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강. 요한복음11장1절-57절, 나사로의 죽음과 소생
요한복음강해 19강. 나사로의 죽음과 소생(요11:1-57) 2010년6월27일 말씀
오늘은 요한복음11장 말씀을 같이 보겠습니다. 요한복음11장은 57절까지 길게 있는데 제가 다 읽지 않고 그 중에 앞에 몇 절만 읽겠습니다.
1어떤 병자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와 그 자매 마르다의 마을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 마르다가 언니고 마리아가 동생입니다 그런데 1절에서는 마리아가 먼저 명기를 했습니다, 다른데서는 마르다를 먼저 명기를 하는데 그게 다 뜻이 있습니다. 2이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닦던 자요 병든 나사로는 그의 오라버니더라 2절 말씀이 12장에 나오는 말씀을 미리 당겨서 말씀하시는 겁니다. 3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 4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5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6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7그 후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유대로 다시 가자 하시니 8제자들이 말하되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9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두 시간이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10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 11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이르시되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이 정도로 보시고 그다음에 제가 자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지난번에 우리가 10장을 봤습니다.
10장은 구조가 크게 두 구조로 있었음을 이야기 했는데 다시 간단하게 말씀드리면 첫째 구조가 뭐냐면 양 우리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양 우리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여섯 가지 가르침을 이야기하셨는데 두 번째 구조에서는 수전절을 이야기하셨습니다. 수전절을 원어로 하누카(Hanukkah)라 그랬습니다. 수전절에 예루살렘에 들어가셔서 솔로몬행각에서 설교하시는 내용을 우리가 같이 상고했습니다. 설교의 모든 내용들은 예수님의정체성을 말씀을 했습니다. 이렇게 10장 말씀을 예루살렘성전 뜰에서 하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이 화가 나가지고 예수님을 돌로 치려고하는 장명이 있었습니다.
그럴 때 성서에서 뭐라고 그러느냐면 예수님의 때가 아니기 때문에 그분들이 아무리 예수님을 치려고해도 예수님이 맞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러는 겁니다. 우리가 요단강 쪽으로 가자 그러는 겁니다.
이게 10장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계시다가 요단강 쪽으로 가자 그러는 겁니다. 요단강 쪽은 어떤 쪽이냐면 세례요한이 세례를 베푸시는 곳입니다. 요단강 쪽에 있다가 유대로 가자하면 무슨 말이냐면 예루살렘과 주변지역으로 가자 그런 소리입니다 성서를 읽으면서 해석하실 때 그래서 이분이 요단강 쪽으로 피했습니다. 이분이 요단강 쪽에서도 말씀을 전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었다 이런 말씀이 10장 끝입니다.
그리고 11장에 들어가서 갑자기 이렇게 시작을 하는 겁니다.
어떤 병든 자가 있으면서 하면서 나사로가 마리아와 마르다의 남동생 같습니다. 어떤 사람을 통해서 이 두자매가 요단강에 계신 예수님을 찾아가게 하면서 예수님께 사건 보고를 하는 사건입니다 우리 남동생이 아픕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이 보고를 받으시고는 이분들과의 관계를 설명을 하시면서 11장의 모든 메시지들을 우리에게 설명해주고 그 메시지가 예수님과 이 가정과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모든 이야기들을 담아가지고 11장에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11장의 주제가 뭐냐면 11장의 주제는 나사로의 죽음과 이분을 부활시키는 게 아닙니다. 소생시키는 겁니다.
부활과 소생은 다릅니다. 소생시키는 과정에서 요한복음1장부터10장까지 보여주셨던 예수님의정체성을 재확인해주는 겁니다. 그러니까 지금 11장이 뭐냐면 1장에서부터11장이 한 뭉치입니다. 그래서 그 뭉치가 예수님의정체성을 이런 모습으로 저런 모습으로 설명하는 것이 1장부터10장까지인데 11장에서 다시 종합을 해가지고 11장이 끝나면 이제는 예수님의 십자가사건을 위해서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는 장면입니다 네 번째 유월절을 맞이하려 그렇기 때문에 11장이 봉우리입니다. 그런데 봉우리11장이 10까지 모든 내용을 다시 한 번 종합하는데 무엇을 종합하느냐면 예수님이 누구라는 것을 종합해주는 장면이 나사로사건을 통해서 설명해주는 겁니다.
11장 두 번째 주제가 뭐냐면 11장에 보면 유명인사 세 사람이 나옵니다.
누가 나오느냐면 마리아 마르다 나사로입니다 이 세 사람이 어떤 영적의미가 있느냐를 우리에게 가르쳐주십니다. 그것을 우리가 심도 있게 들려다 볼 겁니다. 또 세 번째는 나사로의 죽음과 또 소생하는 겁니다.
