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강해 22강. 예언, 방언 은사(고전14:1-40) 2009년12월27일 말씀
고린도전서강해를 주욱 하면서 특히 12장은 무엇이었습니까?
우리가 보통 12장을 은사장이라 해서 우리가 공부했습니다.
그리고 은사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고르게 하는 일이라는 것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고르게 하는 일이 13장에 와서 사랑과 같은 맥락에서 있다는 말씀을 같이 상고 했습니다. 그래서 13장은 사랑장입니다
그런데 14장에 와서 사랑 장을 말씀하시면서 고린도교회가 가지고 있었던 큰 문제점들 중에 하나가 14장에 나오는 방언하는 것과 또 방언을 통역하는 것과 또 예언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래서 14장 전체를 할애했습니다.
14장을 이렇게 보면 바울이 은사들이 30여 가지가 있는 것 중에서 그 중에 특별한 일곱 가지 은사들은 교회를 살려주는 다시 말하면 교인들을 살려주는 일을 하는 특별은사가 일곱 가지가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일곱 가지은사들을 14장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여기에 적어 놓았지만 계시의 은사, 지식의 은사, 예언의 은사, 가르치는 은사, 찬양하는 은사 그다음에 방언은사 방언을 통역하는 은사 이 일곱 가지 은사가 특별히 교회공동체에서 교인들을 살리고 힘주게 하고 영적으로 자라게 하고 또 그 속에 들어 있는 교인들까지도 그렇게 해준다는 겁니다. 그것을 14장에서는 무엇이라고 말해냐면 덕을 끼친다는 말을 섰습니다. 덕을 끼친다는 말이 한국말로는 그냥 덕이라고 하면 어떻게 보면 그냥 덕이 있다고 해석하기 쉬운데 덕이라는 말을 영어로 말하면 빌딩 업(building up)건물을 지을 때 터 닦고는 건물을 짓는 이런 의미가 덕을 세운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일곱 가지 은사가 덕을 세우는 은사인데 그런데 고린도교회가 일곱 가지 은사들을 가지고 덕을 세우는 일을 못했습니다. 못한 것이 고린도교회만이 아니고 과거 2천년 동안 교회에서 있었던 공통적인 문제들이었습니다. 특히 일곱 가지 중에서 아주 덕을 세우는 데 방해를 하는 은사들이 세 개가 있었습니다.
그것을 14장에서 심도 있게 다루는 겁니다. 그것이 뭐냐면 예언의 은사 그다음에 방언의 은사 그리고는 방언 통역하는 은사라는 겁니다.
이 세 은사가 교회를 자라게 하고 교인들을 자라게 해주는 일을 하지 않고 반대역할을 해왔던 겁니다. 고린도교회 만이 아니고 1세기부터 시작해서 2세기3세기 주욱 오면서 지금까지 이 세 은사 때문에 교회들이 시끄럽습니다.
그러니까 로마가톨릭이 교단을 만들고 제일 먼저 정리한 것이 교회 안에서 이런 세 은사들을 하지 말라고 아주 재제를 해버렸습니다. 그뿐 아니라 정교회 애굽 에티오피아 그리스 기타 등등 모든 정교회들도 이런 세 은사를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왜냐면 교회가 더 시끄러워 진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안에 소수의 사람들이 교회는 하지 말라고 하지만 자기가 기도 가운데 이 은사들이 터져 나오는 겁니다. 소수의 사람들이 그분들이 핍박을 받았습니다. 핍박을 받아가지고 수도원으로 들어가서 은둔생활을 하거나 안 그러면 가정에서도 나타나지도 않고 신앙생활을 해왔던 것이 교회에서는 공식적으로 이 은사들을 못하게 했습니다. 그걸 어디에다가 정당화시켰느냐면 우리가 지난시간에 했던 13장에 보면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폐하고 이런 것들은 다 부분적이고 일시적이고 온전한 것이 올 때는 이 어린아이들 것들을 다 폐한다는 겁니다. 그 온전한 것들이 뭐냐면 이분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성서가 온전한 것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주후 언제 신약성경이 생겼습니까? 397년입니다 397년부터 신약이 정경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제는 그런 게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말씀만 가면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것이 기독교역사 속에서 이어 오다가 1517년에 종교개혁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소위 개신교가 나타난 겁니다.
대표적인 개신교를 보면 루터교(마틴 루터), 성공회(영국 왕이 수장), 개혁교단(칼빈, 쯔빙글리), 감리교(찰스 웨슬리), 장로교(존 낙스), 침례교(스미스), 구세군(윌리엄 부스), 회중교회 등 많은 개신교들이 나타났는데 이분들도 똑같이 로마가톨릭과 같이 이런 방언이나 방언통역이나 예언의 은사들은 하지 말라 왜냐면 교회가 시끄럽다 그래서 못하게 했습니다.
주욱 그렇게 해서 이런 중요한 은사들이 교회 안에서 물밑에 들어가서 나타나지 못하고 그냥 주욱 왔었습니다. 그러다가 1850년대부터 약1800년대부터 이 은사들이 조금 조금씩 여기저기서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선교사들 가운데서 이런 일들이 벌어지다가 1900년에 미국의 캔사스 주에 토피카라고 있습니다. 지금도 캔사스 주청소재지입니다 토피카에서 예배를 드리는 과정 속에서 이 은사들이 아주 대대적으로 나타나는 겁니다. 예배드리는 사이에 방언이 터지고 통역하는 사람이 나오고 예언이 막 나오고 이런 일들이 있어가지고 이 경험이 캘리포니아 아주사 거리라고 거기 교회에 흑인들이 모여 있는 교회인데 거기에 1903년에 떨어져가지고 거기서부터 시작해서 미국에 성령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오순절다락방사건이 재현되는 그런 일들이 그때부터 일어나면서 그것이 한국 까지 나오고 아프리카 남미 유럽까지 퍼져가지고 개신교 안에서 이런 운동이 일어나고 특별히 로마가톨릭 안에서도 이 운동이 이 불길이 붙어서 각 교단으로 퍼지는 겁니다.
우리나라도 알다시피 1903년에 원산에서 선교사들이 모여서 기도하다가 캐나다선교사인 하디라는 선교사를 중심으로 해서 기도하다가 이 불이 떨어졌는데 그 당시에 길선주 전도사가 거기 있다가 부를 받아서 1907년에 소위 평양에서 성령의 불이 떨어진 것 제가 여러 번 말씀드렸습니다.
이렇게 해서 이 운동이 막 일어나면서 하다보니까 무슨 문제가 생기느냐면 이렇게 조용하던 교회들이 그 안에서 집사 장로 권사들이 심지어는 목사님들까지 갑자기 방언이 터지고 예언하고 이런 사역들이 일어나니까 교회들이 시끄러워져가지고 그러면서 이분들이 예언을 하는데 이런 방언과 예언을 안 하는 사람들은 이것은 가짜다 저것은 틀렸다 은혜가 없다. 면서 교회 안에서 난리가 나가지고 교회들이 많이 깨져버렸습니다 교단들이 갈라지고 그래서 20세기에 들어와 가지고 교단들이 많이 생겨났습니다. 그 당시에 많은 교단들이 이 문제 때문에 갈라지고 교회가 갈라지고 싸움하고 이런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또 에큐메니칼(Ecumenical)운동이라고 그래서 자유주의와 복음주의와 갈등 때문에 교회들이 많이 갈라졌지만 이런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은사가 상당히 중요한 은사입니다 이 은사에 대해서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그러다가 1930년대 미국에서 이런 은사를 경험한 사람들이 모여가지고 안 되겠다 우리가 이러지 말고 교단을 만들자 그래서 만든 교단이 어셈블리 오브 갇(Assembly of God)이라고 그래서 A, O, G라고 그걸 한국말로 번역하면 하나님의 성회라고 그럽니다. 우리나라는 순 복음이라고 번역이 되어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성회가 그런데 이 안에도 교단이 많습니다. 그중에 가장 큰 교단이 어셈블리 오브 갇(Assembly of God)입니다
지금 이런 교단이 이렇게 나타나니까 다른 정통교단들이 처음에는 이 교단을 이단시하는 일들이 있다가 이분들은 이런 핍박을 받으면서 커졌는데 지금은 어셈블리 오브 갇(Assembly of God)이 전 세계에 개신교 중에서 제일 큰 교단이 되어 버렸습니다. 숫자상으로 아프리카 남미 아시아 쪽에 이 교단 멤버들이 엄청나게 많은 겁니다. 이런 과정 속에서 소위 성령운동이라고 하는 이것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하고 어떤 가이드라인이 필요한가를 오늘 제가 여러분들에게 가르치는 가이드라인을 따라서 해주어야 합니다.
