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서 9강. 빛의 자녀가 되자(빌2:12-18) 2000년 말씀
오늘 말씀은 빌립보서2장12절부터18절까지 말씀입니다.
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14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15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16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17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18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 아멘.
하나님아버지 2천 년 전에 사도바울이 3차 여행을 끝내시고 로마감옥에 들어가시고 그동안에 바울에게 신실하게 기도와 물질로 동역 자 역할을 해왔던 빌립보교인들에게 하셨던 말씀을 저희들이 상고하고 있습니다.
빌립보교회가 주님을 사랑하며 주 안에서 사도바울을 그렇게 존경하고 동역의 동역 자가 되었지만 그 속에 주님이 기뻐하지 않으시는 그런 부분들이 있기 때문에 바울을 통해서 그 부분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계심을 이 시간에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하나님이 이 말씀이2천년 동안에 많은 주님의 백성들에게 전해졌고 이 말씀 때문에 많은 분들이 그리스도와 더 가까워지며 예수의 마음을 품은 자들이 되었던 것을 기억하면서 오늘도 저희들이 이 말씀을 통해서 예수의 마음을 가질 수 있는 저희들이 되도록 은혜 베풀어 주시옵소서 그러기위해서는 저희들의 마음을 활짝 열게 하시고 성령님의 조명하심이 우리에게 강하게 임하기를 바랍니다. 성령님이시여 임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그동안 하나님이 빌립보교회를 이렇게 볼 때 빌립보교회는 사도바울의 물질과 기도의 동역자인 것을 우리가 다 아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너희들이 착한 일을 한 너희들에게 이런 말을 썼잖습니까? 그렇게 이야기했고 그렇지만 이 교회 안에 여러 당파심이 있었습니다. 사람이 모였기 때문에 어디가나 똑같습니다. 이기심과 당파심과 자만심이 교인들 안에서 또 어떤 분들은 성품이 강해가지고 독선이 있었고 그래서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지를 못했다는 그러한 말씀으로 사도바울은 빌립보교회에 말씀하시는 겁니다.
복음에 합당한 복음의 가치를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지난시간에 사도바울은 성령님의 가르침에서 뭐라고 그러느냐면 너희들 예수의 마음을 품어야 된다. 그러는 겁니다. 이것은 꼭 빌립보교회만이 아니고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의 마음을 품자고 그래서 2장1절에서5절 말씀 기억나시죠. 그것을 우리가 자꾸 잊어버립니다. 그 말씀을 제가 다시 한 번 반복을 해볼 테니까 가만히 들어 보세요 예수의 마음을 품는 것이 어떤 것인가? 사람들이 너희들이 권면이 있지 위로가 있지 교제가 있지 자비가 있지 이런 말들을 많이 하지만 예수의 마음을 가지지 않고 하기 때문에 그냥 형식적으로 하는 경우가 많다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은 너희들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하나로 묽어서 한 마음을 가지고 이런 마음을 가지고 할 때 다툼이나 허영이 없어진다는 겁니다. 그래서 겸손한 마음으로 위로도 해주고 격려도 해주고 긍휼을 베풀고 자비를 베풀라는 겁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이웃을 배려하는 마음을 예수님의 마음이라고 그랬습니다. 항상 저분이 나보다 낫다는 그러한 마음 그게 겸손한 마음인데 왜냐면 이런 사람은 자기가 낫다는 경험을 하지 않으면 저 사람이 나보다 낫다는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복 있는 사람은 조금 어려움을 격어야 됩니다. 그래가지고 코가 낮아지는 연습을 해야 됩니다. 그게 복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스스로가 저분이 나보다 못난 것 같은데 알고 보면 내가 더 못 났구나. 이것을 하나님이 고백하게 합니다. 이 고백을 할 수 있을 때까지 나를 낮추시는 그것이 복 있는 사람입니다 그걸 걸 어느 정도 겪으십니까?