부활은 소생과 다르다고 그랬습니다. 어떻게 다르냐면 소생은 죽었다가 살아났는데 옛 모습그대로 살아나는 겁니다. 그러다가 몇 년 있다가 또 죽는 겁니다. 그게 소생입니다 부활은 무엇입니까? 다시 살아났는데 옛 모습이 아닙니다. 부활체입니다. 그리고는 죽지를 않습니다. 예수님의 부활모습 기억나시죠. 이런 모습입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이 승천해 올라가셨잖아요.
부활하셔서 예수님이 어떤 때는 옛 모습처럼 보이기도 하고 벽을 뚫고 지나가시기도 하고 시간과 공간에 제한을 받지 않는 특수 몸입니다.
그래서 나사로는 부활체가 아니고 소생했다고 그러는 겁니다.
옛 모습대로 다시 소생했습니다. 그래서 나사로의 죽음과 소생을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로 예표로 이렇게 우리에게 보여주는 겁니다. 11장에서
그다음에 네 번째는 예수님이 나사로를 살린 사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11장 후반부에 보시면 예수님을 믿게 되는데 그것 때문에 유대인들이 아주 고민을 합니다. 우리민족이 저 사람을 따라 다니다보면 자기네의 파워가 흔들리고 또 자기네 생각에는 로마사람들이 자기네를 싫어할 것 같다는 겁니다. 유대인들을 그래서 유대인들이 그 사건 때문에 핍박을 받는다는 생각 때문에 공의회를 열어가지고 예수님을 따라 다니는 사람이 많으니까 나사로가 살아났다는 사건 때문에 공의회에서 회의를 해가지고 공의회의장되는 대제사장 가야바이분이 결정을 합니다.
저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야 되겠다. 라고 결정을 내리는 장면입니다
그게 11장으로 끝납니다. 그러니까 이게 무엇입니까? 창세기3장15절의 예언을 이루는 그 순간입니다 그러니까 나사로사건은 주님이 창세기3장15절부터 시작해서 구세주로 오시면서 십자가에 죽으실 것을 주욱 예언하시면서 말씀하시다가 나사로사건을 통해서 이제 딱 종지부를 찍으시는 겁니다.
나사로사건을 통해서 그러니까 11장이 이런 의미에서 상당이 의미 있는 장입니다 11장의 구조를 보면 항상 매장마다 구조가 있습니다. 구조를 보시면 첫 번째 구조가 1절부터16절까지 우리가 처음 읽었던 그 부분인데 뭐냐면 예수님이 요단강지역에서 나사로가 지금 아프다는 소식을 들은 이야기가 처음 16절에 있습니다. 두 번째 구조는 예수님께서 초청을 받았으니까 베다니로 가서 마르다와 마리와 대화하는 장면이 두 번째입니다. 17절에서37절에 대화하는 장면 그 대화를 우리가 한번 자세히 볼 것입니다
세 번째는 뭐냐면 예수님이 나사로를 살리시는 이야기입니다
회생시키는 그것이 38절에서44절까지입니다 그다음에 네 번째로 이 사건 때문에 공의회를 개최해가지고 가야바 대제사장이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정하고는 검문하는 장면이 마지막에 있습니다. 45절에서57절에 그러면 우리가 첫째 부분을 봅시다. 예수님이 요단강지역에서 나사로소식을 듣는 그 장면을 보면 3절에 하시는 말씀이 동생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이야기와 같이 이 가족을 예수님이 아주 사랑하셨다는 이야기가 그기에 적혀있습니다.
4절에 가서 예수님이 소식을 들은 다음에 반응하시는 모습을 보면 예수님이 그랬습니다.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벌써 예수님께서는 나사로가 아프다고 말한 사람은 죽었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미 죽는 걸로 아셨습니다. 그래서 아주 단도직입적으로 하시는 말씀입니다 죽을병이 아니고 이 사건을 통해서 아버지가 영광 받고 또 내가(예수님이)영광 받고 그다음에 이 집식구들과 나를 따라다니는 제자들이 내가 누군지를 알게 될 거라는 겁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겁니다.
이게 4절과15절에 그렇게 쓰 있습니다. 11장 전체에서 예수님이 누군가?
이분의정체성을 여러모로 말씀하십니다. 나사로사건을 통해서 예수님은 누군가? 예수님이 그러시는 겁니다. 나는 부활이다 나는 생명이다 나는 그리스도다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는 인자다 인자라는 뜻이 무엇입니까? 하늘에서 보내심을 받은 자라는 뜻이 인자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해서 여섯 가지로 예수님이 나사로사건을 통해서 자기가 누구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재정리하시는 겁니다. 이렇게 정리를 했는데 11장에 들어와서 11장에서 이렇게 예수님이 이런 분이라고 믿었던 유대인들이 있었고 안 믿었던 유대인들이 있었습니다. 이 두 그룹이 누군지를 또 가르쳐주시는 겁니다. 믿었던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만약에 너희들이 나의정체성을 믿으면 어떤 해택이 오는지 아느냐 이 해택이 온다는 겁니다.
