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보서강해 1강. 야고보서 배경(약1:1) 2008년2월27일 말씀
오늘은 야고보서배경을 말씀드리려고 하는데 야고보서1장1절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과 주 예수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두지파에게 문안하노라 오늘은 제가 서론적인 측면에서 야고보서의 배경을 자세히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노트정리를 하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오늘은 제가 정보를 드리는 그러한 시간이 될 겁니다. 오늘은 신학강의를 들으신다고 생각하면 될 것 같습니다. 왜냐면 우리가 다음시간부터 내용을 깊이 들어갈 텐데 들어가기 전에 야고보서에 대한 배경을 잘 알 필요가 있습니다. 집을 지을 때 기초를 잘 닦는 식으로 신약에서 신학자들이 구분한 건데 신학에서 서신들을 이렇게 구분해가지고 구분해서 예컨대 옥중서신이라 이렇게 하는 서신이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감옥에서 썼다고 해서 옥중서신을 네 가지로 봅니다.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 이렇게 넷 을 옥중서신이라 합니다. 바울이3차 여행 끝나고 주후60년부터62년 사이에 이 네 권의 서신을 썼습니다. 그런데 또 바울이 자기제자들에게 목회를 어떻게 하라는 목회의 방향을 제시하고 방법론들을 설명한 서신들이 있습니다.
그런 서신을 목회서신이라 이렇게 신학자들이 말을 합니다. 목회서신은일반적으로 고린도전후서 데살로니가전후서 디모데전후서 그리고 디도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의 서신의 형태가 있는데 공동서신이라 이렇게도 말하고 또는 일반서신이라 이렇게도 말합니다. 이 서신들은 야고보서를 시작으로 해서 뒤에 나오는 베드로전후서 요한1서2서3서 그리고 유다서 이렇게 일곱 권을 공동서신 또는 일반서신이라 이렇게 말합니다.
그래서 신학자들 중에 다는 아니지만 일부가 그럽니다. 공동서신이나 일반서신은 일반이라는 말자체가 좋은 표현은 아닙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야기하느냐면 처음의 두 개의 목회나 옥중서신은 더 중요하고 일반서신은 덜 중요하다는 그러한 인상을 가진 그러한 주장을 해온 신학자들도 없지 않아 있었습니다. 왜냐면 일반서신들은 기독교의 중심사상을 서술하지 않았다고 생각하고는 여기에 대한 중요성을 크게 강조하지 않고 오히려 바울이 쓴 모든 서신들이야 말로 기독교의 핵심 중요한 사상들을 기록했기에 그쪽에다가 무게를 두는 그러한 일들이 그동안에 기독교역사 속에서 많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대해서 반발하는 반대의견들이 많습니다. 그렇지 않다 똑같다. 라고 보고 어떤 분은 특히 야고보서는 바울서신보다 우위에 있는 서신이라고 보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위에든 저위든 관계없이 여고보서가 짧은 서신이지만 상당히 우리에게 가르치는 부분이 많고 바울서신과 맞먹는 중요한 성서의 한부분이라는 것을 저는 깨닫고 여러분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주고 여기에 대해서 우리가 자세히 섭력해보려고 그럽니다.
야고보서는 도대체 누가 썼을까? 저자가 누굴까? 여기에 대한 의문들 학설들이 부분하게 있습니다. 분명히 야고보서니까 야고보가 썼을 것 아닙니까?
야고보를 영어로는 제임스(James)라 그럽니다. 제임스를 약자로 짐이라고 하기도 하고 원어로는 야고보서인데 영어로 제임스(James)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성서에는 신약에 야고보라고 이름을 지은 사람이 성서에는 다섯 명이 있습니다. 그중에 첫째 이름이 야고보라는 사람이 누구냐면 세베데의 아들 야고보가 있습니다. 그런데 세베데의 아들 하면 성서에 두 사람의 이름이 나옵니다. 세베데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이 그럽니다. 유명한 유한이나 세베데의 아들 야고보가 세베데라는 사람의 아들인데 이 두 분은 다 예수님의 제자였습니까? 야고보가 요한의 형이었습니다. 세베데라는 사람은 갈릴리지방에서 아주 유명한 어부였습니다. 이분은 아마 어업협동조합 조합장정도 되는 사람 같습니다. 그래서 배가 일곱 척 있었고 밑에 일하는 어분들이 상당히 많았다고 마가복음1장20절이나 누가복음5장11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세베데의 아들 요한은 예수님의 제자였습니다. 그리고 이분의 형 야고보도 예수님의 제자였습니다. 그런데 야고보가 사도행전12장에 보면 헤롯 왕 아그립바에 의해서 순교를 당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제자 중에서 첫 순교를 당하는 이분이 야고보입니다 어떤 분은 주후42년 이렇게 이야기하는데 이게 그렇게 중요하지 않고 예수님의 제자 중에서 첫 순교를 당하는 분이 야고보입니다 그러면 이 야고보가 이 책을 썼을까요. 아닙니다.
