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강,사도행전10장34절. 베드로의 혼적 한계성(2)
인간론 12강, 베드로의 혼적 한계성(2)(행10:34)
사도행전10장34절을 보면 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35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이분이 지금까지 무슨 생각을 하였다는 겁니까,
복음은 유대인에게만 필요한 거지 이방인들은 로마사람들은 그까짓 것 자기가 볼 때 시시하게 복음을 받을 것으로 생각 안했다는 겁니다,
우리도 생각이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도 그런 부분이 많습니다,
뜨겁고 금식하고 박수치고 할례루야 이것은 우리민족만 하는 줄로 압니다, 그러다가 다른 나라 아프리카사람들이 우리처럼 똑같이 하면 그 사람들도 하느냐 이런 사고방식이 과거 10년 전까지 우리에게 많이 있었습니다,
특히 우리민족은 단일민족이기 때문에 이런 사상이 굉장히 짙습니다,
이렇게 베드로가 느낌을 가졌습니다,
그럴 때 성령님께서는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44절에 지금 베드로의 생각을 성령님께서 말씀하십니다,
44절에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 설교를 할 때 성령이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다시 말하면 유대인들이 그러니까 베드로의 오른팔과 왼팔들입니다,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을 부어주심으로 말미암아 놀라더라, 그랬습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저는 이 말씀을 딱 보면서 이랬습니다,
아하 베드로가 자기 오른팔. 왼팔. 자기제자들. 자기교인들에게 이방인이 복음을 받아야 된다는 말을 한마디도 가르치지 않았구나,
자기교회성장만 이야기했지 그러니까 훈련이 안된 사람들입니다 이방인이 복음을 받는 걸 보고 놀라자빠졌다는 겁니다,
이게 어떻게 된 거냐면 복음이 우리의 전유물인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까, 막 말로하면 잡 사람들이 다 복음을 받는구나, 이런 생각을 가진 겁니다,
베드로가 이런 지도자였습니다, 엄청나게 교만했습니다,
그러니까 과거 오순절사건의 베드로가 어떻게 보면 더 순수했을 수도 있었습니다, 성령세례를 받고 주님일하면서 역사도 막 일어나는데 깊은 카르디아(Kardia)속에는 자민족에 대한 자기위치에 대한 교만이 꽉 차 있었던 겁니다, 교만이 가득 차있는데도 하나님이 그 교만을 가지고 하나님이 역사를 일으켰습니다, 그렇지만 밑에 깔려있는 심중에는 민족적인교만 어떤 때는 교단적인교만 교회적인교만 학벌이니 뭐니 하는 이런 교만이 깔려 있었습니다, 이분이 그런 마음을 가지고 가이사랴에서 바깥으로 나가면 좋은데 나가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집회 끝나고 이분들이 변화되는 모습을 보고 놀란 후에 자기제자들 보고 애들아 우리 빨리 예루살렘에 가서 여기서 경험한 것을 이야기해주자면서 예루살렘에 다시 왔습니다,
이분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게 거기가 자기 본부입니다,
그게11장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 이분이 도착해가지고 열두제자와 그 밑에 있는 교인들을 모아놓고는 플래카드에 베드로사도 해외 선교보고대회 아마 이렇게 붙여놓았을 겁니다, 그리고는 선교보고를 하는 게11장입니다 1절에 유대에 있는 사도들과 형제들이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들었더니 2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에 할례자들이 비난하여 이르되 어떻게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합니까, 이것은 말로 안 됩니다, 하는 이런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교회가 예루살렘교회입니다,
그러면서 이르되 네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 하니 4 베드로가 그들에게 이 일을 차례로 설명하여 5 이르되 내가 욥바 시에서 기도할 때에 일어난 일들을 설명하는 겁니다,
15절부터보면 내가 고넬료 집에서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 처음에 우리에게 한 것이 무엇입니까, 오순절다락방사건입니다,