믿으면 너희들이 죽었던 육이 사는 존재가 된다는 겁니다. 죽어도 이게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입니다 지금 살아있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걸 믿으면 예수님의정체성을 믿으면 이걸 안 믿으면 할 수 없는 겁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이렇다는 것을 나사로를 통해서 너희들이 볼 텐데 하나님의 영광을 너희들이 직접 보게 된다는 겁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그러면서 그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그것은 큰 해택인 겁니다. 그러면서 믿었던 유대인들이 누군가에 대해서 11장에서 말을 합니다. 도마도 그랬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그랬습니다. 베다니로 가자 그 양반이 지금 죽은 게 아니고 잠잔다. 그랬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잠 깨우러 가자 그러시니까 도마가 의심이 있다고 그랬잖아요, 아닙니다. 대단한 분이십니다 도마가 뭐라고 그러느냐면 16절에 보면 친구 제자들을 보고 여보 우리도가서 죽자 그러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게 무슨 말입니까? 우리도 가서 죽자 그러면 이분이 가서 살리실 것을 아는 겁니다, 죽자는 말은 제가 볼 때는 우리도 잠자러 베다니로 가자 그런 소리 같습니다. 예수님이 나사로가 죽은 게 아니고 잠잔다고 그랬잖아요. 그러니까 우리도 잠자러가자 아마 그런 말로 한 모양입니다
이런 양반들 도마 마르다 마리아 나사로 이 양반들 다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라는 것을 또 45절에 보면 많은 유대인들이 이분이 누구라는 것을 믿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믿지 않았던 유대인들이 있었습니다.
대제사장들입니다 왜냐면 대제사장이 많잖아요. 그런데 대제사장 중에서 특별한 때 대제사장 중에서 왕초 대제사장을 뽑는 겁니다. 그분이 회장이 되는 겁니다. 그 왕초 대제사장이 가야뱌입니다. 그래서 그해 대제사장이라 그러는 겁니다. 그러니까 많은 대제사장들 바리새인들 그다음에 공의회회원들이 몇 명이라고 그랬습니까? 71명입니다 71명인데 70명에다가 플러스 한명은 회장입니다 그 사람까지 합해서 71명입니다 우리 같으면 국회입니다
예수님을 믿었던 자들과 안 믿었던 자들이 이렇게 구분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그 말을 들었을 때 메신저가 와가지고 예수님 이렇습니다.
하니까 이분이 이틀을 더 요단강지역에 머무셨다. 그랬습니다.
왜냐면 예수님의 생각은 나흘을 채우시라고 그러시는 겁니다.
그날 보고를 받았을 때 이미 나사로는 죽었습니다. 예수님은 다 아시고 그리고는 나흘을 채우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베다니에 가셨을 때 마르다가 그러는 겁니다. 우리 오라비가 나흘 되었습니다. 그런 말하잖아요.
이런 이야기가 구조 속에서 첫 번째 이야기입니다 그다음에 구조 속에서 두 번째 이야기가 예수님이 베다니에 도착했습니다. 도착해서 17절에 보니까
나흘 되었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그리고 18절에 이런 말을 합니다.
예수님이 도착하니까 예루살렘에 있는 많은 유대인들이 베다니로 위문차 갔다고 그랬습니다. 이 동네 구조를 보면 예루살렘성전 뜰이 있는데 그래서 성전 뜰 또는 성전 산이라고 그럽니다. 모리아 산 바로 옆에 1km지점에 산이 하나있는 게 감람산입니다 동쪽으로 감람산이고 감람산과 그의 붙어 있는 조그만 마을이 벳바게라는 마을입니다 벳바게는 마태복음21장에 예수님이 벳바게에 가셨을 때 어떻게 되었습니까? 스가랴서9장절에 말씀이 예수님께서 새끼나귀를 가져 오너라한 곳이 벳바게입니다. 여기서 1km정도 동쪽으로 가면 베다니입니다 그러니까 예루살렘에서 베다니까지가 2km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래서 성서에서는 뭐라고 그랬느냐면 오늘 본문에 보면 거리가 한국말로 5리라 그랬습니다. 5리면 2km입니다 10리가 4km입니다
그러니까 2km거리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유다지역에 오셨을 때 대부분의 경우 베다니에서 주무셨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일보시고는 이분이 베다니에 가서 주무시고는 그다음에 아침에 일어나서는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시고 이렇게 해서 베다니가 특별한 도시입니다 그래서 이름이 베다니하면 의미가 베스라는 것은 하우스라는 뜻입니다 아니는 피그(fig)라는 뜻입니다
피그(fig)는 무화과를 말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무화과의 집이다 이런 뜻입니다 그러면 무화과의 집이라는 뜻은 우리가 더 영적으로 깊이 보면 무슨 뜻입니까? 무화과는 무엇입니까? 이스라엘민족 또는 이스라엘나라입니다
그러니까 이 집이 이스라엘사람들의 집이라는 겁니다. 이 말은 뭐냐면 이 집에 사는 세 사람 마르다, 마리아, 나사로는 이스라엘사람들의 특별한 대표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겁니다. 나사로 같은 사람을 보세요.
