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강해 제16강, 예루살렘총회 (행15장1-35절) 2011년9월18일 말씀
오늘 사도행전15장은 아주 유명한 장입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사도행전15장하면 예루살렘총회다 이렇게 기억하시면 됩니다, 예루살렘총회라는 것은 기독교에서의 제1차 총회입니다
그러니까 전 세계 기독교 교단들이 많잖아요,
교단총회의 효시가 예루살렘총회입니다 우리나라도 대한예수교 장로회 제 몇 차 총회다 할 때 그 몇 차가 근본으로 따지면 여기까지 가는 겁니다,
예루살렘총회까지 그러면 그 말씀이 어디 있습니까,
하면 사도행전15장입니다 이렇게 기억하여 두시길 바랍니다,
15장1절에서35절까지인데요 제가 길기 때문에 읽지 않지만 설교 중에서 그 내용이 다 나올 겁니다, 15장에 들어가기 전에 지난 시간에 했던 말씀을 간단하게 정리하여 드리겠습니다, 지난시간 말씀을 다시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1차 선교여행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안디옥교회가 지도자 다섯 명이 있었는데 다섯 명의 이름이 바나바. 시므온. 루기오. 미나엔. 사울 이렇게 다섯 명입니다 이 다섯 명이 항상 주를 섬기면서 금식을 했습니다,
그럴 떼 성령님이 이분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불려 이르기를 이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는 겁니다, 그래서 성령님이 말씀하시는 겁니다, 내가 불려 이르기를 이 일이 뭔가 그것은 지상계명과 지상사명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따로 세우라 그래서 이분들이 순종한 겁니다, 그리고 이분들이 금식하고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해 가지고 선교사로 파송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질문이 하나 있는 게 왜 예루살렘교회는 이런 지시가 없었나,입니다,
안디옥교회만 이런 지시가 있었을까 하는 질문이 있을 수 가 있습니다,
그럴 때 제가 지난시간에 말씀을 드리기는 그릇이 준비가 안 되어서 그렇다, 라고 제가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는 제가 무슨 말씀을 드렸냐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데 열 가지 방법이 있다고 제가 말씀드렸습니다,
지난시간 것을 다시 한 번 복습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는 1차 선교여행을 시작하는데 안디옥을 떠나가지고 북쪽8km 해안가 도시 실루기아로 갔습니다, 거기서 배 타고는 구부로 섬으로 갔습니다,
살라미에 들려서 바보에 갔습니다, 바보에 총독 서기오 바울을 복음화 시키기 위해서 바나바와 바울이 이분에게 가가지고 예수님을 이야기하는데 방해하는 박수 엘리마라는 사람이 방해하는 것을 보고는 갑자기 바울이 나타나가지고 바울이 설교를 하는 겁니다,
거기서부터 시작해서 13장9절 이야기입니다,
9절부터 시작해서 사울이라는 이름이 바울이라는 이름으로 바뀌는 장면입니다 성경에 보면 바울이라는 이름이 그 순간부터 바뀌기 시작하는 겁니다,
바나바와 바울이 구브로 선교에 가장 핵심이 되는 총독 서기오 바울을 개종시키는 장면입니다 그 후에 이분들의 사명이 끝났으니까 거기에서 베를 타고는 밤빌리아로 가는 겁니다, 거기에 버가라는 도시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데 갑자기 데리고 갔던 마가가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밤빌리아 지방에서부터 비시디아 지방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남 갈라디아 지방으로 해서 남쪽으로 길리기아지방에 다소가 있습니다, 바울의 고향이 길리기아지방 다소가 고향입니다,
그래서 이쪽 지방을 선교목표로 해서 갔습니다, 비시디아지방에 안디옥이라고 또 있습니다, 비시디아의 안디옥에 도착해가지고 흩어진 유대인 크리스천들을 향해서 바울이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이고니온 그다음에 루스드라는 디모데의 고향입니다 거기서 더베로 가고 다시 귀한 할 때 앗달리아라는 항구도시에 들린 겁니다,
앗달리아에서 배를 타고는 구브로에 들리지 않고 안디옥으로 다시 돌아가는 장면입니다, 이게 지난시간에 공부한 내용입니다,
안디옥에 돌아왔는데 바울의 마음이 편하지가 않는 겁니다,
왜냐면 복음을 전하였는데 안디옥에 와 보니까 안디옥에 있는 지도자들이나 교인들이 수군수군 거리는 겁니다, 그리고는 바울에 대해서 이상한생각을 가지고 있고 왜냐면 이미 복음을 받았던 사람들이 그동안 가지고 있었던 신앙노선과 바울이 가르치는 신앙노선과 차이가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예루살렘교회에 있는 지도자들에게 보고가 다 들어간 겁니다,
바울이라는 사람이 우리에게 복음을 전하였는데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이 사람이 이단 같습니다, 이러는 겁니다, 특히 구원론에서 이야기할 때 차이가 있는 겁니다, 그래가지고 예루살렘교회에 열두제자들도 그렇지만 더 심하게 바울에 대해서 반감을 가진 그룹들이 나오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 그룹이 누구냐면 소위 바리새인출신 중에 기독교인이 된 사람들입니다 출신이 중요합니다, 바리새인 출신들인데 기독교인이 된 사람들이 이런 소리를 듣고는 그냥 열을 내는 겁니다, 열을 내어가지고 우리가 안디옥에 올라가서 바울과 바나바를 혼내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이분들이 올라온 겁니다,
안디옥에 와서 바울을 눈에 독기를 가지고는 쳐다보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서 바울보고 그러는 겁니다, 당신이 다른 구원관을 가르치고 그것이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주어가지고 사람들이 기독교의 복음이 지금 구원론이 변질되고 있는 소식이 우리에게 지금 보고가 들어왔다 그러니까 너 조심해라 그러는 겁니다, 그래가지고 바울이 뭐가 다르나 그러니까 이 사람들이 당신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주지 않는 구나 복음을 전하면서 사람들에게 할례를 주지 않으면 구원이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구원의 핵심은 뭐냐면 할례를 받아야 된다는 겁니다,
이렇게 바울에게 덤벼드는 겁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거기서 이분들과 변론을 시작하는 겁니다, 15장2절에 보면 바울이 이들과 큰 다툼이 일어났다 그랬습니다, 헬라말로는 스타시스라는 말인데 불화 의견충돌 이런 뜻입니다,
큰 다툼이 일어났고 그다음에 변론이 일어났다 그랬습니다,
이것 때문에 논쟁이 일어난 겁니다, 그래가지고 바울에게 삿대질을 하면서 너는 이단이다 지금 예루살렘교회에 계신 열두제자들도 이런 부분에서 너 가 가르치는 식으로 안 가르친단다,
