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로힘시리즈 4강, 엘로힘은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 중 어느 것을 선호하시는가? (롬8:28-30;12:1-2) 2021년1월24일 말씀
제가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에 대해서 말씀을 전해왔는데 이게 어려운 주제기 때문에 일반 평신도들이 이 주제를 소화하기가 쉽지를 않습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신학생들이나 또 목사님들이나 신학자들이나 해서 그분들이 특별한 분들이 아닙니다, 그분들도 평신도 생활하다가 어쩌다가 신학교에 가서 그런 타이틀을 가진 것뿐이지 제가 신학교에서 수십 년간 강의를 해보니까 신학교에서도 이 부분을 자세히 다루지 않는 것을 제가 알게 되었습니다, 나름대로 저는 신학을 전공하는 학자로써 이 부분을 상당히 안타깝게 생각하고 저도 갈등이 많았습니다, 왜냐면 어떤 분들은 칼빈주의를 선호하는 교회나 목회자들 밑에서 신앙 생활하다가 신학교에 온 분들도 있고 어떤 분들은 그 반대로 온 분들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가 어떻게 배웠느냐에 따라서 그 사고의 틀이 들어가 가지고 거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분들을 상당히 많이 봤습니다, 저도 그 중에 한사람이었고 그러다보니까 이 두 이슈를 이야기할 때 서로 감정이 나타나면서 불편한 관계로 서먹서먹한 그러한 결과를 가져오는 경우도 제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특히 제가 지난30여 년 동안 선교 지를 다니면서 그것에 있는 많은 목회자들과 신학자들과 평신도들을 나름대로 가르치며 섬기는 일들을 주님께서 허락하셔서 해왔습니다, 그럴 때마다 이 이슈를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를 이야기할 때 반응이 딱 갈라집니다, 그래서 서로가 열을 내면서 자기의견이 맞다 면서 소위 다투는 것을 제가 많이 봤습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고민이었습니다, 왜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분들이 이 두 사상을 가지고 이렇게 충돌하면서 불편을 가지냐 저는 저대로 상당한 고민을 하고 이것 때문에 나름대로 기도도 많이 하고 또 말씀을 상고도 많이 하고 여러분들도 아시겠지만 제가 대학생활을22년을 한 사람입니다 남들은4년 하는 동안에 그러니까 나름대로 학문을 많이 공부하도록 주님이 이끄셨습니다,
그 중에 신학만이 아니고 절반은 세상학문을 공부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세상학문을 나름대로 열심히 공부하고 또 실제 삶에서 그 세상학문을 적용하는 세상사업도 하게 되고 그러다가 신학을 접해가지고 신학을 제가10년 가까이를 했습니다, 신학을 하면서 나중에 주님의 때가 되어서 학문을 정리하는 소위phd라는 것도 제가 받게 되고 또 신학생들을 가르치는 대학에서 교수생활도 주욱 하면서 이 문제가 해결이 되지 않는 겁니다,
왜냐면 현장에서 보면 이 문제가 첨예하게 대립되어 있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나이가 이렇게 되면서 하나씩 하나씩 이 부분에 대해서 주님이 나에게 깨닫게 해주는 게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예수님은 항상 뒤늦게 깨닫게 해주시는 분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주제가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가 하나님의 시각으로 볼 때 어떤 주의를 더 선호하시는가?
라는 주제를 가지고 오늘 이 시간에 다뤄보려고 합니다,
이게 굉장히 중요한 이슈지만 알고 보면 굉장히 간단한 이슈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난시간에도 봤지만 칼빈주의나 알미니안주의나 두 사상의 틀 속에서 있다가 서로 자기 사상을 옳다고 주장해오다가 또는 충돌까지 하다가 하늘나라에 다 갔습니다, 특히 유명한 사람들 칼빈이나 루터나 쯔빙글리나 웨슬리나 우리 입에 오르내리는 이런 유명한 사람들도 자기의 임장을 고수하다가 또는 많은 제자들을 만들어 내다가 이분들이 다 주님나라에 갔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항상 이런 생각을 합니다, 예수님과 이분들이 함께 계실 텐데 이분들이 거기에서도 서로 자기네의 학설 때문에 다투고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한번 해봤습니다, 또 감리교는 저리가라 장로교는 저리가라 칼빈주의는 저리가라 이러면서 하늘나라에 가면 서로 다르게 구별합니까,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분명히 성서에서나 하나님의 뜻은 이 두 사상이 분명히 공존하도록 디자인 하셨다고 저는 보는 겁니다,
이것을 제가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분명히 제 생각에는 유명한 이분들이 과거5백 년 동안에 유명한 분들이 주님나라에서 아하! 우리가 한쪽 코너만 알고 있었구나, 라고 고백하면서 예수님께 상당히 미안하게 생각할 것 같습니다, 부끄러워할 것 같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앞으로 주님의 재림이 가까워 올 때는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장차 낙원에 올라가서 이런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도록 다른 말로 표현하면 내가 알고 있는 사고틀을 가지고 너무나 이걸 고집부리지 않게 하려면 성서적인 가르침을 다시 한 번 우리가 공부해야 됩니다,
성서에서는 어떻게 말씀하셨나, 오늘 그 말씀을 제가 하면서 이 말씀을 듣고 계시는 분들이 이 부분을 더 자세히 알고 싶으면 제가 전에 칼빈주의 알미니안주의가 있으니까 그 내용을 보시면서 이걸 보셔야 됩니다,
그냥 이것만 보시면 이해하기가 힘든 부분도 있습니다, 그냥 중간에 보시는 분들은 이런 소리 저런 소리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지 마시고 처음부터 쫘악 공부하시기를 바랍니다, 이런 두 논리를 주욱 설명하면서 천국에 올라가 유명 인사들이 분명히 이런 반응을 예수님께 할 것 같습니다,
뭐냐면 예수님 우리가 한쪽코너만 알았네요, 그런데 왜 우리에게 이런 지적한계성을 주셨나요, 왜 우리는 세상 적으로 똑똑한 사람이었는데 논리의 한계성을 주셨나요, 또는 이성의 한계성을 주셨나요,
제 나름대로 열심히 했는데 또 왜 우리에게 영적한계성을 주셨나요,
예수님의 크신 것을 보지 못하고 그러면서 이분들이 아마 이런 표현을 할 것 같습니다, 제 짐작입니다 이런 우리들의 한계성에도 불구하고 엘로힘 하나님이시여 삼위하나님이시여 왜 저희들을 이렇게 사랑하셨습니까,
이런 고백을 할 겁니다, 왜 우리들에게 은혜를 이렇게 많이 베풀어주셨습니까, 왜 오래 참으셨습니까, 왜 까불던 저희들을 안다고 용납하셨습니까,
이렇게 아마 예수님께 부끄러운 모습을 가지시고 말씀했을 것이라고 저는 짐작을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질문이 왜 우리 예수님께서 주님을 사랑하는 주님이 사랑했던 엄청난 분들에게 이런 한계성을 주셨나,