안 그러면 또 문제가 생기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고린도교회도 이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가이드라인을 제시했습니다. 14장에서 가이드라인만 가지고는 충분치가 않아서 저는 성경전체에서 흐르는 가이드라인을 종합으로 해서 여러분들과 이 시간 이야기하려고 그럽니다. 방언과 예언의 문제점 중에 가장 큰 문제가 뭐냐면 교회에 덕을 끼치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교회에 덕을 끼치지 않는 것이 그래서 우선 방언에 대해서 우리가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는 예언에 관한 말씀을 하려고 그럽니다.
방언은 성서에서 보면 두 가지 방언이 있습니다.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이 있습니다. 사람의 방언은 사도행전2장9절에서11절에 나오는 열다섯 개의 나라의 말을 했잖아요. 이런 방언들입니다 사람들의 언어를 쓰는 방언들 이것의 목적이 무엇일까요? 전도용입니다 사람들을 놀라 게 만들어서 어떻게 저 갈릴리사람들이 우리 방언을 쓰느냐 그래서 3천명이 주님께 오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사람의 방언은 그런데 천사의 말입니다 천사의 말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공중방언과 14장27절에 개인방언이 있습니다. 14장4절입니다.
천사의 말은 알아듣지 못합니다. 우리가 알아들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방언은 예언과 차이가 뭐냐면 개인 방언은 우선 내가 말을 하지만 내가 그 뜻을 모르고 말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 방언은 도움을 받는 사람이 내 자신입니다 교회가 교인이 도움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방언 중에 공중방언이 있습니다. 여기14장에 그 이슈를 많이 다루었습니다. 공중방언이 있는데 왜냐면 공중방언에 문제를 야기했습니다.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데 갑자기 한 사람이 뭐라, 뭐라 막 방언을 합니다.
저기서도 막 방언을 합니다. 이런 일들이 지금도 이런 성령운동을 하는 사람들 교회에 가면 지금 도 있습니다. 뭐라, 뭐라고 방언을 하는데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 방언 할 때는 고린도교회에서도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겁니다.
아무리 방언을 해도 꼭 통역하는 사람이 옆에 있어야지만 방언을 하라는 겁니다. 그리고 한 사람이 했을 때 또 그 사람이 한 말을 누가 통역을 한 후에 그 다음에 다른 사람이 일어나서 방언을 하라는 겁니다. 또 통역이 있어야 되고 또 통역이 끝나면 또 방언하라는 겁니다. 다시 말하면 통역이 없으면 방언을 하지 말라는 겁니다. 이 공중방언은 왜 그렀느냐면 이유는 간단합니다. 14장에서 말씀하십니다. 혹시 믿음이 없는 사람이나 또는 외부사람이나 방언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들이 들어와 가지고 그런 사람들이 그렇게 하는 것을 보고는 이 사람들 미쳤구나. 이 사람들 이상한 사람들이구나. 이런 인상이 들어가므로 해서 나 이제 교회 안 나갈래 이렇게 될 때는 거침돌이 된다는 겁니다. 우리가 계속해서 고린도전서에서 거침돌이슈를 항상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이 나에게 좋았지만 거침돌이 되는 행위가 될 때는 잠잠 하라는 겁니다. 이게 굉장히 중요한 개념입니다
이것을 컨트롤을 못하는 사람들이 있는 겁니다. 성령의 은사 중에 하나가 컨트롤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성령님이 하니까 컨트롤이 필요가 없다 성령님이 하니까 한다. 그러면 그렇게 하는 사람은 그것이 마귀의 방언이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왜냐면 성령의 은사는 컨트롤입니다 컨트롤을 안 하고 하는 것은 이게 잡놈이 하는 경우가 많다는 겁니다. 구별할 수 있겠습니까?
할렐루야, 아멘, 지금 성령님이 나에게 말합니다. 하는데 컨트롤을 못하고 하는 겁니다. 그럴 때는 그것은 비 성령님이라는 겁니다. 이 부분이 우리가 꼭 필요합니다. 방언을 굉장히 중요시하고 방언의 중요성은 제가 나중에 말씀드리겠지만 방언을 꼭 해야 된다는 이런 분들이 많습니다. 실은 그래서 오순절교단이라고 예언과 방언의 역사들이 소위 사도행전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그래서 사도행전에 오순절 날 일어났기 때문에 그런데 실은 오순절 날에 일어났던 방언은 무슨 방언이었습니까? 사람의 말을 하는 방언이었습니다.
오순절 날에 일어났던 방언은 그리고 사도행전을 보면 방언이 일어났던 일들 소위 사람의 말 말고 천사의 말이 일어났던 일들은 극소수입니다
그게 사도행전에 지배적으로 있는 게 아닙니다. 아주 극소수입니다
딱 두 번입니다 베드로가 고넬로 집에 가서 설교하셨을 때 이방인들이 방언을 받았습니다. 이때 방언은 천사의 방언입니다 사도행전10장46절에 그 사건이 있었고 그다음에 사도행전19장6절에 바울이 3차 여행을 했을 때 에베소에 있었을 때 에베소사람들에게 안수를 하니까 이방인들 중에 일부가 천사의 말을 하는 방언을 받았다 그랬습니다. 또 예언까지도 은사를 받았다 그랬습니다. 이 두 곳 빼놓고는 사도행전에 방언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없습니다. 공중방언 특히 개인방언을 하는 목적이 뭐라고 그랬습니까?
첫째 개인방언은 목적이 누구에게 덕을 끼치는 겁니까? 자신에게 덕을 끼치는 겁니다. 그러니까 해야 됩니다. 그렇지만 공중방언은 누구에게 덕을 끼치기 위해서입니까? 교인들 듣는 사람들에게 덕을 끼치기 위해서 공중방언을 하는데 꼭 뭐가 필요합니까? 꼭 통역이 필요한 겁니다. 통역이 없으면 하지 말라 잠잠 하라 그랬습니다. 가끔가다가 어느 집회나 기도원에 가나 어떤 뜨거운 교회에 가면 단에 선 사람이 막 방언으로 기도합니다.
그것은 지금 14장에 비교하면 비성서적입니다 지금 우리나라가 그렇게 하고 있는 곳이 있습니다. 다른 선교지에 가면 아프리카나 이런 데 가면 또 그렇게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알아듣는다면 가능하지만 그것이 하나의 전통이 되면 어떻게 보면 거침돌이 되지 않는 경우라면 가능하겠지만 그것은 성서에서는 그런 말이 없습니다. 통역이 없으면 공중방언에서는 무조건 잠잠해라 그랬습니다. 개인방언에 대해서 이야기해봅시다 이것은 우리에게 상당히 중요하고 개인방언의 은사를 받는 것은 우리에게는 큰 복입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모든 사람에게 있는 방언의 은사가 아닙니다.
은사는 하나님이 본인이자기의 뜻에 따라서 나누어준다고 그랬잖아요.
은사들을 그러니까 우리교인들 중에 개인방언을 나는 못하니까 나는 믿음이 없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마세요. 저는 개인방언을 합니다. 방언한지 30년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걸 가지고 자랑할 필요는 없는 겁니다. 개인방언의 특징은 첫째가 무엇입니까? 이것은 천사의 말입니다 13장1절에 그랬습니다. 두 번째는 14장2절에 그랬습니다. 하나님께 하는 방언입니다 또 14장2절에 보면 알아듣는 자가 없다고 그랬습니다. 그다음에 방언을 하는데 누가 기도를 하느냐면 네 속에 있는 프뉴마(pmeuma)성령님이 기도를 한다는 겁니다. 14장14절에 보면 우리 프뉴마(pmeuma)성령님 다 압니다. 내 속에 있는 프뉴마(pmeuma)성령님이 기도하는데 로마서8장26절에 무엇입니까? 내 속에 있는 성령님이 나의 빌 바를 내가 모르지만 나를 대신해서 중보 해주신다고 그랬습니다.
