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강. 요한복음17장5절, 창세전에 존재하신 하나님
저주와 복 시리즈 3강. 창세전에 존재하신 하나님(요17:5)
저주와 복 시리즈 세 번째 말씀입니다. 창세전에 삼위하나님이 존재하셨다는 주제를 가지고 심도 있게 서로 이야기를 나누려고 그럽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신비한 비밀을 계속해서 가르쳐주실 줄 믿습니다.
여러분들에게는 지혜가 넘쳐나는 그러한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그동안에 공부해왔지만 창세전에 삼위하나님께서 결정을 하셨는데 어떤 결정을 하였냐면 예수하나님을 시간 속으로 던져서 성육신시켜서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심으로 앞으로 만들어질 하나님의 자녀들이 저주를 받게 되는데 자주를 대신 지실 것을 이렇게 창세전에 예정하셨다는 이 말씀을 지난시간에 공부했습니다. 오늘은 이 말씀을 중심으로 해서 계속해서 우리가 깊이 보려고 그럽니다. 그래서 바울이 나중에 이것을 깨닫고는 뭐라고 그랬습니까? 이것은 그리스도의 신비다 미스터리(mystery)라는 단어를 바울이 사용했습니다. 왜냐면 바울도 이것을 잘 소화하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가 알다시피 바울이 계속 이것을 깨닫고는 주후55년에 깨달았잖아요.
그리고는 이분이 편지 쓸 때마다 항상 이 말씀을 하실 때마다 무슨 표현을 하느냐면 이 신비라는 단어를 계속 써왔습니다. 이 말은 이분이 이것을 완전히 소화를 못했다는 하나의 증거로 이런 단어를 쓰지 않았나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분이 순교1년 전인 주후67년에 디모데후서를 썼잖아요.
디모데에게 유언적인 말씀을 하실 때 디모데후서1징9절에 이분이 똑같이 창세전십자가사건을 이야기하는데 그때는 이분이 유일하게 신비라는 단어를 써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말씀을 상고하면서 이분이 더디어 이 신비가 풀렸구나. 순교1년 전에 이 신비가 풀렸구나. 라는 것을 우리가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베드로도 65년에 순교당하셨는데 이분이 64년에 베드로 전 후서를 쓰실 때 신비의 말씀을 쓰셨는데 이분도 신비라는 단어를 써지를 않았습니다. 베드로전서1장19절20절에 그러니까 베드로도 오랫동안 훈련받으시고는 신비문제 해결 받고 주님나라에 가셨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과연 계속해서 신비가 될 것인가? 아니면 이것을 그냥 내가 소화할 수 있는가? 각자의 영적 수준에 따라서 다를 겁니다.
창세전십자가에 매달려서 저주를 예정하신 이야기 이것은 우리가 공부하면서 아담이 타락하면서 받은 저주를 보여주는 사건이 창세기3장15절을 원시복음이라 그랬습니다. 원시복음을 야훼께서 예수님께서 사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여자의 후손으로 이 세상으로 내려와서 사탄의 후손과 십자가상에서 싸움이 있는데 승리할 것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저주받으실 것을 이미 창세기3장15절 원시복음에서 말씀하셨습니다. 그게 주전4천년입니다
그리고는 주전1000년에 다윗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시편22편1절에서 다윗에게 비디오로 보여 주었습니다 다윗이 환상으로 본 겁니다.
보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서 저주받으시면서 외치는 장면을 다윗이 봤습니다. 외치는 게 나의하나님, 나의하나님 어찌하여 주께서 나를 버리시나이까? 이렇게 버리시나이까? 할 때 영어성경이나 원어를 보면 현재완료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현재완료형은 뭐냐면 과거언제부터 시작해서 지금가지 계속해서오는 그것을 이야기하는데 과거 언제부터냐면 창세전에 이미 이 계획을 짜시고는 지금까지 오고 있는 계속성을 나타내는 겁니다.