야고보는 이 책을 쓰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에서 지금 말하는 세베데의 야고보는 세 번째로 높은 사람으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제일 높은 분이 누구냐면 예수님의 동생인 야고보입니다 마리아를 통해서 낳은 그 야고보가 열두제자들 중에 제일 높고 두 번째로 높은 분이 베드로입니다
일반적으로는 베드로가 더 높다고 하는데 아닙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가 세베데의 아들 야고보입니다 네 번째로 본다면 이분의 동생인 요한이고 그다음에 안드레고 이렇게 순서로 나갑니다. 제가 지금 첫째 야고보를 누구를 이야기했습니까? 세베데의 아들 야고보입니다 두 번째는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가 있습니다. 이분도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제자 열두 명 중에서 야고보라고 하는 이름이 두 분이 있습니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가 있고 세 번째 야고보는 마가복음15장40절에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작음 야고보라고 이렇게 표현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분이 우리가 누군지 모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는 장면 속에서 멀리서 바라보는 여자들이 있었는데 작은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도 거기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봐라 보았다 그럴 때 작은 야고보라는 이름이 나옵니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작은 야고보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가 아닌가? 라고도 추측을 합니다. 그렇지만 추측이고 세 번째 야고보이름이 작은 야고보 그다음에 네 번째가 예수님의 육신의 동생인 야고보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동정녀마리아니까 그분의 몸을 이용하셨는데 예수님의 밑의 동생이 마태복음13장55절과56절에 보면 남자동생이름이 네 분이 나옵니다. 순서대로 첫째 남자동생이 야고보입니다
두 번째가 요셉입니다 세 번째가 시몬이고 그다음에 네 번째가 유다입니다
유다 네 번째 이 동생이 마지막 성서에서 나오는 아까 일반서신 유다서를 쓴 사람입니다 그리고는 계속해서 그 누이들 그랬습니다. 여자들의 이름을 말하는데 그 누이들이라고 복수로 써놓았습니다. 그게 똑같이 13장56절에 보면 그런데 보통 원어를 보면 그 누이들 할 때 한 누이면 누이라고 그러는데 두 누이면 누이들 이라고 복수입니다 만약에 두 누이라고 그러면 거기에는 일반적으로 성서에서나 또는 표현할 때에 both of them이라고 적어 놓습니다. 그러면 두 사람이라는 소리인데 그냥 누이들 했을 때 우리같이 신학을 하는 신학자들은 그렇게 생각합니다. 둘보다 더 많다고 보는 겁니다.
그러면 셋이 될 수도 있고 그보다도 더 될 수도 있습니다.
여자동생들이 그래서 일반적으로 만약에 셋이라고 생각한다면 예수님의 동생이 몇 명인 겁니까? 남자가 몇 입니까? 넷 여자가 셋이니까 일곱 동생이 있는 겁니다. 이렇게 추측을 하게 됩니다. 어떤 분은 아홉 동생이라고 말하는데 추측만 하는 겁니다. 이렀다 보니까 문제하나가 생기는데 예수님의 어머니가 종신처녀였다고 하는 로마가톨릭의 교리와 맞지를 않는 겁니다.
에베소서공의회가 주후431년에 있었는데 그때 로마교회를 강화하기 위해서 마리아의 숭배사상을 강화하기 위해서 이분들이 마리아의 종신처녀 설을 이 공의회에 가져 왔습니다. 그래서 그기에 여러 가지 문제들을 제기하는 분들이 있어서 그걸 통과시키지 못하다고20년 있다가 451년에 칼케톤 공의회에서 정식으로 종신처녀 설을 통과했습니다. 그 후부터 로마가톨릭교회는 지금까지 이 학설을 가지고 주님을 섬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개신교에서는 어떻게 마리아가 종신처녀나 그 밑에 동생이 적어도 일곱 명이 있는데 그러니까 맞지 않는다고 보는 겁니다. 다섯 번째의 야고보가 있는데 이분은 진짜 야고보로 예수님의 제자가 있는데 예수님의 제자 중에 유다라는 이름의 제자가 두 분이 있습니다. 가룟 유다가 있고 그다음에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있습니다. 그런데 유다의 아버지 야고보가 누군지 모릅니다.
그러니까 야고보라는 이름이 여기에 또 나옵니다. 야고보의 아들 유다인데 그 야고보는 누군지 모릅니다. 그러다보니까 하여튼 야고보가 신약에서 다섯 명의 이름이 등장된다는 겁니다. 이렇게 다섯 명 중에서 누가 야고보서를 썼다고 우리가 이야기합니까?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입니다 1세기2세기 때 유명한 신학자들이 있는데 이런 부분에 대해서 연구한 신학자들이 오리겐이라는 신학자와 요세비우스라는 사람과 제롬이라는 유명한 신학자들이 있는데 이 사람들이 다 그분들의 서적에 보면 이렇게 예수님의 형제인 야고보가 야고보서를 썼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동생야고보는 어떤 사람입니까? 동생야고보는 열두제자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자기 동생을 제자로써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이3년 공생애동안에 예수님의 최소한 일곱 형제들이 예수님이 사역하는 것에 대해서 반대를 했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도 믿지를 않았습니다.
