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용현목사 강해설교 녹취록/사도행전 강해

37강, 사도행전21장17절-30절, 바울과 예루살렘사도들

변명섭 2019. 12. 14. 10:37

사도행전 강해 제37강, 바울과 예루살렘사도들(행21:17-30) 2012년8월26일 말씀
오늘 주님께서 지난시간에 바울이 3차 여행을 끝내고 예루살렘에 도착한 그 이야기까지 하였습니다, 오늘은 그다음이야기입니다 
사도행전21장17절부터30절까지 말씀입니다 성경을 읽지 않아도 제가 그 내용을 자세하게 설명하여 드릴 테니까 잘 정리하시면 되겠습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에 도착한 때가 언제냐면 오순절 전에 도착해야 되겠다, 그랬습니다, 그래가지고 바울이 오순절 전에 도착을 분명히 했던 것 같습니다, 오순절이 3월6일입니다 그러니까 적어도 3월4일이나5일쯤 아마 도착하지 않았나, 생각이 됩니다, 그래서 나손의 집에 있었던 겁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에 도착할 때 바울을 맞이한 분들이 누구냐면 사도바울을 통해서 선교지에서 배웠던 사람들 중에서 일부가 예루살렘에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그 제자들이 성 밖에까지 나와서 마중을 했던 모양입니다
그래가지고 나손의 집으로 다 같이 들어간 것 같습니다, 
아주 기쁜 마음으로 맞이했다 그랬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바울일행이 들어갈 때 열두제자들인 사도들은 바울을 맞이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에 보면 그 다음날에 바울이 누가와 그 동료들이 함께 야고보를 방문하였습니다, 성경에 분명히 야고보를 방문했다 그랬습니다, 
야고보를 방문하려 들어갔는데 가보니까 장로들이 거기에 같이 있었다, 
그랬습니다, 그럼 장로들은 누구냐면 여러 가지로 해석이 되지만 일반적으로 우리가 다른 사도들 열두 사도들 그분들을 지칭하지 않았나, 
이렇게 보고 있습니다, 또 어떤 해석은 아마 그분들이 아니고 다른 장로들이 거다, 라고 보고 있고 거기에 베드로이름이 거론이 안 됩니다, 
그러면 야고보는 왜 만나는가, 우리가 이렇게 지적해 볼 필요가 있는 겁니다, 야고보는 예수님의 육신의 4명의 남동생이 있습니다, 
마태복음13장55절에 보면 4명이 순서대로 이름이 나와 있습니다, 야고보가 첫째이고 요셉. 시몬. 유다 그렸습니다, 그리고 그다음 절에 보면 딸들이 있다 그러니까 여동생들이 아마 있었던 같습니다, 
56절에 그런데 남자형제 중에서 가장 큰 동생이 야고보였습니다, 
그러니까 야고보는 예수님의 3년 공생애기간에는 예수님을 배척했던 사람입니다, 자기형님을 그냥 하나의 인간으로 봤지 그리스도로 보지를 못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때는 열두제자그룹에 속해있지를 않았습니다, 
야고보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이분이 개종을 한 겁니다, 
이분이 이런 예수님과의 관계가 있기 때문에 예루살렘교회가 이분을 최고지도자로 모셨던 겁니다,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아느냐면 예루살렘총회에서도 알 수 있고 사도행전15장13절 갈라디아서1장19절에서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분이 나중에 예루살렘교회가 흩어진 다음에 여기저기 주욱 갈라디아니 갑바도기아니 본도 아시아니 이런데 다니면서 야고보가 자기 흩어진 교인들을 상대로 복음을 전해주고 한 그런 일들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이분들에게 편지를 쓴 것이 야고보서입니다 야고보가 이런 사람입니다 이제 바울이 야고보에게 찾아간 것은 야고보가 이만큼 지도자라는 것을 인정해주는 겁니다, 그래서 바울이 야고보에게 가가지고 무엇을 했겠습니까, 바울이 제일 먼저 한 일이 자기가 들고 온 헌금을 갖다 주는 장면이 제 눈에 보입니다, 그리고 성경에 보면 19절에 자기가 그동안 1차 여행부터 시작해서 지금 3차 여행 끝날 때까지 이방인들을 어떻게 봉사했고 그분들에게 어떻게 복음을 전했나, 그 다음에 교회들이 어떻게 개척되었나를 성경에 보면 낱낱이 보고를 했다 그랬습니다, 
낱낱이라는 것은 적당히 한 것이 아니고 하나하나 자세히 설명을 해준 겁니다, 이들이 이 설명을 다 들은 다음에 이들의 반응을 보면 20절에 반응이 나옵니다, 뭐라고 그러느냐면 딱 한마디입니다 반응이 뭐냐면 하나님께 영광 돌렸다 그랬습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렸다 이말 한마디만 하고 그다음에 성경에서는 말이 없습니다, 그러면서 누가가 이 장면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 돌렸다는 말을 쓰는 겁니다, 그리고는 이들이 그길로 바울에게 제안을 하나 하는 겁니다, 뭐라고 제안을 하느냐면 당신이 이렇게 이방선교를 많이 했지만 지금 밖에 많은 유대인들이 기도교인이 되었는데 당신을 통해서도 된 사람들이 있지만 우리를 통해서도 된 그런 유대인크리스천들이 많이 있는데 그분들이 당신을 많이 오해하고 있다, 라는 말을 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 기독교인의 숫자가 유대인 기독교인 숫자가 수만이라 그랬습니다, 그런데 원어를 보면 수천 명이 있다는 겁니다, 그들 대부분이 당신을 이단으로 생각한다는 겁니다, 지금 야고보와 베드로와 이분들이 수고하고 돌아온 바울에게 하는 대답이 이런 겁니다, 그 사람들이 당신을 이단으로 생각한다는 겁니다, 뭐냐면 당신이 이단이기 때문에 이미 아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이제 조금 있다가 당신을 죽이려고 덤벼들 거라는 겁니다, 