나사로가 이스라엘사람들의 대표성을 가진 사람입니다. 나사로가 죽었습니다. 이스라엘사람들이 예수님 없이 죽었잖아요. 그러다가 예수님이 가서 회생시킵니다. 그러니까 9장에서 유대인들이 눈이 감겼잖아요. 그러니까 나면서부터 눈이 감긴 소경과 똑같은 겁니다. 그리고는 죽었습니다.
어두움 속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나사로를 소생시키듯이 이제는 유대인 중에서 소생되는 사람이 있겠다는 겁니다. 그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겁니다. 그런데 그 소생의 주체가 누굽니까? 예수님 때문에 이것이 신약에 와서는 예수님을 모르고 눈 감겼던 사람들이 예수님 때문에 눈이 떠지고 예수님 없이 영원히 죽었던 사람들이 영원히 멸망할 사람들이 영원히 살아나는 소생하는 사건들이 나사로를 통해서 일어나는 겁니다.
그다음에 마리아 마르다를 보면 두 관계가 아주 묘합니다. 마르다는 마리와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이 예수님이 사랑하는 두 딸들인데 스타일이 다르고 주님이 주시는 복이 다릅니다. 또 이분들이 예수님에 대해여 반응하는 반응내용이 다릅니다. 이런 부분을 우리가 보면 두 가지의 크리스천들의 모습을 우리가 보여주는 겁니다. 주님께서 11장에서 두 가지의 크리스천들의 모습을 마르다 적인 크리스천과 마리아적인 크리스천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계십니다. 오늘 본문말씀에서 잠깐 보면 예수님이 베다니로 오고 있는 겁니다.
마을 안에 들어오지 않으셨습니다. 마을 바깥 저쪽에 예수님이 나타나시는 겁니다. 나타나시니까 예수님이 오시는 소식을 듣고 마르다가 뛰어 나와 가지고 예수님을 만나는 장면입니다 22절에 보면 그러면서 뭐라고 그러느냐면 20절에 마리아는 안 나가고 집에 앉아 있었더라.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두 여자가 급한 상황 속에서 반응이 다릅니다. 그러면서 마르다가 예수님을 만나가지고 뭐라고 그러느냐면 예수님! 예수님이 우리와 같이 계셨더라면 우리 오라비가 죽지 아니했을 터인데 왜 안 계셨습니까?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제라도 우리를 위해서 기도해주시면 어떻게 우리오라비가 복을 받지 모른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지금 여기서 우리가 잘못생각하면 나나로가 살아날 것으로 마르다가 생각하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대답을 하십니다.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마르다가 대답하기를 아하! 지금 사는 게 아니고 마지막 말 부활할 때 다시 살줄 아나이다. 그러는 겁니다.
그러니까 마르다는 당장 죽은 오라비가 살아난다고 믿는 게 아닙니다.
마지막 날에 부활할 것을 믿는 겁니다. 그러니까 마르다가 믿음이 있었습니까? 없었습니다. 거기에 같다대고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마르다야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므릇 살아서 나를 믿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네가 이것을 믿느냐 이렇게 물어보는 겁니다. 그러니까 마르다가 그러는 겁니다. 주여 그러하외다 그러는 겁니다.
믿는다고 그러는 겁니다. 우리가 마르다 같은 크리스천이 상당히 많습니다.
그러면서 마르다가 뭐라고 그러느냐면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그랬습니다. 27절에 마르다가 이렇게 보면 굉장히 믿음 있는 자매 같습니다. 그런데 이분은 남동생이 당장 회생할 것을 믿지 않는 겁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다 믿는데 부활도 믿습니다. 그러니까 마르다 같은 사람은 많은 우리 크리스천들과 비슷합니다. 지적인 정보는 다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다 느낌도 있습니다. 감정적 이해도 있고 소위 피부적 이해입니다 그렇지만 당장 자기 남동생이 살아날 것은 믿지를 않는 겁니다. 마르다는 마리아와 같이 예수님께 측별 강의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왜냐면 예수님이 과거3년 동안에 예루살렘에 오시면 꼭 그 집에 들렀기 때문에 이분들도 분명히 예수님을 따라 다녔을 겁니다. 그러니까 이분들이 요한복음에 나오는 1장부터 시작해서 2장3장4장10장까지 모든 기적들을 이분들이 다 들었고 보았을 겁니다.
예수님이 저녁에 그 집에 들어가 가지고 애들아 나 오늘 무엇을 한줄 아느냐 나! 물로 포도주를 만들었다 가나에서 일어난 일이지만 말해주었을 겁니다. 나 니고데모만나가지고 이런 대화를 했다 베데스다연못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너 들었지 너 오병이어사건 북쪽에서 일어난 것 들었지 아주 가정교사로 기가 막히게 해주었을 겁니다. 네 알아요. 알아요. 하는데 머리로만 안 겁니다. 우리교회도 이런 사람들이 분명히 있을 겁니다.
