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서

17강. 빌립보서4장4절-9절,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는 평강

변명섭 2022. 3. 27. 09:55

빌립보서 17강. 마음과 생각을 지키는 평강(빌4:4-9)

빌립보서4장4절에서9절까지 말씀입니다.

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5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8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9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아멘. 지난시간에 빌립보서강해 열여섯 번째를 했는데 그때 제목이 무엇인지 기억나십니까? “주안에서 굳게 서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때 제가 무슨 말씀을 하였냐면 빌립보서4장부터 구체적으로 상급을 받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을 제시해주었다 그랬습니다. 그래서 제시하는 과정에서 이분이 문장형태를 명령형으로 써왔습니다. 이렇게 해라면서 성경에서 명령형으로 쓰는 것은 이것은 틀림없이 해라는 겁니다. 하지 않으면 상급이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와 같이 주안에서 굳게 서라 그래놓고는 서라는 그 내용이 군대용어같이 굳건히 서라는 전투적인 용어라고 제가 말씀드렸습니다. 왜냐면 이렇게 서지 않으면 마귀가 와서 내 면류관을 빼앗아 간다는 겁니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마귀가 와서 면류관을 빼앗아가는 이유를 유오디아와 순두게의 비유로써 제가말씀을 했습니다. 교회 안에서 이분들이 초창기부터 교회개척을 하고 10여 년 동안 신앙생활을 잘했는데 이분들이 교회 안에서 어느 정도 입지가 서고 소위 파워가 서고 의견이 강한 포지션에 있다 보니까 거기서 여러 가지 분리작용들이 마귀가 그분들의 성품을 이용해가지고 그러한 일들을 해 왔던 것을 우리가 볼 수가 있습니다. 이런 것은 과거2000년 동안 어느 교회나 다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초창기 멤버들이 교회가 성장해지면서 연륜이 생길 때 초창기 멤버들이 이런 유오디아나 순두게 같은 사람이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문제는 이런 사람들이 문제입니다

우리가 영의 눈으로 이런 사람들을 볼 때 저는 불쌍하게 보입니다.

저분이 철이 없구나. 저분이 언젠가는 큰 후회를 할 텐데 그 후회할 텐데 까지만 볼 수 있는 눈만 가지면 성숙한 사람입니다 그걸 우리 멤버들은 다 보이죠? 그걸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진단할 줄 알아야 합니다. 마귀의 전략은 하나님의 공동체가 모여서 자기들끼리 북 치고 장구치고 가끔 싸움도 하면서 자기네들끼리 모여서 기도도 많이 하라고 그럽니다. 그런데 자기들끼리 모여서 서로 다투고 불평하고 이렇게 하니까 너 네들 그렇게 하면 너희들 힘이 없으니까 자체문제해결만을 위해서 애쓰다가 하늘나라에 간다는 겁니다. 그렇게 하도록 하는 겁니다. 그것이 마귀의 전략입니다 여기에 빠지면 안 됩니다 문제해결을 위해서 새벽기도 열심히 하고 금식하고 그것을 주님이 별로 원하지 않으시는 겁니다. 자체문제해결 때문에 신앙 생활하는 것은 그것은 어린아이들 짓입니다 마귀의 전략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벗어나야 되는 것입니다 벗어나려면 분리작용을 하는 일이 무엇인가를 깨닫고 반대로 화평케 하는 일들을 철저하게 해야 됩니다 우리도 사람들이 모이니까 이 안에 분리작용을 하는 그러한 일들이 꼭 나타납니다.

그 일을 누가 하느냐가 문제입니다 여기에 제가 볼 때는 없는 것 같습니다

그 일은 꼭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럴 때 분리작용을 하는데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되면 안 됩니다. 그러면 그것은 영적으로 어린 사람들입니다.

분리작용을 할 때는 대개 보면 불평부터 시작합니다. 아무개 어떻고 또 제일먼저 불평을 시작하는 것이 목사님이 어떻고 부목사님이 어떻고 반주자부부가 보니까 어떻고 이런 식으로 사람을 슬슬 끌기 시작하는 겁니다.

하여튼 그런 이야기는 들으면 안 됩니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는 하면 안 됩니다 그렇게 말하는 그 사람을 들여다보면 너는 그럽니다. 자기가 온전하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런 사람들 보면 참으로 불쌍합니다. 우리는 그런데 끼면 안 됩니다 빌립보교회에 그런 문제들이 있었고 다른 교회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고린도교회는 말할 것도 없이 엄청난 문제들이 있었습니다. 그 안에 성령의 역사들이 많이 있었지만 은사들이 많았지만 그 안에 똑같이 마귀의 역사들이 대단하게 많았습니다. 우리한국교회도 과거30년 동안은 그런 모습들로 점철되어 왔습니다. 은사의 역사도 강했지만 마귀의 역사도 엄청나게 강했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동의하십니까?

지난시간에 이 이야기를 제가 하면서 이랬습니다. 다 모여 있는 우리가 어떤 사람들이냐면 각자가 다 성품이 다른 사람들입니다 배경이 다릅니다.

