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22년 1년 동안, 45회에 걸쳐 '이스라엘 시리즈'를 공부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크신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우리의 영성이 성장되도록 은혜 베푸셨습니다. AMI교회 교인들만 아니고, 전 세계에 흩어진 디아스포라들에게도 입니다. 우리들이 이 말씀을 배워, 주변에 열심히 가르치며 나누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누가 시켜서가 아닙니다. 성령님의 감동과 인도하심 때문입니다. 은혜로 '신부의 반열'에 들어온 분들입니다.
2023년의 시작입니다. '은혜 시리즈'로 새해를 맞이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평강이 더욱 풍성할 지어다"(벧후1:2, 3:18)의 주제로 새해 주일을 맞이했습니다. 제가 여러분들에게 새해 인사로 이 말씀으로 인사했습니다. 새해 인사 치고는 어울리지 않아 보입니다. 우리(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 모두)의 통상 새해 인사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입니다. 타 문화권에서는 종교배경과 관계없이 "Happy New Year" 입니다.
우리들의 새해 인사 속에 깔려있는 메시지가 무엇인가요? 건강, 무병 장수, 부요, 성공, 소원 성취, 만사형통 등 행복을 기원하는 소원이 담겨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듣기를 선호하는 인사입니다. 모든 사람이 즐기는 인사입니다. 이런 새해 인사로만 아닙니다. 실제 이런 복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새해를 시작하면서, 교회로, 성당으로, 절간으로, 사당으로, 해맞이로, 보신각 종으로, 송구영신 파티 모임으로 갑니다. 새해에 실제로 이런 복들 받기를 소원합니다. 이렇게 하므로 잠시나마 기분이 좋고 마음이 편해집니다.
우리가 이런 행사를 매년 같은 날에 합니다. 2022년 새해에도 했습니다. 한해를 지나고 보니, 소원한대로 복을 받은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반면 소원한대로 되지 않고, 그 정반대로 된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아픔과 좌절과 스트레스로 한해를 보낸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앞으로도 우리가 매년 이런 새해 인사를 반복할 것입니다. 서로를 격려하며 복을 빌어줄 것입니다.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말입니다. 이러다가 하나님의 카이로스(히. eth, 헬. kairos, 영. time, 때, 전3:1) 때에 죽어 '이 세상'을 떠납니다(전3:3). 새해 시작마다 빌며 받았던 복들을 다 뒤로 남겨둔 채, '이 세상'을 떠납니다. 기독교인이나 비 기독교인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가는 곳만 다를 뿐입니다. 낙원(눅23:43) 가는 사람과 지옥(마5:29) 가는 사람으로 나뉩니다.
'기독교인'이나 '비기독교인'이나 '이 세상' 사는 동안 상기의 복들이 필요합니다. 특히 여호와(예수님)께서 기독교인들에게 이런 복들을 약속했습니다. 창조목적에 순종 잘하면 '이 세상 복들'을 많이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신28:1-14). 그런데 이 '세상 복들'이 '한시적' 입니다. 죽어서 가지고 가지 못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딜레마 입니다. 예수님께서 크리스천들에게, 이 한시적인 '이 세상 복들' 뿐만 아니라, 이것 위에 또 다른 '업그레이드된 복'을 약속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와 평강의 복' 입니다. '한시적인 복'이 아닙니다. '저 세상으로 이어지는 복' 입니다. 성령님께서, 바울을 위시한 신약성경 모든 저자들에게, 이 복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가르치셨습니다. 이들이 이 복을 받았습니다. 이들이 자신의 제자들에게 이 복을 받으라고 권면했습니다.
어떻게 알 수 있나요? 이들의 서신들에서 발견됩니다. '첫 인사말'에 예외 없이 이 복 받기를 권면했습니다. 신기합니다. 서로 짜고 말한 것처럼, 모든 서신들에 동일합니다. '은혜와 평강' 입니다. 두(2) 단어가 붙어서 표현됩니다. 먼저 '은혜'로 시작됩니다. '은혜'가 우선합니다. 어디에서 내려오는 '은혜'입니까?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내려오는 은혜" 입니다(갈1:3; 살전1:1; 살후1:2; 고전1:3; 고후1:2; 롬1:7; 엡1:2; 빌1:2; 골1:2; 몬1:3; 딤전1:2; 딛1:4; 딤후1:2; 벧전1:2; 유1:1-2). 그리고 '평강'입니다. 맺는말에서도 다시 강조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을 지어다" 입니다(갈6:18; 살전5:28; 살후3:18; 고전16:23; 롬16:24; 엡6:24; 빌4:23; 골4:18; 몬1:25; 히13:25; 딤전6:21; 딛3:15; 딤후4:22). 이것이 바로 크리스천이 반드시 받아, 우리 삶에 누려야 하는 중요한 '두(2) 영적 자산' 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이 편지 수신자들이 살았던 당시, 이들에게는 결코 '평강'을 누릴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습니다. 엄청난 산고 속에서 살았습니다. 이들이 개종했기 때문에 받고 있는 산고들입니다. 기존에 믿어왔던 '로마황제 숭배', '바벨론 종교', '유대 종교'를 떠나, 기독교로 개종한 이유입니다. 소수 그룹이었습니다. 온갖 핍박, 미움, 배척, 소외, 왕따, 불이익 속에 있었습니다. 경제적, 사회적, 교육적, 사업적, 직장 적, 가정적 불이익을 감수하며, 항상 불안과 초조와 걱정과 스트레스 속에 살고 있었습니다. 이런 분들에게 '평강'을 말하는 메시지는 설득력이 없어 보입니다. 상당히 무리가 있어 보입니다. 맞습니다. 당시 대부분의 서신 수신자들에게는 무척 부담스러운 메시지였습니다.