그런 스타일의 역사하심이 있었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16절에 내가 주의 말씀에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신 것이 생각났노라
이게 사도행전1장5절 말씀입니다,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10일)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이 말은 베드로선생님이 바로 예수님 코밑에서 그 말씀을 들었는데 그 말을 잊어버리고 있다가 이제야 고넬료 집에서 그 말씀이 생각이 나더라는 겁니다, 고넬료 집에서 왜냐면 실제로 이방인이 복음을 받는 모습을 보고서 생각이 나더라는 겁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성령세례가 다시 일어나는 것을 보고는 주님의 말씀이 이제 생각나는구나,
내가 그동안에 좁은 생각만 했구나, 이게 베드로의 사고방식입니다,
지금 베드로의 사고방식을 가진 하나님의 종들이 엄청나게 많습니다,
어느 나라가나 똑같습니다, 미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베드로의 사고방식을 가진 분들이 전체교회에 90%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바울의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은 전체지도자 중에 10%가 될까 말까입니다, 이게 왜 그런지 아십니까, 사람들이 자민족중심사상으로 꽉 차있어서 그런 겁니다, 자신의 문화에 지배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타문화는 싫어하는 게 사람입니다,
타문화사람들을 보면 불편한 게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그걸 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타 문화권에다가 하나님이 바울과 바나바 같은 사람을 미리 던져놓은 겁니다, 던져서 타문화와 교제하게 하는 겁니다,
그게 한 세대가지고 안 됩니다, 3세대4세대 가서 완전히 그 문화권에다가 집어넣어버리는 겁니다, 이게 피조물들이 가지고 있는 한계점들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타문화속에 살지 않으면서 선교를 한다는 것은 보통 힘든 게 아닙니다, 그러니까 연습을 해야 됩니다,
안 그러면 자기는 선교사로 나갔지만 그 사람들이 볼 때 이사람 우리문화를 너무 모르는구나, 자기문화가지고 우리한데 와서 자랑하는구나,
자기스타일로 하는구나, 다 압니다,
그러니까 제대로 선교를 못합니다, 하는 것 같지만 원주민들은 싫어합니다, 우리 선교하는 사람들은 그걸 경험하지 않으십니까,
시간을 요구하십니다, 시간을 17절을 보면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더라
이 말이 굉장히 재미있는 말입니다,
지금 베드로가 선교보고를 하면서 자기교인들을 앉혀놓고 하는 소리입니다, 하나님이 요한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고 나중에 성령으로 세례 받는다는 말도 우리가 다 들었는데 이분들이 그대로 경험하는 것을 내가 봤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주 예수그리스도를 믿을 때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저 사람에게도 주었으니 내가 뭐라고 할 말이 없다는 겁니다,
당신이 괜히 이런 말 저런 말하지 말라는 겁니다,
나 이제야 깨달았다는 겁니다, 18절에 그들이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다시 말하면 베드로가 지금 이분들에게 여보시오,
생각을 바꿉시다, 지금 이런 상황입니다 주님의 뜻을 알았습니다,
그러니까 이분들이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가만히 듣고 있었다는 겁니다,
저는 이 말을 보면서 이분들이 왜 잠잠했을까 여러분들 이 예루살렘교회는 어떤 교회입니까, 오순절교회의 시조입니다,
다시 말하면 할례루야, 아멘 하고 박수치고 하는 오순절스타일교회 예루살렘교회가 그런 교회의 시조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그런 스타일로 하는 걸 오순절 파라고 그러고 성령파라 그럽니다,
베드로가 고넬료 집에 가서 여차여차하여 이방인들도 복음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이 오순절파들은 어떻게 합니까,
할렐루야 이제야 되는데 그것 안하고 잠잠히 있었다는 겁니다,
그게 무슨 일이냐면 속으로 기분 나쁘다는 소리입니다,
어떻게 오순절 이 경험이 우리 전유물인줄 알았는데 잡동사니들도 가진다는 겁니다, 우리 같으면 한국 사람과 미국사람만 가지지 저 아프리카 시시한 가난한 나라사람들이 우리보다 더 성령 충만해가지고 우리한데 가려치려고 덤벼드니 이게 어떻게 된 거나 그런 소리입니다,