성서공부를 우리가 많이 합니다. 그런데 머리로만 알고 있는 사람들 예수님께서 지금 저 멀리 마을 입구에서 마르다하고 대화하신 다음에 예수님이 그러는 겁니다. 마리아가 어디 있니 마리아를 찾으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언니가 뛰어 들어가는 겁니다. 동생에게 가서 예수님이 오셨다 예수님이 오셨다 그러는 겁니다. 그러니까 마리아가 이렇게 반응을 합니다.
29절에 보면 마리아가 급히 일어나서 예수님께 달려갔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유대인들도 뒤를 따라갔다 그랬습니다. 마리아와 같이 앉아 있던 유대인들도 그러니까 마리아가 예수님께 가서 막 우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의 우는 모습을 보고 통분히 여겼다 그랬습니다.
깊이 감동받았다는 뜻입니다 한국말로는 민망히 여겼다는 뜻입니다
뭐냐면 괴로워하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눈물까지도 흘렸습니다.
예수님의 인성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마르다보다도 마리아를 그만큼 사랑하셨던 겁니다. 그래서 마리아가 남동생 때문에 괴로워하는 걸 보고는 예수님이 괴로워했습니다. 그런데 마리아가 기가 막힌 게 마르다도 이렇게 안 합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꼭 예수님 발아래 딱 엎드리는 겁니다. 마리아는 딱 엎드리더니 예수님 앞에서 막 우는 겁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 불평을 하는 겁니다. 딱 올려 쳐다보고는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마르다와 똑같은 말을 하는 겁니다. 그런데 마르다는 서서 말했고 마리아는 딱 발 앞에 엎드려가지고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는 겁니다. 마르다에 대해서 잠깐 보겠습니다. 마르다는 큰 딸입니다 순서를 봐도 그렇고 성경에서 보면 마리아를 동생이라고 그랬습니다. 거기다가 마르다는 4복음서에서 누가복음에 한번 나오고 그리고 요한복음에 두 번 나옵니다. 누가복음10장38절에서42절과 요한복음11장1절에서부터44절과 12장2절에 그러니까 11장에서 한번 나오고 12장에서 한번 나옵니다. 마르다의 성품은 이렇게 분석해보면 외향적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마르다는 인사하기를 좋아하고 일을 좋아하고 사람 좋아하고 동생 마리아는 그 반대 같습니다. 공부하기 좋아하고 내향적이고 배우기 좋아하고 이런 스타일로 누가복음10장39절에 보면 예수님이 베다니에 마르다 마리아 나사로 집을 방문했다는 이야기가 최소한 다섯 번 나옵니다.
다섯 번 나오는데 다 기간이 있습니다. 누가복음10장38절에서42절에는 공생애 중간에 가셨고 오늘 본문의 말씀은 2차로 공생애 말기에 가신 겁니다.
그다음에 11장 끝난 다음에 유월절 6일 전에 6월9일 날 토요일 날에 예수님이 이 집을 방문했을 때 마리아가 어떻게 하는지 우리가 볼 수가 있습니다.
그다음에 종려주일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다가 그날 밤에 종려주일은 1월10일입니다 그날 밤에 베다니에 들어가서 주무셨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에 베다니에서 다시 나오는 장면입니다. 그리고는 고난주일수요일에 마태복음26장6절에서13절에 1월13일입니다 이 날에 예수님이 그 가정에 방문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래서 이렇게 방문한 이야기를 볼 필요가 있습니다. 누가복음10장38절을 보면 1차 방문입니다 38그들이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마을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 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 39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40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제가 원어를 보니까 분주하다 페리 스파우 페리라는 말이 뭐냐면 주위에 둘레에 그런 소리입니다 스파우라는 말은 칼을 빼다는 소리입니다
다시 말하면 칼을 빼서는 막 휘두른다는 소리입니다 그것을 분주하다는 겁니다. 영어로는 갈피를 못 잡다. 정신을 못 차리다. 그런 뜻으로 사전에 나옵니다. 그러니까 이 자매는 칼을 빼가지고 온천지를 휘두러면서 다니는 이런 여자라는 겁니다. 그걸 한국말로 분주하다는 겁니다. 40절에 다시 봅시다.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이르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 41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42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여기에 굉장히 중요한 메시지를 우리에게 주고 있습니다.
지금 마리아는 뭘 하고 있습니까? 예수님 앞에서 이 남자가 도대체 누군가?
예수님의정체성을 끊임없이, 끊임없이 깨닫고 또 물어보고 하는 여자입니다.