저도 마찬가지로 소위 목사지만 항상 이 마음을 가지지 않으면 제가 주님을 섬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아! 황 목사님 그 사람 이제 나이도 지긋하고 공부도 많이 하고 아는 게 많고 어쩌고저쩌고 나를 이야기할 때 그렇게 하지만 나는 내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들이 너무나 많은 겁니다. 유명한 빌리 그래함 목사님도 항상 그런 말씀을 하십니다. 왜냐면 주님 앞에서는 주님이 보실 때는 항상 머리 둘 곳이 없는 그러한 하나님의 종이 되기를 바라고 우리 모두가 다 그런 마음을 항상 가지고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이런 마음을 가진 사람은 소위 성숙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아주 중요한 요소를 가진 분입니다. 그러니까 나도 그런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낮아지는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그래서 저 사람이 나보다 낮다 나보다 학벌은 없지만 성품이나 마음가짐을 보면 나보다 낮다 항상 그래서 그분을 보면 존경스럽게 보이는 그런 마음 이것이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이 마음을 우리가 항상 가져야 됩니다.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은 싸움을 하지 않습니다. 싸움할 이유가 없는 겁니다. 왜냐면 저 사람이 나보다 나아보이니까 싸움이라는 것은 내 의견이 강할 때 싸움을 하는 겁니다. 내가 교만한 마음이 있을 때 싸움하는 겁니다.
자기의견을 관철시키려고 할 때 싸움하는 거지 자기가 나은 게 별로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매일 주님의 은혜와 용서 안에 산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싸움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남을 비판할 그럴 경우도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여기서 말씀하시는 게 뭐냐면 12절에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이때 아가페라는 말을 썼습니다. 너희들이 그러지만 나는 조건 없이 사랑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아가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 아니라 지금 내가 없을 때도 지금 내가 감옥에 있는데도 항상 복종하고 두렵고 떨리면서 너희 구원을 이루라 그랬습니다. 여기 보면 명령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빌립보서는 원어를 들여다보면 명령형이 많습니다.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가 구원을 이미 받았는데 무슨 구원을 이룹니까? 이렇게 말합니다. 성경에는 구원이 세 가지의 단계가 있습니다. 첫째는 과거적인 측면에서 말할 때 구원입니다 과거에 이미 거듭났습니다. 현재적인 측면에서 구원을 소위 성숙과 성화단계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마음을 품는 성숙의 과정을 구원이라는 말로 표현을 했습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는 미래적인 측면에서의 구원입니다.
나중에 우리가 죽어서 하늘나라에 들어가서 주님과 교제하며 상급을 받는 그 구원 그게 마지막구원입니다 이 구원까지를 사도바울은 이야기하는데 오늘 말하는 이 구원은 뭐냐면 예수님의 마음을 품어서 성화되는 성숙되는 구원을 이루라는 겁니다. 그런데 앞에다가 형용사 둘을 붙였습니다.
두었고 떨림으로 이렇게 되도록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명령하십니다.
왜냐면 이게 두려운 겁니다. 떨림이 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왜냐면 성화를 내가 하지 않으면 성화의 구원단계를 내가 성취를 못하면 신앙생활을 내가 오래해도 나중에 주님을 만날 때 가서 보니까 아무 흔적이 없는 겁니다.
주님의 기록이 없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성화의 삶을 사는 낮아지는 마음 남을 위하는 마음 배려하는 마음으로 모든 사람을 감싸주지 않고 내 의견이 강하고 다툼이 있고 분쟁이 있고 투기가 있고 이런 삶을 사는 사람들은 원죄는 구원을 받았지만 두 번째 구원단계를 맞보지 못했기 때문에 두렵게 생각하라는 겁니다. 하늘에 올라가면 너는 흔적이 없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상급이 없다는 말입니다. 상급이 없기 때문에 광야에 사는 사람처럼 그분들은 구원은 받았지만 애굽에서 광야에서 불평이나 하고 하나님도 섬기고 우상도 섬기며 그렇기 때문에 그분들은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구원을 이루라는 이 말씀이 엄청나게 두려움으로 떨림으로 와야 됩니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에게 없는 것이 심각한 문제입니다. 이때 구원을 이루라는 그 말씀에 동사가 있습니다. 명령형으로 되어있는데 현재에 그것을 이루라는 겁니다.
그런데 원어에는 어떻게 되어 있느냐면 현재형이지만 지숙적인 행동을 암시해주는 단어가 이 단어입니다 현재 한 순간이 정지 상태가 아니고 현재 이루고 있지만 그것이 진행적인 의미가 숨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취를 위해서 계속해서 나태하지 말고 이루어나가라는 말입니다 예수의 마음을 내 성품에 담고서 열매 맺는 그날까지 나태하지 말고 계속해서 이루어나가라는 이러한 의미가 구원을 이루라는 이러한 말씀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어떤 방법으로 예수님의 마음을 우리가 품을 수가 있냐를 사도바울이 13절에 보면 가르쳐주십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신다는 겁니다.