당시 대부분의 크리스천들에게 이 메시지가 이들의 귀에 들리지 않았습니다. 현실성이 없는 메시지였기 때문입니다. 눈앞에 있는 당면 문제들로 온갖 걱정과 불안과 좌절과 스트레스로 매몰되어 있는데 말입니다. 전지하신 예수님(마10:30; 롬11:33)이 이들의 이 무관심을 모르실 리 없습니다. 그런데 당시 예수님이 바울과 베드로에게, 편지의 서두에 반드시 이 '은혜'와 '평강'을 삽입하도록 하였습니다. 실은 서신 집필 당사자들도 이 '은혜'와 '평강'을 누리기 힘들 때였습니다. 이들이 엄청난 산고 속에 있었을 때였습니다. 특히 베드로는 순교 1년 전이었습니다(주후64).
이런 상황 속에서, 베드로가 제자들을 향해 권면합니다. '은혜'와 '평강'을 받는 방법을 가르쳐줍니다.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knowledge)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 지어다(be multiplied)"(벧후1:2). 그리고 그의 서신 결말에서 재강조합니다.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knowledge)에서 자라가라(grow)."(벧후3:18). "예수님의 은혜"도 자라고, "예수님을 아는 지식"도 자라라고 했습니다. 아니면 심한 산고 속에서 '평강'을 가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 대다수의 성도들은 이 권면에 무관심하였습니다. 단지 소수의 크리스천들만이 이 권면대로 순종하며, 평안을 누리다 천국으로 갔습니다. 대부분의 성도들은 산고 속에서 평안을 누리지 못한 채, 스트레스 속에 살다가 천국으로 갔습니다.
질문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이 무엇인지요?" "어떻게 아는 사람임을 알 수 있나요?" '7대 신학 주제들'과 이를 바탕으로 한 '하나님의 전신갑주'(엡6:11-18)로 옷 입은 사람인지, 아닌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결여된 어떤 가르침도, 설교도, 세미나도, 일시적 감정 touch는 되지만, 지속성 있는 흔들림이 없는 '영원한 평안'은 주지 못합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엄습해 오는 '10대 산고들'(birth pangs)과 '8대 악(evil)을, 이런 감성 touch 가르침만으로는 평안을 누릴 수 없습니다.
10대 산고들이란 이러합니다. (1) 자연적 산고, (2) 경제적 산고, (3) 정치적 산고, (4) 보건적 산고, (5) 사회적 산고, (6) 문화적 산고, (7) 가정적 산고, (8) 순교자 산고, (9) 복음적 산고, (10) 세계복음화 산고입니다. 오늘날, 예수님의 통치와 허락 하에서, 이 산고들을 구체적으로 집행하고 있는 팀이 바로 '두 짐승'(계13:1-18) 입니다. 이들이 오늘날 우리 눈 앞에서 '8대 악'을 만들어 집행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이것을 매개로 인간사회를 자신들이 통제와 통치하는 새로운 사회로 만들려고 시도합니다. 이 시도를 '신세계 질서'(New World Order) 확립이라 합니다. 이들의 이 시도 때문에 앞으로 이 '산고'가 더욱 심해질 것입니다. '산고'는 기쁜 소식(예수님 지상재림)이 가까울수록 더욱 심해져야 하는 자연적 특성이 있습니다.