우리 같으면 무엇을 공부하는 여자입니까? 기독론을 열심히 공부하는 여자입니다 그런데 이쪽에 마르다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누군지 예수님의 본질을 공부하기보다 그분에게 먹을 것을 같다드리는데 관심이 더 많은 겁니다. 그리고 내용보다는 겉으로 활동에 관심이 더 많은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그러는 겁니다. 다 좋다는 겁니다. 마리아가 하는 것도 좋고 마르다가 하는 것도 좋은데 어떻게 더 좋으냐면 열심히 예수님이 누군가를 공부하는 사람이라는 겁니다. 우리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셀 모임이 있을 때 음식 당번들 절반정도는 셀 모임에 참석하지 않고 부엌에서 준비합니다. 그렇지만 그걸 빨리빨리 하시고는 올라오셔야 합니다. 부엌에서 일한다고 하면서 올라오지 않으면 그 여자들은 마르다입니다. 똑같습니다. AMI비전 스쿨 할 때도 식당에서 빨리 하고는 공부할 때는 올라와서 앉아 있어야 되는 겁니다. 그래야 주님이 볼 때 그게 더 좋은 거라는 겁니다. 교회에 왜 나옵니까? 교회에 예수님을 만나려 나오지 않고 친구 만나러오고 놀러오는 사람도 있고 젊은이는 여자 친구 만나러오고 또 친구들이 많으니까 교회에오면 편하고 하여튼 교회 오는 목적이 예수님을 만나러오는 것이 아니고 딴 데 관심이 있는 겁니다. 이렇게 두 가지에 관심이 있다는 것을 마리아와 마르다를 통해서 보여주잖아요.
그래서 예수님이 하도 안타까우니까 마르다야, 마르다야 두 번을 말씀하셨습니다. 중요한 게 우선순위입니다 내가 교회를 왜 다니는가?
그럼 예수님을 알게 된다는 것은 우리 성서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지상계명을 깨닫고 순종하는 겁니다. 예수님을 그냥 지적으로만 아는 사람이 아니고 깨닫는 사람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마리아를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이 마리아가 이 집이 부잣집도 아닌데 이 여자가 두 번씩이나 예수님께 자기의 재산을 다 털어버렸습니다. 비싼 향유가 웬 만한사람 1년 봉급이라 그랬습니다. 1년 봉급이면 지금 우리 같으면 얼마 됩니까? 연봉3천만 원 받는 사람 2천만 원 받는 사람 5천만 월 받는 사람 하여튼 지금 돈 같으면 예수님이 오셨는데 2찬만 원 짜리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한번 붓고 예수님의 발에 한번 부었습니다. 두 번 그러면서 예수님이 그러잖아요.
이 여자 너희들 내이야기할 때마다 계속해서 이 여자 이야기하라는 겁니다.
세 번째 예수님과 나사로의 회생입니다 예수님이 나사로를 회생하는 장면이 세 번째 아이디어인데 쭈욱 내용을 보면 마리아의 눈물 때문에 예수님이 감동받아가지고 남동생을 고치는 이야기가 쫘악 나옵니다. 예수님이 그러니까 마르다 때문에 하신 게 아니고 마리아 때문에 11장 본문 1절에서 아까 제가 말씀 드렸지만 다시 보세요. 본문 1절에서 예수님이 요한에게 마리아이름을 먼저 쓰게 하신 겁니다. 마르다보다도 동생 이름이 유대문화 속에서는 이게 불가능한 겁니다. 우리나라문화도 그렇잖아요. 윗사람 이름을 먼저 쓰잖아요.
그런데 여기는 그렇지 않는 겁니다. 또 남자이름을 먼저 써야 되는데 제일 막내 여동생이름이 먼저 나오고 남자이름이 제일 마지막에 나옵니다.
왜 이렇게 마리아를 11장에서 대표주자로 리드로 높혔을까요?
그것은 이유가 있는 겁니다. 이유는 동생이지만 영적으로 더 높은 사람이었다는 겁니다. 왜냐면 그만큼 주님을 사랑하고 희생을 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이 다섯 개의 이 모습을 간단하게 봅시다. 아까 예수님이 1차로 방문했을 때 예수님이 마르다 마리아집에 방문해서 누가복음10장이야기 아까 우리가 봤잖아요. 그 내용이 처음에 무엇이었습니까? 마리아가 더 좋은 일을 했다 그랬습니다. 그다음에 오늘 본문은 무슨 소리입니까?
마리아가 왜 더 좋은 일을 했습니까?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 앞에서 마리아와 예수님과 대화하면서 마리아가 뭘 가지고 있었냐면 예수님이 자기 동생을 고칠 것을 마르다는 안 믿었는데 마리아는 믿었습니다.
그리고 12장에 보면 마르아의 엄청난 모습이 보입니다. 요한복음12장이 세 번째 방문했을 때 장면입니다 유월절 엿새 전은 1월9일 토요일 날입니다
그 다음날 1월10일이 동려주일입니다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 살리신 나사로가 있는 곳이라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 새 마르다는 일을 하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그러니까 마르다는 항상 일만 하는 겁니다.
예수님께 초점을 안 맞추고 3절에 보면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4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5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6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7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이렇게 하시는 겁니다. 이게 세 번째 방문 때 장면입니다.
