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에는 아브라함의 자녀를 호칭하는 대표적 세(3) 이름이 있습니다. '히브리인', '이스라엘인', '유대인' 입니다. 요즈음 우리가 이 세(3) 이름들에 대해 공부하고 있습니다. 지난주일 설교에는 "유대인이란 누구인가?"에 대해 공부했습니다. '유대인'을 히브리어로 'Yehudi', 그리스어로 'Ioudaios/oi', 영어로는 'Jew/Jews'라 표기하며 부릅니다. 성서에 '히브리인'이란 표현이 총 46회 기록되어 있습니다. 구약 31회, 신약 15회입니다. 반면 '이스라엘인'은 무려 3,074여 회나 많이 기록 되어 있습니다. 구약에 약 3,000회, 신약에 74회입니다. 이와 함께 '유대인'이란 표현이 총 265회입니다. 구약에 82회, 신약에 183회입니다. 이 세 이름 중, '이스라엘인'의 표현이 가장 많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인'과 '이스라엘인'의 이름이, 주로 구약에 많이 표현되어 있는데, 반면 '유대인'이란 표현은 주로 신약에서 사용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신약 183회중, 요한복음(78회)과 사도행전(74회)에 집중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머지 30회는, 마태, 마가, 누가 복음에 합하여 15회, 바울서신에 15회뿐입니다. 그러니 '유대인'이라는 표현을 집중하여 많이 사용했던 분이, 바로 '요한'(John)과 '누가'(Luke)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두 분이 자신들의 저서에서 무슨 이유로 유독 이렇게 '유대인'이란 표현을 많이 사용했는지 궁금합니다.
그 이유를 알려면, 우리는 '유대인'의 배경이 무엇인지 알 필요가 있습니다. '유대인'이란, 본래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유대지방에 사는 사람들에 대한 호칭입니다. 이 지역에 두(2) 지파가 살았습니다. '유대지파'와 '베냐민지파' 입니다. 이 지역이 르호보암의 '남유다 왕국' 입니다(왕상12:21). 한편 여로보암이 나머지 10족속으로 '북 이스라엘'을 치리했습니다(왕상11:11,12:25). 갈릴리 지방이 최북단 지역입니다. 전통적으로 '남 유다지역'이 중심 지역이며, 그 나머지 지역이 변두리 지역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멀리 떨어질수록, 변두리 취급 받았습니다. '남쪽 유대인들'이 '최북 쪽 갈릴리 사람들'을 천시했음을 성서의 여러 정황에서 발견됩니다(마26:69; 막14:70; 행2:7). 예수님의 제자들도 갈릴리 사람들 이었습니다(막14:70; 눅13:1-2; 행2:7). 예수님도 갈릴리 사람으로 취급 받았습니다(마26:69; 눅22:59,23:6). 이렇듯이 '유대인들'이 '이스라엘인들'을 천시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지역 우월사상'이 강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이 '천시 받는 이스라엘 분들' 가운데에서, '기독교 복음 창시자'와 '그분의 제자들'이 나왔다는 사실입니다. 목이 곧고 우월 사상을 가진 '유대인들'이 결코 수용할 수 없는 태생적, 구조적 문제를 안고, 이스라엘에서 '기독교가 탄생' 되었습니다. 유대인의 시각에서, 기독교가 무시 받을 수밖에 없는 '이단종교' 였습니다. 특히 '유대인' 종교지도자들의 혐오 대상이었습니다. '유대인'이란, 상류층 엘리트층 주류 기득권자들을 지칭하는 계층적 의미를 담고 있는 고유명사이기도 합니다. 제사장들, 바리새인들, 사두개인들, 서기관들, 에센인들, 열성당원들 등 모두가 유대인이었습니다. 최고 의결기관의 회원인 '공회원'(Sanhedrin member) 모두가 이들로 구성 되었습니다. 북쪽 이스라엘인들은 이 높은 권력기관에 참여할 수 없었습니다. 비주류 하류층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12 제자들이 이 하류층에 속했습니다.
