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시리즈 10강. 왜 산상수훈에 대한 반응이 다양한가(눅5:1-11) 2023년
지난시간에는 왜 안드레가 3인방에 없는가? 라는 주제를 가지고 서로 공부했습니다. 오늘은 4인방이 산상수훈을 받았을 때 반응들이 서로가 달랐다는 부분을 놓고 공부를 하려고 그럽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불편한 말씀을 한 것이 유명한 제자의 요건입니다 굉장히 불편한 겁니다.
이게 뭐냐면 누가복음14장26절입니다. 이 말씀은 모두에게 불편한 겁니다.
무슨 말씀이냐면 예수님이 누구든지 자기아버지와 또 어머니와 아내나 자식이나 형제나 자매나 이런 사람들을 예수님보다도 더 사상하면 안 되고 미워해야 되는데 자기 목숨보다도 미워해야지만 내 제자가 된다는 겁니다.
이게 상당히 어려운 이야기고 해석하기도 힘든 이야기입니다
또 이렇게 하는 사람은 많지가 않습니다. 이 말씀을 중심으로 해서 오늘 4인방들이 이 말씀을 어떻게 반응을 했는지 우리 한번 살펴보려고 그럽니다.
우리가 지난시간에 안드레에 대해서 했는데 다시 한 번 정리하면 안드레를 태생적으로 그러니까 태생적이라는 말은 이분이 태어나기 전에 어머니의 배속에 있기 전에 이분에게 주신 예정된 특성들이 있습니다.
안드레에게 우리가 그런 공부를 지난시간에 했습니다.
간단하게 보면 첫 번째는 이분을 독수리 과 인물로 은혜를 베푼 분이다 독수리 과 인물로 두 번째는 세례요한의 으뜸제자로 세 번째는 나중에 예수님의 으뜸제자로까지 네 번째는 그 이름이 안드레라는 이름이 사나이다운 그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외유내강한 그런 사람입니다 다섯 번째로 외로운 광야의 신약시대에 광야에서 외쳤던 신약시대의 세례요한으로 보시면 되겠습니다. 그런데 이분이 외로운 광야의 독수리로 보면 되겠습니다.
아주 높은 영성 가입니다 그리고 이분은 메시아를 대망하는 자입니다
초림의 메시아를 똑같이 재림 때도 이런 스타일의 분들이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이분은 3인방들의 멘토 역할도 한분이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그다음에 3인방들과 그릇사이즈가 다르고 그릇 분량이 다르고 모양도 달랐던 분이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그리고 이분은 서신을 한권도 쓰지 않은 분입니다 다른 분들은 서신을 썼는데 그다음에 이분은 슬라브족복음화에 집중했던 분으로 바울은 그기까지 올라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분은 북쪽으로 더 올라가서 슬라브족 사람들까지 복음을 전한 이런 분으로 우리가 보면 되겠습니다. 또 이분은 이름이 사도행전에 열두제자이름이 나올 때 네 번째 이름으로 나옵니다. 이분이 본래는 처음에 나와야 되는 사람인데 순서가 네 번째입니다 사도행전에서 보면 그리고는 그 이름이 없습니다. 사도행전에는 이분의 이름이 없습니다.
바울서신에도 이분의 이름이 거론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서신에도 요한서신에도 야고보서신에도 요한은 특히 죽마고우인데 이분이 다섯 권의 서신을 썼는데도 안드레라는 이름을 거론하지 않았습니다. 그런걸 보면 성령님께서 완전히 이분들의 마음을 닫아서 이분의 이름을 숨겨놓으신 것 같습니다.
산상수훈을 주시기 전에 예수님께서 4인방을 불렸습니다.
그것이 마태복음4장18절에서21절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어떻게 불렸느냐면 산상수훈을 주시기 전입니다 이미 세례요한을 통해서 저분 예수님이 모든 인간들의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는 말을 듣고는 예수님을 베드로에게 소개했던 안드레입니다 그리고는 이 4인방들은 아하! 그런 분이 계시구나. 이렇게만 알고 있으면서 다시 그물 던지는 일을 하려 갔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의도적으로 해변을 걸어가시다가 베드로와 안드레가 그물을 던지는 것을 이렇게 봤습니다. 보시고는 이분들에게 나를 따르라는 겁니다. 그리고는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어 주겠다고 하신 것이 4장18절에서19절입니다. 그리고는 20절에 이들이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그랬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볼 때 아하! 이분들은 이제 고기 잡는 것을 포기한 분들인가? 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아닙니다.
