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강해

20강. 요한복음12장1절-50절, 향유 부음, 승리 입성, 한 알의 밀

변명섭 2021. 9. 2. 19:55

요한복음강해 20강. 향유부음, 승리입성,  한 알의 밀(요12:1-50)  2010년8월22일 말씀
오늘은 요한복음강해 스무 번째입니다. 요한복음12장 말씀 전체를 보려고 그럽니다. 제가 설교가 아니고 말씀강해기 때문에 이렇게 한 장을 통째로 놓고 가르치는 것이 더 효과적일 것 같아서 이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까 내용이 조금 많기 때문에 그것을 잘 정리를 해드리지 않으면 혼돈스럽기 때문에 시간이 약간 걸릴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여러분들이 잘 따라주셔서 주님께 감사드리고 제가 본문말씀 12장에서 세절만 읽겠습니다. 
요명한 12장24절에서26절까지 읽겠습니다. 24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25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26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 아멘.
요한복음12장은 본격적으로 고난주일에 접어드는 장입니다 지금까지 1장에서부터11장까지는 3년 공생애기간 동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담겨있는데 12장부터가 본격적으로 고난주일이야기가 시작이 됩니다. 그런데 고난주일 바로 직전 날부터 시작됩니다. 그래서 성서에 보면 1절에 유월절 엿새 전 하면 계산을 해보면 유월절 엿새 전이 몇 월 며칠입니까? 1월9일입니다
그러면 그게 무슨 요일입니까? 토요일입니다 그러니까 그다음 날이 무슨 날입니까? 종려주일입니다 1월10일입니다 1월10일은 무슨 날입니까? 
이 날에 시장에 가서 양을 사서 보관하는 날입니다 그러니까 그 전날입니다
이 전날부터 시작해서 12장은 1월10일 되는 날 이야기도 12장에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는 그 훗날 이야기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우선 요한복음12장 구조부터 우리가 한번 보면 좋겠습니다.
요한복음12장의 구조는 큰 구조로는 네 부분이 있습니다. 우선 첫째가 12장1절에서11절까지입니다 예수님이 베다니에서 향유를 부음 받으시는 장면입니다 이 안에 네 개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이 안에 첫째는 어떻게 구분되느냐면 마르다 마리아 나사로 이 세분이 예수님을 디너에 초청하는 장면입니다 자기 집으로 1절과2절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마리아가 값비싼 향유를 예수님 발에 붓는 장면입니다. 3절과4절에서 그리고는 세 번째로 가룟 유다가 반대하는 장면입니다 4절에서6절에 네 번째는 예수님이 마리아를 칭찬하는 장면입니다 그것이 7절에서10절입니다. 이렇게 해서 한 단원이 끝납니다.
두 번째 단원은 예수님의 종려주일 승리의 입성입니다 이게 1월10일 날입니다 12절에서19절입니다. 마태복음은 아주 자세하게 했는데 요한복음은 이주 짧게 했습니다. 여기에도 세 단원이 있습니다. 작은 단원으로 첫째 승리의 입성입니다 12절에서15절에 두 번째는 16절에 제자들이 예수님이 왜 나귀새끼를 따고 가는지 이해를 못했다는 겁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17절에서19절에 그 후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랐다 그랬습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 단원에서 20절에서36절인데 예수님이 자신의 죽음을 예언하는 겁니다. 20절에서36절에 거기에 네 소단원이 있습니다. 
첫째가 20절에서22절에 일부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경배하는 겁니다. 
두 번째로 한 알의 밀알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을 예언하는 겁니다. 23절에서26절에 오늘 제가 읽은 말씀입니다 세 번째가 뭐냐면 예수님이 성부께 기도하시는 장면입니다 27절에서29절에 네 번째는 예수님이 자신의 죽음이 만민을 구원하게 할 것을 예언하십니다. 30절에서36절에 그리고 네 번째 큰 단원이 예수님께서 유대인이 두 종류의 유대인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두 종류의 유대인 37절에서50절입니다. 그중에 조그만 NO1이 눈감긴 다수의 유대인이 있다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영의 눈이 감긴 다수의 유대인 NO2는 눈을 뜬 소수의 유대인이 있다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러면 첫 단원인 예수님이 베다니에서 향유를 받으시는 장면을 제가 먼저 설명을 해드리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토요일에 누구네 집에 들어갔습니까?
나사로 마리아 마르다 집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들어가서 있는데 왜 들어갔느냐면 예수님이 이분들에게 초청을 받았습니다. 그 이유는 11장에서 나사로가 살아났잖아요. 여기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예수님을 특별히 디너에 초청을 하신 겁니다. 그럴 때 마르다는 열심히 음식을 준비했고 나사로는 예수님 옆에 그냥 앉아 계셨습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갑자기 지극히 비싼 향유를 부르기를 순전한 나드라 그랬습니다. 순전한 나드를 한 근이라고 한국말로 표현 했는데 가져다가 예수님의 발에 붓는 겁니다. 
그리고는 자기 머리털로 그 발을 씻는 겁니다. 나드 한 근을 다 부은 게 아닙니다. 일부만 약간 부은 겁니다. 그리고는 그 향내가 온 집에 가득 했더라 그랬습니다. 순전한 나드라는 것은 특별히 이 지역에서 나는 향이 아니고 히말라야나 인도 북부지방에서 나는 특별한 향나무 뿌리에서 나오는 겁니다.
문헌을 보면 굉장히 비싼 겁니다. 그러니까 나사로의 집이 가난한 집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나사로의 부모님이 상당한 재력을 가졌던 분 같습니다.