이게 민족적인 자만심 이게 우리에게 있거든요 어느 민족이나 다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오순절파들이 박수도 안치고 조용히 있는 겁니다,
속으로는 아이구 기분 나빠 이러면서도 겉으로는 하나님께 영광 드립시다, 이러는 겁니다, 이게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급할 때 쓰는 말입니다,
기도해봅시다 안 그러면 주님께 영광 드립시다,
속으로는 다른 생각하면서 겉으로는 이럽니다, 똑 같습니다,
잠잠하여 기분 나쁘면서도 하나님께 영광 드립시다, 이게 뭡니까,
그러면서 하는 소리가 이르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주셨군요,
이렇게 생각하고 이런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 예루살렘교회입니다, 거기에 지도자가 베드로입니다, 거기에 열두제자들도 다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열두제자들에게 사도바울처럼 그렇게 쓰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분들은 사도바울을 만드는 하나의 도구로 사용 받았지 그분들이 주님이 말하는 지상명령을 이루는 일에 멋있게 쓰임을 못 받았습니다,
왜냐면 문화적인 제한성 때문에 그래서 거기서 마가 같은 사람도 하나님이 사랑했잖아요, 마가는 고작해야 그 옆에 있는 애굽에 가서 전도해서 애굽 곱틱교회 시조가 되었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그 중에 도마는 인도까지 갔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그래서 인도까지 간 거지 바울처럼 여기저기 교회개척하고 그런 일은 안 했습니다, 그냥 배 타고 간 겁니다,
여러분들 지금 사도행전11장18절입니다,
그리고 19절부터가 안디옥교회이야기 바울이 등장하는 이야기가19절부터입니다 12장에 가서 잠깐 베드로의 이야기가 나오지만 그걸로 끝납니다,
그때부터 바울이 등장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사도행전11장18절이 분수령입니다, 베드로의 장면이 여기서 끝나고 그다음19절부터는 계속해서 바울이야기입니다, 베드로가 이런 사람이었습니다,
베드로와 바울과의 관계를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베드로는 바울을 싫어했습니다,
바울을 보면 괜히 알레르기반응을 일으켰던 분이 베드로입니다,
열두제자들도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이분들이 그릇이 크지 못했습니다,
열두제자들의 그릇이 크지 못하니까 그저 생각하는 폭이 좁았습니다,
사역의 범위가 좁았습니다, 질투심이 있었습니다,
적대심도 있고 경쟁심도 있었고 그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분들이 나빠서가 아닙니다, 그분들이 가지고 있는 한계성 때문에 그러는 겁니다, 혼의 그릇 때문에 그러는 겁니다,
베드로의 혼의 한계성을 우리가 한번 보면 문화적인 한계성이 있었습니다, 갈릴리사람입니다, 경제적인한계성, 사회적인한계성, 조그만 마을 어부출신입니다, 문화적으로도 이분은 타문화를 몰랐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유명한 헬라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오늘날 같으면 영어를 하지 못했습니다,
영어를 해야 전 세계에 나가서 복음을 전하는데 이분은 벌써 언어가 안 되니까 나가지 못하는 겁니다, 나가도 대화가 안 되니까 언어라는 것은 그 사람과 사고방식이 같을 때 말이 나오는 거지 그냥 배웠다 해서 나오는 게 아닙니다, 머리구조를 영어 화를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봐도 항상 문제들이 있었습니다,
무슨 문제가 있었냐면 이분이 첫째1차 선교여행을 끝나고 갈라디아에 있는 소위 디아스포라유대인들이 그쪽에도 많이 살았습니다,
그럴 때 갑자기 크리스천이 된 바울이 나타나가지고 선교여행을 다니면서 복음을 막 전하는데 자기네가 배웠던 것 하고 다른 복음을 전하는 것 같았습니다, 바울은 뭘 전했냐면 은혜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로마서를 쓴 거나 똑같습니다, 우리가 율법을 지켜서 의인이 되는 게 아니고 우리는 은혜다 은혜의 복음을 전하니까 예루살렘교회에서 베운 게 뭐냐면 구약에 나오는 여러 가지 율법들을 잘 지켜야 된다,
할례도 받아야 되고 여러 가지 음식도 골라 먹어야 되고 이렇게 해야 되는데 사도바울은 그것은 별것 아니다 구원과 관계없다, 라고 외치니까 유대인크리스천들이 본부에다가 보고를 하는 겁니다,
