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강해 33강, 나인성과부아들을 살리신 예수님(눅7:11-17) 2017년4월2일 말씀
오늘본문은 누가복음7장11절부터17절까지입니다, 제가 읽겠습니다,
11그 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 새 제자와 많은 무리가 동행하더니 12성문에 가까이 이르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한 어머니의 독자요 그의 어머니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13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14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15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머니에게 주시니
16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 하더라
17예수께 대한 이 소문이 온 유대와 사방에 두루 퍼지니라
오늘말씀은 상당히 어려운 말씀입니다, 그리고 여러 가지 우리가 고려해야 될 부분들이 많기 때문에 제가 그동안에 기도해오면서 우리교회 성도들이 이 말씀을 잘 소화할 수 있도록 계속 주님께 부탁을 하고 지금 이 자리에 섰습니다, 우리가 지난시간과 그 전시간의 배경은 평지수훈과 산상수훈을 주님이 하셨잖아요, 그리고 산상수훈을 끝내고는 도중사역으로 나병환자를 치유한 사건 우리다 기억나시죠, 그리고는 가버나움에 들어오셨습니다,
그리고는 백부장하인을 치유하였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제자들 앞에서 치유사역을 하신 목적이 뭐였습니까, 제자들에게 시각의 전환을 시켜 주기위해서 패러다임 시프트(paradigm shift)이방인들에게 관심을 두라 내 마음은 이방인에게 있다는 하나님의 뜻을 가르쳐 주기위해서 제자들에게 이런 환경들을 만드셔서 보여주시는 겁니다, 제가 지난시간에도 말씀드렸지만 이분들은 1%정도 시각의 변화가 있었을 걸로 우리가 짐작을 했습니다,
제자들이3년 동안 시각의 변화훈련을 계속해서 받아왔는데 시각의 변화는 어디에 근거를 두냐면 아브라함과의 계약과 모세와의 계약을 깨닫게 하게 위해서 시각의 변화훈련을 시켰는데3년 끝나고는 예수님이 이분들에게 소위 지상사명을 내렸습니다, 너희들은 이제는 예루살렘에만 있지 말고 유대에만 있지 말고 이방민족인 사마리아에도 가고 땅 끝까지 로마제국을 향해서 나가라 이렇게 했잖아요, 3년을 시각변화훈련을 시킨 다음에 지상사명을 내리신 겁니다, 예수님도 차근차근히 하나하나 훈련시키면서 결론적으로 지상사명을 내리시기 위해서 이렇게3년 훈련을 시켰던 겁니다,
그런데 이분들이 오순절 사건을 경험하면서 예루살렘교회를 개척했지만 예수님의 열두제자들이예루살렘교회가 아직도 멀티시각 이방인을 행한 복음에 대한 하트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어떻게 했습니까,
강제로 핍박을 허락해가지고 강제로 예루살렘교회를 흩트려버렸습니다,
그래가지고 예루살렘교회2만 명 이상 되는 교인들이 이방나라로 흩트림을 받는 이야기우리가 다 알고 있잖아요, 그런 경험 속에서 베드로가 고넬료를 만났을 때 예수님께서 환상을 주었잖아요, 이방음식을 먹으라고 그럴 때 베드로는 이방음식을 안 먹겠다고 그만큼 베드로가 이렇게 훈련을 받았는데도 마음이 아직도 자민족중심이었던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서 베드로는 천천히 아브라함과의 계약 모세와의 계약 이방인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스스로 깨닫게 되고 깨닫게 되고 그렇게 가면서 나중에 순교당할 때는 완전히 깨닫게 되어가지고 이분이 순교직전에 베드로 전 후서를 쓰실 때 보면 그 속에 이분의 마음이 시각이 변화된 모습을 우리가 볼 수가 있습니다, 오늘은 같은 주제지만 새로운 각도로 훈련시키는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오늘은 예수님이 가버나움에 계시다가 남쪽으로 내려가시는 겁니다, 남쪽으로 약40km내려가서 나사렛 근처입니다, 그기에 나인성이라는 마을이 있는 겁니다, 이 나인성이라는 마을은 나사렛에서 약10km동남쪽에 있는 마을입니다, 그러니까 나사렛주변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가버나움에서는 약40km떨어진 마을입니다, 이 마을근처에 다보 산이라는 산이 있습니다, 마태복음17장에 변화 산 우리 기억나시죠,
변화 산이 일어났던 그 산이 다보 산이라고 그러는데 나인이라는 마을이 다보 산언저리에 있는 조그만 마을입니다, 나인이라는 뜻이 원어로 뭐냐면 푸른 초장이라는 뜻입니다 또 아름다운 거처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왜 나인으로 내려갔을까 이게 우리의 질문입니다
예수님이 나인으로 내려가시는데 많은 무리들이 동행했다 그랬습니다,
열두제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많은 무리들이 떼를 지어40km의 긴 거리를 같이 갔습니다, 아마 제가 볼 때는 백부장도 같이 가지 않았나,
유대인 장로들 백부장의 하인 또 그 가족들 또 예수님의 기적을 경험했던 바리새인들 사두 개인들 서기관들 제사장들 평지수훈을 통해서 산상수훈을 통해서 또 여덟 가지의 비범한 일들을 통해서 그동안에 예수님의 모든 사역하는 것을 보면서 예수님을 따랐던 사람들이 많은 무리가 나인으로 갔던 모양입니다 나인성에 가까이 왔는데 사람들이 죽은 자를 메고서는 예수님 앞에 나오는 모습을 오늘본문에서 이야기합니다, 한과부의 독자라 그랬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모습을 보시고는 먼저 과부를 예수님이 불쌍히 여기셨다, 그랬습니다, 그러면서 울지 말라 이렇게 말씀하시고는 관에다가 손을 대시고는 청년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일어나라 그러니까 이 청년이 살아나는 장면을 모든 사람들이 이 모습을 보더니 두려워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는 이야기로 그러면서 아! 이분이 큰 선지자구나 그다음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구나, 이런 고백을 하는 장면이 오늘본문에 장면들입니다,
보면 지금 제자들만이 아니고 많은 무리들이 이 장면을 보고 상당히 놀랬던 이야기가 오늘본문의 이야기들입니다, 이 말씀을 가지고 성령님이 우리에게 조명해주시는 많은 이슈들이 있습니다, 첫째 이슈는 나인의 뜻입니다,
나인은 푸른 초장이다 또는 아름다운거처다 이렇게 아시고는 예수님께서 나인으로 내려가신 이야기는 사복음서에서 누가복음에만 있습니다,
다른 복음에는 이 스토리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나인성에서 과부아들을 독자를 살리는 이 사건을 통해서 숨어있는 교육프로그램이 있습니다,