신기하게도 본래 예수님이 유대인중 유대인 가문인, 다윗의 왕족 후손으로 태어난 귀족출신입니다(마1:1-17; 눅3:23-38). 야곱의 예언대로 예수님이 왕족으로 태어났습니다(창49:8-10). 이 야곱의 예언 성취를 위해, 그는 다윗의 고향 유대지방 베들레헴에서 태어났습니다(눅2:1-7). 예수님이야말로 유대인중 유대인이십니다. 그런데 그는 갈릴리지방 나사렛에서 30년, 목수의 아들(마13:55)로, 그리고 대를 이어 자신도 가난한 목수(막6:3)로 사셨습니다. 하층사회에서도 하층으로 살았습니다. 그는 유대인들로부터 하찮은 나사렛 사람으로 불렸습니다. 하층 사회, 비 주류층 일원으로 취급 받으셨습니다. 유대인들의 천대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마2:23). 제자들도, 가룟 유다를 제외하고, 볼품없는 하층, 갈릴리지방 어부들이었습니다. 기독교의 아이로니(irony)중 하나입니다.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이런 하층 사회 출신 예수님을, 결코 메시야(헬. 그리스도, 구원자)로 믿을 수 없게 디자인되어 있었습니다. 유대 전통에 의하면, 메시야는 상류 유대인 중에서 탄생되어야 하고, 최고 영적 지도자로 존경 받아야 하며, 공회에서 메시야로 인정받아야만 합니다. 나사렛 예수님은, 이 유대인의 메시야 자격요건에, 가까이도 미치지 못하는 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스스로 자신이 메시야라고 하셨습니다. 당시 유대교 최고위 영적 지도자였던, 대제사장 가야바(Caiaphas)의 질문에, 예수님이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히. 메시야)이다"(마26:63-64). 이에 격노한 가야바가 예수님이 신성모독(blasphemy)했다고 외치면서, 레위기 24:16 모세의 율법대로 사형시켜야 한다고 확신하고(마26:66), 십자가에서 저주받아 죽이도록(신21:23)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넘겼습니다(마27:2). 창세전 '하나님의 신비'와 '그리스도의 신비'가 성취되는 순간입니다. 물론 가야바는 이 신비를 알리 만무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셨으며, 마음속으로 흐뭇해하셨을 것입니다.
요한이 요한복음을 저술한 때가 주후 68-70경입니다. 여기에 무려 78회나 '유대인들/유대인들에게'라는 표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른 복음서와는 다릅니다. 요한복음 저술 목적 때문입니다. 그 목적이 이러합니다. 영의 눈이 감긴 유대인들 중, 은혜로 눈뜨게 예정된 소수 고위층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100% 신성)이시며, 그리스도 (메시아, 구원자)이심을 믿게 해주시기 위해, 성령님께서 요한에게 감동을 주시어, 요한복음을 저술케 하셨습니다."(요20:31). 100% 인자되신 예수님(요3:13)이, 100% 하나님이심(요20:31)을, 눈이 감긴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의 정체성을 입증하기 위한 복음서입니다. 이 입증 과정에서 유대인들의 반발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 무려 78회나 '유대인들/유대인들에게'란 표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든 유대인이 아니고, 눈 뜨이기로 예정된 유대인들(마13:13-17)을 향한 복음서입니다. 이중 눈을 뜨게 된 대표적 고위층 인물들이 바로, 공회원들인 '니고데모'(요3:1)와 '아리마데 요셉'(요19:38)입니다.