나이도 다릅니다. 교육수준도 다릅니다. 가정환경도 다릅니다. 이렇게 다른 사람들이 모여 있는데 어떻게 같은 마음을 품을 수가 있습니까?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그걸 가지고 같은 마음을 품어라 같은 마음을 품어라 그러면 어떻게 같은 마음을 품느냐는 겁니다. 이것은 불가능합니다. 불가능합니다. 그러니까 같은 마음을 품으라는 것을 지난시간에 원어를 들여다보면 뭐라고 그랬습니까? 하나로, 하나로 묶어지는 것이 아니고 하모니(harmony)입니다 하모니(harmony)를 가지라는 겁니다.

우리하나님은 하모니(harmony)를 요구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제가 다양성을 가지신 하나님이라 그랬습니다. 그분은 다양성을 가지신 하나님이십니다. 다양성을 좋아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제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자연을 봐라 사람을 봐라 오케스트라를 봐라 제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다양 속에서 조화를 이룰 때 하나님은 기뻐하시는 겁니다. 거기서 아름다운 소리들이 들려오는 겁니다. 하나님 그분자체도 삼위하나님으로 한분이시지만 세 위가 다양성을 가지고 하모니(harmony)를 이룰 때 그분들이 기뻐하시고 그분들이 우리보고 너희들이 우리처럼 되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다른 것을 인정하셔야 됩니다. 달라야만 됩니다. 다른 사람들끼리 서로 모여서 하모니(harmony)를 이룰 때 그 속에서 기쁨이 있고 보람이 있고 평강이 있는 겁니다. 평강이라는 말이 무슨 말인지 아세요. 그 뒤에 깔려 있는 말이 다른 속에서 서로가 하모니(harmony)를 이룰 때 평강이 있는 겁니다.

평강이라는 말은 다른 속에서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달라야 됩니다.

이렇게 사도바울이 빌립보교회에 말씀하시면서 오늘 계속해서 명령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이 4절에서6절입니다. 계속해서 명령하십니다.

조금 더 발전하는 개념에서 명령하십니다. 첫째 뭐냐면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는 겁니다. 그다음에 명령이 뭐냐면 5절에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리라는 겁니다. 이게 쉽습니까? 그다음에 또 뭐라고 말씀하느냐면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는 겁니다. 대신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감사하므로 하나님께 하라는 겁니다.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나의 마음과 생각을 지킨다고 약속하는 겁니다. 이 말은 너무나 많이들은 말입니다 우리는 이 말을 수천 번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왜 안 됩니까? 문제는 이렇게 중요하고 성경에서는 핵심 같은 말씀인데 이 중요한 핵심 같은 말을 우리가 지킬 수가 없는 겁니다. 어떻게 항상 기뻐할 수 있습니까? 딴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이 목사님들은 항상 기뻐하십니까? 그게 가능합니까? 안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라고 명령하시는데 그게 안 되는 겁니다. 그것도 항상 입니다. 항상

어떤 환경에 처하던지 이런 말입니다 이게 가능합니까? 이게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게 정말 미치는 겁니다.

그다음에 뭐라고 그랬습니까? 어떻게 모든 사람을 관용하라는 겁니다.

이게 가능합니까? 관용이라는 말은 모든 사람을 다 받아주라는 겁니다.

막말로 하면 밥맛이 없는 사람도 받아주라는 겁니다. 네가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도 다 받아주라는 겁니다. 이게 가능합니까?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라는 겁니다. 그다음에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모든 일에 염려하지 말라는 겁니다. 이게 가능합니까?

그리고는 기도하고 간구하고 감사하라는 겁니다. 감사가 나옵니까?

당장 내 마음이 급한데 지금 이걸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는 겁니다.

이 말씀을 이렇게 볼 때마다 벽에 걸어놓은 것을 수천 번을 봤고 우리찬양 속에서도 말씀하시고 주 안에서 평강을 가져라 염려하지 말라 주께 맡겨라

이게 맡겨지지 않는데 어떻게 합니까? 주께 맡긴다고 말은 수천 번 했는데 이게 됩니까? 안 됩니다 이 말씀을 볼 때마다 마음이 무겁고 죄의식만 자꾸 생기는 겁니다. 내거 못하니까? 눈물만 자꾸 흘립니다. 왜 내가 안 됩니까? 이 말씀이 나에게 깊이와 닿지가 않습니다. 피부에만 와서 잠깐 나를 만졌다가 또 흘려 나갑니다. 현실성이 없습니다. 내가 현실에 이게 적용이 안 됩니다 이게 지금 문제입니다 그러면 이걸 우리가 어떻게 현실 속에서 적용을 시킬 수 있습니까? 불가능한 것을 어떻게 가능케 할 수 있습니까?