성령님이 안에서 내 대신에 랄랄라 기도해주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상당히 이익입니다 내가 무엇을 기도해야 될지 모를 때 내 대신에 성령님이 나의 부족함을 이분이 아시고 내 대신에 기도해주시는 겁니다. 그런데 14장14절에 보면 그랬습니다. 내 마음으로는 알지 못한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한국말로는 마음인데 실은 원어를 보면 누스(NOUS)라고 내 이성입니다
내 이성으로는 그게 무슨 뜻인지를 모른다는 겁니다. 바울이 말씀하시기를 나는 모르는데 랄랄라, 랄랄라 성령님은 아시고 내 대신에 기도해주신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14장2절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것은 영의 기도인데 미스터리(mysteries)를 기도한다는 겁니다. 내가 모르는 신비를 내 대신에 기도해준다는 겁니다. 왜 그럴까요? 누구의 덕을 위해서입니까?
자신의 덕을 위해서 14장4절에 그랬습니다. 그러면서 18장18절에 너희들 나는 누구보다도 도 이 방언기도를 많이 매일 매일한다는 겁니다.
바울은 그러니까 이 은사를 받은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이 은사는 다른 사람 덕을 세우지를 못합니다. 내 자신을 위한 방언입니다 왜 이렇게 개인방언이 필요 하느냐면 개인방언의 기도의 유익은 첫째로 방언기도를 하면 이 기도가 방해를 받지 않습니다. 왜냐면 영의 비밀을 미스터리를 말하기 때문에 공중권세 잡은 자 1층천2층천에 있는 자 보다 3층천에 있는 삼위하나님께 우리가 기도하는 겁니다. 성부하나님을 향해서 기도하고 삼위하나님께 기도하는 겁니다. 그런데 2층천과 1층천에 공중권세 잡은 자들이 우리가 기도를 하면 일반 기도를 하면 이놈들이 다 알아들어서 우리의 기도를 와서 막는 경우가 많은 겁니다. 그렇지만 방언기도를 하면 아무도 모른다고 그랬잖아요. 하나님밖에 모른다고 그랬거든요 그러니까 그놈들도 모르는 겁니다.
공중권세 잡은 자들이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에 방해를 못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걸 꼭 해야 되겠습니다. 그렇지만 못한다고 해서 섭섭하지 마세요. 두 번째로 방해가 없기 때문에 직접 전달하는 겁니다.
그다음에 기도응답이 빨라지는 겁니다. 여기에 대한 예를 제가 다니엘서10장이야기를 드렸습니다. 다니엘이 기도를 했습니다. 다니엘이 기도를 하고는 그 기도를 즉시로 여호와께서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받으셨는데 그 기도의 답을 가지고 내려오는 데 누가 내려왔습니까? 가브리엘천사가 응답을 받고 내려오는데 2층천에 바사군인들이 다시 말하면 마귀들이 꽉 차서 못 오게 방해를 하는 겁니다. 그래가지고 21일 동안 다니엘은 기도에 대한 대답이 없으니까 21일을 기도하는 겁니다.
그러다가 21일 째 가브리엘이 와서 하는 소리가 내가 이놈들이 방해를 해서 못 내려와서 내가 미가엘천사를 불려다가 도와달라고 해서 미가엘천사가 이놈들과 싸움하고는 이놈들을 쫓아내고는 내가 이제 도착했다는 이런 말씀을 하신 게 있습니다. 그러니까 중간이 뭐가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방언기도가 좋습니까? 안 좋습니까? 좋은 겁니다. 네 번째는 방언기도를 하면 기도 자가 덕을 이룹니다. 기도 자가 성숙해지는 겁니다. 왜냐면 내 속에 있는 쓴 뿌리들을 제거해주니까 로마서8장26절에 나의 연약한 부분들을 제거해주기 위해서 기도해주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방언기도를 하면 성화되는 좋은 첩경이 될 수가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랬습니다. 14장39절에 방언말하기를 금하지 말라 아까 말씀드렸지만 고린도교회의 교인들 중에 이런 개인 방언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분들이 개인적으로 방언할 뿐인데 나타내려고 공중방언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겁니다.
그래서 공중방언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14장에서 바울이 말씀하셨습니다.
첫째 통역이 꼭 필요하다 14장5절,13절,27절에 통역이 없으면 교회에서는 공중방언을 하지 말고 잠잠해라 28절에 그랬습니다. 통역이 있으면 순서대로 하되 적당하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 적당하게 하라는 말은 한국말 번역이 조금 시원찮게 되어 있습니다. 원어를 보면 경외 받게 하라 이렇게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단정하게 하라 예의바르게 하라 원어를 보면 유스케모노스(eujschmovnw")라는 말인데 사전을 보면 경외 받게 어울리게 예의바르게 이런 뜻입니다 그걸 적당하게 하라고 한국말로 번역되었으니까 그 단어가 조금 시원찮은 겁니다. 그러니까 인격적으로 예의바르게 그냥 하니까 소리 지르고 몸을 비틀면서 이런 식으로 하지 말라는 겁니다.
점잖게 우리하나님은 점잖은 하나님이십니다. 성령 충만해지면 점잖지 않고 뜨거워가지고 이런 사람들 초창기에는 그럴 수 있지만 어느 정도 되면 점잖아 져야 되는 겁니다. 경우에 맞아야 되는 겁니다. 상식에서 벗어나면 안 되는 겁니다. 왜냐면 33절에 분명히 그랬습니다. 우리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오. 화평의 하나님이라는 겁니다. 그러면서 37절에 하시는 말씀이 이런 방법으로 점잖게 단정하게 예의바르게 질서 있게 하는 것은 이것은 예수님의 명령이라는 겁니다. 예수님의 명령이니까 그대로 해야 합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명령을 따르지 않기 때문에 과거2천년 동안 교회에서 문제들이 생기니까 못하게 막아버린 겁니다. 이 은사가 중요하지만 이 은사가 구원과 직결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아예 야기되는 문제가 더 심각하게 크니까 못 하게 막아버린 겁니다. 바울은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왜 공중방언을 할 때 통역이 필요한가? 이유를 몆 가지를 드렸습니다. 첫째 모든 소리는 다 뜻이 있다는 겁니다. 10절11절에 그랬습니다. 피리를 봐라 거문고를 봐라 나팔을 봐라 뜻을 모르면 허공에다가 말하는 것이라는 겁니다. 뜻을 모르고 하는 것은 야만인이라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중방언을 할 때는 꼭 뜻이 있어야 되는데 그 뜻을 통역을 통해서 알려주어야 된다는 겁니다. 그걸 이해를 못하면 통역이 없으면 이분이 뭐라고 말했는데 축복을 내리는 방언이었는데 뜻을 모르니까 아멘 소리를 못한다는 겁니다. 바울이 16절에 그랬습니다.
아멘소리를 못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 복을 받지를 못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꼭 통역이 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그래야지만 그 교회가 교인이 덕을 받는 다는 겁니다. 그것만이 아니고 방언이 없으면 거침돌이 되어서 믿음이 적은 자들이 이것을 이해 못하는 자들에게 넘어지게 만든다는 겁니다.
왜냐면 이들이 그들의 이성으로 이해 못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라는 겁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19절에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가르치는 것이 일만 마디 깨닫지 못하는 말로 하는 방언보다 낫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계속해서 이런 걸 가르쳤습니다.
공동방언을 하게 될 때 통역을 어떻게 하는가? 예를 들어서 한 가지 방법은 여기 앉아있는 한분이 궁중방언을 하는 겁니다. 그런데 통역하는 사람이 주변에 없습니다. 그러면 어떤 분들은 통역도 하면서 동시에 번역까지 하는 은사를 가진 분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공중방언을 한 다음에 자기 방언을 그대로 막 통역을 하는 겁니다. 이렇게도 할 수가 있다는 겁니다.