요한복음7장5절에 보면 그런 말씀이 적혀 있습니다. 이 형제들은 전통적인 유대인 삶을 살았기 때문에 유대인명절들 일곱 절기 때는 자기 형님이 자기 오빠가 예수님입니다 예루살렘에 가는 것도 존경하고 그기에 갑시다. 하고 예수님이 안가면 왜 안가세요 이렇게 하지만 예수님을 신성화하거나 또는 특별한 선지자의 사람의 모습이라고 보지를 않았습니다. 이 형제들이 그래서 예수님께서 마가복음6장4절에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선지자가 자기 고향에서 자기친척들이나 자기 형제자매들에게 존경을 받지 못한다고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이 가족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별로 관심이 없었습니다.
어떻게 저 형님이 저럴까하고 부정적인 개념으로 그런 태도로 예수님을 보아 왔습니다. 3년 공생애동안에 전에도 그랬고 그러다가 야고보가 하루아침에 변한 사건이 있습니다. 언제 변했느냐면 이분이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예수님이 부활한 사건을 경험하고는 가장 가까이 있는 분으로 자기 바로 위에 형님이니까 이분이 죽으신 걸 분명히 봤는데 이분이 부활하셔서 부활체의 모습으로 자기에게 나타나서 이분이 깜짝 놀라가지고 아하! 이분은 우리 형님이지만 사람이 아니구나. 이렇게 고백한 것이 고린도전서15장7절입니다.
이분이 이렇게 바울을 통해서 이분이 이런 사람이었다고 말을 합니다.
부활을 경험하고 이렇게 부활을 경험한 후에 이분이 그대로 열두 제자대열 속에 들어갔습니다. 열두 제자는 아니지만 열두 제자들과 구체적으로 교제하며 그 속에 들어가서 예수님의 부활을 아주 목숨을 걸고 전했던 분입니다
그러면서 이분이 그때부터 열두 제자들보다도 더 영향력이 있는 아주 파워있는 사람으로 등장하게 됩니다. 그리고는 이분의 메시지는 내 형님이지만 저분은 하나님이다 이렇게 말하기 시작하고 내 형님이지만 저분은 죽었다가 부활하신 분이다 우리의 구세주라고 아주 공식적으로 외치는 사람으로 변해버리는 겁니다. 그러니까 열두 제자들이 이분을 자기네의 수장으로 이분을 모셨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교회가 개척이 되었잖아요. 개척되었을 때 열두제자들이 이분을 수장으로 모셨습니다. 베드로도 이분을 높이고 베드로도 이분을 어려워했습니다. 왜냐면 예수님의 바로 밑에 동생이니까 그런데 그것 만이 아니고 이분이 예수님의 동생이면서 성품이 아주 예수님같이 젠틀하시고 성서에서 나오는 좋은 성품들을 이분이 다 가지고 있었던 겁니다.
그리고는 리드 십이 아주 강했고 그리고 영성이 아주 특출했다고 그랬습니다. 이분이 그러니까 베드로도 이분 앞에서는 꼼짝을 못하는 겁니다.
몇 가지 증거를 제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왜 이렇게 베드로도 이분에게 꼼짝을 못하고 심지어는 바울도 이분에게 머리를 숙였습니다.
첫째로 베드로가 사도행전12장에 나오는 말씀인데 베드로가 감옥에 들어갔다가 기적적으로 출옥을 합니다. 출옥을 해가지고 이분이 마가의 어머니 마리아가 가지고 있는 다락방에 거기에서 사람들이 베드로를 위해서 기도하는데 그 기도하는 장소로 베드로가 갔습니다. 그래서 출옥소식을 알렸습니다.
