을 받는 조건을 말했습니다. 디모데야 네가 이렇게 해서 받지만 그다음에 주님의 재림을 사모하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받는다는 겁니다. 주님의 재림을 사모하는 자들 우리가 이 사역을 왜 합니까? 주님의 재림을 준비하는 일을 하는 겁니다.

막연히 우리가 예수 믿는 것이 아니잖아요. 분명한 목표가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섬기는 것이 그저 내 개인문제 해결 받으려고 온 사람들입니까? 그런 사람들은 이 대열에 못 들어갑니다. 주님의 재림이 가까이 왔기 때문에 이방인의 숫자를 채우기 위해서 저희들은 이 사역을 하는 것 아닙니까? 최소한 저는 그런 마음으로 하고 있습니다. 주님 빨리 오십시오.

저는 그 마음뿐입니다. 그런데 오시기 전에 이 일을 성취하는데 많은 사람들 중에 동역 자들과 같이 이 일을 하기 원합니다. 중국 사람들, 싱가포르사람들 미국사람들 캐나다사람들 필리핀사람들 인도사람들이 이 일에 지금 전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기에 우리가 한 모퉁이에서 동역자일을 하기 때문에 어디가든지 주여! 주님의 재림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이 일을 합니다는 것을 항상 잊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의의 면류관은 우리에게 오겠습니까?

안 오겠습니까? 이 면류관을 우리는 받아야 됩니다. 제목을 바꾸어서 부름의 상으로 면류관의 특징은 무엇인가? 첫 번째 이 세상의 상장이나 또는 상품이나 상패나 왕관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옷을 입는 것을 의미한다. 다니엘서12장3절입니다. 두 번째로 사역한 공로만큼 예를 들면 영광 체의 모습이 결정된다. 다시 말하면 영광의 정도가 결정되는 겁니다.

광체의 정도가 결정되는 겁니다. 고린도전서3장8절에 세 번째로 소수에게만 주어지는 것이다 고린도전서9장24절에 네 번째로 사역자체보다는 예수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사역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빌립보서2장4절과5절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다는 말은 영광체로 변한다는 말입니다 내 몸에서 영광이 나타나는 겁니다. 이것을 성경에서는 여러 가지 말로 표현을 합니다. 뭐라고 그러느냐면 성화된다. 이렇게 표현을 합니다.

성화된다는 것은 예수그리스도의 마음을 내가 닮아가면서 내가 조금씩, 조금씩 내가 빛이 나는 겁니다. 그것을 성화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전진 성을 발전성을 의미합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성경에서 뭐라고 표현하느냐면 온전하게 된다. 이렇게 표현을 합니다. 그래서 온전한 자 또는 완전하게 된다.

완전한 자로 표현합니다. 또 어떻게 표현하느냐면 성숙한 자 성숙을 향해 가고 있다 이렇게도 표현합니다. 그다음에 재미있는 표현을 에베소서에서 했습니다. 뭐냐면 그리스도의 정성한 분량이 충만할 때까지 이런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사이즈로 변화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내가 예수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닮아가는 겁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전 세계를 안고 있잖아요. 그런 큰마음의 소유자가 될 수 있도록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나도 승리해지는 겁니다. 예수님처럼 그런데 내가 나중에 죽을 때 그냥 조금만 예수님의 모습으로 죽었습니다. 그러면 저 나라에 가서 예수님과 영원 삶속에서 대화할 때도 거리가 있습니다. 깊은 대화를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계급이 낮은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영광체가 없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리스도의 피에 의해서 하나님의 자녀는 되었지만 영광체로는 아니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는 교회에서 이런 걸구별을 안 시켜주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다 영광 체로써 보좌 밑에서 전 세계인구가 다 북 치고 장구 치고 노는 줄 압니다. 아닙니다. 이곳은 엄청난 계급사회입니다. 하늘나라는 우주가 별의 세계입니다. 별이 얼마나 많습니까? 사탄이 타락했기 때문에 타락한 후에 우주가 별들이 다 생명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현대과학으로 달나라에 가 봐도 생명이 없는 겁니다. 산소도 없습니다. 금성에 가도 없고 어디가도 없습니다. 있을 수가 없습니다. 지구 하나만 하나님이 생명을 이렇게 만들어서 여기에 산소를 집어넣고 여기에 하나님의 자녀들을 놓은 겁니다.