우리가 이단한분을 만났습니다, 이렇게 된 겁니다,
예루살렘교회와 선교지에 갔다 온 그 지역에서 이단이 나타났다는 겁니다, 그런데 바울은 파워도 없고 배후도 없고 아무것도 없잖아요 신학교동창도 없는 사람이 사도바울입니다,
그러니까 주변에서 당신 이제 복음을 못 전합니다,
당신이 전하는 곳 마다 이 사람들이 다 방해할 겁니다,
그러니까 예루살렘에 가서 설명을 좀 하라는 겁니다,
그래서 바나바와 같이 예루살렘에 내려가서 이분들에게 설명할 때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신지 아십니까, 예루살렘교회에 유대지방에 기근으로 먹을 것이 없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래가지고 먹을 것이 없을 때 안디옥 쪽에는 풍족해서 먹을 것을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내려가는 겁니다,
그러니까 소위 교계정치가 이때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내려가 가지고 바울이 해명을 하는 사도행전15장에 첫 예루살렘공의회를 개최를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교단총회를 한 겁니다, 5절에 바리새파 중에 어떤 믿는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되 이방인에게 할례를 행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말하면서 바울이 가르친다고 말하는 겁니다,
그런데 야고보가 절충안을 내는 겁니다, 이게 교계정치입니다,
바울이 가르친 것을 인정하여 주자는 겁니다,
그런데 바울이 얼마나 실망했겠습니까, 목숨을 바치고 뛰고 있는데 이걸 가지고 서로 정충을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21절에 이는 예로부터 각 성에서 모세를 전하는 자가 있어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그 글을 읽음이라 하더라
그러니까 아직까지도 이런 사람이 있기 때문에 구약에 모든 잔재들이 필요 없는 것들이지만 절충안을 내서 이것만은 조금 봐주자 이러는 겁니다,
왜냐면 강한 사람들이 그 안에 있기 때문에 그래가지고 22절에 이에 사도와 장로와 온 교회가 그 중에서 사람들을 택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으로 보내기를 결정하니 곧 형제 중에 인도자인 바사바라 하는 유다와 실라더라 그러면서 실라 라는 사람이 여기에서 사도바울에게 딱 붙어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나중에 바나바 대신에 실라가 바울의 오른팔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서 이 사람들 편에 30절에 그들이 작별하고 안디옥에 내려가 무리를 모은 후에 편지를 전하니 이게 뭐냐면 예루살렘총회에서 편지를 하나 받았습니다, 편지에 이런. 이런 조건 아래서 이런 식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은 된다, 다시 말하면 사도바울이 증을 하나 받은 겁니다,
본부에서 바울이 이단이 아니다, 라는 증을 하나 받은 겁니다,
그래가지고 2차 여행 떠나는 장면이 16장입니다,
사도바울이 이분들에게 이렇게 걸고 저렇게 걸고 하여 상당히 괴로움을 당했습니다, 정치게임에 바울은 정치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눈만 뜨면 복음전하는 일에 정신이 빠져있는 사람인데 교계정치에 휩싸이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바깥으로 자꾸 내보내는 겁니다,
어느 나라나 이런 두 그룹이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 같은 스타일의 그룹이 있고 베드로스타일의 그룹도 있습니다, 이게 하나님이 허락한 그룹 같습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2장을 보면 아까 갈라디아지방 사람들이 그랬다고 그랬잖아요, 그래서 이것 때문에 바울이 어려웠잖아요,
예루살렘회의가 끝난 다음에 갈라디아사람들에게 쓴 바울의 첫 편지가 갈라디아서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렇지 않다, 라고 보는 사람도 있지만 갈라디아서2장을 보면 바울과 베드로의 관계를 볼 수가 있습니다,