통역이 꼭 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그다음에 우리 권사님 한분이 일어나서 공중방언을 합니다. 그러면 우리 안수집사님이 일어나더니 그 방언을 통역을 하는 겁니다. 그러면 이게 성서적인 겁니다. 그런데 어떤 자매가 일어나서 방언을 하는 겁니다. 그런데 통역하기 전에 어떤 집사님이 일어나서 또 방언을 하는 겁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안 된다는 겁니다. 누가 방언으로 말하면 누가 통역하고 또 누가 방언을 하면 누가 일어나서 통역하고 이 순서대로 하라는 겁니다. 왜냐면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리고 방을 할 때도 나이스하게 젠틀하게 인격적으로 하라는 겁니다.
누가 봐도 이 사람들 참으로 멋있구나. 지금 이게 내 말이 아닙니다.
성서의 말을 제가 이렇게 풀어드리는 겁니다. 방언에 대한 잘못된 가르침들이 있어왔습니다. 첫째는 뭐냐면 방언은 훈련받은 훈련된다고 믿는 그래서 오늘날 딴 나라는 심하지 않습니다. 우리나라는 심합니다. 방언은사 받을 사람들은 이번 집회에 꼭 오십시오. 제가 방언 받게 하겠습니다.
예언은사 오십시오. 이렇게 하는 겁니다. 그것은 비성서적입니다 방언은사가 연습한다고 되는 겁니까? 아닙니다. 왜냐면 방언은사는 하나님이 자신의 뜻대로 분량에 맞추어서 나누어주는 것뿐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겁니다.
연습해서 되는 게 아닙니다. 두 번째로 어떤 분들은 그럽니다. 크리스천은 모두가 다 방언 받아야 된다는 겁니다. 방언 안 받으면 안 된다는 겁니다.
이게 맞습니까? 아닙니다. 방언은 은사입니다 은사는 하나님이 뜻에 따라서 줄 사람만 주고 하나님이 주기 싫은 사람은 안 줍니다 꼭 필요한 사람만 주게 되어있는 겁니다. 방언 은사가 모두가 다 받아야 되는 은사가 아니라는 겁니다. 심지어는 이 방언 때문에 소위 일반 정통교단들과 또 오순절교단과의 관계 속에서 한때는 방언을 강조하는 교단들이 그랬습니다.
방언을 받지 않으면 구원도 없다는 데까지 나간 겁니다. 지금 그런 사람들이 미국에 가면 아직도 그걸 강조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방언 못 받으면 구원까지도 없다. 그러니까 그럽니다. 방언 못 받으면 집사 될 수도 없고 장로 신학교도 못 간다는 그런 교단들이 지금도 있습니다. 방언 못 받으면 목사 안수도 못 받는다. 그러니까 방언 연습까지도 하게 되는 겁니다.
목사 안수 받으려면 그러다 보면 연습해서 받은 방언 그게 누가 준 겁니까?
잡놈이 준 겁니다. 또 어떤 분들은 그럽니다. 우리가 성령세례를 받았습니다.
성령세례를 받으면 꼭 방언이 수반되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오순절 때 봐라 120문도가 다 그랬잖느냐 이겁니다. 120문도가 받은 방언은 천사의 말이 아니고 사람의 방언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세례와 방언 이것이 이꼬르가 아닙니다. 방언은 받을 수도 있고 못 받을 수도 있습니다.
요즘 과거도 그랬지만 아주 근본주의교단들은 또는 장로교도 일부가 그러고 또는 형제교회들 다시 말하면 세대주의 교단들 세대주의 신학을 하는 쪽에서는 무엇을 강조하느냐면 방언과 예언은 1세기 때 이미 폐해버렸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은 방언하는 것은 비성서적이다 예언도 마찬가지고 그러니까 지금 방언하는 것은 그것은 성령님이 하는 것이 아니고 악령이 하는 거다. 이렇게 아주 단절을 해버리는 교단들도 꽤 많습니다. 선교지에 가도 그런 선교사들을 통해서 배웠기 때문에 우리가 다니는 선교지에 가면 그렇게 배워온 사람들도 꽤 있습니다. 미국 남부 텍사스지방에 가면 소위 침례교인들 형제교인들 또 아주 신실하고 말씀에 깊고 선교도 많이 하고 아주 인격적인 사람들도 그 지방에 많은데 한 가지 그분들이 가지고 있는 약점 중에 하나가 방언과 예언은 1세기에 끝났다고 보고 그걸 못하게 하는 겁니다.
그걸 하는 사람들은 마귀가 한다고 그러고 마귀영이 들어갔다고 그러면서 정죄하는 그런 신학자들 그런 교회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방언에 대해서는 이 정도로만 합시다. 사도바울은 예언 은사에 대해서 14장에서도 다루고 있는데 방언 보다는 다루는 내용이 조금 적습니다. 그렇지만 바울이 말씀을 하시기를 방언 은사보다는 예언은사 받기를 사모하라 그랬습니다.
어떤 부분에서 그런 말씀을 하였냐면 예언은사는 자기 자신을 자라게 하는 은사가 아닙니다. 예언은사는 주변사람들이나 교회라는 것은 하나의 건물을 이야기한은 것이 아닙니다. 에클레시아(ecclesia)라는 것은 하나님이 자녀들이 모인을 교회라 그럽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모인 그룹들이 무리들이 덕을 받는 다는 겁니다. 그분들이 자라나게 된다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언은사는 아주 복된 은사라는 겁니다. 그런데 예언을 하는 은사가 성서에 보면 네 가지로 분류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개인예언입니다
고린도전서14장에서는 개인예언에 관하여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다음에 교회예언입니다 교회를 상대로 예언을 하는 그런 예언이 고린도전서14장에 다루어 졌는데 성경전체를 보면 예언이 특히 구약의 선지자들이 하는 예언들은 사회를 향해서 예언을 하고 국가를 향해서 예언을 하고 또는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의 하나님나라와 또 저쪽으로 가는 것도 하나님의 나라지만 하나님나라에 대해서 예언을 하신 게 구약의 선지자(prophet)들이 프로(pro)라는 것은 미리라는 소리입니다
벳(phet)는 말한다는 소리입니다 미리 알고서 말해준다는 뜻입니다
바울이 예언하는 것을 방언보다 더 중요시하게 생각하면서 왜 예언을 사모하라 했는지 그 이유를 3절에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14장3절이 굉장히 중요한절입니다 뭐냐면 예언의 목적이 있다는 겁니다. 교회와 교인들을 유익하게 하는 일인데 뭐냐면 첫째는 교회가 덕을 세움을 받는 다는 겁니다.
자라나게 한다는 겁니다. 개인이나 교회가 예언을 통해서 성장하는 겁니다.
거기에다가 권면이라 그랬는데 권면은 격려입니다 그다음에 안위 위로를 받게 된다는 겁니다. 이 세 가지 교회가 자라나게 된다는 것과 또한 개인이 자라난다는 그게 무슨 뜻입니까? 어떻게 자라난다는 겁니까? 어떻게 자라나느냐면 예언을 통해서 이분이 항상 우리가 강조하는 겁니다.
창조목적이 무엇인지를 알게 해주는 겁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 영광 드리는 겁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는 항상 우리가 이야기하는 창조주의정체성을 알게 해주는 겁니다. 창조주가 어떤 하나님이다 세 번째는 피조물의 정체성입니다 피조물은 어떤 정체성을 가지고 있느냐를 이것을 깨닫게 해주기 위해서 예언을 하게 하는 겁니다. 그게 덕을 끼친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걸 아는 사람들은 뭘 해야 하느냐면 지상계명과 지상사명에 순종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언의 목적은 이 네 가지입니다. 이것을 깨닫게 하고 그다음에 네 번째의 계명과 사명에 순종케 하기 위해서 예언을 하는 겁니다.
그것을 덕을 끼치게 한다고 말했습니다. 예언의 목적을 다시 한 번 재확인해보면 개인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덕을 끼치게 하고 권면해주기도 하고 위로를 받게 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덕과 권면과 위로입니다
그런데 덕을 끼친다는 말을 뭐라고 그랬습니까? 에디파이를 영어로 빌딩 업(building up)건물을 짓는 겁니다. 건물을 세우는 겁니다. 자라나게 하는 겁니다. 이렇게 자라나게 하는데 자라나게 하는 방법을 어떻게 하느냐면 권면을 먼저 하는 겁니다. 권면이라는 말을 격려로 바꾸셔야 합니다.