구원을 이루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여기서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일반적으로 보면 이게 무슨 뜻인지 말 모르실 텐데 제가 설명을 해드리는 겁니다. 먼저 내 안에서 구원을 이루도록 성숙하도록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도록 행하신다는 겁니다. 행한다는 원어가 뭐냐면 에네르게이아(Energeia)라는 말인데 에네르(Ener)라는 말이 행한다. 일하신다는 말인데 이 말이 영어로 에너지(energy)라는 말로 이렇게 파생되어 있습니다.
이 말이 뭐냐면 구원받은 자는 이미 내속에 예수님의 성품이 들어와 있습니다. 구원을 위한 성령님이 내 속에 들어와 계십니다. 그런데 이 성령님이 내 안에서 활동을 못하시는 겁니다. 왜냐면 내 속에 하트(heart)와 카르디아(Kardia)깊은 마음 속마음 그다음에 겉에 있는 마음을 소올(soul)이라고 그럽니다. 프쉬케(psuche)라는 말로도 쓰는데 밑에 하트(heart)에 이미 성령님이 내재하시면서 예수님의 성품이 내속에 이미 들어와 있습니다.
들어와 있는데 내속에 세상의 성품들이 믿음과 질투와 모든 세상의 성품들이 같이 그기에 있기 때문에 내속에 있는 예수님의 성품이 활동을 못하시는 겁니다. 에너지(energy)를 발산을 못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내안에서 행하시도록 예수님의 성품이 흘려 나오도록 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면 보혜사성령님이 나를 돕기 위해서 공기 속에 계신 성령님입니다. 보혜사성령님인 파라클레토스(parakletos)성령님이 파라(para)라는 말은 나와 같이한다는 뜻입니다. 클레토스(kletos)라는 말은 불려야만 오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초청을 수동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불리 움을 받는 분 그런 말이 클레토스(kletos)라는 말입니다. 내 옆에 이렇게 와서 계신데 내가 초청을 해야지만 나한데 오시는 그분이 보혜사(保惠師)성령님으로 나를 도와주시는 분입니다.
구원을 이행하시는 분이 아니고 이분은 성화되기 위해서 구원을 행하시는 나를 도와주시는 그래서 주님이 제자들에게 너희들이 몇 날만 있으면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텐데 오순절 때 오신 성령님을 말씀하시는 겁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매일매일 그 성령님 보혜사성령님이 나에게 와서 계십니다. 이 분이 나에게 오셔서 내 머리위에 와서 임재하시고 내속에 들어오셔서 어떤 때는 이슬같이 임하시고 어떤 때는 비둘기 같이 임하시고 어떤 때는 불같이 임하시고 어떤 때는 폭풍같이 임하시고 그 성령님이 나에게 임하셔서 내 속에 있는 들어온 것들을 씻어내는 이것을 소위 우리가 말하는 성령세례라는 겁니다. 성령세례를 받아서 한번 일회적으로 한 다음에 그다음에 더러운 것들을 뽑아내는 겁니다. 미움이 나가고 질투가 나가고 불평이 나가고 분리하는 영들이 나가고 그다음에 성령님으로 충만해지는 겁니다.
이러한 성령세례와 성령 충만이 나에게 이렇게 오실 때 그 때 이미 내속에서 소원을 두고서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변화되고 성화되면서 그것을 행하게 하시는 겁니다. 소원을 둔다는 이 말은 누르마인드라는 말인데 이것은 자유의지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내속에 소원을 두고 그래서 내가 오 나는 주님의 마음으로 가고 싶습니다. 성령세례를 받고 매일 말씀과 성령님의 씻으심을 매일 경험하는 자는 주여 저는 주님의 마음으로 소원을 가지고 싶습니다.
주님의 마음이 되고 싶습니다. 이게 소원을 가지게 됩니다. 이 단계에 안 가면 아무리 말을 해도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내가 가질 수가 없습니다.
소원이 없는 겁니다. 그래서 성령세례를 우리가 받아야지만 그러니까 그 성령세례는 각자가 매일매일 받을 수가 있습니다. 저는 아침에 일어나면 주님 앞에 첫마디로 찬양하는 찬양이 뭐냐면 이것입니다. 왕이신 나의 하나님 내가 주를 높이며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라 오늘아침에도 눈 뜨자말자 의무적으로 자유의지입니다. 의무적으로 이 찬송을 하는 겁니다.
그러면 성령님이 나에게 다시 임하시면서 너가 나를 기분 좋게 하는구나.