또한 누가(Luke)가 기록한 사도행전에도 74회나 됩니다. 모두가 바울의 선교 사역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베드로 사역에는 유대인 관련 언급이 없습니다. 바울의 1차 선교여행(주후46-48, 행13:4-14:28), 2차 선교여행(주후50-52, 행15:36-18:22), 3차 선교여행(주후53-57, 행18:23-21:17) 기간에, 유대인과 관련된 사건들이 많이 일어났기에, 74회나 됩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유대인들에게'를 이렇게 많이 기록했습니다. 선교 지였던, 로마제국의 여러 도시들에서 벌어진 이야기들입니다. 그곳에 있던 유대인들이, 앞장서서 바울의 전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아들이심'과 '메시아(그리스도) 이심'을 극렬히 반대했습니다. 심지어 바울을 살해하려는 의도가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누가(Luke)가 이 유대인들의 강퍅한 모습들을 하나하나 기록했습니다. 그가 이 사건들을 일으키는 장본인이 '히브리인들'이나 '이스라엘인들'이라고 하지 않고, 유독 '유대인들'이라고 했습니다. 신기하게도 해외에 있는 '유대인 디아스포라들'만이, 앞장서서 '자신들의 눈 감김'을 적나라하게 스스로 노출시켰던 것입니다. '엘리트층인 유대인들/유다인들의 눈 감김'에 대해 누가(Luke)가 심히 놀라면서, 이들의 강퍅한 행위들을 적나라하게 기록했습니다.
우리의 질문이 있습니다. 왜 '기득권 지식층인 유대인들'이 이렇게 '예수님의 정체성'을 수용하지 못했나요? 이는 기독교인들이 주장하는 '메시야의 정체성'과, 자신들이 배워온 '메시야의 정체성'이 서로 상반되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이 전통적으로 배워왔던 '메시야의 정체성'과 정반대이기 때문입니다. 메시야에 대한 가르침이 서로 다를뿐더러, 정반대이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의 생각으로는, 기독교인들의 '메시야 신학' 가르침이, '비성서적 이단 가르침'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진정 메시아'라면, 그가 반드시 엘리트 유대인 제사장 출신이어야만 한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주류 유대사회'에서 요구하는 '메시야 자격요건' 입니다. 예수님이 이 자격만 갖추셨다면, 이런 메시아에 대한 불필요한 오해와 갈등과 논란이 없었을 터인데 말입니다.
우리가 인정하듯이, '기독교 메시아이신 예수님'이, '유대인들의 메시야 자격요건'을 갖춘 분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정반대의 요건'을 가진 분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유대인들이 기대하는 '메시아적 삶'을 살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의 '메시아적 기대와 정반대되는 환경'에서, '정반대되는 삶'을 사셨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할 수 없는 '구조적 삶'을 살았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할 수 없도록 삶을 디자인 하시고, 실제 이런 삶을 사셨습니다. 놀랍게도 이것이 '창세전 삼위 하나님의 디자인' 입니다. 우리가 요즈음 '이스라엘 시리즈'를 공부하면서, 이 '창세전 하나님의 디자인'을 조금씩 터득하고 있습니다. '유대인의 눈 감김'이 '하나님의 신비'(고전2:7;롬16:25-26), '그리스도의 신비'(엡3:4)와 '천국의 신비들'(마13:11)의 틀 안에서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도 배우고 있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이 '신비들' 속에 숨겨진 예수님의 가르침을 조금씩 배우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종종 이 소화하기 어려운 신비들을 수용하기에 벅찰 때도, 헷갈릴 때도 경험합니다. 