기독교인들이 당신이 이단이기 때문에 그러니까 목숨이 위험하니까 조심하라는 겁니다, 
저는 이 말씀을 들으면서 이 사람들이 바울이 이단이 아닌 것을 알면서 이분들이 이단이 아니라는 것을 예루살렘과 전 선교지에다가 말을 해주어야 되잖아요, 그것을 하지 않고 이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오늘 굉장히 중요한 말을 앞으로 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이단인가면 21절에 보면 내용이 나옵니다, 바울이 모세를 배반한 자라는 겁니다, 
그리고 이들에게 크리스천들에게 할례를 하지 말라고 말했고 구약의 모세율법에 나오는 모든 규례들을 관습들을 지키지 말라고 가르쳤다는 겁니다, 
바울이 그러니까 속으로는 지금 이분들도 어느 정도 동의한다는 내용입니다, 그러니 바울이 기가 찬 겁니다, 그렇지만 그것을 어떻게 합니까, 
바울도 그것을 인정해주어야 하는 겁니다, 왜냐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 그렇게 생각한다니까 그래서 이분들이 바울에게 제안을 하는 겁니다, 
무슨 제안을 하느냐면 바울신학에 대한 오해되는 부분을 당신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한번 보여주기를 바란다는 겁니다, 오해되는 부분이 잘못 오해되었다는 것을 한번 증명할 기회가 왔다는 겁니다, 
당신이 모세율법을 존중 한다는 증거를 한번 보여주라는 겁니다, 
그래서 지금이 보여줄 때가 되었다는 겁니다, 
그래가지고 뭐라고 그러느냐면 마침 예루살렘교회 안에 유대인크리스천4명이 나실 인 서원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겁니다, 
나실 인 서원이라는 것은 뭐냐면 특별히 자기 몸을 구별해가지고 하나님께 바치기를 서원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서원을 할 때 어떻게 하느냐면 민수기6장2절에서16절에 나오는 가이드라인이 있습니다, 
그 가이드라인에 의해서 나실 인 서원을 하는 겁니다, 나실 인 서원을 하는데 보통 일주일간 한다고 그럽니다, 결례라 그럽니다, 
결례 순결하다는 겁니다, 포도주와 독주를 먹지 않고 머리도 깍지 않고 그 당시에 이 사람들은 수염도 많이 길으니까, 
수염도 깍지 않고 그 기간에 시채를 만약에 가까이 했을 때 가족 중에 누가 죽어가지고 그러면 시체를 가까이 했기 때문에 그분의 머리도 더러워졌고 마음도 더러워졌다고 보고는 집비둘기 새끼 2마리 가지고 오던지 아니면 산비둘기2마리를 제사장에게 바치는 겁니다, 
그리고는 또 1년 된 수양까지 가지고 오고 이렇게 해서 제사장에게 바치는 겁니다, 이런 것을 하는 건데 이분들이 뭐라 하느냐면 바울형제여 당신도 나실 인 서원을 이 사람들과 같이 하면 어떠나 이겁니다, 
그래서 바울이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나도 하겠습니다, 그러면서 이분들이 거기다가 뭘 또 제안하느냐면 이분들에게 지금 들어가는 돈이 있습니다, 
비둘기새끼2마리도 사야 되고 또 산비둘기2마리 사야 되고 1년 된 수양도 사야 되고 그다음에 나중에 나실 인 서원이 끝나면 머리도 이발소에 가서 깎아야 되는데 이발비용과 이 모든 제물비용을 당신이 다 데라는 겁니다, 
그리고는 나실 인 서원을 한번 하라는 겁니다, 
그러면 이 사람들이 당신이 이런 걸 하는 것 보면 오해가 좀 풀릴 수 있다는 겁니다, 저분이 모세의 율법을 존중하는구나, 라고 인상을 줄 수가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바울이 흔쾌히 나실 인 서원을 본인도하고 이 사람들도 했습니다, 나실 인 서원이 끝난 다음에 예루살렘성전 안에 들어가서 제사장에게 우리가 이렇게 했습니다, 하고 또 구약의 제사장에게 들어가는 비용도 다 갖다 바치고 이런 일들을 바울이 그대로 한 겁니다, 
그리고 바울이 거기서 끝냈습니다, 끝내고는 바울이 속으로는 기분이 별로 안 좋았지만 바울철학이 이렇게 해도 되는 걸로 이분은 옛날부터 가지고 있었습니다, 지금 이 사건은 주후57년입니다 바울이 55년에 고린도전서를 쓸 때 바울은 이런 부분에서 신앙철학을 2년 전에 말씀한 것이 있습니다, 
바울이 뭐라고 그러느냐면 고린도전서9장19절에서23절입니다, 
바울이 고린도교인들아 나는 모든 사람에게 나는 자유 한 사람이다 그러면서 그렇지만 나는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되었다는 겁니다, 그 이유는 뭐냐면 그 사람들을 내가 얻기 위해서라는 겁니다, 그러면서 20절에 그랬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 같이 된 것은 유대인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아래 있지 아니하나 나는 나실 인 서원을 할 필요가 없는 사람들이지만 그렇지만 율법아래 있는 자같이 된 것은 율법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는 겁니다, 계속해서 바울이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21절에 율법이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에게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이방인에게는 나는 이방인이 아니라는 겁니다, 