구약을 존중하고 그랬는데 너는 어떻게 된 거냐 그러니까 바울이 이것 때문에 아주 착잡하여 진 겁니다 열심히 선교를 하고 있는 안디옥교회에 분란을 야기 시킨 겁니다, 그리고는 1차 선교여행 갔다 와서 교회가 이제 축하를 해야 되고 교회가 잔치 속에 들어가려고 하는데 아주 찬물을 끼 얻는 겁니다, 영적리드에 도전을 하고 이분들의 영 권에 도전을 하고 교권에 도전하는 이런 생각을 했음이 틀림없었습니다,
바울이 구원론 이런 말을 하기까지 그분이 주님을 만나가지고 10년 이상을 주님과 대화해서 받은 메시지거든요 바울이 개종을 언제 하였습니까,
35년에 개종해가지고 45년에 안디옥교회에 갔습니다,
거기에서 또 1년 같이 있고 2년 선교여행하고 예수님을 만난 후에 13년을 묵상하면서 받은 메시지입니다 이 구원론을 바울이 볼 때는 그런 겁니다,
이 사람들은 덜 익은 열매들이다 괜히 종교성이 있어서 소리나 지르지 영적 유아들이다 나중에 갈라디아서에서도 이런 사람들을 바울이 말씀하시기를 영적 초등학문을 가지고 있으면서 너희들이 까분다, 그러는 겁니다,
바울이 볼 때는 너희들은 영적 애꾸들이다 한쪽밖에 못 보는 그리고는 색맹이라고 할까요, 근시안적인 이런 사람들이 기독교에 대해서 조금 배웠다고 조금 안 다고 깨달았다고 호들갑 부리는 모습이 바울의 눈에는 보이는 겁니다, 이분들은 자기가 아는 것이 가장 최선이고 최고로 생각하는 겁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종교적인 배경 때문에 안하무인으로 사람을 보고 교만하고 거기다가 조금 안다고 열을 내면서 말을 하고 알고 보면 별것 아닌데 그러면서 남을 정죄하는 겁니다, 비난하고 비평하고 이단이라고 정죄하고 이런 모습을 보면서 우리나라에도 제가 볼 때는 이런 모습들이 있습니다,
별로 알지도 못하면서 나 신앙생활 오래했어 어느 유명한 대형교회 나갑니다, 그러면서 웬만한 말은 잘 듣지도 않고 알고 보면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런 일들이 있습니다, 남을 또 정제까지 합니다,
바리세파출신 크리스천들의 특색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 안에 들어와서 구원받은 사람들인데도 자기의 문화적인 백그라운드 사회적인 환경적인 또 교회적인 배경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이 바리새인이 되어가지고 이분들이 가지고 있는 특색이 자기가아는 교회. 자기교파. 자기교단. 자기전통 이것이 최고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 우월사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두 번째로 예수님 안에서의 타 교리나. 타 교파나. 타 교단이나. 타 전통을 배격하는 이런 사람들이 대표적입니다, 그리고는 세 번째 이런 사람들을 이단으로 정제하고 네 번째로 얕보는 이런 특색들이 있습니다, 과거2000년 기독교 역사를 보면 항상 이런 그룹들이 있었습니다, 어느 교회나. 어느 교단이나.
어느 나라나 민족의 차이는 조금 있지만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닙니다,
특히 우리나라가 이 부분에서는 더 강한 것 같습니다,
우리 민족성 때문에 나오는 조금 다른 사람들은 다른데 보셨지만 자기가 애꾸인 것을 모르는 겁니다, 그러면서 눈 크게 뜬 사람을 뭐라고 그럽니까,
자기가 녹색 썬 그라스를 끼고 있으니까 모든 색깔이 다 녹색이 되어야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선 그라스를 빨리 벗어버려야 다른 색이 보이는데 우리가 가지고 있는 약점입니다,
이들이 안디옥교회에 대한 태도가 뭔지를 우리 같이 봅시다,
첫째로 바울과 바나바에 대한 이단성에 대해서 비난하고 비평했습니다,
그 이단성의 내용이 뭐냐면 모세율법 되로 할례를 주지 않는 다는 겁니다, 특히 갈라디아서2장1절에 보면 바울이 디도는 그레데 섬 출신입니다 헬라사람인데 디도를 이미 1차 여행 때 디도를 복음화 시켰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마 안디옥까지 데리고 갔던 것 같습니다,
나중에 보면 그런 이야기가 나오거든요, 이 사람을 할례 시키지 않고 그냥 멤버로 받아들인 겁니다, 이런 소문을 다 들은 겁니다,
어떻게 당신은 이방인을 할례도 안 시키고 기독교인화 시키느냐 그것은 말도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분들이 안디옥교회를 보는 눈은 당신들이 이렇게 이단사상을 1차 선교여행을 하면서 뿌려놓고 조금 있으면 2차 갈 테고. 3차 갈 테고 하면서 우리가 복음을 뿌려놓았던 밤빌리아. 비시디아. 남 갈라디아 이 지역 사람들을 혼 돈 시킨다는 겁니다,
혼돈. 변질 시킨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너희들은 안 된다는 겁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해법을 변질시킨다는 겁니다,
여러분들 교단의 특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지금도 여기서 보면 이분들은 예루살렘교회의 법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 이게 어느 세대나 어느 나라나 똑같습니다, 보면 일관적으로 교단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교단의 특징은 첫째가 세례의식이 서로가 다릅니다,
어떤 때는 물을 뿌리고 어떤 때는 물속에 들어가는 침례 그다음에 교단이 의식의 차이가 예배의식이 다릅니다, 세 번째는 조직이 다릅니다,
예컨대 로마 카톨릭은 교황조직입니다 그것이 싫어가지고 나온 성공회는 소위 대주교가 제일 높은 분입니다 감리교는 감독제도입니다 장로교는 교단장이라는 이름이 있습니다, 침례교도 교단장이라 그럽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분들은 이런 조직이나 세례의식이나 예배의식이 다르기 때문이지 구원의 요건은 같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서로 연합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지금 이분들은 바리새파출신의 예루살렘 분들은 어떤 생각을 하였냐면 구원의 요건이 다른 겁니다, 그래서 구원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면 할례를 받아야 되고 또 모세의 율법을 지키고 순종해야 된다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분들은 사명감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올라가서 저 사람들을 새롭게 변화시켜야 된다는 겁니다,
이런 뜨거운 마음 때문에 이분들이 안디옥으로 올라간 겁니다,
안 그러면 바울이나 바나바나 다른 사람들이 구원이 애매모호 화 될 가능성이 있고 그 사람 때문에 선교지가 잘못되는 것을 걱정하고 이분들이 안디옥으로 올라간 겁니다, 그러니까 서로가 다투는 겁니다,
이 문제 때문에 다투고 서로 변론했는데 이게 해결이 됩니까,
바울이 이분들 말 들을 것 같습니까 안 듣습니다,
그리고 이분들도 바울 말 들을 것 같습니까 안 듣습니다,
이 종교싸움은 교리싸움은 이렇게 무섭습니다,
그래서 서로가 평행선으로 가는 겁니다, 해결점을 찾을 수 가 없는 겁니다, 바울은 이분들과 싸움을 하면서도 속으로는 가소롭다 답답해 죽겠네 이 꽉 막힌 사람들과 영적 유아들과 내가 무슨 말을 할 것인가 그릇이 적은 사람들 하고 바울은 답답했지만 그 이상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겁니다,
납득시킬 수 있는 방법도 없고 해결할 돌팔 구가 없는 겁니다,