가능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이렇게 명령하는 겁니다. 이게 옵션이 아니잖아요. 이렇게 하라는 겁니다. 안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불가능한 것인데 가능하니까 그러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것을 우리가 오늘 한번 생각해보자는 겁니다. 그게 왜 안 되느냐면 여기서 이렇게, 이렇게 하면 무엇을 준다고 약속을 했습니까? 하나님의 평강을 주겠다는 겁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평강만 가지면 이 문제가 천천히 점진적으로 해결된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평강 이것만 가지면 된다는 겁니다. 일반평강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평강입니다 오늘 제가 하나님의 평강을 우리가 가지는데 이걸 어떻게 가지느냐 입니다. 이걸 같이 상고하고 싶은 겁니다. 이것만 가지는 길만 아시면 하루아침에 되는 것이 아니지만 문제가 서서히 해결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평강 왜냐면 우리는 저 나라에 가면 평강밖에 없습니다.

평강의 삶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연습을 해야 합니다 천국시민이기 때문에 우리는 평강을 누리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평강을 누리는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누리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내 속에 하나님의 영광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게 눈으로 빛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이 평강이 나의 마음과 생각에 들어와야 되는데 이것을 구체적으로 제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우선 평강이 없으면 어떻게 되는지 아십니까? 첫째 우리 마음이 두 레벨로 되어 있습니다. 위에 마음과 아래마음이 있습니다. 위에 마음을 원어로 프쉬케(psuche)라 그럽니다. 이것은 겉에 나타나는 마음입니다 이것을 생각이라고도 번역을 했고 어떤 때는 성품이라고도 표현을 했습니다. 성경에서는 한국말로 영어로는 마인드(mind)이렇게 표시를 해놓았습니다. 이 마음의 그릇이 하나있고 그 밑에 문이 하나 있어가지고 그 마음의 그릇 밑에 깊은 마음의 그릇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을 카르디아(kardia)라고 원어로는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영어로 하트(heart)라 그럽니다. 이게 우리나라 말로 마음으로 더 깊은데 있는 나의 속사람입니다 우리가 어머니배속에서 나올 때 어린아이들은 위에 마음이나 밑에 마음이 그래도 깨끗합니다.

죄 성은 그기에 들어 있지만 그래서 위에 마음과 아래마음이 제일먼저 위의 마음이 가정환경이나 또는 교육환경이나 또는 사회 환경이나 여러 가지의 환경에 의해서 위의 마음이 영향을 받습니다. 미움이나 또는 질투나 또는 열등의식이나 이런 것들이 위의 마음으로 들어옵니다. 기쁨도 들어오고 그렇지만 아픔들이 그 안에 있다가 한 달 정도 되면 그 아픔들의 기억이 사라져버립니다 사라지면서 그것이 바깥으로 나가버리는 것이 아니고 밑에 마음으로 내려와서 좌정을 합니다. 하트(heart)에 들어와서 그래서 우리가 어린아이들을 키울 때도 어릴 때부터 좋은 것만 보여주어야 됩니다. 좋은 것만 기억나게 해주어야 합니다. 부모가 싸움하는 모습과 너 이놈아! 왜 이것을 못하니 다른 아이와 비교하면 아이가 열등의식을 느끼면 그것이 시간이 흐르면서 밑의 마음으로 쫘악 내려가 있습니다, 그것이 눈이 쌓이던 쌓이는 겁니다.

두려움, 열등의식, 질투하는 마음, 미움, 분쟁하는 마음, 죄의식, 좌절, 변덕스러운 마음, 걱정, 슬픔, 초조한 마음, 이런 모든 마음들이 밑에 다 깔려 있습니다. 그렇게 깔려 있는데 그것이 하나님의 성품이 아니지 않습니까?

이것은 내가 그런 상처를 받았을 때 그런 나쁜 걸 경험했을 때 마귀가 와서 내 마음을 주관하고는 내 마음을 그때부터 마귀가 지배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 속에 깔려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게 평소에는 밑에 마음에 깔려있는 것이 평소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어떤 특수한 상황에 있었을 때 그것이 탁 튀 쳐나옵니다. 그래서 그것이 깔려 있는 사람의 얼굴을 보면 어떤 때는 그걸 잘 조절하는 사람은 예의바르다 그럽니다. 그리고 저 사람 참으로 훈련 잘 되어 있다 그런데 술에 취해버리면 막 나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부분이 그분에게서 나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는 어떤 때는 화가 났을 때 마음을 컨트롤 못하는 이런 상황에 있을 때 그것이 탁 나오는 겁니다. 그러면 아! 저사람 전혀 생각 안했던 부분이 튀 쳐나온다 그럽니다. 이것이 이렇게 깔려 있는 겁니다. 마귀의 마음들입니다

그래서 제가 치료사역을 강조하지 않습니까? 치료사역이라는 게 뭐냐면 그런 부분들을 서로가 이렇게 기도하며 서로가 대화하면서 이런 부분들을 끄집어내는 겁니다. 딴 게 아닙니다. 자연스럽게 이 마귀는 문제가 뭐냐면 자기 자신의 마음에 이악한 놈의 마귀가 있다는 것을 인정을 할 때 이놈의 자기 자신의 위치가 폭로되는 겁니다, 나는 열등의식이 있다 나는 입만 열면 이간질하는 성품이 있다 자기가 폭로하는 겁니다. 그것을 사람들에게 말을 하는 겁니다. 그러면 이놈이 이 안에서 견디지 못합니다. 이놈이 이제부터 느슨해집니다. 느슨해져가지고 찬양을 부르거나 기도를 하거나 하면이놈이 슬슬 나갑니다. 한꺼번에 다 안 나갑니다. 그렇지만 나가기 시작합니다.