누구를 가르치려고 그러느냐면 직접적으로 열두제자들입니다
그다음에 간접적으로 나머지제자들입니다 나인성교육프로그램이라고 제가 이름을 한번 붙여 보았습니다, 나인성교육프로그램에 나오는 교육보조 자료들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나인성이라는 그 마을이 보조자료 중에 하나입니다 두 번째 보조 자료가 유대인출신으로 결혼했던 기혼녀인데 결혼하고는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런데 아들이 낳은 후에 이분이 과부가 된 겁니다,
그다음에 보조 자료는 이아들이 아버지 없이 지낸 겁니다,
그런데 이 독자가 어린나이에 죽었다고 우리는 보는 겁니다,
성서에서는 예수님이 청년아 그랬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이아들을 보고 잠을 잔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오늘본문 이 스토리를 목사님들이나 또는 성경교사들이 이 내용을 설교하거나 가르칠 때 최소한 세 가지의 다른 차원에서 이 내용을 가르칩니다, 첫 번째는 육적인 차원에서 해석하고는 그것을 가르치는 그러한 선생님들 신학자들 또는 목사님들이 있습니다,
이런 시각으로 이 스토리를 볼 때 과부를 어떻게 보느냐면 과부는 물리적과부로 보는 겁니다, 실제로 한번 결혼한 여인이고 남편과 사별한 여인으로 보는 겁니다, 또 이 여인은 재혼하지 않았고 홀로된 여인으로 보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과부니까 외로운 여자고 소외된 여자고 물질적으로도 충분하지 않고 정신적으로도 도움이 필요한 여인으로 이 독자가 죽었습니다,
자식에 대한 심한 애착심을 가진 이런 여자로 표현 해봤습니다,
그리고는 성서적으로 이런 여자들은 우리가 사랑해야 된다,
이렇게 가르치는 겁니다, 다시 말하면 성서에 보면 과부를 사랑해야 된다,
도와주어야 된다, 돌봐주어야 된다, 라는 성서의 이야기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성서구절이 예레미야7장6절 22장13절 에스겔서22장7절 스가랴7장10절 말라기3장5절 디모데전서5장3절 야고보서1장27절 이 성경구절에 보면 대표적으로 과부와 고아들을 특별히 돌봐주고는 사랑해주라는 그러한 명령이 말씀 속에 있습니다, 그런데 성서에서 보면 이와 정반대로 과부를 특별사역자로 사용하셨던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과부는 영적지도자입니다
누구냐면 여자선지자 안나입니다, 누가복음2장37절에 이 안나는 사람들이 돌볼 필요가 없습니다, 이분은 스스로도 영적으로 강권하고 여러 부분에서 도움이 필요 없는 분입니다 또 특별과부를 보면 엘리야시대에 사렙다의 한 과부가 나옵니다, 이분은 시돈 땅에 있는 이방인여자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누가복음4장26절과 열왕기상17장8절에서16절까지 이야기인데 예수님이 누가복음4장26절에서 이 과부이야기를 합니다, 이스라엘에는 그 당시에 과부들이 상당히 많았는데 엘리야에게는 이 과부들이 눈에 안 보이고 이방여자 시돈 땅에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관심이 있어서 여호와께서 이여자분에게 은혜를 많이 베풀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러다보니까 과부라고 그래서 다 불쌍한 게 아니고 과부가 불쌍한 분들도 있지만 외로운 분들도 있지만 또 그렇지 않는 분들도 있다는 것을 제가 소게하고 싶어서 이런 말씀을 드립니다, 오늘본문에 나오는 이 과부는 과부인 것만이 아니고 독자아들을 잃어버리는 그런 과부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이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겼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육적인 측면에서 설교를 하는 분들은 우리도 예수님처럼 사랑을 가지고 과부를 사랑해주고 특히 과부집안에 이런 불상사가 있을 때는 예수님처럼 불쌍히 여겨주고 잘 도와주어야 된다, 라는 식으로 오늘본문을 가지고 공부하고 설교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문제는 이런 설교를 하실 때 예수님이 과부의 아들을 살리는데 문제가 있는 겁니다,
육적인 수준을 가지고서 설교하는 분들이 가지고 있는 딜레마가 뭐냐면 예수님의 이 기적을 어떻게 설명하느냐 이겁니다 특히 진보주의적인 목회자들이나 신학자들은 이 기적을 그냥 기적대로 수용하는 사람이 있느냐면 이 기적을 상징화해서 설교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실제로 살리신 것이 아닌데 살린 것처럼 상징적으로 말씀하셨다 까지도 이야기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어째든 오늘 이 사건은 세 가지측면에서 보면 제가 지금까지는 그중에 한 가지측면인 육적인 측면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쪽을 보고 성경공부를 하거나 그런 식으로만 보는 겁니다, 두 번째 시각은 뭐냐면 혼적인 차원으로 해석하는 시각입니다 그러면 과부를 어떻게 보느냐면 혼적인 과부입니다 다시 말하면 정신적인 과부로 보는 겁니다, 이 말은 뭐냐면 정신적으로 외로운 사람 정신적으로 파탄을 경험한 아들이 죽었으니까 좌절을 경험한 절망을 경험한 또는 아픔을 경험한 여인으로 보는 겁니다,
그래서 이 여자 분은 지금 절망가운데서 소망 없이 도움 받지 못하고 외롭고 소외된 자로 보는 겁니다, 정신적인 남편이 없는 사람입니다
의지할 자가 없는 여자로 보는 겁니다, 이런 의미에서 과부입니다
독자를 가지고 있었을 때는 그 아들에게 소원을 가지고 아들을 의지하고 살았는데 독자까지도 잃어버린 그러니까 유일한 정신적인 소망까지도 다 잃어버린 그러한 여자로 그런 사람으로 보고서 이 본문을 해석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여자를 보고 불쌍히 여겨서 정신적인 도움을 주셨다 독자를 살리신 것은 실제로 살리신 것이 아니고 격려나 위로 사랑차원에서 이 여자에게 그런 것을 베푼 정신적으로 살리신 이런 차원에서 버는 겁니다,
특히 진보주의자들의 해석은 이런 식으로 해석하는 겁니다,
진보주의자들 중에서는 타종교도 다 같다고 하는 종교다원주의자들 이런 사람들은 성서를 이런 식으로 해석을 합니다, 그런데 예수 안 믿는 불교스님이나 이런 사람들이 이걸 보고는 여기까지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분들도 첫 번째 해석도 할 수 있고 두 번째 혼적인 차원도 불교스님들도 일반사람들도 예수 안 믿는 사람들도 여기까지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 좋아한다고 그러잖아요, 그런데 소위 복음주의자들은 저나 여러분들은 복음주의자들입니다 해석을 육적인 차원에서 해석도 하지만 또 혼적인 차원에서 해석도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영적인 차원에서 주님의 말씀을 해석을 해야 되는 겁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숨겨진 미스터리가 항상 숨겨져 있습니다, 예수님의 행동과 말씀과 사역 속에서 그리고 세 번째 영적차원의 해석은 어떻게 우리가 해야 되느냐면 첫째 과부입니다