그런데 아버지 어머니가 숨겨놓은 나드를 마리아가 훔쳤는지 제 생각에는 허가 없이 꺼내어서 자기 오라비의 살려줌에 감사하여 표시를 한 모양입니다 그런데 성서에 보면 나중에 가룟 유다가 그럽니다. 그 가격이 얼마냐면 300데나리온이라고 그랬습니다. 그러면 그 당시에 일반 노동자들이 일하는 하루의 품값이 1데나리온입니다 그러니까 300데나리온은 1년 치 봉급입니다
우리 웬만한 사람의 그러면 상당한 겁니다. 1년 치 봉급을 지금 한 번에 쏟아내는 장면입니다. 그러니까 가룟 유다가 뭐라고 그럽니까? 왜 그것을 그렇게 낭비하십니까? 이렇게 말하면서 뭐라고 그러느냐면 이걸 팔아가지고 불쌍한 사람들 주면 되지 않습니까? 그러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그러느냐면 6절에 저 형제가 우리 열두제자들 모임에 회계인데 돈을 이렇게 맡겨 놓으면 저 형제가 돈을 가지고 장난을 친다는 겁니다. 
그렇게 주욱 해왔다는 겁니다. 돈을 훔치고 돈을 좋아하는 형제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저 형제의 마음속에 뭐가 있느냐면 300데나리온에 팔아가지고 자기 돈궤에 집어넣으면 저놈이 자기가 그 돈을 가질 확률이 있다는 늬앙스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은 하나의 문자적인 표현이고 속에는 무슨 표현이 있습니까? 예수님이 그랬습니다. 이 자매가 예수님의 십자가사건을 미리 예견하고 예수님의 시체에 바를 것을 미리 예견하고 미리 일부분을 바쳤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랬습니다. 그것은 내 장사할 때까지 남겨두어라 그러니까 일부는 붓고 나머지는 성서에는 안 나오지만 십자가사건 속에서 예수님의 시체에다가 발랐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보면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하는 준비된 분이십니다. 
창세기3장15절에 거기에 대한 자세한 것은 제가 다음시간에 할 텐데 그렇기 때문에 이분은 이미 사탄의 한 후손으로 마귀 중에 한 마귀인데 그래도 마음속에 소위 자선사업을 한다는 명목이 있습니다. 돈이 있으면 불쌍한 사람 도와주고 하는 그런 마음이 있잖아요. 그런데 뭐가 빠져 있는 겁니까? 
예수님의 보혈이 빠진 겁니다. 예수님의 보혈이 빠지면서 자선 사업하는 분들이 가룟 유다의 스타일입니다 우리가 많은 자선 사업을 하잖아요.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지 않고 예수님의 피를 전하지 않으면서 우리가 돈을 쓰고 자선 사업하는 것은 그것은 하나님의 시각으로 볼 때 의미가 없는 가룟 유다 식 자선 사업인 겁니다. 그러면 베다니로 가셨다, 가셨다 했는데 조금 더 자세히 우리가 보려고 그럽니다. 성서에 보면 예수님이 최소한 여섯 번 베다니를 방문했습니다. 그러면 그걸 우리가 조금 더 자세히 보면 베다니사건을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메시지들이 있습니다. 
첫 번째 예수님의 베다니방문이 공생애 중간인데 누가복음7장36절에서50절에 나옵니다. 여기에 보면 베다니 바리새인 집에 갔다 그랬습니다.
이걸 우리가 정돈하지 않으면 상당히 혼돈 스럽니다. 베다니 바리새인 집에 갔다고 그랬습니다. 40절에 보면 바리새인의 이름이 누굽니까? 
시몬이라 그랬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상식적으로 베다니에 갔다 그러면 나사로 마리아 마르다 집에 가셨구나. 이렇게 생각하는데 지금은 그게 아닙니다.
처음에 베다니에 가신 것은 베다니 바리새인 시몬의집인데 그다음에 보면 그 동네에 죄를 지은 한 여자가 이 집에 예수님이 계시다는 소식을 듣고는 향유 담은 옥합을 들고 바리새인 집을 찾아간 겁니다. 그렇다면 한 죄 있는 여자가 도대체 누굴까? 그러면 상상을 한번 해보세요. 우리가 자칫 해석을 하면 옥합을 깨어서 받쳤으니까 상식적으로 누구로 생각하는 겁니까?
마리아로 생각하잖아요. 제 생각에는 마리아가 이 마리아가 아닌 것 같습니다. 도대체 한 죄 있는 여자가 누굴까? 할 때 누구겠습니까? 
요한복음을 주욱 보면 요한복음 전체에서 흘려 나오는 메시지에서 아마 8장에서 간음하다가 잡혀서 용서받은 여자 기억나세요. 이 여자일 것으로 추측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여자도 예수님께 빚을 많이 진 여자입니다 
죄와 용서를 많이 받은 여자 아닙니까? 그러니까 이 여자가 37절38절에 보면 예수님 뒤로 그 발 곁으로 가서 막 우는 겁니다. 그리고는 이 여자가 자기의 눈물을 가지고서 예수님의 발을 적시는 겁니다. 그리고는 이 여자가 자기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닦는 겁니다. 그리고는 그 말에다가 키스까지 하시는 겁니다. 그리고는 그 발에다가 향유를 붓는 겁니다. 이럴 때 마다 꼭 불평하는 사람들이 나타나는 겁니다. 불평하는 사람이 그 집주인 시몬입니다 
소위 바리새인입니다 율법주의자인 시몬이 불평하는 겁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선지자였다면 그는 이미 자신을 만진 자가 죄인임을 알았을 터인데 저 여자가 아주 바람쟁이 여자인데 죄인임을 알았을 터인데 모르는 걸 보니까 선지자가 아닌 모양입니다 이런 식으로 비아냥 그리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대답하시는 장면이 시몬아 내가 할 말이 있다는 겁니다.