바울의 답답함을 안디옥교회 지도자들이나 장로들이 주변에서 본 겁니다,
보니까 이게 문제해결이 안 된다, 면서 바울보고 그러는 겁니다,
이게 문제가 해결 안 됩니다, 저 사람들 못 고칩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예루살렘으로 내려가십시오, 바나바와 같이 내려가서 그래도 파워를 가진 열두제자들에게 당신의 신학을 설명해 주세요,
그렇게 된 겁니다, 그때 바나바와 바울이 몇 사람을 데리고 가는데 그중에 디도까지 데리고 간 겁니다, 디도는 하나의 좋은 예이거든요 디도는 할례를 받지 않는 이방인의 예입니다 그러니까 디도까지 데리고 간 겁니다, 예루살렘에 도착했습니다, 성경에 보면 그랬습니다, 열두제자들과 거기에 있는 장로들이 다 와서 인사하고 그런데 바울이 설명을 합니다,
1차 선교여행 보고를 그 사람들에게 합니다, 선교보고가 끝나는 순간에 바리새인 출신의 기독교인들이 막 열을 내면서 하는 말이 당신들 이방인들을 복음화 시키면 그 사람들에게 할례를 주어야 된다, 그러는 겁니다,
그다음에 이들에게 모세의 율법을 꼭 지키게 해라 아니면 구원이 없다, 라는 겁니다, 이렇게 하면서 이분들이 또 열을 내는 겁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사면초가가 된 겁니다, 그러니까 열두제자들도 안 되겠다는 겁니다,
베드로와 야고보가 볼 때 이문제가 심상치 않는 겁니다,
성령님이 그분에게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그 지도자들이 그러는 겁니다, 그러지 말고 우리가 총회를 한번열자 그것이 예루살렘총회입니다 이 문제 때문에 예루살렘총회가 열려진 겁니다, 교단 총회입니다 이 예루살렘총회는 아까 말한 대로 기독교의 첫째 되는 총회고 총대는 열두 사도들과 장로들이다, 그럽니다, 총회를 열고 총회위원장이 제 생각에는 베드로 아니면 야고보인데 위원장이 누구라고는 나오지 않지만 어떤 분들은 야고보일 수도 있다는 겁니다, 야고보라고 우리가 생각하면 왜냐면 예수님의 동생이니까 이 사람은 열두제자는 아니었습니다, 오리지널 열두제자가 아니기 때문에 예수님이 부활 후에 기독교인이 된 사람입니다 오리지널은 아니지만 예수님과 관계 때문에 제자들이 이분을 높여 습니다,
이분이 아마도 거기에 총회장이 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분이 총회를 열고는 여러분들 이 사건에 대해서 토의합시다,
그러니까 그 안이 아수라장이 된 겁니다 성경에 보면 찬반론이 여기저기서 오가고 아수라장이 되어 버린 겁니다,
그래서 제가 그 내용을 읽으면서 보니까 항상 이런 모임이 있으면 그 안이 항상 세파가 있습니다, 우파. 그다음에 중도파. 좌파가 항상 있는 겁니다,
어디가나 이 세파는 항상 존재합니다, 기도교안에서만이 아닙니다,
일반직장에서도 사회에서도 심지어는 가정에서도 주님이 허락하신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안에서 지금 예루살렘총회에서 우파는 어떤 사람입니까,
유대인우월주의자들인 겁니다, 자민족우월주의자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뭐냐면 복음은 오직 유대인의 전유물이다, 라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렇지만 이방인이 복음을 받으려면 꼭 할례를 받아야 되고 모세율법을 따라주어야 된다는 겁니다, 안 그러면 구원이 없다, 라고 보는 우파가 있습니다,
소위 보수파들입니다 좌파는 어떤 사람입니까 좌파는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하나님이 볼 때는 다 하나다 그다음에 할례를 받을 필요도 없다, 라고 보는 겁니다, 그다음 중도파들도 있습니다, 이 두 파를 잘 비빔밥 만드는 파들도 있습니다,
이런 분위기가 이렇게 보이는 가운데서 성령님이 베드로에게 딱 말씀하시는 겁니다, 베드로를 감화 감동시키는 겁니다, 지금 이 안이 아주 복잡하고 어수선하고 이러니까 성령님이 베드로에게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베드로야 너 나가서 한마디 해라 그래서 베드로가 나와 가지고 발언하는 장면이 15장7절부터11절까지입니다 베드로가 말씀하시는 내용을 보면 베드로 본인이 이방인을 향해서 복음을 전한 경험이 있습니다,
사도행전10장에서 고넬료 가정을 복음을 전한 경험을 예화로 들면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내가 경험했는데 하나님이 나를 택하여 가지고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해서 내가 전해보니까 이방사람들도 유대인처럼 우리처럼 성령을 받는 것을 내가 보았다, 라는 겁니다,
내가 이분들 보고 할례 받으라고 말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런데도 이분들이 예수를 구주로 믿음으로 저들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보고 예수님을 영접했다는 겁니다, 그게 은혜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은혜로써 복음은 믿음인데 믿음으로써 구원을 받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겁니다, 이것이 전통적인 사도바울의 구원론입니다 그러니까 자기 경험한 것을 이야기하면서 너희들 바리새파크리스천들아 너희들 열 내지 말라 진짜 복음은 내가 경험하여 보니까 바울이 가르친 내용이 맞다,
는 겁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겁니다, 베드로가 그러면서 그러는 겁니다,
지금 열 내는 친구들 보고 그러는 겁니다, 우리조상과 우리는 능히 메지 못하는 멍에를 우리들의 목에다가 걸려고 그러느냐 이 말이 뭐냐면 너희들 그렇게 고집부리면 주님이 나에게 멍에를 메게 하신다, 그러는 겁니다, 내가 너희들 잘못 가르쳤다고 주님이 나에게 책망 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 제자들이 너희들 때문에 하나님께 욕먹기 싫다 이런 소리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까 너희들 생각을 바꾸어라 는 겁니다, 바울이 옳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11절에 이분이 결론을 내렸습니다,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는 것이지 이렇게 할례를 하고 모세의 율법에 순종하므로 구원받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베드로가 딱 이러니까12절에 뭐라고 그러느냐면 이 총대들이 열 내던 사람들이 온 무리가 가만히 있었다고 그랬습니다,
한 사람도 말도 못하고 가만히 듣고 있었고 성령님에 감동받아가지고 총회장이 아주 조용해진 겁니다, 그러니까 이 총회는 은혜 서러운 총회였습니다, 우리나라도 기독교신문을 보면 총회가 열리면 총회가 싸움판입니다 사회자를 우습게 알고 예수님이 계신지 모르는 겁니다,
기도는 그렇게 해놓고는 그러니까 총회에서 삿대질하고 싸움하고 돈 봉투 서로 왔다 갔다 하고 이런 답니다, 여기 지금 예루살렘총회는 이게 제대로 된 총회입니다 지도자가 성령님에 한마디 하니까 조용해지는 총회입니다 이게 기가 막힌 총회입니다, 베드로의 한 마디로 조용해지니까 성령님이 야고보에게 하시는 말씀이 야고보가 일어나가지고 베드로가 한말을 옹호하는 발언을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지도자서로가 하나가 되어 있는 모습입니다,