이 과부는 영적으로 과부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영적과부라는 것은 뭐냐면 영적으로 남편을 잃어버린 분입니다 그러면 영적남편이 누굽니까,
예수님인 겁니다, 이걸 먼저 초점을 두고서 우리한번 봅시다,
그런데 이분이 한번 결혼했던 여인입니다, 이 말은 뭡니까 이 과부는 한번 예수님과 결혼했던 분입니다 이걸 뭐냐면 지금 유대인가지고 이야기하는데 유대인들이 주후30년부터 주후70년까지 예수님의 제자들을 상징화하는 겁니다, 다시 말하면 주후30년부터 주후70년까지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신랑으로 모시고 살았던 겁니다, 그렇게 모시고 살면서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 아들이40년 동안 제자들을 통해서 생산한 영적아들들입니다 크리스천들입니다 특히 유대인크리스천들을 지금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런데 갑자기 이아들이 죽었습니다, 이게 주후70년인 겁니다,
그런데 나중에 우리가 보겠지만 죽었는데 완전히 죽은 게 아닙니다,
잠잔다, 그랬습니다, 주후70년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①성전이 파괴되고 ②이스라엘이 패망하고 ③디아스포라로 다 로마제국으로 흩어져버렸고 이분들이 ④눈이 감겨서 예수님을 보지 못하고 ⑤반유대주의로 핍박을 받았고 그러면서 주후70년부터 언제까지 유대인들이 문을 못 떠 습니까, 1900년입니다 그때 메시아닉 유대인들이 나타날 때까지 눈을 못 뜨고 있었던 겁니다, 유대인이라는 민족이 죽은 사람이 된 겁니다,
그러니까 잠자는 겁니다, 잠자는 말은 나중에 깨어난다는 말입니다
그런 가운데 주후70년부터1900년 이사이에 이사야에게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들이 다 망한 것 같은데 거기에 그루터기를 남겨놓았다는 겁니다,
그루터기를 영어로 스텀프(Stump)라 합니다, 그것을 거룩한 씨라고도 표현을 했습니다, 이사야서6장13절에 그루터기 또는 거룩한 씨라 그랬습니다,
이것을 숨겨놓았다 그랬습니다, 이것을 이사야가 또 어떻게 표현했느냐면 남은 자들이라 그랬습니다, 렘런트(remnant)라는 표현을 했습니다,
이사야서1장9절 10장20절에서23절에 나중에 이 렘런트(remnant)를 바울이 로마서11장5절에서 표현을 했습니다, 이분들이 어디서 살았습니까,
광야에서 살았던 겁니다, 옥토에 살지 않았고 광야에서 살면서 광야골짜기 밑에 그루터기들이 숨겨져 있었던 겁니다, 아까 다섯 가지의 어려움을 당하면서 1900년 동안 유대인들이 죽은 모습으로 지냈던 겁니다,
다섯 가지가 성전 무너져서 성전 찾으려고 이분들이 간구했습니다,
나라를 찾으려고 그다음에 디아스포라로 전 세계에 흩어져 있으면서 고국에 돌아오려고 해도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시는 겁니다,
그다음에 눈이 감겨가지고 예수그리스도가 여호와하나님이라는 것을 모르는 겁니다, 그뿐 아니라 계속해서 기독교인들을 통해서 반유대주의로 핍박을 당하고 있는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어린 아들이 이렇게 주욱 가다가 메시아닉 유대인이 나올 때쯤 되니까 청년나이가 된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지금 청년아 일어나라 너 이제 일어날 때가 되었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이 과부를 보고 불쌍히 여겼다 그랬습니다,
왜 예수님이 과부를 보고 영적차원에서 불쌍히 여겼을까요,
이 과부는 누굽니까 과부는 유대인입니다 유대인들이 앞으로 다섯 가지 고통을 겪을 것을 예수님이 다 아시고 과부를 보고 예수님께서 불쌍히 여겼다 그러는 겁니다, 다섯 가지의 고통은 유대인들이 왜 겪어야 됩니까,
이방인들을 살리기 위해서인 겁니다,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된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들을 복음화 시키기 위해서 한 알의 죽은 밀이 되어야 되는 겁니다, 한 알의 죽은 밀 요한복음12장24절에 그런데 몇 년 동안 한 알의 죽은 밀이 되었습니까 약1900년 동안 다섯 가지 고통을 경험하면서 하나님이 사랑하는 이방인 숫자를 채우는 일입니다, 이게 아브라함과의 계약을 모세와의 계약을 그대로 역사 속에서 보여주는 겁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때가 된 겁니다, 전도사3장1절에 보면 모든 게 때가 있다고 그랬잖아요, 때가 되어서 이아들이 청년이 살아나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청년이 부활하는 것이 아닙니다, 청년이 회생했습니다,
이 말은 뭐냐면 청년이 회생한 게 뭐로 표현 했느냐면 메시아닉 쥬들이 나타났다는 겁니다, 이 사건이 어디에서 일어납니까, 나인성에서 일어나는 겁니다, 나인성은 푸른 초장입니다 이분들 유대인들이1900년 동안 광야에 있으면서 광야 밑에 그루터기로 숨어 있다가 이 청년이 살아나면서 완전히 환경이 변한 푸른 초장이 된 겁니다, 푸른 초장이라는 도시로 하나님이 나인이라는 도시를 만들어 가지고 푸른 초장으로 아주 사람이 살기 좋은 도시로 나인성이 변해버린 겁니다, 이런 모습을 에스겔에게 보여 준 게 있습니다,
에스겔서37장1절에서14절에 보면 에스겔이 주전594년에 이 혼상을 봤습니다, 뭐냐면 골짜기가 있는데 골짜기에 마른 뼈들이 많이 있는 겁니다,
그런데 나중에 이 마른 뼈들이 누구냐면 이스라엘사람들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마른 뼈들에게서 생기를 집어넣어서 마른 뼈들 중에 일부가 살아나는 그러한 장면을 본 겁니다, 그래서 이것이 뭐냐면 메시아닉 쥬가 나타날 것을 보여준 겁니다, 에스겔서38장39장은 뭐냐면 7년 환란이 일어나는 장면을 보여준 겁니다, 그러니까7년 혼란이 일어나기 전에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을 그래서 에스겔서37장은 마른 뼈 이야기입니다 나인성에 과부의 청년 독자가 회생하는 그 사건과 마른 뼈 사건과 다 연계되어 있는 같은 이야기입니다, 특히 이 사건을 주전700년에 이사야에게 하신 말씀을 보면 기가 찬 말씀으로 이사야가 이걸 본 겁니다, 이사야54장4절에서8절에 보면 이사야53장은 뭡니까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53장을 하시고는 신약시대에 들어와서 이스라엘사람들이 다시 살아나는 모습을 이사야에게 보여주신 겁니다, 4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라 놀라지 말라 유대인들에게 네가 부끄러움을 보지 아니하리라 예수님을 통해서 네가 네 젊었을(청년) 때의 수치를 잊겠고 과부 때의 치욕을 다시 기억함이 없으리니 다시 말하면 유대인들이 남편 없이1900년을 지내다가 이제는 남편이 나타난다는 겁니다,