나중에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서 하늘나라에 간다면 주님께서 엄청난 우주를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만든 다음에 새롭게 우주를 만들어놓고는 영광체로 많이 비치는 사람들은 우주를 수만 개 수천 개씩 주는 겁니다.

너 그것을 관리해라 그래서 왕 같은 사람이 되는 겁니다. 제가 왜 이런 사역을 하는지 알겠습니까? 저는 그 비전이 있기 때문에 하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 저에게 수억 개의 우주 중에 몇 십만 개달라는 것도 너무 겸손한 것 같습니다. 조금 더 많이 주세요. 그곳이 영계기 때문에 그 안에도 백성들이 있는 겁니다. 그리고는 이 지도자들이 생각만하면 새 예루살렘이라는 큰 도성 안에 하늘보좌가 있거든요 거기로 드나드는 겁니다. 그기는 하늘영광이 비치기 때문에 웬만큼 영광이 없는 사람은 들어가지 못하는 겁니다.

우리나라 같으면 청와대 같은 곳입니다 여러분들 다 저와 같이 그 속에 마음대로 드나들어야 되잖아요. 그리고는 수많은 우주들을 지배하는 지도자들로 그기는 비행기도 필요 없습니다. 생각만 하면 마음대로 갈수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지금 아시아지역이나 아프리카지역에 많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사귈 기회를 주었잖아요. 하늘에 올라가면 얼마나 신나겠습니까?

우리친구가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저 내 교회에 앉아서 몇 사람이 앉아서 북 치고 장구 치고 놀다가 하늘나라에 가서 주여 하면 네 친구가 누구야 그런데 우리는 친구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열방에 친구들을 만들고 있잖아요.

이게 보통 복입니까? 왜 흥분을 못하십니까? 그래서 우리는 이런 비전이 있기 때문에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의 풍성한 장성한 분량으로 우리를 영적으로 키워야 됩니다. 예수님의 모습으로 그분의 성품을 닮아가는 그분과 열람하는 그래서 저 사람을 보면 예수님 같아 그런 소리를 들을 때 그게 최고입니다 저 사람은 교회 목산데 보면 아주 마귀새끼 같아 저 사람은 무서워 아주 엄하고 가까이 가기도 싫어 무서워 입만 열면 나를 꾸짖고 자기만 잘난 체 하고 이런 사람이 되면 안 되잖아요. 저 사람에게 가까이 가고 싶어 그리고 내 마음을 주고 싶어 이런 사람이 우리가 다 되어야 되잖아요.

그런 사람들이 모인 이 공동체는 여기가 천국 아닙니까? 그러면 악령이 여기에 와서 까불겠습니까? 못 까붑니다. 그럼 마음을 가지고 계시면 주님이 기뻐하시고 우리예배를 받으시면서 그분의 성품을 우리에게 부어주시고 오늘 우리 찬양 가운데서도 계속 부어주십니다. 저는 여러분들을 위한 기도는 간단합니다. 한 사람 한사람이름 불려가면서 주님의 영광을 부어주세요

주님의 성품을 닮게 해주세요. 점점 더 주님의 모습이 커지게 하세요.

기름을 부어 소서 자녀 잘 되게 해주세요. 그런 기도 안 합니다.

그게 되면 자동적으로 다 따라서 되는 겁니다. 이렇게 우리가 온전한 사람이 되어야 되잖아요. 그래서 주님께서 그 유명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태복음5장48절에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완전 하라 이것은 하루아침에 되는 게 아닙니다.

주님이 그냥 한 마디로 하셨지만 이것은 점진 성을 가지고 있는 겁니다.

우리의 최대의 목표는 완전하게 되는 겁니다. 주님을 닮아가는 겁니다.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할 때까지 이르러라 에베소서4장13절입니다. 오늘은 메시지가 중요하기 때문에 조금 더 합니다.

다섯 번째로 부름의 상의 면류관의 특징을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네 번째는 사역자체를 예수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사역한다고 그랬습니다.