그렇게 다윗에게 보여주시고는 300년 후 주후700년에 이사야에게도 보여 주었습니다. 이사야서53장4절에서6절에 그리고는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주후26년에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시는데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보시고는 하시는 말씀이 저분이 세상의 저주를 뒤집어쓰시고 갈 하나님의 어린양이구나? 이것을 세례요한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요한복음1장29절에서 그리고 예수님이 실제로 십자가에 달리셔서 마지막 순간에 예수님이 다윗에게 말씀하셨던 것을 그대로 실천하시는 겁니다. 마태복음27장46절에 엘리 엘리 라마 사막다니 그러면서 아버지 내가 왜 이 저주를 받고 있습니까? 왜 이런 말씀을 하십니까? 이분이 100%인간이 되셨기 때문에 신성을 포기하셨기 때문에 이런 말씀을 하셨던 겁니다. 삼위하나님이 창세전에 이것을 결정한 상황인데도 100%인간이 되셨기 때문에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을 우리가 알잖아요.
그리고는 요한복음19장30절에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질문을 하나 던질 필요가 있습니다. 왜 예수님이 창세전에 십자가에서 저주를 받으셔야만 하는가? 이게 우리의 질문 중에 하나입니다
이 질문을 던지면 우리가 이런 식으로 대답을 해야 됩니다 장차 아담이 타락할 터인데 이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아담이 받았던 육혼영의 복들을 상실하게 되고 그리고는 육혼영의 저주로 대체될 것을 이미 다 아시고는 저주를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분들에게 다시 복을 회복시켜주기 위한 하나님의 프로그램입니다 하나님자녀들의 저주말소프로그램이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저주말소프로그램을 언제 짜셨냐. 창세전에 짜셨다 이렇게 우리가 소화를 하면 되겠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대표적으로 바울을 봐도 바울이 개종 후 20년 동안은 창세전 저주말소프로그램을 몰랐습니다.
바울은 원시복음만 알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아담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저주받으신다는 단순 복음입니다.
이렇게 알다가 20년 후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쓰실 때 고린도전서2장7절을 바울이 깨닫고는 아하! 저주말소계획이 창세전에 이미 디자인 되었구나. 는 것을 깨닫고는 바울이 고린도전서2장7절을 쓰셨는데 그기에 이분이 신비다 그러니까 100% 소화는 못했다는 말이나 비슷한 겁니다. 그 전에 예수님께서 바울로 하여금 마태복음을 읽게 하셨습니다. 마태복음은 주후50년에서 52년에 썼습니다. 마태복음에 나오는13장이야기 천국의 신비를 설명하는 것인데 일곱 가지 비유로 주욱 말씀하시잖아요. 씨 뿌리는 비유부터 주욱 하는데 13장35절에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세상에 기초가 놓인 이래로 이 신비는 언제 만들어졌느냐면 세상에 기초가 놓인 이래로 감추어 놓았다가 지금 들어내는 거라는 이러한 말씀을 마태에게 하십니다. 그래서 제가 지난시간에는 세상에 기초가 놓인 이래로 할 때 이게 언제냐면 원어를 보니까 아포 카타볼레스 코스무 세상에 기초가 놓인 이래로 그랬습니다.
그러면 세상에 기초가 놓인 때가 언제입니까? 창세기1장1절로 본다면 마태복음13장의 천국의 신비는 창세기1장1절에서 만들어 졌다고 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지난시간에는 이것을 창세전이라고 그랬는데 수정해주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보면 아포 카타볼레스 코스무라는 이 표현이 성서 두어 군데에 또 나옵니다. 그래서 이게 굉장히 중요한 표현들이기 때문에 제가 헬라어로 가르쳐주는데 요한계시록13장8절과 요한계시록17장8절에 이 단어가 나옵니다. 요한계시록13장은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오는데 요즘 적그리스도인 두 짐승이 나오는 아주 뜨거운 장입니다 이때 많은 사람들이 적그리스도에게 경배하는 것을 요한이 봤는데 어떤 사람이 경배를 하느냐면 이 세상에 기초가 놓인 이래로 생명책에 이름이 놓이지 않은 사람들 그러는 겁니다.
그러면 이게 굉장히 중요한 개념입니다 그러니까 창세기1장1절 이후에 생명책이 이미 기록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구분이 된다는 것을 예시해주는 겁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이 적그리스도에게 경배하느냐면 아예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지 않기로 된 사람들 언제부터냐면 세상에 기초가 놓인 이래로 그래서 아포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프롬(from)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이 세상에는 적그리스도 제가 때가 되면 적그리스도에 관해서 자세히 설명할 때가 오는데 이 세상에는 두 가지의 시간이 있다는 것을 지금 보면 창세전이라는 하나의 시간이 있고 그다음에 창세기1장1절에 창세 이후라는 시간이 있습니다. 창세전과 창세 이후입니다 그러면 저주말살계획이 언제 시작되었습니까? 창세전에 저주말살계획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사람들이 소화를 못하니까 창조 때 저주말살계획을 했다고 보는 것인데 이것도 소화하기가 힘이 듭니다. 그러니까 세 번째로 뭐냐면 아담타락 후에 다시 말하면 원시복음 적 저주말살계획이 우리에게는 이해가 쉬워지는 겁니다.