이 장면을 다시 한 번 정리하면 이집에 예수님이 가셔가지고 마르다는 열심히 점심준비 했을 겁니다. 나사로는 예수님 옆에 가만히 앉아 있고 마리아는 자기의 전 재산인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는 자기 머리털로 닦는 장면이고 그 옆에 있는 가룟 유다가 이야기하는 장면입니다 이게 언제냐면 유월절 엿새 전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십자가사건에 동참하는 여자입니다
이 여자가 왜 동참할 까요 이 여자는 성서1장에서부터 10장까지 예수님을 이렇게 만나면서 예수님이 누구라는 것을 알았고 이 예수님이 죽으실 것을 다 알았습니다. 왜냐면 예수님이 이미 그렇게 다 말씀했기 때문에 마리아! 성서에는 마리아라는 이름이 여섯 개가 나옵니다. 마리아는 구약에서는 마리아라고 부르지 않고 미리암이라고 부릅니다. 이스라엘사람들의 구약에서는 그래서 미리암은 누굽니까? 모세의 누이입니다 그러니까 모세의 누이도 마리아입니다 그런데 부르기를 미리암이라고 부르는 겁니다.
마리아가 성서에서 첫째 누구 이름이 마리아냐면 예수님의 어머니입니다
두 번째는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세 번째는 야곱과 요셉의 어머니마리아
네 번째는 지금 우리가 공부하는 마르다의 동생 마리아 다섯 번째는 마가의 어머니 마리아 여섯 번째로 로마의 여신도 이름 마리아라고 있습니다.
로마서16장6절에 보면 마가의 어머니마리아는 사도행전12장12절입니다.
야곱과 요셉의 어머니마리아는 마태복음27장56절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마태복음27장56절입니다.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는 마태복음1장16절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 집에 들려 이르시다가 그다음 날 예수님이 종려주일 날에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면서 베다니 이 집에 들어가서 주무셨다고 그랬잖아요. 그게 네 번째 방문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제 생각에 고난 주일에 주욱 예루살렘에 계시면서 베다니 이 댁에서 주무시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특별히 마지막 다섯 번째 예수님이 고난주일 수요일에 마태복음26장6절에서 13절을 보시면 아주 묘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마태복음26장은 우리가 항상 말하는 감람산설교 기억나시죠. 감람산설교가 마태복음24장25장입니다 감람산설교는 어느 요일에 했습니까? 화요일에 했잖습니까?
그래서 감람산설교가 끝나고 그날 저녁에 베다니에 가서 주무시다가 나오신 게 수요일입니다 수요일에 나오시기 전에 베다니 그 집에서 하시는 일입니다 마태복음26장6절을 보면 조금 혼돈스럽게 마태가 써놓았습니다
어떻게 쓰 놓았느냐면 6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계실 때에7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아와서 식사하시는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이렇게 나오는데 여기 보면 나병환자 시몬이 누구냐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추측하기를 나사로가 문둥이가 되었나. 이렇게 추측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는 시몬입니다 그래서 성경학자들이 그러는 겁니다. 도대체 이 문둥이 시몬이 누군가? 그리고 추측하는 겁니다.
무엇을 추측하느냐면 마르다의 남편으로 추측하는 겁니다. 우리가 천국에 올라가서 이걸 주님에게 한번 여쭈어 봐야 합니다. 그런데 그때 여기서 한 여자가 그랬습니다. 그 여자가 누굴까요? 마리아입니다 참고로 마리아는 영어로 뭐라고 부르느냐면 메리(Mary) 영어권 사람들은 마리아로 안 부릅니다.
메리(Mary) 라 부릅니다. 그런데 마르다는 뭐라고 부르느냐면 마르다는 헬라어입니다 그런데 영어를 쓰는 사람들은 마르다를 뭐라고 부르냐면 마르타(martha)라 그럽니다. 7절에 한 여자가(마리아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아와서 식사하시는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아까 요한복음12장3절에는 어디에 뿌렸습니까? 발에 뿌렸습니다. 이게 다른 겁니다.
어떤 신학자들은 같은 거다 아닙니다. 다릅니다. 머리에 부으니 8제자들이 보고 분개하여 이르되 무슨 의도로 이것을 허비하느냐 이때 보면 요한복음12장에서는 누가 분하였습니까? 가룟 유다입니다 여기는 제자들이라 그랬습니다. 제자들이 보고 분개하였다 그랬습니다. 분명히 누가 앞장섰을 것 같습니까? 제 생각에는 베드로 같습니다. 예수님 왜 가난한 여자에게 이걸 다 받으십니까? 아마 그렇게 했을 겁니다. 8제자들이 보고 분개하여 이르되 무슨 의도로 이것을 허비하느냐 9이것을 비싼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거늘 10예수께서 아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11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12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례를 위하여 함이니라13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이 여자를 높이시는 겁니다. 분명히 다릅니다. 3차하고 5차가 다릅니다.