5절에 보면 이는 너를 지으신 이가 네 남편이시라 그의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이시며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시라 그는 온 땅의 하나님이라 일컬음을 받으실 것이라 7절에 보면 내가 잠시 너를 버렸으나 하나님이 볼 때는 잠시지만1900년입니다 큰 긍휼로 너를 모을 것이요
8 내가 넘치는 진노로 내 얼굴을 네게서 잠시 가렸으나 영원한 자비로 너를 긍휼히 여기리라 네 구속자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
왜 이렇게 했습니까, 이방인의 충만한 숫자를 채우시기 위해서 이분들이 이렇게 한 알의 죽은 밀알이 되었다는 겁니다, 이게 생명을 살리는 원칙입니다
그러니까 오늘본문말씀을 이렇게 세 차원으로 보는 해석을 해드렸습니다,
육적인 차원. 혼적인 차원. 영적인 차원으로 해석을 해 드렸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어느 차원의 사람들입니까, 우리가 성서를 영적인 차원으로 보는 수준까지 가주어야 되는 겁니다, 그러면 제가 질문을 던지겠습니다,
당시 예수님의 제자들이 이 사건을 어떤 차원으로 소화했을까요,
이 사건을 보고 있었던 열두제자들이 육적인 차원으로 분명히 소하했을 겁니다, 그 당시에 그 이상은 생각도 못했을 겁니다,
그리고는3년 공생애를 끝내고 계속해서 이와 비슷한 이야기들을4복음서에서 계속 가르쳤습니다, 우리가 계속 공부할 터인데 3년 공생애 끝나고 어떤 차원으로 이 이야기를 다시 한 번 보여주었을 때 이분들이 소화할 수 있을까요 분명 육적차원에서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혼적차원까지 갔을 거라고 우리가 짐작은 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오순절사건이 일어나고 이분들이 예루살렘교회에 지도자들이 되었습니다, 지도자들이 되었을 때는 어떤 차원으로 이 스토리를 소화했을까요, 이분들이 분명히 조금은 영적차원으로 이해는 하겠지만 그것 가지고 그분들이 소화를 못했을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계속 기다리시는 겁니다, 이분들이 영적시각의 사역자들이 될 때까지 그러니까 사도행전을 보면 이분들의 발전되는 모습이 시각이 변하는 모습들을 우리가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서서히 발전적으로 영적차원을 증가시켜주는 겁니다, 크게 해주고 영성을 증가시켜주고 그러다가 이분들이 스스로 사역말기 되었을 때 순교직전에는 그의 영적차원으로 소화할 수 있는 사람으로 되었다가 그것 때문에 예수님 때문에 순교까지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질문을 던져보겠습니다,
오늘날 우리크리스천들은 세 종류의 크리스천들을 우리가 항상 말합니다,
NO1크리스천들은 선데이 크리스천들이라 그러고 또는 맹목상 기독교인들이라 합니다, 이분들은 성경을 읽지도 않고 기도도 안하고 그냥 교회에 다니다가 말다 관심도 없지만 크리스천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전 세계에서60-70%의 기독교인이 여기에 속한다고 그랬습니다,
이 안에도 피라밋식으로 계층이 다르지만 이런 사람들은 오늘본문의 스토리를 어떻게 소화할까요, 육적으로 밖에 소화가 안 됩니다,
그러니까 교회에 앉아있는 기독교인들은 육적차원으로 밖에 오늘본문을 소화를 못합니다, 또 그런 식으로 밖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분들은 오늘 같은 분문을 읽고는 이 안에서 정보를 습득하는 수준입니다, 아! 이런 일이 있었구나, 그다음에 지식을 습득하는 겁니다,
그리고는 사람의 인권을 예수님이 인권이 있으신 분이구나,
불쌍한 사람을 도아주고 인간적인 차원에서 그리고 이걸 남의 이야기처럼 객관적인 스토리로 보는 겁니다, 그러니까 감동 없는 하나의 제3자적 피부 적 스토리로 보는 겁니다, 이런 일이 있었구나, 우리도 도와주어야지 이 정도의 사람들이 교회에 나오는 사람이60-70%가 있는 겁니다,
그게 나빠서가 아닙니다, 그렇게 되어 있게끔 디자인을 해놓으시는 겁니다,
두 번째 수준인 NO2크리스천들은 뭡니까 번영신학이라고 그랬습니다, 기복크리스천입니다, 성공크리스천들입니다, 이분들은 약20-30%입니다
전문가들에 의하면 이런 사람들은 기도도 많이 하고 예배도 열심히 드리고 교회봉사도 많이 하고 전도 선교도 많이 하는데 이분들의 관심은 어디에 있다고 그랬습니까, 이 세상에 있는 겁니다, 이 세상에서 복 받기를 원하는 겁니다, 저쪽 세상은 관심도 없는 겁니다, 언젠가는 죽으면 가지만 당장 급한 게 이 세상입니다, 그래도 좋은 크리스천들입니다 이런 크리스천들이20-30%인 겁니다, 어느 나라나 교회 안에 보면 이 사람들은 오늘본문을 어떻게 해석을 할까요, 이 사람들은 혼적인 측면으로 해석을 하는 겁니다,
다시 말하면 도덕적인 차원에서 또는 윤리적인 측면에서 이성적인 측면에서 감성적인 측면에서 어느 정도 감동이 있는 겁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했구나,
감동이 있구나, 그러니까 감성을 터치 하는 겁니다, 이성과 감성을 터치하는 메시지를 이분들에게 던지는 겁니다, 첫 번째 그룹들은 지성만 터치하는 겁니다, 그런데 두 번째 그룹들은 이 예화를 가지고서 이성과 감성에 초점을 맞추는 겁니다, 그러니까 아! 오늘 은혜 받았습니다,
오늘말씀에 감동받았습니다, 오늘말씀이 나에게 큰 도움이 되었네요,
그리고는 내가 불쌍한 사람들 잘 도와주어야지 과부들 내가 잘 도와주어야지 예수님처럼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서 마음을 내어놓고 같이 울어주고 이런 식으로 메시지를 전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오늘날 교회라는 게 우리나라만이 아니고 전 세계가 다 그렇고2000년 기독교역사에서도 마찬가지고 교회에 주류로 앉아있는 사람이 NO1번과NO2번 사람인 겁니다,
그러니까 NO1과NO2번 사람들에게 오늘 같은 예화를 설명할 때 이런 식으로 육적인 측면과 혼적인 측면을 초점으로 해서 교인들을 가르치는 겁니다,
그래야 이분들이 이것을 소화하는 겁니다, 그래야 오늘말씀 참으로 좋았다
본문을 읽고는 분문과 관계가 없이 그냥 예화 들고 이야기하고 이게 이분들이 굉장히 기분이 좋은 겁니다, 그런데 예배 끝나고 나와서 물어보는 겁니다, 오늘 설교의 본문이 무엇이었습니까, 하면 모르는 겁니다,
별로 그냥 재미있는 이야기로만 들은 겁니다, 만약에 영적인 측면에서 오늘본문을 이야기해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선소화를 못합니다,