옹호하는 발언은 13절부터18절까지 옹호하는 발언이 뭐냐면 이방인을 선교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베드로가 한 말 너희들이 들어봤지 그러면서 야고보가 뭐라고 그러느냐면 우리는 이방인 선교해야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분들에게 이런 율법을 강요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이분이 지혜를 받는데 아모스 선지자아모스9장11절12절을 인용하는 겁니다, 그때는 성경책이 없는 되도 인용을 하는 겁니다,
그러면서 아모스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 중에 모든 이방인들이 주를 찾게 해야 된다는 겁니다, 그런 내용이 거기에 있는 겁니다,
그러면서 야고보가 베드로의 말씀이 맞다 너희들 지금 할례가지고 지금 이렇게 난리를 치는데 할례 안 받아도 된다, 그러면서 우리는 이방인 선교를 해야 된다, 라고 외치는 겁니다, 야고보서를 언제 섰냐면 총회가 끝나자마자 야고보가 야고보서를 쓰지 않았나, 그럽니다,
안 그러면 총회 전에 같은 49년에 야고보는 어디에다가 야고보서를 섰냐면 터키지방 본도. 갑바도기아 이쪽지방 사람들에게 편지를 섰습니다,
그리고는 나중에 우리 보겠지만 바울이 총회가 끝나자마자 나중에 안디옥으로 가가지고 바울이 남 갈라디아사람들에게 다시 말하면 자기가 방문했던 남 갈라디아사람들에게 갈라디아서를 쓰신 겁니다,
갈라디아서는 뭐냐면 율법과 은혜에 관한 이야기를 쓴 게 갈라디아서입니다 총회가 끝나자마자 어떤 분들은 총회 전에 쓰셨다 하는데 갈라디아서2장을 잠깐 보면 거기 내용에 의하면 총회 후에 섰습니다,
야고보가 이렇게 베드로의 발언을 옹호한 후에 절충안을 제시하는 겁니다, 내 의견에는 이방인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히면 안 된다는 겁니다, 괴롭힌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면 그런 사람들에게 할례를 받으라고 괴롭히지 말고 모세오경을 꼭 지켜야 된다고 괴롭히지 말라는 겁니다,
괴롭힌다는 말은 그 말입니다, 그렇지만 예외조항을 여러분들에게 타협안으로 내놓겠다는 겁니다, 예외조항이 뭐냐면 모세율법 중에서 지킬만한 것 네 가지만 지키기를 내가 제안한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20절에 제안이 나옵니다, 뭐냐면 첫째 우상에게 바친 제물을 먹지 말라, 두 번째 제안은 음행을 하지 말자 미혼자들에게 음행을 하지 말고 세 번째는 목메어 죽인 고기를 먹지말자 네 번째는 동물의 피를 먹지말자,
많은 율법 중에서 야고보가 이 네 가지를 제안하는 겁니다,
제 생각에는 그 당시 그 지역에 이런 일들이 많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러니까 이것만 우리가 교통정리하면 되고 나머지는 우리가 안 해도 된다는 겁니다, 구원과 관계가 없다 이것도 구원과는 관계가 없다, 라는 겁니다,
그래가지고 야고보가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또 하시는 말씀이 우리가 결정한 것을 이것을 서면으로 정리해가지고 편지를 써가지고 이것을 각 지방마다 보내자는 겁니다, 그래가지고 거기에 서기관들이 이것을 다 써서 보냈습니다, 그리고 성경에서는 반대자가 한 사람도 없었다, 그랬습니다,
만장일치로 결정했다, 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 편지를 섰는데 편지내용이 23절과29절입니다, 편지내용을 잠깐 봅시다,
사도와 장로 된 형제들은 안디옥과 수리아와 길리기아에 있는 이방형제들에게 문안하노라 들은즉 우리가운데 어떤 사람이 우리가 시킨 것도 없이 나가서 말로 너희를 괴롭히는데 괴롭힌다는 말은 할례 받으라,
모세오경 모세율법을 지켜라 이렇게 하고 있는데 그래서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흩트려버린다는 겁니다, 자꾸 이런 소리 저런 소리 해가지고 복음을 핵심에서 벗어난 소리를 자꾸 하니까 그래서 이분들이 뭐라고 그러느냐면 사람을 택하여 다시 말하면 바사바라 하는 유다와 실라를 공동총회에서 나중에 뽑았습니다, 이분들을 뽑아가지고 바울과 바나바를 붙여가지고 안디옥으로 올려 보내면서 이분들이 대변인 노릇을 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을 택해서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아니한 자인 25절26절에 보면 이 편지 속에서 바나바와 바울을 높이는 장면입니다 뭐라고 높이느냐면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아니한 자인 우리가 사랑하는 바나바와 바울과 이렇게 써놓았습니다, 이 사람들을 아주 높이는 장면입니다, 이것을 공식적으로 편지에다가 집어넣은 겁니다, 이 사람들과 함께 다시 말하면 유다와 실라와 바나바와 바울이 함께 우리가 일치가결 된 이 편지를 너희들에게 보낸다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28절에 그랬습니다,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 아무것도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할 것이라 이 요긴한 것이 아까 네 가지 예외조항입니다 이 네 가지 조항만 빼놓고 29절에 복음은 구원을 예수님을 은혜로 믿고 믿는 것으로써 구원받는 것이지 이런 율법을 지켜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편지로써 정확하게 말씀한 것이 이것이 소위 사도바울의 구원론과 같은 맥락으로 확인시켜 준 겁니다,
예루살렘총회에서 그러니 바울이 기분이 좋았습니다,
바울의 속이 시원했던 겁니다, 그래가지고 바울이 바나바와 같이 유다와 실라를 데리고서 안디옥으로 귀환하는 장면이 30절부터입니다
그래서 작별인사를 하고 안디옥으로 내려갔다, 라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무리를 모아놓고 편지를 전하는 겁니다,
무리들이 다 듣고는 이 글을 읽고는 위로의 말을 하면서 기뻐하는 겁니다, 그리고는 이것이 다 된 다음에 유다와 실라를 그분들이 선지자라 그랬습니다, 32절에 보면 이분들이 일어나서 한마디씩 하는 겁니다,
우리가 이렇게, 이렇게 해서 총회를 열어가지고 이렇게 해서 당신들 지도자들이 재확인 받았다 그러면서 안디옥 팀들에게 권면하고 권면이라는 말은 격려해주었다는 소리입니다 격려해주고 믿음에 굳게 서라,
움직이지 말고 너희 믿음을 굳게 지키고는 선교 일을 열심히 해라, 이렇게 말해 준 겁니다 33절에 보면 이분들이 유다와 실라가 예루살렘으로 다시 귀환했다, 라고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안디옥교회가 제자리 메김이 되었습니다, 그다음에 34절을 보면 바울과 바나바가 안디옥 교회에서 다른 사람과 함께 주의 말씀을 가르치며 전하니라 바울과 바나바와 같은 교회 팀들이 뭘 했느냐면 그분들이 하는 사역이 먼저 가르치는 사역을 한 겁니다,
우리교회가 그래서 가르치는 사역을 하잖아요, 우리 지금 이 설교도 가르치는 사역을 하는 겁니다, 가장 중요한 것이 뭐냐면 가르치는 것을 잘 해야 됩니다, 그다음에 전파라는 말을 섰는데 그 말이 설교라는 말입니다 그르치면서 설교도 해주고 가르치는 것을 조직적으로 주욱 가르치는 것이고 설교는 메시지를 탁 탁 뱉어내는 겁니다, 이것이 우리의 사명인 겁니다, 아멘,
열심히 적으시면서 내 것으로 만들어야 가르치는 것이 가능합니다,