이게 우리의 질문입니다 왜 이런 한계성을 허용하셨나,
그러면 그 대답들을 지난시간에도 조금 했지만 오늘 조금 해보겠습니다,
첫 번째는 너희들이 한계성을 가지고 나를 섬기는 것은 엘로힘의 존재의 다양성을 더 깨닫게 해주기 위해서다 이렇게 저는 한번 이해를 해봅니다,
다시 말하면 너희들이 한계성을 가지고서 그 한계 속에서 너희들이 알고 있는 것만 가지고서 고집했잖아 그렇지만 큰 그림 안에서는 엘로힘이 얼마나 다양하신 분이신지 아느냐 그 존재적으로 이것을 더 깨달으라고 나중에 낙원에 올라가서 이분들이 깨달았는지 모릅니다, 살았을 때도 깨달았지만 다시 말하면 삼위하나님은 존재하시는데 어떻게 존재하느냐면 삼위로 존재하시면서 동등 동격 그렇지만 사역 적으로 특징을 가지시고 서로 다르면서도 조화를 이루시면서 서로 존중하시면서 역동하시면서 존재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너희들이 깨달으라는 겁니다, 아마 이분들은 한쪽 코너의 자기들이 아는 것만 가지고 이야기했으니까 하나님의 존재적 다양성을 저 위에 올라가셔서 또 분명하게 깨달았을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왜냐면 저 위에 올라가서 분명하게 깨달아야지만 창조목적에 삼위하나님이 이런 분이라는 것을 영원히 깨닫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영원한 측면에서 이 세상에서만 깨닫는 게 아니고 그러기 위해서 자기네의 실수를 허락하시는 겁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내가 얼마나 좁은 시각을 가진 한계적인 인간이었구나,
라는 것을 교단을 창설하고 교파를 창설한 유명한 사람들이지만 아니다
너희들도 한계성을 가진 인간이다, 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기 위해서 그것을 아마 저 위에 올라가서 분명히 깨달았을 겁니다,
두 번째 깨달음이 뭐냐면 아하! 이 삼위하나님은 창조하실 때도 다양성을 가지고서 창조하셨구나, 라는 것을 분명히 이분들이 깨달았을 겁니다,
평소에도 알고 계셨지만 더 구체적으로 실수를 통해서 우리가 지난시간에도 말했지만 인간을 만들 때도 다양하게 만들어놓고 자연을 만들 때도 동식물을 만들 때도 그러면서 이 모든 자연이 시편148편에 보면 이 모든 자연들이 하나같이 조화를 이루면서 삼위하나님께 찬양 드리는 모습을 봤습니다,
다르면서 조화되는 창조의 원칙을 봤거든요, 그런데 우리 칼빈주의 사람들은 자기네만 깨달은 것만 가지고 다른 사상을 이단이라고 정죄하고 심지어는 죽이기까지 하고 또 알미니안주의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사상을 가지고 그러면서 살아 왔습니다, 그 자체를 인간 세계에서 살 때는 몰랐는데 저위에 올라가보니까 아하!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이것이 엄청나구나, 우리의 이런 못남도 불구하고 이렇게 우리를 사랑해주셨구나
이것을 깨달으면서 영원히 예수님 제가 땅에 있었을 때 이런 실수를 했는데 영원히 예수님의 존재성과 창조성을 제가 찬양드리겠습니다,
라고 분명히 말하고 계실 겁니다, 세 번째로는 우리크리스천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분량을 다양하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알다시피 바울이 그것을 나중에 로마서를 쓰시면서 깨달은 겁니다,
로마서12장3절부터8절에서 깨달았습니다,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은 은혜의 분량이 다르구나, 은사의 분량이 다르구나, 믿음의 분량이 다르구나,
라는 것을 깨달은 겁니다, 그러면서 바울이 그랬습니다, 로마서12장1절2절에서 다른 것을 깨닫고 주안에서 예수님 안에서 이 모든 것을 잘 조화를 이루는 사람들이 진정한 영적 예배자다 그러는 겁니다, 진짜 합당한 영적 예배자다 그런데 우리도 못하고 있지만 로마 교인들도 그걸 잘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모습을 우리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주님나라에 가게 될 겁니다, 그러면 저기에 올라가면 아하! 이런 하나님이었구나,
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겁니다, 네 번째로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은 그분들도 깨닫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피조물이기 때문에 아는 지식의 한계성이 있구나, 라는 것을 그러니까 칼빈. 쯔빙글리. 루터. 알미니우스 그분들이 가지고 있었던 지식이 한계성이 있었구나, 라는 것을 이 세상에 살고 있을 때는 몰랐습니다, 왜냐면 자기고집이 세었으니까 자기 아는 것이 다 인줄 알고
그 제자들도 똑같이 닮아가지고 다 그렇게 했거든요, 그러니까 소위 거룩한 예수님이름 안에서 서로싸움하고 다투고 감옥에 집어넣고 이단이라고 정죄하고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위에서 내려다보시면서 이놈들 참으로 잘한다,
아마 그랬을 겁니다, 왜냐면 이게 예수님의 디자인입니다,
서로 싸움질하게 그래가지고 나중에 올라와서 보니까 아하! 우리가 이렇게 다툰 것이 이게 부끄럽구나, 그러매도 불구하고 우리예수님이 우리를 안아 주셨구나, 라는 것을 깨닫게 하시려고 이렇기 때문에 지식의 한계성을 지금 항상 가지고 있어야 됩니다, 저는 이런 걸 다 깨달았습니다,
그 많은 햇수동안 신학을 연구하고 가르치고 저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제가 이걸 깨달은 겁니다, 아하! 우리인간은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이 한 부분이구나, 또 다른 분에게도 지식을 주셨구나, 다른 분의 지식이 절대적이 아니지만 배울 점이 있구나, 라는 것도 깨달은 겁니다,
그리고 내 지식만이 절대적이 아니구나, 제가 오늘 전하는 이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오늘 전하는 말씀일부분을 제가 깨달은 것을 전하는 것뿐이지 이것이 절대적이라고는 생각하지 마세요, 아직도 저는 여러분들도 계속 배워야 되는 존재들입니다 그리고 내가 모르는 것이 있구나, 못 보는 것이 분명히 있구나, 그리고는 이것을 우리가 조금 학대해석하면 칼빈이 깨달은 것도 한 부분이었구나, 알미니우스가 깨달은 것도 한 부분이었구나,
절대적인 깨달음이 아니었구나, 절대적인 지식이 아니었구나,
이런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서 성서를 보면 성경을 보면 성경은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가 공존하는구나, 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분명히 천국에서 칼빈과 알미니우스나 웨슬레나 이런 분들이 매일 만나가지고 서로 소위 속된 세상말로하면 커피한잔 하시면서 우리가 조금 무든 했네, 그런데 알고 보니까 참으로 고집스러웠네, 아마 이런 이야기들을 하시면서 서로가 웃고 계실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딱 보시면서 이놈들아 알겠니, 그래도 내가 너희들 얼마나 예뻐했는지 알겠니, 아마 그러실 겁니다,