그런데 열두 제자들은 그기에 안 계셨던 모양입니다 안 계시니까 베드로가 거기서 인사만하고 나오는데 나오면서 그러는 겁니다. 그기에 여자들보고 자매들 꼭 잊지 말아요 야고보 선생님께 꼭 인사를 드리세요. 내가 출옥했다는 것을 그러면서 성서에 그랬습니다. 사도행전12장17절에 야고보와 형제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라 항상 야고보이름을 갖다 대고 최고 수장이니까 그다음에 나머지제자들은 다 형제들이라고 부르는 겁니다. 이렇게 야고보가 베드로에게도 존경을 받았습니다. 또 두 번째는 사도바울이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났잖아요. 회심했잖아요. 그리고는 이분이 3년 동안아라비아 쪽으로 내러 갔습니다. 많은 학자들이 저도 그기에 동조하지만 이분이 모세가 십계명을 받았던 시내 산 까지 갔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거기 가서 3년을 주님과 대화하고는 다시 다메섹으로 올라와가지고 거기서 다시 예루살렘으로 내러가서 이분이 첫 기독교인이 되었기 때문에 예루살렘교회에 열두 제자들을 만나서 인사를 드리려고 그러는 겁니다. 그런데 이분이 누구에게 먼저 가서 인사를 드리려고 그랬냐면 야고보에게 가서 인사를 드렸습니다. 갈라디아서1장19절에 보면 다른 사람들은 만날 필요도 없는 겁니다. 제일 영향력이 있는 최고수장인 야고보에게 가서 형님 안녕하십니까? 제가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과거에는 형님들을 제가 핍박을 했는데 이렇게 변신했습니다.
이렇게 보고를 드릴 때 누구에게 드렸냐면 야고보에게 가서 보고를 드렸다고 그랬습니다. 그리고는 사도바울이 1차 선교여행을 떠나가지고 선교를 했습니다. 주후46년에서48년 사이에 선교를 하고는 다시 안디옥교회로 돌아왔는데 소문에 의하면 야고보와 베드로의 제자들이 바울이 선교했던 그 지역에 흩어져서 있었습니다. 터키 남단에 그분들이 그러는 겁니다.
바울이 전하는 은혜의 복음과 예루살렘지도자들이 전하는 구약의 율법의 복음과 상충됩니다. 그래서 바울이 전하는 복음이 이상합니다. 라는 소문이 났기에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바울이 안디옥에서 예루살렘교회지도자들을 방문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사도행전15장 나오는 이야기인데 이때 이분이 베드로에게 먼저 내러가서 이야기하고는 베드로가 뭐하고 하니까 야고보가 교통정리를 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걸 예루살렘총회라고 그럽니다. 제자들이 다 모인 곳에서 이분이 지휘봉을 드시고는 바울이 전하는 모든 것들은 너희들 상관하지 말라 성서적으로 맞는 거다 예외가 한두 개 있지만 그것 빼놓고는 바울이 전하는 것이 맞다 고 최종결정을 내려주는 분이 야고보입니다 그러니까 야고보가 바울의 선교를 뒤에서 밀어 주었던 분입니다
열두 제자들 중에서 그분이 밀어주지 않았으면 바울의 선교가 힘들었습니다.
그리고는 바울이 이분 때문에 힘을 받아가지고 2차 여행 3차 여행까지 끝나고는 이분이 예루살렘에 도착했습니다. 예루살렘에 도착했을 때 예루살렘에 열두 제자들에게 방문하는데 1차로 누구를 방문하느냐면 야고보를 방문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 저 이렇게, 이렇게 선교지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왔습니다. 하고 인사드리고 선교보고를 그분에게 했습니다. 사도행전21장18절에 보면 그렇게 적혀있습니다. 또 갈라디아서2장11절12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루는 예루살렘에서 안디옥교회에 베드로가 왔습니다.
베드로가 이방인들과 같이 식사를 하는 장면을 바울이 봤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그러는 겁니다. 당신 말이야 어떻게 이방인들과 같이 밥을 먹느냐 당신 항상 그런 걸 싫어하는 사람들이 열두 제자들이 그런 걸 싫어하는데 바울은 나는 괜찮지만 당신들이 이렇게 이중적인 모습을 보여 주었는데 그렇게 말하고 있는데 갑자기 야고보의 제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에 도착한다는 소식이 온 겁니다 그러니까 베드로가 야고보의 제자들이 올라온다고 하니까 그 소리를 듣고는 겁을 내었다 그랬습니다.
이 사람들이 알면 큰일 난다는 겁니다. 왜 그럴까요? 베드로가 누구를 두려워합니까? 야고보를 두려워하는 겁니다. 그만큼 야고보의 영향력이 컸습니다. 그만큼 이분들이 예루살렘교인들이 야고보를 존경했습니다.
