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용현목사 강해설교 녹취록/사도행전 강해

18강, 사도행전15장36절-41절, 바울과 바나바의 싸움

변명섭 2019. 12. 8. 15:47

사도행전 강해 제18강, 바울과 바나바의 싸움 (행15:36-41) 2011년11월20일 말씀
오늘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같이 보겠습니다, 
사도행전15장36절에서41절입니다, 아시다시피 사도행전15장은 예루살렘총회가 끝나고 바울과 바나바가 안디옥으로 다시 돌아 왔잖아요, 
그 해가 49년입니다, 그리고는 1년 정도 계시다가 이분들이 우리 한번 다시 2차 선교여행을 갑시다, 거기에 대한 제안을 하는 장면입니다, 
15장36절입니다, 36 며칠 후에 바울이 바나바더러 말하되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하고 
37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38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함께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39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 40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 41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니며 교회들을 견고하게 하니라 아멘, 
이 말씀이 짧은 말씀이지만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부분이 많습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은 바울과 바나바가 다툰 이야기를 중심으로 해서 제가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지난 시간 내용을 정리하면 1차 선교여행을 주후46년에서48년입니다, 그리고 동행했던 자들이 바나바와 바울과 마가와 그리고 갈라디아서2장에 보면 디도도 데리고 갔다 그랬습니다, 
그런데 디도 이야기는 사도행전에서는 데리고 갔다는 이야기가 없습니다, 
나중에 갈라디아서에서 그 말이 나옵니다, 
그때 디도를 할례를 안 받게 하고 디도는 그레데 섬 출신입니다 이렇게 1차 여행에 동행한 사람들인데 중간에 마가가 떠나기 전에 무슨 일이 있었냐면 지도자가 변하는 모습 바나바에서 바울로 변하는 지도자가 이렇게 변하는 모습에서 우리 생각에는 마가가 떠나지 않았나, 
그러면서 두 가지 학설을 지난시간에 말했습니다, 마가가 어머니생각이 나서 떠났다 사도행전13장13절에 밤빌리아 버가에서 떠난 겁니다, 
어머니생각이 나서 떠났다, 라고 하기도 하고 또는 자기 외삼촌의 지도력을 빼앗아 버리는 것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기 위해서 떠나지 않았나, 
라고도 우리가 볼 수 있는 겁니다, 이렇게 어쨌든 떠났으니까 떠날 때 바울의 기분이 어떻겠습니까, 안 좋았습니다, 왜냐하면 마가가 어머니보고 싶다는 생각은 있지만 속에는 자기 외삼촌을 도외시 시키게 한 것에 대한 불만이 깔려 있었지 않았나, 그래서 바울도 마가에 대한 감정이 별로 좋지를 않았던 겁니다, 이런 가운데 1차 선교여행을 끝내고 이제 돌아왔는데 바울이 전한 메시지에 대한 여러 가지 부정적인 이야기들이 들려왔잖아요, 
1차 선교여행 마지막 했던 곳이 디모데의 고향인 루스드라 더베에서 바울이 디모데를 눈여겨보았던 모양입니다, 디모데가 잘 나서가 아니고 디모데의 외할머니와 어머니의 기도가 뒤에 깔려 있습니다, 
그런 젊은이를 주님이 바울에게 보여 주시는 겁니다, 
그래서 1차 선교여행이 끝나고 안디옥으로 돌아오니까 바울이 전한 복음에 대한 부정적인 이야기들이 들려오니까 바울신학에 대한 도전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 내려가서 예루살렘총회에 참석하는 장면입니다, 
그래서 총회에서 바울신학을 인정하고는 총회가 끝나고는 남 갈라디아 쪽 갈라디아교회에 자신 있게 편지를 쓰는 겁니다, 그게 갈라디아서입니다 편지를 쓰실 때 그 편지 내용이 율법과 은혜와 믿음과의 상관관계를 쓰신 겁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에 사도행전 강해에서 제가 율법과 은혜와 믿음의 상관관계를 우리가 깊이 다루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들이 다 끝난 후에 제2차 선교여행을 떠나려고 바울이 바나바에게 제안을 했는데 다툼이 생겼습니다, 다툼을 이렇게 읽으면서 우리가 어떻게 선교마인드가 있는 두 거물급인사들이 왜 다툴까 이것이 우리의 질문 중에 하나입니다, 