불편합니다, 거부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첫 번째 NO1크리스천들은 영적유아. 영적어린아이라 합니다, 두 번째 N02크리스천들은 영적사춘기. 영적청년기라 그럽니다, 세 번째 NO3크리스천들은 영적아들. 영적아버지라 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설교자들은 설교를 할 때 앞에 앉아있는 대상이 누구냐를 먼저 읽어야 합니다, 앞에 앉아 있는 대상이 어느 수준의 사람들이 앉아 있느냐 거기에 맞추어서 해야 되는 겁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NO1.NO2사람들이 앉아있는데서 영적인 이야기를 하면 안 됩니다, 교인들 다 떠나버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NO1.NO2사람들이 주종을 이루고 있는데 교회에 교인들을 유지하려면 세 번째 NO3수준으로 이야기하면 안 되는 겁니다, 세 번째 영적인 수준으로 이야기하면 교회가 시시하다고 가버립니다, 그러면 이게 나쁜 겁니까, 아닌 겁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첫 번째 하나님의 자녀들이 많아야 되는 겁니다,
이분들을 잘 먹여야 되는 겁니다, 이분들 중에 어떤 분들은 잇 빨이 없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우유를 먹여주어야 되는 겁니다,
그래서 잘 씹어서 주어야 되는 겁니다, 이런 분들에게는 어떻게 합니까,
같은 본문을 가지고도 예화를 많이 들고 스토리를 만들어서 이야기해주고 또 가끔 농담도 해서 웃게도 하고 또는 대화식으로 말도하고 또 세상에 섞어서 이야기하고 이래야만 아하하 좋아가지고 오늘 은혜 받았다 그럽니다,
그렇게 해야 되는 겁니다, 이런 사람들을 양육하는 목사님을 특별한 은사가 있어야 합니다, 이런 어린아이들을 잘 키우는 은사가 있어야 하는 겁니다, 유치원선생님들이나 초등학교선생님들은 그런 아이들을 다루는 특별한 은사가 있잖아요, 대학교수들은 그런 걸 못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교인들 중에 대분이 그런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목회를 해야 되는 겁니다,
이분들은 굉장히 힘든 목회를 하는 겁니다, 두 번째 사람들의 수준이 많은 교회가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 번째 사람들도 앉아 잇지만 두 번째 지식을 요하는 이런 사람들에게는 지적접근방법을 사용해야 하는 겁니다, 아카데미한 단어도 써야 되고 접근도 아카데믹한 접근을 해야 하는 겁니다, 세상지식이야기도 많이 해주고 상식도 이야기해주어야 되고 철학 문학 유명 인사들이 말하는 것을 인용도 잘해야 되고 적절한 예화도 잘 드려야 되고 사람들이 볼 때 오늘과 똑같은 본문말씀을 가지고 여러 가지 지적이 이야기를 집어넣어가지고 아카데믹하게 미사어구를 써가면서 적절한 고급단어를 쓰면서 표현도 그렇게 해주어야 되는 겁니다, 이것도 은사인 겁니다, 그래야지만 두 번째 그룹들을 잘 모셔다가 잘 자라게 해서 나중에 천국으로 보내는 겁니다, 그 안에 첫 번째 그룹들도 끼여 있으니까 그렇게 해서 천국으로 보내는 일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목회하는 목회자들은 얼마나 중요한 사역을 하는지 모릅니다,
그러니까 절대로 이런 목회자들을 비평하거나 그러면 안 됩니다,
그런 사람들이 절대적으로 많아야 되고 그런 사람들이 많은 사람들을 목회하기 때문에 힘든 목회를 하는 사람들입니다 세 번째 스타일의 설교는 똑같은 본문가지고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 사람들은 강해설교를 하는 겁니다,
성경 그 자체를 보고 그 안에 들어있는 영적의미를 설명해주는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대상은 많아야 전체기독교인 중에서5-10%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시편23편을 한번 봅시다, 시편23편에 실제적인 예화를 드려보면 시편23편을 세 그룹들이 어떻게 다르게 소화하느냐 입니다,
시편23편은 다윗이 고백한 겁니다, 시편23편 내용을 보면 그 안에 네 가지 차원의 고백이 숨겨져 있습니다, 첫 번째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3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4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5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6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이것을 다윗이 푸른 풀밭이니까 나인입니다 다윗의 수준에서 나인 고백을 하는 겁니다, 똑같이 이것을 두 번째로 유대인 민족적 고백을 한다고 보는 겁니다, 유대인이 눈이 감겼다가 눈이 떠져가지고 푸른 풀밭으로 인도받는 유대인 민족적 고백으로도 우리가 해석할 수 있습니다,
또는 크리스천들의 개인적 고백으로도 이것이 해석이 가능한 겁니다,
네 번째로 진정한 고백은 뭐냐면 그 안에 다윗이 고백한 것이 자기 개인적인 고백이지만 그 안에 깔려있는 게 뭐냐면 아브라함과의 계약적 이야기입니다 그게 여기에 숨겨져 있는 겁니다, 모세와의 계약 아브라함과의 계약적 고백이 선교적인 차원의 고백이 이 속에 숨겨져 있습니다,
그러면 제가 나인성에 과부의 아들이 부활이 아니고 회생을 했다는 말을 제가 했습니다, 회생이라는 단어와 부활이라는 단어가 다릅니다,
성서에서 보면 예수님이 회생을 시킨 케이스가 세 케이스가 있습니다,
죽었다가 살린 케이스가 그런데 그것을 다 잠잤다가 깨운 케이스입니다,
첫 번째는 오늘 나인 성과부의 아들케이스입니다,
두 번째는 누가복음8장40절에서56절에 회당 장 야이로의 딸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장면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죽은 것이 아니고 잠잔다, 그랬습니다,
그리고 회당 장야이로의 케이스를 누가복음8장55절을 보면 굉장히 중요한 말씀을 거기서 합니다, 그 영이 돌아왔다는 단어를 썼습니다,
그런데 영은 누구의 영입니까 야이로의 딸의 영입니다 사람의 영입니다
사람의 영이 빠졌다가 돌아왔다는 것은 리턴으로 하나님이 영이 빠졌다는 그 상태가 잠자는 상태인 겁니다, 우리가 보통 완전히 죽은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내영과 혼이 어디로 올라갑니까, 낙원으로 올라가버리잖아요,
그런데 이 경우에 보면 영이 빠졌지만 낙원까지 올라가지 않는 경우를 우리가 짐작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의도적으로 그 영을 뽑아버린 겁니다,