14년 후에 내가 갈라디아교인들에게 자기와 열두제자들과의 관계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십사 년 후에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나니 2 계시를 따라 올라가 내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그들에게 제시하되 유력한 자들에게 사사로이 한 것은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다시 말하면 이 사람들이 방해공작을 하기 때문에 가서 본 그것을 예루살렘에 가서 보고를 드렸다는 겁니다, 3절에 그러나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디도까지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지 아니하였으니 왜냐면 디도가 헬라사람이거든요 헬라사람이 기독교에 들어오면 할례를 받아야 되는 것이 그 사람들의 원칙입니다,
그러나 나와함께 있는 헬라인이라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지 아니하였으니4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 때문이라 그들이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5 그들에게 우리가 한시도 복종하지 아니하였으니 왜냐면 주변에서 그러는 겁니다, 헬라사람이 교계에 들어왔으니까 할례 받아야 된다,
그것을 자꾸 따라하다 보면 이게 비 성서적이지만 할 수없이 저 사람들이 하도 시끄럽게 해서 해주지만 이제는 안 하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자꾸 하라는 그룹들이 있다는 겁니다,
6절에 유력하다는 이들 중에 바울의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본래 어떤 이들이든지 내게 상관이 없으며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나니) 왜냐면 그 사람들은 외모로 보면 대단한 사람이라는 겁니다,
그렇지만 저 유력한 이들은 내게 의무를 더하여 준 것이 없고 헌금한 것도 없다는 겁니다, 자기를 도와준 일도 없고 대신 내 마음을 불편하게만 했다는 겁니다, 7 도리어 그들은 내가 무할례자에게(이방인들에게) 복음 전함을 맡은 것이 베드로가 할례자에게 맡음과 같은 것을 보았고 베드로 당신은 유대인들만 맡아라, 우리는 사명이 다르다는 겁니다,
7절을 다시 보세요, 도리어 그들은 내가 무할례자에게(이방인들에게) 복음 전함을 맡은 것이 베드로가 할례자에게 맡음과 같은 것을 보았고
8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느니라 완전히 지기와 베드로의 격차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지금 갈라디아교회 사람들에게 우리는 다른 사도라는 겁니다, 9 또 기둥 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나와 바나바에게 친교의 악수를 하였으니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그들은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 서로 교제는 한번 했다는 겁니다,
10절에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도록 부탁하였으니 이것은 나도 본래부터 힘써 행하여 왔노라 그다음에 베드로를 한번 혼을 내주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11절에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언제냐면 사도행전12장17절에 보면 아까 제가 베드로의 장면은 11장18절에서 끝났다고 그랬잖아요, 그리고 주욱 나오다가 12장에 가서 야고보가 순교하는 장면을 이야기하고 그다음에 베드로가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감옥에 들어가 있는데 12장12절에 보면 마가의 다락방에서 이분들이 베드로를 위해서 기도하는데 기적적으로 주의 사자가 베드로를 감옥에서 뽑아내는 이야기입니다, 감옥에서 베드로를 뽑아내어가지고 그래서 마가의 다락방에 들려가지고 그 눈앞에 나타난 겁니다,
그래서 여보세요 내가 지금 기적적으로 나왔다는 겁니다,
그리고는 17절에 보면 그랬습니다, 베드로가 그들에게 손짓하여 조용하게 하고 주께서 자기를 이끌어 옥에서 나오게 하던 일을 말하고 또 야고보와 형제들에게 이 말을 전하라 하고 떠나 다른 곳으로 가니라 이래놓고는 베드로의 이야기가 끝나는 장면입니다, 그러면 누가 그럽니다,