그냥 그 당시 잠깐 예수님을 따르는 겁니다. 그리고는 저 멀리 예수님이 이렇게 보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둘 야고보와 요한이 그물을 깁고 있는 장면을 예수님이 보신 겁니다. 이들에게 나를 따르라 그러니까 이분들이 배와 자기부친을 남겨 두고 예수님을 따랐다고 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4장21절에서22절에 산상수훈 던지시기 전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산상수훈을 가르쳐주기 전에 이미 이분들이 잠깐 예수님과 만남을 통해서 예수님을 따르는 것같이 보이면서 따르는 사람이었는데 나중에 보니까 어업을 완전히 포기한 사람들은 아닙니다. 그냥 그때. 그때 따라던 사람들로 이 내용을 오늘 우리가 공부하게 될 겁니다. 이런 사람들을 데리고 팔복 산에서 많은 무리들도 뒤에 있었지만 이분들을 상대로 해서 산상수훈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중심대상이 이 네 분이다 4인방이라고 보세요.
그러면 4인방을 예수님께서 어떻게 주님께서 선택하셨나. 라고 보면 우리는 신학적으로 이렇게 봅니다. 아하! 이것은 예수님의 주권이다 이 부분이 굉장히 중요한 개념이니까 잘 소화하셔야 합니다. 예수님이 이미 주권적으로 또는 예지하시고 예정 적으로 4인방을 이렇게 부르신 겁니다.
그리고 그뿐 아니라 이 4인방 중에서도 한분 안드레와 나머지3인방을 다르게 만드신 겁니다. 예정 적으로 다시 말하면 그릇이 다르게 모양새가 다르게 성품이 다르게 그러면서 안드레이분을 어떤 제자로 만들었다고 우리가 공부했습니까? 독수리시각을 가진 주님의 제자로 디자인 하셨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리고 나머지 세분들은 장차 독수리시각이 되겠지만 시작을 두더지 병아리 참새시각자로 해서 3년을 훈련받게 하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보면 이분들이 3년 훈련받고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에 오순절사건이 있었잖아요 오순절사건 이후에도 예루살렘교회를 이분들이 담당을 해서 하는 사역자들이었는데 이분들을 보면 이분들이 두더지 병아리 참새까지는 갔지만 이분들이 죽기 전까지 계속해서 새끼독수리정도까지 그러다가 죽기 전에 아마 독수리시각 자가 되지 않았나. 라고 우리가 짐작을 합니다.
그러니까 이분들3인방들은 끊임없는 훈련을 통해서 시행착오를 통해서 날로. 날로 시각의 변화가 오는 겁니다. 그릇의 변화가 오고 저 부터시작해서 우리 모두가 이3인방에 속해 있다고 보면 됩니다. 여러분들의 생각에는 목사님은 안드레가 아닙니까? 턱도 없는 소리입니다 저는 안드레 격이 아닙니다.
저도 마찬가지로 3인방들처럼 끊임없이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훈련 받으면서 시각을 넓혀가고 있고 높여가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오늘 이 시간에는 이분들을 어떻게 교육시켰나? 교육방법을 잠깐 섭력해 보려고 그럽니다.
첫째 안드레를 보면 안드레는 이미 독수리 과로 들어온 사람이기 때문에 애기독수리지만 이분은 따로 제쳐놓았습니다. 과가 다르기 때문에 그래서 개인학습을 시켰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이분은 개인학습을 시키면서 누가복음14장26절에 제자의 덕목 기억나십니까? 아버지와 어머니와 형제자매와 자기까지 미워해야 되고 예수님을 더 사랑해야 되는 조건입니다
안드레의 시각이 애기독수리가 어느 정도 되었기 때문에 이 말씀에 안드레는 크게 부담을 느끼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게 크신 은혜입니다
그러니까 벌써 우리주변에도 오늘날도 이런 분들이 있습니다.
이 말씀을 액면그대로 믿고 행동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가족 다 집어던지고 오지에 들어가셔서 이렇게 주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은 제자도 누가복음14장26절을 편한 마음으로 안을 수가 있었던 겁니다.
은혜가 필요한 겁니다. 이게 아무나 되는 게 아닙니다. 저도 이걸 못합니다.
나머지3인방들은 이 은혜가 없었기 때문에 아예 밑바닥부터 시작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은 시행착오를 겪게 하면서 두더지시각부터 시작하게 한 겁니다. 그래서 현장교육을 시키는 겁니다. 눈높이교육을 상황 화시켜서 또는 비유로 가르쳐주는 겁니다. 그러면서 시행착오를 겪게 하면서 3인방들을 집중적으로 훈련시키는 것이 4복음서이야기입니다 또 사도행전이야기들입니다 이렇게 보면 그런데 3인방 중에서 가장 집중적으로 한 사람에게 집중한 대상이 누구였냐면 베드로입니다 그러니까 4복음서에 보면 또는 사도행전에 처음12장까지 보면 베드로를 중심으로 해서 이야기가 전개되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3인방 중에서도 관심이 베드로에게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항상 베드로를 놓고 이야기를 하십니다.