이르시되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42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 43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내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 이르시되 네 판단이 옳다 하시고
44그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올 때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닦았으며 45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46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47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48이에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는 겁니다.
이 사건이 첫 번째 베다니에 방문한 사건입니다 두 번째 베다니사건도 공생애 중간 때입니다 누가복음10장38절에서42절입니다. 이 부분은 제가 지난시간에도 말씀드렸지만 제가 읽으면 여러분들이 무슨 뜻인지 아십니다.
누구네 집에 갔느냐를 상상해보세요 38그들이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마을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 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
39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40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이르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 주라 하소서 41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42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을 하는 장면이 두 번째 베다니에 방문하는 장면입니다
그러면 이 가정은 누구네 가정일까요? 마리아 마르다가정입니다
그러니까 첫 번째 집하고 같습니까? 다릅니까? 다릅니다. 그러면 세 번째로 봅시다. 세 번째는 요한복음1절에서44절입니다. 우리가 지난시간에 한 겁니다. 요한복음11장1절에서44절은 무엇입니까? 나사로가 살아나는 장면입니다
이게 공생애 마지막 때입니다 그다음에 네 번째가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다섯 번째가 뭐냐면 마태복음21장17절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요한복음에만 있습니다. 다섯 번째가 마태복음21장17절입니다. 이것은 간단하게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 하셨다가 저녁시간에 베다니로 가셨느니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추측하기로 마르다와 마리아와 나사로의 집으로 가셨다고 보는 겁니다. 그다음에 여섯 번째로 수요일 날인 1월13일 날에 마태복음26장6절에서13절입니다. 그다음에 마가복음14장3절에서9절입니다.
이 말씀을 보면 조금 내용이 다릅니다. 마태복음26장6절을 보세요. 
6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계실 때에 7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아와서 식사하시는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계실 때 그랬는데 나병환자 시몬이 누굽니까? 우리가 아까 바리새인 시몬일 가능성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나병환자 시몬이라고 그럴까요? 우리가 추측하는 겁니다. 나중에 우리가 천국에 가서 이것을 주님께 여쭈어볼 가능성이 있습니다. 왜 갑자기 바리새인 시몬이 나병환자가 되었을까요? 우리가 추측하는 겁니다. 그 사람이 별로 주님 앞에 좋은 말을 안했습니다. 뭐라고 그랬습니까? 왜 이렇게 비싼 걸 이렇게 하십니까? 하니까 그것 때문에 아마 예수님의 보혈사건을 반대했거나 비난했거나 그런 말투를 했기 때문에 그런지 모르지만 이 양반이 그 후에 나병환자가 되지 않았나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어째든 그 집에 들어가신 겁니다. 그리고 7절에 한 여자가 그러면 이 여자가 도대체 누굴까요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들어갔으니까 이 여자가 마르다나 마리아는 아닐 것 같습니다. 
분명히 이 여자가 누굴 것 같습니까? 아까 향유를 부은 그 여자일 겁니다. 
그리고 그 여자가 향유를 다 뿌리지는 않고 일부는 가지고 있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사건 후에 쓰시려고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7절에 보면 뿌리는 모습이 다릅니다. 7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아와서 식사하시는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그랬습니다.
아까는 발에 부었습니다. 8제자들이 보고 분개하여 이르되 무슨 의도로 이것을 허비하느냐 여기서 분을 내는 것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분을 내는 겁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말하는 베다니사건은 아까 그 베다니사건과 동일한 사건이 아니라는 것을 제가 말씀드리고 싶어서 그러는 겁니다. 많은 신학자들이 보면 같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꽤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다릅니다.
8제자들이 보고 분개하여 이르되 무슨 의도로 이것을 허비하느냐
9이것을 비싼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거늘
10예수께서 아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11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12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례를 위하여 함이니라 13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그러니까 이 여자가 대단한 여자임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추측하기를 간음해서 돌로 맞을뻔 한 그 여자가 이렇게까지 훌륭한 여자가 되어서 예수님께서 이 여자를 기억하라 했으니 예수님이 기억하라는 말이 어디에 또 나왔습니까? 자신의 떡과 피를 기념하라 하듯이 상당히 높인 그러한 이야기로 볼 수가 있습니다. 문제는 뭘 했느냐 어떤 죄를 지었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고 그 죄를 어떻게 내가 회개를 하고 생명의 주인이신 예수님께 내가 헌신되느냐가 더 중요한 겁니다. 
이 여자의 삶을 우리가 볼 때 그러면 두 번째 사건을 같이 봅시다.
예수님의 종려주일 입성입니다 12절에서19절까지인데 이 날은 어느 날이라고 했습니까? 1월10일입니다 4복음서에 종려주일에 관한 이야기는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4복음서에 기록된 성경구절을 드리겠습니다.
마태복음21장1절에서11절, 마가복음11장1절에서10절, 누가복음19장29절에서40절, 요한복음12장12절에서15절입니다. 그런데 이 내용들을 자세히 비교해서 보면 표현이 조금씩 다릅니다. 그래서 그 부분을 제가 설명해주려고 그럽니다. 우선 마태복음21장1절에서11절에서 우선 1절에서3절을 보면 예수님이 감람산 벳바게로 가셨다 그랬습니다. 그다음에 제자들을 몇 사람을 보냈다 그랬습니까? 제자들 두 사람을 그리고 거기 보면 나귀와 나귀새끼라 그랬습니다. 나귀와 나귀새끼 두 마리를 데리고 온 것 같이 말씀했습니다.