이러면서 우리가 질문을 하나 던질 게 있습니다, 이들이 지금 천국에서 미안하게 생각하시면서 후회하고 계실 텐데 그러면 전지하신 하나님이 예수님이 삼위하나님이 엘로힘 하나님이 이들이 이렇게 천국에 올라와서 후회하실 것을 미리 아셨나, 그러면 뭐라고 대답해야 됩니까, 분명 미리 아시고 이렇게 디자인 하셨구나, 라고 저는 생각이드는 겁니다, 그 말은 뭐냐면 왜 이분들에게 통째로 다 주셔가지고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를 하나로 묽어가지고 하나로 잘 정돈해서 이게 성서적이다, 라고해서 이 똑똑한 사람들에게 그걸 가르쳐주고는 충돌하지 않도록 했으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왜 충돌까지 허락하셨나, 라고 우리가 질문을 던져보는 겁니다,
저는 항상 이걸 질문 던집니다, 세상학문에서도 이런 걸 가지고서 질문을 던집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세상학문공부도 많이 해야 됩니다, 변증법입니다
질문을 던져가지고 답을 찾아내는 겁니다, 제 생각에는 그러는 겁니다,
왜 이렇게 후회하도록 허락하셨나, 왜 이렇게 이 세상에서 서로 충돌하도록 허락하셨나, 저는 이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제 생각입니다 제 학문입니다
제 신학이라고 그럴까요, 이것은 뭐냐면 아하! 이 세상이 창조목적학교구나
학생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들이 충돌과정을 통해서 자기네들의 부족함을 깨닫고 충돌과정을 통해서 한쪽이라도 철저하게 한번 배우는 칼빈주의면 칼빈주의 알미니안주의면 알미니안주의 그래서 서로가 고집부리면서 충돌하도록 그래서 저는 이것을 허락된 충돌이다 이런 단어를 한번 써보았습니다, 또는 계획된 충돌이다 또는 디자인된 충돌이다 이것을 통해서 충돌과정 속에서 중요한 개념이 이겁니다
이게 다 제가 만든 단어들이니까 다른 데 가면 이런 단어들을 안 쓰니까 참고로 하세요, 역기능적 교육방법을 만드셨구나, 이렇게 저는 깨달았습니다,
역기능적 적그리스도도 역기능적 가짜그리스도를 많이 만들어가지고 진짜 그리스도를 더 갈급하게 만드는 교육방법입니다 이산화탄소를 많이 만들어 가지고 산소를 더 갈급하게 만드는 이런 교육방법이 역기능적 교육방법입니다 똑같이 두 사상이 공존하고 있는데 이 두 사상이 공존한다는 것을 성서를 보면 나오는데 눈이 가려져가지고 그것을 보지 못하는 겁니다,
그래가지고 그 유명한 사람들도 한쪽만 보고는 고집 부리게끔 이렇게 함으로써 이분들이 낙원에 올라가서 아하! 우리를 의도적으로 창조목적을 교육시키기 위해서 이렇게 우리한쪽 눈을 가려놓으셨구나, 칼빈도 그런 생각을 할 것이고 알미니우스도 웨슬리도 그랬을 것이라고 저는 짐작을 하는 겁니다,
그래서 아하! 이제는 우리는 영원한 천국에서는 이 두 사상이 공존하면서 우리를 가르치겠구나, 라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그러다가 오늘날 예수님의 재림이 가까운 때 많은 목회자들 사이에서 또는 신학자들 사이에서 또는 평신도들 사이에서 전 세계적으로 그럽니다, 성서를 읽으면서 보니까,
이 두 사상이 공존하게 되는 것을 보게 되는 그러한 사람들이 여기저기에서 많이 출현하고 있습니다, 제가 자꾸 말하지만 저는 국내 사람이 아닙니다,
저는 국제적입니다 아프리카대륙 중동 아시아 전 대륙 미국 호주 전 세계를 다니면서 주님의 종들과 교제하면서 보니까 그런 사람들이 오늘날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 두 사상이 공존합니다, 그러면서 저에게 물어보는 겁니다,
목사님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라고 질문하는 팀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그럴 때마다 제가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보면 저는 공존한다고 믿습니다, 라고 보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러면 제가 무엇이라고 대답하겠습니까, 공존한다고 생각하면서 이 두 사상이 서로 충돌하면 안 되는구나 이분들이 느끼는 겁니다, 저도 그걸 느끼는 겁니다, 이 두 사상이 서로 조화해야 되는구나, 협동해야 되는구나, 또 서로가 보완시켜주어야 되는구나,
이것이 엘로힘 하나님의 디자인이구나, 이것을 깨닫는 사람들이 오늘날 상당히 많은 겁니다, 그러니까 칼빈주의를 선호했던 사람들 중에서 이제는 마음 문이 이렇게 열리면서 눈이 떠지면서 알미니안주의를 이렇게 수용하는 사람들이 나오고 또는 반대로 알미니안주의를 강하게 믿던 사람들이 칼빈주의를 이렇게 수용하는 사람들이 나오면서 성령님이 그들에게 지혜를 주시는 겁니다, 이것을 어떻게 잘 하모니이즈(harmonize)하면서 협동하면서 주님을 섬길까 그러다보니까 이제는 초교파주의자들이 많이 나오는 겁니다,
초교단주의자들 초 신학주의자들 예수님 안에서입니다 예수님 밖으로 가면 어떻게 됩니까, 종교다원주의자가 되어 버리는 겁니다, 제가 강조합니다,
예수님 안에서입니다 예수님 안에서라는 말은 삼위일체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의 기독론을 철저하게 믿는 분들입니다, 예수님의100%신성과100%인성을 믿는 분들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육체적인 재림을 믿는 분들입니다
우리와 같은 분들입니다 이런 분들 안에서 이 두 사상이 조화를 이뤄야 되는구나, 성서를 보니까 이게 공존하고 있구나, 라고 믿는 분들이 나오기 시작하는 겁니다, 여기까지가 서론입니다 지금부터 하나하나 집고 넘어 가겠습니다, 그렇다면 목사님 성서에서는 이것을 우리에게 어떻게 가르칩니까,
그리고 기독교역사를 보면 역사에서는 이것을 어떻게 이야기했습니까,
그러면 제가 지난시간에도 이야기했지만 지금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는 언제부터 이것이 시작이 되었습니까, 종교개혁 후부터입니다
그래서 종교개혁 후에 이 두 사상이 신학 화되고 교리 화되고 조직화 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초림부터1500년 동안 이때 기독교인들은 어떤 사상을 가졌나요, 하고 물어본다면 어떻게 대답을 해야 됩니까,
종교개혁 전 크리스천들이 많았잖아요, 종교개혁 전의 크리스천들1세기부터 시작해서 종교개혁이16세기니까1500년 동안 크리스천들은 어느 주의였나요,
그러면 저는 이렇게 보는 겁니다, 조금 있으면 제가 성성적인 것을 가지고 이야기하겠지만 이분들은 어디에 강했냐면 알미니안주의 사상에 강했습니다,
1500년 동안에 종교개혁 전에 칼빈주의 사상보다는 알미니안주의 사상에 강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 교회시대만이 아니고 구약시대를 한 번 쫘악 봅시다, 구약시대를 다 봐도 구약시대도 알미니안주의가 대세를 이루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봐도 알미니안주의라는 것은 내 자유의지입니다
그래서 자유의지라 그러면 알미니안주의라 그러면 중요한 단어가 하나가 있습니다, 그 단어가 뭐냐면 순종입니다 순종이라는 단어는 나의 의지를 발동해가지고 하나님 앞에 잘 보이는 것이 순종입니다, 그래서 구역의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십계명 수직계명에 순종해라 그리고 다시 말하면 우상 섬기지 말라 이게 주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 말에 순종을 안 하고 불순종한 이야기가 구약성경이야기입니다 순종하면 내가 복을 많이 받는데 신명기28장1절에서14절의 복을 주겠다, 그랬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순종을 안 하면 나머지15절부터 끝에 보면 엄청난 어려움을 당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빤히 알면서도 모세이후부터 순종하지 않고 혼쭐 받는 이야기가 구약전체이야기입니다