제가 여러분들에게 괴롭히는 것이 아닙니다, 괴롭히는 것은 율법을 지키라고 괴롭히는 겁니다, 이것을 꼭 하셔야 됩니다, 안하는 사람은 한마디로 말하면 나중에 후회합니다, 이렇게 이분들이 했는데 바울이 안디옥에 와 가지고 가르치면서 설교도 하지만 바울의 마음속에는 뭐가 있느냐면 자기가 1차 여행 때 복음을 전했던 저쪽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아직도 마음이 풀리지가 않는 겁니다, 총회에서 준 편지 한 장 가지고는 가르치는 일이 되지 않는 겁니다, 왜냐하면 남 갈라디아사람들이 구원론에 문제가 있는 겁니다,
행위구원 율법을 지키는 그것이 구원의 조건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성령님이 바울아 저 사람들에게 조직적으로 구원론을 설명해 주어라 특히 율법과 은혜의 관계성을 설명하여 주라는 겁니다, 베드로나 다른 사람들은 이것을 설명할 그런 지적능력과 영적능력이 안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그것을 메시지를 받아가지고 편지를 쓴 것이 갈라디아서입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는 학설이 두가지학설이 있습니다,
남 갈라디아학설이 있습니다, 남 갈라디아 이 말이 뭐냐면 이렇게 총회가 끝나고서 49년에 어떤 분들은 총회전이라는 사람도 있지만 저는 총회 후 같습니다, 총회 후에 남 갈라디아를 향해서 글을 쓰신 편지가 갈라디아서다 그것이 남 갈라디아학설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남 갈라디아학설을 믿지 않고 북 갈라디아학설을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이 언제 섰냐면 바울이 3차 여행을 할 때 3차 여행은 53년에서57년에 이 때 에베소나 빌립보에서 이분이 북 갈라디아를 향해서 주후56년에 섰다 그러는 겁니다, 그의 3차 여행이 끝날 쯤 되어서 북 갈라디아를 향해서 쓴 것이 갈라디아서다 이렇게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은 자기가 생각했던 것이 논리적으로 자기에게 맞으면 이것이다 하고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학자들 말 다 들을 필요는 없지만 주님이 그분에게 주신 영적인 지혜와 통찰력이 있기 때문에 그분들 말씀을 귀를 열고는 들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교인들을 제가 지금 학자로 만드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필요합니다, 우리가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래서 우리는 북 갈라디아학설이 아니고 남 갈라디아학설입니다,
이분이 갈라디아서를 섰는데 제가 다음시간에는 갈라디아서를 집중적으로 한번 조명 해보려고 합니다, 이 배경과 연계해가지고 그런데 바울이 정말 하나님이 쓰시는 영적인 거장이고 베드로도 마찬가지인데 이분들 관계가 예루살렘총회 이후에 보면 그렇게 가까운 관계가 아니었습니다, 그분들이 주님에게 갈 때 까지 관계가 그렇게 좋게 가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싸움하는 사이는 아닌데 같이 동역을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우리가 주님을 섬기면서 아마 이런 일들이 일어나잖아요, 그래서 한번 우리가 참고사항으로 알았으면 합니다,
왜 서로가 그렇게 가까워지지 않았는가,
서로가 환경적으로 교육적으로 또는 여러 가지 배경의 차이 때문에 그럽니다, 그래서 우선 베드로입장에서 한번 볼 필요가 있습니다,
겉으로는 외형적으로는 동역 자 같은데 항상 이분들은 앙금이 그사이에 있었습니다, 똑같이 우리 같은 교회 교인들이지만 겉으로는 다 사랑한다 하면서도 어디에 서로가 보이지 않는 앙금들이 있게 되어 있는 겁니다,
없다 그러면 거짓말입니다, 왜 바울과 베드로도 그랬거든요 대단한 사람들도 그랬습니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위로를 얻을 수가 있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한번 분석을 해보는 겁니다, 제가 분석하는 겁니다,
이분들을 보면 베드로입장에서 한번 바울을 보는 겁니다,
배경의 차이점인데요, 베드로가 바울에 대한 우월감을 한번 볼 수 있는 겁니다, 베드로가 내가 너를 상대 안하는 이유는 내가 너보다 낫다하는 겁니다, 제가 혼자서 묵상해보니까 열 가지가 나옵니다, 베드로 생각에는 나는 열두제자들 중에서 수제자다 바울아 너하고 비교가 안 된다 나는 예수님과 삼년동안 함께 지냈다 너는 안 그랬잖아 또 베드로생각에는 그러는 겁니다,
예수님이 나한테 너 교회 세우는데 반석위에 너 가 교회를 세우는 거다,
예수님이 나한테 그랬다 그것뿐이냐 네가 천국열쇠를 내가 너한테 주겠다고 당신에게 이런 말한 적이 없어 나 말이야 예수님이 변화 산까지 데리고 올라가서 나는 낙원도 구경했다 너도 했지만 나는 예수님의 십자가사건을 그대로 목격했고 부활사건도 목격했던 사람이다 예수님이 나한테 지상계명도 주셨고 직접 지상사명도 나한테 주셨다 당신인데 준적이 없어 이분이 가지고 있는 자존감이 있습니다, 내가 그 유명한 예루살렘교회 개척자야 거기에 내가 최고 수장 이였단다, 그리고 핍박받을 때 이 교회를 내가 몸소 지켰던 장본인 이란다 이런 부분에서 베드로에게 바울이 할 말이 없는 겁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바울을 향해서 보는 열등감을 우리가 안 볼 수가 없습니다, 무슨 열등감이 있는가, 제가 뽑아보니 열 가지가 나옵니다,
베드로가 바울을 보면서 느끼는 것이 첫째가 바울보다 교육수준이 없고 그래도 바울은 바리새파출신이어서 아주 열심히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 당시에 종교교파들 있잖아요, 바리새파. 사두개파. 서기관. 열심당원 이 속에 들어간 사람만 하여도 엘리트들이거든요 베드로는 그런 그룹에 들어간 종교인이 아니었습니다, 거기다가 베드로가 볼 때는 바울은 공회원이고 가말리엘제자고 이런 부분에서 꼬리를 내릴 수밖에 없는 겁니다,
또 자기는 북 갈릴리지방 시골 어부출신이고 그 당시에 지식인들이 사용하는 헬라말도 할 줄 모르고 구약도 잘 모르고 게다가 잘 난체 하다가 예수님에게 욕먹었지만 예수님을 세 번 부인도 하고 자기를 생각하면 자기가 꼬리를 내릴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러나 자기가 지도자지만 알고 보면 실세는 야고보였습니다, 그러니까 야고보 그늘 속에서 항상 있었던 겁니다,
거기다가 이 사람은 예수님이 자기코앞에서 사도행전1장8절 말씀을 주셨는데 이분이 그걸 귀담아 듣지를 않았던 겁니다,
이런 모든 것을 생각하면 꼬리를 내릴 수밖에 없는 베드로의 모습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베드로는 바울에 대한 적대감정이 있었습니다,
제가 한 세 가지를 보았습니다, 바울을 생각하면 밥맛없는 게 하나가 있는 겁니다, 베드로입장에서 왜냐면 자기가 그렇게 교회를 열심히 성장시켜놓았는데 바울이 우리교회를 핍박을 해가지고 교회를 다 흩트려버린 장본인이거든요, 그러니까 베드로 마음 깊숙이 앙금 있는 겁니다,
그러면서 자기가 사랑하는 스데반 안수집사를 순교하게 한 장본인이고 거기다가 자기교인 중에 다메섹에 올라가가지고 전도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거기까지 따라 올라가가지고 자기교인들을 잡아다가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와서 감옥에 투옥시키고 죽이려고 했던 장본인이 바울입니다 이렇게 베드로 입장에서 보면 그냥 바울을 생각하면 밤에 잠이 안 오는 겁니다,