왜 다툴까 그러면 우리가 보통으로 볼 때 다투는 이유 중에 하나가 서로의 이해관계가 상충된 게 있었습니다, 마가 때문에 이해관계 그리고는 사람을 보는 시각의 차이에서 오는 다툼이 있었습니다, 
뭐냐면 바울은 사역중심의 시각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런데 바나바는 사역보다는 사람중심의 시각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이 두 사람이 다투는 모습을 기록하지 않으면 좋은데 그러면서 은혜로운 가장 사도행전에서 나타나는 거물급 두 인사의 이 다투는 장면을 적나라하게 기록하여 놓았습니다, 
그래서 이 다투는 구절 때문에 과거에 교회 안에서 다툼이 있거나 그래서 교회가 갈라지거나 또는 교단이 갈라지거나 이럴 때 나와서 설교하는 목사님들이 신 구교를 다 합해서 항상 인용하는 성경구절이 이 구절입니다, 
우리가 지금 서로 싸움을 많이 하고 갈라질 때 갈라지는 예화를 드릴 때 이 성경구절을 인용하면서 그리고는 갈라집니다, 그래서 이 성경구절 때문에 많이 갈라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만큼 갈라지는 이 문제가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갈라지게 하는데 정당화 시키는 하나의 참고문헌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렸다면 이 두 분의 갈라짐과 다툼이 우리에게는 부끄럽지만 이것을 성경에서는 왜 문제시 하지 않았나, 이겁니다, 
특히 바울서신에서 보면 바울이 편지를 13개를 썼습니다, 
13개의 편지를 쓰면서 한 번도 바나바와 자기와 갈라진 사건에 대해서 언급을 하지를 않았습니다, 바울이 그리고는 여기에 대해서 내가 잘못했다는 말도 안 했고 했다는 말도 없었습니다, 
바울이, 바나바가 히브리서를 썼다고 보는 분들도 있습니다, 
또는 바울이 썼다, 라고 보는데 바나바가 히브리서를 썼다고 했을 때 그 히브리서에도 본인이 이런 갈라질 때 상항을 설명하는 게 없습니다, 
그러다 보면 우리가 이해하는 게 두 분이 갈라질 때 분명히 하나님의 큰 뜻이 거기에 숨겨져 있다고 보는 겁니다, 
하나님의 큰 뜻이 나중에 바울이 깨달았습니다, 
저도 하나님의 큰 뜻을 바울의 이 모든 서신을 통해서 깨달았는데 왜냐면 성경에 나오는 신약에 나오는 모든 스토리를 종합해보면 하나님의 1세기 때에 구원계획을 이루기 위해서 주연으로 쓰셨던 분이 바울이구나 하는 것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주연 하나님의 구원계획이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느냐 사도행전9장15절에서 알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9장하면 바울이 다메섹에서 개종되는 장이9장입니다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는 장면입니다, 이때 이분의 명성이 아주 나쁘게 나 있을 때입니다 크리스천입장에서 보면 아주 나쁜 사람이었습니다, 
크리스천들을 죽이는 사람이니까 이럴 때 다메섹에 있는 선지자 아나니아에게 예수님이 바울을 만나라 할 때 이분이 바울이 무서우니까 만나기 싫다고 그러니까 바울이 앞으로 어떤 일을 할 사람이라는 것을 예언을 주시는 게 있습니다, 저사람 지금 깡패 같지만 저사람 앞으로 내가 어떻게 쓸라고 그런다, 그게 사도행전9장15절입니다, 
아시다시피 저 사람은 앞으로 내 이름을 위해서 이방인들과 많은 임금들 이방임금들에게서 복음을 전하고 핍박을 받고 내 이름을 위해서 저 사람은 사용 받은 나의 귀한 종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은 1세기 때 중동과 터키지방과 그리스와 로마제국을 복음화 하는데 사용 받는 주연급 내 종이라는 겁니다, 
아나니아가 딱 보니까 저 사람은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님을 영접하고 이분과 관계를 맺기 시작하였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이 있잖아요, 그래서 이미 하나님께서는 이 사람이 이런 주연급 사람이 되기 위해서 예수님을 만나지 않게 첫 30년을 훈련을 시켰습니다, 그 당시에는 예수님을 만나지 않을 때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첫 30년을 이 사람을 어떤 구원계획이었냐면 이 사역을 위해서 이방사역을 하기 위해서 디아스포라로 만들어 놓은 겁니다, 그리고는 교육 훈련시키고 좋은 학교 다니게 하고 율법교육도 철저하게 시키고 그리고는 교회를 핍박하도록 만들어 놓은 겁니다, 