앗시리아. 바벨론제국 기타 등등 예루살렘성전이 무너지고 이게 다 뭐냐면 알미니안주의적으로 순종을 안 했기 때문에 어려움을 당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대인적인 사고방식은 알미니안주의적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은 율법과 잘 지킨 겁니다, 그래서 보수유대인들은 지금도 그렇지만 수염도 길게 기르고 특히 안식일을 철저하게 지키고 이런 모든 것들은 구약시대에 알미니안주의적입니다 신약시대에 보면1세기2세기3세기에 보면 카타콤크리스천들입니다 카타콤크리스천들도 아주 알미니안적사고가 지배적이었습니다, 이분들은 목숨을 다해서 예배드리고 금식하고 순교까지 각오하고 구원을 유지하려면 예수님의 재림을 맞이하려면 그런 사고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노력을 강조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다음에4세기 들어와서부터는 로마가톨릭교회부터시작해서 애굽 정교회 시리아정교회 그리스정교회 등 5대교구들도 알미니안주의가 강했던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인들에게 순종을 가르쳤습니다, 교회전통을 지켜야 된다, 교회법을 지켜야 된다, 성직자들에게 순종해야 된다,
예배와 미사에 반듯이 참여해야 된다, 복 받기위해서는 십일조를 내어야 된다, 건축헌금을 내어야 된다, 교회봉사 해야 된다, 금식도 해야 된다,
이런 모든 것이 다 알미니안주의입니다 그뿐 아니라 로마가톨릭이나 정교회는 연옥사상이 있습니다, 연옥사상은 사람이 죽으면 연옥에 간다는 겁니다,
크리스천들은 연옥에 가서 평소에 지었던 죄를 다 씻어 내어야 된다는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떤 분들은 심한 노동도 해야 되고 노동을 하면서 죄를 씻어내어야 하고 또 한 가지는 살아있는 친척들이 가족들이 기도해주고 헌금도 해주고 성인들 앞에 가서 초불 켜놓고 기도해주고 그래서 이 세상에 살면서 그분을 위해서 선행도 하고 그렇게 하면서 때가 차면 이분들이 낙원으로 간다는 사상이 연옥사상입니다 이것이 다 알미니안주의입니다
행위구원입니다 알미니안주의라는 말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은혜구원이 아니고 행위구원주의입니다 그러다가 종교개혁이 일어났습니다,
행위구원측면에 강했던 로마가톨릭을 향해서 반기를 든 그룹이 나왔습니다,
그게 첫 번째로 루터입니다 루터는 로마서1장17절을 읽다가 깨달은 겁니다,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어니라,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 다는 겁니다, 이분은 그러니까 행위구원이 아니고 믿음구원이라고 보는 겁니다,
그것을 나중에 칼빈은 거기다가 은혜를 더 보텐 겁니다,
믿음을 가지려면 은혜가 따라와야 된다, 그래서 그 뒤에 에베소서2장8절9절에 우리가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구원받는 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은혜교리가 성서에 이미 오래전에 있어왔는데도 행위구원자들이 그것을 보지를 못한 겁니다, 하나님이 다 그렇게 가려 놓은 겁니다,
그러다가 종교개혁이 일어나면서 그 쪽을 보는 분들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겁니다, 이게 다 하나님의 디자인입니다 그 쪽을 보는 분 칼빈이 나타나가지고 이것을 은혜구원 하나님의 주권론 또는 예정론 이쪽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겁니다, 이걸 칼빈주의라고 그럽니다, 그래서 이 칼빈주의 사람들이 나타나서 이분들이 칼빈주의를 체계화시키고 신학 화시키고 교리 화시킨 겁니다,
이와 같은 때 지난시간에 제가 설명했습니다, 알미니안주의자들도 이것을 체계화하고 신학 화하고 교리 화시킨 겁니다, 그래가지고 이 두 팀이 완전히 교리 화되어가지고 충돌이 생기는 이야기가 지난5백년 이야기입니다
여기 까지 잘 소화가 되십니까, 기독교주제 중에 가장 어려운 주제가 이 주제입니다, 이것을 제가 나름대로 소화하기 쉽게 정돈해주는 그러한 예를 들고 있습니다, 지금부터 중요합니다, 그러면 성서에는 이 두 사상에 대해서 어떻게 우리에게 가르쳐 주느냐 입니다, 지금부터 하나하나 잘 들으시길 바랍니다, 구약에 나타나는 인물들을 한번 보면 구약에 나타나는 인물들과 그분들을 통해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간단하게 보면 첫 번째 나타는 인물이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을 보면 아브라함은 주전2166년분입니다
이분을 부를 때 어느 주의입니까, 이분은 본래 아버지 데라부터 바벨론종교를 믿어왔던 사람들입니다 갈대와 우르에서 이런 타종교를 믿어왔던 사람들인데 이분을 부를 때는 무슨 주의입니까 칼빈주의입니다,
그냥 의미로 부른 겁니다, 행위구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으로 불렸습니다, 예정적인 주권 속에서 그런데 이 사람이 불리 움을 당한 후에 그다음부터 행동으로 나타나는 겁니다, 순종으로 그것은 무엇입니까,
알미니아주의인 겁니다, 그러니까 성서적 알미니안주의는 행동으로 나타날 때 자기의 의지가 발동되지만 거기에는 누가 항상 도와줍니까,
성령님의 도와주심이 그 의지 속에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비 크리스천들에게는 이게 해당이 안 되지만 비 크리스천들은 자기의 의지가 발동하지나 크리스천들은 자기의지 플러스 성령님의 인도하심이 따라오는 겁니다,
그러다가도 아브라함이 그 명령에 완전히 순종 못하는 때가 있었습니다,
예컨대 창세기12장1절에 보면 세 가지 조건이었습니다,
고향을 떠나고 아비를 떠나고 친척을 떠나라 그랬잖아요, 그런데 이분은 세 가지를 다 충족 못했습니다, 불순종했습니다,
아버지도 모시고 가고 친척 조카 롯을 데리고 갔습니다, 그러니까 고향만 떠난 겁니다, 그러니까 이분이 알미니안주의를 하면서 그렇다고 주님께서 그대로 부르신 것을 무효화시키지 않으셨습니다, 그대로 인정해주시면서 살살 데리고 다녔습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의 삶을 주욱 보면 이분이 죽었을 때는 뭐가 완성이 되는 겁니까, 칼빈주의가 완성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을 통해서 하시고자하는 하나님의 예정이 있습니다,
그 예정을 이루셨다, 라고 볼 때 결국 돌아가신 겁니다,
그러니까 예정으로 부르셔가지고 칼빈주의로 부르셔서 알미니안주의로 쫘악 사용하시다가 그리고는 칼빈주의로 끝을 맺으시는 겁니다,
모세를 봐도 똑같습니다, 주전1526년에 태어난 분입니다,
모세도 칼빈주의로 선택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입니다 예정적인 선택입니다 그래가지고 이분을 사용하실 때는 알미니안주의로 사용하셨습니다, 모세에게 너 네 민족을 해방시켜라 명령을 내렸을 때 이분이 알미니안주의로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못합니다, 일곱 번이나 거절했습니다,