그러면 우리질문이 있습니다. 목사님 왜 베드로입니까? 그러면 우리가 예수님의 입장에서 보면 예루살렘교회를 개척해놓고 거기 최고지도자로 만들기 위한 예수님의 디자인이 있었습니다. 저분을 최고지도자로 만드는 베드로를 그런데 예수님이 보니까 베드로는 같은 어머니 뱃속에서 나왔는데 안드레와 다른 겁니다. 형제인데도 안드레는 아주 제자요건에 그냥 들어올 수 있는 믿음의 소유자인데 베드로는 소위 우리가 지금 말하는 쓴 뿌리를 많이 가지고 있는 분 같습니다. 그래서 이분을 우리가 계속해서 공부하겠지만 태생적으로 감정의 폭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리고 즉흥적인 부분이 있고 어떤 때 보면 겁도 없이 아래 위를 보지 않고 행동하는 부분도 있고 그러니까 이분은 지금 예수님께서 팔복의 이야기를 해주지만 팔복의 사람까지 가려면 한참가야 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보실 때 그리고 베드로는 그뿐입니까?
산상수훈에서 이야기했습니다. 열 가지 아들 되는 덕목 거기까지 가려도 이 사람은 한참 가야되는 사람입니다 그뿐 아니라 고린도전서13장에 사랑덕목까지 가려면 한참 가야되는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이분을 집중적으로 훈련시켜야 되는 겁니다. 예수님의 입장에서 그래서 사복음서에 보면 이분을 훈련시키는 장면 중에 일부를 제가 오늘 여러분들과 같이 나누려고 그럽니다. 첫 번째로 이분을 교육시키는데 오늘은 두 가지 방법으로 교육시키는 것을 우리가 공부하려고 그럽니다. 첫 번째 방법이 뭐냐면 마태복음8장14절에서15절에 마가복음1장29절에서31에 누가복음4장38절에서39절에 베드로의 장모님을 열병 들게 해가지고 그의 죽게 만들어놓습니다
이게 예수님의 디자인인 겁니다. 그러니까 장모님이 아프니까 분명 베드로가 예수님께 예수님 우리장모님을 위해서 기도해주십시오. 아마 그랬을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치유하시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치유가 되었잖아요.
그러니까 베드로입장에서는 이게 보통일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베드로가 나중에 보면 예수님을 두려워했다 그랬습니다. 장모님이 병이 낫는 것을 보고는 뿐만 아니라 베드로입장에서는 예수님이 너희들 나를 따르라. 따르라 그랬는데 따를 수가 없는 겁니다. 왜냐면 장모님도 반대하고 아마도 사모님도 상당히 반대를 했던 모양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이런 일을 계획하시고 이루신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이렇게 하신 것을 보시고는 안드레는 어떻게 생각하셨겠습니까? 안드레는 자기형수님마음이 변한 모습을 본 겁니다 안드레는 이미 헌신 된 사람입니다 거기다가 사돈 어머니께서 또 마음이 변한 것을 본 겁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병이 나았으니까 그냥 안드레는 속으로 흐뭇하지 않았을까 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렇게 성서를 보면 베드로가 이 사건 이후에 아까 본 누가복음14장26절에 제자의 도를 따랐을까요. 장모님사건 이후에 우리가 성서를 쫘악 보면 성경을 보면 안 따랐습니다. 그때뿐이었습니다. 왜냐면 따르지 않고 또 고기잡이 나가는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장모님과 사모님에게 나 이제 고기잡이그만하고 예수님 따라갈 거야. 앞으로 삶은 너 네들이 알아서해 그렇게 하지 않고 이분이 예수님을 따르다가 시간되면 고기잡이 가고 왔다 갔다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두 번째 훈련을 시키는 겁니다.
그것이 누가복음5장에만 나와 있습니다. 누가복음5장1절부터11절에 누가가 그것을 기록했습니다. 아직까지 풀타임으로 헌신안하는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고기잡이하는 모습을 찾아가는 겁니다. 그래서 누가복음5장1절에서부터 나오는 이야기가 예수님이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서 게네사렛호수는 티벨리야 호수 갈릴리호수 게네사렛호수는 누가복음5장에만 나오는 단어입니다
예수님이 게네사렛 호수에 가가지고 3인방이 고기 잡는 모습을 보는 겁니다.
안드레는 없습니다. 신기한 게 안드레가 고기잡이에서 없다는 말은 무엇입니까? 이분은 이미 세상직업 다 손 놓았다는 소리입니다 벌써 사람이 달라진 겁니다. 안드레는 애기독수리 과에 들어 갔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분에게 그런 마인드를 주신 겁니다. 그래서 세분이 고기잡이하는데 예수님이 오셔가지고 하시는 말씀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게 많습니다.