실은 저주말살계획이 언제부터 시작된 겁니까? 창세전인데 그걸 소하를 못하니까 바울도 소화하기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조금 댕겨 와서 창세 때 저주말살계획 이보다 더 댕겨 오면 아담타락 때 이것을 원시복음 적 저주말살계획입니다 이것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한꺼번에 주지 않고 조금씩, 조금씩 때를 따라서 처음에는 원시복음 적으로 가르쳤다가 조금 있다가 그것을 창세 때 했단다. 이러게 했다가 나중에는 창세전까지 밀고 나가시는 겁니다.
그런데 같은 하나님의 자녀들인데도 소화능력에 따라서 대부분의 하나님의 자녀들은 어디에 머뭅니까? 원시복음 적 말소계획에 머물려있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 고 해서 구원이 없는 게 아닙니다. 이분들도 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그런데 더 깊이 멀리 갈수록 그것을 소하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제자 급 사람들 깊은 영성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 예수님을 더 사랑해야 되는 순종해야 되는 그런 사람들에게는 한꺼번에 안 줍니다. 천천히 때를 따라서 천천히 깊은 하나님의 마음을 가르쳐주는 겁니다.
그래서 첫째 창세전이라는 단어를 바울이 처음에 쓴 단어인데 고린도전서2장7절에 그런 단어를 썼습니다. 창세전에 저주말소계획이 있었다는 겁니다.
이게 바울이 개종해서 몇 년 후입니까? 35년에 개종해가지고 55년에 이걸 깨달았으니까 20년 후입니다. 이분이 쓴 창세전 만세전 이렇게 표현을 했는데 원어로 프로 톤 아이오논 befor the World 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대부분의 영어성경에는 이게 세상 전으로 성경을 영어로번역하는 사람들도 굉장히 이 부분에 대해서 혼돈스럽게 번역한 게 굉장히 많습니다.
그래서 깊은 영성이 우리에게 필요로 합니다. 바울이 그래서 이것을 창세전에 이렇게 저주말소계획을 준비하셨다가 이것을 감추어놓았다 그랬습니다.
감추어놓았다가 언제 뚜껑을 열었습니까? 주후55년에 뚜껑을 연 겁니다.
오랫동안 감추어놓았다가 그러면 왜 이렇게 감추어놓았을까요?
그러면 우리지난시간에도 봤지만 인간의 피조물의 속성 때문에 그런 겁니다.
피조물은 이런 것을 소화할 수 없기 때문에 피조물을 배려하는 입장에서 하나님의 깊은 영적인 속성을 소화할 수 없기 때문에 그러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질문이 이렇게 창세전에 계셨던 삼위하나님이 도대체 창세전에 존재했을까? 그러면 본명이 존재했을 겁니다. 창세전에 삼위하나님이 존재하셨는가? 오늘 여기에 대한 질문입니다 그러면 분명이 존재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성서말씀으로 우리가 대답을 해야 됩니다 그러면 여기 관계되는 성서말씀이 두 군데에 있습니다. 우리크리스천들은 이런 기본적인 부분에서 기억을 잘해놓아야 됩니다. 첫째가 요한복음17장5절입니다. 예수님이 직접 하신 말씀으로 요한복음17장은 굉장히 유명한 장입니다 성만찬 끝나시고 제자들이 보는데서 예수님이 하늘을 우르르 보시면서 성부하나님과 대화하시는 장면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17장하면 아주 유명한 장입니다
성만찬 끝내시고 제자들이 보는데서 아버지와 대화하시는 장면입니다
대화하실 때 예수님이 아주 유명한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그중에 5절에 아주 특별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뭐냐면 아버지여! 그래놓고는 세상이 있기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영광을 가지고 있었잖아요. 이렇게 말씀하시는 겁니다. 세상이 있기 전에 이 말이 원어로 프로 투툰 코스모스 에이다이 이 세상이 존재하기 전에 우리가 존재 했잖아요 그러니까 이 말씀은 어떻게 해석이 됩니까? 삼위하나님이 언제 존재하셨다는 겁니까? 창세전에 이렇게 우리가 번역을 해야 합니다. 창세전에 삼위하나님이 존재하셨다는 겁니다.