그리고 마태복음에는 이렇게 하는 것은 다 스가랴9장9절을 이루기 위함이라 이렇게 마태복음에서 분명히 말했습니다. 그리고는 제자들이 자기 겉옷을 나귀새끼 위에 얻었다 그랬습니다. 이게 굉장히 중요한 개념입니다
이게 뭐냐면 열왕기하9장13절에 보면 왕에만 행하는 행위입니다
왕이 나귀를 탈 때 자기네 겉옷을 벗어서 얻는 장면입니다 무리들도 똑같이 겉옷을 길에다가 펴는 겁니다. 그다음에 종려가지 나무를 베어서 길에 펴는데 마태복음에서는 종려가지라고 말 안하고 그냥 나뭇가지라 그랬습니다.
그다음에 9절에 보면 앞에서 가고 뒤에 따르는 무리들이 예수님보고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이게 굉장히 중요한 말입니다 유대인이 부를 때 주여 이름으로 오사는 이여 하는 말은 구약의 여호와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분들이 볼 때 지금 예수님이 구약의 여호와라는 겁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호산나 하는 겁니다. 
호산나라는 말은 시편118편25절에 보면 여호와여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뜻입니다 영어로는 더 로드 세이버(The Lord Savior)라는 말입니다.
이분들이 성령님의 가르침에 의해서 예수님을 그렇게 본 겁니다 
그런데 두 번째로 마가복음11장1절에서16절에는 마태보다는 덜 자세하게 쓰셨습니다. 그리고 차이가 있는 게 있습니다. 마가복음11장1절2절에 보면 감람산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다는 베다니를 거기다가 삽입을 했습니다. 
왜냐면 베다니와 벳바게는 같은 이웃동네입니다 왜냐면 베다니에 이르렀다가 그다음에 벳바게로 가셨잖아요. 그래서 그것을 지적하시기 위해서 그런 겁니다. 제자들 둘을 보냈다 하면서 아무도 타지 않는 나귀새끼를 끌고 왔다 그랬습니다. 어미를 끌고 왔지만 마가는 어미에게 초점을 맞추지 않은 겁니다. 어미가 분명히 따라 왔을 겁니다. 왜냐면 새끼를 데리고 오면 어미가 화가 나서 가만히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마태는 어미와 같이 왔다고 그랬지만 마가는 단순히 새끼를 데리고 왔다 그다음에 마가는 스가랴서9장9절 말씀을 인용하지 않았습니다. 마가는 마가복음을 쓸 때 그런 목적으로 썼습니다.
그래서 제가 초창기에 주욱 복음서를 이야기할 때 이 내용을 제가 다 말씀드렸습니다. 그다음에 누가복음을 보면 19장29절에서40절입니다.
누가복음을 보면 여기도 마찬가지로 감람산 베다니 벳바게 제자들 두 명 그다음에 아무도 타지 않는 나귀 그리고 어미를 끌고 왔다는 말은 여기도 없는 겁니다. 35절에 보면 새끼만 끌고 왔다는 겁니다. 똑같이 나머지는 마태복음과 그의 비슷합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에는 특별히 38절부터 아주 신기한 표현을 거기다가 써놓았습니다. 누가는 그런 부분에서 다른 제자들보다 예리합니다. 항상 그렇습니다. 38절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다시 말하면 여호와여 구약의 여호와 신 예수님이시여 하고 외치니까 바리새인들이 불평하는 겁니다. 당연히 그렇습니다. 너희들 어떻게 저분이 구약의 여호와나 그러면서 예수님께 그러는 겁니다. 바리새인들이 당신 제자들이 지금 헛소리하고 있는데 그렇게 못하도록 꾸중하십시오. 
그러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대답하시는 장면이 40절에 그러는 겁니다.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내가 돌을 들어서 소리 지르게 하겠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돌들도 말을 하는데 무슨 말을 하겠다는 겁니까? 
저 나귀새끼를 타고 가는 저분이 왕이고 구약의 여호와다 왜 나귀새끼를 타고 가는지 아느냐 저 사람은 창세기3장15절 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그러니까 우리크리스천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외치는 것은 이 부분입니다 저분은 하나님이시다 구약의 여호와시다 우리의 구세주시다 이런 것을 외치는 겁니다. 내가 말을 안 하면 자연이 돌, 나무, 새 시편148편에 보면 바다여 물고기여 나무여 산이여 왕이여 노예여 모든 우주의 피조물들은 이 예수님을 여호와여, 여호와여 라고 외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할 일은 예수님만 높이시는 겁니다. 
예수님만, 예수님만 그러면 내가 원하는 나의 모든 소원을 이쁘니까 다 들어주십니다. 이것 주세요. 저것 주세요.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피조물은 창조주를 높이기만 하면 고맙게 생각하고 그분에게 찬양을 드리면 그다음에 내 마음을 아십니다. 뭘 원하는지 다 아십니다. 이것을 안 하고 달라고만 하면 불교와 똑같은 겁니다. 힌두교나 똑같은 겁니다. 무속종교나 똑같은 겁니다.
그다음에 요한복음12장 오늘 본문말씀 속에 장면을 봅시다. 12장12절에서16절입니다. 12절에 그랬습니다. 그 이튿날 그러면 몇 월 며칠입니까? 
1월10일입니다 우리가 그 전까지 이야기가 1월9일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분명히 그 이튿날 주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장면이 쫘악 거기에 나옵니다.
종려나무가지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종려나무는 승리의 상징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본문 말씀 속에서 이렇게 주욱 설명하는데 왜 예수님이 나귀새끼를 탔는가? 그것을 우리가 알 필요가 있습니다. 제가 과거에도 몇 번 이야기했지만 왜 어미나귀를 타지 않고 그것도 누가 한 번도 타지 않는 나귀새끼를 타느냐면 정답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시기 때문에 그러는 겁니다. 양는 발이 네 개입니다.