도리어 그리스도 율법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또 믿음이 약한 자에게는 내가 약한 자같이 된 것은 약한 자를 얻고자 함이요, 그래서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으로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 23절에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적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코자 함이라 이 말씀을 바울이 이미 지금 이 사건2년 전에 자기 제자들인 고린도교회에 말했습니다, 
사실은 바울은 나실 인 서원을 받을 필요도 없는 사람입니다 할 필요가 없는 사람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위해서는 카멜레온입니다, 
그렇죠, 사람을 구하는데 있어서는 카멜레온입니다 여기서는 이렇게 행하고 저기서는 저렇게 행하고 그것을 이해 못하는 사람이 볼 때는 오해하기 딱 알맞은 겁니다, 저도 바울의 이사상이 저에게도 꽉차있습니다, 
어딜 가나 저도 카멜레온입니다 제가 선교를 지금 30년 가까이 하면서 카멜레온 행동을 엄청나게 많이 하였습니다, 왜냐면 제가 바울의 이 사상을 제가 받았습니다, 바울은 주후50년에 디모데를 차출하면서 디모데에게 할례를 베풀었습니다, 사도행전16장3절에 보면 그 이유가 뭐냐면 주변에 유대인크리스천들이 저 젊은이의 아버지가 헬라사람이라는 것을 이미 알았기 때문이라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헬라출신이기 때문에 할례를 시켜야지만 안 그러면 바울에게 또 뭐라고. 뭐라고 말할 사람들이 주변에 있는 걸 알고는 필요 없지만 바울이 할례를 강제로 시킨 겁니다, 
그렇지만 바울이 상항에 따라서 그 훨씬 전에 주후49년에 갈라디아서를 쓰면서 바울이 갈라디아교인들에게 그러는 겁니다, 
내가 이방인인 헬라인인 그레데사람인 디도가 크리스천이 되었을 때는 나는 할례를 시키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상항에 따라서 할례를 해야 되겠다고 생각하면 주변사람들 한 사람이라도 혹시 실족할까 봐서 놓치지 않기 위해서 이분은 그때그때 카멜레온이 되는 겁니다, 
갈라디아서2장3절에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주후57년입니다 52년에 바울이 고린도에서 나실 인 서원을 하셨습니다, 거기에 있는 유대인들을 생각하면서 유대인들을 얻기 위해서 그래서 바울이 2차 여행을 끝내면서 겐그레아에서 나실 인 서원을 끝내고는 머리를 깎았더라, 기억나십니까, 바울이 그때그때 오면서 카멜레온역할을 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바울처럼 복음의 본질은 변하지 않으면서 복음을 전하는 방법은 나실 인 서원은 비 본질입니다 이것은 카멜레온 적으로 변하는 것이 더 나았던 것이 바울의 신학사상입니다 왜냐면 복음 받는 사람들이 다양하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성품도 다양하고 문화도 다양하고 여러 가지 배경이 다양하기 때문에 거기에 맞추어서 그때그때 성령님이 주시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이와 같이 사도들이 당신 나실 인 서약하십시오, 하니까 바울이 웃으면서 한다니까 거기에 있는 유대인들이 복음화가 된 겁니다 바울이 백번이라도 하라고 했으면 했을 겁니다, 
성경에 보면 누가가 거기에 대해서 뭐라고 바울이 말했다는 것이 없습니다, 그냥 자존심 다 내리고 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성전에 들어가서 성전에 있는 제사장 옆에 가서 고개 숙이고 나실 인 서원 끝냈다고 보고까지 해야 되는 겁니다, 그리고 돈도 갖다 주어야 되고 다 했습니다 
나실 인 서원이 끝나고는 성전에 앉아 있는 겁니다, 
바울이 앉아 있는데 갑자기 소란소리가 밖에서 들려오는 겁니다, 
그러더니 보니까 유대인크리스천그룹들이 이렇게 보니까 에베소출신들입니다 오순절을 기념하기 위해서 몰려온 자기 눈에 익은 크리스천들도 있었지만 비 크리스천들도 아마 거기에 섞어 있지 않았나, 보고 있습니다, 
이 무리들이 성전으로 달려오면서 막 소리를 지르는 겁니다, 
저 양반 못된 놈이라는 겁니다, 저 양반 며칠 전에 에베소출신 드로비모 그분을 3차 여행 때 바울이 데리고 다녔거든요 드로비모는 이방인입니다 드로비모를 데리고 성전 뜰에서 왔다. 갔다하는 것을 우리가 봤다는 겁니다, 
그때 이 사람들이 보고는 저 양반 말이야 이방인을 데리고 성전 뜰에서 왔다. 갔다 했는데 기분이 나빠 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오늘 딱 보니까 성전 안에 지금 있는 겁니다, 그래가지고 무리들을 불려 가지고 저사람 우리가 혼내주고 죽여 버리자는 겁니다, 하나님의 법을 어긴 놈이라는 겁니다, 
그래가지고 나와 가지고 이분들이 바울을 성전 안에서 붙잡았습니다, 
그래서 꼼짝없이 당한 겁니다, 도와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겁니다, 
같이 나실 인 서원을 한 4명은 다 도망 가버리고 바울 혼자 그런데 성전에 나오니까 성전 문이 곧 닫히더라, 성경에는 그렇게 써놓았습니다 성전 안에 못 들어가게 더러운 사울 이놈 너는 성전에 들어갈 자격이 없다 그래가지고 성전 뜰에서 무리들을 동원하는데 뭐라고 말하느냐면 이 양반이 우리 디아스포라들을 여기저기 있는 디아스포라들을 그냥 유혹을 해가지고 율법을 어기게 하고 예루살렘성전까지도 훼방하는 행동을 그동안 오래 동안 해 왔다는 겁니다, 그러던 자가 지금 여기 와 있다는 겁니다, 