그런데 삼위하나님이 예전에 이 영광을 가지고 있었는데 지금 예수님이 완전히 100%사람이 되셨기 때문에 이 영광을 예수님이 포기를 한 겁니다.
그런데 이 영광을 다시 회복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언제 회복합니까?
예수님이 저주를 받으시고 이 말은 하나님의 예정된 하나님의 자녀들의 과거의 죄 현재의 죄 미래의 모든 죄들을 통째로 예수님이 뒤집어쓰시는 장면입니다 그래서 엘리 엘리 라마 사막다니 이 저주를 다 받으시고는 그다음에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 하시고 숨을 거두는 순간에 예수님의 인성이 끝나는 장면입니다 인성이 끝났다는 것은 예수님이 무슨 성으로 회복되었다는 겁니까? 100% 신성으로 회복되는 순간입니다 100% 신성으로 회복되는 순간에 이분이 엄청난 일을 수행하시는 겁니다. 33년을 인간이 되셔가지고 창세전에 디자인했던 삼위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신 겁니다. 이루시고는 예수님이 아버지에게 자랑스럽겠습니까? 자랑스럽지 않겠습니까? 아버지입장에서는 정말 아들이 수고를 많이 하신 것에 대하여 자랑스러운 겁니다.
창조주가 피조물에게 이렇게 어려움을 당하시고는 또 창조주가 신성을 33년 동안 포기하시고는 이런 엄청난 일을 했기 때문에 기도하는 겁니다.
제가 조금 있으면 예전에 창세전에 우리가 가졌던 그 영광을 제가 곧 회복할 겁니다. 그러는 겁니다. 창세전에 그래서 창세전에 삼위하나님이 계셨다는 것은 요한복음17장5절입니다. 잊지 말아주세요 그다음에 하나를 더 보시면 요한복음1장1절입니다. 아르케(arche)라는 헬라 말을 썼습니다.
아르케(arche)라는 말은 태초라는 소리입니다. 이 태초는 창세기1장1절의 태초와 다릅니다. 요한복음1장1절의 태초는 창세전에 예수님이 계셨다는 존재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창세기1장1절의 태초는 창세 때 태초입니다
같은 아르케(arche)라는 단어인데 다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첫 번째는 창세전이라는 단어를 고린도전서2장7절을 가지고 제가 말씀드렸고 그리고 요한복음17장5절에 창세전 단어를 썼습니다. 그다음에 바울이 로마서16장25절에 이때도 창세전인데 원어를 보면 한국 킹 제임스성경에는 영세전이라는 표현을 했고 그리고 말씀보전학회에서 킹 제임스성경을 번역한 게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자기네가 원어에 제일 가깝다고 하는데 제가 볼 때는 원어에 가깝지 않습니다. 그 사람들은 뭐라고 썼냐면 이 세상이 시작되기 이래로 이렇게 표현을 했습니다, 그러면 이 세상이 시작되기 이래로 하면 언제부터라는 느낌이 옵니까? 우리가 은밀하게 보면 저세상 이 세상이라고 하면 원시복음부터라고 우리가 은밀하게 볼 수 있습니다. 우리 팀들은 이걸 우리가 공부했기 때문에 이 번역도 잘못되었습니다. 우리가 크로노이스라는 단어 배웠습니다. 시간하고 다른 시대라는 의미가 있는데 크로노이스 아이오니오스 영원한 때부터 그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이 시작된 이래로 번역된 것은 잘못 번역이 되었습니다. 아이오니오스 영원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영원한 때부터 그러니까 영원한 때는 창세 이후 부터입니까 창세전입니까?
창세전입니다 그래서 한국 킹 제임스는 영세 전부터 이것도 잘못 번역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로마서16장25절을 바르게 번역하면 창세전부터 이렇게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저주를 받은 이것은 창세전부터 계획한 것으로 번역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후60년경에 에베소서를 쓰실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에베소서1장4절이나 베드로도 마찬가지입니다 베드로전서1장20절 이때도 보면 프로 카타볼레스 코스무 창세전에 저주 받을 십자가사건을 예정하셨다 이렇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창세전 다시 말하면 십자가저주사건은 창세전에 이미 예정되었다 이렇게 정리하시길 바랍니다.