그래서 지금 다메섹에서 이제는 회심하게 만들어 놓고 그때부터 겸손훈련을 시키는 겁니다, 그리고는 회심한 후에 이 사람이 회심을 주후35년에 하였습니다, 이분이 주후5년에 태어나가지고 35년에 회심하였으니까, 
30살에 딱30년을 하나님이 훈련을 시켰습니다, 그리고는30세부터68년까지 순교당하기 직전까지33년입니다, 예수님도33세까지 사셨잖아요, 
똑같이 바울도 33년을 주님의 일을 하는 사역자로써 또 하나님이 훈련을 시켰습니다, 이 훈련을 하는 과정 속에서 이분에게 선교열정도 부어주고 지혜도 주셔서 13권의 책을 쓰게 하시고 그리고는 주변에 동역 자들을 붙여주셨습니다, 그중에 한 분이 바나바입니다, 
바나바는 책 한권밖에 안 쓰신 분입니다, 
또 동역 자 누가도 붙여 주시는 겁니다, 누가는 책 두 권을 썼습니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썼습니다, 또 마가도 붙여주시면서 한꺼번에 다 한 것이 아니고 서서히. 서서히 하나님이 큰 그릇으로 보여 주시는 겁니다, 
동역 자들을 통해서도 보여주시고 본인도 깨달으면서 순서대로 한꺼번에 안 보여 주셨습니다, 조금씩. 조금씩 필요할 때 마다 사람을 붙여주시고 그러면서 갔는데 이 중에 제일 먼저 붙여주신 분이 바나바였습니다, 
그러니까 바나바는 주연급분이 아니고 조연급분이십니다 이 큰 이방사역의 전체 큰 그림의 주연급이 바울인데 그 바울의 주연급 일을 하는데 최초로 나타나는 조 연급이 바나바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바나바를 한번 봅시다, 
바나바의 성품을 한번 보면 사도행전11장24절에서 뭐라고 그랬냐면 이분은 착하고 성령 충만하고 믿음이 충만하다고 그리고는 우리가 성경에 보면 바나바가 감정도 풍부해서 이렇게 이 사역을 위해서 예루살렘교회 초창기 이 사역을 위해서 내 있는 재산 다 바쳐야지 하고는 이분이 자기 땅을 팔아서 헌금했던 사람이 바나바입니다 사도행전4장37절에 그 뿐입니까 나중에 바울이 개종한 후에 다메섹에서 아라비아 시내 산 모세가 십계명을 받았던 그 산에서 3년을 보내시고 다시 바울이 다메섹에 갔다가 예루살렘에 들릴 때 외롭게 있을 때 제자들 중에 최고 지도자인 야고보와 베드로를 만나게끔 소개 시킨 분이 바나바입니다 그러니까 바나바는 약자를 배려하는 그러한 마음을 가졌던 훌륭한 성품의 소유자였습니다, 사도행전9장27절 갈라디아서2장9절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뿐입니까 그렇게 이제 소개를 시켜준 후에 바울이 자기 고향으로 가도록 아마 뒤에서 인도해 주신 분입니다 예루살렘에서 바울을 죽인다고 유대인들이 그러니까 그래서 피신시켜서 자기고향 다소까지 가서 몇 년 있었습니까, 7년 동안 혼자 외롭게 있었습니다, 7년이 되었을 때 바나바가 안디옥교회 담임목사님 하실 때 성령님께서 바울이 고향에서 혼자 외롭게 7년을 고생하고 있는데 저 사람을 데려다가 전도사를 시켜라 해서 바울을 데리고 왔던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보통 특별한 분이 아니십니다, 
사람이 굉장히 이웃에 대한 배려가 있고 정이 많았고 괜찮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뿐입니까 1차 여행 때 사도행전13장9절에 보면 바울을 세우는 일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바나바는 항상 성경에서 본래 이름은 요셉인데 별명을 격려자로 바나바라는 이름으로 사도행전4장36절에 그러니까 이 사람은 사람중심인 사람입니다 바나바는 알고 보면 바울은 바나바와 완전히 반대의 성격인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을 세우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자기와 반대 성격되는 사람을 조연자로 돕는 자로 붙여주신 겁니다, 
이게 인간관계에서 성경에서만이 아니고 보통 인간관계에서 똑 같습니다, 
부부관계도 마찬가지고 성품이 다른 사람끼리 만나게 하십니다, 
부부가 똑 같으면 재미가 하나도 없을 겁니다, 달라야 서로 싸움하면서 같이 자라나는 겁니다, 똑같이 여기도 보면 다른 사람을 붙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성품이 다른 사람을 바울에게 주셨기 때문에 바울이 이 사람을 통해서 더 힘을 받으면서 하나님이 바울에게 주신 아나니아에게 주신 사도행전9장15절의 사역을 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바울을 이렇게 키우시는 겁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 좋은 사람과 결별하게 하시느냐 이것도 의문인 겁니다, 