그러시는 겁니다.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분을 기분 좋게 해서 따리를 붙어야 됩니다. 의무적으로 그런데 그런 마음이 없습니다. 제가 목사지만 그런 마음이 없을 때가 많습니다. 그렇지만 주여 의무적으로 주님 앞에 따리를 붙이는 겁니다. 그러면 주님이 그때 또 나에게 성령님이 임하심으로 기름 부으심으로 임하시는 겁니다. 그러면 내속에 있는 모든 잡동사니 같은 것들을 뽑아주시는 겁니다. 매일매일 하셔야 됩니다. 운전하면서도 하시고 그러면 조금씩, 조금씩 예수님의 마음을 우리가 가지게 됩니다. 왜 우리가 그렇게 가지게 됩니까? 13절에 보면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우리에게 소원을 둔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동기가 분명해야 됩니다.
내가 이렇게 그리스도의 마음을 나에게 주세요. 주세요. 할 때마다 무엇을 고백하느냐면 이렇게 하면 주님이 기뻐하시고 제가 주님이 기뻐하시는 이방사역을 내가 할 수 있잖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나에게 이 마음을 그리스도의 마음을 주십니다. 그 마음을 내가 가지야만 사방에서 모여드는 이방형제자매들을 내가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사랑할 수 있잖아요 그분들을 조건부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있는 그대로 내가 사랑할 수 있잖아요 주님! 그러니까 주님의 마음을 나에게 주세요. 주님의 마음을 나에게 주세요. 그러면 뜻이 어디에 있습니까? 주님의 마음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그러는 겁니다.
우리의 삶의 목적은 주님의 마음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게 해서 주님의 마음을 기쁘게 하다보면 내 마음이 기뻐집니다. 그러니까 내 마음이 주님이 기뻐하실 때 내 마음이 기뻐하는 것이 성령의 열매에서 나오는 기쁨입니다. 그냥 내가 좋아서 기뻐하는 것이 아니고 아하! 주님 만족스럽습니까? 주님 기쁘시죠. 그러면 주님이 주시는 기쁨이 나에게 확 오는 겁니다.
우리가 그 기쁨을 맛보아야 합니다. 주님의 뜻을 행할 때 그렇게 주님의 기쁨을 맛보게 되는 이것이 단회성이 아닙니다. 이것은 한 번에 오는 것이 아니고 단회 적이지만 어떤 하나의 점에서 항상 점진 성을 띄고 있습니다.
오늘 내가 그러한 걸 경험하고 내일은 조금 더 한 학년 올라가는 것을 경험하고 모레는 또 한 학년 더 올라가는 것을 경험하고 점진성입니다.
또는 계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이게 단계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제보다 오늘이 점점 더 높은 단계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발전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매일매일 내 성품이 내 인격이 그리스도의 인격과 성품으로 변화되고 성화되는 겁니다. 빌립보교회가 이런 부분에서 약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빌립보교인들에게 너희들이 이런 것이 없기 때문에 나에게 물질도 주고 나를 위해서 기도도 하고 나에게 인간적인 도움을 많이 주지만 너희들은 아직 성숙하지 않다는 겁니다. 왜냐면 너희들을 들려다보니까 투기와 분쟁이 있고 다툼이나 허영이 많고 그다음에14절에 원망과 시비로 하나님 일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빌립보교회가 다른 에베소교회나 데살로니가교회나 고린도교회보다는 훨씬 성숙한 교회지만 그 안에 아직도 이런 미성숙이 보인다는 겁니다. 사탄의 성품인 시비가 있고 원망이 있고 다툼이 있고 물어뜯고 분쟁이 있고 투기가 있고 화합을 깨는 파괴적인 성품입니다. 디아볼로스(Diabolos)라는 마귀라는 이름은 파괴자라는 소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들 사이를 이렇게 파괴시키는 성품이 어디서부터 나오느냐면 마귀는 우리에게 자기중심적인 이타주의가 아니고 자기 이기주의적인 공동체 안에서 성품을 가지게 하면서 이렇게 나옵니다. 그러니까 항상 예수님의 마음은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인데 자기고집이 강한 사람이 이기심이 강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런 걸 깨달은 다음에 저 사람을 보면 항상 자기의견이 강하고 자기와 다른 사람의견을 수용을 못하게 하려고 그러고 자기생각으로 이렇게 해야 됩니다. 이래야 됩니다. 그리고 말을 안 들으면 나가서 분리를 하는 이런 사람들이 우리공동체 안에서 얼마나 많습니까?
성숙을 보여주지 못하는 그런 사람들이 어느 나라나 교회나 가면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한국민족에게 이것이 어느 나라 민족보다 더 강합니다. 분리를 제일 많이 하는 크리스천공동체가 대한민국교회들입니다.