누가가 이렇게 써놓았습니다. 배가 두 척이 있는 것을 예수님이 보셨다는 겁니다. 그런데 배 두 척이 있는데 그러니까 물에 떠있는 게 아니고 강가에 두 척이 있는데 하나는 베드로의 배고 또 하나는 야고보와 요한이 타고 있는 배라는 겁니다. 그런데 배 두 척에 이분들이 그물을 씻고 있었다.
그랬습니다. 육지에서 그물을 씻고 있을 때 예수님이 오신 겁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이 오셔서 대화를 하는데 이분들이 왜 그물을 씻고 있느냐면 밤을 새면서 고기잡이 했는데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밤을 새워서 고기잡이를 했는데 그런 상황 속에서 예수님이 베드로의 배에 들어가셨다 그랬습니다. 그러면서 베드로에게 하는 소리가 뭐냐면 이 배를 띄워서 물가에 나가자 그러는 겁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물가에 나갔습니다. 예수님이 그 배를 타고는 물가에서 군중들에게 말씀을 하셨다 그랬습니다. 누가복음5장3절에 말씀을 잠깐 하시고는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그러시는 겁니다. 베드로야! 이 배를 몰고 깊은 데로 가가지고 고기를 한번 잡아보자는 겁니다. 그물을 그쪽에 가서 내려라 그러니까 베드로의 대답이 우리가 할 때 우리는 안드레가 빠진 우리입니다 야고보와 요한과 베드로의 두 배가 우리가 밤새도록 애써 고기를 잡으려고 했는데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러는 겁니다. 그렇지만 선생님의 말씀에 따라 내가 그물을 내려겠나이다. 그러는 겁니다. 누가복음5장5절에 그러니까 안드레는 그기에 없습니다.
안드레는 이 교육헌장에 없습니다. 3인방만 있는 겁니다.
그래가지고 그물을 던졌더니 고기가 엄청 많이 잡혀가지고 그물이 찢어질 정도라 그랬습니다. 그래서 옆에 있는 야고보와 요한이 타고 있는 배에도 가득 채웠다 그랬습니다. 누가복음5장6절에서7절에 이런 교육헌장에서 성질이 급한 아주 반응이 빠른 베드로가 액션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는 겁니다. 그리고 고백하는 장면입니다
뭐라고 고백하느냐면 선생님 나를 떠나가소서. 그리고는 오!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그러는 겁니다. 그때 죄인이라는 소리가 구원과 관계있는 죄인이야기가 아니라고 저는 보고 있습니다. 여기는 지금 구원이슈가 아닙니다.
이런 부분에서 내가 말을 잘 듣지 않으니 죄송합니다.
그런데 내 동생 안드레는 주님의 말씀을 잘 따르는데 저는 이게 안 됩니다
그러니까 제가 선생님에게 빚진 것도 있는데 장모님도 고쳐주었잖아요
그리고 제처도 허가했는데 제가 그런데도 아직 고기잡이 하고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저는 죄인입니다 이렇게 해석하시면 되겠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조인입니다 하니까 옆에 있던 야고보와 요한이 놀래가지고 예수님에게 놀랬다는 이야기만 그냥 하는 걸로 이 스토리는 끝납니다.
다시 말하면 두 번째 교육이 첫 번째 교육이 무엇이었습니까?
베드로를 향하여 장모님 병고쳐주는 것이고 두 번째는 지금 고기를 두 배에 가득 차게 하는 이런 일로 무엇을 시키려고 그러는 겁니까?
너희들 고기잡이 포기하고 이제는 나를 따르라 내 제자가 되어라 이런 메시지였다고 우리는 보면 되겠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질문을 하나 던져 보겠습니다. 그러면 왜 안드레는 없습니까? 안드레는 그러면 뭐라고 대답해야 됩니까? 안드레는 이미 과가 독수리과로 예정되었던 분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이분은 이미 두 번씩이나 그러한 기적을 보여주지 않아도 이분은 자기가 알아서 순종하는 분이기 때문에 그러니까 이분은 독수리 과였기 때문에 저세상 이 세상 저세상을 희미하게나마 또는 부분적으로나마 어린아이수준으로는 알고 있었지만 구체적으로는 몰랐지만 그 속에 성령님이 이분의 마음을 그렇게 만드셨던 것 같습니다 그 과에 걸맞게 여기 앉아있는 여러분들도 제가 볼 때 이런 분들 분명히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3인방처럼 시간이 필요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3인방들은 두 기적의 사건들을 특히 베드로에게 보여 주었는데도 이분들은 예수님을 100% 따르지 않았습니다.
신기하게 그 모습을 오늘 말씀 속에서 정리해드리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왜 이것을 우리에게 보여 주느냐면 신약시대에 제자 급 사람들 중에서 소수는 안드레스타일의 사람들이 있느냐면 다수의 예수님의 제자 급들은 3인방스타일들이 다라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는 것 같습니다. 왜냐면 겸손훈련을 해서 어느 정도 올라갔을 때 까불지 않는 겁니다.
