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지서17권 개관 33강, 예레미야 애가-2
예레미야 애가의 내용을 보면 첫 번째 뭐가 있느냐면 본인의 슬픔을 잠깐 비쳤지만 그리고는 본격적으로 어떤 말로 시작이 되느냐면 바벨론나라나 느부갓네살 왕 이 사람들이 나쁜 사람들이 아니다, 라는 말을 기록해놓았습니다,
예레미야애가를 쓰기 전에 예레미야서를 봐도 그런 말이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에게 하신 말씀이 예레미야야 너 민족을 괴롭히는 느부갓네살 왕 그 사람은 내 종이다 그런 말씀을 하십니다,
예레미야43장10절에 내종이다 이 말은 뭡니까 역사의 주인이 나다 예수님이 지금 여호와 이름으로 그래서 내가 그 사람을 내 뜻을 이루기 위해서 이렇게 권력을 주고 나라를 이렇게 강하게 만들어서 내 사랑하는 내 민족들은 창조목적의 중요성을 가르쳐주기 위해서 이런 일들을 벌리고 있단다,
그리고 느부갓네살 왕도 지금 악역을 하고 있지만 다 아브라함의 후손이다 아브라함의 처 중 한분인 하갈의 아들 이스마엘의 두 번째 아들 게달의 후손이다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 바벨론 분들은 내가 너희들을 창조목적을 교육받기 위해서 훈련시키는 과정 속에서 사용되는 도구들이다 그러는 겁니다, 이 개념을 예레미야가 깨달은 겁니다,
그래서 성경구절을 드리겠습니다, 예레미야애가1장12절에서15절 또 2장1절에서8절, 2장17절 또는22절, 4장11절, 1장5절, 또1장8절9절, 4장13절, 5장7절,16 이 모든 내용 속에 이분의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예레미야애가 이 책이 처음에는 애가로 시작이 됩니다, 1장1절2절을 보면 애가로 시작이 됩니다, 그런데 끝을 맺을 때는 회개로 끝맺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5장21절22절에 이런 시작과 끝을 가지고 중간에 쓰여 있는 내용들을 보면 예레미야애가는 여호와하나님을 찬양하는 내용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크고 은밀한 비밀을 이분이 본 후에 인식의 변화가(패러다임 시트 Paradigm shift)온 겁니다, 어려운 역사적상징속에서 세상을 보는 시각의 변화가 온 겁니다, 이것도 우리가 배워야 되는 하나님이 주시는 메시지입니다
그래서 이분에게 이런 어려운 상황 속에서 자기 민족이 지금 다 포로가 되었고 예루살렘성전이 무너지고 이제는 기될 때도 없는 그러한 상황 속에서 자신은 또 이방나라 애굽에 가서 이렇게 외롭게 앉아있는 정말 처참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이 이런 크고 은밀한 비밀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하신 후에 이분에게 이런 고백을 하게 합니다 그래서 고백을 하는 내용들이 여호와는 우리 민족의 소망이시다, 라는 표현을 합니다,
3장21절 또 24절25절에 그다음에 여호와는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3장22절에 계속해서 여호와는 변화지 않는 신실한 분이시다
3장23절에 계속해서 여호와는 구원의 하나님이시다
3장26절에서 3장22절에서26절 내용을 읽겠습니다,
22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지금 그의 진멸상태에 있는데 완전히 진멸상태로 들어가 버렸는데 나라도 없어지고 자기네가 섬기던 예루살렘성전도 무너져버렸고 백성들이 다 이방나라로 노예처럼 끌려가버린 이런 상황 속에서 성령님이 이분에게 그러시는 겁니다, 패러다임 시트가 오니까 소망을 집어넣어주시고 우리 민족이 진멸되지 않는 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이분이 여호와를 찬양하시면서
23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 예레미야가 묵상을 하면서 자기 민족의 장례를 묵상하면서 주님과 대화를 해보니까 아침마다 새로운 메시지를 자기에게 주신다는 겁니다,
민족에 대하여 역사의 대하여 그리고는 예수님께 고백하는 겁니다,