전 세계에서 제가 담대하게 말합니다. 저는 전 세계에 다니면서 교회들을 다 본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가 압니다. 그러니까 우리한국민족은 영의 눈으로 주님이 보실 때는 어린아이들입니다 기독교역사가 깊은 백인들의 지도자들이 이렇게 한국교회를 보면 영적으로 어린아이들이라 그럽니다.
저에게 몇 번 말합니다. 제가 얼마 전에도 미국에 어느 큰 교단에 선교책임자와 미팅을 하면서 그분이 그러는 겁니다. 절보고 한국에는 새벽기도 열심히 하지 그리고 자기도 한국에 몇 번 가보았고 기도원에 가면 뜨겁고 큰 교회 많고 헌금도 많이 나오고 선교도 많이 한다고 하여 우리가 볼 때는 굉장히 부럽단다. 그런데 왜 한국교회가 그렇게 싸움을 많이 하고 미국에 있는 한국교회들 보면 그렇게 갈라지고 싸움하고 서로 협조안하고 왜 그러느냐고 저에게 그러는 겁니다. 그걸 자기가 빤히 알면서 나를 놀려주려고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겁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한국교회가 아직도 어린아이들이라는 겁니다. 연합을 못하고 지난 우리교회 기공식에 여기서 1.2km떨어진 곳에 목사님이 오신 겁니다. 그분은 선교마인드가 있고 벌써 사람이 그릇이 다른 겁니다. 얼마나 존경스럽습니까? 그분은 우리가 이렇게 하는 것을 질투심을 느끼면서도 이분들을 도와야 되겠다는 마음으로 왔다는 겁니다.
그분이 왜냐면 주님을 바라보니까 그러는 겁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이분들이 하는구나. 우리가 못하는 것을 그분이 나에게 그러는 겁니다.
제가 여기 숨어 있는 것을 여기 와서 봤습니다. 그분이 과거부터 저를 압니다. 제가 주님 일을 선교 일을 하는 것을 옛날부터 아는 사람입니다.
그분의 교회는 큰 교단으로 자기가 일을 하려고 해도 당회에서 움직여주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자기는 상당히 딜레마에 빠져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분은 이 사역을 해야겠는데 당회가 움직여주지 않고 그러니까 우리가 하는 일에 나와서 돕겠다는 겁니다. 당신들이 우리대신에 하고 있으니 자기네가 돕겠다는 겁니다. 그렇게 나오는 목사님이십니다.
그런 분들을 제가 격려해주어야 됩니다. 이렇게 주님께서 예수그리스도의 마음을 닮으면 14절에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게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 교회가 그런 게 있는 겁니다. 원망이라는 말은 곡구스몬(γογγυσμω̑ν)인데 원어사전에는 험담하는 불평을 곡구스몬(γογγυσμω̑ν)이라고 말했습니다. 항상 자기중심이기 때문에 자기 마음에 안 맞으면 투덜되는 겁니다.
연합을 화합을 생각 안하고 자기생각만 하고 험담하고 불평하고 투덜거리는 시비라는 말은 헬라어로 디아로기스몬(διαλογισμων)으로 사전을 찾아보니까 무슨 뜻이냐면 악한 생각으로부터 불안한 생각이나 의심이나 논쟁과 다툼까지도 포함하는 분열적인 행동을 시비라고 그랬습니다. 시비라는 말이 악한 생각으로부터 불안한 생각이나 의심 또는 논쟁과 다툼까지도 포함하는 분열적인 행동을 디아로기스몬(διαλογισμων)으로 이런 마음이 없어져야 합니다.
이렇게 될 때 사도바울은 15절에 써놓았습니다. 이런 마음이 없어지면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게 된다는 겁니다. 우리가 다 이렇게 되어야 합니다.
흠이 없고 순전하게 된다는 겁니다. 이게 주님의 눈으로 볼 때 그러는 겁니다. 흠이 있다는 말을 어떻게 썼느냐면 아멘푸뜨스라는 말을 썼습니다.
그리스말로 아가 붙으면 부정적인 뜻이 있습니다. 멘푸뜨스라는 말은 비난하는 그런 말입니다. 그래서 아가 붙으면 사람들에게서 비난받지 않는 하나님에게서 비난받지 않는 비난에서 자유를 누리는 그런 뜻이 됩니다.
그러니까 나중에 우리가 주님을 만나려갈 때 아멘푸뜨스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뭐냐면 너 참으로 흠이 없는 아이구나 너 정말 흠이 없구나.
이런 소리를 들어야 되고 순전 하다는 말과 똑같은 말입니다.