그렇게 존경하는 분이기 때문에 이분이 예루살렘교회가 누구의 핍박 때문에 흩어졌습니까? 누가 죽었습니까? 사도행전8장에 스데반집사님이 순교를 당하고는 그 후부터 사도행전8장에서 예루살렘교인들이 흩어지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래가지고 이분들이 북쪽으로 올라가고 나중에는 터키지방으로 로마제국으로 흩어지는 겁니다. 예루살렘교회 2만 명 되는 교인들이 다 흩어져서 그의 없는 겁니다. 지도자들만 교회에 남아 있는데 그러니까 이분들이 멀리 떨어져 나가면서도 항상 자기네의 지도자인 야고보를 존경하고 흠모하는 겁니다. 그래서 야고보도 그걸 알고는 항상 그분들과 교제하다가 야고보가 듣기로는 이분들이 이방에서 신앙을 지키면서 살고 있지만 생명에 열매가 안 맺히는 삶을 산다는 소리를 듣고는 야고보 마음속에 항상 괴로움이 있는 겁니다. 그러다가 흩어진 사건은 주후33년입니다 예루살렘교회 교인들이 흩어진 게 그런데 야고보가 야고보서를 쓴 것이 언제냐면 주후48년도입니다
어떤 분들은 주후60년이라고 이야기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 학설은 맞지가 않습니다. 그러니까 야고보서가 바울의 첫 서신이 갈라디아서인데 주후48년49년에 썼거든요 갈라디아서와 그의 비슷한 때 첫 서신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성서에서 나오는 서신중에서 첫 서신이 야고보서입니다
그러니까 야고보가 자기가 사랑하는 교인들이 15년 동안 지금 바깥에서 핍박을 받아가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겁니다. 이럴 때 저들에게 힘을 주기 위해서 또 저들에게 성서적으로 중요한 부분을 가르치기 위해서 글을 쓴 겁니다.
주후48년으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주후33년에 흩어졌는데48년이니까 몇 년 후입니까? 15년 후입니다 이런 모든 배경을 잘 알아야지만 성서를 우리가 깊이 볼 수가 있습니다. 저희교인들은 그게 훈련이 된 것 같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수신자가 도대체 누구냐 누가 수신자인가 1절에 다시 보면 하나님과 주 예수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있는 열두지파에게 문안하노라 그랬습니다. 그런데 이분은 자기위치를 분명히 말했잖아요.
내 형님인데 그런데 그분이 누구냐면 예수님으로 자기백성을 구원하시는 분으로 그분이 그리스도라는 겁니다. 그분이 메시야라는 겁니다. 그리스도라는 말은 기름 부음을 받은 자입니다 자기는 이분의 종이라는 겁니다.
온전히 세상적인 커넥션이 아니고 영적인 커넥션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러면서 누구에게 편지를 보내느냐면 열두지파에게 흩어져있는 그랬습니다.
원어로 그리스말로 흩어져있는 그게 뭐냐면 디아스포라라는 말입니다
디아스포라라는 말이 흩어져 있는 그런 말입니다 흩어져있는 열두지파에게 보낸다는 겁니다. 이 당시만 해도 이 사람들은 열두지파니까 이방인이 아닙니다. 다 유대인들입니다 사도바울의 편지는 그의 대부분이 이방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왜냐면 그의 다입니다. 사도바울은 자기가 이방인에게 교회를 개척을 해놓고 복음을 전해주고 거기에다가 편지를 썼습니다.
그런데 야고보서는 아닙니다. 이방인들이 복음을 받기 전에 유대인크리스천들에게 편지를 쓰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편지는 초기의 편지입니다
당시의 수신자들 열두지파들의 모습이 어땠냐면 흩어져 있으면서 이분들이 복음 때문에 핍박을 받았습니다. 복음 때문에 자기 고향을 떠나가지고 핍박을 받았습니다. 어떤 핍박들이냐면 첫째 핍박은 종교적인 핍박입니다
이게 뭐냐면 그 동네에 사는 유대인들에게서 받는 핍박입니다
어떻게 당신들은 예수를 하나님이라고 생각하느냐 아니라고 해서 그기에 대한 핍박을 많이 받았습니다. 주류사회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지를 않았으니까 유대인의 주류사회가 그러니까 이분들은 비주류기 때문에 해외에 나가서도 그 동네에 있는 교포유대인들에게 핍박을 엄청나게 받았습니다.
직업도 구하기 힘들고 아이들 학교에 가도 놀림감거리가 되고 모든 부분에서 은행에 가면 은혜계좌도 열어주지도 않고 이런 핍박입니다
두 번째 핍박은 정치적인 핍박입니다 로마제국이기 때문에 로마사람들이 싫어했습니다. 왜냐면 로마사람들은 자기네가 왕인데 이 크리스천들은 자기네의 왕이 있다는 겁니다. 그것도 왕 중의 왕이라는 겁니다.
그러면서 이 왕이 또 온다고 자꾸 그러는 겁니다. 그러니까 로마제국의 왕이 싫어하는 겁니다. 너희들 나를 왕으로 생각해야 되는데 왜 너 네 왕이 따로 있다고 그러고 그 왕이 곧 온다고 하니까 그래서 핍박을 자꾸 하는 겁니다.