밑에 있던 몸이 위로 올라오고 위로 올라오면 이놈은 나가는 겁니다.

시간문제입니다 그러면서 내 스스로가 성품이 변하는 겁니다.

성품이 어릴 때부터 전혀 그런 아픔이나 나쁜 경험을 많이 안한 사람들은 나이가 50이 되어도 사람이 괜찮습니다. 항상 어디에 가도 화평케 하고 남에 대해서 씹지 않고 항상 좋아하면서 삶이 너그러운 마음이라고 그러잖아요. 그런데 그렇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니까 평강이 없는 겁니다. 겉으로 있어 보이지만 이런 것들이 좌정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이런 분들은 파괴적인 행동을 하게 되고 용서 못하는 그러한 행위를 하고 이간질 잘하고 분리적인 행동 잘하고 남을 해치는 말을 하고 말만 하면 남을 좌절시키는 말을 하고 이런 것이 독소가 막 나오는 겁니다. 야고보서3장에 보면 너희들 성령님이 계시지만 내 속에 그런 독소들이 있어가지고 마귀의 마음과 성령님의 마음이 동시에 막 나오는 겁니다. 이런 문제가 있는데 이런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 입니다. 하나님의 평강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 되려면 어떻게 되느냐 이런 놈들을 뽑아내어야 되잖아요. 이 아픔들을 뽑아내어야 되는데 뽑아내는 방법을 제가 나름대로 말씀을 드리려고 그럽니다.

이걸 잘 기억해두세요 첫째는 원시안적인 시각을 가져야 합니다.

사도바울이 깨달은 것들입니다 시각을 원시안적으로 보는 겁니다.

근시안적이 아니고 시각을 먼저 바꾸는 겁니다. 예컨대 이게 무슨 말이냐면 나는 하늘 천국시민권자라는 것을 이 세상을 보는 게 아니고 저세상을 먼저 보는 연습을 하는 겁니다. 나는 하늘시민권자임을 매일 확인하는 겁니다.

이게 대단히 중요한 개념입니다 사도바울이 빌립보에서 우리에게 말하는 겁니다. 시민권이 나는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니고 저곳에 있다는 것을 매일 확인하는 겁니다. 그러면 눈이 그쪽으로 자꾸 떠지게 됩니다.

문제는 이쪽으로 떠있기 때문에 그러는 겁니다. 밑으로 떠있기 때문에 이런 것들이 나가지를 않습니다. 마귀는 눈을 자꾸 밑으로 뜨게 합니다.

두 번째 방법은 천국시민이라는 자신의 위치를 항상 고백한 다음에 천국시민 플러스 나는 면류관을 받는 그러한 주님의 자녀라는 것을 항상 확인하는 겁니다. 그기에 대한 비전을 가지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 비전이 가지는 게 아니라 그 비전이 내 눈에 보일 때까지 내 영의 눈을 딱 뜨고 있으면 내 눈에 그것이 환상으로 보이는 겁니다. 그기까지 끌로 올라가야 합니다.

나는 면류관을 받는 자다 그리고 주님을 만났을 때 그 모습을 자꾸 생각하는 겁니다. 그 생각을 하십니까? 저는 그 생각을 항상 합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 것은 잠깐 있다가 없어지는 것이다 여기서 아무리 젊은 사람이지만 60년만 있으면 이 세상에 없습니다. 10년도 모릅니다.

1년 후에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계속해서 이 세상이 내 고향이 아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 이 세상은 너는 언젠가는 떠난다는 개념을 철저하게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마귀는 아니다 이 세상은 너 세상이다 나는 언젠가는 떠난다. 여기가 내 고향이 아니다 그래서 저는 무엇을 생각하느냐면 항상 내 장례식을 생각합니다. 주님 제가 혹시 살아있는 동안에 주님이 재림해 오신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걸 위해서 저는 온 천지를 뛰어 다니는 겁니다. 그리고 외칩니다. 주님이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 오실 확률이 대단히 많다 그러니까 나는 혹시 안 오신다면 아니면 내가 일찍 불리 움을 받는다면 나도 장례식이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나는 항상 그럽니다.

내 장례식 때 나를 방문 온 저분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특히 세 자녀들이 아버지를 어떻게 생각할까? 나는 그 생각을 항상 합니다. 그래서 주여 내 장례식이 멋있는 장례식이 되도록 내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장례식이 되기를 그래서 장례식을 항상 생각합니다.