바울을 하나님이 쓰시기 위한 계획인데 바울이 이런 계획된 일을 하도록 발판을 만들어 주신 분이 바나바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열두제자가 아니거든요 오리지널 예루살렘그룹이 아닌 겁니다, 
기독교계에서는 아주 알려지지 않는 소위 말하면 발판이 없는 사람이 바울입니다 이 사람이 발판을 딛고 올라설 수 있도록 만드는 일을 하게끔 하는 분이 바나바입니다 하나님의 시각으로 보면 이제는 됐다 바나바 너 조연급은 여기서 끝났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헤어지게 하는 방법 중에 하나가 마가를 통해서 서로 성격이 다르니까 사람중심인 사람과 사역중심인 사람이 한번 부딪치게 만드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부딪쳤다, 
라고 하는 겁니다, 그것도 보통 부딪친 게 아니고 아마 엄청나게 싸움을 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생각은 누구에게 초점이가 있습니까, 
바울에게 초점이가 있는 겁니다, 만약에 바나바와 부딪치지 않고 헤어지지 않았더라면 바울이 사역을 하는데 상당히 불편한 겁니다, 
왜 그럴까요, 바울의 리더십에 항상 불편을 줄 수 있는 그러한 존재가 바나바인 겁니다, 바나바가 아무리 사람이 좋아도 왜냐하면 바울입장에서 그런 겁니다, 바울입장에서 뭐냐면 이 사람은 내가 신세진 내 선배다 바울입장에서 보면 신세진 내 선배인데 나이도 나보다 많고 상관입니다 항상 지도자로 바나바를 모셔야 됩니다, 그런 사람을 옆에 모시고 있으면 바울이 일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하나님이 바울을 마음껏 쓸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바나바를 떠나게 한 겁니다, 바나바는 자기조카 마가를 데리고 구브로로 선교여행 갔다 하고는 그 후에 소식이 성경에 기록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분은 조연급사역이 끝났다는 것과 똑같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바울의 본성과 이분의 사역의 특징을 보시길 바랍니다, 
제목은 바울의 본성과 사역의 특징 바울은 이분의 스타일이 뭐냐면 독립적인 사역을 하는 사람입니다 예루살렘사람들의 지시를 받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안디옥교회에서 파송은 했지만 이분이 안디옥교회를 통해서 헌금의 도움을 많이 받지 않아서 본인이 직접 텐트 메이커 자비량사역을 했던 사람입니다 바울이 아주 독립심이 강했습니다, 왜냐면 하나님이 그분에게 주시는 것이 있기 때문에 주님과의 관계 속에서 사람들을 컨트롤을 받지 않으려고 돈 좀 받으면 그분들의 컨트롤을 받거든요 그러다보면 이분이 가는 길이 제대로 가지 않고 사람중심으로 갈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철저하게 이분에게 이런 성품을 주셨습니다, 
그다음에 이분의 성품 중에 두 번째가 사람중심이 아니고 사역중심이었습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는 이 사람은 과정보다는 목표중심적인 사람이었습니다, 빌립보서3장14절에 내가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부르신 상을 위하여 쫓아가노라 이 단어 하나하나가 이분의 목표가 뚜렷하다는 겁니다, 자기가 지금 하고 있는 것이 푯대를 향해서 자기가 달려가고 그다음에 뭐라고 썼냐면 예수님 안에서 푯대가 분명하고 하나님이 나를 불렸는데 그냥 부른 목적이 뭐냐면 상이 뒤에 있다는 겁니다, 
이것을 위해서 쫓아가노라 이랬습니다, 쫓아간다는 말은 영어성경에는 무엇으로 했는지 한번보세요 더 프레스 온(The Press on)이라 그랬습니다, 
프레스라는 것은 드라이크리닝 집에서 누르는 것 그것을 프레스라 합니다, 주름을 피게 막 민다는 겁니다, 프레스 온 이라는 말은 계속해서 이 목적을 향해서 내가 다리미질 하면서 꽉꽉 눌려가면서 내가 최선을 다해서 간다는 겁니다, 이 사상이 바울사상입니다 바울사상을 답습하시려면 이 목표가 뚜렷하고 그다음에 하늘나라에 가서 어떤 상급이 있다는 것을 뚜렷한 사상을 가지고서 매일매일 프레스 온 하셔야 합니다, 
이것 안하시는 분은 안 하셔도 괜찮습니다, 