세 번째 핍박은 문화적사회적 핍박입니다 인종차별하고 특히 현지에 있는 토착민들이 외국에서 온 유대인들 특히 크리스천 이상한 종교를 믿는 이런 사람들을 핍박을 했습니다. 네 번째 핍박은 경제적인 핍박입니다
직장도 없고 막노동 밖에 할 수없는 그런데 그 안에도 항상 뭐가 있느냐면 똑똑한 사람들이 있어가지고 돈벌이를 잘 하는 사람들이 항상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도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사회나 그 사람들은 부자였습니다. 그 안에서 크리스천들 중에서도 부자인데 그 부자들이 자기네들 배만 채우고 가난한 크리스천들을 안 도와주는 겁니다. 그런 이야기가 야고보서에 나옵니다. 그다음에 다섯 번째 핍박은 가정적인 핍박이라고 제가 이렇게 생각하는데 왜냐면 그분들이 이렇게 고생을 하니까 남자들이 직업도 없고 남자들이 수입도 없고 하니까 남자들이 병에 걸려서 빨리 죽었습니다.
그래서 과부들이 그렇게 많았습니다. 그 공동체에 그러다 보니까 과부까지 나중에 죽는 일이 있어서 고아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야고보서에 보면 너희들이 예수를 믿는다고 하고는 믿음이 있으면서 왜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지 않고 고아들과 과부들을 도와주지 않느냐고 비난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기까지 정리를 해놓고 그다음에 줄을 바꾸어서 다른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기독교신학계에서 야고보서가 그렇게 인정을 받지를 못했습니다.
야고보서가 항상 열외에 있는 서신으로 천대를 받았습니다. 야고보서가
왜냐면 사도바울의 편지와 비교했을 때 야고보서가 너무나 초라하다는 겁니다. 특히 야고보서를 들여다보면 거기에는 기독교의 핵심교리들이 다 빠졌다는 겁니다. 예컨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과 또 교회관이나 또는 성령론이나 또는 종말론이나 이런 모든 기독교의 핵심교리들이 빠져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책은 별것 아니라는 겁니다. 이렇게들 계속 주장해왔고 그렇게 취급을 당했습니다. 야고보서가 우리도 야고보서를 별로라고 생각하잖아요? 그렇죠. 짧은 조그만 책으로 생각하는 게 우리 일반적인 우리의 느낌입니다. 이런 일들이 특히 종교개혁이 일어났을 때 더 심하게 일어났습니다.
종교개혁이1517년입니다 마틴 루터가 이 문제를 들고 나왔습니다.
왜냐면 루터가 로마서1장17절을 읽다가 이분이 종교개혁을 하겠다고 마음을 굳힌 것입니다 로마서1장17절이 뭐냐면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겁니다.
의인은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의인이 되는 것은 믿음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오로지 믿음입니다. 믿음 그전에 로마가톨릭은 믿음에다가 이분들은 행위를 강조합니다. 그래서 면죄부를 사야 되는 행위 교회에 열심히 나와서 교회에 충성해야 되는 행위 이런 걸 하면 행위로써 구원을 받는다고 했는데 이분이 이 말씀을 읽다가 아니다 믿음밖에는 구원의 길이 없다고 믿는 겁니다. 우리 개신교가 그래서 믿음의 관한 부분을 강조하는 겁니다.
그것을 한분으로 이신칭의(以信稱義)라고 그럽니다. 소위 칭의론이라고 그래서 내가 하나님 앞에 어떻게 의인이 되는가 할 때 믿음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루터가 이신칭의(以信稱義)에 대해서 강조를 많이 해왔던 분이 이것 때문에 개신교들도 지금까지도 이신칭의(以信稱義)칼빈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신칭의(以信稱義)에 대해서는 동의했습니다. 그런데 야고보 선생님이 야고보서2장전체내용을 보면 특히2장17절에 이랬습니다. 행함은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말하는 겁니다. 루터가 자기가 깨달은 것과 이게 상반되는 겁니다. 루터는 뭐라고 그랬습니까? 믿음이면 된다고 했는데 여기다가 행함이 안 따라오면 죽은 거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루터가 화가 난 겁니다.
자기주장과 맞지 않으면 열을 받습니다. 그래가지고 이것 가지고 싸움을 하는 겁니다. 루터가 그러는 겁니다. 야고보서는 다른 책들 즉 사복음서나 바울이 쓴 모든 서신들이나 이런 것들과 비교해서는 이것은 책도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가지고 그러는 겁니다. 이것은 지푸라기서신이라는 겁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는 겁니다. 왜냐면 그 속에는 이분은 지금 자기가 주장했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라고 헸는데 그기에 대해서 반발이야기가 야고보서2장17절에 나오니까 그것 가지고 꼬투리 잡아가지고 말하는 겁니다. 야고보서는 예수님의 죽음이나 부활이나 기독교의 핵심교리들이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야고보서는 상사 속에 집어넣으면 안 된다는 겁니다. 이게 사람이 열 받으면 그렇게 나오는 겁니다. 아무리 성령 충만해도 그 유명한 사람도 그래가지고 이 사람이 1522년에 독일어로 출판된 신약성경 초판이 있습니다. 그기에 야고보서를 빼버렸습니다.