그래가지고 온 성이 난리가 났다 30절에 그랬습니다, 
그 다음절은 제가 다음시간에 하겠지만 바울을 죽이려고 계획하고는 매질을 시작했다 그랬습니다, 오늘 본문은 여기까지입니다 그러면 몇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첫째 질문이 뭐냐면 사도들이 왜 바울을 냉대하느냐입니다, 
이미 바울이 예루살렘에 온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숙소도 미리 마련해주지 않았습니다, 이 사도들은 이미 주후30년부터 사역을 시작해서 예루살렘도시에서 지금57년이니까 27년을 예루살렘에서 사도역할을 하는 토박이들입니다 그러니까 이분들은 지금 유대인지도자들과 어느 정도 교제가 있고 자기들도 어느 정도 파워그룹이 되어 가지고 정치지도자들과도 바리새인들과도 교제가 다 있고 바울을 죽이려고 하는 저 세력들을 무마 시켜서 하지 못하도록 하는 어느 정도 파워를 가진 분들입니다 영향력이 있는 분들입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안 했습니다, 바울이 온다는 소식을 아마 간접적으로 들었겠지만 영접도 해주지 않았고 숙소도 마련해 주지 않았습니다, 
나손의 집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알고 있었는데도 이집에 찾아와서 인사하고 수고했다는 격려도 안 해주었습니다, 우리 같으면 그동안 수고 했는데 저녁 식사 같이 한번 하자 이것도 없었습니다, 
우리 같으면 오늘 저녁에 당신이 왔는데 우리 사도들 다 모아놓고 우리교인들 중에 핵심 멤버들 모아 놓을 테니 저녁 집회 한번 하자 이것도 없었습니다, 바울을 불려다가 융숭한 대접을 해야 되는데 안 했습니다, 
대신 이분들이 이렇게 바울에게 관심이 없으니까 바울의 예루살렘입성은 아주 초라했습니다, 몇몇 자기 주변에 제자들만 기쁘게 영접했다 그랬습니다, 실은 바울이 개종한 게 35년이니까 지금 57년이니까 개종 후 22년 동안 정말 주님을 위해서 엄청난 수고를 많이 하고 고생을 많이 하였는데 그래서 바울 때문에 지금 터키지방 소아시아지방 마케도니아지방 그리스지방 이제는 로마제국의 대부분의 중요한 나라들이 복음화가 된 겁니다, 
교회들도 많이 세워지고 이런 일들을 하고 선배들에게 인사하러 온 이 사람에게 사도들이 이렇게 했는데 인간 같으면 예를 들어서 전투하고 돌아온 개선장군이 되잖아요, 2차 전쟁 때 아이젠하워 장군이 뉴욕에 와서 환송퍼레이드를 하는 것처럼 드골장군이 프랑스에 개선문 앞에서 큰 퍼레이드를 받은 것처럼 바울도 그런 개선장군의 그런 환영을 받았으면 좋을 터인데 전혀 그런 모습이 없었습니다, 바울이 이것을 이미 알고 있었고 이미 각오까지 한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누가가 거기에 대고 바울이 섭섭하다는 말 한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도 바울은 하루 밤 자고나서 그 다음날 야고보에게 찾아가서 선교보고를 하고 헌금 드리고 했던 겁니다, 
보고가 끝난 다음에 누가는 바울에게 이분들이 감사했다 장말 수고했다는 말 한마디도 안했던 것을 누가가 했으면 다 적었을 텐데 기록 안 하였습니다 한 가지 기록한 것은 하나님께 영광 드렸다, 그랬습니다, 
우리기독교인들이 이말 마음대로 씁니다, 진짜로 영광 드리지 않았는데도 이 말을 많이 씁니다, 그 당시에 영적지도자들도 다 이런 식이었습니다, 
행위가 따라오지 않는 행위들을 많이 했습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야고보와 베드로는 바울에게 정말 격려를 해주었어야 됩니다, 
어떤 격려를 해주어야 되는가, 제가 한번 상상을 해봤습니다, 
이런 격려를 아마 해주었어야 될 것 같습니다 당신 정말 수고가 많았다 당신이 22년 전에 개종했을 때 그때 이야기를 우리가 들었다 지금 57년이니까 22년 동안 우리가 당신이 개종한 후에 별로 도와주지 못해서 정말 미안하다 당신이 복음을 이렇게 전했기 때문에 사방에 교회들 여기저기 많이 개척되고 이 예루살렘출신들도 당신 때문에 배운 것이 많다 복음의 진수를 배웠다 우리가 하지 못한 일들을 당신이 해왔구나 고맙다 이런 말씀은 하셨어야 됩니다, 예수님이 너 개종하기 전에 우리에게 사도행전1장8절 말씀을 주셨는데 그런데 이 말씀대로 우리가 잘 하지를 못했다 그런데 당신이 우리 대신 했으니까 고맙다 이런 정도 말씀은 해야 데는데 당신 오래 전에 안디옥교회에 전도사로 있을 때 우리가 기근이 많이 나가지고 고생하고 있을 때 바나바와 같이 헌금 들고 온 것 그 당시에는 고맙다는 말 안했지만 지금 22년이 지나서 내가 고맙게 생각한다, 그런데 지금 또 헌금 들고 왔니 너 정말 고맙다 이런 정도는 해야 되잖아요, 영적지도자인데 그리고 이런 말도 분명히 해야 됩니다 바울아 그런데 우리가 너에게 섭섭한 게 조금 있다 너 말이야 우리교회 안수집사인 스데반을 죽이는 일에 가담했지 그뿐이나 스데반을 죽여 놓고는 너가 가가호호를 방문하면서 우리교인들 얼마냐 핍박을 했느냐 그것 때문에 우리교회가 풍지 박산이 되었다 너 때문에 일부 교인들이 다메섹까지 갔는데 거기까지 너가 따라가 가지고 그 사람들 혼내다가 예수님께 혼쭐난 것 너 기억하니 그렇지만 그 당시에 너 가 했던 것을 가만히 생각하면 내 속에 너를 미워하는 쓴 뿌리가 있다는 이런 말도 해주어야 되잖아요, 너 생각하면 치가 떨린다, 이 교회가 이