왜냐면 원어로 파라클레시스(paraklesis)파라(para)라는 말은 옆에 곁에 있으면서 클레시스(klesis)라는 말은 옆에서 힘을 실어준다는 소리입니다.
그래서 권면이라는 말은 격려하는데 옆에서 예언을 통해서 그분을 이웃에게 힘을 실어주는 겁니다. 그것이 예언의 목적이라는 겁니다. 그 사람을 살려주는 겁니다. 격려에 네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첫째 칭찬을 해주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언은 칭찬이 들어가야 합니다. 사도바울의 편지를 보면 칭찬이 먼저 들어갑니다. 우리인간관계에서도 항상 칭찬을 해주는 겁니다.
사람이 칭찬을 받으면 어떻게 됩니까? 엔돌핀(endorphin)이 살아나가지고 잠재력이 개발되는 겁니다. 그래서 격려의 첫째는 칭찬입니다
우리 모두에게도 건강해 보인다. 해피해 보인다. 이 말을 항상 입에 달고 다녀야 됩니다. 부정적인 이야기는 될 수 있으면 하지 말아야 합니다.
부정적인 사람들이 많지만 될 수 있으면 하지 말고 우리 AMI식구들이여 제가 여러분들에게 될 수 있으면 부정적인 이야기를 안 하려고 노력하는걸 아십니까? 예언적인 말은 해주지만 그 예언 속에 사람이 살아가는 게들어 있잖아요. 그러니까 우리가 될 수 있으면 가족들에게도 될 수 있으면 부정적인 이야기를 하지 마세요. 격려의 네 가지 중에 첫째가 칭찬 두 번째가 위로라 그랬습니다. 좌절하는 사람이 많거든요 위로를 해주면 살아납니다.
괜찮아, 괜찮아 위로해주면 세 번째는 뭐냐면 그래도 잘 안 듣는 사람은 도전을 해준다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바울도 이분의 편지 속에 뭐냐면 내가 권하노니, 권하노니 하는 말들이 있습니다. 권한다는 말이 조금 팔꿈치로 치는 수준으로 야! 조금 해봐라 그냥 칭찬만 해도 안 듣는 사람은 팔꿈치로 한번 쳐야 됩니다. 가끔 제가 그렇게 합니다. 그렇지만 사랑을 해서 하는 겁니다.
그래도 안 듣는 사람은 도전 대결을 하라고 그랬습니다. 바울도 데살로니가전서5장14절에 보면 데살로니가교회에 이렇게 대결을 했습니다.
그렇지만 미워서가 아니고 사랑 안에서 이 모든 네 가지가 격려라는 겁니다.
격려를 받으면 사람이 어떻게 되느냐면 위로를 받는 겁니다. 그래서 덕을 끼치는데 먼저 격려해주면 그다음에 위로를 받습니다. 그것을 파라무디아(paramuqi,a)라 그럽니다. 뭐냐면 옆에 서서 이 사람이 편안하게 새 힘을 받게 되고 새 비전을 가지고 새 소망을 가지고 이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 사람이 그러면서 이분이 어떻게 되느냐면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재확인 받고 자기 자신이 하나님이 누군가를 알게 되고 또 지상계명과 사명을 재확인하게 되고 이렇게 만들어주는 겁니다. 예언을 통해서 그러면 살아나는 겁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주시는 예언은 두려움이 없어집니다. 두려움이 용기를 주고 불안이 없습니다. 불안이 안정 평강을 주고 혼돈이 없습니다. 두려움이 용기를 주고 불안한 것이 안정하게 되고 혼돈이 정돈이 되고 미움이 용서 자비 사랑으로 변하고 하나님이 주신 예언은 그렇게 변합니다.
좌절된 사람이 새 힘을 받고 새 소망을 가지게 되고 분리된 그런 사람이 하나 되는 일을 하게 되고 분쟁을 좋아하는 사람이 화평의 사도가 되고 이렇게 됩니다. 개인적인 교회적인 예언을 하면 이 예언이 이렇게 사람을 변화시키는 겁니다. 이런 예언이 아니고 다른 예언이 들어오면 이걸 받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 개인예언과 교회예언 그다음에 사회국가예언과 하나님나라의 조금 더 큰 예언을 보면 구약의 선지자들이 하신 예언들을 보면 그 예언의 첫째 초점이 뭐냐면 이스라엘나라가 하나님의 자녀들이 뭘 못한다는 겁니까? 하나님의 창조목적에 위배한다는 겁니다.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지 않고 우상을 숭배한다는 겁니다. 그기에 대한 꾸짖음이 예언입니다.
그기에 대한 비난입니다 구약에 예언서가 17권이 있잖아요. 그 중에 예언서를 다 들여다보면 그중에60-70%가 무슨 내용이냐면 전부 이 내용입니다
너희들 왜 우상을 섬기느냐 창조목적이 무엇인지 아느냐 그러면서 꾸짖는 이야기입니다 그것 하나만 보면 예언자들은 막 꾸짖는 사람들이구나.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17개의 예언서 내용을 잘 들여다보면 꾸짖어 면서 하시는 말씀이 내가 자비를 너희들에게 베푼다. 내가 너희들 용서해줄게 너희들이 회개하면 이런 하나님의 사랑이 그 안에 숨겨져 있습니다.
똑같이 개인 예언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언을 하지만 우리를 어떻게 합니까?
자라나게 하고 우리에게 격려해주고 위로해주는 겁니다. 국가적인 예언도 똑같습니다. 그러니까 예언은 남을 비난해서 끝나는 게 아닙니다.
방향도 제시합니다. 창조목적을 회복하라 그래서 회복하면 너희들 사랑한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국가적인 사회적인 예언입니다 그래놓고는 방향제시까지 다 주고 나중에는 그렇게 인도까지 하십니다. 그것이 주님이 주시는 예언입니다 개인이나 교회예언의 특징을 좀 봅시다. 분명히 3절에는 사람에게 한다고 그랬습니다. 22절에는 믿는 사람들에게 한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안 믿는 사람들에게 하는 게 아닙니다. 예언은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예언을 하는 겁니다. 왜 그렀습니까? 예언의 목적이 영적으로 더 자라나게 하기 위해서 어떻게 자라납니까? 창조의 목적을 깨닫고 하나님의정체성과 피조물의정체성과 지상계명과 사명에 순종하라고 예언을 해주는 겁니다.
그러니까 살아나도록 이걸 할 때 살아나는 겁니다. 그냥 살아나는 것이 아닙니다. 구체적으로 방향제시가 있습니다. 그런데 예언을 할 때 여러 사람이 예언을 할 때는 꼭 아까 방언처럼 서로가 통제를 해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고린도교회에서도 예언이 여기서 나오고 저기서 나오고 할 때 순서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32절에 예언하는 자들은 그분들의 영은 다른 사람이 예언하는 사람의 영에 지배를 받는다고 그랬습니다. 서로서로 보고 한 사람이 예언이 시작되면 조용히 있다가 순서대로 하라는 겁니다. 막 일어나서 무질서하게 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다음에 굉장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29절에 그랬습니다.