그리고는 다시 리턴 시키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잠잔다는 표현을 쓴 겁니다, 예수님께서 그래서 깨웠다는 표현을 썼습니다,
세 번째로 잠자는 케이스가 나사로이야기입니다 요한복음11장1절부터44절에 그기도 보면 나사로가 잠을 잔다, 그랬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또 죽었다는 표현까지 썼습니다, 11절에는 잠잔다, 그래놓고는 14절에는 죽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은 무덤에 있었지3일 된 사람으로 시체에 냄새가 난다고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내영이 빠져버리면 육이 섞는 모양입니다,
이 나사로의 경우를 봐도 그러니까 이 세 경우가 완전히 죽어가지고 내영과 혼이 낙원에 올라간 케이스가 아니고 이분들이 회생을 했습니다,
회생했다는 것은 옛 모습으로 그대로 다시 돌아왔다는 겁니다,
옛 모습그대로 육. 혼. 영이 돌아온 겁니다, 부활은 뭡니까,
예수님이 낙원에 올라가셨다가 부활체로 나타나신 겁니다,
부활체는 다릅니다, 예수님의 부활체의 모습은 첫 번째로 고린도전서15장42절에 섞지 않는 육이라고 그랬습니다, 두 번째로 고린도전서15장44절에 신령한 몸이라고 그랬습니다, 세 번째로 고린도전서15장43절에 영광스러운 몸이라고 그랬습니다, 네 번째로 고린도전서15장43절에 강한 몸이라고 바울이 표현을 했습니다, 다섯 번째로 예수님이 부활하셔가지고 시간과 공간과 여기에 제한을 받지 않았습니다, 벽을 뚫고 오시고 저 멀리서 대화하는 소리도 다 아시고 요한복음20장19절과26절 누가복음24장31절에 보면 예수님의 부활체의 모습이 회생된 사람과 다릅니다, 그런데 부활체의 여섯 번째로 누가보음24장39절에 보면 예수님이 부활체이신데 손발에 뼈가 있었습니다, 특수 뼈 같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제자들과 생선도 잡수셨습니다,
누가복음24장43절에 보면 육의 음식도 잡수셨습니다, 그렇지만 회생된 이분들은 과거100% 모습그대로 회복 받은 겁니다, 그런데 부활은 다릅니다,
그러니까 이세 분들이 회생했다는 것을 잊지 말아주시길 바랍니다,
이걸 가지고 기독교의 교단 몇 개를 보면 교단들 중에서 죽으면 무의식상태로 그냥 땅에 묻혀있다고 가르치는 교단들이 있습니다,
첫 번째 이분들은 기독교 교단도 아니지만 여호와의 증인입니다
여호와의 증인은19세기 말에 로셀이라는 사람이 만든 이단 종파데 이 사람들은144000에 대해서 강조합니다, 144000은 특별한 사람들인데 제사장그룹들이라는 겁니다, 하늘에 있는 영물들이라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사람들은 죽으면 낙원으로 직행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전에 이미 죽었던 사람들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분들 말에 의하면 낙원에 있는 겁니다, 아마도144000명 대열에 들어오는 사람들은 낙원에 그렇기 때문에 이 사람들이 이 안에 들어오려면 열심히 전도해야 됩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은 죽으라고 전도합니다, 집집마다 문 두드리면서 왜냐면 이 안에 들어오려고 그러는 겁니다, 그런데 이144000명 안에 들어오지 못하면 어떻게 되느냐면 이 사람들은 요한복음3장3절을 인용합니다,
너희들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나라를 볼 수가 없다는 겁니다,
다시 말하면 이 사람들이 죽으면 무의식상태로 땅에 그대로 있다는 겁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천년왕국이 끝나고 새 하늘과 새 땅이라고 그래서 우리가 말하는 저쪽세계가 아니고 이 땅을 새롭게 만든다는 겁니다,
그럴 때 무의식상태로 있던 이 사람들이 부활한다는 겁니다,
무의식개념입니다 그런데 여호와의 증인이 아닌 사람들은 어떻게 하느냐면 여호와의 증인이 아닌 일반사람들은 죽으면 다 무의식상태로 간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분들이 무의식상태로 갔다가 나중에 똑같이 부활을 하는데 천년왕국 때 부활할 때 회개하면 이 땅에서 영원히 살고 회개 안 하면 무의식상태로 들어갔다가 아예 없어져 버린다는 겁니다, 이게 지금 여호와의 증인에서 말하는 겁니다, 이 교단은 기독교 교단은 아니지만 참고로 알아두시길 바랍니다, 두 번째로 기독교 교단 하나가 무의식상태의 교리를 가르치는 교단이 안식교입니다, 안식교는 19세기 말에 엘렌 화이트(Ellen G. White)라는 여자가 창시한 교단인데 이분들이 가지고 있는 교리를 보면 대부분의 교리는 우리 정통복음주의교리와 그의 같습니다, 성서도 하나님의100%말씀이고 삼위일체도 똑같이 믿고 예수님의 육체적 부활 구원 주되심 다 우리하고 똑같습니다, 또 성화의 삶을 강조하는데 침례를 받는 것도 똑같습니다,
성만찬도 같고 성령의 은사도 같습니다, 또 십계명을 특별히 강조를 하고는 십계명을 심판의 기준으로 보는 겁니다, 또 이분들은 안식일을 그대로 구약의 안식일로 유대인이 지켰던 안식일인 토요일을 중요시하는 겁니다,
왜냐면 십계명 중에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켜라 그랬기 때문에 로마가톨릭이 일요일로 바꾸었거든요, 이분들은 토요일을 고집을 부리는 겁니다,
또 십일조도 강조하고 그리고 이분들은 성도의 삶을 보면 단순한 삶을 강조합니다, 사치하면 안 되고 세상음악이나 오락이나 하면 안 되고 또 육체도 성경에서 가르치는 건강을 유지하려면 성서에서 먹지 말라는 음식은 먹지 말아야 되고 성서에서 먹으라는 음식을 먹고 그렇기 때문에 불량식품을 절대로 못 먹게 하는 겁니다, 이분들이 자연식을 강조하는 겁니다,
알콜이나 담배나 마약이나 이런 것은 절대로 안 되고 동성애 동성결혼도 절대로 안 되고 그리고 예수님의 재림도 문자적으로 세계적으로 가시적으로 오신다는 것을 우리와 똑같은 이야기들입니다 그런데 이분들에게 천년왕국부터 이분들의 죽음에서부터 정통교단과 차이가 있습니다,
이분들의 죽음의 교리는 모든 인류는 죽으면 무의식상태가 된다고 믿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재림 때 모든 죽은 기독교인들이 부활한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재림 때 그리고 그 당시에 살아있는 기독교인들은 휴거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만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와 차이점은 뭡니까 교단마다 차이가 있지만 무의식은 우리와 다른 점입니다
그런데 천년왕국에 가서는 상당히 차이가 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천년왕국과 이분들이 이야기하는 천년왕국은 첫 번째로 지구가 완전히 파괴가 된다고 그랬습니다, 인간이 살 수 없는 상태가 된다는 겁니다,