24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그를 바라리라 하도다 이렇게 바라보는 자에게 선을 베푸시는 것을 저는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25기다리는 자들에게나 구하는 영혼들에게 여호와는 선하시도다 26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
그러시는 겁니다, 잠잠히 기다리겠습니다, 이게 굉장히 중요한 말입니다
여호와의 구원을 완전히 인정하는 자는 어려운 상황에 있을 때 고난이 있을 때 좌절이 있을 때 앞뒤에 어떻게 행해야 좋을지 모르는 그러한 어려운 상황에 있을 때 우리가 예수님의 신실함을 예레미야처럼 고백하고 성령님이 그렇게 인도하십니다, 그리고는 잠잠히 기다리게 하시는 엄청난 믿음의 표현입니다 그냥 잠잠히 기다리는 겁니다,
그런데 기다릴 수 있습니까 지금 밖을 보면 예레미야 입장에서 보면 자기가 지금 애굽이라는 땅에 와서 앉아있고 모든 것이 낯 설은 외로운 곳에서 또 과거를 들여다보면 과거 우리민족을 노예화시킨 민족이 주전1900년 정도에 그리고400년 있다가 주전1500년경에 노예에서 해방되었잖아요,
이분이 지금 주전 약600년분인데 약1300년 전에 우리 민족을 노예화시켜서 엄청나게 고생시킨 이 애굽이라는 이 나라에 가서 이분이 지금 외롭게 혼자 앉아 있는 겁니다, 우리입장에서 보면 그렇지 않기를 바라지만 남북이 풍지 박산이 되고 우리민족이 이 나라 저 나라에 다 흩어지고 지금 일본 땅에 앉아가지고 일본 땅이 그분들에게는 애굽이나 비슷하겠습니다,
일본 동경에 조그만 쪽방하나 빌려서 앉아가지고 내 민족이 다 흩어지고 나라도 없어지고 이런 때가 오지 않기를 바라지만 그런 상황이나 마찬가지인 이때 예레미야가 예수님이 역사의 주인 되심을 주권자이심을 이분이 깨달은 겁니다, 깨닫고는 이것이 내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란 것을 깨닫고 이제 이 사건을 통해서 내 민족이 더욱 수직계명을 더 잘 지킬 것을 소망하면서 수직계명이 얼마나 중요하다,
라는 것을 비추기 위해서 내 민족을 이렇게 소용돌이 속에 집어넣었구나,
그러니까 잠잠히 기다리는 것은 어떤 믿음이냐면 하나님의 예정된 때가 있습니다, 교육을 시키는데도 기간이 있습니다,
이 교육기간을 1학년부터6학년까지 잘 견뎌나가는데 5학년이나6학년 정도 되었을 거라고 생각할 수도 이분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기간이 이제 끝날 때까지 이분이 하실 일을 다 하시고는 마칠 것이다,
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그냥 막연히 잠잠히 기다리는 것이 아니고 이분이 지금 이 안에서 움직이고 계시구나, 라는 것을 믿고는 그냥 잠잠히 기다리는 이 믿음이 우리에게 적용이 됩니다,
어려울 때 내 실력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어려운 사방을 보면 사면초가 같은 그러한 상황 속에서 우리가 예수님 저는 예수님사랑하려고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는데 왜 이런 어려움이 나에게 있습니까,
그걸 가지고 예레미야33장3절 이 말씀 속에서 숨겨진 뜻이 무엇입니까
라고 이분에게 깊이 대화를 하면 그 속에 숨겨진 내용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저 잠잠히 기다리는 연습이 믿음의 복된 자의 사인 중에 하나라고 생각이 됩니다, 왜냐면 이 어려운 가운데 사랑하시는 모태에서 형성되기 전에 이미 다 알고 계셨던 이분에게 염체 없는 이 소용돌이 속에서 이분에게 이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애야 조용히 그냥 기다려라 기다리는 것이 오래 참는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막연히 오래 참는 게 아니고 우리는 뒤에 깔려있는 굿 뉴스 소망을 바라보면서 오래 참는 겁니다, 신실하신 예수님이 때가 되면 이분의 계획에 어느 정도 성취가 되면 그냥 모든 게 없었던 것처럼 깨끗하게 다시 회복시켜준다는 믿음이 있었고 또 하나님이 그런 분이시라는 것을 예레미야가 깨달은 겁니다, 그런데 이걸 깨달으려면 예레미야도 그냥 편한 상황 속에서는 깨닫지는 못합니다, 우리 피조물들의 약한 부분입니다