이렇게 감정표현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러는 겁니다. 야고보서는 예수님에 대해서 말한 것은 단지 두 번밖에 없다는 겁니다. 1장1절과 2장1절하고 그리고는 전부다 딴 소리를 했다는 겁니다. 이래 놓으니까 다른 신학자들도 야고보서를 경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야고보서는 야고보가 이들에게 편지를 쓸 때 특정한 어떤 문제와 현시대에 처한 상황 속에서 문제해결을 위해서 쓰신 거지 기독교계의 교리전체를 다루는 게 아니거든요
왜냐면 야고보생각에는 저분들이 흩어진 열두지파들은 기독교의 핵심교리들은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전제 해놓고 쓰면서 하시는 말씀이 너희들은 이제는 더욱 성숙한 크리스천이 되라 이런 차원에서 전제적인 부분들은 뽑아놓고 성숙 쪽으로 강조한 그러한 서신인 겁니다.
내용을 자세히 보면 바울신학하고 야고보신학은 동질성이 있습니다.
바울신학은 이신칭의(以信稱義)에서 칭의 쪽을 강조하면서 바울도 믿음만 가지고는 안 된다는 겁니다. 바울신학도 똑같습니다. 기독교인들 중에서 믿고서 예수님만 믿는 게 아니고 너희들의 삶이 변해야 된다고 바울신학도 항상 강조합니다. 그런데 이분들이 그 부분을 보지 못하는 겁니다.
그냥 칭의 부분만 본 겁니다. 야고보는 칭의의 결과 하나님의 자녀가 된 그 후에 어떻게 살아야 된다는 행위를 더 강조한 것뿐이지만 바울이나 야고보나 그 신학적인 합의점이 같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야고보를 존경해서 아까 보듯이 기회 있을 때마다 그분을 찾아가서 인사를 드렸던 겁니다.
그런데 신학들 중에 일부가 두 분은 상반된 의견을 가지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바울의 더 중시한다. 야고보는 그렇지 않다. 라고 신학을 발전시켜서 그렇게 가르치는 분들도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학문이라는 것은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이렇게 해석이 달라지고 따라오는 사람들이 그 영향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선생이 누구냐가 중요합니다. 여러분들의 선생인 저는 이 부분에 대해서 병합하는 합의점을 찾는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몇 가지만 더하고 서론적인 부분을 끝내려고 합니다.
야고보서의 특징이 있습니다. 야고보서의 특징은 실생활과 윤리적인 측면을 강조한 성경말씀입니다. 그래서 어떤 신학자들은 그럽니다.
야고보서는 구약에서 나오는 잠언같이 지혜서다 이렇게 말합니다.
야고보는 그래서 지혜를 강조합니다. 이 세상에 크리스천들 중에서 두 가지 지혜가 있는데 한 가지 지혜는 뭐냐면 3장에서 말하는데 너희들이 하나님의 자녀이면서 서로 다투고 싸움하고 남을 헐뜯고 미워하고 패거리 만들고 하는 그런 사람들은 어떤 지혜를 가진 사람들이냐면 세상 적이고 정욕 적이고 마귀적인 지혜를 가진 하나님의 사람들이라는 겁니다. 이런 지혜를 가진 사람이 있느냐면 또 다른 지혜는 뭐냐면 위에서 내려오는 지혜라는 겁니다.
이 지혜는 어떤 지혜냐면 성결하고 화평하며 관용하고 양순하고 긍휼을 베풀고 선한 열매를 맺게 하는 지혜라는 겁니다. 그래서 이런 지혜를 구하라 다시 말하면 성숙한 영적크리스천이 되라고 강조하는 것이 야고보서의 전체의 그림입니다. 그런데 이분이 보실 때15년 동안 저 멀리 나가 신앙 생활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유대인크리스천들 이분들이 그런데 핍박도 받고 예수님 때문에 고향을 떠나서 저렇게 열심히 하는데 믿음은 있는데 저분들의 삶 속에 보면 아직도 영적으로 어린아이들이라는 겁니다.
다툼이 있고 미움이 있고 안에서 싸움하고 불쌍한 사람을 돕지 않고 전도도 안하고 그런 크리스천들을 뭐라고 그럽니까? 선데이크리스천이라고 그럽니다. 우리교회도 선데이크리스천들이 있습니다. 선데이만 나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도 가끔 빠지고 교회에 무슨 행사가 있으면 잘 나오지도 않고 그런 분들을 명목상크리스천이라고 그럽니다. 이름만 있는 크리스천들 그 당시에도 그런 크리스천들이 많았고 오늘날도 우리교회만이 아닙니다.