이것은 비성서적인 겁니다, 두 번째로 천년왕국 때 사탄과 타락한 천사들이 지구를 점령한다고 믿는 겁니다, 그리고 천년왕국이 끝날 때 예수님과 성도들과 거룩한 예루살렘도성에 있는 하늘의 백성들이 지구로 내려온다는 겁니다, 천년왕국이 끝날 때 이때 죽어서 무의식상태로 있었던 사탄의 자녀들이 부활을 받고 심판받게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는 이분들이 지구를 새롭게 만들고 우주도 새롭게 만들고 그래서 우리인간은 새롭게 된 지구에서 영원히 산다는 겁니다, 이게 안식교의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모든 기본교리들은 그이 같은데 종말론에 와서 차이가 있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의 복음주의협회나 이런 사람들은 안식교를 이단이 아니고 같은 형제자매로 보는데 우리나라에도 절반 절반입니다,
그러니까 그분들이 볼 때는 마지막 때 재림론 이런 것들은 하나의 지엽적인 기독교의 교리들이지 각 교단마다 무 천년주의 후 천년주의 전 천년주의 또는 역사적 전 천년주의 세대주의 다 이런 부분에서 다르잖아요,
다르기 때문에 인정해주면 이단이 아니다, 라고 보는 그룹들도 상당히 많습니다, 세계적인 교회에서는 이분들을 이단으로 안 봅니다,
그런데 어떻게 보면 이런 부분에서 사람들이 다른 어떤 개신교그룹들보다도 더 깨끗한 그룹들입니다, 그래서 저도 이분들을 이단으로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함부로 주님이 사랑하는 사람을 내가 이단이라고 정제할 수 있습니까, 잘못하면 내가 뒤통수 얻어맞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그냥 주님자녀들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종말론에 가서 조금 차이가 있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되고 그다음에 무의식상태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렇게 단순하게 보면 여호와증인과 뭐가 차이가 있습니까, 이렇게 나오는데 차이가 많습니다, 여호와증인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안봅니다, 삼위일체를 안 믿으니까 그 사람들은 엄청난 이단입니다
제가 결론적인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오늘날 같은 하나님의 자녀들인데도 시각의 차이가 있음을 우리가 잠깐 섭력을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말씀을 볼 때도 차이가 있다는 겁니다,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들도 시각의 차이들이 다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하나님의 자녀들도 영적수준의 차이로 인해서 시각의 차이가 있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크리스천들 중에서 우리나라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세요, 같은 기독교인들인데 세월 호를 보는 시각의 차이가 있는 겁니다, 박근혜대통령의 이슈도 시각의 차이가 있는 겁니다, 북한을 보는 이슈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드를 보는 것도 대기업을 보는 시각 양극화문제를 보는 시각 타종교를 보는 시각까지 시각의 차이들이 있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 안에서 차이가 나는 것은 우리가 용납할 수 있습니다, 이게 굉장히 중요한 개념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시각이 차이가 나는 것은 용납이 됩니다, 왜냐면 영적레벨이 다르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 밖에서 기독교인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다시 말하면 예수 밖에서 종교다원주의개념으로 시각이 다른 것은 용납이 됩니까, 안 됩니까,
안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런 다양 속에서 우리는 첫째로 뭐냐면 예수 밖에서 이렇게 보느냐 예수 안에서 보느냐에 따라서 차이가 있는 겁니다,
같은 기독교인이지만 예수님의 재림 전에 징조들을 두가 측면으로 봅니다,
징조들을 비관적인 측면에서 보는 것이 성서적입니다
다시 말하면 전쟁이 일어날 것이고 기근이 일어날 것이고 여기저기에서 크리스천들이 핍박을 받을 것이고 많은 지진들이 일어나고 세상이 악해지고 이런 것을 비관적인 측면으로 보는 겁니다, 우리교회는 이 측면으로 봅니까,
그렇습니다, 이것은 복음주의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측면입니다,
무 천년주의와 전 천년주의 사람들이 보는 측면입니다 그런데 후 천년주의는 진보적인 사상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이 땅을 천국으로 만들자 하는 그룹들입니다, 이 그룹들은 WCC그룹들입니다, 이 그룹들이 훨씬 많습니다,
80%이상의 기독교인들이 이 그룹들입니다 이 세상을 천국 화시키자 이런 사람들은 예수님의 재림 전에는 이 세상이 낙원화가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인권을 존중하고 우리는 효모섹스 하는 사람들도 다 사랑해주고 이 세상은 하나님이 다 사랑하기 때문에 이런 낙관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는 기독교인들이 훨씬 더 많이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런 것을 분별할 수 있는 분별력을 우리가 가질 필요가 있는 겁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도 목소리가 큰 사람들은 어느 쪽 사람들입니까
저쪽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이 이쪽 복음주의적인 성서적인 기독교인들이 목소리가 없는 겁니다, 우리교회도 목소리를 안내잖아요,