그런데도 총회 때 얼굴도 보기도 싫을 것인데 그래도 총회 때 바울을 편을 들어준 겁니다, 그러고 보면 예수님 안에서 자기 쓴 뿌리와 이런 갈등이 예수님 안에서 해소될 수 있구나 밑에 갈등이 깔려있지만 그것을 컨트롤 할 수 있구나 이분들은 그런 의미에서 위대한 사람들인 겁니다,
아마 낙원에 가서 까지도 두 분이 이런 관계에 있을 지도 모릅니다,
낙원에 가면 이런 것은 다 없어지겠지만 그때도 조금 서먹서먹할 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바울의 입장을 조금 봅시다,
바울이 베드로를 볼 때 바울의 우월감이 일곱 가지로 정리가 됩니다,
첫째가 뭐냐면 바울은 베드로를 보면 자기는 엘리트의식이 있는 겁니다,
교육수준이 높고 가말리엘제자고 두 번째는 자기는 바리새파의 종교인의식이 있는 겁니다, 베드로는 없었습니다, 세 번째는 자기는 공회원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회적인 지위가 높았던 겁니다, 우리 같으면 국회의원 같은 수준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때 베드로는 북쪽 갈릴리지방에 어부였습니다,
이게 비교가 안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월의식이 바울에게 있었습니다,
네 번째는 바울은 구약을 바싹하게 아는 지식인인데 베드로는 그렇지 않는 겁니다, 다섯 번째로는 자기는 디아스포라출신이기 때문에 문화적인 적응력이 투철하고 뛰어났습니다, 베드로는 보니까 문화적인 적응력이 약합니다, 여섯 번째로는 바울은 언어적으로 그 당시에 히브리말도 잘했고 헬라어도 잘했고 히브리방언인 아람어도 잘하였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베드로를 볼 때는 당신은 나하고는 비교가 안 된다고 본 겁니다 그다음에 바울이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 당신 예수님과 3년 공생애기간에 같이 지냈지만 나도 다메섹에 갈 때 예수님이 직접 나한테 나타나셨다 그러니까 나도 직접 예수님과 같이 대면했던 사람이라는 이런 프라이드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베드로를 향해서 가졌던 열등의식도 있었습니다,
그것도 제가 일곱 가지로 정리해봤습니다,
이런 것을 제가 드리는 이유가 여러분들이 혼자서 자주 묵상을 하는 겁니다, 이런 것을 체계적으로 조직적으로 우리가 공부해야지만 내가 묵상할 수 있고 실력이 생기는 겁니다, 그리고 무엇이든지 그런 식으로 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베드로를 향한 열등의식이 나는 열두제자가 아니다 이것이 바울의 열등의식입니다 두 번째는 나를 예수님이 왜 늦게 불렸나 이겁니다 30살 때 주후35년에 불렸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언제 불리 움을 받았습니까, 적어도 주후26년 정도니까 몇 년 차이입니까 9년 차이입니다 사역적인 측면에서 보면 바울이 사역을 언제 시작하였습니까,
45년에 시작하였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만나서 사역한 것이 실은 30년부터라고 따지면 사역도 15년 후배입니다 이런 부분에서 바울이 열등의식이 조금 있었을 겁니다, 열등의식이라고 보기보다는 큰 소리 못 치는 선배니까 그런 의미에서 네 번째는 바울이 항상 하는 말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15장8절에 제작들을 이야기하다가 자기는 나는 만삭이 되지 못하고 태어난 자라는 겁니다, 바울이 이런 측면에서 자기의 약한 부분 제자들과 비교하면서 자기의 열등한 부분을 이야기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러면서15장9절에 가서 또 이분이 표현합니다,
뭐라고 표현하느냐면 사도 중에서 나는 지극히 작은 자라는 겁니다,
열두제자들 보다 자기는 지극히 작다, 라고 그랬습니다,
여섯 번째는 이분이 그동안 사역을 하면서 항상 열두제자들에게 도움을 받지 못했습니다, 베드로가 총회 때 한번 도움을 주었지만 그 후에는 직접적인 도움을 주지를 않았습니다, 항상 따로 독립적으로 사역을 하였습니다,
열두제자들의 파워가 바울을 도와주지 못했습니다,
이런데서 오는 바울의 열등의식 마지막 일곱 번째로 이분이 열두제자들이 예루살렘교회 중심으로 또는 기독교계 주류 지도자들인데 바울이 주류 지도자그룹에 합류를 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부분에서 바울은 항상 마음에 갈등이 있었지 않았나, 라고 우리가 짐작을 할 수 있습니다,
그다음에 제목이 바울이 베드로에 대한 적대감정이 적어도 아홉 가지가 있는 것을 제가 성경 속에서 느낀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가 바울이 다메섹에서 개종할 때 예루살렘에 계셨던 열두제자들 특히 거기에 수제자인 베드로가 반가워하지도 않았고 찾아오지도 않았습니다,
열두제자들은 복음을 전하려면 이방까지 가야 된다고 외치는 사람들인데 바울이 기독교인이 되었는데 찾아오지도 않았습니다,
편지 한 장도 없었습니다, 두 번째는 바울이 외로우니까 다메섹에서 어디로 갔습니까, 아라비아 시내 산으로 내려갔습니다,
3년 동안 은둔생활을 할 때 한 번도 편지한통 받은 것도 없고 또는 사람을 보내서 위로받은 것도 없고 본인도 온 일이 없고 그대로 방치시켜버렸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베드로에 대한 감정이 있는 겁니다,
세 번째는 3년 아라비아생활을 끝내고 다메섹으로 올라갔다가 다메섹에서 주변에 있는 형제들이 예루살렘에 가서 열두제자들을 만나라 그래서 예루살렘에 갔습니다, 예루살렘에 도착했을 때 열두제자들이 바울을 안 만나려고 했습니다, 그때 바나바가 만나도록 주선하여 야고보만 만났다고 갈라디아서1장19절에 그랬습니다, 네 번째는 야고보를 만났는데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들이 바울이 온 것을 알고는 죽이려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바울을 보호해 주었던 이름 없는 몇몇 형제들이 있었습니다,
그 형제들이 바울을 감싸고는 숨겨가지고 가이샤랴에 보내가지고 배타고 자기고향 다소로 올려 보낸 겁니다, 그러니까 그 당시만 하여도 야고보나 베드로가 특히 예루살렘에서 어느 정도 파워가 있는 지도자였습니다, 정치적인 파워도 어느 정도 있었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렇게 바울을 죽이려고 할 때 가서 한 마디라도 할 수 있는 파워가 있었는데 도와주지를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속으로는 은근히 바울 저 형제 잡혀가지고 죽었으면 좋겠다,
라고 생각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도행전9장30절 전후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이 말은 제가 만든 말입니다 다섯 번째는 바울이 다소에 가서 7년 있는 동안에 한 사람도 와서 위로해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종교계의 지도자들이 특히 베드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완전히 잊어진 존재였습니다, 이분이 그러니까 거기에서 오는 갈등이 분명히 있었습니다,