출애굽기3장4장5장6장에 보면 일곱 번이나 거절 한 것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내가 너와 함께하리라 이 말은 무엇입니까 너의 의지를 발동하면
성령님이 도와주겠다는 겁니다, 그래가지고 모세를 사용하셔서 출애굽 시키는 사건입니다 그러니까 출애굽사건은 언제 예정된 겁니까,
아브라함에게500년 전에 이미 말씀하신 겁니다, 창세기15장13절에서16절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이미 말씀하신 겁니다, 아브라함을 통해서 예정된 것을 미리 말씀하셨습니다, 너 후손이 장차 이방나라에 가서400년 동안 노예 생활하다가 이 땅으로 오리라 출애굽하리라 라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디자인하신 것이니까 아브라함을 통해서 예정적인 측면을 모세가 이것을 자기의 자유의지를 발동해가지고 그것을 하다가 나중에 아브라함의 예정을 성취하시는 도구로 사용 받으시는 겁니다, 다윗을 한번 봅시다,
다윗도 분명 예정적인 측면에서 칼빈주의에 의해서 선택받은 사람입니다
형제가 많은 가운데 제일 막내를 이분이 알미니안주의의 사고방식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밧세바를 만나가지고 그 안에서 솔로몬까지 태어나게 했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밧세바를 만나서 밧세바를 자기마누라로 만든 것이 이게 알미니안주의입니까, 칼빈주의입니까, 왜냐면 신기한 게 밧세바를 통해서 나온 네 번째 아들이 솔로몬인데 솔로몬이 예수님의 성육신하는 선조로 나옵니다, 마태복음1장에 보면 예수님이 인간으로 내려오시는 통로 중에 하나가 솔로몬입니다 그러면 뒤집어서 보세요, 솔로몬을 낳으려면 누가 있어야 됩니까, 밧세바가 있어야 됩니다, 밧세바는 다윗을 만나서 밧세바 사이에서 솔로몬이 나와야 됩니다, 이 말이 뭐냐면 다윗의 밧세바 사건은 그 속에 뭐가 깔려 있습니까, 예정적인 논리가 깔려있고 알미니안주의적인 논리가 깔려 있는 겁니다, 다윗의 자유의지를 발동해서 밧세바를 좋아하게끔 만든 겁니다, 그렇지만 그 뒤에 깔려있는 게 하나님의 예정적인 것이 깔려있구나 솔로몬을 출생하게 하기위해서 왜냐면 솔로몬은 예정적인 측면에서 예수님이 성육신하는 도구 중에 한 사람입니다 신기하지 않습니까,
제가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까,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가 공존하고 있는 겁니다, 솔로몬의 삶을 봐도 똑같습니다, 솔로몬의 삶도 보면 이분의 출생은 칼빈주의적인 출생입니다 이분의 삶을 보면 알적인 삶입니다, 아버지 다윗을 통해서 너 우상섬기는 일을 하지 말라 안 그러면 남북이 갈라진다는 것을 세 번이나 경고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솔로몬이 자유의지를 발동해가지고 그 경고에 불순종했습니다,
불순종했기 때문에 남북이 갈라졌습니다, 그러면 이것을 여러분들이 어떻게 보고 계십니까 남북이 갈라져가지고 앗시리아 사건 바벨론사건 구약의 스토리가 나오는 겁니다, 그러니까 솔로몬이 자유의지를 발동해서100%순종했더라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고 이스라엘의 역사도 다른 방향으로 갔을 겁니다, 그러니까 제가 이렇게 보면 알미니안주의자들과 칼빈주의가 큰 틀이라면 그 틀 속에 있는 그 틀 속에서 움직이는 칼빈주의의 디자인에 의해서 움직이는 꼭 필요한 도구들입니다 알미니안주의가 예레미야를 보면 이분은 예레미야서1장5절에 예레미야에게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너는 너의 어머니모태에 형성되기 전에 내가 너를 알았다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이게 기가 막힌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너를 어머니모태에서 형성되기 전에 이미 너를 선지자로 내가 이미 디자인했다 이런 말이나 똑같습니다, 그러면 이게 무슨 주의입니까 이게 칼빈주의입니다,
예레미야가 잘나서가 아닙니다, 모태에서 형성되기 전에 전지하신 하나님을 지금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래서 내가 지금 너를 선지자로 삼았다 그러니까 네가 지금 선지자가 된 것은 나의 예정이었다, 그러는 겁니다, 그러면서 이분이 가르쳐주시는 겁니다, 지금 이스라엘나라가 바벨론나라에 잡혀서 고생하고 있잖아 이게 다 자유의지를 잘 못 발동해서 이렇게 지금 되고 있는데 그런데 내가 예레미야에게 그랬습니다,
에스겔에게도 똑같이 그랬습니다, 내가70년 후에 다시 회복시켜줄게 그러는 겁니다, 이것은 이 사람들이 잘나서 회복되는 게 아니고 그 속에 뭐가 깔려있습니까, 하나님의 예정이 또 깔려 있는 겁니다,
70년 후에 내가 훈련을 많이 시킨 후에 그러니까 저는 이걸 깨닫는 게 이 사상이 지금 유대인들이 창조목적학교교육훈련을 받고 있구나,
이렇게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신약으로 들어가서 바울의 삶을 보면 바울이 태어난 곳은 무슨 주의로 태어났습니까, 이분은 칼빈주의로 태어났습니다,
어떻게 아느냐면 아나니아가 말하는 것을 보면 압니다, 사도행전9장15절에 주후35년입니다 연도를 제가 드리는 이유가 역사의 흐름을 알아야 됩니다,
그러니까 주후35년은 이 사람이 몇 살 때입니까, 30세 때입니다
바울이 지금 다멕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는 장면입니다 이때 아나니아라는 선지자가 바울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 사람은 이방인들과 왕들과 또 이스라엘자손들 앞에서 내 이름을 증거 하기위해서 선택받은 그릇이다 그러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정된 그릇이라는 겁니다,
다시 말하면 유대인만이 아니고 이방인들과 그다음에 로마 제국 안에서 이방의 왕들에게 예수님의 이름을 증거 하기위해서 예정된 그릇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예정론인 겁니다, 그다음에 보면 바울이 스스로가 이 사실을 고백하는 게 있습니다, 갈라디아서입니다 갈라디아서1장15절과16절입니다,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언제 썼느냐면 주후49년에 썼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햇수를 잘 아시길 바랍니다, 주후49년이라는 것은 바울이 풀타임사역을 언제부터 시작하였습니까, 주후45년에 안디옥교회에 전도사가 되었습니다, 개종10년 후에 그래가지고 그 다음해 주후46년부터48년까지 바울이1차 선교여행을 했습니다, 1차 선교여행을 할 때 이분의 사상은 뭐였냐면 제가 볼 때 알미니안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나니아가10년 전35년에 이런 예정적인 측면을 이야기해주었는데도 바울은 이 부분을 자기가 한번 귀로 듣고 그냥 흘려버린 것 같습니다,