도대체 다른 곳 어디로 갔나, 그럴 때 이분이 아마 거기서 안디옥으로 갔겠다, 는 겁니다, 그래서 이분이 안디옥으로 가서 누구를 만났느냐면 바나바와 바울을 만났다고 보는 겁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2장11절에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 받을 일이 있기로 내가 그를 대면하여 책망하였노라 여기서 보면 누가 더 높습니까, 뒤 늦게 안수 받은 목사인데 고참 교계지도 자을 책망을 했다는 겁니다, 왜냐면12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그들이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다시 말하며 베드로가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고 있는데 할례자 유대인이 나타난 겁니다, 나타나니까 베드로가 잔소리 듣기 싫어서 도망갔다는 겁니다, 선생님 왜 이방사람과 밥 먹습니까,
이런 소리 듣기 싫으니까 옛날에 고넬료 집에 가기 전에 혼났잖아요,
이분이 그런 소리 듣기 싫으니까 피한 겁니다, 어떻게 보면 베드로가 약삭빠른 사람 같습니다, 과거 우리가 베드로를 주욱 봤지만 이런 모습은 없잖아요 그런데 이분이 이제는 정치를 하다 보니까 이런 약은 사람이 되어 버린 겁니다, 상황에 따라서 그래서 13절에 남은 유대인들도 그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그들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 바나바도 똑같이 그랬던 겁니다, 14 그러므로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따르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 그러는 겁니다, 그러니까 다시 말하면 베드로 당신이 유대인으로써 유대인을 쫓으면서 유대인답게 살지 않으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 하느냐 다시 말하면 당신 하는 행동이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하면서 이때부터 베드로에 대한 이야기가 그의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1차여행이 45년에서48년입니다,
2차 여행은 50년에서52년입니다, 예루살렘총회가49년에 개최하였습니다,
예루살렘총회 끝나고 50년도부터 베드로의 소식이 그의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베드로 전 후서를 쓴 이야기가 나옵니다,
베드로 전 후서를 언제 썼느냐면 약64년경에 썼습니다,
68년에 사도바울이 순교 당했습니다, 그리고 70년에 이스라엘이 망했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67-68년경에 베드로가 순교 당했다고 그럽니다,
베드로가 사도바울과 그의 비슷한 나이라고 생각할 때 60살이 조금 넘은 나이입니다, 그리고 베드로의 사역은 주후26년에 예수님3년 공생애 시작할 때부터 예수님을 따라 다녔으니까, 사도바울은 35년에 예수님을 만났으니까 바울과의 관계에서 약10년 선배 같은데 베드로전서를 이분이 64년에 쓰고 66년에 베드로후서를 썼습니다, 그러니까 이분이 영적으로 보면 많이 성숙되어 있을 때입니다, 많이 성숙되어 있을 때 그분의 편지내용을 간단하게 보면 이분이 어떤 모습으로 성숙되었는가,
베드로전서1장24절에 보면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25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베드로가 지금 누구에게 이 말씀을 하느냐면 베드로 전 후서는 터키지방에 흩어진 옛날 베드로가 예루살렘교회에서 당회장 했을 때 흩어진 사람들이 지금 터키 남단 지역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에게 편지를 쓰는 겁니다,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 이 지역 사람들에게 가끔 와서 부흥회도 하고 그랬던 모양입니다, 이분들이 어려움을 당하고 있을 때 편지를 쓴 겁니다, 모든 육체는 풀과 같다,
나도 지금 목숨을 바쳐 주님을 섬기지만 너희들 인생도 그렇다 그러면서 주의 말씀만 세세토록 있음이라 그러니까 복음을 열심히 전하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뒤늦게 이제 주님 앞에 가기 직전에 모습을 우리가 잠깐 보는 겁니다, 베드로전서3장9절에도 그랬습니다,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 14절에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며 근심하지 말라는 겁니다,
이분이 의를 위하여 고난을 많이 받았던 모양입니다,
