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일에 "왜 산상수훈을 주셨나?"(마5:9,45; 고전4:15)에 대해 공부했습니다. 그전 주일에는 "너희도 온전 하라"(마5:48)를 공부했습니다. 온전한 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모세 율법'과 '상위 율법'에서 자유케 된 자라 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대신 이 '멍에'를 지셨습니다(마11:28-30). 율법의 저주를 우리를 위해 뒤집어쓰시고 '대속 자'(Redeemer)가 되셨습니다(시22:1; 마27:46; 갈3:13). 이 분(진리)이 우리를 자유케 하셨습니다(요8:31-32). 자유를 맞이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요일3:10). '온전한 자'로 여김을 받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은혜로 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자유를 얻은 다수의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 자유를 만끽하며 누리지 못합니다. 인간의 자유의지와 인간책임을 강조하는 알미니안적 사고방식을 가진 크리스천들입니다. 이들은 성령님께서 우리의 자유의지까지도 지배하시며, 인도하신다는 사실에 민감하지 못합니다. 성령님께 온전히 나의 자유의지를 맡기지 않습니다. 성령님께 맡기면 무책임하다고 합니다.
나의 노력과 의지와 책임을 강조합니다. 성령님 대신, 나의 책임을 우선시합니다. 야고보서 2:17을 인용합니다. 인간 이성과 논리를 중시합니다.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크리스천이지만, 인간 책임을 강조합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크리스천들의 믿음 체계가 이러합니다. 아주 인기 있는 논리이며 가르침입니다.
요즈음 유투브에 '잘 잘법'(잘 믿고 잘 살자) 강사들의 논리입니다. 상당히 인기 있습니다. 많은 크리스천들이 접속하며 은혜 받는다고 합니다. 댓글에 보면 심지어 비 크리스천들도 좋아함을 알 수 있습니다. 전도에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이들이 설득력 있는 논리와 미사여구로, 성경을 이용하여, 이 세상에서 행복하게 사는 방법을 가르칩니다. 대부분의 크리스천들의 소원입니다. 이 세상이 창조목적학교라는 사실에는 무감각합니다.
최선을 다해 이 세상에서 잘 믿고 잘 살기를 소원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크리스천들이 이 소원을 성취 못한 채, 아쉬움을 남긴 채, 때가 되어 죽어 낙원으로 갑니다. 최선을 다했는데, 이 세상 무거운 짐을 그대로 지고 있다가 낙원으로 갑니다. 괴로운 이 세상이었습니다. 열심히 성경대로 살려고 애썼습니다. 그런데 평강 없이 스트레스를 짊어지다가 낙원에 갑니다. '잘 믿고 잘 살아보려고' 부단히 애썼는데 말입니다. 이 모습이 우리 대부분 크리스천의 딜레마입니다. 여기에 대한 답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나요? 저는 '산상수훈'에서 이 답을 찾았습니다.
'산상수훈'이 마태복음 5-7장에 있습니다. 소수 제자들을 향한 가르침입니다. 다수가 아닙니다. 그 내용의 핵심이 무엇인가요? 제자가 되려면 하나님 아버지처럼 온전해야 하는데,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가르치시는 내용입니다. 인간의 자유의지와 노력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가르침입니다. 예수님의 은혜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가르칩니다.
그런데 이 '은혜의 소중성'을, 모든 크리스천이 절감하지는 않는다고 가르칩니다. '영적 아들'(마5:9,45)과 '영적 아버지'(고전4:15) 수준이 되어야만 한다고 하십니다. 이 수준이 되면, 조금이나마, 희미하게나마, 부분적으로나마, 어린아이 수준으로나마, 이 '은혜의 소중성'을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하나님 자녀들이 이 '은혜의 소중성'에 민감하지 않다는 사실을 '산상수훈'에서 가르칩니다.
영적 자녀들을 낳고 키우는 분이 '영적 아버지'입니다. 예수님의 은혜에 빚진 자임을 깨닫는 분입니다. 이런 분이 바로 '땅의 소금'이며 '세상의 빛'입니다(마5:13-16). 순서가 중요합니다. '소금과 빛'입니다. '빛과 소금'이 아닙니다. '생명 살리는 원칙'을 깨달은 분입니다(요12:24). 이 원칙에 따라 '로마제국 복음화'에 적극 참여하는 분입니다. '세계 복음화'에 적극 참여하는 분입니다. 이런 자 되라고 산상수훈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이 '소금과 빛'이셨습니다. 먼저 '소금'이 되시어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시고 죽으셨습니다(마27:50). 제3일에 '부활'(마28:6)하시어, 어두움을 쫓아내시는 '참빛'(요1:9)이 되셨습니다. '생명 살리는 원칙'을 직접 모본으로 보여주셨습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어야만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요12:24).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셨고, 실제로 본인이 실천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대속의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이 은혜를 깊이 깨달으라고 '산상수훈'을 주셨습니다.