예수님은 발이 두 개입니다 그러니까 이분이 어린양모습으로 변하려면 이분이 말을 타야 됩니다. 그런데 사람이 탈 수 있는 동물은 나귀입니다
양을 탈수는 없습니다. 양은 사람이 타는 동물이 아니잖아요. 그래서 나귀를 타는데 나귀새끼를 타는 겁니다. 왜냐면 한 번도 사람이 타지 않은 순수한 소위 예수님의 유월절에서 조건이 있습니다. 흠 없고 일 년 된 수컷 이것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이분이 나귀새끼를 타는 겁니다. 그래서 새끼라는 말을 영어로 콜트(colt)라 그럽니다. 어미나귀를 던키(donkey)라 그럽니다. 
그런데 던키(donkey)의 새끼들을 뭐라고 합니까? 콜트(colt)라 그럽니다.
콜트(colt)를 탔다고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콜트(colt)를 예수님을 상징하는 겁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 대목이 자신의 죽음을 예언하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이 20절부터36절입니다. 이 부분은 12장의 하나의 핵을 이루는 부분이라고 생각이 되는데 예수님이 1장부터 시작해서11장까지 주욱 기적을 많이 일으켰잖아요. 물이 포도주가 되게 하시고 5병2어사건 38년 된 환자가 낫는 사건 태어나면서부터 소경된 자가 눈을 뜨는 사건 얼마 전에 나사로가 또 소생하는 사건 이런 사건들이 예루살렘에서 그 주변에서 일어나니까 유대인들이 아니고 그 지역에 살고 있는 헬라인 몇 명이 예수님을 뵙기를 원하는 겁니다. 헬라인 몇 사람이 헬라사람들은 그런 부분에서 똑똑합니다.
그런데 이분이 직접 예수님을 만나기 힘드니까 누구에게 이야기합니까? 
빌립에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래서 빌립은 직접 예수님께 말씀을 못하고 안드레에게 하는 겁니다. 그래가지고 둘이서 예수님께 이야기하는 겁니다.
빌립과 안드레가 선생님 지금 저기에 헬라인 몇 명이 예수님 뵙기를 원합니다. 그러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들은 체 마는 체 하시는 겁니다.
왜냐면 예수님이 그분들의 마음을 아는 겁니다. 헬라인들은 무슨 생각을 하느냐면 아! 저분을 내가 사귀면 저분과 좋은 비즈니스도 있을 것 같고 우리가 계획하는 사회적인 어떠한 이익에 이용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그분들의 마음을 알았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많은 사람들 중에 그런 게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저 사람을 내가 이용해가지고 내 뜻을 이룰까 출세할까 이런 마음이 있었던 것이 이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러니까 영광을 예수님을 이용해가지고 찾으려고 그러는 겁니다.
자기네의 어떤 이익과 영광을 찾으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내가 사람에게 영광 받기를 원하지 않으신다는 겁니다. 그분들과의 사건 속에서 아마 이분들이 예수님을 칭찬을 하고 예수님에 대해서 뭘 받아 내려고 그러는지 아니면 개인적으로 칭찬하려고 그러는지 예수님이 아시고 나는 그 사람들에게 칭찬 받기 위해서 내가 지금 이렇게 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나는 성부하나님에게서 칭찬받고 영광 받기를 원한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시고는 분위기를 완전히 그쪽으로 몰고 가시는 겁니다. 
그러면서 그 유명한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한 알의 밀알 이야기를 하시는 겁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그럴 때 한 알의 밀이 귀하게 여기신다는 겁니다.
다시 말하면 존귀함을 받는다는 겁니다. 영광을 받는다는 겁니다.
이러면서 여기에 더불 의미가 거기에 숨겨져 있는 겁니다. 본인이 한 알의 밀알이 될 것을 말씀하시고 그분을 통해서 수많은 지금 현재 23억의 크리스천들이 나타난 겁니다. 다 하나님의 자녀는 아니지만 한 분의 한 알의 밀알이 그렇게 되어가지고 또 이분은 이런 생각을 하시는 겁니다. 
옥합을 깨뜨리는 그 여자 생각나느냐 그분들이 한 알의 밀알이 되었다는 겁니다. 이것을 또 염두에 두시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또 이분은 마음속에 제자들 보고 너희들도 앞으로 이렇게 될 것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면 삼위하나님이 영광을 받게 되고 그다음에 너희들도 영광을 받게 된다는 겁니다. 다시 말하면 존귀히 여기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늘나라에 올라가면 계급사회라고 그랬잖아요. 내가 희생을 할 때 이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것도 그냥 막연한 희생이 아니고 살리는 일 사람을 살리는 일 예수를 통해서 살아나게 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은 다 이렇게 영광 받게 된다는 겁니다. 예수님과 관계없이 희생하는 사람들도 상당히 많잖아요. 
그런 사람들은 기억함이 없지만 예수님과 관계해서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는 사람은 영광 받는 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비전 스쿨을 해도 마찬가지고 비전 캠프를 해도 마찬가지고 이 목적을 가지고 할 때 나는 썩어지고 나는 숨어버리고 주님 제가 부엌에서 일해도 강의실에서 일해도 주차장에서 일해도 무엇을 해도 주님 저의 이것 때문에 살아나는 일들이 일어나게 해주세요. 그런 마음으로 할 때는 불평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감사한 것 밖에 없는 겁니다. 주님 저를 사용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이 캠프를 통해서 주님 살아나는 일을 예수님이 누구 신 것을 더 분명히 깨닫고 저분들이 많은 열매를 맺는 일을 하도록 뒤에서 우리가 중보해주며 그 일을 할 때 그런 마인드를 가진 사람을 주님이 가만히 두지 않겠다는 겁니다. 귀하게 여기겠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을 하시면서 우리에게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하나가 있습니다. 그 부분이 어디에 있는지 아십니까? 12장27절을 보세요.