그리고는 베드로전서4장12절에 그랬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13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그리고는 베드로전서 5장2절에서4절에 보면 지도자들에게 이 지역에 있는 지도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이 지도자들아 2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며 3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 4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관을 얻으 리라 이 말을 거꾸로 보면 이분이 처음에 힘들게 부덕이 하게 하는 그런 부분들이 있었는데 이제 와서 지내고보니 너희들은 그렇게 하지 말라 내가 과거에 그렇게 했단다,
이렇게 우리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더러운 일을 쫓아서 하지 말라 즐거운 뜻으로 해라 이분이 나도 옛날에 큰 교회 당회장되면 지도자가 되면서 나도 나의 일을 위해서 일을 많이 해서 바울 같은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았단다, 하나님은 종은 종이지만 내가 그분을 우습게 알았단다,
이런 내용이 속에 들어있습니다, 자기를 회개하면서 내가 이제 주 안에서 겸손해지고 주 안에서 이제야 주님의 뜻을 알았구나,
이분이 뒤늦게 이분이 뒤늦게 깨달은 겁니다, 왜 그렸습니까,
혼의 그릇이 빨리빨리 깨달을 수 있는 그런 혼이 그릇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릇이 바울하고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하시는 말씀이 주장하는 자세로 하지 말고 양 무리에게 오직 본이 되어라 그러니까 이분의 스타일이 뭐냐면 주장하는 자세로 했던 사람입니다, 다시 말하면 소위 권위주의로 리드 쉼으로 했던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그러니까 왜냐면 배우지 않았거나 열등의식이 많았던 사람은 권위주의적으로 하거든요 자신 있는 사람은 권위주의적으로 안 합니다,
독재하는 사람들이 왜 독재합니까, 자신이 없으니까 독재하는 겁니다,
자기자리 빼앗길까봐 민주주의는 그게 아니잖아요,
자신 있기 때문에 민주주의 하는 겁니다,
이분도 내가 독재를 저지려고 있는 그런 방법으로 지도자역할을 했는데 이제는 그러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어라, 는 겁니다,
그리하면 우리 주님이 너에게 말씀하신다는 겁니다,
영광의 면류관이 너희를 기다린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독재를 하면 영광의 면류관이 없다는 겁니다,
내가 너희들에게 이렇게 부탁하는 것은 내가 곧 주님을 조금 있으면 만난다는 겁니다, 이런 식으로 하면서 베드로 전 후서를 쓰면서 자기가 이만큼 성숙해졌다는 겁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혼의 그릇이 한계점이 있습니다,
뭐냐면 첫째는 이분이 바울하고 차이점은 하나님의 비밀을 바울처럼 많이 담지를 못했습니다, 그릇이 조그만 하니까 그래서 하늘의 복잡한 하늘의 비밀을 다양성 있게 받을 만한 그릇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이분이 그것도 뒤늦게 베드로 전 후서를 하나님이 사랑하시니까 베드로에게 주었습니다, 주었어도 베드로 전 후서가 아주 짧습니다,
전서는 5장이고 후서는 3장입니다 주부8장의 편지를 주었는데 그것도 페이지로 따지면 10페이지입니다, 그런데 내용을 보면 복잡한 신학이론이 그 안에 많이 없습니다, 그저 힘내라 고통을 이겨라 이렇게 살아라,
이런 겁니다, 신학적인 교리적인 그러한 것이 그 안에 숨어있지 않습니다, 왜냐면 하나님이 그분에게 줄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사랑하시니까 뒤늦게 어느 정도 그릇이 겸손해지니까 거기다가 하나님 말씀을 던져서 집어넣어주었습니다, 그러니까 이분이 그것도 본인이 직접 쓸 수 있는 실력이 아닙니다, 그래서 옆에 있는 마가가 대필해주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이아들을 상당히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이 있기 때문에 그분을 하나님이 그렇게 불려다가 그렇게 쓰셨던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바울과 비교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오늘날도 베드로와 같은 하나님의 종이 계시고 바울과 같은 하나님의 종이 있습니다, 이 두 그룹들이 주 안에서 잘 협조해서 주님의 복음을 전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대부분의 경우에는 베드로그룹들이 바울 그룹을 상당히 괴롭히는 것을 성서에 보면 그렇게 했습니다,