우리교회는 그런 비율이 아주 적은 교회입니다 제가 볼 때는 90%의 사람들은 여기에 속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10%정도는 아직도 선데이크리스천들입니다 일반적으로 다른 데 가보면 그의90%가 선데이크리스천들입니다
복음 때문에 고통을 당하고 복음 때문에 여러 가지 핍박을 당하지만 인격에 변화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헌신이 약한 사람들입니다
왜냐면 이유가 뭐겠습니까? 이유는 제가 항상 강조하지만 내 속에 있는 쓴 뿌리가 그대로 있기 때문에 그러는 겁니다. 쓴 뿌리가 빠져나가야 되는데 그래서 여기 여고보서3장에 보면 쓴 뿌리에 관한 이야기를 합니다.
똑같이 2천 년 전에 야고보가 편지한 것도 내용은 인격의 변화가 없기 때문에 쓴 뿌리가 그대로 있기 때문에 이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신칭의(以信稱義)다시 말하면 예수를 믿으면 복음을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이신칭의(以信稱義)이것을 누구나 다 갖고 있습니다. 크리스천들 중에서 그 당시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만 머물려버리는 겁니다. 다시 말하면 복음을 예수님을 값싼 구원을 주는 하나님으로 생각하는 겁니다.
그냥 믿기만 해라 할렐루야 어디 가서 은혜 받아서 예수 믿었다 그래서 영러로 그러는 겁니다. 이지 빌리그렘이라고 어디 큰 집회를 받고 그기서 예수님을 영접하세요. 손드세요. 따라하세요. 축하합니다. 예수 믿었습니다.
예수님의 보혈이 이렇게 싸구려보혈입니까? 잠깐 느낌으로 예수님이 날 위해서 죽으셨구나. 땡큐 감사합니다. 이걸로 끝나는 것이 아니잖아요.
하나님이 보혈을 흘렸는데 하나님의 피가 얼마나 소중하고 비싼 피 인데 그렇게 쉽게 피조물들은 생각하는 겁니다. 창조주가 나를 위해서 피를 흘렸는데 피조물이 되셔가지고 피조물처럼 되셔가지고 그걸 그렇게 값없이 생각하는 겁니다. 우리가 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잖아요. 똑같이 그 당시에 크리스천들이 그랬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야고보는 예수님의 가장 가까운 사람입니다 이분이 벌써 영적으로 깊이 들어가서 보는 겁니다. 너희들 믿기만 해서 되느냐 진짜 믿으면 행위가 따라오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신데 믿음이라는 게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신데 그분이 나를 위해서 사람이 되셔가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분 때문에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것을 믿는 겁니다.
이것을 깊이 믿으면 그다음에는 행위가 따라오게 되어 있는 겁니다.
자연적으로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바울도 이것을 강조했고 모든 주님의 사람들이 이것을 강조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분이 그러는 겁니다.
야고보가 행위가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2장17절에 2장20절에 그랬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헛것이다 그랬습니다. 헛것이라는 것은 소용이 없는 의미가 없는 믿음이라는 겁니다. 2장26절에 또 그랬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 이걸 계속강조하시는 겁니다. 바울신학도 똑같았습니다.
바울도 똑같이 그랬습니다. 크리스천 중에서 소위 육신의 크리스천이 있느냐면 영의 크리스천이 있다는 겁니다. 고린도전서2장과3장에서 그랬습니다.
또 바울이 그랬잖아요. 로마서7장의 크리스천이 있느냐면 로마서8장의 크리스천이 있다는 겁니다. 영에 속한 크리스천 육신에 속한 크리스천과 차이가 있다는 겁니다. 그와 같이 믿음과 행함은 항상 동전의 앞뒤와 같습니다.
항상 같이 이것이 분리되는 이유는 우리 속에 쓴 뿌리가 있기 때문에 우리가 이번에 쓴 뿌리와 행위가 어떻게 연관되는지를 이번 야고보서강해를 통해서 주님께서 하나하나 우리에게 보여주실 겁니다. 기대하시고 이런 차원에서 야고보서를 스무 번을 읽으시길 바랍니다.
기도드리겠습니다.
예수님 야고보를 통해서 주신 말씀을 저희들이 깊이 묵상하기 위해서 오늘은 서론적인 측면인 배경부분을 서로 상고했습니다. 이것이 하나의 정보로만 우리에게 머물지 않게 은혜 베풀어주시옵소서. 우리가 믿음이 있다면 행위가 저절로 따라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제 믿음이 있다는 것은 행위가 따라오는 것을 알고 우리의 삶이 그기에 맞추어 살아갈 수 있도록 은혜 베풀어주시옵소서. 지금 이 시간은 예수그리스도의 무한하신 은혜와 하나님아버지의 극진하신 사랑하심과 성령님의 끊임없는 조명하심이 깨닫게 해주심이 순종케 해주심이 우리에게 항상 있기를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황용현 목사님 설교내용영상으로 보세요.
https://www.youtube.com/watch?v=yKRGai1yj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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