그래서 심지어 예수님도, 이 인간의 심성을 미리 감지하시고, '신비'(헬, musterion, 영, mystery)라는 표현을 하도록 바울에게 지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입장에서는 '신비'가 아니지만, 유한한 피조물인 인간 입장에서는 '신비'임이 틀림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오는 은혜를 받지 않으면, 결코 이 '신비들'을 수용하기 힘들며, 헷갈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감당하기 힘든 이 '신비 문제'를, 매일 매일의 삶에서 어떻게 적용하며 해결 받아야 하나요? 비기독교인은 물론, 우리 주변의 일부 기독교인들이, 우리에게 이 '신비들'에 대해 질문을 할 때, 우리는 어떻게 대답해야 하나요? 우리의 이성과 논리로, 우리가 배워왔던 성서 지식으로, 열심히 설명해줄 수 있습니다. 종종 가르치는 우리 자신도, 이 '신비 이슈'(mystery issue)와, 그리고 이것과 연관되는 여러 '신비적 이슈들'(mysterious issues)에 속 시원한 답을 해결 받지 못한 채, 가르칠 때가 있습니다. 좋습니다. 감사하게도 이런 마음가짐으로 열심히 가르치다 보면, 내가 해결 받지 못했던 부분을, 때를 맞추어 성령님께서 깨닫게 은혜를 베푸신다는 사실을 경험하게 만드십니다. 자신의 실력이 아님을 고백케 하십니다. 더욱 겸손케 하십니다. 깨달은 것을 자랑하지 않습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조금씩 성숙한 전도자로 변모되어가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요즈음 유튜브에 올리는 저의 메시지에, 정성껏 댓글로 동역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들의 댓글 모습에서, 겸손과 헌신과 뜨거운 전도자 영성을 보게 됩니다. 저에게는 물론, 댓글을 읽는 분들에게도, 도전이 되며, 격려가 되며, 동기부여가 되며, 동역 자 의식이 고조됩니다. 댓글로 서로 교제하는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저도 흐뭇한데, 우리 예수님이 얼마나 흐뭇해하실까요? 여러분의 짧은 한마디의 댓글이, 전 세계에 흩어져있는 주님의 사랑하는 백성들을 흐뭇하게 만듭니다. 과연 이 시대의 전도자들이며, 격려 자들입니다. 특히 오늘날이야말로 '종말적 복음 오염'으로 가득 찬 시대입니다. 복음을 담고 있는 교회인 '어항'이 이산화탄소로 오염되어 있는 시대입니다. '어항'이 오염되어, 이 '오염된 어항 속'에, '영적으로 허기진 물고기들'이 많이 살고 있습니다. 이들이 여러분들의 깨끗한 산소가 담긴 댓글을 먹고 있으며, 계속 기다리고 있습니다. 얼마나 기쁘며, 자랑스러운지 모릅니다.
이 물고기들을 섬겨야 하는 사명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산소를 찾아 유튜브 속을 헤매고 있습니다." "산소 부족으로, 필사적으로 물위로 입을 내미는 고기들입니다". '이런 어항 속의 물고기들'을 우리 주변에서 자주 발견합니다. "우리는 이들에게 산소를 공급해 주어야 하는 사명 자들 입니다". '어항 관리자'이며, '어항 청소 자'입니다. '어항'을 멀리서 구경만 하면 안 됩니다. 멀리서 보면 오염된 어항인지 분별할 수 없습니다. 가까이 가서 '어항 속'을 들여다 보아야 합니다. 이미 죽은 고기들도 보이고, 죽어가는 고기도 보이며, 필사적으로(desperately) 산소를 찾는 고기도 보입니다(계3:1-6). 지혜로운 '어항 관리자'는 이들에게 급히 지체하지 않고, 오염되지 않은 산소를 공급해주어야 합니다(마24:45-46). 게으른 '어항 관리자'는 이것을 하지 않습니다. 이런 게으른 자를 예수님이 '미련한 악한 종'이라 하셨습니다(마24:48). '들림 받는 신부'가 아닙니다(마24:37-25:46). 이런 자는 7년 환난 속에 들어가 울며 이를 갊이 있을 것이라고 예수님이 '예언적 경고'를 하셨습니다(마24:51,25:30). 우리는 이 예수님의 경고에 귀를 쫑긋 세워 집중하여 듣고, "순종하는 지혜 자, 어항 관리자"가 되어야 합니다. 황 목사는, 여러분 모두가 이런 '지혜 자 반열'에 들어가도록 최선을 다해 섬길 것이겠지만, 여러분 '개인의 몫'도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성령님이시어, 도와 주시옵소서, 아멘. 황 용 현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