그러면 본문1절에서 왜 마리아의 이름을 먼저 이야기했을까요.
그러면 답이 나옵니다. 마리아가 언니보다 영적으로 더 높은 여자입니다
왜 높습니까? 희생했기 때문에 그러는 겁니다. 예수님의정체성을 깨닫고 희생한 겁니다. 다시 말하면 기독론을 분명히 공부하지 않고 예수님이 누구라는 것을 분명히 공부하지 않고 희생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누구라는 걸 안 다음에 희생하는 겁니다. 예수님을 분명히 알지 못하고 희생한다고 해서 물질 내는 사람은 꼭 자기 영광을 찾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부분의 영광은 자기가 자랑하면 안 됩니다 딴 사람이 인정을 해주어야 합니다.
여기서 차이가 나는 겁니다. 그래서 이 여자를 주님이 높이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오늘 이 메시지 속에서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크리스천이 두 가지가 있다는 겁니다. 대별해서 마리아와 마르다가 있다는 겁니다. 우리AMI식구들은 다 마리아가 되어야 되겠습니다.
지금 마리아들이 되고 있습니다. 남자들은 마리아라고 부르지 않고 뭐라고 부르면 되겠습니까? 그리고 마지막으로 제가 간단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마리아 마르다 사건을 끝내놓고 이것 때문에 주님께서는 역사에 변화되는 터닝 포인트를 주님이 가져오시는 겁니다. 다시 말하면 1장에서부터 주욱 해서 마지막12장으로 넘어가면서 유월절어린양이 실제로 되게 하는 터닝 포인트가 변화되는 포인트가 11장 마지막 부분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여야 되잖아요. 그래서 공의회를 열게 하는 겁니다.
공의회를 왜 열었나 보면 예수님이 마리아 남동생 사건을 하게 하시고는 주변에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니까 그러기 때문에 47절에서53절을 보면 그랬습니다. 예수님의 표적 때문에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서 예수님을 왕 중의 왕이다 이렇게 이야기하고 저분이 그리스도다 저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다 이러니까 유대인들이 자기네의 포지선이 어려워지는 겁니다. 왜냐면 자기네는 예수님을 반대하고 예수님이 왕 중의 왕이 아니고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고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말하는데 자꾸 자기네 말을 듣지 않고 따라다니는 사람들이 나오는 겁니다.
심지어는 공의회회원들 중에 누굽니까? 니고데모 또 아리마대 요셉 이런 사람들까지도 따라다니고 하니까 이게 불안한 겁니다. 그래서 이분들이 회의를 열고는 회장되시는 가야바가 예수님을 죽이자 그래서 그때부터 음모를 시작하는 겁니다. 그럴 때 거기에 나중에 누가 가담하게 됩니까?
가룟 유다가 가담하게 됩니다. 그것도 창세기3장15절에 이미 예언 된 겁니다. 이렇게 해서 성서 창세기부터 하는 모든 일들이 이렇게 요한복음에서도 다 정리되면서 마무리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말씀이 재미있습니다.
재미만 있다고 그러면 마르다가 되어 버리는 겁니다. 이제는 거기서 한 단계 올라가서 마리아가 되셔야 합니다. 희생하셔야 합니다. 시간희생 물질희생 모든 걸 다 희생하며 나의 인격도 희생하며 저분을 위해서 내가 죽어주는 겁니다. 이런 부분에서 그럴 때 주님이 그것이 더 좋은 것이었다.
나중에 너희들 이 사람기억하게 기념하라는 겁니다. 이 말은 무엇입니까?
천국에서 높임을 받을 거라는 겁니다.
기도드리겠습니다.
예수님! 요한을 통해서 예수님이 누구시며 예수님의정체성을 이런 모습으로 저런 모습으로 가르쳐주면서 이제 11장을 저희들이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11장에서 분명 창세기3장15절의 그 예언의 메시지가 이루어지는 그 단계까지 오게 하셨습니다. 주님 저희들이 이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의 크심으로 다시 한 번 찬양 드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오늘 우리 셀 모임에서 이 부분을 서로 심도 있게 대화하면서 하나의 지식으로만 끝나지 않고 주님을 깊이 이해하고 주님을 그러므로 해서 사랑하고 의지하고 마리아와 같이 나의 모든 것을 주님 앞에 드리는 가치관에 변화가 일어나는 천국은 예수님이 말씀하셨잖습니까? 천국은 좋은 진주를 보고 자기 있는 것을 다 팔아서 진주를 사는 것처럼 주님 가치관의 변화를 우리에게 주셔서 이 세상에 잡다한 없어질 것에 내 마음이 빼앗기고 거기에 100%나의 모든 것을 갖다 바치다가 우리가 목숨이 끊어질 때 아이고 내가 잘못해구나라고 후회하는 사람이 되지 않도록 우리에게 이 지혜를 허락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황용현 목사님 설교내용영상으로 보세요.
https://www.youtube.com/watch?v=nivRcMHhHM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