그래도 내가 기독교공동체에 들어와서 목숨을 바치고 복음을 전하려고 하는데 기독교의 주류지도자들이 자기를 괄시하고 쳐다보지도 않고 인간취급을 안하는 겁니다, 여섯 번째로 7년이 다 되었을 때 누가 찾아왔습니까,
바나바가 찾아와서 안디옥교회에 전도사로 부임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바나바가 베드로가 시켜서 간 게 아니거든요 바나바가 직접 주님에게 말씀을 받고 간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바나바에게 베드로선생이 말씀해서 저를 데리려 왔습니까, 물어보니까 아닌데요, 하였을 겁니다,
그러니까 베드로에 대한 섭섭함이 깔려있는 겁니다,
일곱 번째로 1차 선교여행 갔다 왔습니다,
1차 선교여행 동안 준비할 때나 가서 있는 동안에나 또 갔다 와서나 한 번도 열두제자들이 도와주지를 않는 겁니다,
선교헌금도 지원하지도 않고 뒤에서 기도도 해주지 않고 그런데 갔다 오니까 딴 소리만 나오는 겁니다, 여덟 번째 딴소리를 합니다,
바리새인출신들이 와서 바울을 이단이라고 외치는 그 일까지 벌어진 겁니다, 아홉 번째 예루살렘총회에서 어느 정도 위로를 받았으나 이 감정이 해결이 되지를 않는 겁니다, 바울이 베드로에 대한 감정이 해결이 되지 않는 것을 갈라디아서를 쓰시면서 갈라디아서2장을 보시면 그 감정을 우리가 알 수가 있습니다, 2장1절부터10절까지 제가 간단하게 설명하여 드리겠습니다,
2장1절에 십사 년 후에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나니 언제부터 14년 후입니까 바울이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난 후 부터입니다 주후35년에 만났으니까 14년 후니까 주후49년에 자기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는 겁니다,
그다음에 2 계시를 따라 올라가 내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그들에게 제시하되 유력한 자들에게 사사로이 한 것은 개인적으로 보고하였다는 겁니다, 이유는 왜 보고를 하였냐면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자기가 1차 선교여행 갔다 왔잖아요,
갔다 와서 복음의 씨를 뿌려 놓았는데 이 사람들이 방해할 가능성이 많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가서 이 사람들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고 그러니까 우리가 복음을 전하다 보면 이 이론이 그대로 교계 안에서 지금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질투심 자기와 다른 배경 이것 때문에 유명한 자들인데도 이런 짓을 했기 때문에 이분은 예루살렘총회에 간 목적이 뭐라는 겁니까,
갈라디아사람들에게 이야기하기를 자기가 전한 구원의 복음이 헛되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방해세력들이 있기 때문에 3절에 그러나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디도까지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지 아니하였으니 왜냐면
4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 때문이라 이미 이 사람들이 복음 전하려 1차 선교여행 다닐 때 디도를 할례를 안 시키고 데리고 다녔거든요 그러면서 사역자로 임명까지 한 겁니다, 예루살렘 팀들이 이미 스파이를 보내가지고 이미 체크를 하면서 다닌 겁니다, 가만히 들어온 스파이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이 담대하게 스파이가 있었으면 빨리 할례를 시켜주어야 되잖아요,
그런데 그 스파이가 있기 때문에 더 고집을 부리면서 할례를 안 시켰다는 겁니다, 4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 때문이라 그들이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가진 자유를 엿보고 이 자유가 무엇입니까 율법에서의 지유인 겁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들을 자유케 하리라 여러분들이 아주 좋아하는 성경구절이 갈라디아서2장20절입니다,
이게 무슨 말인지 아십니까, 2장18절19절부터 보면 율법을 향해서 죽어 버렸습니다, 율법에서 자유를 얻은 사람이라는 소리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고 하면서 주욱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이 말이 뭐냐면 나는 율법에서 자유를 얻었다는 겁니다,
그 이야기가 20절입니다, 제가 다음시간에 자세하게 이야기 할 겁니다,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5 그들에게 우리가 한시도 복종하지 아니하였으니 누구에게 복종 아니 하였습니까, 율법 되로 사는 것 그다음에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이 요구하는 할례를 시켜야 된다는 것 그래서 한시도 복종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가 항상 너희 가운데 있게 하려 함이라
1장6절에 보면 어떤 단어가 나오느냐면 다른 복음이라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다음에 8절에도 보면 다른 복음 9절에도 보면 또 다른 복음 8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율법만 강조하는 이것은 다른 복음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저주 받는 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예수그리스도의 은혜의 복음이 핵심이거든요 예수님의 은혜의 복음이 다시2장6절을 보세요,
6 유력하다는 이들 중에 (본래 어떤 이들이든지 내게 상관이 없으며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나니) 이 말은 무엇입니까 야고보나 베드로나 너희들이 볼 때는 유력한 사람들이라는 겁니다, 파워가 있는 사람들이라는 겁니다, 그러면서 저 유력한 이들은 내게 의무를 더하여 준 것이 없고 7 도리어 그들은 내가 무할례자에게 복음 전함을 맡은 것이 이 분들이 내가 사역할 때 나를 도와준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겁니다,
도리어 내가 무할례자에게 복음 전하는 사람인데 베드로 그 사람은 할례자에게 복음전하는 사람이라면서 베드로와 자기를 차별화 시켜 버립니다,
나는 전 세계99.9%의 세계 인구를 담당하는 사람이고 베드로는 오직 유대인들에게만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라는 겁니다,
예를 들면 어떤 분은 한국 사람에게만 복음전하는 사람이고 어떤 분은 외국인들에게만 복음전하는 사람 으로써 다르다는 겁니다,
