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용현 목사님 칼럼

22년3월12일 칼럼

변명섭 2022. 3. 13. 05:19

22년3월12일 칼럼

지난 9일 치러진 20대 대선에서 윤석열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습니다. 박빙의 대결이었습니다. 온 나라가 후보 선호에 따라 희비가 엇갈렸습니다. 심지어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도 희비가 엇갈렸습니다. 신기하게도, 한 지붕 밑에서 한 분의 예수님께 예배드리는 같은 교인들인데도, 서로 엇갈린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요? 한 분의 예수님을 섬기며, 같은 신앙고백을 하는 분들인데 말입니다.

 

같은 그리스도인이지만, 예수님이 허락하신 은혜의 분량, 은사의 분량, 믿음의 분량이 다르기 때문입니다(롬12:3-8). 주어진 분량과 그릇만큼, 이세상과 이세상 안에서 일어나는 대소사 사건들을 보기 때문입니다. 주어진 그릇 사이즈만큼, 주어진 그릇 모양만큼 입니다. 어떤 분은 '독수리 시각' 분량과 사이즈, 어떤 분은 '참새 시각' 분량과 사이즈, 어떤 분은 '두더지 시각' 분량과 사이즈 입니다. 개인의 사이즈와 분량은 주권자 하나님(롬9:6-23)의 장중에서 이분의 소원대로 결정됩니다. 바울이 이 하나님의 주권을 개종(주후35)하고 22년 후인 로마서를 집필할 때(주후57) 드디어 깨달았습니다. '독수리 시각자'로 변모 되었습니다.

 

당시 바울에게 큰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자신과 예수님의 12제자들을 포함한 신실한 크리스천들을 핍박하며 순교케한 악한 왕 네로(주후54-68)을 보는 시각에 변화가 왔습니다.

이 네로가 악하지만, 하나님이 임명한 자라는 놀라운 깨달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복종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율례를 거역하는 저주받는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엄청난 기독교의 파라독스(paradox) 입니다(롬13:1-3).

 

바울이 이 깨달음을 그의 영적 아들들인 디도(딛3:1)와 디모데(딤전2:2) 에게 전수시켰습니다. 그는 당시 크리스천들에게 반 네로(anti Nero)사상을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의 서신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는 정치에 관여하지 않고, 핍박 속에서 로마제국 복음화에만 집중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정하신 때(time, kairos)에 네로(Nero)에 의해 로마에서 참수 당했으며(주후68), 그 후 같은 해에 하나님의 정하신 때에, Nero도 자신의 맡겨진 사명 다하고 자살했습니다. 그가 기독교인들의 anti Nero 운동 때문에 왕위 자리를 빼앗기고 자살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때가 되었기에 그가 죽었습니다. 이것이 바울의 정치관과 통치자관 이었습니다.

 

베드로도 바울과 같은 사상을 가졌던 분이었습니다. Nero에 의해 로마에서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순교당한 베드로(주후65)도, 그의 순교 1년 전(주후64)에 저술한 그의 유일한 두(2)서신 중 하나인, 베드로전서에서, 당시 Nero로부터 엄청 핍박을 받고 있는 그의 제자들에게(벧전1:1), 바울이 깨달았던 하나님의 주권사상을 베드로도 깨닫고 이들에게 전수시켰습니다.

 

"주를 위하여 인간의 모든 법령에 복종하되, 권세 있는 왕에게나, 혹은 악을 행하는 자들을 벌하고, 선을 행하는 자들을 칭찬하라고 그가 보낸 관리들에게 하라. 이는 하나님의뜻이 그러함이니----- 모든 사람을 존경하고 형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왕을 존경하라"(벧전2:13-17).

 

베드로는 1년 후 자신을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아 죽일 악한 왕 Nero를, anti Nero 운동하지 말고, 오히려 그를 존경(honor)하라고까지 제자들에게 가르쳤으니 분명 기독교의 파라독스(paradox)가 아닐 수 없습니다.