만약에 내가 서울에 있다가 주님이 부르신다면 나는 이 동네 어느 병원 영안실에 가 있을 것이다 만약에 누가 나를 더 좋은 병원에 데려다 준다면 아마 나는 삼성병원영안실에 가 있을 것이다 여기 앉아 있는 분들 본인이 어느 영안실에 갈 것을 다 압니다 대강 다 짐작합니다. 여러분들은 어느 영안실에 갈 것 같습니까? 젊은이들은 죽음을 생각 안합니다만 죽음을 생각하셔야 합니다. 이 세상이 내 세상이 아니라는 것을 그게 겸손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죽음을 항상 생각할 때는 이 세상에 있는 이 아귀다툼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눈의 각도가 벌써 저쪽에 가 있기 때문에 문제는 항상 있지만 그 문제가 심각한 문제로 나에게 다가오지 않습니다. 그럴 때 평강을 가질 수 있습니다. 네 번째는 원시안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은 내 자신의 한계성을 깨닫는 겁니다. 제한성 무능성을 항상 재확인하는 겁니다. 주여 저는 주님이 불려 가면 언제나 가야될 사람입니다 저는 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주님이 도와주지 않으면 이것을 항상 주님과 대화하는 겁니다. 이런 마음 소위 원시안적인 마음을 가지고 주님과 대화할 때마다 내 속에 있는 하트 속에 들어있는 마귀의 성품들이 불안을 느낍니다. 이 사람을 조금 데리고 놀려고 그랬더니 매일 불안감을 주고 매일 걱정하게 하고 이 사람 이간질하는데 내가 조금 써먹으려고 그러는데 이 사람은 지금 눈이 딴 데 가있네 그러니까 나를 묶었던 마귀가 안에서 흔들리는 겁니다. 흔들리면서 마귀의 정체가 들어나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런 마음을 가질 때 우리가 오늘같이 찬양을 주님 앞에 깊이 드리면 이 안에 있는 마귀들이 나가기 시작하는 겁니다.

찬양만 드려도 내 눈이 딴 데 가있으면 이 사람을 만져도 소용없구나.

나가는 겁니다. 찬양만 드려도 나갑니다. 나가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면 그 사람의 모습이 변합니다. 모습을 보면 자기도 놀랍니다. 지각이 뛰어난 하나님이라 그랬습니다. 나도 모르게 이런 놈들이 나가니까 천천히 변하는 겁니다. 그리고는 나도 모르게 평강이 조금씩, 조금씩 오는 겁니다.

옛날 같으면 그런 문제가 있으면 난리가 났는데 웃어버리는 겁니다.

저 사람 왜 저러지 나도 모르는 겁니다. 자기도 모르게 변화는 겁니다.

어떤 기준이 있는 게 아닙니다. 이렇게 조금씩 변화는 겁니다.

그런 걸 경험하십니까? 이런 문제를 우리가 서로가 집어주면 마귀가 나에게 슬슬 나가기 시작하는 겁니다. 치유사역이 그렇기 때문에 중요한 겁니다.

대단히 중요합니다. 대단히 중요합니다. trust(신뢰)가 그래서 중요합니다.

그러면 두 번째로 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원시안적인 시각으로 우리를 바꿀 수 있느냐 입니다. 제가 원시안적인 시각으로 바꾸라 그랬습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바꾸느냐 그 방법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제시하여 주셨습니다. 기도를 해야 된다는 겁니다. 그다음에 간구를 해야 된다는 겁니다. 기도와 간구를 안 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 말을 하면 목사님 그 말을 그만 하세요 괴롭습니다. 저는 기도도 합니다. 간구도 합니다.

그런데 분명히 기도하고 간구하라는 겁니다. 걱정하지 말고 그런데 이런 식의 기도와 간구 가지고는 안 됩니다. 어떤 기도를 하셔야 되느냐면 나의 영과 혼을 주님이 계시는 보좌로 끌어올려야 됩니다. 보좌를 향한 기도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사랑했던 분들은 다 기도가 보좌를 향한 기도였습니다.

그래서 영의 말씀을 많이 잡수시고 영의 신진대사를 이렇게 하다보면 시각을 올려서 주님을 자꾸 바라보다보면 나의 영안이 더 밝아집니다.

그리고 영귀가 청력이 더 밝아집니다. 그러니까 말씀을 꼭 잡수셔야 됩니다.

영의 양식이기 때문에 그리고 아까 제가 말씀하신 시각을 자꾸 원시안적으로 보는 연습을 계속하는 겁니다. 하다보면 나의 영의 눈이 점점 발전되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래서 주여 하고 눈을 감으면 내 영과 혼이 보좌 앞으로 가는 겁니다. 우리가 그 연습을 해야 합니다. 보좌가 내 영의 눈으로 보이는 겁니다. 내 자신이 보좌 밑에 꿇어앉아있는 모습이 내 영의 눈으로 보이면서 주님과 대화하는 모습이 자기가 보는 겁니다. 그게 주님과 인격적으로 대화를 할 수 있는 아주기본단계입니다 기본위치입니다 그래서 이분과 고상한 말을 안 해도 되잖아요. 주님 나 피곤합니다. 그러면 주님이 날보고 씨익 웃으시는 겁니다. 그런 자라 그러면 알았어요. 자겠습니다. 하고는 자면 되는 겁니다. 그냥 이분과 사랑의 대화를 하는 겁니다. 이분은 인격체기 때문에 이분을 우선 높여드려야 됩니다. 존경해드려야 됩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기분 좋게 해드려야 됩니다. 한마디로 이분을 기분 좋게 해드려야 합니다.