그러니까 사랑하는 분들에게는 지금 남 유다 분들에게는 이런 어려움을 준 것처럼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나로 하여금 우상을 섬기게 하고 의도적으로 나로 하여금 코를 낮추게 놓게 한 다음에 혼쭐을 내시고는 그다음에 스스로 깨닫게 인도하고는 때가 되어 다시 회복시켜주고 그런 트레닝 교육 이것이 꼭 필요합니다, 지나고 나면 이게 이분이 하셨구나,
라고 고백을 듣기를 원하시는 이런 훈련 우리에게 이런 훈련들이 항상 있어왔습니다, 그런데 이 훈련이 구약에서 이스라엘사람들의 훈련인데 이 훈련을 이렇게 들여다보면 나중에 더 자세히 보게 될 터인데586년 사건이 일어날 것을 다 예언했습니다, 그런 것이 일어날 것을 선지자들을 통해서 어느 선지자들을 통해서 예언하였습니까, 첫 선지자가 요엘 선지자를 통해서 주전830년에 예언했고 미가 선지자를 통해서 주전750년에서 주전686년까지 586년 사건을 예언했고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주전739년에서 주전630년까지 586년 사건을 예언했고 스바냐 선지자를 통해서 주전630년에 586년 사건을 예언했고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 주전626년에서 주전586년 사건을 예언하게 하시고 그리고는 하박국 선지자를 통해서 주전586년 직전의 사회상에 대해서 보여 주시고 그리고는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서 주전593년에서 주전565년에 586년 사건을 말씀하게 하시고 이런 모든 일들을 미리 다 알려주었잖아요, 바벨론에 의해서 586년 사건이 일어날 것을 다 알려주시고는 그다음에는 70년 동안 포로 생활할 것도 다 알려주었습니다,
에스겔25장12절,29장10절에 정확하게 70년 있다가 다시 회복될 것을 그러니까 하나님은 어려움을 주고는 회복이 꼭 따라옵니다,
기가 막히게 여기에 대한 소망이 우리에게는 있습니다,
꼭 우리의 삶 속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매를 때렸다가 꼭 회복이 따라옵니다,
회복이 그래서 70년 예언을 한 것이 그대로 성취가 되는 겁니다, 역대하36장21절에 성취를 시키는데 누구를 통해서 성취시키느냐면 고레스 왕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을 사용하셔서 성취하시는 장면을 우리가 볼 수가 있습니다, 이란 사람들은 아랍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고레스 왕도 하나님께서는 내가 기름부음을 준 나의 종이라고 그랬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사야45장1절에 그러니까 역사의 주인 되시는 예수님이 이방나라 왕도 기름을 부으셨다는 겁니다, 우리 알다시피 바로 왕도 여호와가 모세에게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그분을 강퍅하게 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사람들을 노예화하고 그분들을 보내주지 않았다는 겁니다, 400년 동안 그리고 출애굽 직전에도 아홉 가지 이적을 베풀 때 이분을 강퍅하게 했기 때문에 이분이 이스라엘사람들을 석방시키지 않았다는 겁니다,
출애굽기7장3절부터4장21절에 내가 바로 왕을 강퍅하게 했다는 겁니다,
이런 걸보면 지금우리나라는 전 세계에서 가장 복음을 만방에 전하려고 하는 복 받은 나라입니다 잔 세계에서 그런데 조그만 이 나라 주변에 강퍅한 왕들이 진을 치게 하셨습니다, 우리 주변에 강퍅한 나라와 그 백성들이 진 치게 하신 것에 대하여 겁내면 안 되는 겁니다,
우리는 누구의 장중에 있습니까, 예수님의 장중에 있는 겁니다,
왜 이런 강퍅한 왕들을 우리 주변에 준비하였을까요,
우리 보고도 그 강퍅함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께 무릎을 꿇고 예수님을 의지하라고 이런 강퍅한 사람이 없으면 우리민족은 누구나 마찬가지로 우리 피조물들은 예수님께 의지 하지 않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스라엘사람들도 유대사람들도 이 어려운 가운데서도 강퍅한 왕들이 지배하는 이 사회에서도 대부분의 하나님백성들은 여호와를 의지 하지 않았습니다, 그 어려운 가운데서도 그런데 소수의 남은 자들이 그들만이 예수님을 의지했습니다, 이 원칙이 그대로 오늘날 우리에게도 적용이 되는 겁니다, 우리나라도 크리스천들이 많고 교회들도 많고 기독교계가 어느 정도 영향력도 있는 사회지만 주변의 모든 강퍅한 왕들을 보는 시각의 차이가 있는 겁니다, 정말 예수님의 장중에서 이분들을 허락하셨다,