그 대열에 못 들어가는 사람입니다, 그 대열에 들어가시려면 이 사상이 뚜렷해야 되는 겁니다, 안하면 자기만 손해입니다, 그다음에 이분의 성품이 뭐냐면 사역의 특징이 뭐냐면 이 사람은 한자리에 머물던 사람이 아닙니다, 
순례선교사였습니다, 이분은 고린도에 약2년 정도 계셨고 그리고 에베소에  3년 계셨고 나머지는 순례했던 분이십니다, 
왜냐면 여기저기. 여기저기 순례하면서 교회를 개척하고 지도자를 세우고 지도자를 훈련시키고 주로 소프트웨어를 제공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소프트웨어 그쪽동네 교회 건물을 세우지 않았습니다, 
하드웨어를 세운일이 없었습니다, 하나 세웠다면 두란노 서원을 세웠는데 에베소에 그것도 건물을 샀다는 이야기는 없었습니다, 
아마 임대한 모양입니다 그것도 바울이 돈을 지불한 것이 아니고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분명히 거기에 헌금한 걸로 생각합니다, 
그 외에 이분이 교회를 세웠다는 것은 하드웨어를 세운 것이 아니고 소프트웨어 가정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다음에 여섯 번째 이분의 사역의 특징이 문서사역입니다 13권의 책을 썼던 겁니다, 
그다음에 일곱 번째 이분이 선교사를 파송하는 사역을 했습니다, 
제자들보고 너희들 고향 다 떠나라 미전도 족속들을 향해서 달려라 그리고는 이분이 그랬습니다, 복음이 들어간 곳은 될 수 있으면 들어가지 말라, 
로마서15장20절에 나는 절대로 복음이 들어간 곳은 내가가서 교회개척하고 그 일을 안 한다는 겁니다, 그다음에 마지막으로 이 사람의 스타일은 자비량선교입니다 텐트 메이커 이런 사람하고 바나바하고 이게 맞겠습니까, 
안 맞습니다, 바나바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쓰셨지만 바나바와 헤어진 후에도 바울이 바나바를 한번 만난이야기가 성경에 나옵니다, 
갈라디아서2장11절에서14절에 보면 헤어진 후에 제 생각에는 같은 49년입니다 헤어지자마자 안디옥에서 일어나는 사건입니다 안디옥에 베드로가 왔는데 베드로와 바나바가 같이 않아서 이방인들과 같이 밥을 먹고 있는데 바울이 나타나니까 슬슬 피했다, 그랬습니다, 그럴 때 바울이 너 베드로야 그다음에 바나바까지 막 꾸중했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러니까 바울생각에는 나는 이제 당신들보다도 더 권위 있는 지도자라는 것을 영적 우월성을 노출하는 장면입니다, 
그다음에 내가 가지고 있는 바울신학이 은혜와 율법의 상관성 믿음을 가지고 있는 이 상관성이 신학의 위상이 있다는 것을 (베드로나 바나바는 구약적인 율법우월사상을 많이 가지고 계셨던 분들입니다)
이분이 노골적으로 말씀하시는 겁니다, 
거기다가 자기 직설적인 성품과 연합해가지고 직설적인 성품이니까 자기 윗사람들에게 베드로와 바나바는 그 앞에다가 대고 다른 사람 듣는대서 한마디하고 꾸중하는 장면입니다 이게 바울의 성품인 겁니다, 
그러니까 어떨 때는 직설적인 성품이 좋습니다, 소화를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상당히 시험이 될 때가 있습니다, 
바울과 마가가 헤어졌을 때 헤어진 후에 관계를 잠깐 봅시다, 
헤어진 후에 성경에 보면 바울과 마가가 동역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마가하고 헤어진 후에 그런데 바울과 마가가 동역했다는 기록은 없지만 두 관계가 가까웠다는 기록은 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마가가 내 아들이다 자신이 아들이라고 말한 기록은 있습니다, 베드로전서5장13절을 보면 베드로와 마가는 상당히 가까웠는데 아마 베드로와 바나바도 가까웠을 겁니다, 
그렇지만 마가와 바울은 가깝다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그런데 바울의 영적아들은 디모데입니다, 
그리고는 주후60년이 되었습니다, 갈라질 때는 주후49년입니다 11년 후에 바울이 골로새서를 쓰시면서 골로새서4장10절에 지금 마가도 로마에 나와 같이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마가도 아마 방문하셨던 모양입니다, 그 당시에 거기에 베드로도 같이 계시지 않았나 생각이 되는데 그럴 때 골로새서교인들에게 그러는 겁니다, 
마가가 언젠가는 너희들에게 방문할 수도 있는데 그때 너희들 마가를 우리 동역 자가 아니라고 그래서 냉대하지 말고 환영해주어라 이런 말이 나옵니다, 마가를 환영해주어라 골로새서4장10절입니다, 