왜냐면 이분이 의도적으로 나에게 감사하라 영광 돌려라 원하잖아요.

우리자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내 자녀지만 아버지에게 따리를 붙일 때 내가 주고 싶지 따리를 안 붙이면 아무리 내 자식이지만 그게 그렇습니다. 아빠 오늘 왜 이렇게 멋있어 이렇게 빈 말이라도 한 마디 하는 겁니다.

엄마 오늘 더 젊어졌네. 이러면 이놈에게 안 줄 수 없잖아요.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성품을 닮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너희들이 나에게 먼저 따리를 붙이라 그러는 겁니다. 그래서 감사하라 나에게 찬양하라 나에게 존경하라는 말을 하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따리만 붙여도 나머지는 알아서 다 주십니다. 그러니까 따리를 그분이 내 옆에 전혀 계신지도 느끼지 않고 따리를 붙이면 그게 무슨 인격적인 관계가 됩니까? 그러니까 내영이 그분 앞에 가가지고 그분과 그래서 주께로 가까이라는 말씀을 하셨잖아요.

성령님이 내 옆에 가까이 계신 것을 느끼면서 그분과 대화를 해야 하는 겁니다. 그걸 느끼는 것만이 아니고 내 눈으로 보는 겁니다. 그래서 그 연습을 하셔야 합니다. 인격적인만남 친밀감 이런 것들을 가지고 그분과 이렇게 먼저 기도를 하는 겁니다. 기도는 그냥 일반적인 인사 일반적인 이야기입니다.

그다음에 간구라 그랬습니다. 먼저 따리를 붙인 다음에 그다음에 이것조금 주세요, 이것조금 주세요. 이게 간구입니다 이순서가 가꾸로 되면 안 되잖아요. 기분 좋게 해드린 다음에 우리 찬양도 그것입니다 주님께 기분 좋게 해드리는 겁니다. 그러면 내가 기분 좋으니까 너희는 먹어라 그러면서 우리도 기분 좋게 해주시는 겁니다. 간구를 뭐로 간구합니까? 주님! 주님의 성품을 나에게 조금 주세요. 우리가 지금 걱정하지 말라 이래라 저래라 내 속에 있는 더러운 것들 마귀의 성품들을 주님 이것을 조금 뽑아주세요 내가 질투하는 이런 것들이 죽으라고 안 나갑니다 나를 조금 뽑아주세요 주님의 성품들을 나에게 조금 주세요. 나는 주님을 닮아가기를 원합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고 빌립보서2장에서 말씀 하셨잖아요. 주님의 성품을 나에게 조금 주세요. 그러면서 이렇게 주님을 쳐다보면서 그러는 겁니다.

주여 나는 입만 열면 평강이 없습니다. 누가 나보다 잘되는 걸 보면 씹고 싶고 내가 최고로만 항상 있고 싶지 누가 나보다 올라서면 발로 밟고 싶고 주님 제가 이런 게 있습니다. 주님 날 좀 어떻게 해주세요. 그러는 겁니다.

그러면 주님이 이렇게 보고는 그래 원하니 그런데 애야 알았다 그러는데 눈 떠보면 똑같은 겁니다. 그렇지만 이런 걸 할 때 조금씩, 조금씩 나가게 하십니다. 나도 모르게 그게 변화되는 걸 본인이 느끼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의 성품으로 이렇게 바꾸어지는 겁니다. 바꾸어지면서 성품만 바꾸어지는 게 아니고 시각이 그리스도의 시각으로 바꾸어지는 겁니다. 시각이 가치관이 세계관이 바꾸어지는 겁니다. 이것을 한 순간에 하면 안 되고 정기적으로 해야 됩니다. 이것을 생활화해야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습관적으로 해야 되고 그래서 매일 주님을 만나는 연습을 이렇게 우리가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렇게 보좌를 향한 기도를 하게 되면 열매를 맺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제목을 보좌를 향한 기도의 열매로 첫째 거시적 안목을 가지게 됩니다. 시각이 달라집니다. 이게 자연적으로 그렇게 됩니다. 시간이 가면서 그게 하루아침에 되는 게 아닙니다. 저분이 기도 많이 하고 하는데 왜 저러고 있습니까? 그럴 때는 저분이 기도 많이 하고 하는 이 공식 속에 들어와 살 때는 우리가 기다려주어야 됩니다. 저분이 변화고 있구나. 그래서 우리가 옆에서 사이드사격을 해주어야 합니다. 주여! 저분이 저렇게 기도를 하는데 저분의 약한 부분을 주님이 빨리빨리 고쳐주세요 사이드사격을 해주는 겁니다.

거시적 안목을 가지게 된다고 그랬잖아요. 그러면 제일 먼저 천국시민의식이 분명해지는 겁니다. 시민권이 여기에 있지 않다는 것을 그리고는 세계관의 변화가 옵니다. 그리스도의 안목을 닮아가는 겁니다. 그리스도의 안목은 온 주님의 자녀들 세상에 있는 온 지구에 있는 세상 사람들을 다 사랑하시는 겁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을 그게 그리스도의 안목입니다 그러니까 내 위주에서 나만 생각하는 그게 시각이 눈이 밑에 있다고 생각하는 나만 생각하는 그러니까 거기서 하나 더 가면 내교회만 사랑한다고 그럽니다.