그렇다면 창세전이란 언제를 의미하느냐면 창세전이란 왜냐면 오늘날 교육받은 사람들은 제가 지금 말씀드리는 굉장히 중요한 기본적인 성서신학이론을 소화를 못하고 이게 풀리지 않아서 신앙생활을 잘 못하는 사람이 너무나 많습니다. 이 질문들이 많아가지고 그래서 나름대로 질문을 조금이라도 해소시키는데 도움이 되기 위해서 제가 이렇게 서 있는 겁니다.
창세란 언제를 의미하는가? 거꾸로 물어보면 제가 이렇게 대답할 겁니다.
그것은 영원 때다 이렇게 말하면 이것도 혼돈스러운 겁니다.
그러면 언제가 영원 때냐 창세이전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창세기1장1절 태초 이전을 이야기한다는 겁니다. 다시 말하면 창조이전이다 또 다른 말로 표현하면 피조물창조이전이다 다시 말하면 피조물이 가름할 수 없는 때입니다 피조물이 만들어지지 않을 때입니다 삼위하나님만 존재하고 계셨을 때입니다 이때 십자가저주를 예정하신 겁니다. 그러니까 초이성적 때입니다
이런 때 창세전저주말소계획을 만드셨습니다. 이런 영원 때 창세전에 이것을 바울은 신비롭다 그랬습니다. 모든 크리스천이라고 다 이것을 소화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신비롭다는 것은 그런 때 특별한 크리스천들은 소화가 가능하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또 질문을 던지는 겁니다. 어떤 사람들이 소화가 가능할까? 그러면 이사야11장1절과2절에 보면 이사야에게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여호와의 신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떨어져야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사야가 이런 표현을 했습니다. 여호와의 신이 뭐냐면 지혜와 총명의 신이라는 겁니다. 또 모략과 재능의 신이라는 겁니다. 모략은 카운슬링해주고 격려해주고 하는 그러한 신 그다음에 지식의 신 그다음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 이런 신을 여호와의 신이다 그러니까 성령님의 역할 중에 지혜를 주시는 역할 총명, 지식, 모략, 재능, 삼위하나님을 경외하는 능력을 베풀어주시는 그 신 성령님인 여호와의 신이 임해야지만 이 신비로운 창세전저주말소계획을 소화할 수 있다는 겁니다. 이게 아무나 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자녀지만 여호와의 신의 임재를 받은 자들이지만 특별영적감수성을 가져야지만 된다는 겁니다. 다시 말하면 여호와의 신은 우리가 다 받았습니다. 그래서 구원받았지만 구원을 위한 여화와의 신만 가지고는 안 된다는 겁니다. 그기에 보혜사성령님이 강하게 역사해가지고 우리로 하여금 조금 더 업그레이드된 여호와의 신은 같은 신이지만 역사하시는 강도가 다른 겁니다. 그래서 바울도 그렇기 때문에 다메섹에서 개종하면서 강한 성령도 다 경험 했지만 이분 속에 아직도 버려야 될 것들이 있으니까 20년 동안 여호와의 신이 여기까지 소화할 수 있는 단계까지 만들지 않은 겁니다.
그래가지고 바울이 20년이 되니까 창세전저주말소계획을 조금 소화하게 되었습니다. 되었지만 이분이 계속해서 신비라고 표현한 겁니다.
아까 말했지만 신비라고 표현한 것은 무엇입니까? 100% 소화를 하지를 못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주욱 나가다가 이것을 언제 소화한 것을 보여주었습니까? 순교1년 전 디모데후서1장9절에 보면 신비라는 표현을 그때 안 썼습니다. 이걸 보면 순교1년 전에 이것을 소화하셨구나. 이분이 똑같이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언젠가는 순교할지 모를 터인데 순교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순교할 찬스도 있고 들림 받을 찬스도 있고 그 전에 주님나라에 갈 찬스도 있고 그렇지만 빨리 이것을 100%소화를 하고는 신비라는 단어를 내 머릿속에서 없앴으면 좋겠습니다.