렇게 성공했는데 너 때문에 그냥 폭 싹 했다, 지금 베드로가 말하는 겁니다, 우리교회가 예수님께서 마태복음18장21절에서 하신 말씀이 있어 저사람 내가 용서하려면 7번까지 해야 됩니까 하니까 예수님께서 70번씩 7번을 용서하라고 그랬잖아 예수님이 나에게 했는데 너에게는 도저히 용서 못하겠다, 다른 사람은 용서할 수 있는데 아마 베드로가 이런 말도 했어야 되는 겁니다, 내가 베드로였다면 당신이 개종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한편으로는 반가웠지만 내 속에 너에 대한 마음이 쓴 뿌리가 있어가지고 속으로 별로 기뻐하지 않았단다, 당신이 아라비아에 3년 동안 고독훈련을 받을 때 실은 내가 마음을 고쳐가지고 한번 방문해가지고 너를 위로 해 주었어야 되는데 내가 그것을 못하였다 미안해 이런 말도 좀 했으면 얼마냐 좋았을까요, 
그리고 당신이 3년 있다가 예루살렘에 다시 들렸다는 소문이 났을 때 내가 너를 찾아가서 너 위로해주고 너 죽이려고 한사람들 내가 다 막아 줄 수 있는데 그것 못해서 미안해 그러니까 바나바를 통해서 나에게 야고보에게 왔을 때 우리가 만났을 때도 반갑게 만나주지 않았단다, 
너를 죽이려고 살인음모가 예루살렘에 그때 있을 때 우리가 발 벗고 나서서 막아 주었어야 되는데 그걸 못했다 그래서 너는 하는 수 없이 너 고향으로 간 거 기억난다, 너 고향에 있을 때도 우리가 한번 올라가서 위로의 교제도 좀 하면 좋았는데 그것도 못했다 미안하다 이런 말 정도는 해야 되잖아요 저 같으면 할 것 같습니다, 안디옥교회 전도사로 왔다고 했을 때 급히 달려 올라가서 축하 꽃다발이라도 하나 주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것도 이 사람들이 안 하였습니다, 오히려 1차 여행하고 돌아온 바울에게 자기 제자들을 통해서 잘못된 이야기만 하는 겁니다, 
너는 모세율법을 무시하고 은혜의 복음만 전하는 자구나 이래가지고 이 문제를 복잡하게 만드는 일을 뒤에서 조정하는 겁니다, 할 수 없이 바나바와 바울이 같이 예루살렘에 내려왔던 사건 우리가 예루살렘총회라 그러잖아요, 기억나시죠, 이때 바울에 대한 아직도 그 쓴 뿌리가 남아가지고 바울이 오니까 쳐다보지도 안하고 있을 때 야고보가 보고는 교통정리 해주고 어느 정도 소위 타협안을 만들어 가지고 소위 바울의 사역을 성령님께서 하도록 이끄시는 겁니다, 바울이 이런 과정을 통해서 많은 것을 깨닫고 사람이 누구라는 것을 깨닫고 성령님이 끊임없는 메시지를 아마 들었을 겁니다, 
이런 걸 다 보면서 이제 바울이 2차3차 4차 여행은 나중에 하지만 바울이 2차3차 여행을 하면서 까지도 한 번도 바울에게 수고했다는 말 한마디 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는 과정 속에서 지금 예루살렘에 도착한 겁니다, 
3차 여행을 끝내고 도착했는데 머무는 집도 준비 안 해놓고 바울에게 관심이 없는 겁니다, 아마 내 쓴 뿌리 때문에 이마 이렇게 된 것 같다 이렇게 한번 말 한마디라도 했으면 바울이 상당히 좋았을 텐데 그것을 안했습니다, 
선교보고를 하면서도 마음속에 어딘가는 관계가 서먹. 서먹했겠죠, 
참으로 신기한 게 같은 복음을 전하는데 이런 사건이 1세기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전 세계에 영적지도자들 사이에 다 있습니다, 
신기하게 그러면 우리가 질문을 하나 던질 필요가 있습니다, 
왜 사도들이 바울에게 이런 냉대하는 모습을 보였을까요, 그래서 제가 열 가지를 한번 적어 봤습니다, 첫째 이분들 사이는 신학노선이 어는 정도 차이가 있지 않았나 보고 있습니다, 바울은 은혜의 복음을 전하지만 베드로와 모든 사도들은 은혜의 복음도 이해하지만 율법적인 쪽이 강한 것 같습니다 두 번째는 문화배경의 차이라고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사람을 볼 때 이런 열 가지 측면으로 사람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정답이 없습니다, 바울은 헬라 파 유대인입니다 그다음에 사도들은 히브리 파 유대인들입니다 배경이 다릅니다, 
세 번째는 교육수준의 차이입니다 고등교육을 받은 바울과 그렇지 않는 초등교육을 받은 사도들과 차이점이 보는 시각의 차이가 있었습니다, 
네 번째는 사도들이 자기네들이 사도라는 자존심과 프라이드가 있었습니다, 이분들은 무슨 프라이드냐면 우리는 그래도 오리지널이다 원조다 주후26년부터 예수님과 같이 있었고 예수님의 열두제자 속에 있었던 우리는 원조다 우리는 선배다 바울 너는 원조가 아니고 늦게 들어온 후배다 이런 관념으로 꽉차있는 겁니다, 다섯 번째는 믿음의 경륜의 차이로 볼 수 있습니다 자신들은 26년부터 주욱 믿음의 유산을 받아왔고 바울은 35년부터 약9년 차이입니다 이런 믿음의 경륜이 다르다는 그 프라이드 여섯 번째는 과거의 상처가 아직도 미해결 된 겁니다, 제자들은 이분들은 피해자들이고 바울은 가해자입니다 일곱 번째 제자들은 바울만보면 열등의식이 자꾸 생기는 겁니다, 
저 사람은 교육도 많이 받고 저 사람은 이런. 이런 부분에서 우리보다 낫다 이 열등의식이 자기들을 괴롭히는 겁니다, 
열등의식이 있는 사람에게 파워를 주면 권위의식이 거기에서 나타나는 겁니다,
이런 것이 따라 옵니다 그러면 자기 영광 찾으려고 거르고 이런 것은 어떻게 지울 수가 없는 것들입니다 바울도 해결 못하고 이분들도 이 문제를 해결 못하는 겁니다, 여덟 번째로는 성품의 차이점입니다 베드로는 직선적이고 바울도 직선적입니다 그러니까 이 두 분은 부딪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항상 중간에 야고보 같은 사람이 있었던 겁니다, 
바울이 직선적이기 때문에 성령님이 그분의 성품을 사용하시는 겁니다, 
갈라디아서2장8절에 보면 나타나잖아요, 
