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용현 목사님 칼럼

22년7월9일

변명섭 2022. 7. 9. 17:31

지난주일 설교에서 야곱(Jacob)이 새 이름 이스라엘(Israel)을 받은 이야기를 했습니다(창32:28,35:10). 그가 새 이름으로 이스라엘을 받은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철저한 창세전 디자인 속에서였습니다. 이 창세전 디자인을 요한에게 보여 주셨습니다(계12:1). 요한에게 '작은 책'을 먹게 하여, 영성을 업그레이드시키게 한 후(계10:10), 이 새 이름을 주셨습니다. 이 새이름 이스라엘이, 바로 해(sun)로 옷 입은 여자(사40:2)였습니다. 그가 달(moon)을 발밑에 두고, 12별(stars)의 면류관을 쓴 여인이었습니다. 장차 이 여인의 후손이 '12지파'로 되어(창49:28), 이들이 여호와를 버리고 '바벨론 종교'를 믿거나, 이들과 혼합하여 여호와를 섬기는 '배교행위'(apostasy)를 할 것이며, 그로 인해 아브라함의 다른 후손들인 '아랍인들'에 의해 혼쭐이 날 것을 창세전에 디자인하셨습니다. '역기능적 교육방법' 입니다. 이런 교육방법으로 '창조목적의 중요성과 절대성'을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가르치려는 디자인입니다. 이것이 창세전 디자인입니다. 이 디자인에 따라, 하나님께서 세(3) 신비들을 예비하셨음을 공부했습니다. (1)하나님의 신비(고전2:7; 롬16:25-26; 롬1:3-4; 계10:7, 창세전 십자가 예정), (2)그리스도의 신비(엡3:4, 신32:15-21, 창세전 유대인 눈 감김 예정), (3)천국의 신비들(마13:11, 35, 창세전 이 세상 7천년 창조목적학교와 구조 예정)입니다.

 

이 창세전 디자인된 세(3) 신비들을 인간 역사 속에서 실현하시기 위해, 조교 팀으로 아브라함(주전2166-1991), 이삭(주전2066-1886), 야곱(주전2006-1859)을 선택했습니다. 야곱(Jacob)이 형 에서(Esau)를 피해 하란(Haran)으로 가서, 4명의 부인을 만나, 12명의 아들을 얻게 되고, 이들이 12지파(창49:1-28)를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창세전 12별의 면류관을 쓴 여인(이스라엘)' 디자인'(계12:1)의 성취입니다. 이것을 성취하는 과정에서, 이름도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바꾸게 하셨습니다(창32:28,35:10). 이스라엘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그가 예수님께 밤새 매달려, '아브라함의 복'(창12:2-3)을 달라고 애걸했는데, '드디어 이 복을 받아낸 자'라는 의미입니다. 이 '아브라함의 복'이 무엇입니까? 두(2) 단계로 되어 있습니다. (1) '조교 팀이 되는 복', (2) '교장(예수님)이 탄생되는 도구가 되는 민족이 되는 복' 입니다. '이스라엘' 이란 이름 속에 이 두(2) 복이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이 '새 이름 이스라엘'을 주시면서, 이제부터 더 이상 야곱 이름 쓰지 말고, 이스라엘 이름만 사용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창35:10). 왜 이런 명령을 하셨을까요? 이름 속에 담긴 의미 때문입니다. 야곱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속여서 빼앗은 자' 입니다. 자신과 자신의 가족의 행복을 위해, 이웃을 속여서라도 손해 보게 하여, 이득을 취하는 '이기주의자' 입니다. '이기주의적 병아리 시각 자' 입니다. '이타주의를 담고 추구하는 아브라함의 복'을 받을 그릇이 아닙니다. 이런 분이 '아브라함의 복'을 담는 '큰 그릇'이 되려면, 이름부터 바꿔야 합니다. 그 이름이 바로 '이스라엘' 입니다. 이후부터 야곱이라는 이름은 입 밖으로 내면 안 됩니다. 이스라엘로 불리면서 '아브라함의 복'을 담는 '큰 그릇'으로 서서히 변모되어야 합니다. 이때부터 예수님 초림까지 2천여 년 간, 이스라엘이 온갖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조교 팀으로 훈련 받아오면서, 조금씩 그릇 사이즈를 크게 해왔습니다. 예수님 초림 때에도, 이스라엘이란 이름은 가졌으나, 그 그릇이 아직 적어서 예수님을 담지 못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소수 메시아닉 유대인만 담고 있습니다. 이들이 계속 이 '그릇 크게 만들기 훈련' 과정 속에 있습니다. 아직 이들이 '아브라함의 복'을 온전히 담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 온전히 담지 못할까요? 창세전 디자인 된 '그리스도의 신비'를 성취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난번 설교에서 '예수님의 성품'에 대해 공부했습니다. 야곱을 이스라엘로 만드시는 과정에서 예수님의 심정이 어떠하셨을까 살펴보았습니다. 창세전 디자인을 성취하시려는 큰 그림 안에서, 예수님이 야곱을 어떻게 다루셨는지 말입니다. 예수님이 야곱을 방문하셨을 때, 야곱의 당면 문제가 있었습니다. 에서의 위협에서 보호받거나, 해결 받아야 하는 다급한 때였습니다. 이런 때에 예수님이 야곱을 방문했습니다. 예수님이 야곱의 이 다급한 당면 문제를 해결해 주시려고, 그를 방문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야곱을 향한, 창세전에 디자인하신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시기 위해, 그를 방문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이 예수님의 마음을 몰랐습니다. 야곱은 예수님이 자신의 이 힘든 당면 문제를 해결해주실 분으로 기대했습니다. 자신에게 아브라함의 복을 내려달라고 애걸했습니다. 그러면 에서와의 문제가 해결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이 이 야곱의 마음을 아셨지만, 예수님은 일방적으로 자신이 계획하셨던 것을 진행하셨습니다. 환도 뼈의 근육에까지 상처주시며, 강제로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꾸셨습니다(창32:28). 창세전 디자인(계12:1)을 성취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과 야곱의 만남이 바로 이 창세전 디자인을 성취하는데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정하신 때(히. eth, 헬. Kairos, 영. time, 전3:1-8)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만남의 스토리 속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마음을 조금 읽을 수 있습니다. '목표 지향적인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창세전에 삼위하나님이 목표를 세우셨습니다. 이 목표 성취를 직접 수행하시는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그는 이 목표 성취하시는데 있어, 한꺼번에 단숨에 하지 않으시고, 단계적으로 발전적으로 수행하십니다. 피조물의 역사 속에서 눈높이로 상황 화(contextualization) 하십니다. 오래 참으시면서, 집요하고 끈기 있게, 적극적으로 진행하십니다. 삼위하나님의 창세전에 세우신 뜻을, 한 치의 착오와 오차 없이 진행하시고, 반드시 성취하십니다. 이와 같이 앞으로 우리 눈앞에서 전개될, 예수님의 계획하시고 약속하신 재림 사건도, 예수님께서 이런 마음으로, 서서히 하나하나, 단계적으로 진행하고 계심이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때가 차면, 반드시 성취하실 것입니다. 이사야(주전739-680)에게 자신의 초림을 앙망(히. qavah, 영. to look for patiently, 사40:31)하라고 명령하셨듯이, 예수님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자신의 재림을 앙망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야곱의 성품이 필요 합니다.