다섯 번째는 이 면류관은 감소되거나 완전히 소멸될 수 있다는 겁니다.

계시록3장11절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면류관을 빼앗기지 않도록 항상 조심하라 어떤 사람들이 이 면류관을 빼앗길까요? 실큰 일해 놓고 헌금도 많이 하고 시간도 많이 보내고 하나님 일을 많이 했는데 그래서 어느 정도 마라톤선수로 달려갔는데 중간에 영광체가 감소되거나 없어지는 겁니다.

성경에서는 어떤 사람들입니까? 사도바울은 여기에 대해서 강하게 강조합니다. 그렇게 되지 말라고 지금 빌립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뭐냐면 다툼을 야기하는 사람 질투나 투기 분쟁 허영 원망 시비 이간질 바울의 신학은 전부 이 이야기입니다 이기주의 자기중심주의 공동체 안에서 자기주관대로만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이 공동체가 유기적으로 잘 화평케 하는 일보다는 자기중심적인 사고방식 그래서 예수님은 이타주의자라고 그랬습니다.

디모데도 이타주의자라고 그랬습니다.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서 에바브로디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바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공동체 안에서 내가 죽더라도 내 이웃이 살아나는 일 그러니까 열심히 하면서도 불순한 동기입니다. 자기욕심 자기야욕이 많은 사람들 사도바울은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자기영광을 위해서 이런 마음을 가지고서 주님을 섬기는 사람들은 마라톤선수들은 어떤 좋은 일을 한번 했지만 그것이 시간이 가면 영광이 소멸된다는 겁니다. 아니면 어느 정도 감소된다는 겁니다. 이게 대단히 중요한 개념입니다 그러니까 항상 나를 점검해야 합니다. 주여 제가 이것 하고 있는 일이 주님의 관심에 의해서 합니까 아니면 내 관심에 의해서 합니까?

내 영광을 위해서 합니까? 주님 이것을 매일 저는 점검을 합니다.

왜냐면 내가 주님의 일을 실큰 해놓고는 나중에 가서 전혀 주님이 황 목사야 내가 누군지 모른다는 네 이익을 위해서 하고는 내 관심을 보여주기 위해서 했느냐? 구제를 해도 네가 온 동네에 나팔을 불면서 보여주기 위해서 구제를 해놓고는 주님이 산상보훈에서 말씀하시잖아요. 기도를 위해도 골방에 가서 하지 않고는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나는 기도 많이 하는 사람이야 영의 사람이야 과시하면서 하고 금식을 해도 그렇게 했어 그래서 너 상은 네가 이미 다 받았다는 겁니다. 이 말씀이 얼마나 무서운 이야기인지 모릅니다. 지금 우리 한국교회는 주님이 하지 말라는 짓들을 골라서 다 합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어리석은지 모릅니다. 헌금을 해도 주보에다가 누가 얼마 했고 감사헌금 누가 했고 십일조 누가 했고 다 밝힙니다. 주님이 그렇게 하지 말라고 했는데도 왜냐면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왜냐면 그 사람이 인정받으니까 주님은 질투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내가 인정받을 것을 네가 왜 인정받느냐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부분을 우리가 조심해야 됩니다. 어떤 때는 여러분들이 좋은 일을 했지만 제가 그걸 격려해주고 싶지만 제가 조심스럽습니다. 그분은 격려 받기를 원하지만 내가 이렇게 격려를 했다가 하나님이 그분에게 상을 빼앗아 갈까봐 걱정이 되는 겁니다. 아까 그래서 헌금을 얼마 했다는 액수도 이야기 안했고 사람이름도 이야기 안했습니다. 이 말도 하지 말아야 되는데 하는 겁니다. 주님 죄송합니다.

그분들에게 상을 빼앗지 마세요. 그분은 나에게 간곡히 부탁을 합니다.

자기가 이런 걸 했다는 걸 알리지 마세요. 그런 사람이 영리한 사람입니다

절대로 목사님 알리지 마세요. 그러니까 기독교가 성숙된 서구나라들을 보면 누가 얼마 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누가 뭘 했다고 알려주면 더 난리 납니다. 목사님 왜 내 상을 빼앗아 가려고 그럽니까?