갈라디아교인들에게 말하는 겁니다, 저 사람은 할례자의사도다 저 사람이 이방인들에게 이중으로 행동을 해서 내가 꾸중까지 했다는 말까지 합니다, 
또 그 사도들은 유명하지만 겉으로는 유명하지만 나에게는 유명하지 않다 나는 이방인의사도다 이 두 분이 자기네가 가지고 있는 프라이드가 있는 겁니다, 이래가지고 서로가 이것을 해결을 못하는 겁니다, 
이게 이분들만의 이야기가 아니고 우리 모두에게 다 있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없다 그러면 거짓말입니다 마지막 아홉 번째는 이게 굉장히 중요합니다, 이게 하나님의 신비로운 뜻이 숨겨져 있는 겁니다, 이 사람들의 관계 속에서 이런 문제로 서로 갈등하게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겁니다, 
우리하나님은 전지하시고 전능하십니다, 하나님이 이두 영적지도자들이 갈등하도록 이런 모든 이 배경에 스타일을 가지고 이 모든 것이 우리가 극복할 수 없는 요소들입니다 아홉 가지가 이렇게 해서 이분들이서로가 자기가 약한 부분을 알면서 겸손하게 만들기 위한 사람들 앞에 특히 하나님 앞에 그래서 하나님만 의지하도록 만들기 위한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미스터리가 그 속에 숨겨져 있는 겁니다, 바울이 편지를 13권을 쓰면서 그 내용 속에 보면 우리가 자칫 잘못하면 바울이 성인이 되어가지고 바울이 성인이니까 편지를 읽는 사람들이 성인이 아니니까 꾸중하는 식으로 썼다고 착각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성령님께서 바울에게 훈계하면서 바울아 너 모습이 그대로 보여주기 위해서 우선적으로 우리목사들도 설교할 때 마찬가지입니다 
설교할 때 내 모습이 이러니까 너 한번 이야기해라 내가하면서 나를 위해서 설교하는 겁니다, 첫째가 그러면서 나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 설교하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바울도 바울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 많은 편지를 쓴 겁니다, 베드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야고보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분들은 이러면서 자기네 스스로를 더욱 겸손하게 하기 위해서 주님께서 이분들의 갈등을 가지도록 한 겁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들은 그런 사람들 보고 성인이라 그러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저 사람들은 성인들이구나, 
제가 볼 때는 성인이 아닙니다, 될 수 도 없고 이분들이 성인이 되어가지고 죽은 게 아닙니다, 죽을 때도 이런 모습으로 죽은 겁니다, 
쓴 뿌리를 그대로 안고 있는 모습으로 이분들의 편지 속에서 보면 질투심이 항상 그 속에 있었고 열등의식이 항상 있었고 미움이 있었고 경쟁의식도 있고 용서 못하는 마음 이기심 내 욕심 분노하는 마음 이런 것을 안고서 주님을 섬기다가 그냥 낙원에 간 겁니다, 낙원에 가서 이런 것을 털어버린 겁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들도 마찬가지고 이 세상에 어떤 소위 유명한 목사나 신부나 그 사람들 성인이 아닙니다, 
이 갈등을 안고 가는데 정도의 차이가 있는 것뿐입니다 이 복음을 가지고서 이 갈등을 조금씩. 조금씩 변화되는 주님이 보시는 거지 내가 다 되었다 이렇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남을 비평하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남을 비판할 때는 황 목사 너도 아직 덜 되었구나 완전히 이 사실을 깨닫게 될 때는 이 비평의 목소리가 없어져버립니다 나도 그곳을 향해서 가는 사람입니다 왜 하나님이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 세상에 살면서 이런 모습으로 밖에 살지 못하게 해놓았습니까 이것도 질문입니다 왜 완전히 성인으로 만들어 버리지 이것은 미스터리가 아니고 이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7000년 동안 이 세상은 누가 주인입니까 이 세상 신입니다 이 세상 신은 요한복음12장31절 고린도후서4장4절에 이 세상 신이 지배하도록 허락하신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에 이놈들이 지배를 우리는 받으면서 살게 되어 있는 겁니다, 안 받고 살면 그것은 가짜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속에는 질투심이 있고 미움이 있고 갈등이 있고 용서 못하는 마음이 있고 내 욕심이 있고 다 있는 겁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주님과 가까이 하는 것은 이것을 줄어 나가는 사람입니다 이것뿐이지만 사탄의 성품은 이 세상사는 동안에는 없을 수가 없습니다, 없으면 비성서적입니다 미움이 있어야 되는 겁니다, 질투가 있어야 되는 겁니다, 
바울이 주후57년에 3차 여행 그의 끝날 때 로마서를 썼습니다, 
이분이 로마서를 쓸 때만 하여도 굉장히 영적으로 높은 위치에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바울에게 말씀하시는 겁니다, 