아까 베드로는 어땠습니까? 순교1년 전에 베드로 전서 후서를 64년에 썼습니다. 65년에 순교했는데 이분은 이 부분에 대해서 한번 지적을 했는데 신비라는 단어를 안 썼습니다. 베드로전서1장19절20절에 보면 그러니까 베드로는 이것을 소화했습니다. 우리가 오늘 이 공부를 하는 목적 중에 하나가 저주와 복의 시리즈를 통해서 제가 간구하는 것은 저나 여러분들이 영성이 더 확대되고 창세전에 이런 저주말소프로그램을 하셨구나. 이것을 겸허히 내가 수용하는 이런 사람들로 우리가 발전되게 하기 위해서 이번에 시리즈를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피조물들은 상당히 건방집니다. 우리가 이런 엄청난 하나님의 주권영역이 창세전저주말소프로그램을 깊이 묵상하고 이 신비를 묵상하면서 무릎을 꿇고 겸손한 모습을 우리가 보여주지 않습니다.
우리가 비굴한 예로 우리자녀들이 부모에게 이런 질문을 한다고 가정한다면 저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합니다. 자녀들이 부모님에게 이런 식으로 물어보는 겁니다. 엄마아빠 나 만들기 전에 내가 태어나기 전에 당신들은 뭘 했어 이렇게 예를 들어서 이놈들이 물어보는 겁니다. 그러면 말 안하고 가만히 있어면 왜 말 안 해! 엄마아빠 나 인간으로써 엄마아빠의 아들과 딸로써 우리가 알아야 될 권리가 있어 이렇게 덤벼드는 겁니다. 요즘은 인권이 평배해져 가지고 알 권리가 있다는 겁니다. 알권리가 지금 우리나라를 망치고 있습니다. 그래가지고 부모 앞에서 무례하게 고집을 부리는 이런 모습이 있습니다.
엄마아빠 자식에게 이런 것을 꼭 알려주어야 돼 부모책임으로 그런 의무가 있다면서 덤벼드는 겁니다. 이럴 때 어떻게 대답해야 됩니까?
그리고는 대답 안 해주면 나 엄마아빠 부모취급 안할 거야. 우리들에게 효도 기대도하지 마! 나 부모님 존경하는 마음이 없어지네. 이런 식으로 자녀가 나오면 우리부모님들의 생각이 어떻습니까? 이놈들을 잡아 죽일 수고 없고 요즘 애들이 이렇게 당돌하거든요 이게 말세의 징조입니다 자기밖에 모르고 자기의견이 강하고 이걸 뒤집어서 보면 우리가 지금 말씀공부 이렇게 하면서 우리예수님께 예수님! 창세전에 왜 이런 걸 준비했습니까? 하고 자꾸 우리가 여쭙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지혜가 생기고 명철이 생기고 지식이 생기면 아하! 예수님이 왜 이렇게 창세전에 저주말소계획을 하셨냐? 우리가 스스로 깨닫게 되는 겁니다. 알 수 있는 겁니다. 알 수 있도록 말씀 속에서 다 가르쳐주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말씀에 지혜가 있어야 되고 명철이 있어야 되고 지식이 있어야 됩니다. 질문을 다시 던져 보겠습니다. 삼위하나님이 언제 존재하셨냐? 그러면 뭐라고 대답하니까? 삼위하나님이 언제 저주말소계획을 예정하셨냐? 그러면 창세전입니다 그러면 다시 한 번 이런 질문을 해봅니다.
창세전저주말소계획을 짜신 삼위하나님 그분들은 누가 창조했냐요?
이렇게 우리가 건방지게 물어보는 겁니다. 똑같이 모세도 이 부분에 대해서 여쭈어 봤잖아요. 이스라엘사람들의 너하고 대화하는 하나님이 누구냐 그러니까 여호와께서 누구라 합니까? 출애굽기3장14절에 스스로 있는 자니라.
아주 유명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지칭하는데 I am who I am 현재형으로 되어 있는 겁니다. 이것에 대한 해석이 분분합니다. 그렇지만 나는 스스로 있는 존재다 다시 말하면 나는 누구에 의해서 창조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이렇게 표현한 겁니다. 그래서 스스로 계신 분을 몇 가지로 성서에서 표시하는 것이 있습니다. 첫 번째로 무엇을 표현하느냐면 영원한 존재라고 표현을 합니다. 영원한 존재다 이것을 우리가 묵상하면 아! 스스로 계신분이구나
그래서 제가 성경구절 몇 개를 드리겠습니다.