그것이 우리에게는 상당히 강하게 있습니다. 거기서 한 단계 지나가면 내 교단만 사랑하다는 딴 교단은 잘못되었다고 하는 교회경쟁의식이 여기서 다 나오는 겁니다. 내 교회중심 내 교단중심 더 나가서 내 민족중심 우리민족만, 우리민족만 주님의 마음은 우주적인 마음입니다 모든 주님의 백성들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을 다 세계관의 변화가 와야 된다고 생각 합니다.

두 번째로 어떤 변화가 오느냐면 가치관에 변화가 옵니다.

우리에게 이렇게 있는 이 세상의 모든 문제들을 상대적으로 보게 됩니다.

문제들을 상대적으로 심각하지 않다고 보는 겁니다. 지금 여기서 무슨 문제가 일어날 때 우리는 심각하게 보는데 왜냐면 눈이 땅에 가있기 때문에 모든 문제들이 심각하게 보이는 겁니다. 그런데 눈을 저 위에다가 뜰 때는 눈이 저 위를 보고 있는데 밑에 뭐가 보입니까? 희미하게 보입니다.

심각하게 안 보이는 겁니다. 눈이 저쪽에 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여기 밑으로 잠깐 그냥 보는 겁니다. 아하! 문제들이 있구나?

그런데 나는 저 위를 보고 사는 사람이야 지금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문재들에 대한 특성도압니다 이게 어떤 특성이 있구나? 이 문제가 가지고 있는 원천이 어디서 왔구나? 정체가 무엇이구나? 이런 것을 다 압니다

알지만 그기에 내가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 그리고 내가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하고 이 문제를 내가 어떻게 해결하고 그러한 방법도 내가 압니다.

그다음에 이 문제를 항상 존재하고 있다는 것도 인정을 합니다.

문제를 없애달라는 게 아닙니다. 문제는 항상 있습니다. 그 문제가 그렇지만 이 문제는 하나님이 필요해서 나에게 주신 거다. 또는 우리교회에 또는 우리민족에게 그래서 감사합니다. 이 문제를 주셔서 이렇게 기도를 해야 합니다 이 문제를 없애주십시오. 라는 기도보다는 내가 이 문제를 지배할 수 있는 그러한 힘을 주십시오. 그러면 사탄은 꼼짝을 못합니다. 아하! 이 사람을 데리고 놀려고 했더니 이 사람 단수가 나보다 세구나 그러면서 사탄의 힘이 약해집니다. 이렇게 세계관과 가치관이 변해버리면 시각의 변화가 오니까 하나님의 평강이 오겠습니까? 안 오겠습니까? 옵니다. 하나님의 평강이 옵니다

평강을 없애는 평강을 잡아먹는 요인들은 걱정, 불안, 열등의식, 내 하트 카르디아 속에 들어 있는 것들입니다 죄의식, 좌절, 변덕, 시기, 질투, 이기심, 분쟁, 투기, 다툼, 이놈들은 다 마귀의 성품들입니다 그러면 내가 시각을 바꾸어 놓고 주님 앞에 보좌의 기도로써 주님의 성품을 요구하면 주님이 서서히 주님의 성품으로 나를 바꾸어줍니다. 주님의 성품은 예수님의 성품으로 천천히 바꾸어지기 시작하는 겁니다. 사랑 이게 아가페사랑입니다

무조건 사랑해주는 겁니다. 희락 기뻐하라 내가 말하노니 기뻐하라 이게 안 됩니다 그런데 대체시키는 이런 시각의 변화가 오면 이제 자동적으로 기뻐하게 됩니다. 그다음에 화평, 문제인물이 화평케 하는 자가 될 때 오래 참는 겁니다. 자비로운 성품 모든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성품 양선, 모든 것을 선하게 보는 겁니다. 충성, 이것은 변함이 없는 성품을 말합니다.

그것을 충성이라고 한국말로 번역을 해놓았습니다. 변함이 없는 성품 온유, 젠털한 겁니다. 절제, 무례하지 않는 것 고린도전서13장의 마음들입니다

무례함이 없는 마음 다름 사람의 마음을 배려하지 않는 그래서 항상 다름 사람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무례함 그다음에 투기하지 않고 항상 겸손하고 자기유익을 구하지 않고 희생하는 마음입니다 성내지 않는 마음 모든 것을 잘 참는 마음 모든 것이 잘 믿고 바라며 견디는 마음으로 이렇게 바뀌어 질 때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할 수 있는 마음이 생기는 겁니다.

그래서 항상 기뻐하라 그랬지 않습니까? 이렇게 되었을 때 항상 기뻐하는 마음이 천천히 오는 겁니다. 조금씩, 조금씩 우리는 그렇게 되면 항상 어떤 상황이 오던지 기뻐할 수 있는 마음으로 나를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환경의 지배를 받지 않는 겁니다. 환경의 지배를 받지 않는 전천후성품이 되는 겁니다. 누가 나를 씹어도 마음이 편해지는 겁니다.