왜냐면 아픔을 교통하면서 부적합함을 경험하면서 여기에 왔기 때문에 그러면 베드로를 중심으로 해서 예수님의 말을 공생애 동안 잘 안 듣는 모습을 우리가 몇 가지스토리로 말씀드리려고 그럽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100%신뢰하지 않았다는 것을 이분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는 것을 100%믿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가 한번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모습이 그대로 우리에게도 적용이 됩니다. 신학교 나오고 목사가 되고 목회를 20년30년 해도 똑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때가 되어서 나이가 들어서 깨닫는 학자들 목회자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겉으로는 다 아는 것 같지만 이걸 보면 압니다. 첫 번째 보세요.
베드로가 이런 모습을 보여 줍니다. 예수님께서 다음다음시간에 이 부분을 제가 자세히 말씀드리겠지만 제자들에게 최소한 4번 뭘 하였냐면 내가 죽었다가 3일 만에 부활해서 나중에 승천까지 이야기하지만 죽었다가3일 만에 부활할 것을 최소한4번은 한 것 같습니다. 첫 번째 마태복음16장21절에 가이샤라 빌립보에서 베드로가 그 유명한 고백을 하고는 비로써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내가 핍박을 받고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가3일 만에 부활하다는 이야기를 제자들에게 하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16장21절에 이 말씀을 하는데 이분들은 한쪽귀로 듣고는 한쪽귀로 그냥 흘려버린 겁니다.
그렇게 디자인된 사람들입니다 왜냐면 무슨 과기 때문입니까?
두더지과기 때문에 그러는 겁니다. 그리고는 17장22절에서23절에 예수님이 또 똑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26장2절에도 똑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가3일 만에 부활하리라 그러니까 이 말씀을 세 번 하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훨씬 전에 마태복음12장39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그랬습니다. 같은 맥락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직접간접으로 베드로에게 본인이 죽었다가3일 만에 부활할 것을 이렇게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예수님이 이 일의 실현을 위해서 잡혔을 때 십자가에서 죽으시려고 할 때 이 사람들은 다 도망갔습니다. 그래도 가까이 계셨던 분이 요한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 부인까지 하고 이것이 베드로의 잘못 같습니까? 제 생각한 이것은 퍼펙한 예수님의 디자인 속에서 움직여나가는 겁니다. 예정적인 측면에서 보면 왜냐면 예수님이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할 것을 예언까지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이게 디자인입니다 이게 베드로의 잘못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자칫하면 알미니안주의적인 인간 책임론 자들은 아하! 이것은 인간책임이다 아닙니다. 예수님이 뒤에서 가지고 있는 디자인인 겁니다.
디자인입니다. 그래서 이분들이 예수님이 부활하셨는데도 믿었습니까?
안 믿었습니까? 안 믿었습니다. 이렇게 다 알려주었는데도 안 믿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했습니까? 다들 자기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래서 고기잡이를 다시 시작했습니다. 그게 요한복음21장1절에서2절에 부활하신 후에 그때 보면 요한이 기록하기를 고기잡이를 하는 사람들 이름을 기록해놓았습니다 일곱 명 이름이 나옵니다. 그 일곱 명을 보면 순서가 또 있습니다. 목사님 뭐 그런 것까지 다 보십니까? 다 봐야 합니다.
우리가 영성훈련을 하는 겁니다. 성경 공부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영성훈련을 하는 겁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훈련받는 겁니다.
일곱 명 이름을 보니까 요한이 적어놓은 겁니다. 요한은 예수님과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이잖아요 딱 보니까 베드로가 넘버원입니다 제일 앞장서서 우리고향가자 아마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넘버원은 베드로 두 번째는 의심이 많았던 도마이름이 나옵니다. 그다음에 별로 이름이 없었던 나다나엘이 세 번째고 네 번째로 야고보가 나오고 다섯 번째로 요한이 나옵니다.
여섯 번째와 일곱 번째는 요한이 이름을 적지 않고 다른 두 제자들 그랬습니다. 왜 이름을 적지 않았을까? 그게 의문입니다 요한이 아마 성령님이 그렇게 하라고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러면 두 제자가 누굴까?
분명 안드레는 아닙니다. 안드레였으면 제일 앞에 나옵니다. 요한은 안드레와 죽마고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안드레는 이 장면에 없다는 것을 요한은 압니다. 다른 두 제자가 빌립이 아니면 빌립과 바돌로매 정도였다고 저는 봅니다. 아니면 마태든지 그렇기 때문에 베드로가 이렇게 훈련 받고 예수님이 이렇게 내가 죽었다가 부활할 것을 이야기했는데도 예수님을 세 번씩 부인하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잘 믿지도 않고 아예 집어던지고 다시 고향에 가서 고기잡이하는 모습을 우리에게 지금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안드레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아하! 예수님의 제자들도 교회 안에 있는 사역자들도 이런 모습들이 있구나. 하는 것을 우리가 보는 겁니다. 그런데 4인방이 산상수훈을 들었습니다.