그러니까 이미 바울의 입장에서는 마가를 용서해주고 마가를 사랑하도록 바울의 마음을 하나님이 변화시킨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는 또 7년이 흘렸습니다, 67년에 디모데후서4장11절에68년에 바울이 주님나라에 갔잖아요, 주님나라가기1년 전입니다 디모데후서4장11절에 디모데에게 편지를 쓰시면서 그 당시에 디모데는 어디에 있었습니까, 
에베소교회에서 목회할 때입니다, 그럴 때 디모데보고 디모데야 나 지금 감옥에 있으니까 나한테 오느라 하는 편지를 쓰실 때 그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느라 그런 말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마가가 그 당시에 어디에 있는 것 같습니까, 에베소에 계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마 디모데가 목회하는 에베소교회에 도움을 주었던 모양입니다 그러니까 그 마가를 나에게 데리고 오느라 그러는 겁니다, 그러면서 거기에 토씨를 하나 달았습니다, 
마가는 내 사역에 유익한 사람이다, 이렇게 토씨를 달아 놓았습니다, 
이 말은 디모데에게도 디모데야 옛날에는 내가 마가를 욕했지만 이제는 내가 안아준단다, 그러니까 너희들도 관계성을 잘 가져라 이렇게 한 겁니다, 바울은 지금 32년을 사역을 하시고 33년째 들어가면서 지금 큰 그림을 본 겁니다 디모데후서를 쓰실 때 보면서 아나니아에게 하셨던 말씀이 그대로 나에게 다 이루어 졌구나 하면서 자기가 회상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큰 그림을 주셔가지고 이것을 이루시기 위해서 나에게 조연으로써 다 이렇게 붙여주셨구나 저 사람들을 조연으로 그러니까 나와 성품이 다르다고 내가 저 사람들을 조금 마음 아프게 한 것들은 내가 실수를 했구나, 다 하나님이 다른 모습의 사람들을 나에게 조연으로 붙여주어 가지고 나를 이렇게 여기까지 오도록 하셨구나, 
나는 성품이 외골수 성품인데 바울은 그냥 눈 가리고 앞만 보고 달리는 외골수 성품입니다 주변을 보지 못하고 목표 지향적이고 관계성을 그렇게 중요시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이라면 막 밀고 나가는 이런 성품 이였는데 주님이 나의 이 약한 부분들을 커버 시켜주기 위해서 나와 성품이 다르고 교육수준이 다르고 가정환경이 다르고 문화와 사회에 다 다른 이런 다양한 사람들을 나에게 하나님이 붙여주셨구나 이것을 바울이 깨달은 겁니다, 
그러니까 이제는 큰 그림 속에서 모든 사람을 안아 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분이 그래서 이것을 언제 깨달았냐하면 제가 성경을 보면서 이분이 고린도전서를 쓰실 때 깨달은 것 같습니다, 고린도전서가 주후55년에 썼습니다, 그러니까 이분이 사역을 시작해서 10년 만에 깨달은 겁니다, 
그러면서 이분이 고린도전서를 보면 고린도전서12장은 뭐냐면 모든 사람이 은사가 다 다르다는 겁니다, 그다음에 13장에 와서 사랑장입니다 너희들이 아무리 방언하고 구제를 많이 해도 사랑이 없으면 안 된다 하면서 모든 사람을 사랑 안에서 안아주라는 겁니다, 무례히 행치 말고 오래참고 이분이 여기에서 자기와 다른 사람을 자기가 이렇게 해야 되겠다는 것을 깨달은 겁니다, 이게 바울이 10년 만에 깨달은 겁니다, 
그리고는 이분이 2년 후에 로마서를 57년에 썼습니다, 
로마서를 쓰시면서 이분이 로마서1장부터8장까지는 복음의 진수를 이야기하고는 그다음에 9장에서11장은 이스라엘과의 관계성을 이야기하고12장에 들어가서는 이분이 크리스천 라이프스타일을 이야기하는데 그때 이런 말을 합니다, 너희들이 사람이 다 믿음의 분량이 다르다는 것을 알아 라는 겁니다, 사람마다 믿음의 분량 로마서12장3절에 사람마다 믿음의 부르심의 분량이 다르다는 겁니다, 은사가 다르다는 말과 비슷한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을 보면 두 가지 사람이 있다는 겁니다, 
크리스천 중에서 사역적인 측면에서 바울이 어떤 사람은 너 한데 와서 열심히 너와 동역하다가 그분의 믿음의 분량이 차면 부르심의 목적이 그만하니까 너를 떠나게 된단다, 그러는 겁니다, 내가 떠나게 허락한단다, 
그 믿음의 분량이 차면 너를 떠날 때 어떤 사람은 너를 공격하고 너를 밉게 하고 너의 미음을 불편하게하고 너를 훈련시키게 하고 그 사람도 훈련받고 떠나게 한단다, 그리고 또 새로운 사람을 보내준단다 그 사람의 믿음의 분량만큼 또 한 다음에 또 떠나게 한단다, 잠깐씩 가서 이렇게 했다가 도와주고는 떠나는 사람들도 있단다, 그 사람은 또 다른데 가서 또 이러다가 또 떠난단다, 이런 사람들이 있다는 겁니다, 