라고 믿는 크리스천은 아주 소수입니다 만약에 그런 이야기를 하면 교회 안에서도 하나님의 자녀들 사이에서도 저 사람 잘못되었다,
라고 비난받는 그런 사회가 우리나라사회입니다 똑 같습니다, 유대사람들도 그 당시에 마찬가지로 우리가 죄를 지어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죄를 지어서 이렇게 되었다, 라고 보는 거기서 한 차원 더 올라가서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목적을 훈련시키기 위해서 바벨론을 불려서 우리에게 교육시키려고 한다는 그런 사고를 가졌던 사람들은 그의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예레미야도 여기 애가에서도 그것을 지금 이야기하는데 예레미야애가의 내용을 수용하는 사람들은 많지가 않았습니다,
오늘날도 우리 한국의 어려움을 기독교계가 어떻게 보느냐면 소위 인과응보 또는 세속적인 사고방식으로 세상 사람들이 보는 눈과 비슷한 그러한 수준으로 보는 분들이 많고 우리 하나님이 예수님이 재림 전에 우리 민족을 세계복음화에 사용하시려고 정신 바짝 차리게 하고 예수님난 의지 하도록 만들기 위해서 이 주변을 이렇게 타이트하게 만드셨구나,
라고 보는 사람의 숫자는 많지가 않았습니다, 또 많으면 안 됩니다,
여러분들은 이 시각을 가져야만 되겠습니다, 세상을 보는 역사를 보는 시각의 차인데 특별한 사람들에게는 이런 업그레이드된 시각을 주시는 겁니다, 예수님이 그런 사람들을 사용하셔서 역사의 무대에서 역사를 주관케 하십니다, 그러니까 예레미야 같은 사람도 그 당시에 역사를 주관케 하는 아주 중요한 인물 중 한사람으로 등장시켜서 그 사람을 통해서 이런 서신을 쓰게 한 겁니다, 그런데 이 원칙이 그 당시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고 우리 인간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적용되어 왔던 겁니다,
그때부터 시작해서 나머지 구약기간 신약2000년 기간이 이 원칙에 의해서 역사가 진행되어 왔던 겁니다, 잠언3장5절6절 말씀을 제가 가끔 인용하지만 이 말씀이 많이 적요되기를 항상 간구하면서 이 말씀을 제가 묵상합니다, 이것이 지금 우리나라의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예레미야도 이 말씀을 그대로 적용했던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이 말씀은 솔로몬이 잠언을 쓰시면서 했는데 솔로몬이 이 말씀을 해놓고는 자기가 이 말씀대로 나중에 끝을 못 맺었습니다,
인간의 나약한 점이 주님이 또 이렇게 폭로시키십니다,
솔로몬이 무슨 고백을 했습니까, 5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6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했습니다, 이 말씀이 굉장히 중요한 말씀으로 이 말씀이 우리를 떠나면 안 됩니다 마음을 다해서 여호와를 의뢰하라 다시 말하면 너 삶의 생사화복은 여호와가 쥐고 계신다, 또 크게 봐서 지금 역사에 모든 주관자가 예수님이시다, 라는 것을 고백하라는 겁니다,
이걸 먼저 고백하라고 인정하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게 잘 안되잖아요,
그러니까 우리가 예레미야애가를 우리가 묵상하면서 시대적인 배경을 우리가 이렇게 묵상하면서 이 묵상하는 목적이 예레미야는 이 모든 어려운 상황을 이 원칙에다가 대입시켰구나,
그러니까 나의 어려운 상황들 우리나라의 어려운 상황들 이런 것들로 예수님의 장중에 있습니다, 라고 고백을 끊임없이 하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은 모든 기독교인들은 못합니다,
예레미야레벨의 하나님의 자녀들인데 하나님을 원망하였습니다,
왜 이렇습니까, 똑같이 오늘날도 소수의 사람들이 예레미야 같은 이런 접근방법을 가지도록 성령님이 이끄시는 겁니다,