왜냐면 열등의식이 있고 경쟁심이 있기 때문에 자기들이 못하는 걸 저 사람이 하니까 거기에 대한 열등의식이 일어나는 것을 우리가 베드로와 바울의 관계성을 통해서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가 바울처럼 되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바울은 바울이 될 만한 그릇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울의 혼의 그릇을 제 나름대로 열 가지 정도로 봤습니다,
첫째는 문화적인 적응력이 있었습니다, 두 번째는 언어구사력이 있었습니다, 세 번째는 신학적인 바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구약에 대한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었습니다, 거기다가 이성적 논리적 통찰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다음에 이분은 철학적인 접근적인 방법론을 알았습니다, 여섯 번째는 타 문화권을 이해하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이분은 일곱 번째로 차원 높은 넓은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여덟 번째로 차원 높은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분은 영 혼 육을 잘 보존하면서 조화하는 세 부분을 밸런스 맞추는 것을 잘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분은 뚜렷한 세계복음화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방인에게 복음이 가야 된다 미 전도족속에게 복음이 가야된다는 뚜렷한 세계복음화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바울보다 이런 부분에서 많이 미흡했습니다, 그 대신에 자국국민 복음화에는 바울이 할 수 없으니까 그 공간을 메꾸어주는 일을 베드로를 통하여 하였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두 가지사람이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구약의 지도자를 본다면 베드로는 모세 같은 사람이었는데 광야의 그리스도인을 다스리는 지도자라면 바울은 늦게 부름 받은 여호수아 같은 모세의 제자지만 이분은 약속의 땅인 가나안 땅을 점령하면서 영적전투를 했던 그러므로 가나안 땅을 복음화 시켰던 다시 말하면 가나안 땅은 이 세계지구덩어리를 말하는 겁니다,
그것을 복음화 시키는 일을 여호수아를 통해서 하셨던 것을 우리가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는 이렇게 베드로 같은 사람과 바울과 같은 사람이 있는데 두 사람이 다 하나님이 사용하는 하나님의 사도들입니다,
혼의 그릇이 다를 뿐입니다, 이 두 분은 이렇게 사용 받으면서 베드로의 마지막 편지나 바울의 마지막 편지들을 보면 이분들이 많은 과정을 통해서 혼의 그릇이 쓴 뿌리들이 제거되는 것을 우리가 볼 수가 있습니다,
아까 우리 갈라디아서2장을 봤지만 사도바울의 사역에 초창기 때 그분도 베드로나 또는 야고보나 열두제자들이 대한 쓴 뿌리가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성경을 그런 식으로 성경을 쓰게 한 겁니다,
쓴 뿌리를 나타내는 겁니다, 그게 실은 없어야 되는데 그래서 그 쓴 뿌리를 성령님께서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겁니다, 그래서 바울도 나중에 가서는 마지막에 가서는 다 용서해주어라 다 이해해주어라 그냥 그리스도인의 모습으로 이렇게 많이 성화된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도 주님을 섬기면서 나이가 들면 들어갈수록 우리의 혼의 모습이 점점 점 성화되어서 주님의 모습으로 가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고 주님이 우리를 이렇게 만들어서 우리가 천국에 갈 때 그의 예수님의 모습과 가까이 되어서 간다면 이것은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그래서 우리가 혼을 깨끗하게 만든 것이 성화고 주님을 닮아가는 길이고 그렇게 되었을 때 우리가 하늘나라에 갔을 때 천국에서 유업을 많이 받는 주님의 복된 자들이 되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오늘의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아멘,
※황용현 목사님 설교내용영상으로 보세요.
https://www.youtube.com/watch?v=hMuBzX0ohm0