두 번째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면 내가 너 한데 보내주면 죽으라고 안 떠나는 사람이 있단다, 그러는 겁니다, 
그분은 너와 계속가야 되는 사람이란다, 그러는 겁니다, 
조연들인데 두 가지 스타일의 사람들이 있단다, 그러는 겁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깨달은 겁니다, 바울이 뭐냐면 이것도 깨달은 겁니다, 
예수님의 달란트비유입니다 어떤 사람은 조연급인데 한 달란트 조연을 하는 사람이 있는 겁니다, 어떤 사람은 두 달란트 조연하는 사람이 있는 겁니다, 어떤 사람은 다섯 달란트를 조연을 하는 사람이 있는 겁니다, 
그런데 달란트가 많고 작고가 중요한 게 아니라는 겁니다, 
하늘에 상급이 똑 같다는 겁니다, 자기가 맡은 그 조연만 잘하면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달란트비유에서 마테복음25장에서 주님께서 두 달란트한 사람과 다섯 달란트한 사람을 똑같이 칭찬을 했습니다, 
토씨도 틀리지 않게 똑같이 칭찬했습니다, 
자기 분량만 잘 하면 되는 겁니다, 집사는 집사로써. 권사는 권사로써. 안수집사. 장로. 전도사. 선교사. 목사 자기 분량만 잘하면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하늘에 올라가서 바울이 받아야 하는 모든 상급을 그냥 같은 조연들이 다 나누어 가진다는 겁니다, 바울이 통째로 다 가지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에게 주시는 그 량을 바울과 조연했던 사람들이 다 나누어가진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바울아 이게 너 것이 아니다 너는 깃발 들고 앞으로 뛰는 사람이지 너 것이 아니다 나는 너에게 그런 믿음의 분량을 준 것이지 너 가 잘난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너 밑에 뛰고 있는 조연을 보아라, 
그분들과 다 나누어가져라 그러는 겁니다, 이것을 바울이 깨달은 겁니다, 그러니까 고린도전서13장과 같은 사랑 장을 쓸 수가 있었던 겁니다, 
믿음의 분량이 다르다 스케일이 서로 다른 것뿐이지 그 사람들이 다 모자이크로 모자이크해서 하나의 아름다운 그림을 만든다는 겁니다, 
그런데 바울이 그것을 깨닫지 못했을 때는 어떤 사람 이였냐면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한번 보세요, 갈라디아서는 주후49년입니다 바울이 사역을 45년에 했으니까 사역시작하고 4년 후에 썼습니다, 이때 바울이 갈라디아에 가서 열심히 복음을 전했는데 갈라디아 쪽 사람들이 바울을 싫어하는 이야기를 합니다, 저 사람은 베드로와 야고보가 전하는 복음을 안전하고 이 사람은 은혜의 복음을 전한다, 그럴 때 갈라디아서를 쓰면서 이분은 율법 복음은 틀렸다, 라고 쓸 때 이분이 갈라디아사람들에게 열을 엄청나게 받은 겁니다, 
그것뿐입니까, 열두제자들에게도 열을 받아 얼굴이 붉그락 할 때입니다, 
그때 이분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할 때 한번 보세요, 
갈라디아서1장10절에 이랬습니다, 이분들에게 내가 갈라디아사람들에게 또는 열두제자들에게 사람들에게 좋게 하라, 하나님께 좋게 하라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라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내가 아니다 이렇게 막 열을 내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뭡니까 갈라디아교인들아 너희들 내가 전하는 이 진실 된 복음이 이게 진짜 복음이다 너희들이 지금 말하는 율법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그것은 틀려먹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너희들 훈계한다, 
이놈들아 내가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갈라디아서를 쓰면서 너희들 틀려먹었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인용하는 겁니다, 