왜냐면 역사는 누구의 장중에 있습니까, 예수님의 장중에서 지금 예수님이 움직이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 이 역사는 더 악해지고 혼돈스러워지고 사탄의 세력들이 더 강해지고 하나님의 사람들은 예수님이 사랑하는 사람들은 더 핍박받고 저쪽 코너로 몰리고 죽음까지 경험하게 되는 것이 예수님이 예언하신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저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겁니다, 그렇게 되게 되어 있는 것에 대해서 뒷짐 지고 있는 게 아니고 주여 빨리 오십시오, 그다음에 우리는 더 예수님을 증거 하는 일에 앞장서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지금 예수 안에서 NO1사람도 있고 NO2사람도 있고 NO3사람도 있는 겁니다, 그리고 예수 안에서 진보주의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고 보수주의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고 중간도 있고 그런데 예수 안에서라면 다 다르기 때문에 이 사람들을 우리가 안아주어야 되는 겁니다, 다 나와 같지가 않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 안에서 융합적인 사고방식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다양하게 만들어 놓으신 겁니다, 융합 적 사고방식을 가지고서 예수 안에서 이 융합 적 사고방식을 가지고서 나와 다른 크리스천들을 예수님 안에서 나와 다른 크리스천들을 그분의 믿음의 분량과 은사의 분량이 다르기 때문에 그걸 내가 안아줄 때 나에게 갈등이 없는 겁니다,
내가 그분들을 사랑해줄 수 있고 그분들과 교제할 수 있고 동역할 수 있고 섬기면서 때를 따라서 그분들의 마음 문을 열어서 가르칠 수도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런 패러다임 시프트(paradigm shift)가 필요한 겁니다,
나하고 다르다 예수 밖에서 다른 사람들은 우리가 상대하면 안 되지만 예수 안에서 같이 있는 사람들은 이런 차이점이 있다고 그래서 배척하면 안 되는 겁니다, 이런 융합 적 사고방식이 필요한 겁니다,
우리교회 성도님들은 어떤 그룹입니까, 우리는 세 번째 그룹으로 우리스스로 한번 올려봅시다, 그런데 내가 세 번째 그룹의 후보생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압니까, 세 번째 그룹이라는 것은 이렇게 융합 적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아주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들입니다 시각이 큰 사람들입니다
내가 지금은 아니지만 이런 후보생이다 우리 모두가 다 이런 후보생이 되었으면 하는 겁니다, 이런 후보생이라고 할 때 따라오는 특징들이 있습니다,
어떻게 우리스스로를 내가 이런 후보생이다, 라고 특징을 가지느냐면 나를 점검하면서 이게 뭐냐면 첫 번째 수준의 사람들을 보거나 두 번째 사람들의 수준을 보거나 할 때 저 사람들이 서로가 수준이 다르구나,
그래서 성서해석을 저렇게 하는구나, 라고 내가 먼저 보는 겁니다,
그걸 볼 수 있는 눈이 있는 겁니다, 보면서 아주 안타까워하는 마음이 생기는 겁니다, 저렇게 해서는 안 되는데 뭐가 더 있는데 왜 저 수준으로 이것을 이렇게 볼까 답답한 마음이 있는 겁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이미 세 번째 후보생이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그리고 뭐가 조금 없나 면서 갈급해하는 마음이 있는 겁니다, 그래가지고 생각을 자꾸 하는 겁니다,
새로운 것이 없나 기대를 해보고 찾아보고 세 번째 수준을 갈급해하고 배고파하고 목말라하고 그런 마음이 있는 겁니다, 그러다가 어쩌다가 세 번째 수준의 메시지나 가르침을 받으면 아주만족하게 하는 겁니다,
그리고는 시간가는 줄 모르고 더 듣고 싶어 하고 이런 마음이 드는 사람들 그러면서 영적시각이 자기도 모르게 변하는 걸 느끼는 사람들 패러다임 시프트(paradigm shift)를 경험하는 이런 사람이라면 어떻게 됩니까,
아! 세 번째 사람이 될 후보생이구나, 이렇게 진단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하다보면 가치관이 변하게 되고 세계관이 변하면서 거기에서 어떤 생각까지 가느냐면 이것을 내 주변사람들에게 이것을 가르쳐주어야지 보여주어야지 나누어야지 이런 마음이 들면서 거기서 또 한 단계 업그레이드되어 가지고 내 민족만이 아니고 디아스포라에게도 내가 이것을 전해야지 그다음에 디아스포라를 통해서 원주민 타민족에게도 이걸 전해야지 하는 이런 하트를 가지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아하NO2의 후보감이구나,
이렇게 한번 볼 수가 있는 겁니다, NO3후보생으로써 자기가 느끼면 이 사람은 어떻게 변하느냐면 이제는 소위 융합신학을 가지기 때문에 예수 안에서 나와 다른 사람들을 내가 수준이 다르고 볼륨이 다른 사람을 예수 안에서 다 수용할 수가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나라가 지금 복잡한 이슈들을 가지고 이야기할 때 예수 밖에서 이야기하는 사람은 우리의 관심거리가 아니지만 예수 안에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우리가 이렇게 안아 줄 수 있고 그러면서 이런 환경을 내가 지배할 수 있는 겁니다,
이런 환경을 뛰어 넘을 수 있는 겁니다,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이런 환경에 내가 빠져가지고 밤잠 못자고 고민하는 이런 사람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이 수준에서 벗어나서 주님의 뜻 안에서 이게 주님이 하시는 일이니까 모든 사람들을 특히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을 나하고 의견이 다른 사람들을 내가 안아주면서 이분들과 같이 교제하고 그럴 수 있습니다,
환경을 뛰어넘는 크리스천 예수 안에서 이런 사람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드리겠습니다,
예수님 예수님의 재림이 가까이 온 이때 세계정세는 복잡하고 특히 코로나19와 한반도의 정세가 복잡합니다, 주사파정권으로 인한 정치문제 양극화문제 대기업문제 등 이런 모든 일련의 사건들을 같은 크리스천들인데도 보는 시각이 다르고 같은 크리스천이라 하면서 서로 대적하고 서로 갈등을 가지고 이러한 세대에 저희들이 살고 있습니다, 주님 저희에게 지혜를 주시고 영적분별력을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이러한 일에 갈등을 가지지 않게 해주시고 당연한 수준이이라는 것을 깨닫고 역사의 주인이신 예수님의 장중에 있다는 것을 깨닫고 우리에게 맡겨주신 이방복음화사역에만 전념을 하는 우리 모두가 될 때 이 어려운 환경을 뛰어 넘는 믿음의 소유자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교회 공동체가 모두가 이런 믿음의 소유자가 되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황용현 목사님 설교내용영상으로 보세요.
https://www.youtube.com/watch?v=oAlqoOzk7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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