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일에는 은혜 시리즈 #2로, "하나님의 은혜이신 예수님"(롬3:24)이란 주제로 말씀 전했습니다. '은혜'에 대한 개론이었습니다. '은혜'는 히브리어로 'chen 또는 hen'이며, 헬라어로는 'charis' 입니다. 구약에 32회, 신약에 128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은혜스러운'(gracious)은 구약에 32회, 신약에 2회 나타납니다.
이 '은혜'를 종종 '은총'(favor, 호의)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창조자 하나님이 피조물들에게 베푸시는 '은총'이 곧 '은혜'입니다. 이 '은혜'라는 단어 속에 담겨진 속성이 있습니다. 다음의 일곱(7) 가지로 표현됩니다. (1) 하나님의 주권적 호의 베푸심, (2) 하나님의 일방적 호의 베푸심, (3) 하나님의 무조건적 호의 베푸심, (4) 하나님의 무대가적 호의 베푸심, (5) 수혜자의 의도와 무관적 호의 베푸심, (6) 수혜자의 모습과 무관적 호의 베푸심, (7) 수혜자의 자격과 무관적 호의 베푸심입니다. 인간적 차원의 '호의'가 아니고, 하나님 차원적 '호의'입니다.
이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호의)에는 두(2) 차원이 있습니다. (1) '일반 은혜'(general grace)와 (2) '특별 은혜'(special grace)입니다. '일반 은혜'는 모든 피조물들(하나님 자녀, 사탄의 자녀, 사탄과 마귀들과 귀신들 포함)에게 베푸시는 은혜입니다. 어떤 은혜입니까? 햇빛과 햇볕 주시는 은혜, 공기와 물 주시는 은혜, 토양과 음식 주시는 은혜, 생명 유지시켜 주시는 은혜, 성장케 해주시는 은혜, 자녀 낳고 번식케 해주시는 은혜 등입니다.
우리의 질문이 있습니다. 왜 사탄의 자녀들을 포함한 사탄 팀에게도 이런 '일반 은혜'를 베푸십니까? 이들이 하나님을 대적하며, 하나님의 자녀들을 핍박하며 괴롭히는 존재들인데 말입니다. 그 이유는 이러합니다. 이들이 창조목적학교 학생교육용 도구로 디자인되어 임명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이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이 '일반 은혜'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들에게 베푸신 이 '일반 은혜'는 한시적입니다. 이들이 이 세상사는 날 동안에만 주어집니다. 이들이 죽은 후, 이들에게 주어진 이 '일반 은혜'는 소멸됩니다. 더 이상 이들에게 이것이 필요 없기 때문입니다. 지옥과 불 못에서는 이들에게 이 '일반 은혜'를 베풀지 않습니다. 그곳은 '은혜'가 없는 장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자녀들에게는, '이 세상' 사는 동안, 이 '일반 은혜'는 물론, '특별 은혜'까지 베풀어 주셨습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이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요3:16; 고후13:14; 요일4:16)을 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영생'이며, '특별 은혜'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직접 받지 못합니다. 반드시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야만, 받을 수 있게 디자인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아주 중요한 분이십니다. 이 예수님이 '특별 은혜'의 중심되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아무에게나 이것을 주지 않습니다. 반드시 '자신의 은혜'를 받은 자에게만 주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은혜'가 절대로 필요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의 사랑인, '영생'을 받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우리가 이것을 받게 하는 '은혜의 통로'이십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이 우리에게 '은혜' 베푸시지 않으면, 우리가 '영생' 받지 못합니다. 이 예수님을 통해 '영생'받는 것을 '특별 은혜'라 합니다(롬5:15; 고후13:14). 예수님이 이 '특별 은혜'의 본체이심을 다음 일곱(7) 가지로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1) 하나님의 은혜이신 분(롬3:24; 고전1:4, 15:10; 갈2:21; 엡2:7-8), (2) 하나님의 선물이신 분(롬5:15; 엡2:8), (3)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신 분(엡3:7), (4) 그리스도의 선물이신 분(엡4:7), (5)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이신 분(딤후2:1), (6)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이신 분(행15:11; 딛2:11), (7) 은혜의 하나님이신 분(벧전5:10)입니다. 이 예수님의 이름들에서 보듯이, 이분이야말로 '특별 은혜'의 본체이시며, 이것을 베푸시는 유일한 '구원자' 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하여, 이미 이 '특별 은혜' 즉 '영생',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받은 존재들입니다. (1) 그로 인해 우리의 '육혼영의 저주'가 말살되고, 우리의 '육혼영의 복'이 회복된 '특별 은혜' 받은 자들(고후5:17)입니다. (2) 그를 통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즉 '천국 시민권자'로 격상 받은 큰 은혜(엡2:19; 빌3:20) 받은 자입니다. 이뿐만 아닙니다. (3) 그가 우리에게 만유의 통치권, 즉 하나님의 '창조목적 동역 자' 은혜(창1:28)까지 베푸셨습니다. 우리의 이성과 상상을 초월하는 엄청난 '특별 은혜'입니다. 우리가 감당하기 벅찬 '특별 은혜'입니다.