이 부분이 우리가 이해가 안 되는 부분입니다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이제 아버지께 기도하는 장면입니다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때를 면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다시 말하면 나 십자가 안지겠습니다. 이 말을 그대로 우리가 직역을 하면 그렇지만 이분이 기도하시면서 그러는 겁니다.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때 왔나이다. 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이분도 지금 오락가락하시는 겁니다. 이분의 이런 모습을 왜 우리에게 보여 주십니까? 이분이 신성을 포기하셨기 때문에 그러는 겁니다. 선성을 포기했다는 것은 그냥 지식으로 받아주지 마시고 저는 이 부분을 항상 묵상합니다.
신성을 포기하셨다 그러면 저는 거꾸로 이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만유를 다 만드시고 컨트롤하시고 지배하시고 우리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그 파워풀한 예수님이 그러면서 수준을 조금 낮추어서 지금 이 순간도 내 사랑하는 세 자녀의 목숨을 거두어 가시려면 그냥 거두어가시고 내 목숨 가지고 가시려면 당장 가져가시는 파워풀한 예수님을 이렇게 저는 항상 생각하시는 겁니다. 내 피붙이에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내 사랑하는 가족들 우리AMI가족들 데리고 가시려면 하루아침에 데리고 가시는데 이 순간에 데리고 가시는 그런 파워풀한 예수님이 아주 초라한 모습으로 신선을 포기하시는 겁니다. 이 엄청난 포기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것을 묵상하셔야 됩니다. 이것이 우리기독교인으로써 엄청난 묵상입니다
이 묵상을 하는 사람이 겸손해지고 예수님에 대해서 더 알기를 원하고 이분의 명령에 순종하게 됩니다. 이걸 묵상안하는 사람은 순종을 안 합니다.
이렇게 신성을 비웠다는 것을 우리가 다 알잖아요. 빌립보서2장7절부터 주욱 보면 그리고 나중에 12을 보시면 그런 게 나오잖아요. 이분이 이렇게 인간으로 오셔가지고 다 비워버리고 죽기까지 하시고 나중에 죽었기 때문에 만유가 예수님을 높이신다는 겁니다. 만유가 이 원리가 그대로 우리에게 적용되는 겁니다. 내가 낮아지고, 낮아지고 예수님처럼 한 알의 밀이 되어서 죽으면 그래서 나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살아나면 이제는 언젠가는 예수님이 만유의 사람들을 통해서 만유의 피조물들을 통해서 존귀함을 받듯이 우리도 그 존귀함을 받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본인이 신성을 비웠기 때문에 겟세마네동산을 우리가 상고 해봤잖아요. 십자가에 달려 있는 순간에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아버지, 아버지 어떻게 나를 이렇게 하십니까? 
나를 버리십니까? 여기까지 절규까지 가도록 창조주가 된 것을 우리가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다음에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신성을 포기했기 때문에 그분도 창조의 목적을 위배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겁니다. 스스로 교만해질 수 있다는 것도 우리에게 보여줄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망각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도 보여주고 창세기3장15절을 본인이 만들어 냈지만 지금 여기 보면 창세기3장15절에 구원플랜까지도 포기하려는 가능성이 이분에게 있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신성을 비웠기 때문에 그러는 겁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이렇게 할 수 있는데 우리피조물들은 말할 것도 없잖아요 그러니까 저나 여러분들은 이 가능성을 항상 가지고 있는 겁니다. 모든 사람이 다 이 가능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저 사람이 조금 실수를 합니다. 저 사람이 조금 죄를 짓습니다. 저 사람이 보기에 조금 안된 짓을 합니다. 그래도 용서해줄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는 겁니다. 왜냐면 저 사람은 피조물이야 저 사람은 예수님도 실수할 뻔 하시고 지금 이렇게 하시는데  지금 이렇게 하시는데 우리피조물들은 말할 것도 없는 겁니다. 그러니까 주변에 실수하는 사람들 죄 짓는 사람들 보기에 안 좋은 사람들 우리가 다 이해하고 사랑하고 안아줄 수 잇는 겁니다. 그렇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그러니까 이런 포지션에서 내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수님도 인성을 가지고서 살아남기 위해서 이분도 항상 저 나라 쪽을 생각하고 저 나라에서 오는 힘을 기다렸습니다. 이 분도 그래서 그 방법 중에 하나가 쉬지 말고 기도하는 겁니다. 
쉬지 말고 우리가 안테나를 저쪽에다 대고 저쪽 생각을 하라는 겁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이쪽 사람이기 때문에 이쪽도 봐야 되잖아요. 
이쪽을 보면서도 우리는 저쪽을 생각하면서 이쪽을 보는 겁니다. 
시각의 윤활유를 제가 항상 이야기합니다. 이게 있어주어야 되는 겁니다. 
윤활유가 안 되면 이쪽만 보다가 교회와 이쪽만 보는 일을 하니까  교회 와서도 이쪽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교회는 저쪽동네 조직체인데 교회라는 게 무엇입니까? 저쪽동네 조직체가 아닙니까? 그런데 이쪽동네 스타일로 교회에 와서 행동을 하면 아주 우스운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교인 전체가 이쪽 동네 사람이면 괜찮습니다. 그런데 교인 대부분이 저쪽동네 생각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교회는 이쪽동네 이야기하면 그 사람은 우습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저쪽동네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이는데 따라오면 자기도 모르게 눈이 올라가버립니다. 그래서 저쪽동네사람으로 되기 위해서는 항상 말하는 게 쉬지 말고 기도해라 말씀을 묵상해라 또 성령으로 충만해라 진보한 소리들입니다 그런데 이것밖에 없는 겁니다. 예수님도 이것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아까 헬라사람들이 와가지고 예수님을 만나고 싶다고 그랬잖아요. 그럴 때 예수님이 안 만났잖아요. 왜 그럴까요? 