순수하다는 말이 헬라어로 아케라이오(ακεραιο)라는 말인데 아가 붙었습니다. 주님이 볼 때 흠이 없는 이런 사람을 볼 때 어떤 사람이냐면 예수의 마음을 가지고 항상 남을 배려하고 분리가 있을 때 화합을 하고 항상 어디로 가든지 내 의견이 강하지 않고 화평을 위해서 내가 죽어주고 그러면서 그분을 항상 껴안아주고 다른 사람을 이해해주고 이렇게 될 때 주님은 사도바울은 이런 성품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그렇게 닮아가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15절에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나게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될 때 흠이 없는 자녀가 되는데 거기에 보면 세상을 이렇게 표현을 했습니다. 세상의 빛이 되는데 어떤 세상이냐면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상에서 그랬습니다. 이 세상을 이렇게 표현을 했습니다. 어그러진다는 말은 영어로 크루크드(crooced)라 그랬는데 뭐냐면 저 사람이 거짓말 잘하고 사기성이 있어가지고 마음이 구부러졌다는 겁니다.
이 세상이 크루크드(crooced)한 세상은 진리가 왜곡되어 있는 세상입니다.
예수그리스도가 진리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는 말씀이 진리인데
그것이 비뚤어져버렸습니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의 마음이 아닌 사람이 더 출세하고 더 잘되고 그런 세상이라는 겁니다. 그런 세상 안에서 거스르는 일이라는 말은 비뚤어졌다는 겁니다. 비뚤어져서 나쁜 길로 인도한다는 겁니다. 이런 세상입니다. 나쁘게 인도해야지만 더 잘되는 세상입니다.
어두움이 지배하는 세상입니다. 어두움이 진리가 되는 이 세상에서 예수의 마음을 품을 때 우리들은 빛의 역할을 거기다가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오늘 제목의 빛의 자녀가 되라는 말씀이 그 사람들을 변화시키려면 그 사람들을 어두움 속에 가는 사람들인데 그게 이 세상만이 아닙니다.
교회도 똑같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지만 어두움 속에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 사람을 닮아가는 사람은 어두운 사람들입니다. 구원은 받았지만 가치기준이 세상 사람들과 같기 때문에 그러는 겁니다. 빛의 역할을 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의 어두움이라는 것은 그 사람들 속에 투기가 있고 분쟁이 있고 세상 사람들의 어두움을 그대로 닮아가는 가는 사람들입니다
허영이 있고 원망이 있고 시비가 있고 용서가 없고 이해가 없고 화평이 없고 오래 참음이 없고 감사가 없고 온유와 절제와 이 모든 하나님의 마음이 없는 겁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빛의 역할을 하려면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을 때 그 어두움들이 쫓겨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어두움을 그냥 나가라, 나가라 소리만 지르면 되는 게 아닙니다. 사람이 인격이 예수님으로 변해야 된다는 겁니다. 인격이 예수님으로 변화지 않고는 어두움이 물려가지 않는다는 겁니다. 남을 배려하는 마음 겸손한 마음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마음 용서해주고 불쌍히 여기고 화평을 항상 나누어주고 이런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이 마음을 가지고 인격이 예수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변하면 주위에 어두움들이 물려나간다는 겁니다. 투기가 없어지고 분쟁이 없어지고 미움과 질투와 이런 것들이 그런 사람들 앞에서는 없어지는 겁니다.
그런 사람이 한 마디 말을 하면 내 속에 있는 질투가 슬슬 도망가는 겁니다.
능력자가 되는 겁니다. 그런 성품을 가진 사람이 설교를 하면 그 속에서 악한사람들이 나가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런 사람들이 기도를 하면 그 속에서 나가는 겁니다. 그게 능력입니다. 그래서 빛들로 나타내며 빛이 헬라어로 포스로 라이트(right)의 파생 음입니다. 빛의 자녀라는 것은 원어를 보면 포스테르(phdster)하면 등불 항구의 등대라는 말로 쓰 있습니다. 봉화 불 이런 것을 포스테르(phdster)라 그랬습니다. 빛을 발하는 물체라는 겁니다.
이렇게 주님의 모습으로 빛을 발하는 등대로 파도 속에서 헤매는 배에게 등대역할로 빛을 발하여주는 겁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마음이 나에게 임하고 내가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항상 비쳐주고 그 마음이 나에게 임재하면 우리가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내 속에서 나는 보이지 않지만 영의 눈을 뜨고 보면 내가 영광체로 빛이 나는 겁니다. 빛이 나니까 내 속에서 내가 하는 말이 빛의 말이 나오니까 등대역할을 하는 겁니다. 내가 말만 하면 빛이 나오니까 어두움이 물려가는 겁니다. 내가 보기만 해도 어두움이 물려가는 겁니다. 이렇게 되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내 마음이 어떻게 됩니까?