 

예수님의 성품 중, 야곱에게서 발견되는 것이 있습니다. '목표 지향적이며 집요함과 적극성' 입니다. 에서(Esau)에게는 발견되지 않습니다. 이 성품 때문에 야곱을 사랑하셨고, 이 성품이 약했던 에서를 미워하지 않았나 봅니다(롬9:13). 그런데 당시 야곱은 '이기주의적 병아리 시각 자'였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로 이름을 바꾸게 했습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 속에 '이타 주의적 독수리 시각 자'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이름 속에 또한 '배도 행위자'의 의미도 동시에 숨겨있는 게 문제입니다(사40:2; 계12:1). 신기하게도 대부분 이스라엘 분들이 이 이스라엘 이름에 숨겨진 대로 배도행위를 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 중 '소수 남은 자'(remnants, 사1:9; 롬11:5) 만이, 이 배도 행위를 하지 않았던, '진정 이스라엘 사람'이었다는 사실이 경이롭습니다. 이들이 야곱의 성품을 가지고 성실히 여호와 예수님만 섬겼습니다. 구약에서 발견되는 이스라엘의 역사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신약 기독교인들의 '예표'(type, 롬5:14)이며 '본보기'(example, 고전10:6)입니다. 예수님 재림 전 '추수 꾼 성도'에게도, 이 '야곱의 성품'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이 야곱을 사랑하시고 사용하셨듯이, 재림 전 시대에도 이런 '야곱의 집요함과 적극적 성품'을 가진 자를 사랑합니다. 그래서 야곱을 사랑하셨고 사용하셨습니다. 이런 성품의 바탕 위에,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주셨습니다. 이는 야곱의 목표 지향적, 집요성, 적극성 성품은 유지하되, '이기주의적 병아리 시각'을 버리고, '이타 주의적 독수리 시각 자'가 되라는 이름입니다. 그런데 '소수남은 자'만이 이 기대에 부합한 '진정한 이스라엘 사람들' 이었습니다. 나머지 이스라엘 사람들은 딴 짓을 했습니다. '아브라함의 복을 전수 받는 이름'은 가졌지만, 딴 짓을 한 분들입니다. 그러기에 '소수 남은 자들'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이스라엘 분들'이, 예수님의 초림을 '앙망'(qavah, to look for patiently)하지 않았습니다. 이 가르침이, 신약시대 성도들, 특히 재림 전 성도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이 시대에 '예수님의 재림을 앙망하는 분'은, 진정 '남은 자 반열'에 들어온, 딴 짓 하지 않는 '진정한 이스라엘 사람'이라 믿고 싶습니다. '예수님의 혼인잔치에 참여하는 신부들'(마24:37-25:46; 계19:7-10)입니다. 우리 모두 이 반열에 들어옵시다.

황 용 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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