이들이 일으키고 있는 '8대 악'이 이러합니다. (1) 불법(lawlessness)과 불의(unrighteousness)가 더욱 기승부리며 판을 치게 함, (2) 윤리와 도덕을 무너뜨리며, 가정을 파괴함, (3) 성적타락을 부추기며, 동성애(LGBT)의 수용과 보편성을 강조함, (4) 부정선거를 조장하며,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전반을 부패시키며, 공산사회주의 무신론 인본주의 사상(주체사상 포함)을 고취시킴, (5) 인간의 양심을 화인 받게 하여(딤전4:2), 절대주의(absolutism)를 무너뜨리고, 상대주의(relativism)를 앞세워, 비 진리(untruth)를 진리(truth)로 둔갑케 함, (6) 더 심한 전염병을 만들어 퍼지게 하여 사회를 통제함, (7) 핵전쟁 위협을 더욱 가속화하여 사회를 통제함, (8) 기후 변화 획책을 더욱 가속화하여 사회를 통제함 등 입니다. 이 현상이 새해 2023년에 더욱 심해질 것입니다.
이 '두 짐승'이 일으키고 있는 이 '8대 악'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반응이 다양합니다. 같은 기독교인이라 해서 모두가 같지 않습니다. 다름으로 해서 서로 비난하며, 적대시하며 심지어 저주까지 하기도 합니다. 상당히 혼돈스럽습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1) '병아리 시각 보수 구룹' 입니다. 이들은 이 '8대 악'이 반드시 제거되어야 한다고 주장 합니다. 이들과 싸워야 합니다. 아니면 보편적 인간가치가 무너지며, 평화로운 사회를 유지 할 수 없으며, 결국 인류의 멸망도 초래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이런 악한 세력을 무찌르지 않으면, 나라가 망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사회정화와 애국 운동을 합니다. 지난 2천년 기독교 역사에서 이런 그룹이 항상 있어 왔습니다. 열심히 이런 일 하다가 천국에 갔습니다. 그런데 사회는 더욱더 악해지고 있습니다.
(2) '참새 시각 보수 그룹' 입니다. 상기 (1)번 그룹의 믿음에 동조하지만, 행동화 하지는 않습니다.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합니다. 시간이 지나면 이 악들이 없어지거나 새로운 모습으로 진화된다고 봅니다. 지난 인간 역사가 증명합니다. 악과 싸우기보다, 열심히 믿음 지키며 선을 행하면 악을 이길 수 있습니다. 이 악들과 함께 살면서 이들에 동조하지 않습니다. 이 그룹의 기독교인들은, 이 '악들'이 지배하는 '이 세상'에서 열심히 신앙생활 하다가, 악은 '이 세상'에 그대로 둔 채, 때가 되면 자신은 죽어 낙원에 간다고 생각합니다. 언젠가는 예수님이 이 '악들'을 불 못에 던지신다고 믿습니다.
(3) '독수리 시각 보수 그룹' 입니다. "아하! 000구나 그룹" 입니다. 아하! '이 세상'이 '창조목적학교' 이구나! 이제 '4년제 대학졸업식'이 곧 있겠구나! 아하! '두 짐승'이 우연히 생긴 것이 아니구나! 예수님의 디자인이구나! 산고를 일으키는 도구구나! 이들이, 예수님의 장중에서, 이 '8대 악'을 일으키는 주체들이구나! 아하! 우리는 예수님의 명령대로, 잘 견뎌야 하겠구나!(endure, 마24:13), 깨어있어야 하겠구나!(마24:42), 준비하고 있어야 하겠구나!(마24:44), 외쳐야 하겠구나!(마24:37-25:46)를 깨달은 그룹입니다.
또한 앞으로 이들 두(2) 짐승이 더 기승부리겠구나! 예수님의 디자인 안에 있기에 우리 힘으로 이 악을 막을 수 없구나! 우리는 가만히 손 놓고 있는 자가 아니고, 열심히 만방에 예수님의 재림을 외치도록 디자인 되어있는 '은혜 받은 자들' 이구나! '평강'으로 가득 찬 복 받은 자들이구나! '신부 후보생들' 이구나! 예수님 지상 재림 전, 이 '두(2) 짐승'이 드디어 '불 못'에 던짐 받는구나!(계19:20)를 믿는 '세계관자들' 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저 세상'(창1-2), '이 세상'(창3-계20), '저 세상'(계21-22)으로 보는 '독수리 시각 자들' 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이 (3) 번째 그룹입니다.
이런 독수리 시각 자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흘러나오는 '은혜를 받은 자들' 입니다. 아니면 오늘날과 같은 심한 산고 중에 "아하 000구나"의 세계관을 가질 수 없습니다. 이런 자는 산고의 심한 폭풍을 만날 때, 이것을 차고 올라가 창공에서 폭풍을 내려다보며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독수리는 폭풍이 올 때마다, 이것에 매몰되지 않습니다. 이것을 차고 올라갑니다(사40:31). 황 용 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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