그러면 이런 마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그다음 절에 뭐냐면 내 명철을 의지하지 않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내 상식. 내경험. 내 지식. 내 아집. 내 스타일. 내 가치관 이것들을 자꾸 떨어뜨리는 연습을 해야 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사람을 볼 때 이런 걸 우리가 깨달은 사람들은 그분이 입을 열고 말하는 것을 보면 이분은 아직도 자기 고집이 세구나 자기스타일이 있구나, 자기이성이 살아 있구나, 나쁜 게 아닙니다,
일반적인 기독교인들 대부분이 다 그렸습니다, 자시스타일이 있는 겁니다, 거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전적으로 예수님의 장중에서 지금까지 왔습니다, 라는 이것을 철저하게 고백을 못하는 겁니다, 내가 잘나서 내가 운이 좋아서 내가 노력을 해서 이렇게 앞장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이런 테두리 안에 안 들어오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예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구나, 라고 우리가 그렇게 한번 보는 겁니다, 왜냐면 자기 머리에 의존하는 겁니다, 자기경험 자기지식 특히 교육받은 사람들이 그럽니다, 또 성격이 강퍅한 사람들이 그럽니다,
자기고집이 강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데도 그것을 성경 여기저기에서 골라가지고 성경말씀 뽑아가지고 자기 고집에다가 플러스시킵니다,
그런 사람을 대하기가 정말 힘듭니다, 그것을 고치려면 못 고칩니다,
그러니까 그런 사람이 이런 사람이구나, 저런 사람이구나,
빨리 파악하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파악해서 이 사람은 이 수준이구나,
라면서 어느 정도 이해해주고 그래 너 잘났다 이렇게 해주어야 합니다,
그것가지고 싸움하면 안 됩니다 싸움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이곳은 영적 분별력을 연습시키는 곳입니다,
그래서 제 앞에 함부로 말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저는 그 사람이 가까이 오면 그 사람수준을 읽습니다, 이 사람은 어느 수준이구나,
여러분들도 똑같이 그런 영적지혜와 분별력을 가지도록 주님이 지금 이런 세미나를 통해서 이끄신다, 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러면서 주님 감사합니다, 이렇게 이런 세미나를 하면서 나의 패러다임 시프트가 오는 군요, 사고의 전환이 오는 군요 가치기준에 변화가 오는 군요 세계관의 변화가 오는 군요 이렇게 다가오는 사람들은 시간관과 물질관의 변화까지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잠언3장5절6절 말씀 내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이래놓고 여기서 끝나는 게 아니고 이런 사람에게 그대로 따라 오는 게 있습니다,
뭐냐면 범사에 그를 인정하게 되는 겁니다, 굉장히 중요한 개념이 여기에 숨겨져 있습니다, 범사라는 것은 좋은 일이 있을 때나 나에게 불리한 일이 있을 때나 내 기분 상한 일이 있을 때나 그럴 때 마다 범사에 그를 여호와를 인정하라 이 말은 범사에 이것이 예수님의 장중에서 이렇게 하는구나, 내가 지금 어려운 상황에 지금 처했습니다, 내가 지금 실수를 조금 했습니다,
그래서 어려움이 왔습니다, 그럴 때도 하나님이 허락하셔서 나에게 이런 어려움을 주시는구나, 감사합니다, 저 이제 배웠습니다,
말하면 빨리 이 문제 해결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걸 인간적으로 해결하려고 하면 꼬이고. 꼬이고 그런 경우를 많이 경험하였을 겁니다,
저도 많이 경험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한 단계 업그레이드 해 가지고 예수님의 뜻이 계셔서 나를 바벨론포로로 만드셨구나,
이렇게 하고는 예레미야는 이미 그것을 본 겁니다,
그러니까 감사하고 그분을 인정을 했던 겁니다,