이 예언은 꼭 점검을 필요로 한다는 겁니다. 데살로니가전서5장20절에도 그랬습니다. 고린도전서14장29절에도 그랬습니다. 점검해가지고 이것이 교회에 덕이 되지 않으면 과감하게 버려 라는 겁니다. 예언을 해석을 할 때 사사로이 자기 스스로 해석을 하는 자기마음으로 해석하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베드로후서1장20절21절에 그랬습니다. 사도행전21장12절부터 보면 예언은 제대로 받았는데 해석을 잘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도행전21장 스토리가 이런 스토리입니다 바울이 3차 여행을 끝내고 돌아와 가지고 어디에 있었냐면 가이사랴에 도착했습니다. 가이사랴는 우리나라 같으면 인천입니다 해변 가 도시입니다 예루살렘이 대구정도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이미 주님께서는 너 3차 여행 끝나면 예루살렘에 가면 너는 묶임을 당해서 로마 군인들이 너를 로마로 데리고 갈 것이라는 것을 바울은 아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가이사랴 그기에 일곱 집사 중에 한분인 빌립집사라는 분의 집이 그기에 있었습니다. 이분의 딸이 넷이 있는데 그 딸 넷이 다 여자예언자들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예루살렘에서 아가보라는 유명한 예언자가 바울을 방문 왔습니다. 아가보가 하시는 말씀이 내가 환상을 봤는데 바울아 당신 예루살렘에 가면 당신 어려움을 당한다는 내용을 이야기해주면서 아가보가 예언을 해주는 겁니다. 그러니까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바울의 제자들과 그 옆에 있는 사람들이 이런 말을 하는 겁니다. 선생님 그런 일을 당하는데 예루살렘으로 가지 마십시오. 그러는 겁니다. 바울이 듣고 있다가 그 예언의 말씀에 응하지 않고 나는 너희들 말 안 듣고 간다. 이렇게 하면서 그분이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된 겁니까? 바울이 그 예언을 무시해버린 겁니다. 왜냐면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서 아가보 말씀대로 핍박받는 것은 그대로 정확하게 봤습니다. 그런데 그 주변사람들이 해석을 잘 못하는 겁니다. 제가 다시 말씀드립니다. 예언은 어떻게 해석을 해야 됩니까?
이분들이 어떻게 해석해야지만 됩니까? 그 비전을 아가보에게 왜 주었습니까? 그것부터 우리가 알 필요가 있는 겁니다. 왜 주었을까요 아가보가 올라가서 바울에게 격려해주고 안위를 주라고 그래서 이 예언을 보여주었는데 이 환상을 보여 주었는데 격려와 안위를 주지 않고 덕을 끼치게 하지 않고 힘을 받지 않게 하고 오히려 겁을 주는 겁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말해야 됩니까? 아가보가 바울선생! 내가 이런 환상을 봤는데 겁내지마! 당신 여기서 끝내는 것이 아니야 이걸 통해서 당신 로마까지 가가지고 유럽이 복음화가 될 거야 힘내! 그러면 할렐루야 아멘. 이렇게 되는 겁니다.
왜냐면 예언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덕을 끼치고 격려해주고 위로받게 해주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언을 잘 못 해석할 수 있는 겁니다. 잘못 해석하여 그것이 딴 데로 갈 수 있는데 어떻게 해석하느냐면 가이드라인이 어디 있습니까? 고린도전서14장3절입니다. 그러니까 잘못된 해석은 버릴 수 있습니다.
공중예언은 어떻게 하느냐면 한 사람이 예언할 시 그것을 점검해야 합니다.
저 사람의 예언이 맞는지 안 맞는지 점검을 해야 합니다. 점검의 가이드라인이 고린도전서14장3절인 겁니다. 그것이 이렇게 하느냐 안 하느냐 입니다.
두 세 사람이 예언할 시 질서에 맞추어서 한 사람씩,한 사람씩 예언해야 된다는 겁니다. 예언하는 자들의 영이 다른 예언하는 자들의 영의 제재를 받는다고 그랬습니다. 그다음에 적당하게 하라 질서 있게 하라 왜냐면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에 이것은 예수님이 주시는 명령이다 그랬습니다. 그다음에 재미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성서에 보면 예언을 받는 방법이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히브리서11장1절에 보면 분명히 구약의 선지자들이 여러 방법으로 예언을 받았다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예언은 한 방법이 아니고 여러 방법으로 예언을 받았다 그랬습니다. 첫째 방법이 뭐냐면 실제로 성령님의 음성이 들려오는 겁니다. 사무엘상3장3절에서9절 이야기를 제가 여러분들에게 간단하게 하면 사무엘과 엘리 이야긴데 사무엘이 조그만 어린아이였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나타났습니다. 사무엘아, 사무엘아 그러면서 부르는데 사무엘이 어디서 들려오는지 모르고 지나쳐버렸습니다.
세 번째 들려올 때 엘리에게 간 겁니다. 엘리도 그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음성이 이렇게 들려오는 식으로 올 수도 있다는 겁니다.
또 성경에 보면 열왕기상19장9절에서18절에 보면 엘리야에게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엘리야가 호렙 산에 있을 때 호렙 산은 모세가 십계명을 받은 시내 산을 호렙 산이라고 그럽니다. 엘리야가 그기에 있는데 엘리야에게 목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그러면서 엘리야에게 하시는 말씀이 너 다메섹에 가가지고 하사엘을 기름 부어서 아람 왕이 되게 하고 예후에게 기름 부어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고 엘리사에게 기름 부어서 너 후계자가 되게 하라
그러면서 이 땅에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는 7천명이 남아 있는데 그 사람들이 너의 중보자가 될 거라고 소리로서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방법이 있고
두 번째 방법은 마음의 음성으로 성령님이 나에게 말씀하시는 겁니다.
마음의 음성으로 사무엘하7장에 주욱 보면 특히3절에 보면 이미 주님이 다윗 왕에게 다윗의 마음속에 성전을 지어야 되겠다는 그 마음을 이미 가지고 있었다고 그랬습니다. 마음에 이미 메시지를 주었습니다. 그래서 나단선지자가 가서 그러는 겁니다. 여호와께서 다윗 왕과 함께 계신데 이미 여호와께서 당신의 마음속에 이 마음을 주었는데 그 마음속에 있는 바를 이제는 행하세요. 그러는 겁니다. 우리크리스천들이 주님의 메시지를 듣는 방법 중 하나가 이 메시지가 상당히 파워풀합니다. 그러니까 항상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우리면서 듣고 있어야 됩니다. 들리는 소리가 아니고 마음의 음성이 있습니다.
사무엘이 다윗을 찾아가서 기름 부으실 때도 사무엘에게 똑같은 메시지를 주었습니다. 사무엘이 이새 집에 갔습니다. 사무엘생각에는 여호와가 가라고 해서 갔는데 사무엘은 처음에는 실수를 했습니다. 마음의 음성에 초점을 깊이 맞추지 않다 보니까 이 사람이 자기 생각으로는 이 집안에 첫아들이 아마 이스라엘의 왕으로써 기름 부음을 받지 않을까라고 마음에 생각을 했습니다. 첫 아들 엘리압보고 첫아들이고 첫 열매니까 그분에 대해서 생각을 하니까 여호와께서 그러시는 겁니다. 너 사람을 외모로 보는구나. 이렇게 하시면서 아니라고 마음속에 알려주는 겁니다. 그래서 이분이 둘째 아들도 보니까 마음속에서 둘째아들도 아니다 셋째도 아니야 넷째도 아니야 그리고는 여덟 번째를 보니까 이가 그니 일어나 기름을 부으라 하시는 겁니다.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성령님의 음성으로 이렇게 예언을 할 수 있는 겁니다.
예언의 말씀이 그렇게 나올 수도 있다는 겁니다. 세 번째는 영의 눈을 뜨게 하고는 여호와의 사자가 구약에서는 여호와의 사자가 하면 천사 보다도 예수님이 직접 나타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람의 모습으로도 나타나시기도 하시고 어떤 때는 천사의 모습으로 나타나시기도 하시고 그분이 예수님인 것은 앞뒤 문장을 보면 예수님인 겁니다. 예수님이 아브라함 때 여호와의 사자로써 사람의 모습으로 천사의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하갈에게도 나타나시고 창세기18장에 보면 아브라함에게도 사람의 모습으로 나중에 사람의 모습이 두 분은 천사였고 한분은 예수님이었다고 그랬잖아요. 이렇게 눈을 뜨게 하시고는 영안을 뜨게 하시고는 보여주시는 겁니다. 똑같이 민수기22장31절35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발람의 눈을 밝히 하셔가지고 여호와의 사자가 옆에 서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분이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서 있는 모습을 보고 엎드려 고개를 숙이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렇게 하는 분들이 있습니까?