그러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아직도 그 단계까지 성숙되지 않은 겁니다. 그러니까 영적으로 보면 어린아이들입니다 그리고 공동체 안에서 가장 싫어하는 다툼 피스메이커가 되지 못하는 겁니다. 화평케 하는 자가 되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마지막15절에 그랬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쉬지 말고 푯대를 향하여 부름의 상을 위하여 쫓아가노라 상급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자는 이 상급이 감소되거나 완전히 소멸될 수 있으니 항상 깨어서 성숙을 위해서 성화를 위해 예수님님의 마음을 품고 쉬지 말고 중단 하지 말고 노력하라는 겁니다. 그런데 15절에 보면 그랬습니다. 만일 너희가 어떤 일에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한국말로 이 말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원어를 보면 분명히 쓰 있습니다.

상급의 개념이 없이 그저 신앙생활만 하는 사람은 언젠가는 영적인 비밀을 깨닫게 될 것이라는 소리입니다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 이 말이 무슨 소리냐면 우리는 마라톤경주자로 이 상급의 비밀을 모르더라도 현재 달리고 있는 자리에서 정지하지 말라는 겁니다.

계속해서 달리라는 겁니다. 나중에 하나님이 때가 되면 이 비밀을 너희에게 깨닫게 해주겠다는 겁니다. 어떤 분들은 이런 비밀을 모르고 그냥 달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결론적인 말씀입니다. 우리는 다 마라톤경주자들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사역을 위해서 모인 사람들입니다 마라톤경주자들의 여러 모습을 한번 보세요. 주님의 일을 하겠다고 뛰는 자들입니다 집사만 되면 다 마라톤경주자대열에 들어간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첫째 모습이 어떤 사람들이냐면 유니폼만 입고 폼만 잡는 사람이 있습니다. 뛰지를 않습니다.

두 번째 사람은 유니폼을 입고 어떻게 달려야 된다는 강의만 들고 앉아 있는 사람만 있습니다. 아직 뛰는 게 아닙니다. 이런 사람이 교회 안에 대다수입니다 유니폼 입은 사람들 중에서도 세 번째 사람은 유니폼은 입고 있습니다. 강의만 듣는 게 아니고 달리는 경주에 대한 이론에 해박하고 정통한 사람이 있습니다. 논리적으로 달기라면 아주 빠삭합니다. 그렇지만 자기는 한 번도 달려보지 않고 폼만 잡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런 사람들은 지적으로만 이해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게 필요합니다. 그렇지만 이것이 다가 아닙니다. 교회가 똑같습니다. 지금 오늘날 교회를 이런 식으로 표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어업협동조합이라 그럽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보고 너희들은 사람을 낚는 어부들이다 그랬습니다. 그래서 처음1세기 때는 사람을 낚는 일들을 사도바울부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점점 낚는 사람들이 많아지니까 이제는 이래가지고 안 되겠다 우리 여기에 집(교회)을 하나 지어서 고기를 어떻게 낚는지 연습을 같이하자 그래서 소위 성경공부를 하는 겁니다.

그리고는 설교를 듣는 겁니다. 물가에 집을 지어놓고는 그게 교회들입니다

그리고는 그 중에 몇 사람이 고기를 잡어로 나갑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냥 앉아서 구경만 하다가 점점 물가에 고기 잡는 집들이 많으니까 우리 이러지 말고 육지에 제대로 집을 지어놓고 해보자는 겁니다.

중세기 때부터 그래가지고 저 안에 들어가서 크게 집을 하나 지어놓고 사람들이 많이 모여가지고 고기 잡는 학설을 만듭니다. 그리고는 세미나를 매일 합니다. 고기 잡는 사람들이 많으니까 협동조합을 만들어서 어협협동조합입니다. 그래서 매일 앉아서 비디오를 보여주고 고기를 어떻게 잡는다는 것을 가르쳐 주는 겁니다. 그런데 그기에 있는 사람들이 물가로 가는 사람들이 하나도 없습니다. 전부 이론적으로 앉아서 고기 잡는 이야기만 하는 겁니다.