내 마음이 그리스도의 마음을 차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점진적이라고 그러지 않습니까? 발전적이라고 그랬습니다. 단계적이라고 그랬습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매일매일 조금씩, 조금씩 차가는 겁니다.
차가면 나도 모르게 내 속에 평강이 있고 미움이 없고 항상 모든 사람을 은혜로 보고 모든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는 마음으로 보이고 사물을 봐도 파도가 쳐도 그 파도가 지배하지 못하고 이렇게 화평한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겁니다. 그것이 뭐냐면 영광체로 변하는 겁니다. 나에게 영광이 나타나기 때문에 그래서 영광이 많이 차 있으면 우리가 하늘나라에 올라가면 어떻게 됩니까? 하늘보좌가까이 있게 되고 상급을 받는 사람이 됩니다. 면류관을 이런 사람이 자동적으로 다 되는 겁니다. 이런 사람은 소위 피스메이커입니다
어디가든지 화평케 하는 일을 합니다. 사도바울은 지금 성령님의 가르치심에 의해서 이 문제 있는 빌립보교회를 향해서 감옥에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사도바울의 사역의 최종목표가 여기에 쓰 있습니다. 빌립보교회교인들이 헌금도 잘하고 기도도 잘하고 마음씨도 착하지만 그렇지만 그 속에 깊은 성령님의 원하심이 그리스도의 마음은 아직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그럽니다. 내가 너희들에게 바라는 것이 있다는 겁니다. 뭐냐면 너희들은 이렇게 해서 성숙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데 사도바울은 내가 너희들을 이렇게 성숙한 사람이 되어야지만 내가 지금 달리고 있는 마라톤경기가 헛되지 않다는 겁니다. 16절에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 이것이 사도바울의 마지막 그분의 꿈입니다. 뭐냐면 우리 모두는 예수 안에서 달려가는 마라톤선수들입니다. 마라톤게임을 하려면 얼마나 힘듭니까? 사도바울은 이 사람들을 향해서 마라톤을 하는 겁니다. 이 사람들을 데리고 복음전하는 것도 가다보면 목도 마르고 언덕도 있고 어려움이 엄청나게 많이 있는 겁니다. 감옥에 들어간 것도 마라톤경주 중에 하나입니다
이렇게 마라톤경주를 하는데 그다음에 수고를 얼마나 합니까?
이분들을 위해서 말 안 들으면 편지 써서 달래야 하고 이 모든 수고들이 너희들이 예수의 마음으로 열매를 맺지 않으면 내가 지금 달리고 있는 마라톤경기가 내가 수고하는 것이 헛되게 된다는 겁니다. 다시 말하면 제자들이 성령의 열매로 열매가 맺어지지 않으면 가르침이 다 헛되다는 겁니다.
실컷 복음을 전해놓았는데도 교인들보면 그저 앉아서 싸움하고 미워하고 질투하고 그 안에 그리스도의 모습이 안 보이는 겁니다. 평생 40년을 목회해도 교회가 다 그런 모습을 보였을 때 그 목사님은 달려가는 것이 다 헛되다는 겁니다. 구원은 받았지만 사역은 그렇게 하고 땀을 많이 흘렸지만 열매가 없다는 겁니다. 사도바울의 자랑이 뭐라고 그랬습니까? 교인들 중에 전부가 다 이런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 여기 있습니다. 주님 제가 받칩니다.
이렇게 해서 자랑거리가 조금 대게 해달라는 겁니다. 안 그러면 내가 당신들을 위해서 뛰고 당신 들 때문에 감옥에 있는데 이것이 다 헛수고라는 겁니다. 성숙하다는 것은 인격에 변화가 와야 되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상급을 받게 되는 조건이 뭐냐면 제자들이 성숙하는 겁니다. 인격의 변화입니다.
예수의 마음으로 품어주고 그래서 이 속에 더러운 것들을 뽑아주는 것이 인격의 변화가 오려면 그래서 제가 성령세례를 받으라고 그러지 않습니까?
성령세례를 받는 과정 중에 하나가 자기를 고백하며 내 속에 있는 것을 뽑아내며 이러면서 성령의 열매가 맺어져야 합니다. 아무리 말씀을 들어도 그것이 머리에만 뱅뱅 돕니다. 그러면 머리만 크지는 사람이 됩니다.