여호와의 사자가 직접 어떤 때는 예수님이 아니고 가브리엘이 나타나는 방법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가브리엘이 눈으로 보는 겁니다. 세례요한의 아버지가 사가랴입니다. 어머니이름이 누굽니까? 엘리자벳입니다.
가브리엘이 사가랴에게 나타나가지고 사가랴의 눈이 뜨지면서 엘리자벳이 애기를 낳겠다는 겁니다. 누가복음1장8절에서13절 이야기입니다.
가브리엘이 마리아의 눈을 뜨게 하시고는 누가복음1장26절에서34절에 마리아보고 그러는 겁니다. 마리아가 영안이 떠지면서 내가 처녀지만 애기를 수태할 것이고 그 아기는 큰 자고 지극히 높으신 자의 아들이고 다윗의 위를 가진 자고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 노릇할 것이고 그 나라 무궁할 것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영안이 떠지면 처음에 무엇이었습니까?
들려오는 겁니다. 두 번째 마음의 음성으로 들려오는 겁니다.
세 번째는 영의 눈을 떠서 직접 영계의 사람을 보는 겁니다. 천사를 보거나 예수님을 직접 보는 겁니다. 이런 식으로 해서 우리가 예언을 받는 겁니다.
네 번째는 환상을 통해서 우리에게 환상으로 보여주는 겁니다. 그 환상은 이미지입니다. 사진처럼 그림처럼 환상으로 보여주는 것은 성서에 보면 상당히 많습니다. 에스겔에게 특히 많이 보여주었습니다. 에스겔서8장 전체이야기를 봐도 그렇고 에스겔서37장이야기 마른 뼈 환상을 보여 주었습니다.
에스겔서40장에서부터48장에 주욱 보면 앞으로 천년왕국 때 성전이 지어지는데 그 성전의 모습들을 자세하게 환상으로 다 보여 주었습니다.
그림으로 에스겔에게 사도바울이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난 후에 다메섹에 있는 아나니아에게 바울에 대하여 환상으로 보여 주었습니다.
그러면서 이 사람은 특별히 내가 이방을 위해서 내가 그의 어머니배속에서부터 기름 부은 귀한 아들이다 네가 특별히 사랑해주라면서 환상을 보여주는 겁니다. 베드로도 환상을 봤습니다. 동물 환상을 봤잖아요. 그걸 가지고 베드로가 고넬료 집에 가서 설교를 했잖아요. 사도바울도 환상을 봤습니다. 마케도니아환상을 봤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요한이 글 쓴 것이 다 환상을 보고 글을 쓴 겁니다. 이렇게 해서 예언을 할 수가 있습니다.
환상을 보고도 네 번째는 꿈으로 나타나는 겁니다. 가브리엘천사가 요셉에게 꿈에 나타났습니다. 요셉이 꿈을 꾸었습니다. 내 아내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가브리엘이 그러는 겁니다. 성령님이 네 아내를 잉태케 했고 그 아기이름까지도 예수로 하라 이것은 이사야서7장14절에 말씀을 이루게 함이라고 아예 꿈에 이 다섯 가지를 보여준 겁니다. 예언의 은사를 받고 싶습니까?
그러려면 다섯 가지의 이 방법을 알고 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거짓 예언자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왜냐면 방언도 그렇고 예언도 그렇고 특히 이 두 부분은 성령님의 역사에 의해서 은사로 주는 것이기 때문에 방언과 방언통역과 예언은 특히 나타나는 영향을 주는 은사들이기 때문에 성령님과 똑같이 악령도 똑같이 행사를 합니다. 그래서 혼돈을 주게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깨어있어야 합니다. 깨어 있는데 어떻게 깨어 있느냐면 내 하트가 순수해져야 합니다. 조금이라도 하트가 내 마음이 순수하지 않으면 잡놈이 들어와서 은사를 하게끔 합니다. 잡놈이 들어와서 하트가 순수하다는 말은 뭘까요 창조목적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야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내 삶이 투자되어야 되겠다는 확신이 있어야 되고 하나님에 대해서 분명히 알고 내가 누군지를 알고 그 계명에 순종하려는 마음 사명에 순종하려는 마음이 집중하고 있을 때는 잡놈이 와서 나에게 덥벼들지 않습니다. 내 영광을 찾고 나의 어떤 이익을 찾고 나의 어떤 욕심이 있을 때는 근방 잡놈이 와서 방언하게 하고 통역하게 하고 예언까지 하게 합니다. 잡놈이 끔을 보여주고 환상을 보여주고 잡놈이 마음속에서 말하게 하고 잡놈이 들어오는 겁니다. 귀신들린 사람들에게 잡놈이 덤벼드는 것 아시죠? 내가 무슨 음성을 들었습니다. 어쩌고저쩌고 이런 사람들 엄청나게 많습니다. 제 주변에도 있습니다. 가이드라인이 어디 있습니까?
그냥 막연하게 깨끗한 게 아닙니다. 첫째 창조목적입니다 왜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셨느냐 그다음에 하나님이 누구신가? 하나님의정체성에 우리가 철저하게 알고 있어야 됩니다. 이분은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시고 사랑과 자비와 구원주시고 이분에 대한 모든 것을 우리가 묵상하셔야 됩니다.
내가 누군가? 나는 전적으로 타락된 존재다 나는 스스로가 의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고백하고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항상 고백하시고 내가 누구라는 것을 그다음에 이분이 우리에게 주시는 가장 크고 첫째 되시는 계명 수직계명에 내가 철저하게 초점을 맞추고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는 수평계명입니다 그다음에 이방까지 가는 수평계명입니다 여기에 초점을 맞추고 이걸 묵상하는 겁니다. 이걸 묵상할 때 잡놈들이 덤벼들지 않는 겁니다.
이걸 묵상하지 않고 할렐루야 아멘 성경공부 아무리 해야 하나님말씀을 많이 알아도 이걸 묵상 하지 않으면 교만해져가지고 잡놈들이 덤벼듭니다.
예언도 다른 예언을 하게 되고 방언도 방언통역도 딴 짓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많기 때문에 교회가 시끄러워지는 겁니다.
그러니까 저 사명은 여러분들에게 이 네 가지부분을 철저하게 주지시키고 순종하게 하는 것이 제 사명입니다 그래야 여러분들에게 잡놈들이 덤벼들지 않는다는 겁니다. 거짓예언의 특색을 조금 봅시다. 마지막부분인데 개인과 교회에 덕을 세우지 못하는 겁니다. 격려가 없고 안위가 없는 겁니다.
사랑과 연민의 마음이 없이 꾸짖는 겁니다. 비난하는 겁니다. 비난에 분명한 방향제시가 없는 겁니다. 이 네 가지를 이야기하지 않는 겁니다.
그 예언을 듣고 나면 혼돈이 오고 두려움이 오고 불안하고 미움이 있고 좌절이 있고 분리와 분쟁의 씨앗으로 만들어지는 겁니다. 이 예언을 듣고는 어딘가 이상한 겁니다. 그런데 이 예언은 맞지가 않는 겁니다. 맞지 않으니까 수정하는 겁니다. 그때 내가 이렇게 했는데 수정하는 그러한 예언들은 다 거짓예언들인 겁니다. 구약에서 보면 거짓선지자들의 특색들이 있습니다.
거짓말 하는 영에 사로잡힌 예언들을 합니다. 거짓우상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는 겁니다. 여호와의 이름으로 거짓예언을 하는 그러한 일들이 많았습니다. 신약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마태복음7장 산상수훈에서 그랬잖아요.
많은 거짓 예언자들이 선지자들이 나올 터인데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할 수 있는 겁니다. 그리고 악령의 이름을 귀신을 악령을 쫓아낼 수 있습니다. 센 놈이 약한 놈을 쫓아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무당들을 보세요.
그놈이 강한 귀신을 불려가지고 약한 귀신을 쫓아내는 겁니다.
하나님의 종이지만 마태복음7장15절에 그랬잖아요. 속은 이리의 마음을 가지고 있고 겉으로는 양의 옷을 입은 자들 그런 사람들이 이런 짓을 한다는 겁니다. 더러운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예수의 이름으로 기적도 일으키고 가르치기도 하고 설교도 하고 예언도하고 하는데 알고 보니까 예수님의 이름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이미 그런 사람이 많을 것을 예언하셨잖아요.