로마서7장22절부터24절에 바울이 영계에 깊이 들어가면서 깨달은 것이 있는 겁니다, 22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과 서로 안 일어나려고 서로 잡아 가는 겁니다, 
나는 느낄 때 저 사람 사랑해주어야지 저 사람 내가 질투하지 말아야지 내 입을 열면 항상 좋은 말만 해야지 이게 내 마음인데 이게 잘 안 되는 겁니다, 바울이 이 편지를 쓸 때만 해도 벌써 편지를 많이 쓴 사람입니다 
57년이니까 49년에 갈라디아서를 썼고 51년에 데살로니가 전후서 썼고 55년에 고린도 전후서 썼고 성인입니다 그런데 그 편지 내용만 봐도 성인입니다 그런데 57년에 로마서를 쓰면서 1장부터8장에 유명한 기가 막힌 말 다 쓴 사람인데 바울이 그러는 겁니다, 성령님이 바울아 너 속을 들여다봐라 너는 아직 성인이 아니다 바울이 이것을 깨닫고는 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이 고백을 하도록 하나님께서 하는 겁니다, 이 고백을 안 하면 바울이, 바울이 아닙니다, 
죽을 때까지 우리는 이 고백을 하면서 사는 겁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남을 정제하는 것은 안 되는 겁니다, 왜냐면 이것을 깊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이제 남을 정제할 수 있는 힘이 없는 겁니다, 우리가 거기 까지  되어야 됩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도 그걸 향해서 지금 가고 있습니다, 
남을 정제할 수 있는 힘이 빠져야 되는 겁니다, 바울은 겉으로 보면 성인입니다 22년 동안 기도도 많이 하고 타협도 많이 하고 두란노 서원에 신학교 교장도 하고 제자들 많이 만들어 내고 바울은 당대에 최고의 신학자였고 목회자였고 교사였고 이런 사람인데 낙원에 방문까지도 하고 책도 많이 쓰고 엄청난 하나님의 사람인데 우리 인간의 눈으로 보면 성인입니다 
그런데 그분은 자기 속에 있는 갈등을 이 쓴 뿌리를 자기가 다 해결하지를 못하는 겁니다, 주님께서 바울에게 이 쓴 뿌리를 어느 정도 허락하신 겁니다, 어떻게 압니까, 고린도후서에서 바울이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탄의 선물인 육신의 가시를 허락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우리가 보통 말하면 바울의 육신의 가시는 말라리아 병이니 또는 눈병이니 이렇게 생각하는데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본질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분의 혼적인 여러 가지 문제들 영적인 문제들 하나님과 자기만 알고 있는 우상들 습관들 몰래 자기가 좋아하는 어떤 자기 취미들 이런 하나님만 알고 있는 바울이 가지고 있는 문제들이 있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이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내 육체의 가시 이것은 내가 책을 아무리 많이 쓰고 지금 낙원도 갔다 오고 했지만 이 문제가 해결이 안 됩니다 우리 누구나 다 있는 겁니다, 남에게 이야기하기 힘든 주님만 알고 있는 게 있습니다, 이걸 좀 해결해 주십시오, 
그러니까 주님께서 그러는 겁니다, 너 그것 가지고 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너 그것을 가지고 약할 때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다는 겁니다, 
주님께서 바울이 가지고 있는 그 육체의가시가 구체적으로 뭔지는 우리에게 말을 안 하는 겁니다, 저부터 시작해서 여러분들 다 있는 겁니다, 
그것은 천국 갈 때까지 가지고 있어야 되는 겁니다, 
그러면서 그것 때문에 괴로워하고 그것 때문에 주님 앞에 납작 엎드리는 그런 사람이 될 때 우리 주님이 기뻐하시는 겁니다, 
베드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 처음 불리 움 받았다고 그래서 별거 아닙니다, 베드로는 책을 많이 안 썼지만 나중에 64년에 쓴 베드로 전 후서를 보시면 그분도 보면 똑같습니다, 이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해서 내가 지금 힘들다 이분이 가지고 있는 믿음의 분량 이분도 자기가 가지고 있는 쓴 뿌리가 너무나 많은 겁니다, 바울 한 사람을 안아주지 못하는 바울이 주님이 쓰시는 특별한 종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안아주지 못하는 자기의 아집 바울을 통해서 이런 일들을 다 해놓았는데 안아주지 못하는 베드로가 가지고 있는 쓴 뿌리가 있었습니다, 야고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베드로전서1장7절이나 베드로전서2장1절3절 야고보서 보면 야고보 내용들이 어떻게 보면 다 그런 문제들입니다 야고보는 특별히 이 사람은 베드로하고 다릅니다, 베드로는 왜 이런 성격이 되었냐면 열등의식이 강한 사람입니다 바울을 들여다 볼 때 가장 무서운 사람 중에 하나가 열등의식이 강한 사람이 제일 무섭습니다, 파괴적이 되어 버립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우리가 건들면 안 됩니다, 야고보는 열등의식은 별로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이분의 성품이 중도가 된 겁니다, 