이분들이 만나서 아하! 당신 대단합니다. 칭찬해주면 예수님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자기도 모르게 교만해집니다. 예수님도 스스로 컨트롤하십니다.
그렇다면 인간 예수님이 스스로가 약한 부분을 어떻게 보완했는지 아세요.
인간 예수님이 약한 부분을 보완하는 방법을 스스로 어떻게 보완하였냐면 군중들에게 칭찬과 존귀와 영광을 받지 못하게 스스로를 컨트롤했습니다. 
이분이 그래서 군중들로부터 숨었습니다. 기적을 행하시고는 알리지 말라면서 숨었습니다. 유명세를 타지 못하게 스스로를 컨트롤했습니다. 세상의 기준으로는 실패자 불쌍한 자 편협한자 외로운 자 로 취급받게끔 스스로를 컨트롤했습니다. 두 번째는 이 일을 위해서 하나님이 예수님이 스스로 계획을 하셨습니다. 본인이 이렇게 하실 것을 어떻게 했느냐면 첫째로 유대인들 다수를 영의 눈을 감기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러니까 유대인들 다수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예수님이 나타났을 때 예수님을 칭찬하고 존귀와 영광 드리지 못하게 만들어놓은 겁니다. 스스로 그분이 자신을 컨트롤한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심지어는 비난하기까지 믿지 않고 그래서 38절에 보면 이사야에게 하신 말씀이 주욱 나옵니다. 저들의 눈을 멀게 하고 완고하게 하고 마음으로 깨닫지 못하게 하고 이렇게 하는 목적이 뭐냐면 예수님의 이런 숨어있는 계획이 있는 겁니다. 스스로가 영광을 받지 않기를 육을 가지고 있을 때 영광 받지 않으셨습니다. 이 말씀 그대로 예수님께서 제자들 보고 너희들도 그렇게 해라 사함들에게 칭찬받고 존귀히 받고 영광 받지 말라 그래서 우리 산상수훈에서 복 있는 자의 제일 마지막에 무엇입니까? 
제자들에게 하셨습니다. 너희들은 나 때문에 핍박을 받게 되고 내 이름 때문에 너희들은 이런 소리 저런 소리 다 듣게 되어있고 나중에는 너희들을 죽이기까지 할 것이다 뭐냐면 우리가 미워서가 아닙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너희들이 인간이기 때문에 조금만 높아지면 잡생각을 한단다. 교만해진단다. 피조물인 자신을 모르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사도바울도 또 그분의 모든 동료들도 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또 제목을 바꾸어서 인간으로써 겸손하게 된 예수님이 고백하시는 부분을 봅시다. 이분은 그러니까 스스로를 자꾸 이렇게 만들어야 됩니다. 아버지와 자기와 같은 위치에 있고 같은 파워를 가졌는데 인간으로 오셔가지고 스스로를 자꾸 낮추시는 겁니다.
첫째가 뭐냐면 자신이 그러는 겁니다. 나는 아버지로부터 보냄 받은 인자이며 아버지가 보낸 아들이라고 자꾸 말하는 겁니다. 두 번째는 뭐냐면 나는 아버지의 대변인이며 자신이 내 의지로써 말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게 12장49절에서50절에 나오는 내용들입니다 세 번째는 이분이 또 그러시는 겁니다. 나는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기 위해서 보냄 받은 자라는 겁니다. 12장28절에 내 영광을 추구하러 온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실은 그분도 영광 받으시는데 지금 이분은 육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생각이 달라지시는 겁니다. 네 번째로는 아버지의 이름이 영광 받으시면 그러면 나도 곁에서 따라서 영광 받는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겁니다. 
이분이 12장23절 28절에서 그리고는 다섯 번째로 나는 한 알의 밀로 땅에 떨어져주기 위해 아버지로부터 보냄 받았다 그러는 겁니다. 12장24절에 여섯 번째로 그러므로 나는 자신의 생명을 미워하며 사랑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나는 내 생명을 미워하고 사랑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많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12장25절에 이유는 일곱 번째로 내 생명이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게 된다는 겁니다. 요한복음3장16절 5장24절 12장24절에 그러면 그 결과는 어떻게 되느냐면 결과는 네 가지로 나타나는 겁니다. 본인이 이렇게 한 알의 밀알이 되어서 죽게 되면 첫째 결과는 이 세상이 심판받게 된다는 겁니다. 12장31절 48절에 두 번째는 이 세상 임금이(사탄이) 쫓겨난다는 겁니다. 12장31절에 세 번째는 이 세상이 구원받게 된다는 겁니다. 
12장32절47절에 네 번째는 아버지와 예수님이 함께 영광 받게 된다는 겁니다. 이것은 창조목적의 회복입니다 12장28절에 그렇다면 어떤 크리스천이 존귀함을 받을까? 귀히 여김을 받는 크리스천의 조건입니다 예수님이 한 이것을 그대로 따라하면 되는 겁니다. 귀히 여김을 받는 크리스천은 첫째로 군중들에게서 칭찬과 존귀와 영광을 받지 않도록 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군중들로부터 숨기십니다. 유명세를 타지 않게 하십니다. 세상기준으로는 출세하지 않고 외롭고 불쌍한 사람처럼 인기 없는 사람처럼 만들어 놓습니다.
예수님과 똑같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닮는다는 것은 그렇습니다. 
두 번째는 스스로 영광구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빌립보서2장8절입니다.
스스로 낮춥니다. 낮추게 만들어 놓습니다. 존경을 통해서 낮추어 놓습니다.
세 번째로 자기생명을 미워하게 만듭니다. 요한복음12장25절에 네 번째는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듯이 죽기까지 복종하도록 만드십니다.