그리고는 자기가 운이 좋아서 안 그러면 자기가 특별히 선한 행동을 했기에 이런 모습으로 본인이 열심히 복음을 전하는 은혜를 받기 위해서 라는 그런 사고방식을 가지고1차 선교여행을 끝냈습니다, 1차 선교여행을 끝내고는 이분이 그 다음해49년에 갈라디아서를 쓴 겁니다, 갈라디아서를 쓸 때 성령님이 갈라디아교인들에게 바울이 고백하게 하는 겁니다, 그게1장15절16절입니다, 뭐라고 그러느냐면 여보세요 나는 어머니의 태로부터 내가 하나님의 종으로 선별되었단다, 그래서 내가 이방인가운데 복음을 전하는 자로 선별되었다는 말을 합니다, 그러니까 이분이 지금 알미니안적으로 주욱 사역해오다가 성령님이 바울에게 주지시키는 겁니다, 너가 칼빈주의적인 예정 안에서 이렇게 지금 하고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는 겁니다, 그렇지만 제가 볼 때 바울은 잠깐 예정적인 것을 깨달았지만 그분의 실제 삶에서는 알미니안적으로 살아왔습니다, 왜냐면 이분의 편지들을 보면 그렇습니다,
편지들을 보면 갈라디아서도 그렇고 순종 또 명령 이렇게 살아라 이렇게 살아라 자유의지를 발동해서 이렇게 해라식입니다, 그래야지만 된다,
성령의 아홉 가지열매를 맺으라, 이런 식입니다 그래야 하늘나라를 상속받는다, 이런 식으로 알미니안적의 사고를 가졌습니다, 그래서 이분이49년에 갈라디아서에도 보면 알미니안적인 사고가 지배적입니다 그다음에51년에 데살로니가 전서 후서를 쓸 때도 보면 똑같습니다, 또55년에 고린도 전서 후서를 쓰실 때도 보면 이분이 알미니안적인 사고가 훨씬 더 많았다고 저는 보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다시 말하면 고린도전후서가 몇 년도에 썼습니까,
55년이니까 이분이 언제 개종했습니까, 35년에 개종했습니다,
그러니까20년 동안은 이분이 간혹 칼빈주의적으로 메시지를 받지만 네가 태어난 것이 칼빈주의적이였다 그렇지만 이분의 사역은 알미니안적으로 사역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개종22년 되는 해가주후57년입니다
57년에 이분이 로마서를 썼습니다, 로마서를 쓸 때 로마서9장3절에 보면 이분이 그동안에 알미니안적인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로마서9장10장11장은 유대인과 이방인과의 관계에 관한 장입니다
바울이 뭐라고 그러냐면 왜 우리예수님은 내 민족이 아브라함부터시작해서 지금까지 약2천년 가까이 예수님에 관한 메시지들을 고생하면서. 고생하면서 이분들이 현장에서 역사 속에서 예수님에 관한 메시지를 위해서 열심히 역사무대에서 우리 민족이 뛰었는데 이렇게 열심히 뛰었다는 것은 알미니안적인 사고입니다 이렇게 열심히 뛰었는데 왜 내 민족이 예수님에 대해서 눈이 감깁니까, 이게 바울의 고민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민족이 의지를 다해서 매도 맞아가면서 이렇게 열심히 예수님을 섬겼는데 왜 우리 민족은 예수님을 믿지 않습니까, 이게 왜 이렇습니까, 그러니까 바울이 알미니안적인 사고방식으로써 억울합니다, 섭섭합니다, 그러면서 바울이 내가 생명책에서 이름이 지워지더라도 내 민족을 구원시켜주십시오, 그 말이 로마서9장3절입니다, 그 말이 로마서9장을 쓸 때 그런 마음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미 그전에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소리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 전에 갈라디아서. 데살로니가 전 후서. 고린도 전 후서를 쓸 때 내가 예정적인 측면에서 이렇게 태어났지만 하면서 주로 그분의 생각을 지배했던 것이 알미니안주의의 사상으로 지배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그 대답이 어디서 발견되느냐면 로마서9장3절에서 발견되는 겁니다,
그러면서 바울이 로마서를9장10장11장을 쓰시면서 이분이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서 칼빈주의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내 민족을 이렇게 하시는구나,
그렇기 때문에 칼빈주의분들은 로마서9장10장11장을 굉장히 선호합니다,
왜냐면 하나님의 주권이 거기에 깔려있는 겁니다,
특히9장은 그래서 로마서9장은 하나님의 예정적인 주권이 깔려있는 겁니다, 그래서 야곱과 에서이야기도 하시고 바로왕이야기도 하시고 토기장이 이야기도 하시고 그러면서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 안에서 그러다가 이방인의 숫자가 어느 정도 차게 되면 유대인들이 눈을 뜨게 된다는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로마서11장25절26절에 그러니까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유대인은 주권적으로 눈이 감기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러다가 이방인이 먼저 복음화가 된 후에 나중에 그 숫자가 어느 정도 차면 유대인이 눈을 뜨게 된다는 것을 바울이 깨달은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로마서 구조를 보면1장부터8장은 기독교의 중요한 교리들입니다 중요한 교리들을 쓰신 다음에 8장이 아주 기가 막힌 겁니다, 8장에서 바울이 주후57년에 깨달은 것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아주 강한 칼빈주의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8장28절에서30절까지 보면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미 예정되어있다 그리고 때가 되어서 이게 다 과거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현재형이나 미래형이 아닙니다,
예정되었고 부르셨고 의롭게 하셨고 영화롭게 하셨단다,
이렇게 과거형으로 다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성경구절이 그 유명한 칼빈주의의 아주 중요한 성경구절입니다, 이미 미리 다 예정되었고 미리 예정된 사람을 또 부르셨고 과거에 이미 의롭게 하셨고 영화롭게 하셨단다,
로마서8장29절에서30절입니다, 그러면서 중요한 우리가 좋아하는 성경구절이8장28절입니다, 이 말씀을 그냥 우리의 삶 속에서 쉽게 대입하지만 그렇게 간단한 말씀이 아닙니다, 큰 그림 속에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뭐냐면 우리가 알거니와 기독교인들아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그 뜻이 무엇입니까,
그 뜻대로 하는 것은 칼빈주의입니다 칼빈주의로 예정 적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는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다시 말하면 모든 일이라는 것은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 모든 것이 합해서 선을 이루느니라,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구나, 그러시면서 그 다음절부터 예수님께서는 미리 아신 자들을 예정하시고 이렇게 나오는 겁니다,
그러니까 8장28절이 우리가 매일매일 삶 속에서 그냥 나의 어떤 생활을 만족시키기 위한 그런 차원도 있지만 그것보다 더 큰 그림입니다,
그러니까 다시 말하면 로마서 처음8장은 예정론인 겁니다,
그리고는 예정론을 이어서 9장에서부터11장까지 유대인과 이방인과의 관계 속에서도 또 이것도 예정 적으로 이렇게 이 관계를 만들었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로마서12장부터16장은 알미니안주의입니다 이 예정된 자들아 너희들은 자유의지를 발동해서 성령님의 도움을 받아가지고 자유의지를 발동해서 너희들은 이렇게 살아라 다시 말하면 예정된 하나님의 자녀의 모습으로 살아야 된단다, 이것을 가르치는 것이 나머지12장부터16장입니다