마태복음7장에서 예수님이 예언하셨거든요. 그런 사람이 과거2천년 동안에 엄청나게 많았던 겁니다. 앞으로도 더 많을 것이고 특히 마지막 때가 되면 더 많을 겁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은 자기 마음대로 예언을 하는 겁니다. 에스겔서13장12절부터 주욱 보면 자기 마음대로 성령님의 이끄심이 아니고 자기마음대로 예언하는 겁니다. 그리고 예언하는 사람들을 우매한 사람들이라 그러고 황무지에 있는 여우들이라 그러는 겁니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예언을 어떻게 점검해야 되느냐 입니다. 어떤 게 진짜냐 어떤 게 가짜냐를 점검하는 방법을 사도바울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5장19절에서22절입니다. 19절부터 가이드라인입니다
뭐냐면 누가 나 예언합니다. 해서 예언을 했습니다. 그럴 때 제일 먼저 어떻게 하느냐면 예언을 받았으면 그냥 인정을 하라는 겁니다. 첫째 그래서 성령을 소멸하지 말라는 겁니다. 무조건 난 그런 것 안 받아 이러지 마시고 어떤 분이 예언을 나에게 하면 일단락 하나님이 하신 걸로 생각하고 진짜 예언으로 생각하시고 그냥 받으시라는 겁니다. 그래서 성령을 소멸치 말고 소멸한다는 말은 스베누미라는 헬라 말인데 불 끈다는 소리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의 예언이 오면 불을 끄지 말라는 겁니다. 그대로 그냥 놓아두라는 겁니다.
소멸치 말고 그게 첫째조건입니다 그다음에 20절에 보면 예언을 멸시치 말라 그랬습니다. 다시 말하면 무시하지 말라는 겁니다. 예언이 올 때 그런데 20절에 범사에 헤아려라 그랬습니다. 범사라는 것은 모든 예언은 다 헤아려라 그러는 겁니다. 그냥 받지 말고 헤아려 라는 말은 도끼마시아는 무슨 뜻이냐면 테스트하라는 소리입니다 입증하라는 소리입니다 시험해봐라 이게 제대로 왔는지 안 왔는지 입증해보라는 소리입니다 이게 굉장히 중요합니다.
왜냐면 두 군데서 올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이게 어디서 왔는지 찾아내라는 소리입니다 그래서 입증하는 헤아리는 방법을 제가 적어 놓았습니다.
일곱 가지입니다 첫째 이 사람이 하는 예언은 고린도전서13장4절에서7절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무례히 행치 않고 친절하고 교만하지 않고 자랑하지 않고 이 사람이 예언하는데 이 사람이 하는 스타일이나 이 사람의 인격을 보면 이것이 없습니다. 그러면 이런 사람 예언은 나는 안 들어 그럽니다.
왜냐면 오래 참고부터 주욱 나가는 이렇게 하지 않고 너희들이 무엇을 알았다고 무슨 비밀을 알고 예언하는 이런 것은 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인격이 예수님의 인격을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가 굉장히 중요한 겁니다. 우리 목사님들이 특히 설교하는 것도 이게 하나의 예언의 한 차원입니다 설교하는 목사가 인격이 예수 화되지 않으면 그 속에서 나오는 목소리가 말이 딴 말이 나올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저도 내 자신을 매일매일 점검해야 됩니다. 두 번째 이 예언이 교회 안에서 몸을 고르게 하는가? 12장24절에 몸 고르게 한다고 그랬습니다. 교회에 화평을 주면서 몸을 고르게 하는 예언인가? 이걸 체킹하는 겁니다. 그다음에 14장3절에 이 예언의 말씀이 듣는 사람에게 덕을 끼치는가? 이분이 힘을 받는가? 격려를 받는가? 위로를 받는가? 이것을 점검해야 되는 겁니다. 그다음에 분명한 방향제시가 있는가? 이 예언을 통해서 내가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다 깨닫게 되고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결과가 오느냐 아니면 내 어떤 욕심에 내 비전에 내 꿈을 이루는데 이 예언이 사용 받으면 아! 이게 잘못되었구나. 그러니까 개인 예언을 해주면서 당신 이렇게 하면 당신 돈 벌겠다 이렇게 하면 당신 출세할거다 어떻게 하면 당신 잘될 거다. 이런 예언은 점쟁이들이 하는 예언입니다 그기에 속임을 당하면 안 됩니다. 이 예언이 정확한가? 언젠가는 또 수정할 가능성이 있는가? 그다음에 과연 내가 이 예언을 들었는데 내 속에 평화가 없고 혼돈이 있고 두려움이 있고 불안하고 미움이 있고 좌절이 있고 분리가 있고 분쟁이 되고 하면 아하! 이것은 딴 놈이 준 예언이구나.
이렇게 헤아리라는 겁니다. 헤아린 다음에 21절에 뭐라 했습니까?
좋은 것은 취해라 22절에 그랬습니다. 모든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 그랬습니다. 딴 놈에게서 온 것들은 다 멀리하라 그랬습니다.
압에코마이 이 말은 무슨 말이냐면 버려버리라는 소리입니다 아주 단호하게 버려버리라는 겁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만약에 이게 진짜 하나님의 말씀인데 내가 버려버리면 버리고 듣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진짜 하나님의 말씀이면 하나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에 언젠가 또 누구를 통해서든지 나에게 다시 알려 주십니다 겁내지 마세요. 그런데도 또 깨닫지도 못하면 또 알려주십니다.
왜 버리지 않으면 안 될까요? 버리지 않으면 이 잡놈이 나에게 큰 피해를 줍니다. 왜냐면 이 잡놈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나를 혼돈스럽게 하고 불안하게 만들고 왜냐면 이놈의 이름이 파괴자입니다 분리자입니다 거짓말하는 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를 속여가지고 교회를 속여가지고 교회를 혼돈스럽게 하고 불안하게 하고 미움을 야기 시키고 이렇게 되게 되어 있는 겁니다.
마지막 때 특히 가짜 방언하는 사람들 가짜 예언하는 사람들이 속출할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도 그렇고 여러분들도 그렇고 가짜 방언과 가짜 예언에 빠질 확률이 상당히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무엇을 가지고 있어야 됩니까? 영적분별력을 가지고 있어야 되는 겁니다.
이 영적 분별력 외에 지혜를 가져야 되는 겁니다. 지식을 가져야 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말씀을 배우는 것은 무엇입니까?
지식을 우리가 지금 쌓는 겁니다. 그래서 지혜를 쌓는 겁니다. 그게 영적 분별력을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겁니다. 이렇게 하려면 내 하트가 순수해져야 하는데 하트가 순수해져야 하는 방법 중에 하나가 우리가 팔복의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런 사람이 되면 우리가 창조의 목적을 알게 되고 하나님의정체성을 깨닫게 되고 피조물의 정체성을 깨닫게 되고 수직계명과 수평계명에 순종할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이런 사람에게 주님이 주시는 방언과 방언통역과 예언의 은사는 기가 막힌 은사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런 은사를 받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기도리겠습니다.
고린도교회를 살리는 특별히 일곱 가지 은사를 제시해 주셨는데 그중에 세 가지 은사는 특별히 중요한 은사인데 우리 고린도교회부터 시작하여 2천년 교회역사 속에서 이 세 가지은사를 잘못 남용한 결과들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왜냐면 악한 세력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 세 은사들을 잘못 사용함으로 해서 하나님과 대적하려고 하는 그러한 마음들을 가지고 있기에 우리가 이 공격에 빠져왔던 것이 사실입니다 하나님아버지 성령님이시여 예수님이시여 마지막 때 이런 일들이 더 있겠다고 말씀하셨는데 우리가 우리마음을 주님의 마음으로 만들 때는 이런 모든 더러운 세력들이 우리를 공격할 수 없음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깨끗하게 만들어 주셔서 이런 공격에 대비할 수 있도록 우리AMI공동체의 형제자매들을 보호시키시고 또 이런 은사들로 복을 내려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황용현 목사님 설교내용영상으로 보세요.
https://www.youtube.com/watch?v=gUUYi6RHF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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