지금부터 그의 결론적이지만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4인방이 산상수훈듣기 전에 불리 움을 받았습니다. 마태복음4장18절에서21절에 너희들 다 집어던지고 날 따라와라 했습니다. 그래놓고는 이분들이 따라오다가 팔복 산에서 산상수훈을 듣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산상수훈을 들었는데 산상수훈을 듣고는 산상수훈 마태복음5장6장7장의 말씀 속에서 이 말씀을 그래도 어렴풋이 듣고는 행동화했던 분이 누굽니까? 안드레입니다 100%마음에 들지 않지만 벌써 안드레는 가치관과 세계관과 물질관 가족관이 자기도 모르게 다 변해버린 겁니다. 산상수훈을 들으면서 특히 산상수훈에서 6장에 보면 기가 막힌 말씀들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면 6장19절부터 보시면 다 아는 이야기들입니다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였냐면 네 분에게 너 네들 너희 보물이 있는 곳에 너희마음도 있단다. 그러는 겁니다. 너희 보물이 있는 곳에 너희마음도 있단다. 그렇기 때문에 너희들 두 주인을 섬기면 안 된단다 그러는 겁니다.
그러니까 나를 전적으로 섬겨야지 돈도 섬기면서 직장도 섬기면서 두 주인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단다. 제자는 그러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을 안드레는 듣고는 그대로 실천한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은혜 받은 사람입니다
은혜가 없으면 이게 안 되는 겁니다. 3인방은 이 말씀을 한쪽귀로 듣고는 한쪽귀로 버렸던 사람들입니다 이 말씀을 했는데도 고기잡이 간 사람들입니다
이게 차이가 나는 겁니다. 그래서 두 주인을 섬기는 일을 가르쳐주었는데 두 그룹으로 갈라지는 겁니다. 그다음에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너 네들이 나를 따르려면 의식주를 걱정하지 말라 그러는 겁니다.
6장25절에서32절에 그러는 겁니다. 두주인은6장24절입니다.
주께서 다 책임져 주실 거라는 겁니다. 아버지께서 그러면서 예수님이 그 유명한 공중에 새를 봐라 저 새들은 씨앗을 뿌리지도 않는데도 또 거두지도 않는데도 곳간에 모아 놓지도 않는데도 공중에 새들은 그냥 자기네가 원하는 대로 배불리 먹고 지내지 않느냐. 그러는 겁니다.
그리고는 또 그러는 겁니다. 너희들 들에 있는 백합화를 봐라 옷 입는 것 걱정하지 마라 수고안하고 길쌈도 안하는 되도 솔로몬의 옷보다도 더 아름다운 저 백합화를 봐라 그러니까 너희들 옷 잘 입는 것 뭘 하는 것 걱정하지마라 너희가족들까지 다 책임져줄 거야 그런 소리입니다
그러면서 믿음이 적은 자들아 벌써 딱 보니까 안드레는 얼굴색이 다른데 이 세분은 얼굴색에 수심이 꽉 차버리는 겁니다. 그러면서 너희들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걱정하지마라 그러니까 염려하지마라 그러면서 염려하는 것은 이방인들이 하는 거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겁니다.
제가 예전에도 제 간증을 한번 한 일이 있는데 저는 이 말씀을 보면서 나에게 이것이 간증이 되는 겁니다. 제가 30여 년 전에 제가 목회자가 되려고 마음을 먹고 그럴 때 우리아이들이 셋인데 이 아이들을 보니까 주여 제가 목회자가 되면 저 아이들이 얼마나 힘들까 지금은 좋은 직장을 가지고 좋은 사업을 하면서 돈을 많이 벌지만 내가 이걸 다 놓아버리면 우리아이들 저놈들 나중에 대학까지 다 보내고 시집장가 보내야 되는데 이런 생각을 하니까 이게 막 걱정이 되는 겁니다. 제 처는 매일 울기만하고 제가 신학을 공부하고 목회자가 된다고 하니까 자기는 죽어도 목회자사모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제 처가 나에게 그러는 겁니다. 우리재산 절반을 팔아서 교회에 바치자 그리고 당신은 장로로 머물려있으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게 됩니까? 그러니까 이 갈등이 심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제가 주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성경을 가지고 있다가 주님 제게 해당되는 말씀을 주십시오. 하고 오픈했습니다. 딱 오픈하니까 지금 이 말씀이 나오는 겁니다. 이 말씀이 확대경으로 크게 보이는 겁니다.