그러니까16장은 자기 제자들에게 안부를 전하는 장입니다
그러니까16장도 보면 이게 예정론이 아닙니다, 로마제국복음화를 위해서 열심히 하고 있는 바울의 제자들에게 알미니안적으로 뭐냐면 격려해주고 수고했다 해주고 칭찬해주고 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예정된 그 자체만 가지고 안 되는 겁니다, 이 예정을 이루시기 위해서 우리는 알미니안적인 사람이 되어야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알미니안적인 이것을 절대적으로 요구하시는 겁니다, 바울이 그전까지는 로마서를 쓰시기 전까지는 이것을 이분이 완전히 깨닫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로마서를 쓰시면서 이것을 완전히 깨닫는 겁니다, 이 두 주의가 공존하는구나, 그리고 상호 협조하는구나,
그러면서 바울이 로마서를 쓰신 후에 옥중서신들을 쓰실 때 특히 에베소서가 옥중서신 중에 굉장히 중요한 서신입니다, 에베소서를 쓰실 때도 똑같은 구조로 이것을 서술했습니다, 에베소서를 보면1장부터3장은 이것은 칼빈주의입니다, 1장부터3장은 교리를 말하는 겁니다, 로마서1장부터8장까지 말하는 거나 똑같습니다, 교리를 말하면서 뭐라고 그러냐면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건은 창세전에 이미 예정된 거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1장3절에서14절입니다, 예정론을 강하게 이야기하십니다, 그러면서1장4절에서도 그럽니다,
창세전에 우리를 택하셨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을 기독교인들을 창세전에 우리를 택하셨다 그리고는 예정하셨다 택하셨다1장4절5절에 그럽니다,
그러다가2장8절9절에 우리에게 때가 되어 은혜를 주셔서 믿음으로 우리가 구원을 받게 되었단다, 그러니까 은혜를 주셨지만 나의 자유의지가 그기에 들어가야지만 내가 믿음을 발동할 수가 있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유의지와 칼빈주의가 결합된 겁니다, 이렇게 해서1장에서3장을 예정적인 측면에서 예정론을 주욱 설명한 다음에4장에서6장까지 이렇게 예정 받은 자들아 너희들 알미니안적으로 의지를 발동해서 성령님의 도움으로 의지를 발동해서 그래서 성령 충만해지라는 겁니다, 성령 충만 하라는 소리는 나의 의지를 주님의 뜻에 맞는 예정의 뜻에 맞는 사람으로 만드는데 성령님의 도우심이 필요한 겁니다, 그래서 성령 충만하라고 그러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4장부터 마지막6장까지는 뭐냐면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라 그러는 겁니다, 4장1절이 알미니안주의입니다 그리고는4장7절에 은사의 분량대로 우리에게 은사를 주셨다 그리고는4장22절에서24절에 옛사람을 버리고 새사람으로 옷 입어라 그다음에 그 유명한6장에 가서6장11절에서17절에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라 이게 다 알미니안주의입니다
그러니까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가 따로 떨어져 있습니까?
아닙니다, 이것이 합해있습니다, 같이 일을 합니다, 그러면 제가 결론적으로 말하는 이 말씀이 항상 머릿속에 남아있기를 바랍니다,
저는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까 고민하다가 이런 아이디어를 주님이 저에게 주시는 겁니다, 그래서 이 아이디어가 온전한 아이디어는 아니지만 도움을 드리기 위해서 그러는 겁니다, 제가 이름을 한번 붙여보았습니다,
역사바퀴이론 이렇게 한번 만들어 봤습니다, 이 세상은 큰 왕 바퀴가 있습니다, 이 세상역사의 왕 바퀴가 돌아가는 겁니다, 그런데 이 왕 바퀴를 돌리시는 분이 누구나면 예수님이십니다, 역사의 주인이십니다, 그런데 이 왕 바퀴 안에 사이즈가 서로 다른 다양한 바퀴들이 서로 물려있습니다,
예컨대 대형사이즈들도 있고 중형 사이즈들도 있고 소형 사이즈의 바퀴가 돌아가고 어떤 것은 알미니안적인 바퀴들이 돌아가는데 각 바퀴들이 다시 말하면 왕 바퀴는 제가 볼 때 칼빈주의 같습니다, 그런데 그 밑에 있는 다른 대형 중형 소형바퀴들은 어떤 것은 칼빈주의 바퀴고 어떤 것은 알미니안주의 바퀴고 그래서 서로가 맞물려가지고 돌아가는 겁니다,
그런데 그중에 하나의 큰 바퀴를 보니까 이 바퀴이름이 뭐냐면 예수님의 재림바퀴입니다, 많은 바퀴들이 돌아가는 중에 하나가 예수님의 재림바퀴를 들여다보니까 그기에 물려있는 바퀴들이 조금 있는데 그 중에 한 바퀴가 뭐냐면 두 짐승바퀴인 겁니다, 두 짐승바퀴가 예수님의 재림바퀴에 물려가지고 돌아가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두 짐승바퀴를 들여다보니까 또 밑에 깔려있는 게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뭐가 있느냐면 이번에 미국대통령선거바퀴 하나가 있는 겁니다, 미국대통령선거바퀴가 두 짐승바퀴에 물려서 돌아가고 있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대선을 이렇게 보면 일반 예수님을 안 믿는 분들이 볼 때는 상당히 좋아하는 분들도 있지만 또 실망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또 기독교인들 중에서도 실망하는 분들도 있고 좋아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나 저나 이 대선바퀴가 돌아가는 것을 보면서 우리같이 선교마인드가 있는 크리스천들과 또는 재림 마인드가 있는 크리스천들이 다른 말로 표현하면 왕 바퀴를 믿는 크리스천들은 예수님의 장중에서 이 역사가 돌아가고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볼 때는 이번에 미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대선바퀴가 돌아가고 있는데 저놈이 내 생각에는 이렇게 돌아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저렇게 돌아가고 있는 것을 보면서 깨닫는 겁니다,
아하! 예수님의 재림이 다시 말하면 두 짐승바퀴가 지금 활개 치면서 돌아가는구나, 두 짐승이 활개 칠 것을 계시록13장에서 예언을 했는데 이것이 지금 성취되는구나, 하면서 아하! 내가 이런 것을 볼 때 더욱 깨어나라 그리고는 준비하라 그러면서 농사짓는 두 사람이 밭에 있으며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잖아요, 너희들 그러므로 깨어있으라 그리고는 나의 재림을 준비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면서 이번 대선을 제가 이렇게 보면서도 우리는 큰 바퀴 속에서 지금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가 같이 맞물려 돌아가면서 지금 두 짐승바퀴를 보게 되고 그 속에 깔려있는 대선바퀴를 보면서 이런 것을 깨다는 시각 자가 되는 겁니다, 지금 까지 제가 설명하면서 여러분들의 깨달음이 무엇입니까, 아하!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는 우열이 없구나,
이게 하나님의 디자인이구나,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다 필요하구나,