누가 나를 건드려도 마음이 편해지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지 못하면 전천후가 안 되면 예수님이 전천후성품을 가지고 계셨거든요. 어떤 성품이냐면 날씨가 개었다 흐렸다하는 소위 말하면 변덕이 심한 사람입니다.

기분 좋을 때는 아하! 하면서 좋고 성령님 하면서 좋아하고 누가 씹으면 에앵 그러는 겁니다. 그러면서 막 씹습니다. 그게 왜 그럴까요? 전천후성품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제일먼저 시각을 먼저 올려야 합니다.

이렇게 되면 아무것도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환경이 변환 게 아닙니다.

내 시각이 변해버렸는데 시각이 어떻게 변하느냐면 내 속에 있는 하트 속에 있는 마귀의 성품들이 나갈 때 시각이 변하게 되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주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목적이 그래서 그러는 겁니다.

왜냐면 이렇게 변할 때 내가 예수님의 형상으로 자꾸 변모되는 겁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예수님의 형상으로 변모되는 겁니다. 하트 속에 있는 마귀의 마음들이 나가야 내가 예수님의 형상으로 변모가 되잖아요.

그게 우리의 사명인 겁니다. 예수님의 형상으로 많이 변모된 사람은 하늘나라에 가면 계급이 높아지는 겁니다. 보좌가까이 가 있는 겁니다.

딴 게 아닙니다. 집사 장로 전도사 목사가 되었다고 그러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외형적인 겁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내가 얼마만큼 변화되었느냐에 따라서 하늘나라에 가면 왜냐면 예수님의 마음으로 변화되면 될수록 내 속에 주님의 영광이 나에게 채우지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만큼 변화되었으면 영광도 이만큼 있는 겁니다. 이만큼 변화되었으면 영광이 더 커지는 겁니다.

그래서 영의 눈을 떠서 보면 저분이 영광체로 보이는 겁니다.

그리고 그분의 모습도 보면 육의 모습도 보면 그것이 보이기 시작하는 겁니다. 평강이 있는 것이 보이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런 분들은 계급이 높아지기 시작하는 겁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면류관입니다

마지막8절에 그랬습니다. 이런 시각의 변화가 일어날 때 생각이 달라지는 겁니다. 예수님의 생각으로 닮아가는 겁니다. 그래서 그랬습니다. 사도바울이 말씀하시기를 빌립보교인들에게 너희들은 항상 참된 것을 생각하고 경건한 것을 생각하고 의로운 것을 생각하고 정결한 것을 생각하고 자랑할 만한 것만 생각하고 칭찬할 만한 것만 생각하고 덕이 되는 것만 생각하라는 겁니다.

그러면 자연적으로 이렇게 되는 겁니다. 시각의 변화가 오면 자연적으로 이게 굉장히 무거운 말들인데 시각의 변화가 없이 이렇게 말하면 이게 안 됩니다 결론으로 사도바울이 말씀하십니다. 바울이 지금 제가 설명 드리는 이러한 내용으로 이러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평강을 이분이 소유했던 겁니다.

그러니까 이분이 기도할 때도 보좌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3층천에 올라가고 내려가고 한 겁니다. 보좌에 올라가고 내려가고 한 겁니다.

그래서 다툼이나 시기나 분리나 이런 문제로 기쁨을 잃어버리고 관용도 잃어버리고 평강도 잃어버린 빌립보교회에게 부탁하고 명령하는 겁니다.

마지막에 보면 그랬습니다. 9절을 보세요.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이랬습니다. 왜냐면 바울이 내가 이것을 다 경험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너희들에게 가르쳐주고 너희들에게 전수해주고 너희들에게 들려주었고 너희들에게 내가 행동으로 보여주었는데 이것을 행하라는 겁니다.

지금 제가 말씀드린 이런 방법으로 이렇게 행할 때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신다는 겁니다. 이럴 때는 다툼이 없고 항상 기뻐할 수 있고 관용을 베풀 수 있고 그다음에 아무것도 염려하지 않는 사람으로 서서히, 서서히 변한다는 겁니다. 이런 하나님의 평강이 있으면 말이 달라지고 모습이 달라지고 행동이 달라지고 생각이 달라지고 대인관계가 달라지고 대신 관계도 달라지고 하나님의 평강이 있는 자는 염려를 소화하는 능력이 생기는 겁니다. 모든 사람을 나와 다른 사람을 하모니하면서 관용하는 능력이 생긴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기쁨이 내 속에 항상 넘쳐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화평케 하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어디에 가든지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고 평강을 줍니다. 우리 모두가 매일매일 보좌를 향한 기도를 할 때 또 간구를 할 때 이런 평강을 소유한 주님의 복된 자가 될 것을 저는 확신합니다.

 

지금 이 시간은 예수그리스도의 무한하신 은혜와 하나님아버지의 극진하신 사랑하심과 성령님의 감화 감동하심이 우리 모두에게와 온 아시아지역에 흩어져 있는 우리의 동역 자들 위에 지금부터 영원히, 영원히 함께 할 지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