소금의 기능이 무엇입니까? 먼저 녹아서 죽어야 합니다. 그래야 녹아서 염분이 제공됩니다. 아니면 제공 안 됩니다. 이 염분이 생물의 생명을 유지케 해주며, 맛도 내주며, 식욕도 증가시켜 주며, 방부제로 음식을 오래 보관케도 해줍니다. 모든 생명체가 염분이 부족하거나 없으면 죽습니다. 생명 유지시켜주는 요긴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예수님이 이 소금이 되셨습니다. 제자들보고 너희도 '소금'이 되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 세상의 소금'이 아니고, '땅의 소금'이 되라고 하십니다. 땅에 묻혀 녹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모본을 보여주셨습니다. 무덤으로 내려 가셨습니다. 그 후에 부활하시어 '이 세상의 빛'이 되셨습니다. '빛' 되시기 전, 먼저 '소금'이 되셨습니다. 이 원칙이 교회시대 전반에 걸쳐 적용되고 있습니다. '산상수훈'의 가르침입니다.
하나님 자녀들의 영적 성장에는 여섯(6) 단계가 있습니다. (1) 영적 유아(헬. nepios, 고전3:1), (2) 영적 어린이(헬. paidion, 마18:2), (3) 영적 사춘기(헬. teknion, 요13:33), (4) 영적 청년(헬. neaniscos, 요일2:13), (5) 영적 아들(헬. huios, 마5:9,45), (6) 영적 아버지(헬. pater, 고전4:15) 입니다. 피라밋 형입니다. 높을수록 숫자가 적습니다.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도전하셨습니다. "너희들이 영적 아들이 되거라"(마5:9,45). 두(2)번이나 입니다. 처음에는 팔(8)복을 가르치시면서, 그 일곱(7)번째에서 입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불릴 것이요"(마5:9)입니다.
두 번째에는 '상위 율법' 네(4)가지 사례들을 주신 후(마5:21-37)였습니다. 이때 '하나님 아들'이 될 수 있는 열(10)가지 덕목을 주셨습니다(마5:39-47). 상당히 어렵고, 거의 불가능한 덕목들입니다. 그러시고는 마태복음 5장의 결론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온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5:48)입니다. 명령형입니다. '역설적 도그마 명령'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칭호 받기도 버거운데, 어떻게 온전해질 수 있습니까? 아직 '영적 아버지' 수준도 아닌데 말입니다.
우리의 질문이 있습니다. 왜 예수님이 준비도 되지 않았던 제자들에게, 이런 불가능한 요건을, 부탁도 아니고, 명령으로 하셨나요? 너무 일방적이며, 상대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는 무례한 명령이라는 느낌이 듭니다. 이것도 제자들과 만나 교제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관계인데 말입니다. 아직 공식적으로 이들을 제자로 선택되기도 전인데 말입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이들이 듣던 안 듣던, 이해하던 못하던, 의도적으로 일방적으로 이것을 명령하셨다고 봅니다. 장차 이들이 로마제국 복음화 현장에서, 이 명령을 부분적으로나마, 희미하게나마, 어린아이 수준으로나마, 이해하게 될 것을 염두에 두시고 말입니다. 이들이 사역하면서 사역 현장에서 이런 고백을 할 것을 미리 아시고 말입니다.
"아하, 우리가 산상수훈의 명령에 부응하려고 그렇게 노력했는데도 잘 안되는 존재들인데, 우리를 아버지 수준까지 만드셔서, 로마제국 안에서 많은 영적 자녀들을 낳게 하시니, 이게 왠 말인가? 왠 은혜인가?" 이들의 이런 고백을 할 것을 미리 아시고(미리 디자인 하시고), 산상수훈에서 '역설적 도그마 명령'을 하셨다고 생각합니다.
이들이 로마제국 복음화 도구로 사용 받았습니다. 그 후 이들의 제자들에 의해 5대 교구가 세워졌습니다. 로마 교구, 콘스탄티노플 교구, 안디옥 교구, 예루살렘 교구, 알렉산드리아 교구입니다. 큰 나무가 되어 많은 열매를 맺었습니다(요12:24). 지금도 이 제자들이 낙원에서, 이런 고백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결코 자신들이 자유의지를 잘 발동하여 열심히 노력했기 때문이 아니라고 고백하고 있을 것입니다. 자신들이 행했던 선한 행동이 한낮 냄새 나는 걸레쪼가리였다라고 고백하고 있을 것입니다(사64:6).
이들이 어떻게, 심지어 낙원에서까지,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을까요? 이들이 '산상수훈'의 가르침을, 낙원에서 드디어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크신 은혜로 의인이 되었다. 라는 사실입니다. 나의 선행이 아닙니다. 이것이 제자들만의 고백이 아닙니다. 낙원에 올라간 모든 성도들의 고백입니다. 예수님의 크신 은혜에 빚진 자들입니다. 이들이 예수님께 고마워하며, 영광과 존귀와 찬송을 드리는 모습을 요한에게 미리 보여주셨습니다(계4:11, 5:13). 지금도 이 장면이 계속됩니다. 장차 우리도 낙원에 가서 이 반열에 참여할 것입니다. 복 있는 자는 낙원에 가기 전,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미리 이 연습을 매일매일 하는 자입니다.
황 용 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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