시편90편2절에 영어로 Everlasting God 야훼는 영원부터 영원까지 존재하신 분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시간 속에 살기 때문에 시간적인 접근방법을 쓰거든요 영원부터 무한대의 영원까지 존재하시는 분이라는 겁니다.
또 시편102편26절에 영어로 Everlasting God영존하시는 분이시다 영원히 존재하시는 분이라는 겁니다. 이사야40장28절에 영어로eternal God영원하신 하나님이다 그랬습니다. 또는 창세기21장33절에 똑같이 eternal God이라고 썼는데 영생하신 하나님이다 이렇게 번역을 해놓았습니다.
신명기33장27절에는 eternal God 영원하신 하나님이다 이렇게 표시를 다 해놓았습니다. 요한계시록15장7절에는 세세토록 계신분이다 이렇게도 쓰시고도 어떤 번역에는 영원무공토록 살아계신 분이시다 이렇게도 써놓았습니다
그러니까 영원하신 하나님은 피조물이 아니라는 겁니다. 누가 창조하신 분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죽을 때까지 우리삼위하나님을 묵상을 하되 특히 우리구세주 되시는 예수하나님을 묵상할 때 항상 영원하신 하나님 이분을 항상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계속해서 묵상하는 겁니다.
전철 안에서도 버스 안에서도 목욕탕에 들어가서도 영존하신 하나님 그래서 제가 성경구절을 드렸습니다. 영어로 에버라씽 포에버 앤 에버(everlasting forever and ever)세세무궁토록 이런 말입니다. Everlasting God 또는 eternal God 그다음에 forever and ever God 이렇게 계곡해서 묵상하세요.
이것이 I am who I am 어떤 성경에는 I am that I am 그랬습니다.
관계대명사 that을 쓰면 안 됩니다. 그런데 많은 바이블이 that을 써놓은 게 있습니다. 왜 그런지는 나중에 이야기하겠습니다. 그다음에 영존하시는 하나님 그다음에 어떤 하나님을 우리가 묵상하느냐면 불변하시는 하나님입니다.
I am who I am 스스로 계시는 하나님은 영존하시면서 불변하시는 하나님 그래서 다니엘6장26절에는 영원히 변하지 않으시는 분이라고 그랬습니다. 기분에 따라서 변하지 않는 영원히 변하지 않으시는 분 얼마나 멋있습니까?
그래서 이분을 계속해서 묵상하는 겁니다. 나는 변하지만 야고보서1장17절에는 야고보가 변함없으신 분 이렇게도 야고보가 고백했습니다.
그다음에 시편102편27절과 히브리서1장12절에는 동일하신 분 이렇게도 표현했습니다. 그다음에 히브리서13장8절은 우리가 잘 아는 말씀입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 그랬습니다. the same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으로 변함이 없으신 분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스스로계신분인 예수님만 묵상할 때 야훼 예수님이시여! 예수님은 스스로 계신분이시군요 그다음에 예수님! 예수님은 영존하신 분이시군요 영원하신 하나님이시 군요 그다음에 변하지 않으신 하나님이시 군요 불변하시는 하나님이시 군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하나님이시 군요 이걸 계속해서 묵상하는 겁니다. 그러면서 이분이 창세전말소계획을 하실 때 삼위하나님이 어디에 계셨습니까? 이것도 질문하는 겁니다. 누굽니까? 어디에 계셨습니까? 창세전에 그러면 낙원에 계셨다. 3층천에 계셨다 그러니까 은 이미 존재했던 하나님의 집입니다 아버지의 집이라고 그랬습니다.
고린도후서12장2절에서4절에 낙원의 크기는 엄청나게 큰 겁니다.
제가 결론적으로 창세전저주말소계획을 우리가 끊임없이 묵상해야 됩니다.
이것을 묵상하고는 내 것으로 만들고 하나님의 엄청난 신비스러움을 내가 느끼고 주변사람들에게 전해야 되고 나누는 이런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은혜를 베푸십니다. 우리가 이런 예수님의 크신 저주말소계획을 내가 어느 정도 소화하고는 여기에 대해 주님께 감사하면 이분의 존재성과 이분이 그렇게 하셔야만 되는 이유와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음에 계속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런 것을 항상 묵상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찬송을 부르는 이유 중에 하나가 묵상하면서 찬송으로 이렇게 표현하는 겁니다. 예수님을 표현하는 겁니다.