 

얼핏 보면 당시 바울과 베드로를 위시한 기독교 지도자들이 저세상 복음에만 미친, 애꾸눈을 가진 사회성이 없는, 비인격적, 비인간적, 비인권적, 비이성적, 비상식적 외골수들로 보일 수 있었습니다. 이들이 주변의 '두더지 시각'을 가진 기독교인들의 비난의 대상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일부 '참새 시각' 기독교인들도 이 지도자들을 이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어떻게 악한 왕의 비행을 묵과 할 수 있는가? 심지어 존경까지 하라고? 도저히 용납 할 수 없다. 악과 싸워야 하는 것이 기독교인의 사명인데 말이다.

 

어떻게 이런 비인간적이며, 비이성적이며, 비상식적인 파라독스를 수용하며 따르며 순종 할 수 있는가? 시각의 변화를 받으면 가능합니다. 바울과 베드로가 은혜로 때(time, kairos)가 되어, 시각의 변화를 받았습니다. 어떤 시각의 변화인가요? 하나님 나라(저세상, 이 세상, 저세상)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었습니다. 이 세상 7,000년이 창조목적학교라는 시각이었습니다. 교장이 예수님이시며, 교감이 사탄이며, 사탄의 자녀들이 나쁜 교사들이며, 하나님의 자녀들은 천국시민이지만(엡2:19; 빌3:20), 학생으로, 창조목적의 절대성과 중요성을 교육받기 위해 잠깐 이 세상에 내려온 나그네와 순례자(히11:13; 벧전2:11)라는 시각이었습니다.

 

바울과 베드로에게, 이들의 사역 후반부에, 어느 정도 영적 성숙기에, 그 동안 희미하게 소화했던 이 '하나님 나라'의 큰 그림을 보여주셨습니다. 이 세상 7,000년이 창조목적학교임을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그 동안 사역초기에는 '두더지 시각'으로, 사역중반에는 '참새 시각'으로, 크리스천과 복음에 반대하며 핍박하는 로마제국과 Nero왕을 미워하는 눈으로 보았는데, 이제 '독수리시각'으로, Nero왕 뿐만 아니라, 자기네 조국 이스라엘의 고난의 역사까지도, 새로이 조명 받도록 인도받았던 것입니다. 과거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왜 악한 바로 왕을 세워 조국 이스라엘을 괴롭히게 하셨는지도 깨달았습니다(출4:21). 왜 여호와(예수님)께서 악한 바벨론왕 느브갓네살을 자신의 종(my servant, 렘43:10)이라고 하셨는지도 깨달았습니다.

 

우리도 바울과 베드로처럼, 부단한 훈련과정(chronos)을 거쳐, '두더지 시각자'에서 '참새 시각자'로, 그리고 성숙의 때(kairos)가 차서, '독수리 시각자'로 발전되면 이 세상을 보는 시각에 변화가 생기게 됩니다. 우리나라의 역사를 보는 시각에도 변화가 따라옵니다. 이번 대통령 선거를 보는 시각도 일반 기독교인들의 것과 다르게 됩니다. 이번 대통령 선거 결과를, 같은 기독교인이지만, 상기의 세(3)종류의 시각자 마다, 수용 수준이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나와 다른 시각자를 안아줄 수 있게 됩니다. 창조목적학교의 교장이시며, 역사의 주인이시며, 역사의 주관자이신 예수님의 장중에서(마28:18) 이번 선거가 치러졌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예수님 안에서, 악과 어두움까지도 창조하신 분이, 이번 선거과정에서 이것들이 판치도록 허락하셨다는 사실(사45:7, 54:16)도 인정합니다. 이런 과정 속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뜻을 이루신다는 사실도 깨닫게 됩니다. 불법과 부정과 부조리와 속임 속에서도, 역사의 주관자 예수님 안에서 평강을 누릴 수 있습니다.

지난 5년간 문재인 대통령을 세우시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자신의 뜻을 이루신 예수님께서, 앞으로 5년간 윤석열 대통령을 사용하시어 우리 민족을 향한 자신의 뜻을 반드시 이루실 것입니다. 남북통일 시키시어, 으뜸민족으로 높이시어, 복음나팔수로, 만민에게 복의 근원이 되는 민족으로 승화되는 일이 향후 5년 기간에 일어났으면 하는 거룩한 욕심과 기대를 걸어 봅니다.

황 용 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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