그런데 덮어버렸습니다 이 걱정을 하고 있는데 그 말씀이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매일 있다가 또 이 걱정을 하고 있는 겁니다.
하고 있다가 말씀 좀 주십시오. 하고 성경을 펴보니까 그 말씀그대로 나오는 겁니다. 이렇게 해가지고 세 번을 주님께서 나에게 같은 말씀을 주시는 겁니다. 한 장도 넘기지 않고 확대경으로 그래서 제가 확신을 받은 겁니다.
아하! 그리고는 30여년이 지났는데 이 말씀그대로입니다
주님이 그대로 나를 우리가족을 책임지는데 기가 막히게 책임지신 겁니다.
여러분들도 겁내지 마세요. 그러면서 예수님이 이분들에게 그랬습니다.
너희들은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먼저입니다 두 번째가 아닙니다.
첫 번째입니다 그러면서 먼저 구하는 겁니다. 그러면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고 내일일은 내일 염려하고 그날의 재앙은 그날로 충분하다
6장34절에 그러면서 6장을 마치는 겁니다. 여기에 앉아있는 분들 또는 유튜브로 보고 듣고 있는 분들 중에 이 말씀이 적용될 사람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안드레는 지금 무거운 말씀을 들을 때 그대로 적용한 사람으로 보고 있습니다. 안드레는 왜냐면 이 사람은 독수리과로 예정된 삼이기 때문에 아예 태생적으로 이 은혜 이 무거운 것을 그대로 않을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놓으신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은 숫자가 많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나머지 3인방들은 이제는 뭐가 필요 하느냐면 훈련이 필요한 겁니다. 항상 우리가 말하는 것처럼 크로노스(Cronos)가 필요로 하는 겁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30년의 크로노스(Cronos)를 경험했습니다.
크로노스(Cronos)기간 동안에 시행착오를 겪게 하면서 겸손훈련을 시키시면서 팔복의 사람으로 조금씩, 조금씩 변화시키고 아들이 되는 덕목 훈련시키시고 사랑덕목 훈련시키시면서 한 단계 한 단계 그럴 때마다 안드레 같은 멘토 같은 분들이 주변에 있는 겁니다. 그래서 안드레가 3인방을 멘토 시키듯이 계속해서 멘토를 받으면서 여기까지 오게 된 겁니다.
그러다보면 우리가 결론적으로 말씀 속에서 배우는 것 중에 하나가 아하! 하나님의 자녀들 중에 적어도 세 부류의 자녀들이 있구나.
첫 번째는 안드레처럼 처음부터 독수리과로 예정된 분들이 있느냐면 두 번째는 3인방처럼 두더지과로 들어갔지만 나중에 독수리까지 가야되는 훈련을 통해서 가야되는 그런 분들도 있구나. 이런 분들은 사역자들 중에 대부분입니다 세 번째 사람들은 그냥 일반군중들입니다 같은 산상수훈을 들었지만 군중들은 그냥 듣기만 했지 그것이 삶에 적용되지 않고 그러다가 낙원에 간 사람들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러니까 모두가 낙원에 가는데 낙원에 가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이렇게 대별을 하는 겁니다. 그러면 목사님 왜 이렇게 대별을 해놓았습니까 예수님이 그러면 뭐라고 대답해야 됩니까?
그러면 우리는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답은 간단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창조목적훈련을 받는 과정 속에서 때가 되면 낙원으로 올라가는데 본향으로 그기는 직분사회입니다 계층사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계층사회는 예수님이 임의로 정하시는 것보다는 공의의 예수님이시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계층을 설정하시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계층을 설정하기 위한 빌미로 주님께서 다 이렇게 하신 것 같습니다. 왜냐면 하나님의 자녀들도 생명책에 기록한 대로 우리 행위가 전부가 다 생명책에 기록되는데 그 기록에 따라서 예수님께서 우리의 직분을 설정한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은 간단하게 결론적으로 이런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아하! 우리하나님을 예수님을 우리의 주님으로 섬기지만 적어도 우리주변에는 우리공동체에는 세 종류의 사람들이 있구나. 라는 것을 우리가 우선 깨달아야 되고 오늘 말씀 속에서 그리고는 안드레 같은 사람이 있느냐면 모두가 아니고 소수가 그렇고 대부분의 목회자들도 신학생들도 선교사들도 3인방 속에 들어와서 끊임없이 훈련받으면서 시행착오를 겪어가면서 가는 그런 분들도 많구나. 라는 것을 항상 잊지 말아주시고 대부분의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런 것에 대해서 무감각하구나.