그럴 때마다 나에게 은혜가 내려옵니다. 내가 간구하지 않아도 주님이 나에게 은혜를 주시고 내 자녀들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자비를 베푸시고 이분과 초점을 맞추어서 항상 같이 있으면 특히 창세전 이 사건 여기에 대해서 초점을 맞추고 있으면 우리주님이 기분이 좋으시겠습니까? 안 좋으시겠습니까? 예수님을 기분 좋게 우리가 해드리면 그다음부터는 이분이 알아서 나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시고 나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또 하나님이 숨겨놓으신 신비를 더 크게 넓게 높게 깊게 이렇게 계시를 해주시는 겁니다.
계속해서 나의 영성을 더 크게 해주시는 겁니다. 이런 사람은 이 세상에서 내가 돈이 없고 건강도 안 좋고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이 잘 풀리지 않아도 그 안에서 주님이 주시는 엄청난 위로와 평강과 소망을 체험하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는 저세상에서 받을 모든 약속들을 내가 이렇게 보면서 이 세상에서 살 때 궁궐이나 초막이나 이게 천국인 겁니다. 그렇겠죠?
기도드리겠습니다.
아버지하나님 저희들이 조그만 우리들의 지혜와 명철과 지식과 우리의 이성으로는 하나님의 신비를 구체적으로 알 길이 없지만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계속해서 조명해주시면 때를 따라서 우리들이 주님의 신비의 선물들을 담을 수 있는 그릇으로 발전시켜주심을 알고 있습니다. 바울에게도 이 경험을 하게 하셨습니다. 주님 베드로에게도 그랬습니다. 과거2천년 동안 많은 주님의 신실한 제자들에게도 그렇게 하셨습니다. 마지막 때 저희들 AMI라는 공동체에 저희들을 보내주시고 주님의 말씀 안에서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가르치심에 따라 신비한 그리스도의 신비를 더욱더 깨닫게 됨에 따라 이것이 깨닫는 것만이 아니고 이 신비를 깨달음으로 우리 예수그리스도를 더욱 의지하고 사랑하고 예수그리스도를 더욱더 존 귀히 여기며 감사히 여기며 이것을 NK우리 형제자매들에게 이 신비를 나누어주는 지혜를 가지기를 소원합니다. 저희들에게 이 지혜를 teaching power를 우리에게 허락해 주시옵소서. 주님께서 선별해주신 NK의 사랑하는 모든 자녀들 모든 성서적으로 풀리지 않는 질문들이 저희들을 통해서 풀리는 기적이 일어나도록 성령님 저희들 사용하시고 홀로 영광 받아 주시옵소서. 지금 이 시간은 예수그리스도의 무한하신 은혜와 하나님아버지의 극진하신 사랑하심과 성령님의 끊임없이 감동케 하심과 깨닫게 하심과 느끼게 하심과 지식으로 차게 하심과 또 명철로 차게 하심과 지혜로 넘치게 하시는 일들이 우리를 떠나지 않도록 함으로 저희들을 통해서 특별히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NK형제자매들에게 주님이 저희들에게 이 사명을 주셨으니 저희들이 주님을 더욱 사랑하는 주님의 정체성을 더욱 깨닫게 해주는 그러한 도구가 되기를 소망하는 우리 모두에게 지금부터 영원히 함께할 지어다 아멘.
※ 창세전에 존재하신 하나님(요17:5)
1. 언제부터 성부하나님과 성자하나님이 함께 존재하셨습니까?(요17:5)
2. 예수님이 성육신하시어 십자가상에서 저주 받으실 계획을 창세전에 하셨는데 그 내용을 헬라어 원어로 풀이하여 설명하십시오.
3. 마태복음13:35과 요한계시록13:8, 17:8은 상기 2번 질문과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4. “창세전”이란 언제를 의미합니까?
5. “창세전 십자가상”의 저주사건을 모든 크리스천이 쉽게 소화할 수 있습니까? 소화할 수 없다면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6. 삼위하나님은 누가 창조 하셨습니까? 이분들의 특성은 무엇입니까?
7. 창세전에 삼위하나님이 어디에 계셨습니까?
※황용현 목사님 설교내용영상으로 보세요.
https://www.youtube.com/watch?v=wyTWD-00Qd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