요한복음12장24절 빌립보서2장8절에 다섯 번째로 이런 크리스천을 아버지께서 귀히 여기십니다. 12장26절 빌립보서2장6절에서11절에 마지막 네 번째 두 종류의 유대인들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12장37절에서50절입니다.
첫째는 눈 뜬 소수의 유대인들의 특징이 있습니다. 본문에 보면 첫째가 관원 중에 많았습니다. 눈 뜬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영적으로 알아보는 관원들이 많았다 그랬습니다. 42절에 보면 두 번째로 그런데 이 사람들이 예수님 때문에 출교를 당할까봐 두려워했습니다. 42절에 보면 세 번째로 이 사람들이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했습니다. 43절에 보면 다시 말하면 사람에게 인정받기를 기대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분들이 저 세계를 보지 못하기 때문에 그러는 겁니다. 눈은 떴는데 크리스천은 크리스천인데 이 세상에 눈을 뜨고 있는 크리스천인 겁니다.
저 세상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는 겁니다.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알았는데 지적으로 알았습니다. 46절에 보면 아직도 그 어두움에 거하고 있다는 겁니다. 빛으로 오신 예수님의 빛을 받아서 눈이 떠지는데 이 세상에 속해서 어두움에 거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47절에 보면 이들이 심판받지 않고 구원의 반열에 있지만 크리스천이지만 이런 식의 크리스천들이라는 겁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로 눈 감긴 다수의 유대인들의 특징이 있습니다. 이들을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48절에 이들이 심판받을 것이다. 그랬습니다. 그렇지만 이방인의 숫자가 다 차면 주님이 이분들을 다 구원시키겠다고 그랬습니다. 로마서11장25절에서26절에 이분들의 모습을 보면서 두 종류의 크리스천이 있음을 보여주는 겁니다. 영의 눈이 뜬 크리스천들과 영의 눈이 감긴 크리스천들을 같은 크리스천들인데 영의 눈이 뜬 크리스천들은 어떤 모습일까요? 첫째 하나님의 창조목적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두 번째는 지상계명 지상사명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세 번째는 하나님께만 인정받기를 관심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영의 눈이 어두운 크리스천들의 모습은 이 세상에도 관심이 있고 사람에게 영광받기를 원하는 겁니다.
이런 모습을 12장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제가 결론적인 말씀으로 12장은 네 단원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중에 가장 핵심적인 단원이 하나 있다면 한 알의 밀알 사건입니다 한 알의 밀알 사건 하면서 제가 하나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생명을 살리는 원칙은 보시다시피 한 알의 밀이 그냥 있으면 본인 하나고 이게 죽어야 된다는 겁니다. 우리가 이렇게 보면 밀을 봐도 그렇고 쌀을 봐도 그렇고 그 안에 눈이 있잖아요. 눈이 몸뚱어리는 주로 단백질입니다 
눈이 단백질을 먹잖아요. 그러면서 눈이 자라나잖아요. 그러니까 단백질이 죽어야지만 씨눈이 자라나가지고 여기서 열매를 맺는 겁니다. 이게 하나님의 생명을 만드는 원칙입니다 한쪽이 희생을 해주어야 합니다. 한쪽이 그걸 희생으로 생각하지 않고 한쪽이 도와준다고 생각하면서 한쪽이 힘을 집어넣어주는 겁니다. 그래야지만 한쪽이 살아나는 겁니다. 그런데 살아나는 이것을 보면 똑같이 이렇게 씨눈이 또 있는 겁니다. 그래서 그런 게 많이 자라나는 겁니다. 그러니까 실은 그게 죽은 것이 아닙니다. 더 많이 살려 내었으니까 이와 같이 우리사람도 보면 정자와 난자가 만나잖아요. 그래서 우리사람이 되잖아요. 강아지도 마찬가지고 소도 마찬가지고 새들도 마찬가지고 심지어는 꽃들도 마찬가지고 나무도 마찬가지입니다 암수가 결합하는데 항상 보면 하나가 양보를 하는 겁니다. 애기가 자라나려면 여자의 난자가 자라나려면 정자가 양보를 해주어야 됩니다. 희생을 해야 됩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처럼 이렇게 생겨납니다. 이게 하나님의 생명을 주시는 원칙입니다 
이 원칙 속에서 예수님도 너희들에게 생명 주려면 내가 죽어야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살아난다는 겁니다. 똑같이 우리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죽으면 우리주변사람들이 살아나는 겁니다. 그러니까 시간으로도 죽고 나의 달란트 재능으로도 내가 죽고 돈으로도 그렇고 기도로도 그렇고 무슨 일을 하든지 내가 죽는 연습을 하는 겁니다. 그런 사람을 주님이 존귀히 여기시겠다는 겁니다. 사람들도 그런 사람들을 좋아하잖아요. 이 세상에서 그런데 그 수준이 아닌 겁니다. 저 나라에 가서 주님이 좋아하시겠다는 겁니다. 존귀히 여기겠다는 겁니다. 그런 어머니아버지를 가진 자녀들은 그냥 개런티입니다. 주님이 너희 어머니아버지 때문에 내가 너희에게 은혜를 3-4대가 아닙니다. 천대까지 베풀어 준다고 그랬습니다. 이 생명의 원칙 귀하게 여김을 받는 원칙에 우리가 요한복음12장에서 발견되면서 이 부분을 우리가 명심하면 좋겠습니다. 이 부분을 우리가 묵상 합시다

기도드리겠습니다.
예수님! 예수님께서 요한복음12장을 말씀하시면서 이제 구체적으로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 말씀이 우리의 생을 떠나지 않도록 항상 같이 해 주시옵소서 그러므로 우리 삶을 통해서 삼위하나님께서 영광 받아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황용현 목사님 설교내용영상으로 보세요.
https://www.youtube.com/watch?v=q8jOxufw-g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