산상수훈에 무감각하구나. 그리고 두 주인을 섬기는 것보다 예수님보다 세상주인을 더 섬기는 이러한 사람들이 더 많구나 라는 것을 우리가 깨달으면 자기도 모르게 그릇이 커져버리는 겁니다. 그릇이 커지면서 주변사람들을 보면 아하! 저분은 어느 그룹에 있어서 저런 행동을 하는구나.
저분은 어떤 정도의 영적수준이구나 그래서 저런 말을 하는구나.
저런 행동을 하는구나. 라고 볼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걸 보는 지혜를 가지라고 오늘 본문의 말씀을 우리가 서로 나누는 겁니다.
이런 말씀을 우리가 공부하면서 항상 보면서 그렇기 때문에 아하! 저분은 저 수준이구나 저분은 저수준이구나. 그러면서 그걸 비판하는 게 아닙니다.
정답은 무엇입니까? 저수준이구나. 그러니까 내가 그냥 안아주어야지 내가 안아주어야지 안아줄 때 나의 급이 올라가는 겁니다. 그런데 안아주지 못하고 왜 저렇지 권사님인데 목사님인데 장로님인데 왜 저렇지 저런 사람은 상대도 안 해 이러면 그 사람은 점수가 떨어집니까? 안 떨어집니까?
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있는 그대로 안아주는 연습을 과거에는 안 했지만 오늘부터는 해야 되는 겁니다. 그러면 나에게 뭐가 옵니까?
평강이 오는 겁니다. 평강이 없는 이유를 알겠죠? 모든 것을 내 시각으로 보기 때문에 평강이 없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큰 그림으로 볼 때는 평강이 있고 우리권사님들은 나이가 들수록 치마폭이 넓어져가지고 그 치마 속에 많은 새끼권사들이 들어오고 새끼 집사들이 들어오는 겁니다.
그리고는 전부다 안아주는 겁니다. 그런데 어떤 권사는 가까이가면 그냥 찬바람을 느끼는 겁니다. 가까이 가서 말도 못하게 이런 권사님들도 있습니다.
우리교회는 없지만 딴 교회는 분명히 있습니다. 저도 그런 사람 많이 봤습니다. 우리 배선교사님도 자기 마음에 맞지 않으면 가까이하지 않고 배척해버리고 제가 사랑해주어라 그러면 저 사람 못쓴다고 그러다가 저하고 10여년 같이 지내면서 요즘은 많이 변했습니다. 많이 변했습니다.
모든 사람을 안아주는 연습을 하는 이제 큰 그릇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가끔가다가 끼가 나옵니다. 제가 끊임없이 잔소리를 해야 됩니다
그런데 이분이 아니었더라면 제가 라오스를 어떻게 섬깁니까?
주님이 저 아들을 부르셔가지고 준비시키시고 40년을 목회하시면서 준비하셔가지고 가족들 다 뒷전에 놓고 그러니까 누가복음14장26절 말씀대로 사셨던 분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열매들이 나오잖아요. 우리 모두가 다 다는 아니지만 이 원칙을 깨닫고 성령님이 각자 각자에게 말씀하실 겁니다.
주님! 말씀해주시옵소서. 예수님! 오늘 주신 이 말씀 속에서 각자 각자에게 필요한 말씀을 주셔서 때가 되어 카이로스 때가 되었을 때 주님 앞에 헌신하는 한분한분 되도록 이복을 내려주시옵소서 그래서 우리가 한 알의 씨가 많은 열매를 맺는 그러한 우리 삶이 되도록 은혜주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구하옵나이다. 아멘.
삼위하나님의 이름으로 우리의 이 고백이 우리의 삶 속에서 현실화되도록 복을 내려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왜 산상수훈에 대한 반응이 다양한가(눅5:1-11)
1. 안드레의 특성 15가지를 열거하며 느낀 점을 나누어 봅시다.
2. 산상수훈 전, 예수님이 4인방을 부르셨던 장면을 서로 나눕시다(마4:18-21).
3. 4인방을 둘(2)로 어떻게 나눌 수 있습니까?
4. 이 4인방 교육방법이 어떻게 다릅니까?
5. 베드로를 full time(전임) 사역자로 만들기 위한 첫 번째 방법이 무엇입니까?
6. 그 두(2)번째 방법이 무엇입니까?(눅5:1-11) 여기에 안드레는 왜 없습니까?
7. 안드레가 산상수훈을 어떤 태도로 받았습니까?
8. 왜 그가 마태복음 6:19-34을 액면 그대로 수용할 수 있었습니까?
9. 왜 3인방은 이것을 액면 그대로 수용할 수 없었습니까?
10. 같은 크리스천이지만, 왜 산상수훈에 대한 반응이 다양합니까?
11. 우리는 이 다양한 기독교 공동체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합니까?
※황용현 목사님 설교내용영상으로 보세요.
https://www.youtube.com/watch?v=ohKdbd69Bv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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