그런데 궁금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바울이 편지를 저술하면서, 그 마지막 인사에 축도 형식으로, 항상 이 '은혜'와 관련된 언급을 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을지어다."입니다(갈6:18; 살전5:28; 살후3:18; 고전16:23; 롬16:24; 엡6:24; 빌4:23; 골4:18; 몬25; 히13:25; 딤전6:21; 딤후4:22; 딛3:15). 이미 상기의 '특별 은혜'를 받은 성도들인데, 왜 이런 축도를 편지마다 잊지 않고 하셨나요? 궁금합니다. 그 이유는 이미 받은 '특별 은혜' 위에 더 큰 은혜를 받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은혜의 분량'이 증가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행13:43, 15:40).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 상기의 '특별 은혜'를 받은 자들이지만, 개인마다 그 '분량'(헬. Metron, 영. measure, 롬12:3-8)이 다릅니다. 베드로가 자기 제자들에게, "주를 아는 지식을 통해 은혜가 더욱 풍성하기를(be multiplied, 벧후1:2)를 권고했던 사실"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주를 아는 지식'이 커질수록, '은혜의 분량'도 증가된다는 베드로의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자신의 제자들에게 편지 쓸 때마다, 이 사실을 주지시켜 주었던 것입니다. '칠(7)대 신학 주제'를 토대로 한, '하나님의 전산갑주'(엡6:11-18)를 입음으로, 이 '은혜의 분량'을 더욱 크게 할 수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우리가 가끔 이런 질문합니다. 왜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셔야만 하셨는가? 이 질문에 다양한 견해를 가진 분들이 있겠지만, 일반적으로 다음의 세(3) 부류의 크리스천들로 축약할 수 있습니다. (1) 사탄을 멸하시기 위해서이다(요일3:8), (2) 아담이 범한 원죄를 사해주시기 위해서다(롬3:23-24), (3) 창세전 디자인하신 '하나님의 신비'를 성취하시기 위해서다(고전2:7; 롬16:25-26; 계10:7)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이 세(3) 견해들이 모두 성경적입니다. 저도 이 세(3) 견해들을 모두 수용합니다. 그러나 '은혜의 분량'에 따라, 이렇게 세(3) 견해로 나뉜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시각의 분량'에 따라 입니다. (1)번 사람들은 '두더지 시각 자' 또는 '병아리 시각 자'라 여겨집니다. 아주 '근시안적 시각 자'입니다. 누구의 잘잘못이 아닙니다. 적은 분량의 '특별은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자도 은혜의 분량을 크게 할 수 있습니다.
(2)번 사람들은 '참새 시각 자'로 여겨집니다. '아담 타락'(주전4114)을 기점으로 하여 성경을 이해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1)번 사람들보다 훨씬 큰 시각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도 더 큰 시각으로 발전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대부분(70-80%)의 크리스천이, 이 (1)번과 (2)번 시각 자들임을 우리 주변을 살펴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독수리 시각 자'는 어떤 사람들인가요? (3)번 사람들입니다. '창세전 하나님의 신비'를 소화하는 자들입니다. 아주 소수입니다. "아하! 000구나"를 말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아는 지식'으로 시각을 넓힌 자들입니다. 7대 신학 주제를 바탕으로 '하나님의 전신갑주'(엡6:11-18)를 탄탄히 입은 자들입니다(벧후3:18). 심한 산고 속에서도 평강을 누리는 사람들입니다. 이 평강 속에서, 이들은 (1) 산고를 잘 견디며(endure, 마24:13), (2) 깨어있으며(watch, 마24:42), (3) 준비하며(be ready, 마24:44), (4) 외치는 사역(sharing, teaching, preaching, 마24:37-25:46)을 감당합니다. 때를 얻던 못 얻든, 누가 시켜서가 아니고, 성령님의 강권적인 감동주심과 인도하심과 매임으로 말입니다.
이런 사람이 바로 '특별은혜' 받은 사람 중, '특별 은혜' 받은 사람입니다. 바울의 경우입니다. 그는 우리처럼 '영생'의 '특별 은혜' 받은 자였습니다. 그런데 이분에게 또 다른 '특별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남은 자' 되는 은혜였습니다(롬11:5). 그가 바로 '특별 은혜' 위에 또 다른 '특별 은혜' 받은 자였습니다. 바울만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에게도 이 '특별 은혜' 내리십니다. 대부분의 독자들이 이미 이 '특별 은혜'를 누리고 있습니다. 들림 받는 '신부'에게 베푸시는 '특별 은혜'입니다(살전4:14-17). 창조목적학교의 '우수 학생'에게 베푸시는 '특별 은혜'입니다.
황 용 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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