사람이 겸손해지지가 않습니다. 교만해집니다. 아는 게 많고 그래서 성숙해지지 않는 겁니다. 그리고는 마음이 가난해 진 다음에 그기에 성령님의 세례가 자동적으로 임하게 됩니다. 사도바울은 빌립보교회가 아직은 성숙하지는 않았지만 마지막 말씀입니다. 17절18절입니다.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 바울은 아직은 빌립보교회가 성숙하지 않았지만 빌립보교인들이 성숙하게 될 것을 확신하는 겁니다. 왜냐면 바탕이 되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다른 교회와 달리 이분이 어려울 때 별로 불평 없이 물질되고 기도해주는 동역 자가 되어주심으로 이분이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이미 나에게 보내준 믿음의 재물과 봉사로 내가 알 수 있다는 겁니다. 너희들이 얼마나 복 받을 사람인가를 그런데 아직은 성숙하지 않다는 겁니다. 아직은 성숙하지 않지만 너희들의 마음바탕은 되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너희들이 이미 나에게 보내준 믿음의 재물과 봉사 위에다가 내가 나의 전제를 거기다가 얻어 놓으면 너희들은 앞으로 성숙해질 거라는 겁니다. 전제라는 말이 뭐냐면 하나님 앞 제단 앞에 포도의 피 입니다.
포도의 피를 뿌리는 것을 전제의 제사라 그럽니다. 이분이 나의 피 나의 땀 이것을 놓고 너희들에게 이렇게 전제로 뿌리고 있기 때문에 내가 너희들에게 복음을 소개했고 너희교회를 내가 개척했고 기도로 계속해서 전제의 재물로 드리고 또 영적인 잔소리도 오늘같이 계속하고 성숙하라고 듣기 싫어도 예수의 마음을 품어라 품으라고 말씀하는 이 모든 것들이 나의 전제의 재물인데 그래서 너희들은 언젠가는 예수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어서 성숙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될 것을 나는 확신한다는 겁니다. 이분이 그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른 교회다가 이런 확신을 이야기 안 했습니다.
바탕이 되어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우리도 이 바탕을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면 그릇을 먼저 가지고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시비가 없는 빛의 자녀들이 될 것을 확신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너희들이 나의 자랑이 될 거라는 겁니다. 나중에 내가 주님을 만날 때 너희들은 그래서 나 같은 좋은 선생을 만나면 좋은 학생과 좋은 선생이 결합하면 서로가 상을 받는 다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너희들에게 좋은 선생이야 그렇지만 너희들도 내가 볼 때 좋은 학생이야 그러니까 기뻐하라는 겁니다. 하늘의 상급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겁니다. 좋은 선생과 좋은 학생이 만나는 그것이 복입니다.
아무리 선생이 좋아도 학생이 좋지 않으면 의미가 없습니다.
아무리 학생이 좋아도 선생이 좋지 않으면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양쪽이 잘 배합을 해야 됩니다. 만남의 복 저는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제가 여러분들에게 좋은 선생이 되어야겠구나?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은 좋은 선생이 되어야겠구나? 또 바라기는 우리 모두가 다 좋은 학생이 되겠구나?
그래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우리는 왜 열매를 맺어야 됩니까?
서로 잔치하기 위해서입니까? 아닙니다. 주님 앞에 자랑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자랑은 더 구체화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그러한 주님의 모습을 닮아가고 있을 때 그때는 정말 좋은 만남이 되어가지고 우리전부가 다 빛의 자녀가 되어서 이런 주님이 원하는 좋은 만남이 되어가지고 우리이방 형제자매들까지 빛을 비추고 그러면 이방 형제자매들이 그걸 받아가지고 또 자기 형제자매들에게 빛을 비추고 그러면 우리가 하늘나라에 가서 자랑거리가 얼마나 많겠습니까? 저는 그걸 생각하면 아찔합니다.
하늘에 가서 주님을 언젠가는 만날 텐데 주님이 너 이리 오너라 아프리카형제들을 줄을 세우 놓았는데 몇 천 명이 줄을 서는 겁니다. 주님 이게 무엇입니까? 그러면 너 아프리카형제 하나에게 내 모습을 보여준 것이 이렇게 열매 맺었단다. 또 미얀마형제를 보여주는 겁니다. 또 방글라데시형제를 보여 주는 겁니다. 누구를 통해서 줄이 이렇게 많이 서있다 누구를 통해서 줄이 이렇게 많이 서있다 그것이 눈에 보이는데 어떻게 합니까? 우리가 다 이런 사람이 되기를 주님께 간구합니다. 아멘.
※황용현 목사님 설교내용영상으로 보세요.
https://www.youtube.com/watch?v=I6iFvlDRua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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