이분은 예수님의 육신의 동생이니까 다윗왕족출신입니다 그뿐입니까 교계 안에 들어와서도 로얄 페밀리입니다, 왜냐면 예수님의 육신의 동생이니까 그러니까 야고보는 죄의식이 있었던 것이 하나가 공생애 기간 동안에 자기 형님 되는 예수님을 핍박했던 것이 아마 죄의식 중에 하나 깔려 있었던 겁니다, 그 외에는 야고보가 큰 상처 없이 잘 성장한 사람으로 제가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야고보는 문제가 있을 때 해결해주는 일을 해주었습니다, 
그렇지만 주님이 야고보에게도 많은 가시를 주었습니다, 바울과 베드로와 야고보가 성인입니까 아닙니다, 우리 목사들도 아무리 유명한 목사들 성인입니까 아닙니다, 지금 우리나라에 유명목사들 추태를 우리가 보고 있습니다, 
당연한 겁니다, 거기에 대해서 우리가 손가락질하면 안 됩니다, 
사람들을 너무 많이 가지고 있고 너무 이 세상 좋아버리면 저 세상보지 않고 저 세상을 사모하는 사람들이 추하게 이 세상에 욕심을 많이 가지고 있으면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당연합니다, 그런 사람을 위해서 우리가 기도해주고 이해해주는 거지 그것을 우리가 손가락으로 뭐라고 하면 안 되는 겁니다, 사람의 한계점입니다 오늘 본문 속에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이 사람들이 예수님을 3년을 따라 다녔는데 예수님의 마음을 아직도 가지지 못했던 부분을 우리가 보게 됩니다, 왜냐면 이분들이 쓴 뿌리가 있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이해 할 때 우리가 말씀으로 무장하고 성령님으로 우리의 속을 씻어내고 말씀으로 잘라내고 하면 우리 속에 있는 쓴 뿌리가 완전히는 아니지만 서서히 조금 조금씩 없어지면서 그렇지만 주님께서는 항상 나와 예수님만 알고 있는 육신의 가시는 딱 숨겨 놓으시고 그것을 없애려고 하여도 주님의 은혜 때문에 없애지를 못합니다, 그러면서 그걸 가지고 또 주님 앞에 주님 저를 불쌍히 여겨 주세요, 
이 은혜를 계속 베풀어 주세요 지금 주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겁니다, 이렇게 해서 내가 점점 점 낮아지고 겸손해지고 우리 주님께 내가 이렇게 의지할 때 어떤 사람이 되느냐면 주변을 보면 그런 사람들이 내 눈에 잔뜩 보이는 겁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해야 됩니까 그 사람들을 내가 안아줄 수 있는 겁니다, 용서해줄 수 있고 그 사람을 위해서 기도도해주고 위로도 해주고 이게 나의 큰 그릇이 되는 겁니다, 큰 그릇 왜냐면 주님이 그렇게 만들어 주는 겁니다, 이게 성숙한 사람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완전히 승화 된 것은 아닙니다, 내 모습을 보면서 아하 다른 형제자매들의 모습이 이렇게 보이는 겁니다, 저분들도 이 길을 가고 있구나, 
이런 시각을 가진 사람을 주님께서 성숙한 크리스천이라 그럽니다, 
복 있는 크리스천이라 합니다, 예수님이 마태복음에서 아버지가 온전한 것처럼 너희들도 온전 하라는 겁니다, 100%온전한 게 아닙니다, 
이런 시각을 가지고서 모든 사물을 보고 특히 크리스천들 사이에서 살아가는 겁니다, 이 사람이 성령 충만한 사람이구나, 말씀 충만한 사람이구나, 
은혜가 충만한 사람이구나, 그러니까 고린도전서13장의 말씀이 조금씩. 조금씩 내 것이 되는 이런 사람들이 오래 참을 수도 있고 성품은 본래 참지 못하는 사람인데 조금씩. 조금씩 변화가 오기 시작하고 이런 사람은 모든 사물을 볼 때 참으면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라며 견디는 엄청난 시각을 가지게 되는 겁니다, 환경은 변하지 않았는데 이런 시각의 변화가 바울이나 베드로나 야고보 이런 사람들도 순교직전에 이런 사람이 되지 않았을까 우리가 추측할 수 있습니다 이분들의 이런 부정적인 모습들을 우리가 보면서 이게 하나님의 뜻이었구나, 이분들을 이렇게 만드는 것이 나에게도 주님이 이 과정을 허락 하였군요 그러니까 허락 하였다는 이런 부분을 생각하면서 내가 용서해줄 수 있고 이해해줄 수 있고 사랑해 줄 수 있는 겁니다, 
이게 가능합니까, 가능합니다, 시각의 변화입니다 하나님의 큰 뜻을 보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기도드리겠습니다,
예수님 저희들 오늘 그 유명한 바울과 베드로와 야고보의 관계를 묵상하면서 이것이 왜 이렇게 되었나를 아홉 가지의 여러 가지 배경들을 살펴보면서 이게 하나님의 뜻이구나, 숨겨져 있는 신비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 주님이 주신 이 큰 뜻을 볼 수 있도록 느낄 수 있도록 깨달을 수 있도록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주님 그래서 모든 사물을 볼 때 주님의 시각으로 보게 하여 주시고 개인 개인과 관계할 때도 이 시각으로 관계할 수 있도록 주님 능력을 베풀어 주시고 또 우리에게 용기를 주시고 또 변화가 되어 주님께 영광 드리는 우리가 되도록 은혜 베풀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귀하신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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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시리즈] Ac37. 바울과 예루살렘 사도들 /황용현 목사/ - YouTub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