그것으로 해서 고기 잡는 강의를 잘 하는 사람들이 목사들이고 다 그런 것입니다 고기를 잡어로 가지 않는 겁니다. 현대교회가 그렇다는 겁니다.

유니폼을 입고 마라톤을 뛰는 사람들 경우입니다 그다음 단계는 어떤 사람들입니까? 유니폼을 입고 뛰지 않고 걷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달려야 되는데 걷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가긴 갑니다. 옆 사람하고 농담하면서 이야기하면서 그냥 둘이 걷고 있는 겁니다. 이런 사람이 많습니다.

가긴 가는데 가다가 심심하면 물도 먹고 어디에 들렀다가 가고 돌아가기도 하고 그냥 마음대로 왔다 갔다 하면서도 마라톤선수라 그럽니다.

마라톤선수입니까? 아닙니다. 그렇지만 폼은 잡는 겁니다. 걷다가 쉬는 사람 뒤돌아가는 사람 이러다 보면 영광이 떨어지는 겁니다. 출발을 할 때 진짜 달리는 사람의 예입니다 그 안에도 보면 여러 가지 예가 있습니다.

출발점은 같습니다. 그런데 출발시간이 다를 수가 있습니다. 1세기 때 뛰는 사람이 있고 우리 같으면 모태신앙으로 태어난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나이40에 받는 사람이 있고 출발점은 같은데 출발시간이 다를 수가 있습니다.

그다음에 사람마다 속도가 다 다릅니다 뛰긴 뛰는데 빨리 뛰는 사람 나중에 후반전에 가서 빨리 뛰는 사람 그러니까 우리가 이 원칙을 아는 사람은 저 사람이 뛰긴 뛰는데 왜 저렇게 늦게 뛰는 것을 비난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저 사람을 나중에 후반전에 제대로 뛰게 만들겠구나. 준비과정이 많습니다. 모세도40년40년 처음에 80년을 뛰긴 뛰었지만 우리가 볼 때 그렇게 효과 있게 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그게 다 준비과정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보는 눈이 전체를 보면 아하! 이분이 뛰긴 뛰지만 저 사람을 하나님이 지금 이 단계에서는 이렇게 뛰게 하는구나. 저는 여러분들을 볼 때 그런 눈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사람들을 사람의 눈으로밖에 볼 수 없습니다. 저분은 지금 마라톤경주에서 어느 정도에 와 있구나.

이분은 어디에 와 있구나. 이분은 속도를 어떻게 조절하는구나. 그러니까 위치가 다 다릅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가는 위치가 다 다릅니다. 그러니까 있는 데를 그대로 인정해주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 우리는 비교하면 안 됩니다. 그다음에 경쟁하면 안 됩니다. 지금 조금 더 앞에 간다고 해서 내가 상급을 더 많이 받는다. 1등상은 내 것이다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겁니다.

뒤에 따라오는 사람이 나중에 앞장설 수도 있습니다. 베드로보다 늦게 시작한 바울이 나중에 앞장을 섰습니다. 그다음에 제일 종요한 게 공동으로 함께 달리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경쟁자들이 아닙니다. 공동1등상을 받아야 합니다. 1등상이라고 하여 나 혼자 받는 상이 아닙니다. 공동1등상을 받는 겁니다. 그러니까 함께 잘 달려가는 사람들이 받는 상입니다 그러니까 이웃이 힘 빠진 사람을 잘 달리도록 손 붙잡고 같이 달려주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같이 달려가면서 이웃에게 힘을 주는 사람입니다 격려 잘 하는 사람입니다. 가면서 서로가 의견이 있을 때 편하게 해주면서 저희들은 이방사역을 그런 의미에서 하는 겁니다. 미얀마에 있는 우리형제자매들이 우리와 같이 달려가는 데 손 붙잡고 끌어주는 겁니다. 그러면서 인도해주면서 같이 가자 같이 가서는 할 일이 있다는 겁니다. 동역의 목표를 심어주는 겁니다.

우리가 왜 달려가는지 그러니까 사도바울도 이 목표가 뚜렷했습니다.