8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느니라 베드로와 자기를 차별화 시키는데 은근히 누가 더 높다는 겁니까, 갈라디아사람들에게 내가 더 세다는 겁니다,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겁니다, 성령님께서 이 사람들의 오리지널 쓴 뿌리들 이것을 그대로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장면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9 또 기둥 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나와 바나바에게 친교의 악수를 하였으니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그들은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 10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도록 부탁하였으니 이것은 나도 본래부터 힘써 행하여 왔노라 지금 이 내용은 다음 시간에 자세히 보겠지만 이 베드로가 가지고 있는 쓴 뿌리들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영적거장들인데 이분들이 이런 서로 보이지 않는 갈등을 가지고 주님을 섬겼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바울이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에베소서4장 같은데 보면 항상 그랬습니다,
너희들이 권면이나 평안이 있느냐 서로서로 용서해주고 하나가 되어라 자기도 그렇게 하도록 하지만 바울도 인간이기 때문에 한계가 있는 겁니다,
그 한계 있는 것을 하나님이 더 좋아하시고 한계가 있어야 되는 겁니다,
자기가 완전해지면 바울이 아닙니다, 바울이 될 수가 없는 겁니다,
사람은 사람인겁니다, 피조물이기 때문에 그러는 겁니다,
그러면서 서로가 갈등이 있고 미워하고 서로가 이러지만 이분들이 멋있는 부분이 뭐냐면 나중에 가서는 후반기에 가서는 서로 관여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는 서로가 다르기 때문에 같이 일은 안했지만 항상 서로가 제자들끼리는 교류하게 하였습니다, 마가 같은 사람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바울과 같이 선교여행 갔잖아요, 그런데 나중에는 마가가 베드로의 아들이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마가를 바울이 데려다가 자기 오른편에 두는 겁니다, 이런 식으로 그런데 성경을 보면 베드로와 바울이 같이 사역한 이야기는 없습니다, 이런 것을 보면서 이것이 우리에게도 적용이 되는 겁니다,
우리가 환경적으로, 성품 적으로, 문화적으로 차이가 있지만 그 차이를 인정해 주면서 부딪히지 않으면서 서로 이렇게 잘 다듬어 주면서 같이 균형을 잡어면서 같이 살아가는 게 주님의 뜻입니다 완전히 새롭게 되는 게 아니거든요 될 수가 없는 겁니다,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싫어하는 사람이 저기 있습니다, 그 사람이 나를 좀 씹더라도 저 사람이 몰라서 그렇다 저 사람이 그러면서 그걸 안아주고 저 사람은 나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해 주고 같이 사는 겁니다, 그럴 때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겁니다,
부부간에도 마찬가지고 하나님은 다양성을 가지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러니까 하나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잖아요,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랬습니다, 화평케 하는 단어가 나오면 그 생각을 뒤집어서 생각해보세요,
화평치 않게 하는 일 다툼이 있고 분리가 이 세상에 있구나, 교회 안에도 있는 것 그 안에서 균형을 잘 맞추어주는 교통정리 잘 해주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겁니다, 계급이 높은 사람인 겁니다,
베드로와 바울도 보면 둘이 다른데도 서로가 화평케 하는 일을 최대한 하면서 같이 주님을 섬겼던 것을 우리가 볼 수가 있습니다,
이런 차이가 있는데도 예루살렘총회에서도 보면 그래도 베드로가 나와서 예수님의 복음이 변질되지 아님을 증거 하기 위해서 바울이 가지고 있는 성경적인구원론을 자기도 그대로 옹호해주는 겁니다, 거기서 그분의 위대함을 알 수 있는 겁니다, 감정이 나쁘다고 해서 그분의 본질적인 진리를 가지고 있는 것을 자기가 뽑아가지고 틀렸다고 말하는 사람들 목사들 주변에서도 많습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진짜인가 아닌가, 나타나는 겁니다,
자기의 감정을 딱 놓고는 진리 속에서 같이 가주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베드로가 대단한 사람입니다 마지막으로 결론적으로 예루살렘총회가 어떤 의미를 우리에게 부여했느냐면 일곱 가지가 있습니다,
총회를 통해서 구원론이 정립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두 번째는 구원의 대상이 유대인만이 아니고 이방인도 포함되는 것이 정립이 되었습니다, 그다음에 유대인 선호사상과 우월사상이 부과가 되는 겁니다, 세 번째로 이 총회를 통해서 사도바울이 사도직이 공식적으로 인정되었습니다, 이것은 굉장히 기쁜 일입니다, 그것도 바울과 아주 다른 환경을 가진 선배들에게 바울이 인정을 받는 겁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그렇게 하셨고 열두제자들은 이런 부분에서는 아주 훌륭한 분들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이 사람들을 사용하시는 것 같습니다 네 번째로 바울신학이 그분의 구원론이 공식적으로 인정되었습니다,
다섯 번째로 바울이 그 후부터 2차.3차.4차까지 선교여행을 하였는데 그 선교여행에 힘을 실어주고 선교여행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총회는 그 후에 많은 교단들의 기독교교단들의 총회의 모판이 되었고 모본이 되어 왔습니다,
오늘은 예루살렘총회 사도행전15장을 말씀드렸습니다,
기도드리겠습니다,
우리 예수님 예수님이 특별히 선택하셔서 사용하셨던 베드로선생님과 바울선생님의 두 분의 양면성을 섭력하였습니다, 이분들의 장단점이 오히려 우리 주님께 영광 드리는 결과로 나타남을 보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게도 같은 이러한 경우들이 우리의 삶속에 항상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지혜를 주셔서 은혜를 주셔서 나와 다른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안아주는 그러한 성경적인 복 된 주님의 종들이 될 수 있도록 은혜 베풀어 주시옵소서 예루살렘총회를 묵상하면서 모든 메시지들이 내 속에서 이렇게 잘 열매 맺어지는 그러한 메시지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주님 영광 받아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황용현 목사님 설교내용영상으로 보세요.
[사도행전시리즈] Act16.예루살렘 총회 /황용현목사/ - 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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