내가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다 사람들 기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막 이러고 나오는 겁니다, 그렇지만 주님이 딱 보실 때 뭡니까 바울아 너는 지금 그런 말 못할 거야, 너 가 지금 날 기쁘게 하기 위해서 막 열 받는데 너 성격이 그렇다 그렇지만 나중에 갈라디아사람들 복음을 전해놓고 이렇게 미워하니 저 사람들 다 그 사람들의 믿음의 분량이 있어서 그렸다 나중에 안아주어라 이것을 깨달은 겁니다, 바울도 그러니까 우리가 갈라디아서1장10절을 통째로 그것만 딱 뽑아놓으면 평생 이것만 가지고 울 겨 먹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면 수준이 어떤 사람입니까 영적어린애 수준입니다 이 사람이 나중에 주후60년에 빌립보를 썼을 때 보면 어느 정도 사람이 괜찮은 사람이 되었을 때입니다 뭐냐면 빌립보4장5절에 모든 사람에게 관용을 베풀어라 그러는 겁니다, 바울이 본래 이런 사람이 아니잖아요, 
이런 사람이 아닌데 이렇게 큰 그림을 보면서 모든 사람에게 관용을 베풀어라 그러면서 빌립보서3장14절에 내가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예수 안에서 이제는 하나님이 부르신 그 부르신 상급을 향해서 프레스 온((press on)하며 쫓아가노라 그러니까 푯대를 향해서 쫓아가는데 주변에 이런 사람들을 향해서 다 쳐다보면서 안아주면서 가라는 겁니다, 
너 가 푯대를 향해서 달려가는데 필요한 사람들이라는 겁니다, 
이 사람들을 안아주면서 가라는 겁니다, 다시 말합니다, 
바울은 목표지향적인 사람입니다 이 목표가 흔들리면 안 됩니다 목표 지향적이면서 주변사람들을 다 안아 주면서 가는데 주변사람들의 방해 때문에 목표가 깨지면 안 됩니다 그렇지만 목표를 정확하게 알면서 교통정리 잘하면서 가라는 겁니다, 우리 하나님도 목표가 뚜렷한 목표가 지향적인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기 위해서7000년의 시간을 만들어 가지고 목표가 뚜렷했습니다, 7000년 하나님의 인간 역사 속에서 처음4000년은 뭡니까 구약을 통해서 오실 예수에 대한 목표를 정확하게 이야기해주고 그다음에 나머지3000년은 뭡니까, 오신 예수님에 대해서 전하는 것이 정확한 목표였습니다, 예수님이 33년 동안 인간으로 오시면서 적당히 오셨으면 그냥 가신분이 아니잖아요, 정확한 목표를 가지고 33년을 지내고 딱 끝내시고 가신 분이십니다, 모세도 똑 같습니다 40년.40년.40년, 바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30년.33년 하나님의 계획은 딱 목표가 정확하였습니다, 바울에게도 많은 사람이 지나 갔습니다, 바울이 디모데후서를 쓰시면서 순교1년 전에 그랬습니다, 아시아에서 그렇게 내가 정성을 드려서 다 했는데 다 떠나버렸다 데마도 1차 감옥에 있을 때는 옆에 있었는데 지금은 없다 그런데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소수다 그럽니다, 디모데에게 내가 조금 있으면 떠날 텐데 디모데야 너 그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으라, 
그 사람들은 우리에게 주신 나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들이다 동역 자들이다, 떠나지 않는 동역 자들이다, 누가나 디모데나 두기고나 오네시보로나 에바브로디도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나 이런 사람들 마가 까지도 그렇다 마가를 데리고 오너라 이와 같이 바울이 큰 그림을 보시고는 바나바와는 이런 다툼이 있었지만 다툼은 하나님이 바나바를 통해서 바울이 이 만큼 자리매김을 하는데 쓰셨고 그러니까 너희들 그것 가지고 떠났다 그래서 서로가 불편해 하지 말고 이런 큰 그림 속에서 서로 안아주라 믿음의 분량이 서로 다르고 사역이 서로 다르다 그렇지만 이런 큰 그림 속에서 저는 이 말씀을 이렇게 보면서 여러분들은 저에게는 누가고 디모데고 두기고고 오네시보로고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고 에바브로디도고 마가 같은 사람들입니다 

기도드리겠습니다, 
예수님 우리가 예수님이 허락 하셔서 마지막 때에 목표를 향해서 같이 가라고 만나게 해 주셨습니다, 주님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만남에 대한 주님의 깊은 비밀을 깨닫게 하여 주시고 이 만남 속에서 주님을 더욱 사랑하는 우리 모두가 되도록 은혜 베풀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황용현 목사님 설교내용영상으로 보세요.
https://www.youtube.com/watch?v=5qrp5erImNU&list=PLPz9aN5emxOfGkkjER_gEkf6oGb5tJyRs&index=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