우리도 이 목표가 뚜렷해야 되는 겁니다. 여러분들의 지도자인 제가 목표가 뚜렷합니까? 그게 느껴지십니까? 사도바울은 그래서 내가 쫓아가노라 영어로 프레스 온(Press on)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계속해서 프레스 온(Press on)목표지향 적으로 결론적인 결론을 제가 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이 목표지향 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삶의 모습에서 보면 목표지향 적으로 우리에게 보여 주시면서 우리보고 너희들이 이렇게 하라는 겁니다.

모본을 보여 주었습니다. 히브리서12장1절과2절에 보면 정확하게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그 말씀을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우리 한번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우리보고 이렇게 살라고 보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보고 이렇게 살라고 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이게 다 마라톤 경주하는 사람들이 달리면서 어려움입니다.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목표를 보고는 인내가 필요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렇게 하셨다는 겁니다. 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온전케 하신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점점 점 성숙하게 만드는 분이 누구냐면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나를 온전케 만드시는 분이라는 겁니다. 믿음의 주여 온전케 하시는 성숙케 하시는 나를 영광체로 만드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분을 목표로 해서 바라보자는 겁니다. 그런데 그분이 성육신해서 어떻게 하느냐면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이분이 지금 뭐냐면 이 일을 구원사역이 다 끝난 다음에 다시 하늘보좌에 가서 하나님아버지 우편에 앉으셔서 세상을 다스리는 일을 하실 것이라는 겁니다. 예수님은 그기에 대한 목표가 뚜렷한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분이 지금 인간으로 오셔서 받는 고통들 마라톤경주를 목표를 뚜렷이 보고는 달려갔다는 겁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예수님이 목표지향적인 분이십니다. 우리보고 내가 이렇게 했으니까 너희들도 그렇게 하라는 겁니다. 마라톤선수는 고통이 따른다는 겁니다.

그렇지만 무단한 목표지향적인 마음을 가지고 달려가야 된다는 겁니다.

상 받을 사람들은 그러니까 예수님도 보상을 생각하시면서 달려가셨다는 겁니다. 하나님이신데도 모세도 똑같다는 겁니다. 히브리서11장24절26절에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마라톤경주에서 좋은 것을 포기하는 겁니다.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더 좋아하고 가지기준을 바꾸시는 겁니다. 하늘의 비밀을 깨닫고는 왜냐면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상대적 가치기준에 비교하여 영의 눈을 뜨고 보니까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는 겁니다.

모세도 상을 바라보면서 이 모든 어려움을 120년의 여정을 마라톤경주를 했다는 겁니다. 사도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도 모세도 사도바울도 우리 모두가 다 목표지향적인 마라톤선수들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런 마라톤선수들이기 때문에 문제는 이 경기를 하면서 내가 어떤 마라톤선수인가를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유니폼만 입은 정적인 선수가 되지 말고 역동적으로 달리는 마라톤선수가 되어서 약속의 면류관을 많이 받는 영광 체로써 빛을 발하는 그러한 복된 자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기도드리겠습니다.

예수님 저희들에게 복을 주셔서 사도바울에게 주셨던 이 영의 비밀을 우리도 맛볼 수 있는 귀한 선물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좋은 것이 아무리 많아도 잠깐 있다가 다 없어지는 그림자 같은 것임을 다시 고백합니다. 주여 저희들이 어리석은 자들이 되지 않게 해주시옵소서.

눈에 보이는 것에 집착하여 진짜로 알아야 되는 경험해야 되는 말아야 되는 예수그리스도를 깊이 알지 못할 때 우리가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므로 해서 그리스도를 알 수 있는 그러한 자들 되게 도와주시옵소서.

아버지하나님 그러므로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지게 해주시고 정말로 지금 나의 만족과 유익을 위해서 가지려했던 세상유익이 다 해로 여기고 주님을 위해서 다 버릴 수 있는 그러한 복된 자들이 될 수 있도록 은혜와 은총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지금 이 시간은 예수그리스도의 무한하신 은혜와 하나님아버지의 극진하신 사랑하심과 성령님의 도와주심이 예수님을 닮게 만들어 주심이 저희들 위해 우리 모든 열방에 흩어진 동역 자들 위에 또 열방에 흩어진 주님의 종들 위에 자녀들 위에 지금부터 영원히 함께할 지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