하나님이 사용하시는구나, 이 두 사상에 하나님이 누가 더 선호하고 누구를 덜 선호하고 이런 차원이 아니구나, 하나님이 두 사상을 디자인하시고 사랑하시면서 이것을 사용하시는구나, 그러면서 이 두 사상을 하나님이 조화시키면서 보완시켜주면서 이렇게 사용하시는구나, 이것을 바울이 뒤늦게 깨달은 겁니다, 바울도 개종하고 첫20년 동안은 이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칼빈이라는 사람은 똑똑한데도 이것을 깨닫지를 못했습니다, 그 후손들도 알미니우스도 그렸습니다, 웨슬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을 깨닫지를 못했습니다, 어느 정도는 희미하게 깨달았지만 이것을 온전히 깨닫지를 못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쪽으로만 치중해서 강하게 주장하다가 보니까 하나님의 많은 백성들을 혼돈스럽게 하고 상처를 입히고 그렇게 해왔던 겁니다, 그러니까 이제는 마지막 때가 되어서 재림이 가까이 오니까 주님께서 이 문제를 어느 정도 정돈하기를 원하는 겁니다,
그러다보니까 지금 전 세계 하나님의 종들이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가 왜 이렇게 충돌하느냐 내가 성경을 보니까 이게 충돌하면 안 되는데 라는 사람들이 지금 엄청나게 여기저기서 일어나고 있는 겁니다,
저도 그 중에 한 사람인 겁니다, 그것을 제가 지금 논리적으로 성서적으로 이것을 한번 정돈을 해드리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사상을 가져야 됩니까, 융합적인 두 사상을 다 안으면서 그 안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역동적 관계를 잘 내가 보면서 거기에서 일어나는 충돌을 하지 않도록 잘 가르치면서 서로 도와가면서 서로 사랑하면서 주님 재림 전에 우리는 이런 화평케 하는 일을 해야 될 사명이 있는 겁니다, 왜 화평해야 됩니까,
이 두 지엽적인 사고로 서로 충돌하면서 쓸데없는 에너지를 낭비하면 안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왜냐면 지금은 마지막추수 때이기 때문에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에너지를 하나로 묶는 일을 해야 됩니다,
마지막추수꾼들이 되려면 예수님 안에서 교단의 벽을 무너뜨려야 되고 교리의 벽을 무너뜨려야 되고 우리의 전통의 벽을 무너뜨려야 되는 겁니다,
그리고는 이 두 사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그대로 인정해주면서 이것이 큰 그림 속에서 예수님 안에서 이것이 예수님이 필요하시기 때문에 이두 바퀴들이 돌아가는구나, 여러 가지 모습으로 돌아가는구나, 지금 이것을 깨닫는 지혜 자가 되셔야 합니다, 제가 볼 때는 이런 지혜 자들이 지금 이 세대에 필요한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항상 이런 생각을 하면서 우리가 잘 아는 데살로니가전서5장16절과18절을 묵상을 합니다,
이런 자혜를 가진 우리는 항상 기뻐하고 주안에서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은 나의 필요한 것을 달라고 주십시오, 가 아닙니다,
기도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큰 그림을 나의 그림으로 만드는 게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내 뜻과 열람하는 게 기도입니다 기도의 수준을 높이시고 그래서 쉬지 말고 이 비전을 가지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것은 잠자면서 꿈속에서도 이 생각을 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거리고 어떤 일이 있던지 범사에 감사하라는 겁니다, 항상 저에게 이런 비밀을 깨닫게 해주시니 주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잘 아는 빌립보서4장6절7절에 이 세상에 돌아가는 모든 이것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이 예수님의 뜻의 장중에서 모든 것을 기도하며 간구하면서 나의 초점을 예수님의 뜻에 맞추면서 항상 예수님께 이렇게 있으면서 나의 지각이 넘치는 초월하는 나의 이성으로써 이해 못하는 하나님의 평강이 이 비전을 본 사람에게 있는 겁니다, 큰 그림을 보는 사람은 그래서 로마서8장28절을 항상 묵상하세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임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해서 선을 이루시느니라,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 이런 것들이 다 합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구나, 오늘날 그 뜻은 미국대선의 혼돈 속에서도 예수님의 뜻 예수님이 공중에서 나팔소리가 곧 들려오겠구나,
그렇기 때문에 내가 깨어있어야지 내가 준비하고 있어야지 이런 성령님의 가르침이 우리의 마음 문을 계속 두드릴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이 세상에 모든 풍파가 있어도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은혜를 항상 세어보면서 주님 나에게 이 두 사상이 이렇게 공존하는 군요, 이런 은혜를 나에게 주신 것을 너무나 감사합니다, 그러니까 환경이 어렵더라도 이것을 내가 극복하면서 항상 감사하는 삶을 감격의 삶을 살 수 있는 겁니다,
저는 이런 삶을 주님이 이렇게 인도하셔서 나이가 들어도 점점 더 젊게 만드시는 것을 여러분들 눈에는 안 보이십니까,
기도드리겠습니다,
예수님 우리가 쓸데없이 지엽적인 두 사상을 주님이 허락하셨지만 여기에 나의 사고의 틀에 박혀서 사랑하는 예수님의 자녀들을 서로 불편한 관계로 만드는 그러한 어리석음을 하지 않도록 주여 성령님 도와주시옵소서
또 우리의 삶이 지금 오늘 말씀드리는 이 두 사상이 공존하고 있다는 것을 항상 느끼면서 깨달으면서 또 내가 이것을 가르치는 나누는 그러한 복된 자들이 되도록 은혜 베풀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엘로힘은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 중 어느 것을 선호하시는가?(롬8:28-30,12:1-2)
1, 지난주에 공부한 기독교 신학의 양대 산맥에 대해 복습해봅시다
2, 왜 지난500년 전부터 오늘날까지 두 진영은 끊임없이 서로 평행선을 그리며 충돌하며 타협점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까?
3, 오늘날 일부 신학자들이 발견한 성서적 깨달음은 무엇입니까?
4, 종교개혁 이전 교회에서 이 두 사상을 어떻게 적용했습니까?
어느 사상이 지배적이었습니까?
5, 구약성서의 주요 인물들과 사건들에서 발견되는 이 두 사상을 논의해 봅시다,
6, 특히 바울의 살을 통해 보여준 이 두 사상에 대한 가르침을 논의해 봅시다,
7, 로마서와 에베소서 속에 숨겨진 이 두 사상을 논의해 봅시다,
8, 우리의 태도와 입장은 어떠합니까? 재림이 가까운 이때에 우리는 왜 융합 적 신학 사상을 가져야 합니까?
#황용현 목사님 설교내용영상으로 보세요.
https://www.youtube.com/watch?v=0w7A1qO8r2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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