예레미야애가가 실은 애가가 아니고 예레미야찬가 이렇게 우리가 바꿀 수도 있다고 보는 겁니다, 애가 속에서 찬가가 흘려 나오는 겁니다,
상황은 애가인데 찬가가 흘려 나옴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솔로몬이 그러잖아요, 범사에 모든 걸 다 예수님이 하시는구나, 라고 할 때 예수님이 나를 손볼 필요가 없는 겁니다,
가르칠 필요가 없는 겁니다, 깨달았는데 그러니까 내 길을 형통하게 하리라 그러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은 예수님이 의도적으로 우리 삶을 꼬부랑길로 만드시는 겁니다, 꼬부랑길만이 아니고 그것도 언덕으로 올라가는 꼬부랑길입니다, 그러니까 언덕으로 올라가는 꼬부랑. 꼬부랑 이런 힘든 길을 예수님이 평지를 만드시고 어떤 때는 밑으로 내려가는 직선 길로 만들어 주겠다는 겁니다, 다시 말하면 훈련이 필요 없다는 그 소리나 마찬가지입니다 그저 만사형통 이러다 보면 사람이 더 교만해지는 겁니다,
그러니까 훈련된 사람은 만사가 형통하면 어떻게 됩니까,
이걸로 평안하지 않고 예수님. 예수님 나를 왜 만사형통하게 하십니까,
너무나 고맙습니다, 그래놓고는 그 만사형통 된 것을 예수님의 영광을 위해서 마음껏 사용하시는 겁니다, 여기서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겁니다,
그런 사람이 아닌 사람에게는 계속해서 꼬부랑길을 인도하실 수밖에 없는 겁니다,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어떨 때 부면 평생 꼬부랑. 꼬부랑 하다가 주님 앞에 가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런 사람이 훨씬 많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어려운 꼬부랑 길 경험을 하면서 이걸 깨달은 사람으로 우리가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가 이 고백을 애가에서 쫘악 하시는 것을 우리가 보게 됩니다, 알다시피 우리가 지난번에 예레미야서를 공부할 때 예레미야는 성품이 이분이 소위 금 수저 집안이었기 때문에도 그렇지만 산전수전을 겪지 않았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성품이 아주 소심했다 그랬습니다,
소심한 이분에게 여호와께서 그랬습니다,
너 이제 내가 전하는 메시지를 너가 전하여야 되는데 용감해라 강해져라 자꾸 말씀하셨습니다, 똑같이 우리도 소심하지만 우리를 예레미야처럼 사용하시려면 우리도 모르게 성령님이 우리를 예수님을 향해서 강해지고 메시지를 향해서 용감해지는 그런 변화를 예레미야에게 주셨던 것처럼 주실 것이고 시각의 변화도 가지게 하고 지난번에 우리가 공부했지만 예레미야가 처음에는 이런 자기 민족의 어려움을 보면서 4가지의 불만을 토로했던 것을 우리가 공부했습니다, 이분이 불만스러워했습니다,
왜 이렇게 하나님이 사랑하는 내 민족을 이렇게 어렵게 합니까,
그리고는 이분이 네 가지의 마음의 슬픔이 있었습니다,
이것 때문에 그런 과정을 겪게 하셨던 것처럼 하루아침에 예레미야애가에 이런 고백을 한 것이 아니고 이런 과정들이 있었던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로 이런 과정들을 겪게 하시면서 날로. 날로 예레미야애가에서 고백하게 했던 그 큰 그림 내가 너에게 크고 은밀한 것을 보여준다고 하셔서 이분이 애가를 쓰셨을 때 그것을 보신 겁니다,
큰 그림을 보신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의 주인이 되시는 예수님을 찬양할 수 있었습니다, 그렸습니다,
이것으로 예레미야애가를 마무리하겠습니다,
#황용현 목사님 설교내용영상으로 보세요.
https://www.youtube.com/watch?v=Wpom6sYtsD8
'황용현목사 강해설교 녹취록 > 선지서17권의 개관' 카테고리의 다른 글
35강, 학개서의 배경 (0) | 2020.04.26 |
---|---|
34강, 이스라엘달력과 절기들 (0) | 2020.04.18 |
32강, 예레미야 애가(1) (0) | 2020.04.18 |
31강, 에스겔(5) (0) | 2020.04.12 |
30강, 에스겔(4) (0) | 2020.04.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